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콜드 블러드 트루먼 커포티 선집 4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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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때로 지루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그것의 표면은 너무나 허술해서 어느 순간 찢어지고 여린 속살이 드러나고 삶은 저만치 내동댕이쳐지는 경험을 준다. 영원한 평안과 불멸은 없기에 누구나 이러한 순간에 당도한다.

 

하지만 어느 누군가에게는 그 순간이 너무나 급작스럽고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듣고 볼 때 우리는 우리가 그 '누군가'에 해당될 수도 있었다는 두려움,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는 데에 대한 안도, 그래도 삶은 또 그런 결함을 갖고 있다는 깨달음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이렇게 이다지도 연약하고 불합리하고 불가해한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그 '삶'이라는 것이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끄달리는 작디작은 것들로 이루어진.

 

이 책을 꼭 읽고 싶었다. 하필 그 때 임신 중이었고 아무래도 이러한 내용을 읽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아 뒤로 미루어 두었던 트루번 커포티의 논픽션 소설.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또르르 굴러나올 것만 같았던 <풀잎하프>의 작가는 이제 잔혹한 일가족 몰살의 현장에 자신만의 현미경의 초점을 맞춘다. 이야기 전체의 신뢰성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일단 그가 짚어가는 사건의 내막과 그 사건을 둘러싼 가해자와 피해자의 삶의 단면들은 그의 정밀하고 투명한 언어들로 대단한 흡인력을 보인다. 1959년 캔자스 서부의 홀컴 마을에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발을 들여놓고 마는 것이다.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으니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허버트 윌리엄 클러터는 네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는 성실했고 또 그 만큼 부유했고 언제나 바라는 것을 어느 정도 손에 넣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고 자선에도 너그러웠고 홀컴 마을의 사람들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가치들를 대표하는 듯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뒤에 남은 사람들이 이야기하였듯 전 세계 모든 사람들 중 살해당할 가능성이 가장 적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11월의 어느 날, 사과를 먹기 좋은 날씨에 생명보험 계약서에 서명을 한 여덟 시간 뒤, 그는 아내, 딸, 아들과 살해당한다.

 

원한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고작 없어진 40달러의 돈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강도 살인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트루먼 커포티는 마지막에 범인을 드러내는 고전적인 수법이 아닌 애초 처음부터 이 무자비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살인을 저지른 두 명의 사내의 삶도 병렬적으로 배치, 추적한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이 두 명의 교도소 동기는 다른 잔챙이 같은 범죄들은 솔직히 시인하면서도 정작 리버밸리 농장주 가족의 살인 사건과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 지점에 있다. 분명 범인은 맞는데 그 범인의 범죄 현장에서의 행각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어쩌면 커포티는 처음부터 독자들이 편견 없이 딕과 페리, 이 두 청년 그 자체를 먼저 알아가기를 원했는 지도 모른다. 비교적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에서 자라난 딕과는 달리 인디언 어머니의 피가 섞이고 체구가 왜소한 페리에 대한 이야기는 작가의  애정과 연민이 닿아 있어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다. 페리는 양친 부모에게 학대당했고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고 고아원에서 방치되는 등 비참하고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타인에게 정상적인 친밀감을 느낄 수 없었고 따뜻함에 대한 기대와도 멀었다. 페리는 상처받은 짐승의 오라를 가지고 있었다고 트루먼 커포티는 형사 듀이의 목소리를 빌려 말한다. 실제 트루먼 커포티는 이 사건 취재 중 페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객관성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이 범죄를 추동한 것은 감옥 안에서 우연히 리버밸리 농장에서 일했던 이에게서 농장주의 금고 이야기를 듣고 이 농장을 털 생각을 한 딕이었다. 그러나 이 범죄의 전면에서 범죄 자체를 주도한 것처럼 나오는 페리는 사형 집행앞에서 부적절하지만 그럼에도 사죄한다고 마지막으로 이야기한다. 사형 제도 자체에 대한 논란이나 실제 선고와 집행 사이의 그 머나먼 간극의 허점에 대한 이야기는 담담하게 덧붙여져 있지만 핵심은 아니다. 그러니 이 책은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려는 욕심을 가지지는 않는 그 현명한 지점을 포작해 낸 대단한 명민함이 돋보인다.

