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좋은 책들이 많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강렬한 기억을 남긴 책 몇 권만 추려 본다. 


-에세이



사적인 글이 범람하는 시대다. 구태여 책을 읽지 않아도 SNS 검색만으로 충분히 독서를 했다는 환각을 줄 정도다. 그러나 내 개인적 경험이 독자에게 가 닿아 의미를 가지려면 다른 차원의 심화와 확장이 필요하다. 내 욕망, 내 회한, 내 해석, 내 주장이 부수어야 하는 경계가 있다. 대부분은 나를 포함해서 거기에 머무른다. 디디에 에리봉이 출발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그는 읽는 자들이 듣는 자들이 기대하는 최적화의 그 지점에서 과감히 탈주한다. 자신이 떠나온 가족이 가지는 의미, 마침내 탈출했다고 여긴 계급이 끝내 남긴 잔상과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회귀하는 부끄러운 지점에 대한 고백은 내가 말하고 싶었으나 끝내 말하여지지 못한 부분들을 마침내 환기한다. 


그와 다른 나라, 다른 시대를 통과해 성장했지만 내가 버리고 온 나를 불러오는 작가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가 끝까지 내려가고 끝까지 파고들어 쓴 자신의 그것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고백 때문일까. 보편성에서 개별성을 환기하는 필력이 놀랍다. 





-교육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아니어도 그냥 여기에서 내가 어쩔 수 없는 삶의 난제들에 고통당하는 모든 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나를 덮쳐오는 사건들, 관계에서의 고통, 모든 통제권을 상실한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면 이 책이 큰 위안이자 지침이 될 것이다. 내가 삶 앞에서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하는 것인지, 내가 사랑하지만 내가 끔찍해 하는 어떤 면을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그를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하는지 깨어서 인생을 사는 태도를 갖추는 데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읽기가 될 것이다. 특히 십대 사춘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아이를 키우기 전에 읽어도 좋을 것 같다. 부모가 된다는 건 내가 해결하지 못하고 성장한 나의 취약점을 고스란히 대면해야 하는 순간과도 같으니까.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정수는 사실 마지막 권에 있다. 마르셀이 '되찾은 시간'의 의미는 결국 그가 잃어버린 시간으로 통한다. 우리는 시간의 궤적이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사랑하고 성취하고 이별하고 아프고 죽고 사라진다. 이 궤적이 모여 삶의 서사를 이룬다.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삶과 죽음을 성찰하는 일이기도 하다. 마르셀이 말했던 오전에 라떼를 앞에 두고 한없이 뻗어나갈 것만 같은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은 결국 스러지고 사라진다. 단 사물에 내재한 그 실재만은 둔 채로. 시간을 언어로 경험하는 신비로운 경험과 다름 아니다. 끝내 붙잡을 듯 붙잡히지 않는 그 수많은 아름다움에 대한 처절한 구도의 길에서 프루스트가 죽기 직전까지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의 조각들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철학



아무 데도 데려가지 않는 삶의 여정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천착. 이 젊은 두 철학자는 삶의 부조리

와 불합리에 구태여 대응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며 결국 죽어가는 그 여정에 동참할 뿐이다. 삶의 덧없음을 상기하면서도 그것이 무의미에 굴복하지 않는 방법이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빛난다" 어떻게? 찬찬히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미약한 빛이 새어 들어온다. 2022년의 마지막에 맞춤하게 만난 책으로 마무리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철학과 실생활을 접목시키려 시도한 여러 과제들도 해볼만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는 일을 나누는 부분 같은 것들. 가독성과 깊이를 모두 갖춘 철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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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12-28 14: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랑카 님은 올해 정리도 정말 기막히게 근사하게 하시네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제 저도 읽을 때가 된걸까요.

블랑카 님, 올 한 해 마무리 잘하시고요, 우리 내년에도 즐겁게 보내도록 합시다!

blanca 2022-12-28 18:02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우리 건강하게 오래오래 교류합시다. 삼십 년 뒤에도 오케이?

라로 2022-12-28 1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바타 보셨어요?? 저 방금 가족들과 보고 왔는데 먼저 본 사람들이 울었다고 해서 나는 안 울 줄 알았는데 저도 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눈물이 흐르더라구요. 아이들과 함께 보시길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난 안 읽을거야 했는데 블랑카님 때문에 읽고 싶어져요.^^;;

blanca 2022-12-28 18:04   좋아요 0 | URL
라로님, 저 둘째랑 아빠랑만 보냈어요. 제 취향 아니라고 안 봤는데 후회되네요. 솔직히 ‘잃시찾‘ 재미는...그런데 울컥울컥해요. 내가 나이, 시간에 대해 느끼는 걸 콕 집어서 다 표현해 놓았더라고요. 읽으며 감탄했어요. 그리고 프루스트가 죽기 직전까지 이거 다 못 쓰고 죽을까 얼마나 노심초사인지 느껴졌어요. 예술이란 그런 건가봐요.

