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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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냄새가 있다. 무언가 비릿하고 아련하고 한없이 그리운 냄새. 그 냄새에는 많은 것이 묻어온다. 여섯 살 언저리. 나는 노란 가방을 매고 한없이 비를 맞았다. 그냥 무언가 아주 그럴듯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쏟아지는 비로 온통 적셔지는 내가 좋았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엄마가 수건으로 나를 닦아 주던 기억. 엄마는 나를 야단치지 않았다. 열다섯 이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름이 '~진'으로 끝나던 친구 두 명과 일부러 비를 맞으며 소풍에서 돌아오던 기억. 할 얘기도 들을 얘기도 웃을 일도 넘쳐나던 그때. 그리고 스무 살. 어쩔 수 없이 맞았던 비는 슬펐다. 청춘은 너무 찬란하다는 기대치값이 있어 현실과의 간극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냥, 거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눈부시던 나이임을 몰랐고, 무언가를 어떻게 이야기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그 비릿한 내음이 피어 오르기 시작하면 나는 무언가 한없이 그리워진다. 막연한 그 느낌, 다 불러낼 수 없는 기억들. 하지만 그 냄새와 그 소리 안에 나의 과거들은 차곡차곡 자리를 잡고 쌓여 호명을 기다리고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 책은 그러한 것들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의 과거는 종잡을 수 없이 소환된다. 그 기억은 현재로 복원되고 다시 화자는 그 기억을 소환해 내는 매개체들에 둘러싸이는 지금으로 복귀하기도 하며 과거, 현재, 미래, 저기, 여기의 경계를 허문다. 숱하게 회자되었던 마들렌이란 과자는 일부일 뿐이다. 그 과자는 과거의 과거를 호명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준 마들렌을 홍차에 적셔 먹으며 그는 더 이전의 과거, 남편을 잃고 칩거 생활을 하던 레오니 아주머니가 소년이 찾아오면 주고 했던 그 마들렌을 통하여 콩브레 마을의 정경을 다시 불러온다. 프루스트가 불러내는 과거의 부활의 정경은 눈부시다. 그의 화법에 익숙해지면 그의 이야기는 달콤한 향을 풍기며 귓가에 머물기 시작한다.

 

일본사람들의 놀이에서처럼 물을 가득 담은 도자기 그릇에 작은 종잇조각들을 적시면, 그때까지 형체가 없던 종이들이 물속에 잠기자마자 곧 펴지고 뒤틀리고 채색되고 구별되며 꽃이 되고, 집이 되고, 단단하고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이제 우리 집 정원의 모든 꽃들과 스완 씨 정원의 꽃들이, 비본 냇가의 수련과 선량한 마을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

-p.91

 

'나'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고모할머니 등 모계와 부계가 분방하게 얽힌 삼대 가족과 기묘한 동거를 한다. 콩브레의 저택은 정작 레오니 아주머니의 어머니인 고모할머니의 소유다. 실제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던 프루스트의 눈에 서 종종 콩브레의 집을 방문했던 스완이라는 부르조아는 하나의 대리 자아다. 그는 유대인이고 사교계에서 유명하며 그럼에도 정작 화류계의 여자 오데트와 사랑에 빠지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지향하고 가지고 싶은 것들을 향유하는 귀족 세계를 선망하고 질투하는 '속물근성'은 기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핵심적인 정서이다.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한다고 말하는 것의 거리 어디쯤이 우리 모두는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데도 그런 것을 가장 잘 이야기한 사람은 거의 프루스트가 유일한 것 같다. 절대적인 악인도 절대적인 선인도 없이 그의 앞에서는 하나의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인간들의 내면과 그 인간들이 말과 행동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인간은 아름답지도 이상적이지도 않지만 그래서 끊임없이 실수하고 번복하지만 프루스트의 펜끝에서 그려지는 그들의 궤적은 우리와 너무 닮아 있어 습자지처럼 흡수하게 된다. 존재와 삶은 아름다운 것 이상이다.

 

여기에서 남는 것은 사물이다. 콩브레 마을의 모든 일, 모든 시간, 모든 관점에 형태를 주고 완성하고 축성하는 생틸레르 종탑. 화류계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나'의 집안과 멀어진 스완이 사는 집으로 통하는 산책길, 콩브레 특유의 묘하고 경건한 슬픔을 간직한 귀족인 게르망트가가 있는 길,(그 길 앞에서 '나'는 언제나 작가로서의 소양과 자질의 부족함으로 번민한다). 프루스트는 형이상학적 이야기를 형이하학적인 것에서 풀어내는 재능이 있다. 우리가 가고 남는 사물들이 포함하는 우리의 기억들은 불멸로 그것들 안에 갇힌다. 프루스트가 이야기하는 켈트족의 신앙.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들이 갇히는 동물, 식물, 무생물.

 

그러다 그날이 오면 영혼은 전율하고 우리를 부르며,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마법이 풀린다고 한다. 우리 덕분에 해방된 영혼은 죽음을 정복하고, 우리와 더불어 살기 위해 돌아온다.

