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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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혼자 북치고 장구 치며 좋아했다 외면했다 정리한 첫사랑 질베르트에서 떠나 할머니와 발베크 해변으로 가게 된다. 유년시절 곁에 있어도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어머니와의 이별을 해치운 것은 이제 화자가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탈피하듯 진정한 의미의 성장의 관문에 있음을 의미한다. 기차 주변에서 카페오레를 팔던 소녀에게서 느낀 호감과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은 이제 이 청년이 해변가에서 만나 사랑에 빠질 소녀들에 대한 전주곡이다.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다소 장황하고 묘사의 결이 너무 촘촘하고 섬세해 가끔씩 의도치 않게 발걸음이 멈추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 정묘한 묘사의 결마다 우리는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떠나 보냈던 수많은 깨달음과 회한을 언어의 망에 포획해 다시 눈앞에 놓아주는 그 기가 막히는 순간들 때문인 것같다. 화자는 이미 아마도 나이가 꽤 들어버린, 그래서 생과 삶이 가지는 비의와 그 체념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복기하는 이다. 따라서 이 아름다운 바닷가의 눈부신 젊은이도 그때의 바로 그 어리석고 무모하기만 한 시선은 아니다. 그 순간이 찰나에 불과하고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지를 이미 아는 늙어버린 지혜의 시선은 젊음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그는 이러한 망각과 체념들을 죽음에 비유한다. 그리고 그 죽음이 떨어나간 자리에 끊임없이 증식하는 새로운 자아가 삶을 견디게 한다. 그때의 꿈, 소녀들, 소년들, 사랑들은 사라져도 우리는 여전히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이유다.

 

이 작품 전반에는 귀족 세계와 화자가 속해 있는 부르조아 세계와의 그 심연에 대한 고찰이 지속된다. 발베크 해변에서 할머니의 지인 빌파리지 부인을 만나 나누게 되는 교분은 그의 추억으로 남는다.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자신의 신분에 대한 의식과 표현 들은 그녀의 조카의 아들 생루와 친구가 됨으로써 '나'의 관찰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핵심은 그러한 귀족사회에 대한 관찰, 회의, 감상이 아니다. 마침내 화자가 만나게 되는 소녀들. 그 찰나의 은유들에 대한 경탄이다. '괴물과 신들에 둘러싸인 이 나이는 평온함을 알지 못한다. 이런 시절에 저질렀던 행동 중 나중에 지우고 싶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화자의 고백은 그만의 것이 아닐 테다. 이 소녀들의 모습은 지금의 십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기성세대들 앞에서 튀어 오르고 반항하고 순간의 욕구들에 압도당하는 에너제틱한 모습은 모든 청춘은 화자가 사실 자신이 좋아하는 소녀와 그녀의 친구들을 잘 구별하지 못했던 것처럼 하나의 일반화된 군집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완성되지 않고 아직 두드러지지 않고 아직 고정되지 않은 그 유연하고 아름답고 순수하고 어리석은 시간들에 대한 묘사와 찬탄은 더없이 아름답다. 그러니 화자의 사랑이 사랑하는 이 그 자체보다 자기 자신이 사랑에 더 많이 기여한다,고 표현한 대목은 참으로 적절하다. 첫사랑은 그 대상보다 그 첫사랑에 빠져 있던 나 자신에 대한 그리움으로 더 아련하다. 화가 엘스티르가 젊은 시절에 대하여 그 시절이 가지는 불가피한 약점과 고충들을 지혜로 가기 위한 하나의 여정으로 묘사한 대목은 화자가 성장하는 과정에 대한 하나의 주석 같다.

 

얼마전까지 질베르트에게서 오지 않는 편지로 전전긍긍했던 '나'는 이 해변가에서 만난 소녀들 중 하나인 알베르틴에 또 환상을 품게 된다. 마침내 그녀에게서 마음을 얻었다 생각하고 키스를 시도하는 찰나에 대해 죽음이 영원히 불가능해 보이고 삶이 내 안에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청춘의 환희에 가졌던 감상을 그대로 채집한 듯 생생하다.  그러나 역시 이 서투르고 자의적인 사랑의 끝도 여기에서는 그리 아름답지 않다.

