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도록 매일 있었던 일들을 다이어리에 기록하려고 한다. 이것은 오 년 뒤, 십 년 뒤의 나를 위한 일이다. 미래의 나를 염두에 둔 과거 속에 현재를 밀어 넣는 행위다. 되도록 자기검열을 하지 않으려 하고 내가 어떤 일에 대하여 느낀 감정이나 감상보다는 실제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차원으로 만들려고 한다. 별것도 아닌 일에 전전긍긍했던 과거의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학습된 마음도 있다. 그보다는 현실들로 채우고 싶다. 기록하지 않으면 과거는 희미해지고 흩어진다. 


아버지 생신. 살아계셨으면 96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 오늘로 96세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96세가 될 수 있었지만, 고맙게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랬더라면 그의 인생이 내 인생을 완전히 끝장내 버렸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글도 쓰지 못했을 것이고, 책도 없었을 터,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다.

-<울프 일기>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는 서른세 살부터 자살하기 나흘 전까지 27년간이나 일기를 적었다고 한다. <울프 일기>는 이 방대한 일기 중 주로 울프가 작품을 쓰고 고치고 송고하고 그 반응을 기다리는 일에 관련한 것들 위주로 남편 레너드가 출간한 [A Writer's Diary]를 기본으로 한 것이다. 울프 자신이 자기검열을 최소화하겠다고 표방한 일기는 어떤 글이나 이보다는 잘 쓸 수 있다고 위트 있게 말한 그녀의 사전 경고가 아니어도 진솔하면서도 문학적으로 아름다워 시종일관 읽는 이를 설득시키고 끌어당기는 강력한 매력을 발산한다. 누군가의 일기에 이토록 흠뻑 빠져 마치 그녀와 함께 호흡하는 듯한 착각마저 느끼게 한 경우는 처음이다. 무엇보다 이 위대한 작가가 끊임없는 자기 의심과 자기 비하로 고생했었다는 건 놀라운 발견이다. 천하의 버지니아 울프가 스스로를 머리가 나쁘고 글도 못 쓰고 늙었다고 표현하다니. 


이처럼 세월은 흘러간다. 가끔 나는 자문해보다. 어린애가 은빛 공에 홀리듯, 나는 인생에 의해 최면에 걸린 것은 아닐까, 라고. 그리고 이것이 산다는것이냐,고. 이것은 매우 빠르고, 반짝거리고, 자극적이다. 그러나 어쩌면 천박할지도 모른다. 나는 인생이라는 공을 두 손에 들고, 그 둥글고, 매끄럽고, 무거운 감촉을 조용히 느끼면서, 그렇게 며칠이고 가지고 있고 싶다. 

-<울프 일기> 버지니아 울프


인생이라는 공에 홀린 우리. 그것을 손안에 들고 있고 그 반짝거림에 때로 아연해지는 나. 이렇게 세월은 흘러간다고 울프는 이야기한다. 그녀가 <댈러웨이 부인>, <올랜도>, <파도>,<세월> 등을 얼마나 처절한 자기 의심과 싸워가며 아이를 낳듯 산고를 겪으며 세상에 내어놓고 그것의 반응을 전전긍긍하며 기다렸는지를 읽는 일은 그녀가 확신하지 못하는 미래를 이미 알아버린 입장에서 묘한 감흥을 준다. 그녀는 자신이 이토록 위대한 작가로 남게 될 것이라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때로는 독자가 없을 거라 반응이 없을 거라 미리 걱정하고 절망하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는 자기 의심, 삶에 대한 절망을 그녀도 고스란히 똑같이 통과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들을 읽는 일은 산다는 일은 이런 거구나, 같은 묘한 동질감을 자아낸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울프의 묘사력으로 소설의 장면처럼 생생하게 살아나는 건 덤이다. 캐서린 맨드필드가 울프의 집에 와서 비웃으면서 읽기 시작한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다 갑자기 놀라서 "영문학사에 남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광경이" 연출되는 장면. 버지니아 울프집에 와서 조이스의 원고를 읽고 놀라는 캐서린 맨드필드.