-p.85

 

자, 끊임없이 그는 기억을 이야기한다. 클리프턴 패디먼의 이야기처럼 그의 책은 5~10년 사이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만치 와서 나의 과거를 불러내고 또 저만치 가서 지금을 불러내는 과정은 다시 사는 것에 비견할 만한다. 그가 이야기했던 도자기그릇의 물안에서 다시 복원되는 유년시절의 그 눈부신 정경들처럼, 어느 순간 나의 지금은 다시 재구성되어 훗날의 의미와 재해석을 입고 다시 부활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이야기는 삶에 있어 하나의 지침이다. 조금 불친절한 그의 화법과 몽환적인 그의 음색에 조금만 익숙해지면 그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해 줄 것 같다. 끝까지 따라갈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를 만난 것은 행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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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3-23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 오는 날엔 한없이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그리움....
비 오는 날 창 넓은 창가에 앉아 커피 마시는거 참 좋아해요. 하긴 누구나 좋아하겠지만요^^
읽다 포기했던 이 책! 저에게도 행운으로 다가오기를 바라며....ㅎㅎ

blanca 2013-03-25 10:2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비 오는 날 창가에 앉아 카푸치노 한 잔하면 정말 행복하죠! 우산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고. 저는 지금 심한 감기에 걸려 눈물 줄줄 흘리며 이 댓글 씁니다. 세실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2013-03-24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25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도회가 끝난 뒤 펭귄클래식 8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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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가 끝난 뒤>는 마치 삶의, 청춘의 은유 같다. 제목만으로도 왠지 심호흡을 하게 된다. 삶은 몇 개의 찬란한 순간과 그 순간들의 뒷감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 뒷감당이 반드시 성가시고 초라하고 처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삶의 교사 톨스토이가 교조적인 설교를 늘어 놓을 때에는 조금 멈칫하게도 되지만 이 작품에서 그는 설교대신 명징한 서사를 날린다.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 데에 절로 수긍이 갈 정도로 더할 것도 덜어낼 것도 없는 딱 그대로의 완벽한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눈부신 순간들이 있다. 노년에서 뒤돌아 본 그곳에 정지되어 있는 순간들은 그 자체로 빛을 발한다. 평범한 이름의 이반은 젊고 활기찼던 대학생 순간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그의 회고담을 숨을 멈추고 듣는다. 거기에는 더없이 아름다운 소녀가 있고 그 소녀가 위무도 당당한 은빛 견장을 단 아버지와 등장하여 마주르카를 춘다. '나'의 앞에서 그 부녀는 하나로 혼재된다. 딸을 아름답게 입히기 위하여 정작 자신은 낡은 부츠를 신고 딸과 무도회에서 스텝을 밟는 아버지. '나'는 단박에 그 부녀의 이미지와 사랑에 빠진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소박한 부츠와 딸을 닮은 다정한 미소가 함께 떠오르면서 가슴 벅차도록 정겹고 따뜻한 감정이 밀려들었지요.

-톨스토이 <무도회가 끝난 뒤> 중

 

삶은 때로 가혹하게 교훈을 설파한다. 삶은 단순하지 않다. 무도회에서의 아름다운 부녀와 사랑에 빠진 젊은 청년의 이야기는 결코 해피엔딩일 수 없다.  반전은 잔혹하게 다가온다. '나'는 거리에서 그 다감하던 아버지의 모습 대신 도망가려던 포로를 가차없이 매질하고 학대하는 폭력의 주동자로 그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나'의 시선을 짐짓 피한다. 당당하고 부유한 아버지가가 되기 위하여 타협하여야 하는 것들,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무언가 이성적이고 세속적이고 그럴 듯한, 그렇고 그런 설명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톨스토이는, '나'는 이러한 폭력의 구체화만으로도 자신의 소망, 환상, 사랑을 그 자리에서 포기해 버린다. 톨스토이가 자신이 가진 막대한 재산, 저작권을 포기하려 했던 그 모습과도 닮아 있다. 어느 순간, 무언가를 깨달아 버린 그 자리에서 다시 물러서기란 쉽지 않다. 그게 뭐 어때서, 다들 그렇게 사는 거야, 라고 쉽게 타협하고 체념해 버리고 침묵해 버리고 견디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두 남자는 묘하게 닮아 있다. 그렇게 인생의 비의는 벗겨진다. 정말 톨스토이다운 이야기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가난하고 비참한 농노가 주인에게 자신의 결백과 진정성을 증명해 보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한 심부름은 맡은 돈을 허무하게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가 대들보에 목을 매는 것으로 종결된다. <폴리쿠시카>. 이 불쌍하고 전혀 정당해 보이지 않는 삶에 대한 묘사의 천착은 눈물겹다.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하니 막힌다. 옮긴이가 '최상의 리얼리즘을 이루어 낸 작가'라고 그를 명명한 것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삶은 그 정도로 비참하고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맥을 함께 한다.

