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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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와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게시판에서 우연히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너무 슬프고 절망적이라는 이야기에 끌려  유진 오닐이 아내 칼로타에게 쓴 눈물 어린 헌사를 시작으로 티론 가족 네 사람이 각자의 절망이 소통하지 못하고 한없이 반목하고 빗겨가는 그 자리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열두 번째 결혼 기념일에 유진 오닐은 차마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표현해 내기 어려울 만큼 슬프고 비참했던 가족사를 자신이 가장 잘 형상화할 수 있었던 희곡의 형태로 사랑하는 아내에게 선물로 바친다. 실제 유명한 연극배우였고 극단을 따라 호텔을 전전하며 아이들을 낳고 키웠던 유진 오닐 아버지의 이야기가 극중 티론에게 그대로 투영되어 티론의 여름별장의 거실에 모인 부부와 두 아들의 4막으로 이어진 대화로 슬픈 가족사와 서로 간의 갈등, 상처를 짐작할 수 있다.

 

 

1912년 8월, 제임스 티론의 여름 별장의 거실에 나타난 어머니 메리는 진통제 처방이 우연히 마약 중독으로 이어진 상태로 마약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가족에게 다시 돌아온 그녀의 모습에는 여전히 마약에 오염되어 있는 모습이다. 선병질적인 모습과 연극적인 자기 고백, 과거로의 끊임없는 귀환은 그녀가 방탕한 큰 아들과 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둘째 아들, 가족들에게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남편이 만들어 내는 건조하고 차가운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아내는 현실을 부정하고 아버지는 절망과 삶에 대한 탐욕스러운 애착을 묘하게 섞어 아들들을 괴롭힌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그 사람과 아이를 낳았을 때에 이러한 미래를 감안하거나 꿈꾸는 것은 아닐 테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보다 앞질러 정거장에 당도해 있는 미래는 얼마쯤 우리가 삶에 기대했던 그 자비와 관용, 환상을 여지없이 박살내어 버린다. 유진 오닐은 먼저 이 정거장에 도착해 자신의 원가족을 담담하게 지켜보고 이야기한다. 아버지와 반목하는 아들들. 어쩌면 내일이면 완전히 헤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이 위태위태한 가족의 모습에는 인간이 삶이라는 그물에 걸리는 한 어쩌지 못하는 그 필멸의 명제가 살아 있다.

 

 

인간이 되는 바람에 항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고, 진정으로 누구를 원하지도, 누가 진정으로 원하는 대상이 되지도 못하고, 어디 속하지도 못하고, 늘 조금은 죽음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 거죠!

 

유진은 자신의 사후 25년 동안 이 작품이 발표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결혼기념일에 이 희곡을 이미 자신의 것으로 받은 아내 칼로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아이러니하게 그에게 네 번째 퓰리처 상을 받게 한다. "빛으로의, 사랑으로의 여로"라 칭했던 그녀와의 결혼 생활도 결국은 '밤으로의 긴 여로'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모든 삶의 보편적인 은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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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16-07-07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이 인용하신 구절을 제가 다시 인용했습니다...그래도 되었을까요? 문득....이 책을 저도 오래전에 읽었습니다. 당시 유진 오닐의 희곡을 여럿 읽었지요. 일부러 찾아 읽진 않았고 어쩌다보니, 그리 되었지요. ..그런데..이 구절은.....아무튼....

blanca 2016-07-08 16:15   좋아요 0 | URL
테레사님, 어차피 저의 문장이 아닌걸요. 혹시 유진 오닐의 다른 희곡 중 좋았던 것 추천해 주세요.

테레사 2016-07-13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좀 오래전 그러니까, 1900년대에 읽었어요..ㅜㅜ ㅋㅋ 1990년대 후반에요..생각해 보니,,많진 않았네요..느릅나무 밑의 욕망이 기억나네요...그건 잘 알려진 것이라..블랑카님도 ..아실터...
 
