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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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의 두통으로 고생한 적이 있다. 몇 주를 고생하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찾아간 신경외과에서는 별일이야 없겠지만 이제 뇌 MRII를 한번쯤 찍어둘 나이가 됐다고 했다. 이제 그런 나이가 된 건가? 이후에 나의 짱구 머리 사진을 판독해 준 나보다 젊은 의사는 아직 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의 나이에 대한 이 상반된 해석은 결국 내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이야기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해 준 셈이다. 언제나 많을 줄 알았던 머리숱의 급감과 노안은 더 얘기할 필요도 없겠지. 나는 차곡차곡 나이를 먹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영향을 내 삶 전반에 끼친다. 아무리 영혼과 내면과 의지의 이야기를 해도 결국 나는 내 몸 안에 갇혀 존재의 환각을 느끼는 존재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내 몸을 넘어서거나 이길 수 없다. 인정해야 한다.


이 소설은 1923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화자가 딸에게 유산으로 남긴, 자신이 열두 살 때부터 여든여뎗 살 마지막 때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장치로서의 몸에 관해 쓴 일기"의 형식을 띠고 있다. 연령에 따른 몸의 미묘한 변화와 성장, 각종 성가신 질환들, 노화,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연대기적 형식의 보고서는 어떤 세대의 독자가 읽어도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과거, 현재, 미래의 육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작가 특유의 재치와 언어에 대한 탁월한 감각으로 한층 더 생생하고 흥미롭게 다가온다.


내 나이 즈음의 일기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세상은 원래 무게보다 더 무거워질 것이다. 그러면 피로 속에 불안이 침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세상이 무겁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세상 속에 있는 나 자신, 무능하고 헛되고 거짓된 내가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친 내 의식의 귀에다 대고 불안이 속삭이는 말들이다.

-pp.238

암울한 전망이다. 노안의 이야기도 있다. 사춘기 아들과의 대치에 관한 이야기도 심지어 갑자기 출몰하는 이명에 대한 충격도 있다. 얼마 전 나보다 두 살 어린 지인과의 통화에서 우리는 예고 없이 나타난 그 육체적 쇠락의 징후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며 놀라워했다. 거기에 이명도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알고 보면 오십, 육십, 심지어 팔십에 이르기까지 아직 본격적인 노화의 관문에는 다다르지 않은지도 모른다. 더 많은 더 어려운 성가신 것들의 전시가 주르륵 펼쳐진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아직 애송이다. 결국 "왕관들을 빼앗기는 거다." 이미 쓴 적도 없다고 주장하면 할 말은 없지만.


몸이라는 극지에서 빙하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굉음도 내지 않고 조용히. 늙는다는 건 이 해빙을 겪어내는 것이다.

pp.362


"늙는다는 건 이 해빙을 겪어내는 것이다." 절묘한 문장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요새는 노인들이 다르게 보인다. 시간과 세월은 그저 지나가는 게 아니다. 그 안에서 우리의 몸은 늙고 그 안의 존재는 그 미미한 껍질을 붙잡고 분투하며 마지막까지 견뎌내야 하는 과업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 승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상을 나날이 견디는 중이니까. <몸의 일기>는 그러한 과정의 위대함을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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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2-18 14: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페낙을 좋아하게 됐어요
~♡

blanca 2022-02-18 20:18   좋아요 0 | URL
<학교의 슬픔>도 참 인상적으로 읽었는데 다른 책들도 찾아 보려고요.

stella.K 2022-02-18 15: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싶었던 책입니다.
그렇게 노화를 거침에도 불구하고
또 장수하며 지탱하고 버티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지금 내 몸을 생각하면 내가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싶은데 그분들을 보면 나도 버티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늙으면 어떻게 살까 싶은데도 살아지는 것 같습니다.

blanca 2022-02-18 20:18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저도 그렇게 느껴요. 건강하게 장수하고 싶어요.

coolcat329 2022-02-18 18: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노화 죽음...저도 거의 매일 생각하는 단어입니다.
두통이 얼마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지 저도 제 가족의 고통을 곁에서 봤었기에 조금만 머리가 아파도 가슴이 덜컥합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책이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

blanca 2022-02-18 20:19   좋아요 1 | URL
저는 사실 두통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아프니 너무 두렵더라고요. 통증이라는 게 한번 몸을 점령하면 그게 전부가 되어 버리는 경험이 되는 것 같아요.