버지니아 울프가 죽음을 선택하게 될 징조는 일기에 보이지 않는다. 아니 인생 전반에 걸쳐 그녀가 갑자기 어떤 절망감을 표현하는 대목들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그녀는 삶과 생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느낀 사람으로 보인다. "나는 깃발을 휘날리면서 쓰러지고 싶다."는 표현이 그것에 대한 암시일까. 죽은 뒤에 영국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까? 반문했던 그녀는 역사가 되었다. 일기장 속의 울프에게 들어가 더 이상 괴로워하거나 의심하지 말라고 당신은 그 자체로 위대하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누군가 지금 나의 삶이 이대로 충분히 괜찮다고 잘살고 있다고 얘기해주면 좋을 텐데, 같은 개인적 소망과 함께.


나도 일기를 계속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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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6-08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의 죽음 가지고 뭐라고하면 안되겠지만, 울프는 왜
노년에 자살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오랜 우울증으로 그렇게 됐겠지만…

울프의 일기는 잘 읽히지 모르겠어요. 카프카의 일기는 난해했는데 말이죠.
일기를 쓰시는군요.
저는 매번 써야지 하곤 드문드문 쓰고 있습니다.ㅠ

blanca 2022-06-08 16:06   좋아요 2 | URL
저도 지루할 것 같아서 기대도 안 했는데 예상 외로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천하의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는 생각이 우리 평범한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또 놀랐고요. 사후 이런 존재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더라고요. 자살은, 결국 조울증 발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걸로 추정하다고 합니다.

persona 2022-06-08 1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울프에게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를 추천하고 싶어지네요. 근데 저도 3개월 지나니 모닝페이지 아예 안 쓴다는 ;;

blanca 2022-06-08 16:07   좋아요 2 | URL
삼 일 전까지 행복을 이야기한 사람이 갑자기 죽음을 택하는 게 참 아이러니하죠. 저는 요새 글씨를 쓰는 게 너무 귀찮아졌어요. 그래도 일기만큼은 손글씨를 고집하는데 게을러져 큰일입니다.

기억의집 2022-06-09 1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맙게도 아버지가돌아가셨다는 글에 충격이…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았군요. 저는 울프의 작품을 지루하게 읽었는데… 문득 아주 문득 그녀의 짧은 문장이 생각나곤 해요. 제가 이해했던 그 범위안에서…. 예전에 자살하고 싶었다던 지인의 말을 들어보면, 아주 한순간에 자살 충동이 일어난다고.. 그래서 아파트 베란다 창밖 아래를 보면 시멘트로 안 보이고 푹신한 풀밭으로 보여 뛰어내릴까하는 충동이 일어난다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나요….

blanca 2022-06-09 21:48   좋아요 1 | URL
아버지가 보수적이고 강압적이었던 모양이에요. 당시 딸이 글을 쓴다는 걸 응원하거나 지원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죽음에 대한 충동은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북깨비 2022-06-10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종영된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넷플릭스로 시청하고 큰 위로를 받아서 아 나도 일기나 다시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는데 blanca님 리뷰 읽고 나니 막 의욕이 샘솟습니다. ˝미래의 나를 염두에 둔 과거 속에 현재를 밀어 넣는 행위˝라고 하신 표현이 인상 깊었어요. 솔출판사에서 나온 버지니아 울프 전집이 예뻐서 저도 천천히 한권씩 사모으고 있는데 다음은 이 일기를 사야겠어요.

blanca 2022-06-10 20:22   좋아요 1 | URL
저는 ‘나의 해방일지‘는 아직 못봤지만 많은 사람들이 칭찬한 드라마라 관심 있었어요. 일기는...정말이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뒤돌아 보면 나의 과거가 아니라 타인의 기록처럼 느껴질 정도로 낯설게 보이더라고요. 그만큼 쓰지 않은 시간은 그냥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북깨비님도 한번 시도해 보세요. 전집 참 예쁘고 맘에 들어요.
 