 

'나'의 늙은 하녀 프랑수아즈가 커튼을 당기면서 열어젖히는 여름날을 수천 년 지난 화려한 미라로 비유하듯 그의 청춘에 대한 이 절절하고 아름다운 환기는 그것들이 단지 죽은 기억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는 실재임을 암시한다. 이제는 제대로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없는 나의 젊은 나날들도 함께 막을 내리는 듯한 아쉬움을 남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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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고요하리라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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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가 삶을 마감한 방식이나 연유에 대해서 그답다,는 진부한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왜 그러한 방식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 지에 대해 그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그의 죽음에 대한 희미한 설명이 될 수 있다.

 

로맹가리에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45년 동안 최측근에 있었던 친구 프랑수아 봉디가 있었고, 이 책은 그 친구와의 대담 형식이다. 그러나 그 대담은 어디까지나 가상이다. 어쩌면 그는 프랑수아 봉디라는 인물의 외피만 빌려 로맹가리 내부에서 묻고 답하는, 그가 그렇게나 경멸해 마지 않았던 두 개의 자아를 형상화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기에 '합리화'와 중언부언의 '변호'는 없다. 자신의 작품이 '자아를 상대로 벌이는 복수극'이라 이야기했던 그의 목소리가 정직하게 들리는 까닭이다. 다소 괴팍하고 그다지 도덕적이지 않은(스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맹가리의 모습이 지척 같다.

 

 

난 한 여자의 사랑의 눈길로 만들어졌네.

 

<새벽의 약속>은 그와 어머니의 자전적인 이야기이다. 아버지 없이 늙은 홀어머니 밑에서 그 어머니의 희생과 눈물로 어떻게 그녀의 성공의 대리자가 되는 지에 대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신파조가 아님에도 이 땅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란 우리 모두를 결국 울게 하고 말았다. 로맹 가리도 이것을 정확하게 간파해 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사랑에서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이야기한다. 그가 모두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경의는 그가 성장 과정에서 내면에 어머니를 간직하고 그녀의 감시와 보호의 증인을 간접 경험하며 잘못된 길로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그 힘과 통한다. 비행청소년들이 내면에 그러한 증인을 두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다는 그의 지적은 기억해 둘 만하다. <새벽의 약속>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망각에서 구원해냈을 뿐이라는 그의 겸양은 도리어 우리는 그러할 도리조차 없다는 자조로 무력감을 자아낸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숱한 익명으로 당신들의 희생과 눈물은 망각으로 스러져 갈 것이다. 그저 우리의 삶 자체를 어머니에 대한 헌사로 살아낼 도리밖에 없다.

 

그가 여성성과 연약함의 대변자로 스스로를 칭하게 된 것도 결국 그가 가진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존경 덕택일 것이다. 마초적인 것에 대한 염증, 그것이 횡행하는 정치, 사회 현실에 대한 개탄은 로맹가리가 가지는 소수자, 소외된 이, 여성적인 것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과 대척점을 이룬다. 가난한 유대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그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결국 자신의 삶을 완성했다.

 

 

'유럽 만들기'의 허상,-프랑스는 인간의 손이었네.

 

외부무가 15년 동안 로맹가리라는 시련을 겪었다고 자조적으로 고백하는 그는 프랑스가 미국과 소련 틈에서 제3세계를 딛고 '유럽 만들기'를 주도하려는 자기 기만적인 행동에 일침을 가한다. 그가 주장하는 프랑스적인 것은 삶과 맺는 수공관계, 지적 정직성에 있다. 이는 오늘날 유럽연합에서 불거져 나오는 각종 잡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작 동맹을 주장하며 실은 약소민족이나 국가를 수탈하여 이득을 탈취하며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각축의 장으로 변질되지 않았나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가 정치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대신 스무 권의 작품으로 항의하고, 시위하고, 청원하고, 호소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스스로를 인도주의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갈망을 품을 자유주의자 부르조아라고 칭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정치에 관여하는 동안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누구도 정말로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는 지적과 달리는 방향에 대한 통제나 의문은 교통수단 내부의 물질적 안락에 대한 문제로 대체되었다,는 그의 이야기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의 현실에 대한 비판 같아 섬뜩했다.