라로 2022-02-18 1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지금 읽고 있는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책과 겹치는 내용이 있네요,,, 그나저나 노년은 아직 이르지 못한 사람들에겐 두려움 그 자체인 것 같아요. 하아~

blanca 2022-02-18 20:21   좋아요 1 | URL
아, 그 책도 너무 좋죠. 신체가 차차 기능이 떨어지고 다들 나를 할머니로 생각하는 날이 온다고 생각하면 아찔해요. 사실 지금의 제 모습도 낯설어요. 누가 아줌마, 그러면 ㅋㅋ 아줌마 맞는데 기분은 별로라니까요. ㅋ

기억의집 2022-02-18 22: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통은 더 이상 없는 거죠!! 저도 두통이 있는 사람이라.. 어떨 땐 게보린 세개도 먹고 그랬거든요. 저도 검사해서크게 이상은 없다고 하니 한편으론 맘이 놓이는데… 블랑카님도 다행이예요 나이 들면… 그렇죠 저는 제 손을 볼 때마다 속상해요. 너무 쭈글쭈글해서… 다 노화의 과정이겠지만,, 이제 더하면 더 할테니 맘을 부여잡아야겠어요

blanca 2022-02-19 09:58   좋아요 1 | URL
지금은 괜찮은데 저는 두통이 이렇게 힘든 건지 몰랐어요. 여튼 앞으로 건강하게 잘 늙고 싶은데 늙는다는 것 자체가 몸이 허약해지는 거라 심란합니다.
 
밀회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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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역시 윌리엄 트레버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산하고 아름답다. 사십대, 오십대, 십대의 주인공들의 내면의 풍경이 다른 시공간을 넘어 읽는 이들 누구에게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원형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쉽게 쓰여지지 않은 작품인만큼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휘리릭 넘길 수는 없는 이야기들이다.


오랜 결혼 생활을 하고 이제는 망자가 된 남편의 시신이 아직 집에 있는 상태에서 방문객을 맞은 아내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슬퍼하고 애도할 수 없는 나의 마음을 그 수녀들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남편이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소유한 집을 보고 선택한 전력을 내가 이미 잘 알고 있었다면. <고인 곁에 앉다>는 그런 이야기다. 사랑했던 남편과의 작별을 슬퍼하는 아내가 아니라 계산적이고 자주 욱했던 고인의 곁에 앉은 담담한 아내. 그 아내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게 되는 수녀자매. 


중년의 남녀가 일종의 소개 업체에서 만나 소개팅을 하는데 서로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런데 그 점을 차라리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각자가 원하는 것을 대담하게 고백할 수 있는 관계가 된다면. <저녁 외출>은 엉뚱한 발견의 즐거움이 있는 작품이다. 나는 꼭 차 있는 여자와 만나야 한다는 그 내밀하고 언뜻 저급해 보이는 욕망에 솔직해질 수 있는 여자와의 만남은 분명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구태여 애프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렇게 헤어져도 괜찮은 그런 만남에 대한 이야기.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난 남녀가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소통하게 되는 흩어지지 않는 시간에 대한 기록.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주며 주로 책에 관한 이야기만을 하며 맺게 되는 결혼한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있을까. 어떤 죄책감을 끝까지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하게 되는 작품이 <그라일리스의 유산>이다. 남자가 먼저 죽은 여자의 그녀의 유산을 거부함으로써 얻게 되는 윤리적 자긍심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로즈 울다>는 늙은 과외 선생에게서 수업을 받음으로써 의도치 않게 그 시간을 활용한 젊은 아내의 외도를 돕게 되는 소녀가 느끼는 비애에 대한 것이다. 그들의 외도를 스승과 제자는 알아차리고 그 패배감, 배신감, 비애를 공유한다. 소녀는 그 사연을 친구들과의 가십거리로 전락시킨 것에 대해 아픈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트레버는 소녀가 나이 든 남자의 무력함을 알아차리며 느끼게 되는 고통을 그녀의 성장통과 기민하게 연결시킨다. 둘의 눈이 마주치고 동시에 느끼게 되는 슬픔의 지점은 각기 달랐지만 그것이 향해가는 것은 인간이 타인과 영원히 평행선을 그릴 수밖에 없다는 그 거리감에 대한 통찰에서 만난다.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은  결국 기만당하고 현재는 언제나 과거를 좀먹는다. 그렇다고 거기 있었던 찬란했던 순간들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트레버식의 의미 부여는 언제나 감동을 준다. 우리가 원하거나 예상했던 대로 나아가지 않는 인생의 흐름이 무의미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은 이 거장이 언제나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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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21 16: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에서 저도 <로즈 울다> 여러번 읽고 또 읽으면서 그 순간 그 장면을 음미 했습니다 트레버의 문장은 단 한문장이라도 지나칠 수 없죠.^^

