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0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싸이에 한창 열을 올리다 의식적으로 안하기 시작했다. 외국에 사는 친구들과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하여 안하다 하기를
반복하기도 했지만, 결국 열중할수록 더 외로워지고 더 불소통이 되는 것 같은 그 의외의 막막함이 너무 싫었다.
그리고 친구의 사생활을 안부를 궁금해하는 용도가 아닌 끈적끈적한 호기심으로 들여다 보게 되는 그 변질이 점점 역겨워졌다. 온라인으로 하는 소통이 그 시간적 간격을 두고 감정의 정리 및 포장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뒤늦게 상대를 향한 것이 아닌,
어느새 내 자신에게 하는 것 같은 메아리가 되는 것 같은 한계에 부닥쳤을 때 나는 반문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열심히 칭찬의 댓글을 인사치례의 댓글을 주고 받았던 우리는, 과연 서로의 목소리와 서로의 눈동자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은 아닐까? 신기하게 싸이로 친밀감을 더해갔다고 생각하는 관계가 정작 전화선 너머에서는 심지어 얼굴을 사이에 둔 탁자 너머에서는 그렇게 데면데면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자꾸 객관적인 척 중립적인 척 마치 온라인에서 우리의 관계는 재탄생한 듯 무덤덤하고 치기어린 조언을 남발해대고 있었다. 여기서 중지하지 않으면 관계가 아주 묘하게 꼬여 갈 것 같은 두려움에 담배 끊듯 힘겹게 싸이를 끊어가고 있다.  

거의 10여 년을 활동하는 까페가 하나 있다. (여기서 활동은 가입후 글 열람 및 댓글 달기) 원래는 재테크 까페인데 하나의 작은 사회 같다. 익명에 기대어 물론 닉네임이 있지만 자신의 옆사람에도 털어놓지 못할 많은 얘기들을 털어놓고 서로 의논하고 조언해 주고 울어준다. 실제 글을 읽다 너무 감정이입이 되 펑펑 운 적도 있고, 정말 힘든 순간 울먹이며 올린 글들에 달린 댓글들을 읽으며 마음을 다독거리기도 했다. 나름대로 중차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순간 익명 게시판에 올린 글들에 툭툭 달린 불친절한 댓글들이 되레 나의 결단을 만들기도 했다.  나의 취향에 맞는 글을 올리는 사람들의 일상을 마치 친구의 일상처럼 찬찬히 들여다 보며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까지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의 소통. 진정한 소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또다른 영역의 진일보한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치부를, 나의 고민을, 지인들에게는 때로는 자존심때문에 때로는 망설임때문에 털어놓을 수 없었던 그것들을 나를 모르기 때문에 적어도 관계 속에 투영되는 각종 끈적끈적한 선입견과 암시,조종 등을 피해 얘기할 수 있다. 물론 우리들은 눈도 마주치지지도 손도 잡을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솔직할 수 있다. 더 대담해질 수 있다. 그 이상의 관계의 진전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기대도 실망도 없다. 때때로 악플이 달려도 그 사람은 나의 전체를 보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내가 글의 몸체 속에 가두어 놓은 그 찰나의 상황들로 미루어 짐작한 것이기 때문에 썩 기분나쁘지 않다. 오히려 아는 친구가 내가 올린 사진에 묘한 늬앙스를 풍기를 댓글을 달아놓았을 때, 혹은 내가 아무 생각없이 달아놓은 댓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았을 때 서로가 아주 강도가 강한 당혹감에 휩싸인다. 

그런데 이런 익명의 소통은 사람의 직접 대면에 대한 두려움과 관계맺기의 서투름때문에 더 조장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현실의 친구들을 덜 만날수록 나는 이 까페에서 더 오래도록 머물고 더 많은 댓글을 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외로웠다. 내가 던진 말들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응답받을 수 있고 우리의 관계는 그 댓글의 주고받음으로 마침표를 찍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의 이성친구를 소개시키듯 자기의 글들을 만나게 하고 그리고 손털고 나와 버린다.