 

트루먼 커포티는 피해자의 관점도 가해자의 관점도 결국 사건을 해결하고 마는 수사팀의 입장에도 전적으로 치우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다 그들 편에 다가가 있다. 이것은 중립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객관성에 대한 집착도 아니다. 다만 어떤 진실, 삶의 그 허무한 실재,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연민에 대한 애면글면한 천착이라고 이야기하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처음에는 애꿎은 무고한 선량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마지막 가까이에는 그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죽임을 당하지만 정말 끝에는 사 년의 시간동안 그 사건에 시달림을 받았던 형사가 집으로 돌아가는 엔딩씬이다. 한 편의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관객들은 또 삶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치 그런 것이 어쩔 수 없는 삶이라는 것처럼. 카버의 말처럼 소설은, 이야기는 많은 것을 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삶을 바꿀 수는 없다. 처절하고 슬픈 이야기지만 그래서 어쩐지 허무했다. 너무나 무력한 인간의 삶과 닮아 있어서. 분명 행복해지는 책은 아니다.

 

이 작품으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고 결국 알코올 중독과 약물 중독으로 초라한 마침표를 찍는 작가의 삶은 하나의 첨언 같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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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4-03-13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사놓고 영화로 먼저 봤네요. 얼마전에 약물과다로 돌아가신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 카포티로 연기했던 그 영화요. 제가 산 책은 그래서 표지에 배우얼굴이 나와있어요. 영화에서는 이 작가를 좀 안좋게 표현했던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죠.

blanca 2014-03-13 21:27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이 영화 못 봤는데 최근에 죽은 배우가 커포티로 분했군요! 이 작품의 진정성에 대한 논란도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너무 글을 잘 쓰는 작가지만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작가지만 이 작가의 삶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결핍을 숨기기 위한 과장이 상당 부분 작용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후애(厚愛) 2014-03-14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가끔씩 다녀가는데 댓글을 안 남겨서 너무 죄송해요.^^;;;

건강조심하시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blanca 2014-03-17 10:24   좋아요 0 | URL
후애님 서재는 종종 방문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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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살게 된 지 20년이 되어서야 이 세상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임을 알았다. 25년이 되어서야 명암이 표리인 것처럼 해가 드는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른이 된 오늘날에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쁨이 깊을 때 근심 또한 깊고, 즐거움이 클수록 괴로움도 크다.-p.16

 

이런 이야기가 서두에 있었다. 줄을 긋는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깨달음은 반드시 시간과 함께 숙성되는 성질의 것인 것 같다. 스무 살 젊은 아이를 앞에 두고 이러한 이야기를 한들 가슴으로 받아들일 일이 없다. 설사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아이의 생동하는 나날에 그림자를 드리울 일이다. 감정의 격랑 속에서 애늙은이처럼 내일을 걱정한다면 결코 청춘이 아니다.

 

역시 '나쓰메 소세키다!'라고 무릎을 칠 만한 이야기다. 언제나 그의 작품이 그렇듯 별 사건도 별 구실도 없는데 전체를 놓고 보면 하나의 영롱한 구슬 같다. 온천장에 그림을 그리러 온 화공. 결국 그림은 한 장도 그리지 못하고 하이쿠만 잔뜩 읊다 가는 그 화공의 눈앞에 그려진 봄날의 숲, 바다,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온 여인, 동자승, 러일전쟁 출정을 앞둔 젊은이. 그 화공의 시선은 거만하기도 하고 옹졸하기도 하고 편견 안에 갇히기도 하고 한없이 배회하기도 하고 몽환적이기도 하고 지극히 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그의 언어에는 어떻게도 건드릴 수 없는 울림이 있다. 화공의 입 안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의 붓을 빌리지 않아도 이미 한장의 화첩을 적신다.