새파랑 2022-12-28 1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잃어버린시간을찾아서> 정수는 되찾은 시간이군요 ㅋ 딱 되찾은 시간만 남겨놨는데 기대가 됩니다~!!

blanca 2022-12-28 18:05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부럽습니다. 여기까지 오셨다면 이 마지막 권은 완전 술술 넘어가고 줄 긋다 책이 찢어질 수도 있습니다. 아껴두었다 마들렌 한 조각, 홍차에 적셔 드시면서 천천히 읽으시기를...

하이드 2022-12-28 1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들은 이런 책들도 좋아하고, 저런 책들도 좋아하고, 참 많은 책들을 읽었는데, 올해의 책들로 꼽은 것들을 보면, 아, 이런 책들이 가장 좋아하는구나. 알게 되는 시간이에요. ㅎㅎ 좋았던 책들과 올해의 책들로 꼽는 것의 차이. 왜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꼽고 싶은지 이유들에서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을 것 같구요.

blanca 2022-12-28 18:06   좋아요 0 | URL
정말 좋았던 책들 많았지만 하이드님이 딱 적어주신 그 이유로 이 책들을 꼽았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아셨군요! 역시 서재 친구들은 다릅니다.

책읽는나무 2022-12-28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잃시찾의 리뷰는 정말 책을 읽고 싶게 만드십니다. 저는 이제 1 권만 읽었는데 만연체에 적응하여 13 권까지 읽을 수 있을 것인가? 싶던데, 블랑카님의 완독 소식은 불가능이 가능으로 기대하게 만들었죠.
이젠 리뷰마저 황홀하구요^^
일단 철학서를 담아갑니다.
며칠 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blanca 2022-12-29 08:19   좋아요 1 | URL
천천히 생각날 때마다 읽으시면 어느덧 완독에 가까워 있을 겁니다. 마지막 권을 꼭 읽으셔야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해 구현하고 싶었던 것들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더라고요. 그러니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저는 그냥 출간 순서 대로 따라 읽어서 사실 전체 얘기가 잘 연결은 안 돼요. 한번에 다 읽으려 했으면 포기했을 것도 같아요. 책읽는나무님도 2023년도 소망하신 모든 것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stella.K 2022-12-31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꼭 1권부터 읽어야 할까요?
브랑카님의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ㅋ

올해도 수고 많이하셨어요.
새해 복 많이 받아요.^^

blanca 2022-12-31 18:06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이게 계속 앞 전 내용들이 언급돼서 차례대로 읽어야 이해가 되는 대목들이 있어요. 저도 계속 잊어버리기는 했지만 결국 독립된 이야기가 아니라서요. 스텔라님도 2023년도 건강하시고 소망하시는 모든 일들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평온한 일상은 영원하지 않다. 단단하지 않다. 언제나 허물어질 수 있다. 팔자가 사나워서도 내가 특별해서도 아니다. 그건 내가 보편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는 퇴락하고 소멸한다. 그 유한성에 도전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빛나는 아이돌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독재자도 언젠가 반드시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예외는 없다.


그러나 이 생각을 맨날 하며 살 수는 없다. 대부분 대체로 잊고 산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무언가 잠입한다.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 이 바보야,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어, 너조차. 그런데 고작 그런 걸로 고민하다니, 그러면서. 





















"카버가 카버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던 11편의 단편은 하나하나가 어둠 속의 날카로운 섬광처럼 나를 찌른다. 이런 게 삶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계속 살 거야? 라고 내 어깨를 쥐고 흔든다. 


표제작인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은 유독 그렇다. 어느 날 새벽에 잘못 걸려온 전화 한 통. 그게 사건을 일으키는 건 아니다. 중년의 재혼한 부부는 그 전화에 잠이 확 깨어 뜬금없이 생의 유한성에 대해 그리고 내가 비참하게 죽을 확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때 스위치를 끌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그 고통스럽고 모두가 최후까지 유예하고 싶어하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공개 토론을 마침내 벌인다. 침대 위에서. 부인은 생의 존엄만큼 죽음도 그러하기를 바라며 옆의 남편이 기꺼이 생명유지장치의 스위치를 꺼 주기를 바라지만 남편은 다르다. 끝까지 그걸 유지해 달라고 기꺼이 비참해져도 좋으니 생의 끝까지 그 유지장치를 유지해주기를 바란다. 이 서로 다른 의견은 그러나 종국에는 같다. 