나이가 들며 과거의 삶과 추억이 이따금 객관화되는 지점을 발견한다.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마치 타인이 지켜보듯 연상해 내게 되는 경험은 뜻밖으로 나쁘지 않다. 그때는 그렇게나 이해할 수 없었던 주변의 어른들의 시간을 통과하며 내 속의 어린 나는 다시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재해석하게 된다. 그 해석은 특별하거나 나 중심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보편에 가깝게 다른 사람들과 닮아간다. 나는 특별하지 않았고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고 특별하지 않은 종결을 맺게 되기를 바란다. 지구는 절대로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한 사실과 화해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나를 잃는 그 최종적 과정에 덜 두려워하며 다가갈 수 있다. 어쩌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나'와 점진적으로 잘 헤어질 수 있는 순간이 차곡차곡 쌓이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아니 에르노의 인터뷰를 읽으며 그녀의 그 적나라했던 사적 고백들이 가지는 공적 의미를 깨닫게 됐다. 그녀의 이야기들은 과감하게 솔직했다. 소녀 시절의 불법낙태 경험, 유부남과의 밀회, 노동자 계급 부모에 대한 양가 감정. 그러나 그녀 자신도 자신의 이야기들이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란 데에서 자신이 점유했거나 점유한 장소에서 경험한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공적 공간에 내어 놓았다. 우리의 고백들이 의미 있는 글이 되기 위해서는 아니 에르노에게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경험을 과장하지 않기, 과하게 미화하거나 변명하거나 각색하지 않기, 그것을 통과하고 남은 현재의 자신을 긍정하기.


이 책은 아니 에르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인 이브토와 루앙 그리고 인터뷰 당시 거주지 세르지아에서 다큐멘터리 감독 미셀 포르트와 '장소'를 중심으로 그녀의 인생과 글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이다. 


저는 제가 겪었던 일을 다른 사람들 역시 겪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요. 독서를 통해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문학에서 저를 위한 무언가를 찾아냈으니까요. 프루스트에게서. 조르주 페렉에게서. 우리 스스로에게 무의식이 <<나도 그래>>라고 말하게 하는 것들이요. 그러면 자신 안에 빛이 생기죠. 그것이 프루스트가 말하는 <<빛을 얻은 삶>>이고요.

-아니 에르노 <진정한 장소>


"나도 그래"를 통해 빛을 얻는 삶이 바로 문학을 통한 준구원의 과정인 읽기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누군가의 특수한 경험에서 보편적 공감의 지대를 찾아내는 일은 채굴 같은 환희를 느끼게 한다. 그것은 그녀가 말미에 인용한 프루스트의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단념할 때만 그것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말을 통한 "나도 그래"의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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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5-27 14:4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는 이제 그만 읽어도 될 것 같다고 나름 생각했었는데 인터뷰라니, 이건 또 읽어야할 것 같아요.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 블랑카 님의 글도 참 좋네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저는 사실 후회를 많이 하는 편이긴 합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가 합니다. 게다가 아니 에르노가 말했듯이, 제가 겪었던 일들을 다른 이들도 겪었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이 겪었던 것들을 제가 겪었을 거라는 것도 지금은 알고 있어요. 저는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보통의 사람이니까요.

blanca 2022-05-27 20:04   좋아요 2 | URL
아니 에르노 저도 솔직히 읽은 글과 안 읽은 글이 헷갈릴 정도고 좀 겹치는 부분들이 있어서 이 책도 이미 읽은 게 아닌가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다른 결이더라고요. 좋았어요. 그리고 그 적나라한 고백들이 가지는 의미를 비로소 찾을 수 있어서 의미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날이 갈수록 자꾸 나에 대한 내 자신의 생각이 바뀌어요. 그런데 그게 참 재미있어요. 똑같은 과거인데 자꾸 다른 측면이 보이고...이게 나이듦의 미학인지 단점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persona 2022-05-27 14: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직 가진 추억 닳고 닳도록 꺼내보고 거기에 색칠놀이 덧칠놀이 하는 거 좋아하긴 하지만 이 리뷰를 보니까 읽고 싶어졌어요. ㅎㅎㅎ

blanca 2022-05-27 20:04   좋아요 2 | URL
오, Persona님 댓글이 마치 시 같네요. 색칠놀이, 덧칠놀이...