 

 

꿈의 착취보다 더 역겨운 걸 난 알지 못하네.

 

그는 소설만 쓴 것이 아니다. 전처 진 세버그가 할리우드의 스타이기도 했지만 그 자신이 직접 할리우드에서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쓰고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하기도 했다. 그의 할리우드에 대한 목격담은 그 화려한 이면에서 어떻게 스타를 꿈꾸는 젊은 이들의 꿈이 착취당하고 농간당하는 지에 대한 적나라한 보고이기도 하다. 그의 '역겹다'는 표현은 기성세대가 청춘의 꿈과 소망을 하나의 소비재로 폄하하고 이용하지는 않았는 지에 대한 하나의 경종이다.

 

 

나의 천성을, 삶에 대한 사랑을 야심과 성공욕에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지.

 

외무부에서 보낸 시간들이 욕구불만과 무력감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다고 회고하는 그였지만 때로 그곳에 자신이 돌아갈 자리가 있나 확인해 보며 초조해하기도 했다는 솔직한 고백 또한 그답다. 막상 드골이 외교고문 자리를 제안하자 그는 가장 로맹가리 다운 거절을 한다. 타인의 살갗 속으로 들어가 또다른 역사를 살게 된다는 소설쓰기를 통해 그의 삶에 대한 갈급한 욕망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 그가 다시 정치를 하게 된다면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서 그는 초연할 수 없었다. 다시 우리의 로맹가리로 돌아오기 위하여 그는 결국  춤추는 아틀란티스가 되어 무거운 세상을 가볍게 들어올리는 그 매혹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내겐 아들이 하나 있네. 그거면 따뜻하지.

 

로맹가리는 육십이 넘어가는 나이에서 거의 다 왔다고 의미심장한 표현을 한다. 진 세버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이제 겨우 열한 살. 진과는 헤어졌지만 그는 아들과 함께 살았다. 아들과 더불어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자기를 닮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어머니와 맺는 첫 관계를 문명과의 관계라고 칭송했지만 그를 겁내고 그를 사랑했던 아들이 매일 그 사랑과 아버지를 확인하게 위해 올라온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부자의 관계는 결핍과 칭송을 조금 걸러낸 로맹가리와 늙은 어머니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밤은 고요하리라.

 

죽음은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하며 그는 자신이 충분히 쓰지 못했고 충분히 사랑할 줄 몰랐다고 회한섞인 이야기를 남긴다. 그가 들려주는 죽음은 그가 한때 몸담았던 영화계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라스트씬을 연상시킨다. 그가 사랑하는 개 샌디와 오솔길를 올라 빛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 그는 사후 세계를 믿지 않고 죽음 뒤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결국 가장 로맹가리다운 불멸의 길을 택한 것 같다. 쓰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다며 모든 사람 안에 있고자 그가 남긴 이야기는 수많은 이들의 눈과 입과 마음에서 떠돌아다닌다. 아들을 위하여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자신은 궁핍하게 지내도 아들에게는 최고를 고집했던 그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불멸의 것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가 강조했던 인간애, 약자, 소수자에 대한 사랑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장 무시되면서도 가장 추구되어야 할 하나의 지향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그가 내린 결론에 대한 의미와 해석은 제각각의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가 바란 바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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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딸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2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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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는 단순한 장르소설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항상 내재되어 있었다. 그녀의 범인은 무자비한 소시오패스들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내적, 외적 동기를 부여받는다. 그래서 항상 그녀의 이야기는 슬프다. 소름끼치고 잔혹하고 이해할 수 없는 범인이 주도하지 않는 범죄는 인간의 나약한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 같아 서글펐다. 이러한 범죄소설은 분명 애거사 크리스티여서 가능한, 애거사 크리스티만 가능한 이야기 같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들을 읽는 일은 단순히 킬링타임용이 아니었다. 인간과 삶의 내면을 향한 그녀의 시선은 그 층층의 겹을 뚫고 심연에 조심스레 닿아 있었다. 그러니 이제 그녀가 추리소설이 아닌 그냥 소설을 다른 필명으로 기획했었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깜짝선물로 느껴진다. 게다가 딸의 이야기이다.