 

<무도회가 끝난 뒤> 사랑과 정의와 대의의 환상에서 비틀거리며 걸어나온  그 청년과 <폴리쿠시카>의 그 비참한 농노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톨스토이는 절망을 얘기하려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얘기해 버렸다. 대령에게서 매질을 당하던 포로와 그 대령의 품에 안겨 사뿐히 스텝을 밟던 아름다운 소녀와 주인에게 자신의 충절을 증명해 보이려다 또다른 배신자처럼 오인받을 상황에 몰려 목을 맨 농노. 이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다 존귀하고 눈물겨운 생명이다. 그런 얘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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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2-10-31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훔쳐볼 때마다 <글 잘쓰는 블랑카>라는 생각만 들게 하는 블랑카님.
첫 단락부터 장난이 아니네요.
많이 읽는다고 다 잘쓰는 건 아닐텐데, 이건 뭐... 비결은 꾸준히 쓰는 걸까요?

blanca 2012-10-31 22:14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쌀쌀한 날씨에 제 마음 따뜻해지라고 이런 댓글 달아주시는 거지요?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2-10-31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첫 문단부터 압도적입니다^^
블랑카님, 전 요즘 안나 카레니나를 뒤늦게 읽고 있어요. 영화는 진작에 봤지만 원작을 제대로 읽질 않아서요.
언젠가 님이 쓰신 리뷰도 본 적 있는데요.
톨스토이는 절망을 얘기하려다 사랑을 외치는, 그런 작가 같아요, 정말.

blanca 2012-10-31 22:15   좋아요 0 | URL
와, 프레이야님! 안나 카레니나 읽고 계시는군요! 아 꼭 리뷰 써 주세요.
 
일곱 박공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2
너대니얼 호손 지음, 정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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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것도 같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주홍글씨>의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작품. 제목에서부터 의문이 들었다. 대체 '박공'이 무엇을 얘기하는 건가 싶었다. 원문 제목은  <The House of the Seven Gables>다. 게이블. 바로 <빨간머리 앤>의 아름다운 집, '그린 게이블즈'가 떠올랐다. 문을 두드리면 꼭 그들의 앤이 아니더라도 머슈 아저씨와 마릴라가 반갑게 맞아줄 것 같은 그 집도 이 '박공'과 관련이 있었다. 알고보니 가장 흔한 ㅅ자 지붕형태를 얘기하는 단어였다. 장소가 바로 제목이자 소재, 주제가 되는 책이 어떤 내용을 품고 있을지 궁금했다. 지붕이 일곱 개인 집이 잘 그려지지 않아 인터넷에 검색하니 실제 비슷한 모델의 집의 이미지가 있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집의 정경을 불러올 수 있었다.

 

그 건물 자체가 마치 화려하고 음울한 회상들로 가득 찬, 자기 생명을 가진 거대한 인간의 심장과 같았다.
-p.39

 

친정집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사온 곳이다. 일곱 박공의 집처럼 두 세기까진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장소 이상의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지위를 부여받는 것 같다. 그 집에서 매번 최대한 교통이 불편한 학교, 직장 등에 나갔다 어깨에 먼지떠께를 얹고 귀환하곤 했던 기억들은 구석 구석마다 먼지처럼 가라앉아 또르르 말려 있는 느낌이다. 벽마다 가족 구성원들의 추억, 회한들을 숨기고 이 집도 함께 늙어가는 중이다.

 

'일곱 박공의 집'에는 쇠락한 귀족 핀천 가문의 후손인 헵지바가 숙부을 죽인 혐의를 받고 수감 중인 오빠 클리퍼드를 기다리며 그 집에 구멍 가게를 열어 생계를 이어 나가고 있다. 이 노년의 오누이는 더없이 음침하고 비참하다. 하루 하루를 견뎌 나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시련이자 고문이다. 외부 사람들과의 교류도 없고 내일에 대한 희망도 기대도 없다. 그 집 한 귀퉁이에 세들어 사는 청년 은판 사진사 홀그레이브에게 핀천 가문의 처녀 피비가 이 집에 온 것은 하나의 구원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구원의 세례는 이 늙은 오누이에게도 미친다.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처럼 만연체의 연설을 늘어 놓던 작가 호손의 목소리가 갑자기 청랑해지는 것도 자신이 만든 이 캐릭터에 빠져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너무 예쁜 묘사들.

 

그는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듯이 피비를 읽었다. <중략> 그녀는 그에게 실제의 사실이 아니라 지상에서 그가 갖지 못했지만 그의 생각에 아주 절실한 모든 것에 대한 통역이었다.
-p.191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내가 여기에서 갖지 못했지만 절실하게 원하는 것들에 대한 통역이라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이러한 언어들은 또 다른 차원의 감정을 고양한다. 사람이 내가 원하는 것들을 구체화하고 해석해 주는 존재로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자 희망. 그 극대점에는 비참하게도 살인 누면을 쓰고 감옥에서 젊음을 소진하고 풀려 난 클리퍼드가 있다.

 

평생 동안 그는 마치 외국어를 배우듯이 비참해지는 법을 배워 왔다.
-p.202

 

고난은 언제나 사람을 각성시키고 상처의 생채기는 언제나 저릿하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포기해도 비참해지는 법은 언제나 다른 경로를 통해 새롭게 학습된다. 손을 놓았다 다시 접하면 또다시 외국어 실력은 저만치 물러가 있다. 호손은 예리하지만 잔인가히도 한 것 같다. 고딕 소설 같은 이야기 속에서 수많은 기억들을 환기시키고 고통을 소환해 낸다. 핀천 대령과 땅의 소유권을 놓고 분란이 일어 마법사 누명을 쓰고 처형되는 매슈 몰이 단말마에 짜내었다는 예언은 만화경처럼 다양한 형태로 복제되어 후손들에게 돌아온다. 갑작스러운 죽음. 그 죽음을 둘러싼 갖가지 억측과 오해. 그 속에서 태어나는 희생양. 고색창연한 이 집은 딱딱해져가는 심장처럼 몰락의 징후를 예감하며 힘겹게 박동한다.