 

미지근한 해변에서 소금기가 있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이발소의 포렴을 졸린 듯이 펄럭인다. 몸을 비스듬히 하고 그 밑을 빠져나가는 제비의 모습이 날쌔게 거울 속으로 떨어진다. 건너편 집에서는 예순 살쯤 되어 보이는 할아범이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잠자코 조개를 까고 있다. 짤가닥 하고 작은 칼이 닿을 때마다 붉은 조갯살이 소쿠리 안으로 숨는다. 껍데기는 반짝하고 빛을 내며 60센티미터 남짓 되는 아지랑이를 가로질러 날아간다.-p.80

 

이러한 묘사는 이발소 주인과 '내'가 나누는 해학이 깃든 대화의 말미에 나온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재미는 이러한 명징하고 투명한 묘사에도 있지만 그 틈새마다 비어져 나오는 현실적인 즐거움에도 있다. 그러니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다. 머리를 감겨주는 대신 비듬을 격력하게 털어주는, 소세키의 문장을 빌리자면, "지극히 값싼 기염을 토하는 이 주인"과의 이발소 풍경에는 생동하는 유머가 있다. 마침내 이러한 주인까지 즐거운 봄빛 속의 구성 요소로 끼워넣는 능력은 분명 나쓰메 소세키적인 것이다. 그이기에 가능한.

 

서양문명, 중국문명, 일본문명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시각이 중립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니 그의 문명관에는 구구한 해석이 따른다고 한다. 결국 그가 지향했던 곳에는 자연과 예술, 심지어 인간까지도 그 자체의 날것으로 완상하려는 시도와 노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동백꽃이 하나씩 연못에 떨어지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은 그의 시선과 언어가 얼마나 철저하게 그러한 시도를 하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또 뚝 떨어진다."이러한 문장의 반복은 마치 그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그 풍경 앞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정밀하고 생생한 묘파의 일환이다.

 

내세에 환생하면 명자나무가 되고 싶다는 화공의 목소리는 사실 나쓰메 소세키 자신의 것같다. 온천장에 와서 한 장의 그림도 못 그려낸 화공. 그가 그리고자 한 것은 반드시 그림이 아닐 것이다. 생의 한 단면, 사계절의 하나, 결혼에 실패한 여인, 이렇게 단편으로 전체를 조감할 수 있게 하는 능력. 그것의 집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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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1-17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이야기가 서두에 있었다. 줄을 긋는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깨달음은 반드시 시간과 함께 숙성되는 성질의 것인 것 같다. 스무 살 젊은 아이를 앞에 두고 이러한 이야기를 한들 가슴으로 받아들일 일이 없다. 설사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아이의 생동하는 나날에 그림자를 드리울 일이다. 감정의 격랑 속에서 애늙은이처럼 내일을 걱정한다면 결코 청춘이 아니다"


이 이야기에 급 동감하면서도 .. 그런 청춘들이 간혹, 그러니까 제게는 천재들 같은 이들이 있더라구요.
세월의 배움이 가르쳐 주기 전에 간파해버리는 청춘들..

blanca님의 비유법에 읽어보지 않은 글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집니다.. ~~

blanca 2014-01-18 12:31   좋아요 0 | URL
어쩌면 제가 그렇게 현명하게 젊음을 다시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도 같아요. 정말 그런 현명한 청춘들을 만나보셨다니 그 아해들도^^;; 새벽숲길님도 부러워집니다.