 

아들은 장가갈 때까지만 아들이지만 딸은 영원히 딸이라는 이야기가 비단 우리나라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책의 제목이 A daugher's a a Daugher인 이유다. 딸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당시는 치열하고 아팠던 그 많은 소소했던 일화들을 다시 복기하는 것만 같은 엄마의 마음을 지적한 부분이 공감 갔다. 중년의 엄마 앤이 막 피어나는 열아홉 살의 세라 앞에서 느끼는 감상들. 작가는 나의 과거, 현재,미래의 그 정확한 지점에 시선을 던지고 있어 군데군데 깜짝깜짝 놀란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명탐정 할머니 미스 마플은 여기에서 로라 휘스터블로 분한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할머니. 그녀가 앤과 세라에게 던지는 조언은 자신의 나이로 누르는 편견과 강압이 아니라 깨알 같다. 하나 하나 발췌하여 작은 수첩으로 만들어 가지고 다니고 싶을 정도의 가르침. 이것은 마치 애거사 크리스티가 우리들에게 남기는 소중한 별밭 같다.

 

희생이라니! 얼어 죽을 희생! 희생의 의미가 뭔지 잠깐이라도 생각해봐. 그건 따뜻하고 관대하고 기꺼이 자신을 불사르겠다고 느끼는 영웅적인 한순간이 아니야. 가슴을 칼 앞에 내미는 희생은 쉬워. 왜냐하면 그런 건 거기서, 자기의 본모습모다 훌륭해지는 그 순간에 끝나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희생은 나중까지-온종일 그리고 매일매일-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쉽지가 않아. 희생을 하려면 품이 아주 넉넉해야 하지.-252

 

맞다! 특히나 아이 앞에서 엄마의 희생은 멋지고 폼나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딸 세라가 반대하는 리처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앤은 재혼이 결렬되자 진짜 삶과 더불어 세라와의 유대의 끈을 놓아 버린다. 그녀는 자신이 딸 세라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진짜가 아니었다. 로라가 지적한 것처럼 그녀의 품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여기에서 갈등은 시작되었고 세라가 자신을 방기하고 겉만 번드르르한 불량한 남자와 결혼을 강행할 때도 엄마는 딸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미명 아래 무심코 방조했다. 흔히 자식 앞에서의 무조건적이고 품이 넓은 사랑 대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의 범위로 모녀의 관계를 축소, 또는 확대하며 묘파하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펜끝은 예리하고 아프다. 그녀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나약함과 약점들은 사소한 것들에 끄달리는 우리의 모습이다. 부모 자식 간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섬뜩하다. 우리는 많은 예외를 기대하지만 그것은 결국 스스로를 드러내고 만다.

 

그러니 그의 글을 읽는 일은 나 자신의 일기를 적는 것과도 같다. 좋은 엄마가 되는 일은 다시 산다고 해도 또다시 실수를 번복하고야 마는 나의 삶의 재방송과도 닮아 있다. 그저 '엄마'라는 것에 기대어 완벽한 헌신의 축복이 쏟아질 거라 기대하는 것은 일종의 만용이다. 내면에 적어도 로라 휘스터블 정도의 조언가 한 명 정도는 두고 끊임없이 돌아보고 반성하고 마음을 다잡을 일이다. 그것은 인간이 죽는 그 순간까지 성장한다는 이야기와도 통한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조언을 남발하는 나이 든 이들의 성마른 모습이 기우인 것도 그녀가 결국 남긴 가르침이 이것인 까닭일 게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것이라면 사는 것은 소모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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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8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19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4-05-22 10:32   좋아요 0 | URL
흠, 님도 두려운 맘이 있으시군요 근데 많은 분들이 어머니가 되고, 그러는 걸 보면 참 신기해요...! 근데 제가 왜 저걸 비밀글로 해놨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하려고...??

blanca 2014-05-22 12:10   좋아요 0 | URL
비밀로 댓글을 달면 그 댓글에 또 비밀로 댓글을 달아야 할 것만 같은 ㅋㅋ 강박이 듭니다.
 