blanca 2021-12-21 21:55   좋아요 1 | URL
스캇님, 이미 읽으셨군요! <로즈 울다> 참 좋죠. 이런 건 트레버밖에 못 쓸듯...트레버는 소녀, 중년 여자의 심리 묘사에 가장 탁월한 남자 작가인 듯해요. 보통 뛰어난 작가라도 이성의 묘사는 단편적이거나 단순한데 트레버는 그런 면에서 정말 놀라운 작가 같아요.

나뭇잎처럼 2021-12-23 1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윌리엄 트레버 신간인가요? 저 진짜 윌리엄 트레버 좋아하는데. 넘 좋아서 낭독해서 읽기도 하고, 필사도 하고. 국내에 나온 건 다 읽고, 원서도 많이 찾아 읽었죠. 윌리엄 트레버 좋아하시는 분 만나니 넘 반가운데요? 파리 리뷰에 나왔던 윌리엄 트레버 인터뷰가 생각나네요. 그렇게 좋은데 우리나라엔 많이 안 알려진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왜 좋냐고 물으면... 음. 참 딱 말하기 어렵지만. 깨닫지 않고서는 저런 글을 쓸 수 없다, 는 정도로 대답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날씨가 아주 침착한 날, 다시 꺼내들어야겠어요. ^^

blanca 2021-12-23 11:10   좋아요 2 | URL
나뭇잎처럼님 반갑습니다. 저도 엄청난 팬입니다. 윌리엄 트레버는 대가죠. 어떤 사소한 이야기도 강력한 울림과 깊이를 지니고 있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작가 중의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펠리시아의 여정> 같은 작품은 정말 살떨릴 정도로 좋았어요. 서구 사회의 백인 나이든 남자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처절하고 아름답게 이름 없이 죽어간 소녀들의 이름을 찾아주는 하나의 애도를 이야기로 할 수 있을까 경이로울 정도였습니다. 신간 단편집인데 사실 번역이 늦은 거고 시기상으로는 이미 읽으셨을 가능성도 높겠습니다.
 
대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4
에밀 졸라 지음, 조성애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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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인간의 자유의지 신봉자였다. 어떤 상황이라도 고정 불변의 자아가 있고 선한 사람은 일관되게 선한 결정을, 악인은 모든 분야에서 나쁜 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인간은 절대로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대의에 앞장서지만 정작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는 상습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은 복잡다단하고 욕망에 취약하다. 어떤 상황은 사람을 망친다. 이 기본 전제를 알지 못하면 인간사를 읽을 수 없다.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배신은 그 사람이 변한 게 아니라 어떤 상황이 그 사람의 가장 이기적인 본성을 끌어낸 것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나도 당신도 모두 어떤 극한 상황에서는 정말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문학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진 작가로 나는 에밀 졸라를 꼽는다. 에밀 졸라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다. 극한을 뚫고 더 나아간다. 그는 이상주의를 비웃는다. 아름다운 정서적 교감, 인간에 대한 신뢰는 에밀 졸라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그가 구현하는 세계 속 인간 군상은 욕망 앞에서 나약하고 잔인하다. 돈 앞에서 부모를 죽이고 형제에게 낫을 휘두른다. 