우리는 우리만큼은 끝까지 괜찮기를 바란다. 어떤 일이 닥쳐도 그렇게 금방 그런 고통스럽고 비참한 선택의 순간에 당도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건 어리석은 바람이다. 카버는 잔인하지만 그걸 끝까지 말고 나가는 작가다. 어이, 친구, 너라고 예외일 것 같아? 가슴이 서늘해진다. 숨을 잠깐 멈춘다. 정말 하기 싫은 대답을 요하는 질문. 나는 끝내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다. 비겁하니까. 나는 진심으로 죽음이 두렵다. 그것에 관한 무언가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죽을 만큼 두렵다. 그래서 카버에게 대답할 수 없다. 나도 몰라, 생각하기 싫어.


"동생에게 그 돈을 주는 게 실수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로 시작하는 <코끼리>는 이렇게 동양적 정서를 지닐 수 있을까 싶었다. 분명 그 개인주의 최선봉인 미국 작가인데 신기하게도 농경사회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그 가족 전체의 끈끈하고 도저히 분리하기 힘든 경제적 의존, 공생, 기생 관계에 대한 그 복잡한 결을 하나하나 드러내는데 정말 낯선 풍경이 아니다. 끊임없이 돈을 빌려 달라 하고 갚지 않는 실패한 동생, 나의 죄책감에 호소하며 정기적으로 용돈을 받아가는 어머니, 심지어 다 큰 성인 자식들까지 학업을 핑계로 혹은 무능한 남편을 내세워 이 성실한 육체 노동자 사내에게 들러붙어 끊임없이 돈을 달라 요구한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오면 이 이야기는 그저 진부해졌을 수도 있다. 카버는 당연히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느날 사내가 꾼 꿈. 꼬마가 되어 아버지의 목마를 타는 꿈. 다리는 아버지에게 감았지만 두 팔이 자유롭던 가장 이상적이었던 가족 간의 거리, 유대는 아이들이 크고 내가 늙으며 산산이 부서진다. 가족 간의 끈끈함은 위태롭다. 그것은 사랑이기도 하지만 내가 훨훨 날아갈 수 없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누구든 그 어느 지점에서 괴롭다. 그럼에도 거기에서 어딘가로 날아갈 수 있는 지점을 카버는 알고 얘기한다. 그의 결말은 그래서 소중하다. 불가능할지라도 잠시 꿈꿀 수 있는 거기에서 아름다운 승화를 발견한다. 이건 무책임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아들 부부에게 외로움과 삶의 고통을 호소하며 끊임없이 죄책감, 부책감을 자극하는 그렇지만 결코 버릴 수 없는 늙은 어머니에 대한 "가슴앓이"를 보여주는 <상자들>의 결말은 현관에 불을 켜두고 들어갔다 다시 나와 끝내 그 불을 꺼버리는 이웃을 우두커니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아들의 쓸쓸한 마음의 형상화다. 


그러다 기억을 하고, 불이 꺼진다.

-레이먼드 카버 <상자들>


카버를 읽고, 불이 꺼진다. 그건 카버를 읽기 전의 소등과는 다르다. 뭔가를 보고 듣고 느낀 후의 소등은 카버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된다. 더 무겁고 더 처절하지만 무의미하지 않은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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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1-0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blanca 2023-01-09 18:30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thkang1001 2023-01-07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blanca 2023-01-09 18:3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1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2년 11월 26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을 완독했다. 이로써 2012년 9월부터 시작됐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대장정이 막을 내렸다. 번역가 김희영 교수님의 번역 속도에 맞춘 10년여의 읽기였다. '오랜 시간'으로 시작한 책은 '시간 속에서'로 맺는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시간'을 중심으로 축조된 언어의 대성당이다. 침대에서 어머니의 밤인사를 기다렸던 소년은 어느새 '늙은 남자'가 되어 그때는 절대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진정한 의미의 작가로서의 삶을 살게 되며 자신이 평생을 바친 문학의 완성을 목전에 두게 된다. 그것은 사물의 감각을 향유함으로써 실재에 가닿게 되는 그 지난한 과정의 결실의 에피파니에 다름 아니다. 화자가 마침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되는 순간이 뭉클하다. 시간 속에 살며 그 침식 작용과 붕괴에 대항할 수 없는 육체에 갇힌 우리들이 그것을 넘어가서 영원을 목격하게 되는 찰나를 선물하기 위해 프루스트는 온생애를 바쳤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에는 프루스트가 왜 이 어마어마한 시간의 연대기를 기획하게 됐는지 그리고 자신에게 죽음이 닥쳐오는 순간에도 죽음 그 자체보다 이 문학작품의 완결을 보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했는지에 대한 내밀한 심경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 있다. 주인공이 청년기에 선망해마지 않았던 게르망트 가의 귀족들이 시간 속에서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점차 붕괴되어 가는 모습에 나타난 '시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그 잔인한 파괴력과 시간 바깥의 절대적인 실재의 발견으로 인한 전율의 아이러니한 대조는 프루스트가 예술을 통해 구현하려 했던 궁극의 아름다움에 대한 일종의 형상화다. 즉 사물의 바깥에서 구현하려 했던 의미와 사물의 이미지 앞에 놓여 있는 인간들의 구체적인 개별의 삶들을 통해 길항하는 생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안에서 잃어버린 시간과 잃어버리지 않은 시간의 편린들을 모두 발견하는 찰나를 경험하게 된다. 