여자의 일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9
기 드 모파상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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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였던가. 학급문고라는 것이 있어 각자 집에서 가져온 책들로 작은 도서관을 꾸몄었다. 그 때 <여자의 일생>을 집어와 몇 번이나 읽어보려 시도했던 기억이 난다. 번역의 문제였던지 아니면 고작 열다섯 언저리였던 나의 시선이 차분히 머물지 못해서였던지 이 책은 번번히 나를 비껴갔다. 통속적인 제목과 통속적인 여인네의 삶이 한창 세상 전체가 언제든 나의 손으로 조물딱 조물딱 하여 나의 꿈대로 변형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었던 나의 치기와 어우러지지 못했다. 나는 아주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내 삶을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런 서글픈 수동적인 삶과는 공통분모가 찾아지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탓이었던 것도 같다.

 

다시 새로운 여자의 일생을 이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 낳은 내가 읽는다. 이백 년도 더 되는 시차. 시골 귀족의 외동딸 잔느. 수녀원을 막 나온 열일곱의 그녀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에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 환희를 투영한다. 그 설레임, 그 막연한 진동. 모파상이 그려내는 그 점액질의 본능적인 삶에 대한 무모하고 막연한 기대감은 내가 처음 <여자의 일생>을 펼쳐든 그때를 다시 살려낸다. 그러니 나는 가능했다면 이렇게 열일곱의 잔느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공상, 몽상. 가끔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폭우를 뚫고 푀플의 아름다운 가족 소유 저택에 도착한 잔느는 마침내 교구 신부의 소개로 자신이 그토록 꿈꿨던 근사한 남편감 쥘리앵 자작을 만나 사랑에 빠져든다.

 

황혼은 짧았다. 별들이 촘촘히 박힌 어둠이 펼쳐졌다. 라스티크 영감이 노를 저었다. 바다가 인광을 발하고 있었다. 잔느와 자작은 나란히 앉아  작은 배가 뒤에 남기는 이 움직이는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아무 생각도 않고, 망연히 앞만 바라보며, 감미로운 안온함에 잠겨 저녁 기운을 마시고 있었다. 잔느의 손이 의자에 기대 있는 동안, 자작의 손가락 하나가 우연인 것처럼 그 위에 놓였다. 그녀는 이 가벼운 접촉에 놀라고, 행복하고, 당황하여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p.58

이 가슴을 떨게 하던 사랑도 막상 결혼 생활과 만난 남편의 비열하고 치졸한 이기심과 타성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심지어 그는 아내가 함께 젖을 먹고 자매처럼 자란 하녀 로잘리에게 자신의 아이를 임신시키기까지 한다. 이후 태어난 아들 폴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되는 잔느는 남편이 자신과 친구처럼 지냈던 백작부인과 외도를 저지르다 그녀의 남편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되는 결말 앞에서도 그저 아연할 뿐이었다. 이동식 오두막에서 불륜을 저지르다 현장을 발각당해 장사 같은 백작의 손에 의해 송두리째 오두막이 구르는 광경의 묘사는 비장하다고 하기에는너무 희화적이서 웃음이 터졌다.