 

결말에서야 밝혀지는 무고한 클리퍼드를 감옥까지 가게 하고 집에 돌아온 후에도 끊임없이 괴롭히는 사촌 핀천 판사의 묘사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그는 외부에서 볼 때 더없이 고상하고 인자한 존경받을 만한 대상이다. 하지만 조금만 근접해서 보면 그의 모든 면은 탐욕과 위선에서 나온 일종의 타락한 연기다. 그 연기는 지역에서 사회에서 너무나 잘 먹힌다. 정계에까지 진출하려는 그의 의도는 무지한 대중 앞에서의 그럴듯한 연기로 갑작스러운 죽음만 아니었다면 곧 현실화될 전망이었다. 그가 그의 선조가 피를 흘리며 죽어간 바로 그 의자에서 시들어 가고 있을 때 호손이 장황하게 그가 그렇게 마침표를 찍지 않았으면 행해졌을 일들을 늘어놓는 대목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인간이 영원히 살 것처럼 욕망하는 것들에 대한 잔인한 실체를 눈 앞에 그려주는 그의 명민함 때문이다. 핀천 판사는 우리가 가장 증오하는 유형이면서도 가장 욕망하는 것들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야망이 마법보다 무서운 부적'이라는 호손의 경구는 인간이 한 곳에 뿌리박고 앉아 대대 손손 부귀 영달을 누리고 싶어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사실은 하나의 잘 변장한 야망의 또 다른 모습임을 드러내고 있다.

 

 

남매가 '일곱 박공의 집'을 도망치듯이 떠났다 다시 돌아오고 나서 새로운 정착지를 향해 떠나는 결말은 동화적이기도 하면서 호손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들에 대한 결말이기도 하다. 현실과 비현실, 시간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그가 그려낸 스케치는 그가 삶에서 깨달은 남겨진 자들에게 해주고 떠나고 싶었던 애기인 것만 같아 기억해 두고 싶다. 그 누구나에게도 개별적이지만 공통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인 것도 같다. 상처도 후회도 회한도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우리 인간 세상에서 정말 잘못된 일은, 내가 행한 것이든 당한 것이든 진정으로 바로잡히지 못한다는 것이 진실이다.

<중략>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정당함을 찾을 수 있게 되었을지라도 그것을 끼워 넣을 마땅한 구석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보다 나은 치유는 고통을 당한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라고 여겼던 그것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p.425

 

 

+ 작가의 문체는 때로 굉장히 장황하고 교조적이다. 하지만 이런 서술이 지루함을 만드는 것 같지는 않다. 캐릭터와 배경을 탁월하게 그려내는 능력과 초현실적이고 마법적인 서사의 힘이 매력이다.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결말의 해피엔딩은 그래서 아쉽기도 하고 편안하기도 하다. '그린 게이블즈'에 앤이 오지 않았더라면 마릴라와 머슈 남매가 핀천 남매처럼 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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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27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까지 박공을 마음대로, 조개껍데기 비슷하게 생긴 무엇으로 상상하고 있었답니다...
블랑카님 때문에 이제 제대로된 상상을 하겠네요.... ㅋㅋ. 그런데, 옛날 러시아 동화 읽을 때 스프라든지 아니면 유럽 동화의 무슨 빵 이런거를 상상할 때 정말 가슴이 뛰었는데 실제 접하니.... 음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호손은 주홍글씨 밖에 못 접해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황하고 교조적이라는 느낌이 확 들어오니 말이죠.
오랜만에 뵙는거 같은데, 잘 계시죠?

blanca 2012-04-27 22:21   좋아요 1 | URL
마녀고양이님, 저는 박공이 무슨 목수 같은 직업을 얘기하는 줄 알았어요. ㅋㅋ 이런 뜻일 줄은 저도 몰랐답니다. 저는 <주홍글씨>를 어렸을 때 아마 계림문고판으로 지루하게 읽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참 신기한 건 이 책은 재미있답니다. 독특한 즐거움이 있는 책이라 간만에 재미있게 읽었어요. 저는 대체 왜 바쁜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운데 항상 잠도 모자라고 그런 상태예요. 코알라양 만큼은 아직 아니지만 이제 꼬맹이도 친구처럼 어디 데리고 다닐 수준이 되어 재미지기도 하고요. 마녀고양이님 생활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 2012-04-27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헤밍웨이를 정주행하면서, 미국문학을 전공하며 헤밍웨이와 피츠제랄드와 포크너를 읽었어야 했는데...하는 생각을 하는 중인데, 블랑카님 리뷰를 보니 그들 이전에 호손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네요. 큰바위 얼굴같은 동화도, 영 굿맨 브라운같은 단편도, 주홍글씨같은 청교도 사회를 그려낸 장편도 척척 써내는 호손인데, 게다가 초현실적이고 마법적인 서사라니... 이 사람 천재입니까!!!