나는 본질적인 책, 유일하게 참된 책은 이미 우리의 각자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위대한 작가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발명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번역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가의 임무와 역할은 바로 번역가의 그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


프루스트의 훌륭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나 발견을 읽는 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글을 읽음으로써 독자들이 스스로를 재발견해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가 사는 일에 바빠 놓친 그 수많은 개별적인 순간들과 빛나던 추억들의 세세한 풍경들을 연상시킴으로써 우리의 지나간, 잃어버린 삶을 재발견할 수 있는 거대한 지적 설계도를 펼쳐놓은 것이다. 따라서 그가 홍차를 마들렌에 적실 때, 그가 사랑했던 알베르틴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생각지도 않았던 샤를뤼스의 기행 앞에서 우리는 각자의 그와 유사하거나 그것들이 연상시키는 우리의 잃어버린 순간들을 재발견하고 마침내 우리 자신을 다시 읽게 되며 삶의 의미를 재발명하게 된다. 


중년의 남자가 나에게 인사했다. 그는 나를 '누나'라고 불렀다. 잠시 누군가 기억을 더듬다 비로소 나보다 두 살이 어렸던 동기의 얼굴을 떠올랐다. 나는 내가 이미 그 집단에 속하고 오히려 그 집단보다 더 늙었다는 사실을 타인을 통해 자각하고 내가 더이상 젊지 않다는 깨달음에 순간 아연해졌다. 이것은 마치 마르셀이 게르망트 가의 연회에 가서 그 수많은 늙음을 목격하고 그제서야 자신이 고정적으로 일관적으로 인식했던 동일한 젊은 시절의 자기가 더이상 아님을 깨닫는 순간과도 만난다. 알베르틴이 살아있었다면 그 소녀 시절의 빛나던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은 사정없이 무너졌을 것이다. 대신 질베르트와 생 루이의 열여섯 살의 딸이 마르셀이 추억 속에 간직한 첫사랑의 소녀들의 그 과거를 정확히 환기한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 소망들은 세대를 가로질러 반복될 것이다. 존재는 시간 속에 현현하지만 시간을 뛰어넘어 영속한다. 그 시간의 바깥에서 그것을 스케치하려했던 작가는 자신의 삶 자체를 예술의 소재로 승격시켰고 그것을 번역한 번역자는 비로소 우리 읽는 이들에게 그 작가의 의도와 노력의 결실을 건네 주었다.


지금 나의 순간들이 무의미로 흩어지지만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책.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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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26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10년간의 독서와 그 결실! 왠지 뭉클하면서 감동적이에요.
삶이 잃어버린 순간들을 독자 스스로 찾는 책이라니 이 책을 언젠가 저도 읽을 수 있을까요?

blanca 2022-11-26 16:50   좋아요 2 | URL
오늘 너무 기뻐 일기도 썼네요. ^^

붉은돼지 2022-11-26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오!!!!!!!! 완주를 축하드려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완독하신 분 처음 뵙는 듯합니다. 아니 전에 한 분 계셨던것 같기도 하고.....저는 뭐 일단 완비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만....(샀다가 팔았다가 다시 사고 있습니다.ㅋㅋㅋㅋ)

blanca 2022-11-26 16:52   좋아요 0 | URL
그냥 내가 뭘 성취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잃시찾˝ 읽은 여자가 됐다는 자족감에 뿌듯하더라고요. 누군가에게 자랑했더니 ˝그게 뭔데?˝이러더라고요. 흑.

꼬마요정 2022-11-26 1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축하드립니다^^
진짜 멋집니다. 잃시찾 완주라니... 정말 책도 경이롭지만 블랑카님도 경이롭습니다^^

blanca 2022-11-26 21:0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완독하고 싶었어요. 솔직히 아주 재미있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왜 사람들이 그렇게 이 책을 보통명사처럼 인용했는지 알 것 같았어요. 뭔가 어떤 경지를 넘어간 책이더라고요.

새파랑 2022-11-26 1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독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긴 여정이셨을거 같아요. 전 10권까지 읽고 일단 3권 남았는데, 구매는 다 해놨는데 과연 언제 읽을지 모르겠어요 😅 이제 시간은 안잃어버리는 것으로~!!

blanca 2022-11-26 21:07   좋아요 1 | URL
오, 10권까지 읽으셨으면 나머지는 순삭이죠. 왜냐면 분량 자체가 확 줄어들기 시작하더라고요. 제가 1권부터 꺼내 봤는데 이 책은 초반부가 어렵고 나머지는 오히려 쉽게 탄력 받아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더라고요. 완독의 성취감을 누리시기를...