운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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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를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이 나치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그곳의 참상을 다양한 형식으로 증언했다. 인간이 강제한 시스템 아래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견디어 낸 시간은 삶의 자기회복력의 세례를 받아도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개별적인 트라우마를 남겼다. 견디어내고 살아남았다고 섣불리 마침표를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이 인간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한 기억은 그 인간들을 마주보고 살아내야 하는 삶 자체의 의미를 뿌리부터 흔든다.

 

그러나 <운명>은 여타 다른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의 증언의 어조와 달랐다. 무엇보다 주인공은 열네 살 소년이다. 회상의 형식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다. 한창 가족의 따뜻한 보호 아래 공부하고 친구들과 뛰어 놀아야 할 소년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제 노역을 다니다 그 출근 버스에서마저 끌려 내려와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아우슈비츠로 끌려간다.

 

"우리는 학교를 위해 공부하지 않고 삶을 위해 공부한다."였다. 그렇다면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대해 반드시 공부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p.124

 

열네 살 소년은 울지 않았다. 건조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때로 화가 나기도 하고 무기력해지기도 했지만 그는 아이처럼 징징대지도 포기하지도 않은 채 그저 성실히 하루 하루 수용소 생활을 해나갈 따름이었다. 그의 시선은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 주변 풍광, 그를 둘러싸고 수용소의 질서를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어른들, 같은 수용소 안의 또래 소년들, 때로 항상 배고픈 그에게 대가 없이 빵을 주고 자포자기하지 말라 격려하는 멘토 같은 사람들을 따라 움직인다. 그의 시선을 통과한 수용소의 풍경은 마치 우리가 가진 삶의 일상처럼 흘러간다. 소년도 때로 그 점에 놀란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다 던져버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반응이 아니라 그저 주어진 하루 하루를 힘들지만 엮어 나가며 살아나간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지쳐 있는 수용소의 의사에게 "당신의 고통은 별거 아니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얘기해 줄까도 생각했다.

 

그는 일년 여의 수용소 생활을 종전으로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귀가하다 대신 전차 요금을 내어 준 어른에게 고국의 부다페스트를 보니 어떤 느낌이 드냐는 질문에 "증오심요."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억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어른도 아닌 아이를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놓아 수용소에서 노역을 시키고 인간이하의 대우를 일삼는 것을 방조한 자신의 고국에 대하여 아이는 증오를 느낀다. 끔찍한 기억을 다 잊으라는 동네 어른들의 조언에는 반발한다. '내 기억에 대고 명령을 할 수는 없다.'고.

 

소년이 돌아올 곳은 해체되고 없었다. 아버지는 죽고 새어머니는 재혼했다. 그러나 노을지는 저녁 거리에서 생모를 찾아 가며 그가 느낀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그가 이 시간대를 수용소에서도 가장 좋아했다,고 회고하는 장면은 섬뜩하면서도 장엄하다. 계속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 계속 삶을 지속해 가겠다는 각오를 지키기 위하여 소년은 나아간다. 어른들의 잔인한 도발로 소년의 삶은 파괴되지 않는다. 소년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살아 귀환한 자의 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성장에 대한 기대가 어쩐지 눈물겨웠다. 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자전적 이야기의 회고인 이 이야기가 그가 후에 소년 시절 겪은 수용소의 트라우마로 순탄치 않은 삶을 이어가야 했음을 알고 들을 때 더욱 그러하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나 생을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음을 그 자신이 삶으로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단지 외피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나면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이 역설적으로 얼마나 타인의 존재와 그에게 주어진 생 전부를 파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처절한 예시가 된다.