blanca 2012-04-27 22:24   좋아요 1 | URL
브론테님, 헤밍웨이 정주행하고 계시는군요! 우아, 근사해요. 저는 브론테님이 얘기하신 책들 중 <큰 바위 얼굴>만 읽었어요. 이 책은 옮긴 이가 자칫 지루할 수 있다고 덧붙였는데 일단 아주 재미있더라고요. 동화 같은 느낌도 있는데 군데군데 호손의 이야기들이 삶의 경구들 같아서 철학책 같기도 해요. 천재 맞는 것 같아요. 저는 미국문학을 전공할 뻔했는데 영어가 너무 부족해서--;; 접혔어요.(접은 게 아닌고요--) 브론테님의 헤밍웨이 정주행 경과가 궁금해집니다. 간간이 올려주실거죠?

노이에자이트 2012-05-02 15: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홍글씨 상당히 재미있어요.저는 서른 넘어서 읽었으니 그럴까요? 사실 어린이가 읽기엔 좀 어렵죠.성인이 된 지금 읽으시면 그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겁니다.

blanca 2012-05-02 23:19   좋아요 1 | URL
노자님, 그럴까요? 저는 참 지루하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서른 넘었으니 이제 한 번 제대로 읽어볼까요?^^;; 호손의 문체가 만연체 및 약간 교조적인 면이 있는 게 참 재치있긴 하더라고요. 발자크도 생각나고요.

icaru 2012-06-15 14: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 표지는 <위기의 주부들> 시작할 때 나오는 그림인데 ㅎㅎ) 뒤늦은 딴소리 지송^^;;;

blanca 2012-06-15 22:15   좋아요 1 | URL
ㅋㅋㅋ 저 표지가 의외로 여기 저기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놀라고 그래요. <위기의 주부들> 시작할 때도 나왔군요!

saint236 2012-09-26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표지는 아내의 역사라는 책의 표지로도 사용된...

blanca 2012-09-27 10:07   좋아요 1 | URL
아, 저도 본 것 같아요!
 
드리나 강의 다리 대산세계문학총서 3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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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살. 언덕 위를 힘겹게 기어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타이어 타는 냄새 속, 손잡이를 잡고 몸을 흔들며 생각했다.  시간은 대체 왜 이렇게 안 가는 걸까? 빨리 스무 살이 되어야 할 텐데. 창밖을 내다 보아야 언덕 위로 다닥 다닥 붙은 집들과 바다 같은 하늘이 다였다. 그런데 세상은, 지구는 꼬마 같은 여자애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불가항력이라는 말 자체를 떠올리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우리 엄마는 원래 엄마로 태어난 줄 알았고 나의 꼬부랑 할머니는 귀밑 머리 땋고 얼굴 붉히던 소녀 시절을 가져 본 적이 없었을 거라 여겼다. 이제 버스를 타고 몸을 흔들며 내다보는 세상은 온갖 불가항력으로 덮여 있고 시간은 무참히 빠르다고 느낀다.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고, 세상은 나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불평한다. 살아갈수록 지구에서 내가 그리는 궤적은 점점 더 작아져만 간다. 세상은 더 커지고 나는 외려 더 작아진다. 인생이란 세상이란 이런 걸까?

 

인생( 이 말은 그 당시 문학이나 정치에서처럼 매우 자주 그들의 대화에 등장했다. 그리고 어디에서든 대문자로 쓰여 있다)은 그들 앞에 하나의 객체로, 마치 그들의 자유로운 감성을 위한 그리고 지적인 호기심과 감성적인 성취를 위한 전장으로서, 그들이 결코 경계를 알지 못했던 것들로 서 있는 것이었다. 그들 앞에는 모든 길들이 끝도 없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이러한 길들의 대부분은 그들이 발도 내딛지 않을 테지만(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어떤 길을 택하든 자유이며, 이 길에서 저 길로 가로질러 갈 수 있다는 사실은 인생에 대한 황홀한 의욕을 북돋아주고 있었다.
-p.348

 

