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박지연 씨의 어머니는 삼성에서 합의금을 받는 조건으로 산재 소송 포기 압력을 받았다고 한다. 치료비로 큰 빚을 진 그는 소송을 포기하지만 뒤늦게 후회했다고 한다. 아이의 죽음을 땅에 묻고 진실을 숨기려는 그들에게 이용당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겨레21 819호 참조>
인간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으니, 물건 취급 받아서는 안 되며,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존중받아야 한다.
-p.139
인간의 존엄에 관한 응시가 특별한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성취가 개인의 미덕을 실증하는 것 같은 환각에 너도나도 취해 살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중시하는 가치를 분배하는 기준에 대하여 묻는 것은 지극히 도발적이고 원론적인 문제로 회귀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존재하는 방식이 곧 그래야만 하는 방식으로 오도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숨이 막힐 때마다 나의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를 돌아보아야 함을 강요받고 있다.
하버드 대학의 극장식 강의실에서 천여 명의 학생들 앞에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 그도 사실은 이 사회에서는 혜택받은 소수에 해당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례적으로 이 책을 집어들게 된 것은 사실 정의가 무엇인가가 진심으로 궁금해서라기보다는 하버드 대학의 뜨르르한 강의를 나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하나의 허영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도 그랬다. 그리고 내용이 명성보다 빈약할 거라 지레 짐작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가는 길은 칸트식으로 말하면 전혀 주체적이지 않은 욕망에 반응하는 행위였다.
아리스토텔레스,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칸트, 존 롤스에 이르기까지 이름만 들어도 버석거리고 하품부터 나오는 인물들의 사상에서 정의에 관련된 핵심만을 추출하여 착착 들러붙게 설명해 주는 그의 입담은 명불허전이다. 고등학생 때 이런 책을 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다. 깊이 그 자체를 놓고 본다면 이론이 있을 테지만 이 책이 강의에 기반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만족스럽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체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질문을 던질 때 짚고 넘어가는 대목들에 대한 이정표다. 특히 개인의 절대적 자유와 정부의 윤리적 가치적 중립을 지지하는 현대 사회에서 공동체 안에서의 개인의 정체성과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열린 토론에 대한 주목은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흘려보낸 것들을 뒤늦게 챙겨 보려는 시도처럼 느껴진다. 요컨대 그는 정의에 대하여 고민하는 것을 좋은 삶에 대한 논의를 간과하고는 거의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역설한다. 이 책은 좋은 삶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하여 그것에서 끝마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리주의 그것의 허점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지향하는 공리주의의 약점은 알려진 바와 같다.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행복을 계량화했다는 점이다. 이 공리주의를 주창한 벤담의 죽음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교수가 강의 시간에 우스갯 소리를 해서 조는 학생들을 깨워주려는 시도처럼 마이클 센델의 얘기는 독자들을 유머로 오히려 바짝 조인다. 벤담은 자신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보존 전시하라고 유언했다. 그래서 현재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가면 그의 사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1980년 국제벤담학회 창설 모임에서는 이 방부 시신이 참석했다. 엽기적인 대목은 그의 두 발 사이에 놓여 있었던 진짜 머리를 학생들이 훔쳐 가 자신들의 요구 관철을 위해 이용했다는 점이다.
