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프니 듀 모리에 - 지금 쳐다보지 마 외 8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0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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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미리 정해진 일이었다. 나는 우리 인생이 트럼프 카드와 같다고, 누굴 만나고 누구와 사랑에 빠지는지는 카드가 어떻게 섞이는지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운명의 손에 들려 게임 판으로 나간 카드는 버려지기도 하고 다른 손에 넘어가기도 한다.

- 대프니 듀 모리에 <몬테베리타> 중


대프니 듀 모리에의 단편들은 농밀하다. 압축적이다. 일상의 균열로 그 사람의 삶 전체에 건 헛된 기대와 믿음을 배반하는 이야기들이다. 상대를 의심했는데 결국 문제는 나였다. 나만 소외되어 세상은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 결국 우리가 기대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허룩한지 허약한지를 드러내는 이야기들이 남기고 가는 나머지는 결코 '내'가 아니다. 이 모든 무자비한 우연성, 비논리성, 불합리가 나마저 해체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무주의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다. 미스테리적 긴장을 놓치지 않으면서 삶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시선을 유지하는 미덕은 흔한 것이 아니다. 대프니 듀 모리에니까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다.


<지금 쳐다보지 마>에서 '나'는 아이를 잃고 이탈리아 여행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쌍둥이 노자매의 허무맹랑한 신비한 예지 능력에 기대는 아내를 비판한다. 아내는 나약하고 나는 강인하다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전은 그것마저 하나의 허상임을 일깨운다. 나는 결국 나의 미래를 본 것이라는 각성은 뼈아프다. 


히치콕 감독의 <새>는 대프니 듀 모리에의 동명의 단편을 영화화한 것이다. 대자연의 재앙은 인간의 대비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일상의 견고함 또한 그렇다. 내가 보내는 하루하루들, 내가 믿는 사람들, 내가 나라고 여기는 것들의 지반 자체가 흔들릴 때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서 나를 덮친다. 심지어 내가 살고 있다고 여기는 시간, 공간적 공간 또한 미심쩍다. 과거를 회고할 때 흔히 우리는 그 시간, 그 공간에 나로 있었던 나날들조차 실재했었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가 있다. 


<푸른 렌즈>에서 여주인공 마다가 시력 복원 수술을 하는 동한 임시로 꼈던 푸른 렌즈는 주변 사람 모두를 끔찍한 동물들 형상들로 변모시킨다. 마다는 모두를 의심하게 된다. 그들의 선의, 배려 등도 그 렌즈를 통과하면 미심쩍고 사악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거대한 은유다. 우리가 모두 사회적 페르소나를 입고 사회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 아래 맨얼굴은 어떠할 것인가에 대한 고찰이 놀랍다. 


마지막 <몬테베리타>는 감동이 있는 진지한 모색이다. 동양적 이상향인 무릉도원이 연상되는 '몬테베리타'로 떠나버린 여인을 끝까지 잊지 못하는 두 남자의 삶. 한 사람은 여전히 세속에 발을 담그고 나머지 한 사람은 결국 세속과 몬테베리타의 경계에서 헤매다 죽음을 맞는다. 우리가 있는 여기를 '홍진'에 비유한 것, 거기에서 바라보는 이상향인 몬테베리타 또한 일종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 거기에 도달해서 버리고 포기해야 할 것들에 대한 냉정한 직시, 직관이 빛나는 작품. 산다는 것과 꿈꾸는 것의 경계에 선 작가의 성찰이 뭉클하다. 결국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거나 누릴 수 없다는 한계의 자각에서 우리는 다시 출발한다. 


대프니 듀 모리에는 여전히 놀랍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며 진지한 고민을 하는 방법을 아는 영리한 작가다. 그녀를 읽는 일은 결국 우리 삶의 독법과 만난다. 허무하고 시간 낭비가 아닌 일. 읽기의 무게를 여전히 실감하게 하는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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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0-06-26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ttp://www.cinecube.co.kr/news/notice_view.jsp?b_idx=2&uid=10092&rnum=1
씨네큐브에서 히치콕 특별전을 하고 있습니다.^^ 레베카는 7월 1일 저녁에 하네요.우리 벙개할까요? ㅋㅋㅋ

blanca 2020-06-27 09:03   좋아요 0 | URL
흑, 아쉽게도 번개는 못하지만 테레사님 보시고 오시면 꼭 후기 부탁드립니다.!!!