아,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젊음에 대한 통찰이 예리하다. 게다가 그 젊음들은 터키인, 기독교인, 유대인들로 민족도 종교도 신념도 공유할 수 없는 이질감에 부대껴야 한다. 발칸반도. 고등학교 지리시간 목이 짧은 지리 선생님은 백묵으로 칠판을 치며 "유럽의 화약고!"라고 이곳을 호명했다. 월드컵 때 몬테네그로라는 나라를 온전히 외우고는 혼자 으쓱했다.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발칸 반도는 축구는 잘 하지만 별안간 시끄럽고 어렵고 혼란스러운 곳으로 폄하된다. 싸움의 틈새에서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인간의 이야기는 실종된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야기들. 여기에서 태어난 작가 이보 안드리치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접경에 위치한 작은 도시 비셰그라드를 가로질러 흐르는 드리나 강의 다리가 지켜보는 인간의 역사를 재건한다. 1516년 터키 제국의 소년병으로 징집되어 고향을 떠났던 정치가 메흐메드 파샤 소콜리가 유년의 상흔을 드리나 강의 다리를 세우면서 치유한 때부터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여 1914년 드리나 강의 다리가 무너지기까지의 400여 년의 연대기 안에서 결혼식 날 드리나 강에 몸을 던진 어여쁜 신부, 이교도에 항전을 반대한다고 같은 이슬람교도에 의해 드리나 강 다리 카피야의 대들보에 오른쪽 귀를 못밖여야 했던  알리호좌, 아름다운 터키 소녀에 잠깐 한눈을 팔다 그 열정의 값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아야 했던 젊은 군인, 비셰그라드 주민들 뿐 아니라 각지에 흩어져 있는 친족들의 생활까지 지치지 않고 돌보았던 유대인 처녀가 지나간다. 우리들 각자는 더없이 존귀한 존재들이고 나름대로 주어진 시간을 겸허하게 채우며 삶을 살지만 내일이 당연히 오늘 같을 거라고 여기며 사는 나날들은 때로 거대하고 사악한 흐름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도 한다. 사고, 병마, 배신, 자연재해, 전쟁. 100년만 지나면 나의 이름을, 나의 노력을, 나의 꿈을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렇게도 무기력하고 이렇게도 허무한 인생. 이 책을 읽으며 가슴이 스산해지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것들이 단지 거기에서 추억되고 이야기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 만드는 작가의 위대함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그는 인간 세기의 반 이상을 일하고 절약하고 염려하고 돈을 벌면서도 개미 한 마리도 밟지 않으려고 주의했고 누구에게나 친절했으며 똑바로 자기 앞만 내다보고 소리 없이 돈만 벌었다. 그런데 결과가 이렇게 되었다.  마지막 남은 산적처럼 두 명의 군인 사이에 앉아서 포탄이나 그 밖에 어떤 것들이 다리를 해칠 때면 그 이유로 그의 목을 베거나 총살할 때까지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중략>

 그런 거지, 그런 거야. 상인 파블레는 혼자 중얼거렸다. 모두들 너에게 일하고 저축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강요하지. 교회와 정부와 너의 타고난 이성도. 너는 그 말을 듣고 신중하게 길을 가며 바르게 살고 있지만 사실은 사는 게 아니라 일하고 절약하고 걱정하고 하는 동안 너의 평생은 그 안에서 지나가버리는 거야. 그러다가 갑자기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어져서 세상이 이성을 비웃고 교회는 문을 닫고 침묵해버리며 정부는 힘없이 되어버리고 정직하고 피땀 흘려 돈을 번 사람들은 잃게 되고 빈둥빈둥 세월을 보낸 자들은 얻게 되지.
-p.457

 

상인 파블레의 일생은 우리의 일생이기도 하다. 상인 파블레의 최후는 우리가 가장 겁내하는 마지막 모습이기도 하다. 이념, 종교, 민족은 정작 그것들에 대해 이해하지도 존중하지도 않는 무리들이 단지 자신들의 권력, 명예,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돌연 강고한 경계를 가지게 된다. 갑자기 그 경계는 도덕과 비도적, 정의와 불의의 그것으로 탈바꿈한다. 18세기 후반 대홍수가 났을 때 터키인들과 기독교인 유태인들은 한곳에 모여 서로를 다독였던 모습은 이제 하나의 전설처럼 남고 말았다. 드리나 강의 다리가 4세기를 지나 돌연 무참히 무너졌던 것처럼 그들이 나누었던 인간적인 연대와 공감은 흔적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이야기가 묻힌 곳에 증오와 반목은 다시 자라나고 있다. 우리는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는데 영원히 살 것처럼 여전히 미워하고 심판하고 비난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불가능하지.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영원한 건축물을 세워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하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더욱 즐겁고 편안하게 해주는 고귀한 정신을 가진 위대하고 현명한 사람들이 영원히 이 세상 어디에서든 자취를 감춰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p.471

 

있을 수 없는 일. 단 하나의 희망까지 저버리는 일. 이 세상에서는 끊임없이 파괴와 약탈이 자행되더라고 어느 한 곳에서는 반드시 위대하고 존엄한 정신이 자라나 거기에 끊임없이 항거하고 투쟁하고 건설하는 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일. 그래,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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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01-20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의 글을 읽어보니 "삶을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은 시간이다. 눈깜짝할 새 지나가 버리는 시간에 쫓겨 좀처럼 숨돌릴 여유조차 가질 수 없다. 시간은 교도관처럼 우리 등 뒤에서 회초리를 들고 감시한다."고 했던 쇼펜하우어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네요. 그는 "요컨대 인생이란 휴전없는 싸움의 연속이며 손에 무기를 든 채 죽게 되어 있다"고도 말하고, 애꿎은 '단테의 신곡'을 빌어 '이 세계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도 알 수가 있다고 통찰했는데 blanca님의 희망찬(?) 이 리뷰에 도대체 어울리기나 하는 댓글인지 저도 조금은 헷갈립니다. ㅎㅎ