2022-11-26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26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2-11-26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려요.
잃.시.찾을 읽어보면 이 책 완독하기가 얼 마나 힘든지 알 수 있잖아요.
저는 이제 두 권 남았어요.
올해 완독 목표로 열심히 읽어야겠어요^^

blanca 2022-11-27 07:58   좋아요 1 | URL
아, 마지막 권은 정말 감동적이더라고요. 페넬로페님도 조만간 완독하시겠네요. 다시 찬찬히 읽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꺼내보니 그 엄두는 솔직히 안 나더라고요.^^;;

책읽는나무 2022-11-26 2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완독 축하드려요^^

blanca 2022-11-27 07:58   좋아요 1 | URL
책읽는나무님 감사합니다. 뭔가를 해냈다,는 성취감 정말 오랜만이랍니다.

단발머리 2022-11-27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립니다, 블랑카님!! 긴 여행같은 독서가 끝나니 너무 후련하실듯 해요. 또 스스로도 너무 뿌듯할 거 같고요. 저 같으면 플랜카드 준비할 것 같은 ㅋㅋㅋㅋ 그런 맘입니다!!

blanca 2022-11-27 18:28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감사합니다. 사실 이런 축하는 서재에서만 받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올해 제가 크게 이룬 건 없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성취가 될 것 같아요.

하이드 2022-11-27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저도 언젠가..! 한 번 시도했었는데, 2-3권 까지나 읽었나 몰라요. 23년에는 도전해볼까... 말....
앞서 완독하신 분 있으니, 등보고 따라가보겠습니다.

blanca 2022-11-27 18:29   좋아요 1 | URL
하이드님, 추천드려요. 정말 한번 해 볼만한 가치 있는 읽기의 과정이었어요. 중간중간 난해하고 지루한 대목들도 있었지만 넘고 넘다 보니 나도 나이 먹고 프루스트가 말하고자 했던 게 이거였구나, 하고 짐작되는 지점들이 늘어나더라고요. 특히 노화에 대한 장은 정말 ㅋㅋㅋ 크게 웃었어요. 너무 실감 나더라고요. 자기만 안 늙고 주변 사람들만 모조리 늙은 것 같은 착시에 대한 이야기요.

자목련 2022-11-28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캉카 님 멋지고 대단해요!
저는 ˝잃시찾˝ 읽은 여자가 될 수 없을 것 같아요. ㅠ.ㅠ

blanca 2022-11-28 17:47   좋아요 0 | URL
그냥 그간 흐른 세월, 변한 모습 같은 것과 같이 오버랩되어 뭐라 말하기 힘든 기분이 들더라고요. 프루스트가 마지막 장에 휘몰아치며 시간에 대하여 쓴 대목들도 이젠 진정 공감이 갔고요. 그리고 저야 제대로 분석하며 읽은 것도 아니고 쓰윽 읽은 거라 여기에서만 소곤소곤 자랑하는 거예요. 지루한 대목들은 영혼 없이 말 그대로 활자만 읽었답니다. ^^

레삭매냐 2022-11-30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

저도 한 두권 사두긴
했는데 아예 읽을 시도도
못하고 있네요.

blanca 2022-12-01 15:43   좋아요 1 | URL
각자의 때가 다른 것 같아요. 그때가 올 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12-01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년에 읽기 도전하려고 8권까지 일단 사두었습니다^^ 이제 완간되었으니 천천히 따라가보려구요.
완독 축하드립니다*^^*

blanca 2022-12-01 15:44   좋아요 0 | URL
한꺼번에 사 놓고 읽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저는 드문드문 읽다 보니 자꾸 전의 내용을 잊어버려 난감하더라고요.

그레이스 2022-12-01 15: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저는 내년1월부터 시작합니다.^^

blanca 2022-12-01 15:44   좋아요 1 | URL
오, 2023년에 시작하시는군요! 응원합니다.

다락방 2022-12-05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대단하십니다, 블랑카 님. 블랑카 님의 이 글을 읽고 나니 저도 이 책의 완독을 목표 삼아볼까 싶어지네요. 그동안 차마 엄두도 내지 못햇던 일인데요. 블랑카 님의 감격이 글에서도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정말 멋져요, 블랑카 님!!

blanca 2022-12-05 19:01   좋아요 0 | URL
시간에 관련한 가장 길고 놀라운 연대기인 것 같아요. 저도 요새 시간, 노화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서 공감 가는 대목이 정말 많더라고요. 결국 모든 걸 좌우하는 건 시간이었더라고요. 문제는 내 머릿속의 지우개 때문에 읽은 감동만 간직하고 있다는 거죠.^^;;
 