유부만두 2020-06-30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아침에 다 읽었어요. 매우 옛 이야기 같은데도 긴장감이 대단하네요.
은근 무서워서 한 호흡에 다 못 읽고 재미를 아껴가며 읽었어요.
읽고 나서도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들고요. 듀 모리에의 다른 소설을 더 읽어야 겠어요.

blanca 2020-06-30 19:06   좋아요 1 | URL
그죠, 유부만두님. 저 다 읽고 나니까 아까울만치 좋았어요. 안 그래도 저 지금 또 다른 책 대기중이랍니다. 대프니 듀 모리에가 비교적 작품이 많아 다행입니다.
 
마크 트웨인 자서전
마크 트웨인.찰스 네이더 지음, 안기순 옮김 / 고즈윈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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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어른 한 분은 90이 넘자 자서전을 출판하고 싶어하셨다. 한 세기에 가까운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짐작이 갔다. 그 소망은 여러가지 상황으로 안타깝게도 이루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삶은 사라지고 기록은 남는다. 우리는 그 남은 기록이나 후손들의 기억의 조각들로 그 사람의 생을 재구성한다. 기록도 기억도 각자의 관점에서 왜곡되지만 그 왜곡이 전부를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여하튼 누군가의 언어로 한 사람의 잊혀질 뻔한 삶을 재건하여 이해한다는 건 언어로는 다 형용하기 힘든 가치를 지닌다. 


여기 마크 트웨인의 자서전이 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톰 소여의 모험>, <왕자와 거지>의 작가는 사실 '증기선의 안전 항행 수역 수심 두 길'을 뜻하는 필명이다. 그의 자서전은 그의 의지대로 사후에 출간되어 스스로를 이미 '죽은 자'로 칭하는 익살을 빛냈다. 상당 부분이 구술로 이루어져 어떻게 보면 다소 난삽하고 시간의 흐름도 때로 어긋난다. 찰스 네이더의 편집으로 독자들이 방대하고 난해한 그의 이야기의 숲에서 다행히 길을 잃고 헤매지 않게 되었다. 실제 대체로 탄생부터 시간의 흐름대로 펼쳐지는 그의 다채로운 삶의 이야기는 편집자에 의하여 재구성된 것이다. 때로 일흔흘 훌쩍 넘긴 마크 트웨인이 비집고 들어와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는 마치 한 대작가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와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술 한잔 걸치고 되는 대로 뱉어내지만 그 문장 문장 하나가 놀랍도록 문학적이고 심오해서 에피소드 하나로 때로 감동적인 단편 소설을 낭독하는 현장에 초대된 기분이다. 특히 찬사를 받는 그의 어린 시절 삼촌의 농장에서 사촌들과 보냈던 정경에 대한 묘사는 놀랍도록 감각적이라 지금 거기에 가 있는듯한 착각을 자아낼 정도다.


겨울 동안 저 아래 지하 저장실 통 안에 보관해 둔 냉동사과의 모양이 생각나고, 깨물면 어찌나 딱딱하고 이가 시렸는지 그러면서도 어찌나 맛이 좋았는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겨울 저녁 화로에서 사과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구워지고 이렇게 구운 사과를 크림에 푹 담갔다가 설탕을 약간 뿌려서 뜨거운 채로 먹을 때는 정말 뿌듯했다. 

-p.71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고 때로 시니컬한 논객이지만 진지하게 삶에 대한 통찰을 얘기할 때는 기억해 두고 싶은 구절들이 한 가득이다.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먹을 것을 위해 일하고 땀 흘리고 고군분투한다. 언쟁을 벌이고 비난하고 싸운다. 서로 앞다투어 조그만 이권을 차지하려 한다. 그러면서 슬슬 나이를 먹기 시작하고 질병이 뒤따른다. 수치와 굴욕이 자존심과 허영에 상처를 입힌다. 사람하는 사람을 빼앗기고 삶의 즐거움은 고통받는 슬픔으로 바뀐다. 고통, 근심, 비참함의 무게는 해가 거듭될수록 점점 무거워진다. 마침내 야망이 죽고 만다. 자존심이 사라진다. 허영이 무너진다. 그리고는 드디어 세상이 부여한 것중에서 유일하게 독성이 없는 선물을 받는 순간에 도달하면서 세상에서 사라진다.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 실수와 실패와 어리석음만을 저지른, 존재했었다는 흔적조차 없는, 자신이 사라진 것에 대해 단 하루 애도를 표하고는 영원히 잊어버리고 마는 그런 세상에서 말이다.