다크아이즈 2014-01-18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스메 소세키처럼 묘사법을 구사할 수 있다면...
전 꿈에도 그리할 것 같지 않아 자꾸만 그의 문장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구시대? 사람이지만 신세대 감각에 절대 뒤지지 않는 소세키...
블랑카님도 휴일 잘 보내시어요.^^*

blanca 2014-01-18 12:32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이 사람은 정말 작가로 태어난 사람인 것 같아요. 태생부터가 남다른. 물론 노력도 했겠지만 사물을 보고 표현하는 능력이 남달라요. 저는 모처럼 아이가 영화관 나들이를 가서 ㅋㅋ 좀 쉬고 있어요.
 
풀잎 하프 트루먼 커포티 선집 2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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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살 나에게는 안타깝게도 콜린에게 돌리 같았던, 트루먼 커포티에게 숙 포크 같았던 '그녀'가 없었다. 트루먼 커포티의 자전적인 소년 시절의 추억담, 너무나 영롱하고 아름다워 한 줄 한 줄 아껴가며 읽었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자신의 유년'에 대한 이야기 앞에 선 작가는 저도 모르게 돌아갈 수 없는 그곳을 향해 하나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기에 서면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을 얻은 삶이 되어 읽는 이에게 건너간다.

 

어떤 마법사가 내게 선물을 주려 한다면, 그 부엌의 목소리들로 가득 찬 병을 하나 주었으면 좋겠다. 하하하 웃는 소리와 불이 속삭이는 소리. 아니면 버터와 설탕, 빵 냄새가 찰랑찰랑하는 병을 하나 주었으면.

-p.19

 

그 부엌에는 아버지의 사촌 누이인 돌리, 인디언 혈통이라 우기지만 실은 흑인인 캐서린, 그리고 그들보다 나이 차가 오십도 더 나는 어린 나', '콜린'의 십대가 있었다. 돌리는 여동생인 베레나와 평생 독신으로 살며 그 나이에 걸맞는 순응과 세파에의 오염 대신 조금 모자라 보여도 가을바람이 마른 잎사귀를 튕겨 내는 '풀잎하프' 소리가 이미 저 세상에 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간직해서 전해 준다는 낭만적인 믿음을 가진 귀여운 할머니였다. 소년은 돌리를 사랑했고 그녀가 동생 베레나가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는 생각에 역시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친구 캐서린과 집을 떠나 멀구슬나무 위의 오두막 위로 도망갈 때 함께 간다. 이 오두막 위에서 콜린, 캐서린, 돌리는 역시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일탈, 소외의 저변으로 밀려난 것 같은 쿨 판사, 소년 라일리를 친절하게 맞아들인다. 멀구슬 나무 위에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우리들이 딛고 있는 지상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야. 이파리 하나, 씨앗 한 줌. 이런 것들부터 시작해서 사랑이 뭔지 조금씩 배우는 거지. 먼저, 이파리 한 장, 떨어지는 비, 그런 다음엔 이파리가 네게 가르쳐준 것과 비 온 후에 익어간 것을 받아 줄 사람이 오는 법이다. 쉬운 과정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두렴. 일생이 걸릴 수도 있어. 오직 그게 얼마나 진실한지만 알지. 사랑은 사랑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사슬이라는 것을. 자연이 생명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사슬이듯."

-p.80~81

 

돌아온 콜린은 돌리의 죽음과 따스한 부엌 같았던 나이 든 그녀들과의 소중했던 추억과의 이별과 청소년기의 작별과 풀잎하프 소리의 귀환에 대한 믿음으로 이야기를 맺는다. 멀구슬나무 위의 오두막집에서 떠밀려 내려온 소년은 더이상 소년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으리라. 하늘 위의 별을 올려다 보던 자리에서 불현듯 떠밀려 내려와 지상에 착지하던 그 순간. '성장'이란 명명은 그 슬픈 추락을 합리화하려는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 트루먼 커포티는 그 지점을 정확하게 잡아내어 우리들의 그 아련한 성장기의 추억을 불러낸다. 모든 지나간 것들은 '풀잎하프' 소리에 실려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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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3-07-16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80~81쪽 인용한 문장이 좋아요. 그 문장만 곱씹어 볼수록... 차근차근 사랑에 대해 서로 알아가면서도 그 감정을 느껴봤으면 좋겠네요. ^^