내 안에는 많은 내 모습이 있다. 그건 어는 날 소풍을 다녀오며 친구들과 폭우에 흠뻑 젖어 하필 대학가의 카페 유리창에 그 모습을 비춰보고 있는데 그 안에 선망해 마지 않던 대학생들이 안에서 우리가 비에 쫄딱 젖은 모습을 보고 유쾌하게 웃던 풍경이나(긴 머리를 빨래처럼 짜고 있었으니,), 짝사랑하던 사람 남자 친구와 헤어지며 다음에 그 얼굴을 볼 일주일을 기다릴 일에 돌아서며 벌써 괴로워하던 여대생의 모습이나(음..그 정도면 고백을 했어야지.), 아기띠를 하고 전투적으로 언덕을 올라가던 젊은 엄마의 모습이 이제 어엿한 중년의 모습으로 나아간다. 그러니까 결국 시간이다. 수많은 나를 양산한 것은 시간의 흐름이다. 다 결국 나인데 이 모습들은 시간의 나이테를 지나며 타인만큼 멀어졌다. 가끔은 그 간극에 아연하다.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내 안에 수많은 나를 품고 이제는 미래를 생각해 본다. 그러다 보면 그 시간 속에서 할머니도 된다. 이런 생각들을 계속 하다 보면 뭔가 몹시 신비하고 아득하면서 언어로 주워담을 수 없는 각종 감정이 휘몰아친다. 내 앞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뒤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살다 죽을 것이다.

우리가 육체로 팔십 년을 산다면, 정신으로는 과거로 팔십 년, 미래로 팔십 년을 다 살 수 있다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의 삶은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 이백사십 년을 경험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을 거야.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김연수



















김연수의 이야기들은 스무 살의 추억을 이야기하던 삼십 대의 작가가 이제 오십 대가 되어 유장한 시간성 속에서 육체의 유한성, 인생의 한계를 조망하는 것으로 모인다. 현실을 비관하고 모든 것들을 비판하고 불만을 가지기란 쉽다. 그러나 그 안에서 낙관을 이야기한다는 건 용기와 비난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김연수는 거기에서 작가가 설 지점을 섬세하게 찾는다. 그건 통시적으로 우리의 짧은 삶을 바라보는 일이다. 자연히 우리의 삶은 작아질 것이다. 응축될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괴로워하는 일, 한없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상의 과업들은 자연히 사소한 것으로 졸아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의미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살아나가는 일의 그 가치에 대하여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이야기하는 소설가의 여전함이 반갑다. 나이 들어도 때가 묻어도 어떤 원형은 그대로 남는 것 같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오래도록 응원할 수 있다. 


"선생님, 저는 일 년 후에 제가 살아있을지도 장담할 수가 없어요. 생각해보면 십대 때부터 그랬어요. 저는 그렇게 먼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본 적이 없어요."

-나종호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여기 조금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먼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남미 출신의 40대 여성으로 트랜스젠더다. 그녀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한번도 흔들림 없이 믿었던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육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들을 버린다. 명문대 학벌, 주변의 시선, 사회적 기대.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단 한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 그녀를 괴롭히는 우울증은 다른 문제다. 물론 이것이 결국 타인들이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내년에 살아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은 그러나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열심히 산다. 그녀는 치료에도 적극적이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하루하루를 충실히 열정적으로 살아나가는 그녀의 모습에 눈물이 났다. 그녀가 나름의 시선으로 보는 삶은 그렇게 가혹하고 유한하건만 그것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엄숙하기까지 하다. 이걸 비난할 수 있을까. 통시성이 아니라 여기, 지금에 집중하는 삶은 또 다른 견지에서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모두 뒤로 걸어가는 중이다. 대부분은 인생이라는 여정이 얼마나 위험한지 망각한 채로, 가끔 주변 사람들에게 닥치는 일에 충격을 받고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항상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아무도 언제 지뢰를 밟게 될지 미리 알 수 없지만, 생각해보면 그 누구도 지뢰를 피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이젤 워버튼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좋다>














인생이라는 여정은 그러하다. 위험하고 허무하고 짧다. 그러나 그것에서 부조리와 무의미만을 추출한다면 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담담하게 일상을 살아나갈 힘을 어디서든 끌어오는게 과제가 아닐까. 그 과정에서 저마다 삶의 서사를 만들어 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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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4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14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2-11-14 1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 올려주신 세 권의 책들보다 블랑카 님의 이 글이 더 좋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blanca 2022-11-14 12:29   좋아요 0 | URL
^^;;; 다락빙님의 칭찬이 하이라이트네요. 고마워요.