han22598 2022-05-31 15: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군가의 특수한 경험에서 보편적 공감의 지대를 찾아내는 일은 채굴 같은 환희를 느끼게 한다.˝ 아...이 말 너무 좋네요. 그 경계선으로 넘어 온것 같아요...나의 삶에서 일어난 경험들은 오로지 나의 것으로만 존재할 거라고 여기며 살아왔던 것 같은데....다시 생각해보니, 아니 둘러보니. 수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아지고 있는 시점으로요...

blanca 2022-06-01 09: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요새 제가 부쩍 드는 생각이라서요. 예전에는 타인들과 교감하는 영역이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좀 생각이 달라졌어요. 다른 사람들과의 무수한 교집합에서 어긋나는 일부의 조각들로 나를 정의할 것도 아니다 싶기도 하고요.
 

결정적으로 피아노를 그만두게 된 계기는 바흐 때문이다. 체르니 50번에 들어가며 바하 인벤션을 치게 됐고 내가 대충 뭉개버리던 왼손이 오른손과 동등한 선율을 구사해야 하는 그 엄격함의 요구 앞에서 나의 빈한한 실력은 들통나고 말았다. 아무리 연습해도 왼손 성부가 제대로 안 됐다. 나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억지로 허덕이며 거기까지 끌고 가려던 엄마가 드디어 져줬다. 나는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었다. 드디어 인정해야 할 순간이 왔다. 


그러나 굴드처럼 바흐를 연주하려면 언제나 모든 음을 완벽하게 쳐야 했다. 케빈 버재너가 말했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무자비하게 드러나는" 음악인 것이다. "바흐에서는 어떤 것도 피하거나 꾸며낼 수 없다."

-케이티 해프너 <굴드의 피아노>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다. 나는 바흐 앞에서 도저히 더는 꾸며낼 수 없었다. 그 앞에서는 백주 대낮에 숨기려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꾸미거나 눙치던 것들을 어쩔 수 없이 고백해야 했다. 모든 음을 완벽하게 치지 않으면 반드시 그 불협화음이 드러났다. 무자비하게. 
















굴드의 바흐를 들으면 그래서 전율한다. 그의 왼손은 오른손과 동등하거나 더 현란하고 정확하게 바흐의 명령을 수행한다. 오른손잡이들은 왼손이 오른손의 부수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왼손의 선율은 오른손의 보조 역할을 하도록 하는 대부분의 악보에 충실히 복무한다. 이것을 전복시킨 바흐의 음악 앞에서 약한 왼손은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한다. 대부분이 그렇다. 왼손이 오른손을 지시하고 따르라 할 때 그건 그 행위를 위장하거나 덮어버리려는 욕망과 싸우게 된다.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다. 내가 피아노를 결국 그만두게 된 지점에서의 악몽이 이 책을 읽으며 되살아났지만 동시에 그건 깨끗한 포기이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되는 걸 억지로 밀고 나갔다면...나는 충분히 불행했을 것이다. 평범한 내가 그 지점을 돌파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저자 케이티 해프너의 굴드에 대한 이야기는 여느 평전과는 다른 독특한 차별점을 내세운다. 그것은 굴드 자체가 중심이 아니라 굴드가 마치 연인처럼 사랑하고 데리고 다녔던 스타인웨이 CD 318을 통과하는 서사들이다. 그것을 발견하기까지 그리고 그것과 사랑에 빠질 때까지 마침내 파괴된 그것을 단념하기까지의 여정은 굴드의 피아니스트로서의 과업과 삶의 조수간만의 리듬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자신의 바흐를 온전히 호흡하고 받아내 주었던 이 물건의 일대기와 그 자신의 그것을 거의 동일시했다. 한창 전성기 때 스타인웨이 318로 작업했던 레코딩을 오십을 목전에 두고 다시 시도했다는 건 그 자신의 삶의 코다를 향한 흐름과 정확히 일치하는 어떤 전조를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은 실제 그것을 유언처럼 남기고 뒤따른다. 