-p.298


무시무시할 정도로 직설적이고 예리한 묘사다. 평범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이렇게 요약해버리니 할 말이 없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직시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집착하고 끄달리고 괴로워하는 시간들의 낭비에 대한 엄중한 경고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자인하지 않는한 우리는 또 유한한 금같은 나날들을 아깝게 소진하고 말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가족들은 그의 작품의 숨은 편집자이자 리뷰어들이었다. 특히 아내는 주도적으로 그의 작품들을 수정하고 편집했다. 어린 딸들은 엄마의 주변에 앉아 엄마가 삭제해버릴 아빠의 사랑스러운 과감한 문장들을 비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딸들은 두 명이나 장성해서 마크 트웨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다. 그에게 아내와 딸들의 죽음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로질러 가족, 사랑, 존재에 대한 철학적 숙고를 하게 한다. 그는 '영원'을 믿지 않고 삶은 한번으로 충분하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에게 이들의 죽음은 슬프지만 그들에게 죽음은 하나의 선물이라는 믿음으로 시련을 통과한다. 가장 오래 남아 가슴 아픈 작별과 상실의 장을 통과해야 했던 대작가의 이러한 관조적인 시선은 소년들의 모험담을 통하여 미국을 이야기했던 위대한 작가가 마침내 얻어낸 가장 어렵고 고귀한 죽음에 대한 통찰이 아닌가 싶다. 이것은 나에게도 위로가 된다.


스스로를 더없이 게으르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칭했던 그가 죽어가는 아내와 거의 최후까지 문틈으로 러브레터를 교환했던 대목은 그의 냉소보다 더 강렬하다. 그렇게 마크 트웨인을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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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0
임레 케르테스 지음, 한경민 옮김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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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잖은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이 자신들의 참혹한 체험을 다양한 형식으로 증언했다. 그것은 회고담의 형식이거나 때로 허구의 형태를 띤 이야기로 세상에 나왔다. 많은 부분들이 때로 겹쳤고 상충되거나 서로 보완하여 완성되지 못한 그림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이미 이와 같은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도  헝가리 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자신의  소년 시절의 수용소 생활을 자전적으로 그린 <운명>은 세상에 충격과 더불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십대 소년에게서 으레 기대하게 되는 뜨거운 이야기 대신 관조적이고 담담한 관찰자적 시선이 그려낸 나치의 만행은 역설적으로 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폭력으로 느껴진다. 


"짧고 곧게 난 길은 아무 곳으로도 인도하지 않아. 또 하나의 길은 길고 굽이가 많아. 그래서 어디로 인도할지 알 수 없어. 그렇지만 적어도 그 길이 닿는 데까지, 사람들을 걸어간다고 느끼지. 그걸 기록해야 해."


그때 그 소년은 노인이 되어 <좌절>로 돌아온다. 글쓰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늙은 작가는 아내의 노동에 기댄다. '그'가 "세상에 대한 대답"으로 눌러 쓴 이야기는 오랜 시간 응답을 받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하는 번역은 부수입이 아니라 그의 유일 실질적 수입원이 된다. 그는 "무너지는 법, 기다리는 법"을 체현한다. 노인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시선은 어쩐지 서글프게 우스꽝스럽다. 그는 한심하고 무능력해보인다. "마지못해" 사는 그의 생활은 하지만 어쩐지 좀 고귀한 면이 있다. 그는 현재의 이 별스럽지 않은 삶, 초라한 일상과 증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극단의 폭력이 훑고 간 과거의 아우슈비츠의 어느 중간 쯤에서 끊임없이 어떤 부책감으로 서성인다. 이윽고 그를 훑던 시선은 어느새 시간의 불가역성을 뚫고 수용소의 소년에서 고국으로 귀향한 소년의 미래이자 노인의 과거의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시선과 시점과 시제는 혼재되어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지만 삶의 이야기는 사실 정합적이고 논리적이고 순차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모순이기에 임레 케르테스의 기만은 옳다. 