바람돌이 2022-11-14 1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늘 나라는 인간은 왜 이토록이나 성장하지 않을까를 고민하고 한탄해온거 같아요. 저는 30살이 너무 힘들었는데 그게 10대나 20대 때 30살은 완전한 어른이 된 나이였고, 저는 그때쯤이면 뭔가 근사한 인간이 되어 있을거라고 믿었거든요. 그런데 30살의 나와 20살의 나가 별반 다르지 않더라구요. 절망이죠. ㅎㅎ 그 뒤로는 근사한 인간은 영원히 물건너 가고, 지금도 별반 나이지지 않는 저의 크기를 책속의 삶들을 보면서 대리만족하고 있는 중인거 같아요. 블랑카님의 글을 읽다보니 책보다 그런 저에 대한 생각이 더 많아지네요. 읽는 사람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블랑카님의 글을 좋은글이라고 하는거겠죠? ^^

blanca 2022-11-15 09:43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 저에게 삼사십 대는 뭔가 아주 단단하고 현명하고 흔들리지 않는 멘토 같은 느낌의 어른이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겁나는 게 더 많아지고 어떤 선택에 확신도 들지 않더라고요. 저도 제가 성숙했는지 잘 모르겠고 앞으로 어떻게 나이들지 고민이랍니다. 그냥 계속 이런 불확실성, 모호함이 인생인 걸까요?

서니데이 2022-12-08 1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blanca 2022-12-14 10:09   좋아요 1 | URL
댓글이 늦었네요, 감사합니다.
 

몇 년 전까지 커피를 하루에 서너 잔 마셨다. 그 이전에는 아침을 먹지 않고 믹스커피로 하루를 열기도 했다. 속이 이따금 쓰리기는 했지만 큰 이상이 없었고 카페인이 들어가면 그 정신이 찡해지는 청량감이 너무 좋아 거의 중독 수준으로 커피에 집착했던 것 같다. 이것에 제동이 걸린 건 건강검진 덕분이다. 만성 위염에 빈혈이 왔다. 오후 커피는 수면을 방해했다. 그래서 가까스로 줄인 게 하루 한 잔이었지만 이것조차 매일 마시니 주기적으로 역류성 식도염, 만성두통이 왔다. 커피를 다시 끊어보기로 했다. 하루, 이틀 거의 몸에 이상이 온 수준으로 근육통, 구역감, 두통으로 고생했다. 그러다 사흘이 되던 날 커피 마시기 전보다 오히려 몸이 덜 피곤한 기이한 경험을 했다. 


이건 비단 커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몇 년 전부터 내가 마음껏 탐닉하던 간식류들을 먹고 싶은 대로 마음껏 먹으면 공복혈당이 정상치 경계까지 오르는 경험도 하고 있다. 난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내 몸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그 이름은 노화다. 젊었을 때와 똑같이 하면 내 몸은 저항했다. 하고 싶은 것들보다 해야만 하는 것들의 목록에 순응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가는 건가 싶었다. 나만 특별할 리 없었는데, 내심 나는 안 늙을 줄 알았다니...내 앞에 어느 날 갑자기 중학생의 아이가 뚝 떨어진 게 아니듯이 내 몸도 영원히 청춘일 리 없다. 그러나 이 단순하고 명약관화한 명제를 받아들이는 건 말처럼 간단치 않다. 나이듦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노년내과 의사가 쓴 노화에 관련한 책이다. 굉장히 좋은 책이다. 강력 추천한다. 우리나라에서 노년을 맞이하는 일에 대한 의료적, 사회적 측면에서의 의미와 현실, 제도적 보완책, 개인이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노력이 가감없이 서술된 책이다. 노화 지연을 위한 "내재 역량을 잘 보존하는 방법"으로서 무언가를 더하는 대신 빼는 일에 대한 진지한 고찰도 와닿는다. 혀끝에 감기는 과당 음식들의 범람, 성과를 내라고 강요하는 사회, 오감을 자극하는 SNS 속에서 조금 덜 먹고 더 움직이고 마음챙김을 기억하기란 말처럼 쉽지만은 않지만 실제 이런 작은 노력들이 쌓여 결국 우리의 노년의 모습을 만들어가게 될 거라는 예언은 가벼이 넘길 일만은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환자가 바로 분과 전문의를 만날 수 있는 편리한 의료 시스템이 노인들이 여러 분과를 전전하며 통합 관리를 받지 못하고 중복 처방을 받거나 서로 각종 예기치 않은 상호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약들을 한꺼번에 복용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지적은 노인 환자의 특수한 상황인 노쇠를 간과한 치료가 그 노쇠를 더 가속화 시키고 있다는 통찰로 이어진다.  우리는 늙음이라는 상황을 직시하지 않음으로써 노인의 전반적인 삶의 질을 개선함으로써 일상을 건강하게 자립적으로 꾸려나가는 데 때로는 더 방해가 되는 의료적 처치나 처방, 치료를 남발함으로써 노인을 그저 젊은 세대들이 부양해야 하거나 돌봄노동을 해야 하는 성가진 존재로 만들어 버린게 아닐까. 