눈동자를 마주친 사람들을 익명의 관계로 재설정하는 것. 정이현 작가가 얘기했던 것처럼 친구가 여기에 갔었구나, 제를 만났구나를 그애의 목소리가 아닌 하나의 사진과 설명으로 알아야 할 때 느끼는 그 약간의 배신감과 서먹서먹함이 던져주는 아득함. 그건 소통이 아니다. 그렇다고 닉네임으로 나에게 표식을 지우고 둥둥 떠다니는 그 관계에서도 결국 남고마는 이 아쉬움은 또 어떻게 추스릴 것인가. 죽을 때까지 소통을 갈구하지만 결국 인간은 혼자서 중얼중얼하다 산화하고 마는 것 같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10-01-19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공감합니다.
요즘에 제 서재가 방문자 폭주라 인터넷의 위력과 더불어 공포를 실감하는 중이거든요.ㅜㅜ

blanca 2010-01-19 14:28   좋아요 0 | URL
아..진짜 순오기님 방문자 수 보니까 이제 천단위는 가뿐하게 넘기더라구요. 이 정도면 공인으로 대우받으셔도 될 듯. 그런데 저도 우연히 순오기님 서재에 방문했다 하도 재미있어서 며칠간 아주 옛날글부터 찬찬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만큼 인기도 많고 공감도 많이 받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라로 2010-01-19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백배 공감,,,늘 염려하는 부분이기도 하구요~.

blanca 2010-01-19 14:30   좋아요 0 | URL
nabee님 반가워용^^ 사진이 하도 예뻐서 한참을 들여다봤답니다. 알라딘 서재는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도 같이 되잖아요. nabee님의 귀여운 글들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2010-01-19 1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0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1-19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곳에 거의 5년 정도를 있었던 듯 해요. 친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여기서는 하고,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내 속마음의 패악을 이 곳에 털어놓고, 그러면서 책 이야기를 하고, 어떤 이들은 실제 얼굴을 보고 만나보기도 했지요. 처음 보는 이들인데, 낯설지가 않았어요. 요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책을 읽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상대에 따라 설정되기 마련인데 이 곳에는 필터링을 하질 않으니까, 이들은 내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만나게 된 것이어서 그런 걸까, 혹은 책이라는 매개체가 중간에 중매쟁이처럼 끼어 있어서 그런 걸까, 생각을 했어요.

싸이는, 아, `나 이런 곳에 와봤소' `나 이런 것 먹었소' '나 이런 것 사들였소' 그런 느낌 탓에 오래 가질 못하고 있습니다.(제 싸이는 저도 안가요) 공간에 따라 느낌이 다르지만, 이 공간은 제겐 무척 각별하답니다.

blanca 2010-01-19 22:27   좋아요 0 | URL
저도 알라딘은 무언가 좀 다른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가열차게 리뷰들을 올리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근 6개월 정도밖에 안되었는데 Jude님의 5년의 시간이 참 부럽네요. 오히려 알라딘에서 더 많은 나의 모습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아요. 싸이 ㅋㅋㅋ 극렬하게 동의합니다. 제 싸이 제가 보고 막 긁습니다.

302moon 2010-01-19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엔 알라딘에 둥지를 틀었던 기간이 짧았었는데, 올해는 힘차게 달리려 해요. 함께 해요. ^^ 제가 요사이 싸이를 멀리하는 이유이기도 해서, 공감하게 돼요. 가까운 친구들이 통 하지 않는 탓도 있고, 속내를 드러내기 뭣한 상황도 오고 그래요. 책으로 맺어지지 않은 일촌들도 수두룩해서 그럴까요. 그들은 그들만의 잣대로 저를 보려 함을 서서히 깨닫고,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럼에도, 간혹 싸이로 연락해오는 친구들이 있어서, 끊지는 않고, 가끔 ‘나 살아 있음’을 알리는 용도로 슬쩍 들르는 공간이 되었어요. 알라딘에는 멀리 사는 책 친구들이 많지만, 가까이 있는 듯 친근해요. 책으로 맺어진 인연이라 진솔하고 더 차진 사이가 된! 주저리가 길어졌어요. 편안한 밤 시간을 보내고 계셨으면 해요. :)

blanca 2010-01-20 13:42   좋아요 0 | URL
아.302moon님, 정말 그래요. 또 완전히 끊어버리면 그걸로 연락을 전담하는 애들이 있어서. 아쉽고. 또 들어가면 어느새 집중하다 실망하고. 벌써 오후가 기울어 응답하네요. 빗소리가 넘 좋은데. 행복한 오후가 되기를 바랍니다.