물론 비단 318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것을 조율하며 굴드와 연주회, 레코딩에 동행했던 충직한 조율사들, 테그니션들, 심지어 그의 숨겨진 연인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 기이한 강박증을 가진 기인 피아니스트의 바흐 절창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저자의 충실한 자료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눈앞에서 보이는 듯 복원된다. 어딘가에 떨어져 망가져 버린 318을 복원하기 위하여 여름 더위에 외투를 입고 뒷자석에는 피아노의 거대한 부품을 싣고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을 넘는 굴드의 여정의 묘사는 그가 얼마나 이 음악에 이 피아노에 진심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풍경이다. 어떤 절망 앞에서 지지 않는 희망과 이상을 가지고 순간순간에 모든 것을 던졌던 이 예술가의 처절한 삶은 그의 완벽하리만치 엄격한 바흐의 연주 앞에서 일종의 신기를 보여준다. 그의 바흐를 듣는 일은 이미 죽어 이 세상에 없는 그의 영을 불러내는 일처럼 신비롭고 감동적인 시간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앨범이 발매되고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굴드는 죽었다. 318은 비로소 제대로 복원되었고 많은 그의 후배들이 그것을 연주한다. 생전에는 망가진 상태로 이별했던 그것이 그의 사후 부활했다는 대목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는 죽음으로써 그의 연주를 불멸로 만들어버렸다. 우리는 여전히 굴드의 바흐를 듣고 그가 그렇게나 싫어했던 연주회에서 직접 듣는 것 못지 않게 생생하게 그의 영혼과 예술적인 완성도를 향해 가는 노력과 열정을 느끼며 감동한다. 어쩌면 우리의 생과 필멸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것이 여전히 끈질기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그의 연주를 들으며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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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6-20 23: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바흐 때문에 피아노를 포기 하셨군요
제 친구들은 쇼팽에서 넘어졌고
러시아 작품으로 넘어가면서
울면서 그만둔 ㅎㅎㅎ

전 피아노 의자 앞에서 몇시간 씩 두드리는 걸 참지 못하지만
바흐 만큼은 좋아해서
한 번 꽂힌 작품 일년 내내 반복 연주 할 수 있습니다(주변인들은 싫어함 ㅎㅎㅎ)

굴드가 연주하는 베토벤도 참 좋아요 ^ㅅ^

blanca 2022-06-22 13:58   좋아요 2 | URL
왼손을 오른손처럼 쓸 수 없어서 포기요. 하지만 여전히 애증의 음악가이고 제일 좋아하는 작곡가입니다. 오, 스캇님 여전히 피아노 치시는군요!
 

오랜만에 교보문고에 갔다. 교보문고의 입구 한 켠에는 고전문학들로 채워져 있는데 그 서가에서 한적하게 책 읽기가 좋은데 보면 언제나 놀랄 만큼 어린 사람들이 아예 <죄와 벌> 같은 것을 들고 앉아서 읽고 있다. 놀라운 풍경이다. 아무리 영상이 종이책을 잠식하고 있는 시대라지만 좋은 종이책은 여전히 수요가 있다는 방증 같은 풍경이다. 다만 그래서 나는 마음껏 책을 구경하고 싶은데 항상 그러지 못한다. 잠깐 책을 들춰보는 사람들은 신간 코너에 몰려 있지 이런 곳에 있지 않다.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예 다 읽고 갈 태세로 팔을 책장 위에 얹고 있거나 앉아 있다. 
















간신히 확보한 공간이 버지니아 울프 책들이 꽂힌 곳. 죽기 사흘 전까지의 일기라는데 죽음이나 삶에 대한 절망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치열하게 쓰고 읽은 흔적들...묘한 울렁임이 느껴졌다. 삶이란 그런 것일까? 오늘까지 나에게 절절하고 치열하게 다가오다 내일은 뚝 끊기기도 하는...일기를 들춰보다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반, 분량에 대한 부담 반으로 일단 나중을 기약하고 평대에서 눈에 띈 책.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 보르헤스가 천착한 주제는 언제나 죽음, 운명, 그것의 변주, 자아, 존재의 미소함이다. 짧은 글들과 시들이 어쩌면 하나 같이 웅장한 바로크 음악 같은지 문장 하나에 멈추고 문장 두 개에 플래그를 붙이고...내가 지금 여기서 괴로워하는 문제들이 다 사소하게 보인다. 그리고 정말 신기한 우연은. 어젯밤 둥근 달이 갑자기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놀라서 내다 보는데 내가 하필 펼친 대목은. 보르헤스의 시 <달>이었다. 보르헤스는 알았을까? 60년 뒤에 누군가가 지구의 반대 끝에서 자신의 시를 읽으며 달을 바라볼 미래를? 이 "우발적이고 덧없는 존재들" 사이에 살아남을 말들을...