누구나 결국 나이가 든다. 나는 노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예외주의적 사고는 머지않아 나에게 차별로 돌아올 것이다. -<지속가능한 나이듦> 정희원


늙음에 대한 오롯한 사유의 문장화는 박완서의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중년의 여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모시고 있는 치매 시어머니를 통해 그 늙음의 현실화를 목도하고 충격 받는다. 그것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처럼 자연스럽지도 곰삭은 아취가 있지도 않았다. 적나라했고 원시적이었다.


그 여자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늙음과 그 여자에게 실제로 맡겨진 늙음과는 너무도 판이했다.

-<살아 있는 날의 시작> 박완서


자신이 실제로 늙음을 통과하며 그 늙음의 말로의 모습을 목격하며 그 부담을 홀로 떠안아야 하는 중년 여인의 모습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것은 가부장제를 통과한 효라는 미덕으로 포장되고 강요된다. 이것은 오늘날도 여전히 나이듦을 포용하고 지원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서 더 은밀하고 교묘하게 자행되고 있는지 모른다. 


가을이 가고 있다. 따라서 나도 나이 들고 부모님도 늙고 아이들도 크고 있다. 이 시간의 무정함은 시시각각 또 다른 모습의 책임과 어려운 과제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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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10-28 20: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희원 저자의 저 문장은 선고와도 같네요
아찔해집니다. 정신차려야겠어요 ^^

blanca 2022-10-29 08:52   좋아요 1 | URL
저는 저자가 너무 늙음에 대한 이해가 깊어서 꽤 나이가 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젊어서 놀랐고요. 군데군데 제가 요새 느끼는 지점들을 명확히 설명하거나 해석한 부분이 있어 정말 반가웠어요.

햇살과함께 2022-10-29 0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려고 찜해둔 책인데 강력 추천하시니 꼭 읽어봐야겠네요~

blanca 2022-10-29 08:53   좋아요 1 | URL
햇살과함께님 저도 여기에서 추천하신 분이 있어 읽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았습니다. 특히 약물이 서로 다른 분과에서 처방되어 때로 서로가 방해, 간섭,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대목은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이라 꼭 기억해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coolcat329 2022-10-29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에게도 필요한 책이네요.
저는 아직까지는 커피를 마시지만 만나면 같이 커피를 즐길 친구가 하나둘씩 사라져 순간 슬퍼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들도 하나같이 커피 끊으니 삶의 질이 달라졌다는 말들을 해요. 그러니 하루 한 잔은 괜찮다고 꼬시지도 못합니다. ㅎㅎ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친구들에게 추천해야겠어요.

blanca 2022-10-29 16:27   좋아요 1 | URL
맞아요. 커피도 커피지만 커피를 마시며 나누었던 교감이 참 그리워요. 오후에도 한 잔 같이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던 시간들이 참 그립네요.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게 참 스산해지는 가을날입니다.

테레사 2022-10-29 1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라딘 블노그를 끊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죠.좋은 책을 추천해 주는 이웃들 때문에ㅎ

blanca 2022-10-29 16:27   좋아요 0 | URL
테레사님 오래오래 여기 계셔야죠.

라로 2022-10-29 1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만 안 늙은 줄 알았다는 문장 읽고 깨달았어요.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하구요. 😅
약처방에 대한 건 저희 간호학에서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어요. 그리고 여긴 이미 노인학을 전공하게 되지 꽤 되었어요. 어쨌든 그래서 노인들이 약국을 하나로 정하고 약국에서 능동적으로 관리하는 경향이랍니다. 여긴. 어쨌든 이 책 저고 읽어봐야겠어요. 늘 좋은 책 소개 감사해요.

blanca 2022-10-29 16:30   좋아요 0 | URL
라로님, 한국이 주치의 제도가 도입되기 전에 바로 의료분과 전문의를 만나볼 수 있는게 편의성 측면에서는 좋은데 노인분들처럼 복합처방 많고 여러 질환이 겹쳐져 있는 경우는 부작용이 발생한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은 실제 노인을 전문으로 보는 전문의 자체도 많지 않답니다. 미국은 이미 그런 것들이 관리되고 있었다 하니 한국도 이제 점차 노인 환자를 그 입장에서 더 적극 케어하는 방향으로 가서 우리가 곧 맞이하게 될 노년 건강 관리가 더 나아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다락방 2022-11-05 13: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안그래도 매일 노화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살고 있어요. 받아들이려고 하면서도 툭 튕겨져 나오곤 합니다. 제가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네요. 좋은 글 입니다, 블랑카 님. 언제나처럼.

blanca 2022-11-05 19:03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가끔씩 아니 자주 내 나이를 실감 못해요. 그리고 예전에 우리 다 젊었을 때 알라딘 기억나세요? 그 북적북적하던 날들, 그날들도 그립고요. 그래도 이렇게 다락방님과 같이 늙어가는 것도 좋아요. 사실 제일 슬픈 건 서서히 진행되는 노안이에요...이건 깊이 생각하면 정말이지 너무 슬퍼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