 

사람 좋은 친정 부모님들과 다시 함께 하게 되는 잔느의 삶은 다시 아들 폴을 중심으로 흐르게 된다. 결혼 이후 그녀의 주체적인 삶은 간데없다. 때로는 종교에 광적으로 몸을 맡기기도 하지만 모파상의 시선에서 조명된 종교의 그 적나라한 허점에 대한 공박은 그것마저 허무한 허구의 것으로 귀결되게 한다. 한없이 사랑했던 친정 어머니의 죽음을 지키며 어머니가 생전에 소중하게 여겼던 추억의 상자에서 어머니의 불륜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잔느의 절망은 남편의 외도로 고통받았던 자신의 과거와 겹쳐져 결혼 생활 그 자체에 대한 하나의 회의로 이어진다. 모파상이 그려내는 삶은 잔느에게 그 어떤 단 하나의 희망도 허용하지 않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기도 했고 아니면 '삶'이라는 그 자체가 어쩌면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저만치 굴러가 버리고 마는 바퀴 이상이 아닌 것 같다는 자각에 울울해지기도 했다.

 

그녀가 애지중지 길러 낸 아들 폴의 응답은 더욱 가혹하다. 그는 일찌감치 창녀와 돈 안 되는 사업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끊임없이 잔느에게 돈을 요구하고 그녀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미 성년이 된 아들을 마음으로 독립시키지 못한 무력한 어미는 아들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그의 정부를 미친듯이 질투한다. 잠시 종교에서 멀어졌던 잔느는 신이 복수심을 가지고 자신을 질투한다고 느낀다. 인간의 감정으로 현현하는 것이 신인지도 모른다,는 모파상의 덧붙임은 잔느가 다시 사제에게 돌아가 조언을 청하는 것으로 결론난다. 그녀는 주체적으로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지 판단하지 못하고 상황과 타인이 이끌어 가는 대로 그녀 자신을 방기함으로써 더한 비극으로 치닿는다. 말미에 다시 돌아오는 하녀 로잘리의 훈수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그녀의 모습은 한층 더 그러하다. 옛 주인의 심복으로 아들에게 더이상 휘둘리지 않도록 단속하는 하녀의 모습은 물론 잔느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하지만 잔느의 삶이 잔느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 강화하는 하나의 실증 같아 더욱 불쾌하다.

 

아들의 정부가 죽으며 남긴 손녀딸을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서 일종의 환희를 느끼는 잔느의 모습은 조금 섬뜩하기조차 하다. 그 옛날 바람난 남편을 통해서라도 둘째 딸을 얻으려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그 처절했던 잔느의 무모하고 서글픈 시도는 마침내 아들에게서 소득을 얻는다. 경쟁자였던 아들의 정부는 죽고 이제 다시 집착과 애정을 기울일 대상을 손에 얻게 된 것이다. 하녀 로잘리가 마지막으로 한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것도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닙니다."라는 말. 모파상의 냉정하고 건조한 시선이 아프다. 꿈을 꾸며 노래를 부르던 소녀가 다 시들고 약해빠진 노파가 되어 또다른 생명을 품에 안고 돌아오는 길, 그것은 하나의 희망으로서가 아닌 또다른 비극의 매개체가 되어 안긴다.

 

삶에 대한 그 어떤 희망과 기대도 모조리 짓밟아 버리는 데에 이렇게 능숙한 묘파가 가능한 작가는 두 번 다시 나올 것 같지 않다. 그것 또한 삶의 또다른 절망이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미화하지도 않는다. 적당히 둘러대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는 일은 너무 아프다. 정말 그렇다. 그는 '희망'을 '기만'이상으로 독해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를 읽는 일은 얼마간의 각오를 담보한다. 이후 당신은 정말 우울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해서 역설적으로 더욱 더 열심히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게 바로 모파상의 미덕이다. 어쩌면 막장 드라마의 플롯은 이미 우리 삶에서 태동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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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4-1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업이나 취업에 실패하거나 실연당한 사람은 모파상 소설을 읽지 않는 게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요.인간의 어두운 면을 너무 적나라하게 끝까지 파헤치니까요.<여자의 일생>을 결혼을 앞둔 여자에게 권해서도 안 되겠죠.

blanca 2014-04-14 10:50   좋아요 0 | URL
모파상이랑 에밀 졸라가 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대단히 현실적이고 음울하다고나 할까요. 어렸을 때는 <여자의 일생>이 제목부터가 좀 청승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 읽어보니 과연 오늘날이 모파상의 시대에서 진보를 이룬 것인가, 아직도 비슷한 면이 많구나, 싶었어요. 인간의 본성은 어떤 진보나 발전의 틀을 갖다 대어도 절대 변할 수 없는 어두운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졸라도 그렇고 모파상도 그렇고 여성의 심리나 내면을 대단히 섬세하게 잘 그렸더라고요.