펄벅의 <대지>와 같은 제목의 이야기는 그것과는 결과 차원 자체가 다르다. 에밀 졸라의 대지는 역설과 아이러니가 혼재되어 있다. 인간은 그것의 생명성과 위대함에 기꺼이 굴복하고 위안을 얻기도 하고 그것을 물화하여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한없이 휘둘리는 비극적 재화로 축소 치환해버리기도 한다. 130여 년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가 부동산에 대하여 가지는 모순적 욕망과도 겹치는 부분이다. 푸앙 가문의 땅에 대한 집요한 욕망을 둘러싼 갈등과 투쟁은 에밀 졸라만이 그려낼 수 있는 삶의 그 비루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처절한 애착과 얽혀 거대한 인간들의 욕망의 지형도로 완성된다. 


<대지>의 출발은 가볍고 상쾌하다. 우르두캥의 농장의 목수로 일하는 젊은이 장이 푸앙가의 소녀 프랑소아즈의 암소의 교미를 돕는 에로틱한 장면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이윽고 푸앙 영감의 재산 분배를 둘러싼 세 남매의 갈등의 장면으로 나아간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우리가 흔히 그리는 일상적 풍경과 다르다. 남매는 아버지와 자신들이 받아낼 유산을 분리하지 못한다. 부자, 부녀 관계는 철저히 돈에 의해 움직이는 역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그려진다. 노인은 짐짝처럼 자녀들 집을 옮겨다니며 이용당하고 버려진다. 둘도 없는 자매로 서로 허리를 감싸 안고 다녔던 자매 리즈와 프랑소아즈의 관계도 푸앙가의 탐욕스러운 뷔토를 가운데 두고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에밀 졸라는 그를 둘러싼 자매의 연적 관계를 소름 끼칠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린다. 가족 간의 사랑이나 신뢰는 마치 개나 줘버려, 하는 졸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녀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정신없이 타작 일과 그 소리에 빠져 더 힘차게 두들겼다. 바로 그때 저녁 외출 허가를 받고 방문한 장이 그들을 보았다. 그는 갑자기 질투를 느꼈고, 마치 불륜 현장을 적발한 사람처럼 그들을 바라보았다. 땀에 젖어 열기를 뿜으며 헝클어진 모습으로 제때에 제자리에 주거니 받거니 도리깨질을 하면서 그 뜨거운 일을 함께 하는 두 사람은 밀 타작을 한다기보다 차라리 아이를 만드는 중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pp.351


형부와 처제의 밀 타작 장면은 에밀 졸라만이 그려낼 수 있는 농염한 색깔로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으면서도 성적 긴장감이 극대화된다. 곳곳에 드러나는 각종 근친상간적인 장면들은 지금으로서도 파격적인데 19세기 당시의 반응은 어땠을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렵다. 


고전이 가지는 경직성과 구태의연함이 전혀 없는 작품이라 책장이 무섭도록 빠르게 넘어가는 책이다. <대지>를 보면 에밀졸라가 통속적 재미와 작품의 깊이를 함께 가져갈 수 있는 보기 드문 작가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푸앙 영감의 비극적 종말은 그가 하려던 이야기의 종결이 아니었다. 


흩날린 씨앗들이 파종꾼들의 손에서 벗어나 금빛으로 주변에 떠도는 것이 또렷이 보였다. 그러다 파종꾼들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면서 아예 보이지 않았다. 공중에 떠 있는 씨앗들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파종꾼들을 에워싼 모습이 멀리서 빛이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pp.633