* * *

단테의 지옥과 천국

단테는 어디서 지옥의 표본과 이미지를 얻게 되었을까? 우리가 사는 이 세계 말고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그가 그린 지옥은 참으로 그럴듯하다. 그런데 단테가 천국과 그 즐거움을 그리려 했을 때, 그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그곳과 비슷한 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테는 천국의 즐거움을 그리기보다 자기가 거기서 얻어들은 조상이며 마음속 애인 베아트리체, 그리고 많은 성자들의 교훈을 전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이 세계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blanca 2012-01-20 22:31   좋아요 0 | URL
어디에선가 인생의 심판은 시간이 한다,는 말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가혹할 만큼 빠르기도 느리기도 한 것 같습니다. 특히나 저희 동네에는 노인분들이 많아서 복지관에서 거동이 불편하거나 치매를 앓으시는 분들 뵈면 참 많은 생각이 지나갑니다. 지금 붙잡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적은지 자꾸 무기력하게 느껴지네요. 그래서 외려 희망을 자꾸 이야기하고 믿고 싶어지는 지도 모르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12-01-2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보 안드리치 작품 중에는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번역본이 있던 게 이 <드리나 강의 다리>지요.이 작품이 나와서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만 해도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냉전이 끝나고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더니 엄청난 무력충돌과 인종학살이 벌어졌죠.그래서 올림픽이나 월드컵할 때마다 이 쪽 나라들의 국명이 복잡하니 외국기자나 아나운서들이 고생합니다.

2006년 월드컵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였는데 2010년 월드컵에는 몬테네그로가 독립해서 세르비아가 혼자 나오더군요.

blanca 2012-01-25 10:48   좋아요 0 | URL
이 쪽 나라들의 이합집산은 정말 다이나믹한 것 같아요. 저는 왜이리 몬테네그로가 귓가에 맴도는지--;; 다양한 인종, 종교, 민족이 공존하는 것은 머리로만 가능한 것인가 봐요. <드리나 강의 다리>의 오래된 판본을 가지신 분들이 인터넷에 사진을 많이들 올리셨더라고요.

노이에자이트 2012-01-25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소설을 통해서 예니체리에 대한 관심이 생기더군요.오래전 읽은 책이지만 그 뒤로 예니체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블로그는 관심있게 보는 편이죠.여자들도 예니체리에 대해 관심이 많나요?

blanca 2012-01-25 22:36   좋아요 0 | URL
아, 노자님, 솔직히 예니체리가 무언가 생각하다 찾아 봤더니 술탄의 근위 부대군요. 음, 저 같은 사람들이 다수의 여자에 속한다면 큰 관심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클레브 공작부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9
라파예트 부인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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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게 삶의 전부가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때로는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사랑이 전존재를 좌지우지하는, 그런 아주 호사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읽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다. 이렇게 시작한다.

 

 성대함과 정중함이 앙리2세 치세 말년 만큼 프랑스에 눈부시게 나타난 적은 없었다. 왕은 우아하고 친절하고 다정했다. 디안 드 푸아티에, 그러니까 발랑티누아 공작부인을 향한 왕의 열정은 이십 년 전에 시작되었지만, 그때보다 덜 열렬하지도 덜 눈부시지도 않았다.
-p.9

 

 이 소설은 사람을 주어로 시작하지 않는다. 인간의 고결한 자질, 나약하지만 강렬한 정념은 인물들보다 더 강력하게 소설을 휘젓고 다닌다. 성대함과 정중함이 눈부시게 나타나는 시대에 나타난 열정. 이 필연적 모순에서 이야기는 시작하고 사랑은 눈을 뜨고 이야기는 끝나고 사랑은 숨어버린다. 가장 저급한 사랑도 가장 고급한 사랑도 가장 자라기 쉬운 토양인 궁정 이야기는 그 자체로 매혹적이다. 전투처럼 노동의 전장에 달려나가야 하는 생존에 대한 얘기는 한번이라도 더 연인의 눈길을 받기 위해 과장하고 위장하고 연기하는 무리들과, 깔고 앉은 권력과 재물을 거머쥐기 위해 벌이는 암투들로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저쪽이 삶이기도 하도 이쪽이 삶이기도 하다. 저것이 전부라고 여기며 살게 되어지기도 하고 이게 전부라고 여기며 살다 죽게 되기도 한다.

 

 야망과 연애, 이것이 궁정의 정신이었고 사내들이건 여자들이건 하나같이 그 일에 전념했다. 숱한 이해관계와 각기 다른 파벌이 있었고, 거기에 여자들도 깊이 관여했다. 사랑은 항상 사업과 뒤섞였고, 사업은 항상 사랑과 뒤섞였다. 가만히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무관심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더 올라가기를, 누구의 마음에 들기를, 누구를 떠받들기를, 누구를 해치기를 염원했다. 권태도 몰랐고 여유도 몰랐다. 쾌락에 혹은 밀통에 바빴다.

-p.23

 

소위 지배층이라는 자들의 모습. 이 묘사는 낯설지 않다. 정치라는 것이 민중과 유리되어 개인적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에 놓이는 모습은 역겹기도 하고 사실적이기도 하다. 더 올라가기를, 누구의 마음에 들기를, 누구를 떠받들기를, 누구를 해치기를 염원하는 모습. 17세기는 21세기에도 파편화되어 복기된다.