프레이야 2010-01-20 0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문글이 공감되어요. 이 페이퍼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구요.
어느 정도의 선은 중요할 것 같아요. 그래도 눈을 보면 그냥 좋은 분들이 있더군요.
글로 느껴지는 부분이 대개는 맞구요. ^^ (그것도 대상에게서 제가 바라는 이미지일까요?)

blanca 2010-01-20 13:46   좋아요 0 | URL
대문글. 지금 다시 읽어보니 저도 또 공감되네요^^;; 맞아요. 사람에도 느낌이라는 게 맞아들어가더라구요. 어느 정도의 선. 유념해야 될 부분인 것 같습니다. 오래 가려면 약간 아쉬운 듯 유지해야겠지요. 프레이야님,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절로 2010-01-2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통되는 부분이 있지만 안 되는 부분이 많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과 법질서, 이런 기본 프레임을 통한 소통밖에는 안 된다. 심오한 소통은 순전히 개인의 몫인데.....나는 회의적이다...김훈, 그의 말이다. 저도 그에게 한표 던집니다. 몰래 훔쳐만 보다가 그만 '세'를 내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었어요.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강력한 이유 '소통'이 칼날을 제대로 겨누며 말합니다. 너 외롭지..오늘은 간만에 비가 오네요..사람보다 비가 따뜻.

blanca 2010-01-20 13:50   좋아요 0 | URL
저도 소통이라는게 결국 나한테 던지는 독백을 좀더 크게 내지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김훈 얘기가 참으로 와닿네요.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빗소리가 진짜 좋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1-23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투기 토론방이란 데가 있는데 댓글이 육두문자가 섞이는 건 기본이고 진짜 대단하지요.그런 데도 저는 그런 거친 게 더 낫더라구요.알라딘에서는 댓글이 사실 굉장히 점잖은 것 같으면서도 어쩌다 논쟁이 사실상 싸움으로 번질 때 보면 날이 서있어서 섬뜩할 때가 있어서 굉장히 조심하게 됩니다.

2010-01-24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문한지 이틀이 넘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상품 준비중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의 한자 실력은 늘어간다.
잘하면 교육용 한자(--;;) 1,800자를 몇 달 안에 습득하고 3급 시험을 치러 갈 수 도 있을 것 같다. 아니, 치기를 한 번 부려 1급을 시도해 볼까 싶기도. 명함의 한자를 못읽어 전전긍긍하며 웅크리고 열심히 인터넷으로 검색하다 들켰던 기억이 아프다.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하이드님 덕분에. 그 몽화적인 불륜(--;)의 잔영 만큼 표지도 너무 매혹적이다. 영화가 참 좋았지만
서사의 긴박감 대신 등장인물들의 심리변화를 따라가는 나른한 전개 때문에 은근히 지루한 맛(이상하게 이영화는 지루한게 제격으로 보인다.)이 있었는데 책도 약간 지루하다는 평이 올라와서 다소 겁난다. 이외수재미없는 책은 재수없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재미도 주관적인 기준에 디룽디룽 매달리지만 그래도 사랑했지만 지루했던 영화는 영상미로 버텼다지만
책은, 음. 상당히 곤란하다. 재미없으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와 바렐라의 <윤리적 노하우>는 너무 소설만 읽어대는 것 같아서 균형 차원에서.특히 자아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라는 그의 논리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로쟈님의 서평을 재미있게 읽었다. 언니 아기가 물에 빠졌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되레 사람들이 멀거니 구경했던 모습을 보고 난 후 측은지심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대체 윤리적 행위라는 게 본질적 경향성이라고 믿게 된 것은 교육 탓인가, 언론 탓인가. 의인은 드물기 때문에 화제가 되는 것이겠지. <설득의 심리학>에서 백주대낮에 거리에서 강도한테 칼에 찔려 허우적대는 여인을 아무도 돕지 않고 구경하고 있는 잔인한 광경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그건 윤리적 잣대를 들이밀 사례가 아니라, 나, 아닌 누군가가 해주겠지,라는 대중에의 함몰이라는 근거로 설명된 것으로 기억된다.  인간에 대한 기대로 붕붕 떠다니는 것도 안타까워 보이지만 불신과 악의적 단정 하에 침울한 사람의 
모습은 더 불쾌하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하여 책을 읽는다.