지독한 어둠 속에서 빛을 끌어내는 작가라니...끔찍한 파멸 뒤에 떨리는 빛을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바로 <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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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와 맥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4
서머싯 몸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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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을 안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한평생 자기 자신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죽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그와 당신이 아는 그는 백팔십도 다를 수도 있다. 관대하고 정의로운 그가 때로는 무례하고 치졸한 인간의 면면을 다른 사람에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그 정도로 다채롭고 복합적이고 신비로운 존재다. 그 사람 어때? 라고 묻는 일은 호기롭고 이미 거짓과 가식을 예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 사람에 대해 제대로 얘기해 줄 수 없다. 오직 나에게 유난히 부각된 한 면만을,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몇몇의 장면만을 조각조각 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케이크와 맥주>에는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모두가 칭송하는 노작가 에드워드 드리필드의 전기를 쓰게 된 앨로이는 동료 작가인 나 어셴든에게 드리필드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달라고 한다. 그가 유명한 작가가 되기 전 첫번째 아내 로지와 블랙스터블에 살던 시절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숙부, 숙모와 사는 십대 소년이었고 우아한 것과는 거리가 먼 그 부부와 어울려 자전거를 배우고 카드놀이를 하며 그들과 어울린 시간들이 있었다. 그 우정은 기이하고 은밀한 나의 성장통의 일부였다. 그 부부는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블랙스터블을 도망치다시피 하듯 떠나고 나는 의대생이 되어 다시 그들과 재회한다. 그 재회는 드리필드의 어린 아내 로지와의 어셴든의 애정 행각으로 이어진다. 유명한 작가의 그럴듯한 부인이 되기엔 로지는 너무나 자유분방했다. 로지는 남편을 두고 뭇남자들과 어울리는 그녀를 질투하는 어셴든에게


기회가 있을 때 인생을 즐겨야지. 어차피 100년 후엔 우리 모두 죽을 텐데 뭐가 그리 심각해? 할 수 있을 때 우리 좋은 시간 보내자.

-pp.224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녀는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생을 즐긴다. 자신을 원하는 남자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것들을 기꺼이 준다. 누구는 그녀를 천박하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은빛이 나는 여자라고도 한다. 로지는 드리필드에게서도 도망친다. 그녀는 위대한 작가의 아내로 남는 대신 유부남과 다시 미국으로 도망가는 추문을 남긴다.  어셴든은 늙고 살찐 로지와 재회하게 되지만 그녀가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그녀가 남들이 얘기하는 저속하고 천박한 삶이 아니라 딸을 잃은 상처와 편견을 딛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제대로 살아낸 사람임을 깨닫는다. 


서머싯 몸이 <케이크와 맥주>를 통해 드리필드의 신화를 해체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이 드리필드가 연상하는 작가가 토마스 하디라고 추측했다. 불멸의 신화가 되어버린 작가가 사실 가장 좋아했던 일은 소박한 펍에서 노동자들과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이었다는 것, 자유분방한 어린 아내가 뭇남자들과 바람을 펴도 눈감아줬던 무능력한 남편이 아니라 어떤 상실을 치유하는 데 저마다의 방식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존중했다는 것은 그 작가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의 이해였다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케이크와 맥주>는 폄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환희로서의 가치, 현재 우리가 누리는 것들에 대한 그 찰나적 경탄 또한 인생의 한 측면임을 간과하지 말라는 이야기처럼 나에게는 들렸다. 이것은 도덕적인 교훈이나 훈계와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다. 


이제 곧 유명해지겠지만 또 헤어질 한 중년의 부부에게서 자전거를 배워 함께 날듯이 바람을 가르며 잊기 힘든 환희를 느꼈던 소년의 시간이 남는다. 어셴든에게 남은 드리필드의 이야기는 그러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가십이 될 수 없는 찬란한 추억이다. 그러한 이야기는 도저히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서머싯 몸이 결국 하고 싶었던 이야기처럼 들린다. 어셴든은 서머싯 몸 자체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케이크와 맥주>를 읽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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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22 19: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설마 드리필드가 토마스 하디 !

하디가 굉장한 성실한 작가로 알고 있었지만 아내로 인해 맘 고생은 많이 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하디의 생애를 모옴이 이렇게 작품으로 남겼던 이유는 ??


blanca 2021-09-22 19:46   좋아요 1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서머싯 모옴 작품은 좋아하는데 인간 자체로는 근처에 있었으면 참으로 싫었겠다 싶어요. ^^;;; 하디의 아이가 어렸을 때 죽은 일을 작품화해서 난리가 난 것도 다 있었던 일이라고 해서 놀랐어요. 이 작품 관련한 자세한 비화를 알고 싶어요. 작품만 놓고 볼 땐 저는 정말 너무 좋았어요. 흥미와 깊이를 다 갖춘 이야기더라고요. 그런데 서머싯 모옴뿐만 아니라 유독 토마스 하디 관련 에피소드가 많은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1-09-23 1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이 책 읽고 있습니다.