인간 간에 사고 팔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다음으로 등장하는 자유지상주의는 사실 오늘날까지도 진행중이다. 이는 최소국가론을 지지하고 자유시장을 떠받든다.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는 둘다 자유시장의 홍위병들로 이용된다. 여기에서는 주목해야 할 사례가 제시된다. 미국의 군대가 경제적 교육적 혜택을 받기 위한 하류층 젊은이들로 채워진다는 대목이다. 시장을 이용하여 군 복무를 할당하게 되면 정책 입안자들의 자녀가 연결될 확률은 극히 미미해지고 점점 전쟁을 더 쉽게 일으키고 인명살상을 더 하찮은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수의 시민과 그들 이름으로 싸우게 되는 군인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는 지점에서는 평화 대신 호전적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게 되는 경향이 있다. 예리한 지적이다. 자유로운 계약 관계에 의하여 돈이 오고 가는 관계가 그 자체로 정의로울 수는 없다는 방증 같다. 초입에 거론했던 삼성의 행태도 이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돈이 오고 가고 박씨의 죽음이 산업재해가 아닌 것으로 묻힌다는 가정은 그녀를 위시한 투병중인 나머지 직원들의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거대기업의 대우가 정의롭지 못하고 부당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칸트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란
자, 이제 우리는 주민들이 그가 산책나오는 모습을 보고 시계를 맞췄다는 그 유명한 에피소드를 가진 칸트로 돌아가 볼 차례다. 그의 인간 존엄에 대한 통찰은 가슴벅차다. 칸트가 인간이 그 자체로 숭고하고 존중받을 귀중한 존재임을 역설한 대목도 보편적 인권 개념의 태동을 알리는 장중한 서막이지만 그보다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을 재정의한 부분은 꼭 유념해서 들어 둘 필요가 있다. 그가 얘기한 자유로운 인간은 천성이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이다. 욕구에 반응하여 행동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내가 오늘부터 믹스커피를 끊기로 했다면 그것을 안마시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지 욕구에 반응하여 벌써 두 잔째를 들이키고 있다면 지극히 타율적인 인간이란 얘기다.(내얘기다) 동정심에서 나온 선행도 그의 눈으로 보면 불순하다.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수단으로서의 행동과 다른 인간에 대한 특별한 애착, 공감에서 나오는 행동들도 칸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것이다. 그는 특정하다,는 어휘를 경멸한다. 엄격한 도덕주의자가 지향하는 절대 보편의 세계는 불가능하고 이상적일 것 같으면서도 지극히 매혹적이다.
노력하면 다 된다고?
이제 존 롤스가 나온다. 평등한 출발선 그 자체마저도 불신하는 그는 재능있는 사람도 기실은 그것이 도덕적 우연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노력을 한다고? 그 노력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최선을 다했으니 그것을 받아도 온당하는 말은 그에게 넌센스다. 저자는 한 몫 더 거든다. 성공을 우리 노력의 결실로 여길수록 뒤처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은 줄어든다,는 그의 지적.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현사회에서 능력위주 시스템이 가지는 맹점에 대하여 직시하게 만드는 그의 지적은 결국 인간의 존엄 그 자체에 대한 응시로 귀환한다. 그러니 칸트와 롤스는 만난다.
자유로운 개인을 붙잡는 지점
이제 결국 마이클이 강의실에서 천 명을 불러모은 위력을 실감해야 하는 대단원이 오른다. 다 좋다. 개인의 자유를 지지하고 인간의 존엄을 응시하고 그런데 이게 과연 공동체의 선과 어떻게 연결된단 말인가? 상충하는 대목 아닌가? 공동체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어떻게 누리게 해 줄 생각인가 우리는 궁금해진다. 답변은 몽환적이기도 하고 낭만적이기도 하고 물렁거리기도 한다.
그는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는 존재로서의 우리가 서사의 탐색으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그 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먼저 답변해야 가능하다고 한다. 도덕적 고민은 내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내 삶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에 가깝다는 통찰은 역사 속 공통체의 일원으로서의 현재의 후손들이 과거의 잘못을 배상하고 사죄해야 하는 근거가 되어 준다. 연결된 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개인의 절대적 자유만을 주창하다 보면 우리는 왜 일본이 과거사에 대하여 우리에게 사과하고 배상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거를 찾아 낼 수가 없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이기 위하여 우리가 우리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통과의례다.
좋은 삶 그 막연하고 아리송한...그러나 의미있는...
우리가 존경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더 큰 삶의 일부로 이해하고 감당하는 기질이다.<중략> 인격을 갖춘다는 것은 여러 부담을 인식하며 사는 것이다.
-p.330
결국 마지막은 다시 처음과 맞물린다. 우리는 좋은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공론화해야 한다. 그 좋은 삶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더 큰 삶의 일부로서이다. 모호하고 두루뭉술한 결론일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은 다시 물음표를 찍으며 마친다. 수많은 질문들을 촉발하는 불온하고 혼란스러운 책으로서 이 책을 권할 수밖에 없다. 딛고 선 땅이 흔들리고 삶의 좌표가 요동치는 경험은 그 자체로 특별한 것일테니.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은 현재의 틀을 부수고 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의 점화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