"필연적이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사는 것."


노인의 과거는 시대와 상황 앞에서 속수무책이지만 고고하다. 그는 "소비되지 않으려" 발버둥친다. 상부에서 외부에서 가해지는 각종 압력 앞에서 그는 때로 어쩔 수 없이 순종하지만 결국 짐짓 미친 척하다 미쳐버림으로써 자신의 마지막 존엄을 사수한다. 기자, 기계공, 간수의 직분은 외부에서 주어지지만 결국 그가 지켜내는 것은 그 자신, 그 본질이다. 다시 돌아온 노인은 마침내 인간의 극악무도한 만행을 언어로 형상화해내고 자신의 과거를 언어로 재구성한 작가다. 


노인은 무력하지 않다. "좌절"은 하나의 은유일 뿐, 그의 실재가 아니다. 언뜻 패배한 이로 보이는 늙은 작가의 승리는 그러한 것이다. 자신의 삶, 그 자신의 운명을 묵묵히 살아낸 것, 그건 필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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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리커버 특별판)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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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절대선과 절대악에 대한 확신이 흔들린다. 특히 한 인간이 선의 구현 그 자체이거나 악의 화신이라고 단정짓기 어려워졌다. 모든 상황 논리 앞에서 선악의 경계 그 자체를 모호한 것으로 지워버리자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선한 얼굴 뒤의 어두운 비도덕적 행위나 악행들에 묻힌 선한 대목들을 끊임없이 목도하다 보면 생명이 가지는 가변성과 역동성은 인간이 추구하는 불변의 것들의 근간 자체를 뒤흔들 수도 있겠구나 싶다. 사람은 너무나 복잡하고 삶은 점액질이다.


너무 많이 들어 진부해진 고유명사는 어느덧 대명사처럼 녹아들어가 그 고유의 본질 자체를 놓치기도 한다. 나에게는 '프랑켄슈타인'이 그랬다. 잘 알지 못했던 이 괴물은 어느새 너무나 자라버려 나에게는 '악의 '화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다가왔다. 나는 '프랑켄슈타인'을 오해했다.


<프랑켄슈타인>의 화자는 프랑켄슈타인도 그가 만들어 낸 괴물도 아니다. 청자는 독자가 아니다. 북극점 탐험을 떠난 로버트 월턴이 누이에게 보내는 서간문은 프랑켄슈타인의 서사를 두 겹, 세 겹으로 감싼다. 말하여지는 진실은 이미 날것 그대로가 아닐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탄생은 그것이 어떻게 삶의 우연들과 불가역성과 만나 악으로 변질되는지에 대한 자기 서사를 다른 이의 삶을 관통하여 해명한다. 이 세 개의 삶은 어쩌면 애초부터 별개의 것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결국 대원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야망을 접게 되는 탐험가도 의도치 않게 자신의 야망 너머에서 악의 결론을 몸소 경험해야 했던 남자도 선의와 애정을 기대했던 만큼 돌아온 배신에 절규하며 악으로 갚게 되는 괴물도 기실은 한 인간의 내면에 다 함께 지니고 있는 본성으로 치환된다. 관찰하는 자, 욕망하는 자, 그 욕망의 화신은 모두가 다 '나'이다.


괴물은 바로 나 자신의 흡혈귀, 무덤에서 풀려나 내게 소중한 것들을 모두 파멸로 몰아넣을 내 자신의 생명이었다.


빅토르의 고백은 괴물의 탄생 그 자체가 자신의 내면 그 자체에서였음을 보여준다. '나 자신의 생명'은 그렇게 나 자신의 금제를 뛰어넘을 욕망의 숨결을 통해 세상에 마침내 현현한다. 이쯤 되면 프랑켄슈타인 자체가 괴물로 육화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사랑하는 것들을 마침내 파괴하고 마는 그 욕망의 종착점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나 자신이다. 