blanca 2013-07-17 07:36   좋아요 0 | URL
cyrus님 오랜만이에요! 그죠! 군데군데 밑줄 그은 문장이 참 많아요. 너무 예쁜 소설이랍니다. 추천드리고 싶어요.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
셀마 라게를뢰프 지음, 강윤영 옮김 / 다산책방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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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닐스의 이상한 여행>에서 닐스가 새를 타고 스웨덴 전역을 여행다니는 장면보다는 초입부에 어머니 아버지가 닐스가 교회에 안 가는 대신 그날 설교 내용이 담긴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책상에 억지로 앉히던 장면을 여러 번 읽었던 기억이 난다. 왜 그랬을까. 책상에 성경의 페이지까지 확인하여 놓아주던 어머니의 자상함과 천방지축 닐스가 느끼던 답답함, 압박감이 그 또래 피어나기 시작하는 부모에 대한 반항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저를 이루는 애정과 뒤섞여 혼란스러웠던 그 느낌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 이름도 어려운 스웨덴의 여작가 셀마 라겔뢰프는 단 하나의 어린이 소설로 나를 사로잡았다. 파란 장정의 계몽사책의 후반부에는 항상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친절하게 덧붙여져 있어 꼬박꼬박 읽었던 기억이 난다. 셀라 라겔뢰프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작품만 쓴 것이 아니라 성인을 대상으로 한 소설도 썼는데 그게 아마 이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였던 것같다. 언젠가는 꼭 읽어보고 싶다고만 생각하고 잊고 있었던 터에 국내 첫 완역으로 드디어 셀마 여사의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은 내가 생각했던, 기대했던 내용과는 완연하게 달랐다. 스웨덴의 시골 베름란드를 배경으로 파계한 목사 예스타 베를링의 진지하고 낭만적인 연애담을 기대한다면 좀 황당할 수도 있겠다. 나도 그랬으니까.

 

일단 이 책은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예스타 베를링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은 그와 그의 연인들이 삶을 더 풍성하게 인식하는 데에 부차적인 역할 정도로 그친다는 것에도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스웨덴의 아름답고 가공되지 않은 자연 풍광에 대한 근사한 묘사, 그곳에서 벌어지는 환상적인 전설 같은 이야기들의 옴니버스, 끊임없이 자신의 안락한 보금자리를 두고 떠나 모험과 고난을 택하는 기사들의 방랑벽, 기사들을 거두어 먹이고 마을 전체의 경제를 책임지다 시피했던 소령 부인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 다층적인 인식 등이 보물 꾸러미처럼 펼쳐진다. 흔히 남미 소설들을 거론할 때 단골로 등장했던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색채가 이 작품에서는 또 북유럽 식으로 재창조되어 현란하게 구현된다.

 