 

이제 우리 과장하지 말자!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p.284

 

언제나 삶에는 짐작하는 것보다 더 크고 깊은 그 무엇이 있다. 그러니 섣불리 과장하지 못하겠다. 느낌도 짐작도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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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3 0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3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이바 2016-05-24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혹시 영화 사울의 아들 보셨어요? 비르케나우 배경으로 한 영환데 영화 기법(잘은 몰라도)과 더불어 아우슈비츠의 삶을 좀 더 생각하게 되는 그런 작품이었어요. 역사를 기록하는 어떤 방식에 대한 고민거리와 더불어... 굴라그 배경의 문학작품들도 떠올리게 되고요. 다르지만... 아직 운명 초반부밖에 읽지 못했는데 얼른 읽어야겠습니다.

blanca 2016-05-24 20:47   좋아요 0 | URL
에이바님 댓글 보고 찾아보니 아주 평이 좋네요. 아쉽게도 아직 못 봤는데 줄거리 보니 도저히 못 볼 것 같아요. 이제 너무 참혹하거나 슬픈 영화는 차마 볼 수가 없어요. 홀로코스트 관련된 이야기들을 공교롭게 여러번 접하게 되는데 결국은 절망으로 귀결되서 자꾸 가라앉게 되는 것 같아요.
 
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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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안 오는 밤 뜬금없이 스마트폰에 '김연수'를 검색했다. 그리고 마흔이 안 된 그의 과거 인터뷰 내용 중 수시로 '설국'을 읽는다는 이야기에 '설국'을 꼭 다시 읽어야겠다,고.

 

언제였을까? 나는 '설국'을 읽었다. 어렸을 것이다.내용은 흐릿하고 그 아름답고 서늘한 분위기만 남아 있다.  어떤 아주 매력적인 여자가 나왔고 시리고 차갑고 요요한 분위기였다고, 기억한다.

 

그 기억의 잔상은 다행히 어그러지지 않는다. 이백 페이지도 안 되는 소설을 거의 한 자리에서 다 읽고 다시 되돌아 첫 페이지로 간다. '소설'이란 이런 식으로도 완성될 수 있구나, 싶은 이야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서는 도저히 성공할 수 없을 것 같다.(찾아보니 있긴 하다.) 급진적인 전개나 확실한 플롯이 없다. 보통 그러면 문장에 무게가 실리며 억지로 쥐어짜거나 과장, 미화된 부자연스러운 문장들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질 가능성이 많은데 '설국'은 언어로 담을 수 있는 모든 감각적인 색채들이 눈이 부시다. 문장 하나 하나에서 그 차갑다 못해 몸이 얼어버릴 것 같은 차갑고 서늘한 설경의 냄새가 절로 뿜어져 나온다. 덧붙일 것도 생략할 것도 없는 딱 좋은 그 정도에서 작가의 욕심은 멈춘다. 응축되고 농축되고 농염하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여기에서의 '국경'은  나라와 나라의 경계가 아니다. 지리적으로는 군마 현과 니가타 현의 접경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국경'이라는 단어가 크게 어긋날 것 같지 않다. 경계를 넘어서서 한 인간이 인물과 그 인물의 뒤에 있는 풍경이 만나는 지점에서 삶과 죽음을 넘어선 피안의 느낌을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로서 '국경'이란 표현은 무리가 없다. 시마무라는 동경에서 이 눈의 고장으로 넘어오며 고마코라는 당돌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에게는 아내와 아이가 있다. 고마코는 온천장이 있는 마을에서 게이샤 출신의 스승으로부터 샤미센과 춤을 배워 결국 게이샤가 된다. 시마무라는 고마코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묘한 삼각관계를 이뤘던 요코를 고마코를 만나러 가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녀에 대하여됴 미묘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고마코는 두 남자를 두고 동시에 두 개의 삼각 관계에 얽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가 주는 아니다.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밀고 당기는 관계는 시마무라가 여행객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때로 몸을 팔기도 하는 고마코가 일기와 독서록을 꼼꼼히 적는 일에 대하여 느끼는 냉소와 만나 허무로 수렴된다. 그것은 그 일의 하찮음이 아니라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도 그 비애에도 성실하고 진지하게 모든 보고 읽는 것들을 대하는 소녀에 대한 안타까운 정서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이야기의 기본 정서는 삶이 가지는 그 필연적인 허무와 덧없음에 대한 깊은 의식이다. 짧고 덧없는 생과 그 길에서 벌어지는 만남과 이별이 벌어지는 배경에 오히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언어가 닿아 있다. 끊임없이 내리고 또 내리는 눈 속에 갇히는 마을, 그 동면의 계절 동안 소녀들이 집 안에 갇혀 눈 속에서 실을 만들고 눈 속에서 짜고 눈으로 씻어 눈 위에서 바래는 지지미 옷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언뜻 큰 관련 없어 보이는 주변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가 줄곧 연인 아닌 이 연인을 둘러싸고 담담하게 이어진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연보를 보다 힘들게 맹장 수술을 받고 얼마 안 있어 가스로 자살한 대목에서 그 자신이 한 이야기와 묘하게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또 그 모든 과정을 기탄없이 부정할 수 있는 그 묘한 어긋남의 대목이 작가의 것이었나, 싶으니 시마무라가 은하수와 만나는 그 마지막 문장의 무게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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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6-05-12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국 다시 읽어야겠어요. 피상적인 제 독서를 반성하게 되는 글입니다...