다만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책
과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스러
운 샘의 책이 나오는 바람에 그만...

모옴의 돌려까기가 진정 -

blanca 2021-09-24 10:01   좋아요 1 | URL
아, 반가워요. 재미있죠. 모옴이 좀 그래요^^;;
 
죽음의 한 연구 문지클래식 7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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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저기까지 아등바등 걸어가면 이 무거운 짐을 마침내 내려놓고 평지에서 유유자적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때가 있다. 친정 엄마는 나의 그런 믿음을 야멸차게 정정했다. 아니야, 사는 건 산 넘어 산이야. 나는 엄마의 비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엄마의 개별적 삶이고 그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비롯된 거라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죽는 일은 그래,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내가 행하는 느끼는 모든 일들이 그 주어를 잃어버리는 풍경을 가슴으로 받아들인 적은 없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박완서 작가의 얘기처럼 내심 나는 나의 불멸을 믿었던 모양이다. 죽음은 바깥의 풍경이고 모든 무의미는 덜 노력하는 자의 불평처럼 때로 느꼈던 적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기억에서 제외하고는 도저히 연상할 수 없는 시간 틀 안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거기에서 사라져 버리는 경험은 대단히 실제적인 것이다. 분명 나는 그 사람의 팔을 잡고 때로 안고 걸었는데 이제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우리의 두 발이 단단한 대지에 붙박힌 것처럼 때로 느꼈다. 그런데 이제 그 애는 없다. 죽음은 이렇게 서서히 하나씩 나의 삶에 실감을 끼워 놓으며 나를 옥죈다. 죽음 없는 삶은 없다. 예외란 없다. 그리고 죽음이 항존하는 삶은 그 모순과 불합리와 부조리를 극복해 낼 재간이 없다. 어차피 모든 건 사라진다. 그런데 애쓴다. 애닳아 한다. 


박상륭 소설가의 <죽음의 한 연구>는 소설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것은 표면적 형태일 뿐이다. 이 안에는 작가가 표방한 제목처럼 엄청난 사변이 녹아 있는 '죽음의 한 연구'가 한 도보 고행자의 행로를 통해 형상화되어 있다. 그것은 기독교, 불교, 무교, 민간신앙의 경계를 해체하여 거듭나고 있다. 그것은 "붙매이지 않고 자꾸 변절하고, 자꾸 받아들이고, 자꾸 떠나는 일밖엔 없다구"다. 광대하고 심원하다. 작가의 이야기는 작가의 세계관을 벗어날 수 없다. 그가 깨달은 삶과 죽음의 비의는 이야기의 틈새마다 비어져 나온다.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 인물들의 움직임 속에 형식과 틀의 비극에 유형당한 우리의 비극적인 생의 서사가 담겨 있다. 이 이야기를 읽는 일은 그래서 나와 나의 삶과 나의 종말을 듣고 보는 일이다.





은유의 향연

아버지를 알지 못한 채 고을의 창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주인공 승려는 아버지처럼 따르던 스승의 죽음 이후로 수도를 위해 유리라는 곳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수도부 여인과 살림을 차렸으나 이마저 그를 그곳에 매이진 못하게 하고 연이어 읍으로 향한다. 그는 그 과정에서 샘터의 존자와 염주 스님을 살해하고 스승을 압살한다. 그러나 그것을 자백하고 그것에 합당한 형을 받기 위해 떠나왔던 유리로 귀환하여 스스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과정의 이야기가 대략의 줄거리다. 그러나 그가 행한 살인은 실제의 그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은유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탐욕과 편견과 아집을 끊어내는 것은 결국 자기 안의 편협한 자아를 과감히 파괴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자신의 행위가 가상의 것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일이라 항변하는 장면은 묘하게 아이러니한 느낌을 풍긴다. 작가는 우리의 해석의 틀마저 해체하려는 기지를 발휘한 것 같다. 이야기는 몽환적이고 비약적이어서 결국 전체가 주인공의 내면에서 일어난 하나의 은유에 불과했을지 모른다는 암시를 준다. 개아의 틀을 해체하고 인습과 습속, 종교의 경계도 허물고 마침내 '나'라는 자아의 허상까지 부수고 나면 도달할 그곳에 죽음이 당도해 와 있다는 결말은 거대한 풍자처럼 느껴진다. 