한 사람이 세계를 그릴 작정을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지방, 왕국, 산, 만, 배, 섬, 물고기, 방, 도구, 천체, 말, 사람의 이미지들로 빈 공간을 채운다. 그러나 죽기 직전에 발견한다. 인내심으로 그린 그 선들의 미로가 자신의 얼굴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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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보르스카의 <박물관>이라는 시는 유물이 존재에 대하여 가지는 의미와 무게를 노래한다. 박물관의 유물 앞에서 쉼보르스카가 얘기하고자 했던 바를 절감한다. 이건 역설이었다. 우리를 앞서고 우리를 떠나 남고야 말 그 유물들의 힘 안에는 존재의 유한성을 뛰어넘고 세대를 아우르는 영혼의 승계가 있었다. 삶의 종결이 우리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필멸자인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의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언.




왕관이 머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어요.
손은 장갑에게 굴복하고 말았어요.
오른쪽 구두는 발과 싸워 승리했어요. 

-쉼보르스카 <박물관> 중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다. 어렸을 때에는 지루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만 했던 유물들 앞에서 전혀 다른 감정이 휘몰아쳐 놀랐다. 심지어 구석기의 돌도끼들, 신라의 봉분에서 출토된 각종 금관들마저 그것을 썼던 이미 사라져간 그들의 숨결이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듯한 착각 속에 서성거리게 됐다. 머나먼 과거와 연결된 현재에서 그 유물을 매개로 조우하는 듯한 각별한 공감지대에서 나는 그저 나이든 게 아니라 성장했다는 실감이 왔다. 모든 것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이 파괴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큐레이터인 정명희의 유물에 대한 이야기들은 두고두고 남는다. 비단 유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삶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 심화시키는 그녀의 능력은 탁월하다. 두고두고 인상적인 유물을 보고 온 마음처럼 그녀의 문장들을 곱씹게 된다. 박물관에서 흔히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유물들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봐야 할지 친절하고 세심한 가이드 역할은 덤이다. 700년 전의 고려 여인의 서원이 깨달음으로 인한 윤회의 종결과 더불어 그래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중국의 남자로 태어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는 대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멈춰서게 된다. 부귀영화가 아닌 삶의 독립을 위한 남자로서의 재탄생을 꿈꿨던 그녀의 고단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상상해 본다. 거기에서 오늘은 얼마나 많이 온 것인지 아니 앞으로 나아가긴 한 것인지 가만히 되짚어 보게 된다. 발원문에 두 살 아이의 장수의 꿈을 곱게 적은 부모의 마음도 상상해 본다. 그저 아이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만을 바랐던 소망이 큰 꿈이었던 시대와 자본주의의 승자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교육열로 포장되는 현시대의 간극을 가늠해본다. 내가 사는 지금으로부터 700년이 지나고 나서 후세인들이 우리의 소망을 어떻게 바라볼지 차마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그들이 보기에 천박하거나 사소하지 않기를 기원할 뿐이다. 


현재에 발을 담그고 그렇게 과거의 것들을 바라보며 미래를 떠올려 본다. 



현재에 머문다는 게 쉽지 않았다. 있어야 할 곳, 해야 할 것에 맞추다 일과 삶을 혼동했다. 익숙한 것을 소흘히 대하고 사라진 후에야 그리워했다. 내가 없는 것은 잡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정명희 <멈춰서서 가만히>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가  삶의 은유로 읽힌다. 사라진 후에야 그리워하지 않기를 바라며 현재에 머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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