blanca 2016-05-13 08:11   좋아요 0 | URL
노벨상과 문학적 완성도가 비례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 책은 절로 수긍이 가더라고요. 얇고 가독성도 좋아서 여러 가지로 참 즐거운 읽기였습니다. 에이바님도 꼭 다시 한 번 읽어 보세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 게르망트 쪽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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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는 속물이다. '나'는 비겁하다. 그리고 이야기 뒤에 숨어 그것을 위장하지 않는다. 귀족 사회의 모든 화려함을 대변하는 게르망트 가의 별채로 이사한 그는 이제 목하 가장 속물적이고 치기어린 또 하나의 짝사랑을 시작하려는 참이다. 게르망트 부인은 그가 가지고 싶어하고 도달하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의 정점에서 나의 모든 환상과 어리석음과 치기를 구현한 존재다. 젊은 '나'는 미성숙한 '나'는 그 부인의 시선을 한번이라도 받아보려 계획에도 없는 산책을 매일 가장하여 마침내 그녀에게 스토커 같은 인상을 남기고 만다. 게르망트 가의 후계자인 친구 생루의 병영으로 찾아간 것은 우정을 빌미로 그녀와의 만남을 얻어내려는 수작임을 독자에게 밝힌다. 이렇게 솔직하고 어리석고 적나라한 젊음의 치기는 언제나 비현실적이고 때로 기이하게 커져만 갔던 그 미성숙한 모든 우리의 열망들을 반영하고 있어 낯설지 않다. 그래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언제나 떨쳐낼 수 없는 여정인가 보다. 그 길에서 찾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모든 이상과 모든 아름다움은 예민한 '나'의 시선으로 적나라한 속살을 들키고 만다. 퇴락해 버린 빌파리지 부인의 살롱에 방문하게 된 것도 '나'의 아버지가 사회에서 원하는 자리를 얻어내려 물밑 작업을 하려 아들을 밀사로 보낸 것이 아닌가. 정작 애송이인 그가 발견한 것은 숱한 어른들의 그 왜곡된 욕망, 저마다의 탐욕, 위선, 가식의 향연이다. 만화경은 유대인을 탄압하려 한 통속이 되었던 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싼 저마다의 그 잇속에 관려된 왜곡된 진실의 가공 앞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각자의 결핍과 은폐된 욕망을 비춰 준다. 아버지의 지인이자 나의 미래를 격려해 주었던 전직 대사는 정작 자신보다 한참 아래인 '나'를 험담하고 아버지의 반대편에 섰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미 늙어버린 한때의 영화를 누렸던 여인들은 저마다의 살롱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추잡한 경쟁과 연극을 벌인다.