노이에자이트 2014-04-14 17:43   좋아요 0 | URL
그래도 졸라는 혁명에 대한 낙관주의를 담기도 했지만 모파상은 그런 것도 없는 완벽한 비관주의적 사실주의 작가죠.그래서 졸라는 드레퓨스 사건에 적극적으로 나섰나봐요.

여성작가는 남성심리 묘사가 서투른데 남성작가는 여성심리 묘사를 잘하는 사람이 많죠.왜 그런지 예전에 곰곰 생각해본적이 있습니다.

blanca 2014-04-15 09:54   좋아요 0 | URL
노자님 얘기 듣고 생각해 보니 진짜 그렇네요. 남성의 심리를 잘 그리는 여성 작가는 언뜻 떠오르지가 않아요.

302moon 2014-11-2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학교 때 읽으려다 포기했었어요ㅎ 저는 단편이 더 좋더라고요

blanca 2014-11-29 00:25   좋아요 0 | URL
저도 몇 번을 포기했던 기억이 ㅋ 나네요. 모파상의 단편집도 사실 `목걸이`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는데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인 콜드 블러드 트루먼 커포티 선집 4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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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때로 지루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그것의 표면은 너무나 허술해서 어느 순간 찢어지고 여린 속살이 드러나고 삶은 저만치 내동댕이쳐지는 경험을 준다. 영원한 평안과 불멸은 없기에 누구나 이러한 순간에 당도한다.

 

하지만 어느 누군가에게는 그 순간이 너무나 급작스럽고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듣고 볼 때 우리는 우리가 그 '누군가'에 해당될 수도 있었다는 두려움,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는 데에 대한 안도, 그래도 삶은 또 그런 결함을 갖고 있다는 깨달음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이렇게 이다지도 연약하고 불합리하고 불가해한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그 '삶'이라는 것이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끄달리는 작디작은 것들로 이루어진.

 

이 책을 꼭 읽고 싶었다. 하필 그 때 임신 중이었고 아무래도 이러한 내용을 읽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아 뒤로 미루어 두었던 트루번 커포티의 논픽션 소설.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또르르 굴러나올 것만 같았던 <풀잎하프>의 작가는 이제 잔혹한 일가족 몰살의 현장에 자신만의 현미경의 초점을 맞춘다. 이야기 전체의 신뢰성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일단 그가 짚어가는 사건의 내막과 그 사건을 둘러싼 가해자와 피해자의 삶의 단면들은 그의 정밀하고 투명한 언어들로 대단한 흡인력을 보인다. 1959년 캔자스 서부의 홀컴 마을에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발을 들여놓고 마는 것이다.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으니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허버트 윌리엄 클러터는 네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는 성실했고 또 그 만큼 부유했고 언제나 바라는 것을 어느 정도 손에 넣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고 자선에도 너그러웠고 홀컴 마을의 사람들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가치들를 대표하는 듯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뒤에 남은 사람들이 이야기하였듯 전 세계 모든 사람들 중 살해당할 가능성이 가장 적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11월의 어느 날, 사과를 먹기 좋은 날씨에 생명보험 계약서에 서명을 한 여덟 시간 뒤, 그는 아내, 딸, 아들과 살해당한다.