주인공 예스타 베를링도 그를 둘러싼 주위 인물들도 절대 선이나 악으로 조악하게 감침질되지 않는다. 예스타 베를링은 근사한 사내였지만 술독에 빠져 목사직에서 파면 당하고 브루뷔의 언덕을 떠돌다 옛사랑을 잃었지만 그 사랑이 남긴 재산과 지헤로 마을 전체를 현명하게 꾸려나가는 삼셀리우스 소령 부인에게 의탁하게 되며 그녀 아래의 기사들을 만나 함께 지내게 된다. 악의 현현 같은 사악한 지주 신트람에게 속아 소령 부인을 쫓아내고 기사관을 차지하게 된 기사들은 예스타 베를링을 둘러싼 경솔한 연애 사건에 일조들을 담당하면서 좌충우돌 마을을 말아먹게 된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예스타 베를링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기사들의 실수 투성이의 삶에 대한 다양한 만화경이라 해도 될 듯하다. 예스타 베를링은 끊임없이 사랑에 빠지고 기사들은 끊임없이 집으로 돌아가려다 다시 기사관으로 돌아오는 그 회귀의 도정에서 방황한다. 하나의 긴 이야기는 여러 장의 작은 이야기들 자체만으로 역동성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저열하고 인정머리 없기로 유명한 브루뷔의 목사가 자신의 옛사랑이 죽음을 앞두고 젊은 시절의 연인을 추억하러 왔을 때에는 가장 정열적이고 진심어린 늙은 청년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아들의 죽음 앞에서 죽음이 가지는 아름다운 종결의 의미와 초자연적인 느낌을 섬세한 언어로 되뇌이는 어머니의 이야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음악가 기사가 이른 새벽 첫 햇살이 나무들 꼭대기에 불타고 있을 때 살그머니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재회했다 머무르지 않고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는 이야기의 조각들이  하나 하나 모여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나의 퀼트 작품을 연상시킨다. 이야기의 화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정작 가장 마지막 문장으로 응축된다.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나 역시 같은 대답을 해도 될까? 지금까지 환상이라는 이름의 커다란 벌들이 우리 주위를 내내 맴돌았다. 이 벌들이 어떻게 현실이라는 조그만 벌통 속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잘 살필 일이다.

- p.536

 

다 거짓부렁이라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이야기. 그러나 삶과 나 자신을 잘 살핀다면 우리의 삶도 이처럼 환상을 현실 속에 꼭꼭 잘 눌러담는 능력에서 그 행복이 판가름나는 게 아닐런지. 그런 의미에서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는 좋은 안내 지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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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6-0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게 그러니까 제가 생각했던 그런 내용이 아니군요! 제인 에어 같은, 폭풍의 언덕 같은, 오만과 편견같은, 그런 로맨스 소설은 아니란 말이구요. '마술적 리얼리즘' 이라니, 저는 그쪽에 취약한데, 이 책이 그런 내용이었군요. 고마운 리뷰네요, 블랑카님.

blanca 2013-06-07 11:1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도 사실 그런 류인줄 알고 읽다가 그만 읽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래도 어찌 어찌 읽아 보니 아주 독특한 즐거움이 있었어요. 저도 사실은 마술적 리얼리즘과 잘 안 맞는답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런 류에 순수하게 몰입이 안 돼요. 그래도 이 책은 아주 참신한 즐거움이 있었어요.

노이에자이트 2013-06-05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닐스가 탄 새가 기러기더군요. 시골 살 때 이웃에 거위가 있었는데 그 주인이 "기러기를 길들인 게 거위"라고 해서 아하...그렇군 했죠.

blanca 2013-06-07 11:17   좋아요 0 | URL
저도 찾아보니 기러기더라고요. 기러기를 거위가 길들였다니 신기하네요 ㅋㅋ

노이에자이트 2013-06-07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러기를 길들이면 거위가 된다는 얘기였어요.야생기러기를 사람이 잡아 집에서 가금류로 길들였다는 얘기죠.설마 기러기를 거위가 길들였을라구요~

blanca 2013-06-09 17:58   좋아요 0 | URL
아, 정말요? 무식이 탄로났군요 ㅋㅋ 신기하네요. 결국 거위가 기러기군요.

노이에자이트 2013-06-10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로 기러기 사진과 거위 사진을 비교하면 비슷한 것을 알 수 있을 거에요.
그런데 거위를 실물로 보신 적이 있나요? 거위를 안 봤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서요.