 

난무하는 진실을 가장한 허위들을 명료한 시선으로 기술하는 이는 화자가 아니다. 화자를 관통한 시선은 사실 프루스트의 것이다. 아직 성숙하지도 아직 충분히 깨닫지도 못한 어린 '나'는 이런 노회한 이들의 살벌한 전장에 발가벗겨진 채로 이리 저리 휩쓸리는 유약하고 무기력한 하나의 '시선'일 뿐이다. 그러니 그 모든 어리석음과 그 모든 편견들은 어느 한 시기 모두 화자를 통과하고 화자를 오염시킨다. 정작 위선과 가식에 귀족연하는 게르망트 부인이 가진 그 숱한 모든 부스러기들이 가지는 환상 앞에서 아연해하는 화자의 모습만 봐도 그러하다. 게르망트 가의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생루가 거리의 여자와 사랑에 빠져 화자의 도움을 청할 때 때로 그를 도와주고 그의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에 동조하고 싶다가도 그를 둘러 싼 그 공고한 이미 이루어진 기성 세대들의 고정 관념에 복무하고 싶어하는 모습은 어린 시절의 미성숙함과도 만나지만 인간 자체에 대해 그 어떤 이상이나 기대도 이미 포기한 프루스트 자신의 체념과 교차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어머니 같은 존재인 외할머니가 병과 노화로 허물어져 가는 옆에서도 그 모습을 부인하려 하는 '나'의 모습은 내가 삶을 정면으로 헤쳐나가는 모습이 아닌 언제나 얼마간은 비겁하고 얼마쯤은 무감한 것처럼 견뎌나갔고 견뎌나갈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제나처럼 이야기들은 때로 길을 잃는다. 만연체의 문장 안에서, 의식의 흐름 안에서, 시간의 낙차 앞에서. 그런데도 읽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정말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것 같아서? 잃어버렸던 그 수많은 치기, 실수, 실패, 환상 들을 이미 주섬 주섬 챙기는 읽기다. 쓰잘데기 없는 것 같은 살롱에서의 그 가식적인 행동들, 비겁한 언동들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그 시공간의 격차를 가로질러 복제되는 축도 같은 오늘날의 현실의 연상에 찌릿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언제나 반복이다. 모든 좋은 것도 대부분의 나쁜 것도 결국은 이미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속물이 되지 않으려 노력할 수는 있지만 사회가 주입하는 그 모든 욕망 앞에서 무한정 초연하고 고결해지기란 어렵다는 깨달음, 하지만 그 끝이 향할 곳을 예감할 수 없기에 이야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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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12-28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행복한 연말 보내세요.^^

blanca 2015-12-29 18:26   좋아요 1 | URL
네, 다사나단했던 한 해 되도록 잘 마무리하려 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잘 마무리하시고 새해도 미리 복 많이 받으세요.

2015-12-31 0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31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1 0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2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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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프랑스 제2제정의 법정에는 두 작품이 풍기문란죄로 소환되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이것이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보바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변론해 준 변호사에게 <마담 보바리>를 바친다.

 