 

원한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고작 없어진 40달러의 돈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강도 살인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트루먼 커포티는 마지막에 범인을 드러내는 고전적인 수법이 아닌 애초 처음부터 이 무자비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살인을 저지른 두 명의 사내의 삶도 병렬적으로 배치, 추적한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이 두 명의 교도소 동기는 다른 잔챙이 같은 범죄들은 솔직히 시인하면서도 정작 리버밸리 농장주 가족의 살인 사건과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 지점에 있다. 분명 범인은 맞는데 그 범인의 범죄 현장에서의 행각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어쩌면 커포티는 처음부터 독자들이 편견 없이 딕과 페리, 이 두 청년 그 자체를 먼저 알아가기를 원했는 지도 모른다. 비교적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에서 자라난 딕과는 달리 인디언 어머니의 피가 섞이고 체구가 왜소한 페리에 대한 이야기는 작가의  애정과 연민이 닿아 있어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다. 페리는 양친 부모에게 학대당했고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고 고아원에서 방치되는 등 비참하고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타인에게 정상적인 친밀감을 느낄 수 없었고 따뜻함에 대한 기대와도 멀었다. 페리는 상처받은 짐승의 오라를 가지고 있었다고 트루먼 커포티는 형사 듀이의 목소리를 빌려 말한다. 실제 트루먼 커포티는 이 사건 취재 중 페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객관성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이 범죄를 추동한 것은 감옥 안에서 우연히 리버밸리 농장에서 일했던 이에게서 농장주의 금고 이야기를 듣고 이 농장을 털 생각을 한 딕이었다. 그러나 이 범죄의 전면에서 범죄 자체를 주도한 것처럼 나오는 페리는 사형 집행앞에서 부적절하지만 그럼에도 사죄한다고 마지막으로 이야기한다. 사형 제도 자체에 대한 논란이나 실제 선고와 집행 사이의 그 머나먼 간극의 허점에 대한 이야기는 담담하게 덧붙여져 있지만 핵심은 아니다. 그러니 이 책은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려는 욕심을 가지지는 않는 그 현명한 지점을 포작해 낸 대단한 명민함이 돋보인다.

 

트루먼 커포티는 피해자의 관점도 가해자의 관점도 결국 사건을 해결하고 마는 수사팀의 입장에도 전적으로 치우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다 그들 편에 다가가 있다. 이것은 중립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객관성에 대한 집착도 아니다. 다만 어떤 진실, 삶의 그 허무한 실재,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연민에 대한 애면글면한 천착이라고 이야기하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처음에는 애꿎은 무고한 선량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마지막 가까이에는 그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죽임을 당하지만 정말 끝에는 사 년의 시간동안 그 사건에 시달림을 받았던 형사가 집으로 돌아가는 엔딩씬이다. 한 편의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관객들은 또 삶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치 그런 것이 어쩔 수 없는 삶이라는 것처럼. 카버의 말처럼 소설은, 이야기는 많은 것을 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삶을 바꿀 수는 없다. 처절하고 슬픈 이야기지만 그래서 어쩐지 허무했다. 너무나 무력한 인간의 삶과 닮아 있어서. 분명 행복해지는 책은 아니다.

 

이 작품으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고 결국 알코올 중독과 약물 중독으로 초라한 마침표를 찍는 작가의 삶은 하나의 첨언 같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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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4-03-13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사놓고 영화로 먼저 봤네요. 얼마전에 약물과다로 돌아가신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 카포티로 연기했던 그 영화요. 제가 산 책은 그래서 표지에 배우얼굴이 나와있어요. 영화에서는 이 작가를 좀 안좋게 표현했던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죠.

blanca 2014-03-13 21:27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이 영화 못 봤는데 최근에 죽은 배우가 커포티로 분했군요! 이 작품의 진정성에 대한 논란도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너무 글을 잘 쓰는 작가지만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작가지만 이 작가의 삶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결핍을 숨기기 위한 과장이 상당 부분 작용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후애(厚愛) 2014-03-14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가끔씩 다녀가는데 댓글을 안 남겨서 너무 죄송해요.^^;;;

건강조심하시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blanca 2014-03-17 10:24   좋아요 0 | URL
후애님 서재는 종종 방문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