blanca 2013-06-11 09:32   좋아요 0 | URL
아마 본 적이 있을 거예요. 기억은 정확히 안 나지만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 스완네 집 쪽으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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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김희영님의 번역으로는 일단 여기까지 출간되어 있다. 끝이 아닌 끝을 매만지는 기분이었다. 2권은 '나'의 또다른 자아 스완이 아내가 될 화류계 여자 오데트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이야기와 '내'가 스완과 오데트의 딸 질베르트와 사랑에 빠지는 대목이다. 이 두 부분은 묘하게 닮아 있다. 스완은 상류층 출신으로 지적이고 신사적인 인물인 한면과 전혀 지적이지 않고  과거가 모호한 여자인 오데트에게 집착하고 그녀가 속한 천박한 집단에 소속되기 위하여 분투하는 의외의 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것은 '나'의 고모할머니가 부여한 외할아버지 친구인 증권중개인의 아들인 겸손하고 평범한 스완과 사교계를 드나드는 화려한 샤를 스완의 분열된 측면과도 오버랩된다. 1권에서 언급되었던 우리의 사회적 인격에 대한 이야기는 2권의 이러한 캐릭터 유형과 또한 책을 읽는 우리들에 진실로 부합된다. 눈앞에 보이는 존재의 외양에다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모든 관념을 채워넣어 하나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만든다는 프루스트의 이야기. 우리는 죽을 때까지 타인의 본모습과 우리 자신의 본모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곡해하고 오해할 것이다.

 

오데트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며 마음의 지옥을 만드는 스완의 내면에 대한 묘사는 그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비이성적으로 과도하게 타인이나 일의 결과에 집착할 때 보이는 각종 어리석음과 절절하게 닮아 있다. 스완은 모두를 의심하고 모두를 유리한 대로 믿으려 하고 자신의 정당화에 끌어들이려 한다. 그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우리를 위해 괴로워하거나 기뻐할 가능성이 있다고 느끼면, 그 사람은 마치 다른 우주에 속한다는 듯 시로 둘러싸이고 우리 삶은 감동적인 영역으로 변해, 우리는 그 영역에서 조금쯤 그 사람과 가까워지게 된다.

-p.90

 

오데트와 스완이 사랑에 빠지며 공유하게 되는 그들만의 은어, 약속, 음악의 상징성은 그것이 덧없어질 유한한 것이기에 더 빛난다. 스완이 오데트의 코르사주 카틀레야 꽃을 바로잡아 주며 '카틀레야를 한다'는 그들만의 은밀한 언어를 만들고 그것을 신호로 서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 1권에 등장했던 '나'의 이모할머니들의 피아노 선생인 뱅퇴유가 작곡한 소악절이 오데트에게서 연주되었다는 것만으로 그 음악이 나올 때 스완이 떠올리는 오데트에 대한 사랑, 정열들은 삶의 변전과 인간의 감정들의 그 다양한 변질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것들의 역설을 이야기한다. 어리석은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의 퇴색, 그 감정마저 저물고 남는 것들의 궤적은 그 어떤 것에 대입하여도 무리가 없을 만큼 진정성을 갖는다. 나는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문제로 고뇌하고 있는데 어느 날 밤, 스완의 그 지옥같은 마음 속의 전쟁을 듣는 것만으로 그냥,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누구에게든, 이라는 위로를 얻었다.

 

'나'는 스완이 오데트와 어떻게 결혼에 이르게 된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사랑의 결실인 소녀를 짝사랑하게 된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은 '스완'의 그것과 닮아 있다. 그리고 갑자기 '나'의 시선은 다시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와 모든 변한 것들의 잔상을 부여잡고 씁쓸해하는 노인의 것으로 변한다. 모든 것의 덧없음을 탄식하며 2권은 끝을 맺는다. 그리고 3권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글쎄, 모르겠다. 과연 내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할 수 있을지. 여기까지 온 것에 그리고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프루스트의 그 유려한 만연체에 조금은 익숙해진 것도 같아 뿌듯한 느낌도 든다. 서술 시점의 변주, 규칙적이지 않은 서술 시점의 횡단 등 각종 불친절함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고 아름다운 구석이 많은 책이다. 그것은 여기에는 수많은 '내'가 흩어져 있어 끊임없이 잊혀졌던 '나'를 채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일은 '나'를 찾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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