<마담 보바리>는 '결혼 생활 만큼 진부해지'는 간통의 파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간통이 골격을 이루는 이야기는 끊임없이 재생되어 왔다. 그리고 그것이 해피엔딩인 경우는 거의 없다. 삶을 지나가는 숱한 파국의 이야기가 그렇듯 그 이야기들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플로베르가 이야기하는 엠마 보바리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직접적으로 혼외정사를 묘사한 대목이나 간통을 옹오하는 이야기는 발견할 수 없는데 묘한 에로티시즘을 자아내는 것은 어쩌면 플로베르의 이 이야기를 법정으로 불러내려 한 이들이 정확하게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느꼈음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 플로베르가 엠마가 평범하고 안온한 가정생활에서 결코 그녀의 욕망과 환상을 충족시킬 수 없어 곁길로 뛰어나가는 것들이 간통 그 자체만을 이야기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한 노골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시작은 엠마 보바리로부터가 아니다. 그녀의 남편 샤를르 보바리의 소년 시절의 동급생들이 기억도 못 할 만큼 유순하고 평범해 보이는 모습, 창턱에 팔을 괴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꿈을 꾸는 소년은 미래의 아내의 배신과 자신의 몰락, 어이없는 죽음을 상상하지 못한다. 시골의 의사가 되어 첫 결혼에 아내와 사별하고 자신의 환자의 딸이었던 엠마에게 반해 그녀에게 구혼하는 장면, 그녀와의 아름다웠던 신혼생활에 대한 묘사는 아릿할 만큼 아름답다. 단조로운 시골 생활, 과한 공상과 환상, 허위에서 허우적대다 우연히 초대받아 가게 된 귀족의 무도회에서 엠마의 허영심과 외도에 대한 욕망은 비도덕적인 출구로 향하게 된다. 그녀가 화려한 저기에 시선을 둘수록 여기에서 그녀를 둘어싸고 있는 것들은 헐벗고 초라하게 전락한다. 외도의 초입은 순간적으로 그녀가 가져왔던 환상이나 환각을 구체환 한 것같은 착각을 주지만 이윽고 그것들 역시 플로베르의 말처럼 진부함으로 지리함으로 치닫는다. 플로베르는 '여기'를 버리고 '저기'를 택하는 것 역시 '저기'를 '여기'로 변환시키는 삶의 그 가혹한 어쩌면 다행한 속성에 기초한 것임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는 작가다. 번역자의 말처럼 그렇다면 우리 모두 엠마 보바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꿈꾸는 한, 그리고 그 꿈이 어떤 착각, 환상과 만나는 지점이 있는 한 엠마 보바리 같은 패배는 남의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이 이야기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축도처럼 집약된다. 플로베르의 인간형들은 그래서 누구라도 조금이라도 닮지 않고는 못 배겨낸다. 특히 약제사 오메는 보바리 의사 집안 일에 뻔질나게 훈수를 두고 때로 적극적으로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리사욕을 채우고 그 부부의 불행에서 상대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속물이자 위선자로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보바리 부부가 모두 몰락하여 죽고 나서도 끝까지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자신이 바란 바의 대부분을 실현시키는 승리자는 오메이다. 하지만 플로베르가 그의 성공을 묘사하며 정말 삶에 있어 그가 성공을 거두었는 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며 은근히 조롱하는 듯한 조소하는 듯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보이는 성공 안에 진짜 '산다는 것'에 대한 성찰이 빠져 있는 것이 과연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반문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신이 그런 한계 안에서 그러한 시선으로 그러한 만족으로 자신의 삶을 채우다 죽는다,는 것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는 일은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심판할 수 없는 지대다.

 

번역자 김화영의 작품 해설은 그 자신의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에 기반해 한 편의 명강의를 연상시킬 정도로 값지다. 무엇보다 무심코 읽어내려갔던 것들에 대한 신중하고 사려 깊은 분석과 플로베르의 작품 창작 과정에서의 에피소드 들이 어우러져 작품 자체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외동딸 엠마를 홀로 키우다 시집 보내고 자살로 보내야 했던 아버지 루오 영감에 애정이 갔다. 이 소박하고 따뜻한 농부는 전처와 사별한 그래서 장래에 자신의 사위가 될 보바리를 위로하며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귀중하고 다감한 조언을 남긴다. 그것은 꼭 슬픔이 아니더라도 삶의 길목마다 만나는 그 모든 떨쳐내기 힘든 부스러기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에 대한 하나의 지침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래서 기억해 두고 싶다.

 

그런데 말씀이죠, 아주 서서히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고, 한 조각 한 조각, 한 알 한 알, 흘러가더군요. 사라졌달까 떠나갔달까 아니 가라앉았다고 할까요, 여기 가슴 밑바닥에, 글쎄 뭐랄까......여전히 뭔가 묵직한 것이 남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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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5-12-19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내영화로 본데다 최근 읽은 김영하 작가의 산문에도 언급되어있어서 조만간 읽어야지 하고 있었는데 블랑카님의 리뷰에 조급해집니다.ㅜㅜ 미미여사 책을 후딱 읽고 바로ㅠㅠ;

blanca 2015-12-19 22:33   좋아요 0 | URL
아, 달밤님은 영화도 보셨군요. 아, 꼭 읽으셔야 해요. 후회 없으실 겁니다.^^;; 책장은 가볍게 넘어가고 감동은 묵직합니다. 이러니 책 선전 같네요.

2015-12-21 0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1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5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7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