창작 당시 십 대의 메리 셸리가 선과 악, 인간과 괴물의 경계 자체를 지워버리고 확장하는 지점의 언어는 역설적으로 아름답고 투명하다. 괴물의 목소리는 떨리고 그의 어휘는 때로 자신의 어두운 숙명을 그 자체로 이해받을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하고 설득력이 있다. 참담한 현실은 언어의 집에서 안식을 찾는다. 이야기해질 수 있을 때 인간은 산다. "불행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다."는 괴물의 절규는 메리의 이야기가 나아가는 과녁이 인간과 삶이 만날 때 벌어지는 일들 속에 인간이 강제로 부여한 규약, 관습, 통례 들은 판단의 준거가 되기 힘듦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괴물의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나 될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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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중요하다. 흔히 생명과 삶의 가치와 같은 저울에 올려 그 가치를 논하기도 하지만 삶을 영위하는 데에 가지는 그 ‘돈’의 중요한 동력을 감안한다면 이런 비교와 대조는 필연적 자기 모순에 빠진다. 인간의 욕망은 때로 삶의 동력이고 그것의 외연적 교환가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돈’으로 치환된다. 누구나 생과 삶은 차마 돈과 저울질당해서는 안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현대 사회의 돈의 위력이나 가치 자체를 무력화하는 것은 아니다. 돈 자체는 선악의 가치 판단의 준거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나친 악덕의 드라마를 ‘돈’ 그 자체와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에밀 졸라가 그려낸 19세기 후반의 파리 사회가 백 년도 훌쩍 지난 현대의 배금주의와 거의 오차없이 겹친다는 사실은 인간이 만들어 낸 외형적 교환 가치가 제어 없는 욕망과 만날 때 빚어내는 필연적 귀결이 얼마나 끈질기게 부활하는지 보여주는 예다. 증권거래소, 실질적 자금의 불입이 없는 무차별적 증자와 회사 실적 부풀리기, 작전세력, 개미 투자자들의 패망. 이것은 20세기 이후의 신조어가 아니었다.

초로의 몰락한 은행가 사카르가 증권거래소를 중심으로 각계각층의 투기 세력을 규합해 거대한 신디케이트를 만들어 주가시장을 지배하는 모습에는 이성적 판단이나 논리가 거세되어 있다. 다만 인간의 탐욕에 덧씌운 자기 기만, 환상, 이전투구가 실제보다 더 현실 같은 날조된 가치에 자신의 삶 전체를 거는 인간 군상의 민낯이 드러날 뿐이다. 파멸의 전조가 곳곳에 드러나도 레밍이 한꺼번에 물에 뛰어들듯 단체로 치닫는 절멸의 모습은 소름이 끼치도록 근래 전세계를 휩쓸었던 각종 금융 위기, 사건들과 겹친다.

에밀 졸라는 이러한 사태에 교조적으로 접근하는 대신 삶에 대하여 가지는 이러한 ‘돈’의 필연적 영향력을 중립적 입장에서 관찰하고 해부할 뿐이다. 어쩌면 그는 모든 비열한 왜곡된 욕망의 부산물을 돈에 몰아넣는 인간의 무책임함과 경솔함을 지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파멸한 사카르와 대척점에 서 있어 보이는 여주인공 카롤린이 사카르의 은행에 투자한 돈을 잃고 마지막에 빈털털이가 되었음에도 역설적으로 생의 의지와 환희를 느끼는 대목은 생이 돈을 배제할 수는 없어도 뛰어넘는 초연한 경지까지 약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돈’과 ‘삶’을 분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디에 동력의 주도권을 주냐,는 인간 개개인의 선택의지가 개입할 수 있다.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는 용기 또한 그렇다. 그 미약한 가능성이 이 비극적 얘기를 마치 해피엔딩처럼 보이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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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8-01-01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우아한 글을 쓰시는 블랑카님. 작년 한해도 고생하셨고 새해에도 우아하고 감성적인 글 기대할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lanca 2018-01-02 03:29   좋아요 0 | URL
헉, 시이소오님 칭찬에 없던 우아함도 생길 기세입니다. ^^ 새해에는 시이소오님이 더욱 마음 편히 책을 읽으실 수 있는 내외적 여유가 생기기를 기원합니다. 성실한 독서와 기록 언제나 응원해요.

카스피 2018-01-01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8만원도 아니 78만원 세대에게는 누가 뭐래도 돈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네요ㅜ.ㅜ 블랑카님 무술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blanca 2018-01-02 03:31   좋아요 0 | URL
그렇죠. 돈이 가지는 위력에 압도당해서도 안 되지만 기본적으로 사는 데에 필요한 그 마지노선도 부정할 수 없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카스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