 

이러한 곳에서의 사랑. 궁정의 소문난 바람둥이 귀족 느무르 공과 도덕적인 정열이 대체로 불가능함을 알고 끊임없이 정숙하고자 스스로를 괴롭히는 클레브 공작부인의 사랑은 고도의 심리전과 위장술로 다층적으로 펼쳐진다.  이 시대의 사랑은 비도덕적이기도 하면서 정숙한 겉모습을 위장하기를 바라고 한없는 정열을 바라면서도 진중한 이성이 감침질하기를 기대하는 모순의 결정체로 보인다. 정략적인 결혼이 태반을 이루고 나머지 부수적인 정념들은 각자가 알아서 내밀하게 해결하는 것을 쉬쉬하며 용인하는 모습.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그 상황 자체가 기이한 열정, 욕구 불만 등을 애타는 사랑으로 오해하기 십상으로 만들곤 했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그 미세한 균열을 감지하는 예리한 촉수를 가졌다. 매력적인 미혼남이 자신에게 바치는 애정은 기실 불가능과 가능의 경계의 그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몸을 흔들 때 느끼는 짜릿한 전율에서 더 배가되는 것임을 안다. 사랑이 자신을 인도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눈을 멀게 하지는 않는다는 고백은 정작 자신이 눈멀지 않기 위한 필사의 노력의 몸짓이다.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 분)가 남편과 동승한 차 안에서 자신의 연인의 모습을 보고 뛰어 내리지 않기 위해 고통스럽게 참는 모습은 흡사 병마에 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사투를 벌이는 병자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아가페적 사랑은 지향점이고 에로스적 사랑은 현실로 발목을 붙잡으려 한다. 클레브 공작부인, 프란체스카는 아마도 이 금기의 열정을 경험한 이후 돌아가려고 했던 이전의 자신들의 모습을 완벽하게 기억해 내지 못할 것이다. 덧없고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해도 우리가 이미 칼라 영상을 보고 나서는 흑백 영상에 적응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까.

 

 그런 이야기. 사랑을 쾌락과 애써 분리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쾌락으로 폄하하지도 않고 고결하고 완전한 것으로 숭배하지도 않고 그것의 한계, 모순을 보여주며 있는 그대로 그것이 피어오르고 스러지는 그 모든 과정에 대한 아름답고 섬세하고 낭만적인 묘사. 사랑만을 이야기해 보려 했지만 사랑 그 이상을 묘파해 낸 매혹적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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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랑은 '인간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적'
    from Value Investing 2012-01-14 16:20 
    blanca님의 멋진 서평글을 다 읽고 나니, 사랑은 '인간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적'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떠오릅니다. * * *연정은 겉보기에는 별나라 같아도, 사실은 성욕이라는 본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니, 이 본능이 특수화된 것이며 개체화된 것이다.이 점을 염두에 두고 사랑이 희곡이나 소설에서뿐 아니라 실제 사회에서(거기서는 자기보존 본능과 함께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며, 모든 동작 중에서 가장 활동적이다) 연출하는 중
 
 
아이리시스 2012-01-12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영국소설인가요, 블랑카님? 공작부인이라니까 그렇게 생각해봤어요. 첫줄은 완전 공감이구요. 블랑카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도 재밌어요. 읽기에는 좀 힘들 것도 같은데.. 에로스는 타나토스와도 닮아 있대요. 3초의 희열이요. 예전에 쾌락이 사랑의 전부인 것마냥 묘사하면 좀 거부감이 들고 그랬는데 나이를 먹으니(?) 그것도 이해가 돼요. 사랑이 아주 낭만적이고 섬세하지 않아도 매혹적일 수 있다는 것이요.

blanca 2012-01-12 22:20   좋아요 0 | URL
프랑스 소설이랍니다. 작가도 라파예트 부인이라고 귀족 부인이고. 그 시대의 로맨스물격인 것 같아요. 아, 분량도 적고 의외로 잘 읽힌답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도 이러한 것이다, 단정지을 수 없을 것 같아요.

dreamout 2012-01-12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이 책에 대해서 누군가 리뷰를 쓰긴 쓰는 사람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더랬는데... 역시 있으시네요. ^^

blanca 2012-01-12 22:22   좋아요 0 | URL
^^;; 다른 분들이 읽고 더 좋은 리뷰를 써 주기를 바랍니다.

2012-01-12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13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2-01-12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국에서는 워낙에 유명한 소설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거 같아요.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버지니아 울프 이외에는 국내에서 외국 여성작가의 영향력이 미미하니까요.
이 작품이 문학동네 전집 일부로 출간되었군요, 블랑카님 글 덕분에 알게 되었네요.
저도 이 책 읽어볼께요 ^^

blanca 2012-01-13 22:20   좋아요 0 | URL
아, 이게 프랑스에서는 공무원 시험에도 나오는 책이라고 하더라고요. 반사르코지의 아이콘 같은 책이기도 하다네요. 저는 몰랐어요. 예, 한번 읽어 보시고 저와는 또다른 감상을 들려주세요.

비로그인 2012-01-13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럴 때 차에서 바로 내립니다.

blanca 2012-01-13 22:27   좋아요 0 | URL
쥬드님, 처음에 무슨 얘기인가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