죽음에 대한 철학

박상륭은 죽음 앞에서의 삶과 생의 무의미를 강변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 앞에서 삶을 폄하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쉬운 길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현상의 덧없음을 결국 살아내며 체험해야 한다는 고행길을 택한다. 한없이 흔들리고 절망하며 걸어가는 노정의 끝의 깨달음을 삶의 책무로 자인한다. 불교에서의 업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몇 번이고 다시 살아서라도 우리는 그 업을 숙명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풀어내야 한다. "필멸의 윤회"는 우리의 "영생의 희원"과 충돌하지만 생이 삶다로우려면 그것은 숙명의 과제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주인공의 죽음은 그래서 허무한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성취적 결말로 자리매김한다. 박상륭 특유의 아름답고 서늘한 문장들은 어떤 예감처럼 그가 받아들이는 죽음을 결정체처럼 형상화한다. 그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위안이자 안식이다. 그 안은 공허하거나 사변적이지 않다.


<죽음의 한 연구>가 그 입구는 음험하고 지난해 보여도 그 출구로 나아가는 길이 매끄럽게 확장되는 것은 작가의 죽음 그 자체에 대한 탐구와 형상화보다 그것을 품고 있는 삶 그 자체에 대한 무한한 긍정의 탄탄한 기반을 딛고 선 이야기라는 데에 있다. 이야기가 자칫 현학적이고 사변적으로 흘렀을지 모를 한계는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그 교감과 세상의 현상에 기꺼이 동참하는 그 기꺼운 역동성으로  극복된다. 죽음의 무게가 신분에 따라 달리 매겨지는 것, 종교적 허위를 입은 탐욕 등의 간파는 예리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문장들은 단 하나도 어긋나거나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다. 자연과 생과 죽음을 채집하는 어휘들은 살아서 꿈틀대는 것처럼 신비롭게 느껴진다. 전라도의 방언들이 가지는 리듬감은 사람들의 말을 하나의 집단적인 제의 속 구슬픈 노래처럼 들리게 한다. 모두 다 정확히 하나하나 알아듣지 못해도 괜찮게 느껴질 정도로 어떤 경계나 틀을 넘어 마음으로 건너가는 흐름의 강 속에 이야기가 펼쳐진다. 놀라운 체험이다. 실패해도 넘어져도 우리가 걸어간 그 길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한다. 심지어 그것이 쇠락으로 향한 것일지라도 그것의 의미는 나름으로 충만하다. 


마지막 노래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 나도 기꺼이 그의 목소리에 동참한다.

그래, 다시 그 세상에 태어났으면 싶다. 왕후며 장상 마님들의 태 속도 말고, 나를 낳았던 그저 그런 어미, 그런 어떤 옌네 태 속에서 다시 태어났으면 싶고, 그래서 저 바닷가 모래가 번쩍이는 곳에서 모래집이나 쌓으며, 조수가 밀리고 밀려가는 것을 그저 망연히 지켜보고 앉았으면이나 싶다. 저 무염무애의 그러나 비천한 머슴아이, 학대와 멸시 속으로도 스스럼없이 걸을 수 있었던 사내아이. 바다의 음기로만 굳어진 조개 알을 씹어 비린내를 풍기며, 갈매기의 울음에 얼을 빼앗기던 별로 오래도 흐르지 않은 옛적에 있었던 아이, 그 아이가 다시 되었으면 싶다.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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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7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27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21-06-05 15: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좋은 주말 되세요~

blanca 2021-06-05 18:43   좋아요 1 | URL
초딩님 덕분에 알았네요. 감사합니다.^^

초딩 2021-06-05 19:3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제가 알려드렸듯이 뿌듯합니다
:-) 3만원도 확인하세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