<롤리타>는 영화 호평에 기대어 뒤늦게 그리고 어둠의 통로로 보려 했던 시도가 좌절로 끝난 오기 덕택에. 아무래도 이것 때문에 늦지 싶다. 뒤늦게 품절이라고 할 듯. 왠지 예감에. 

그리고 갑자기 읽고 싶어 온몸을 긁게 되는 책들. 배송이 밀리니 뛰쳐 나가 사야 하나. 

 

 

 

 

 

 

 

 

<벨아미>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자신의 외모를 무기로 여자들을 유린하는(적절한 표현인지) 스토리라고 한다. <면도날>은 재미를 보장하는 서머셋 몸이기에 주저없이 선택한다.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는 얼마나 재미있는지 읽으면서 깜짝 깜짝 놀란다. 나쓰메 소세키의 책들은  단조로운 얘기를 어떻게 아름답게 가독성 있게 감쳐 보여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증 같다. 심리 묘사에 집중하고 주인공이 하느적 하느적 걸어다니는 타입인데 전혀 지루하지 않다.  

소설을 한동안 읽지 않았는데 그 허구의 공허함 속에 인생에 대한 인간에 대한 통찰이 파고들어가 움찔움찔하게 되는 재미를 알아 버렸다. 거짓말이 다가 아니라, 그 거짓말 속에 녹아 있는 작가의 인생관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분석의 향연이 결국 작가의 자서전 내지 일기를 읽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끊임없이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한다. 교묘한 위장술 아래 자신을 숨겨놓는 작가들의 그 트릭을 발견하는 쾌감, 그게 중독성이 아주 강하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10-01-17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벨아미...저는 이 책이 한동안 번역이 안 되길래 안타까웠어요.40년전 정음사 번역본을 읽었거든요.출세하려고 온갖 추한 짓은 다하는 젊은 놈이 등장하지요.게다가 직업이 기자! 여하튼 소설가들은 기자를 싫어하나 보다...하고 생각하게 되었어요.일단 읽어보세요.모파상 특유의 인간묘사가 적나라합니다.

blanca 2010-01-18 13:51   좋아요 0 | URL
40년 전에 읽으셨다는 얘긴 아니시죠?ㅋㅋㅋ 직업이 기자군요. 더 흥미가 갑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1-18 16:19   좋아요 0 | URL
'40년전의 정음사 번역본'으로 써야 하는데...추잡한 기자를 모델로 한 소설은 우리나라에도 있죠.

2010-01-18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8 2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9 0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곳 안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전쟁과 평화, 논쟁과 타협, 이성과 감성, 위선과 위악.
들어가는 문은 좁았다. 그러나 나오는 문은 턱없이 휘했다. 허전하고 슬펐다.
나는 오른쪽 발을 그 출구의 문지방에 걸친채 그대로 있어도 될 구실을 찾아 더듬거렸다.
톨스토이의 분신 같은 레빈이 고개를 들었다.
안나는 갔어요. 나도 가게 됩니다. 사소한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고
순간순간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당신도 결국 한 줌의 먼지로 스러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삶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그 경계 너머에 절대적인 선, 절대적인 진리가 스며 있습니다.
불합리한 사랑이지만 우리는 사랑을 합니다. 이 힘이 오는 그 시원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영화를 먼저 본 것은 언제나 그렇듯 약간의 함정과 약간의 생생함을 떨구었다.
소피마르소의 그 에메랄드 빛이 살짝 휘감긴 회색 눈동자는 안나의 그것과 거의 흡사했지만
안나의 특질인 붉은 입술 사이를 팔딱팔딱 뛰어 돌아다니는 생기로 묘사되는 그 과잉된 뭔가
되레 온순해 뵈는 그녀의 인상에서 도저히 상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억눌린 생기를 마침내
발산하고 마는 안나를 제대로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건 분명 실책이었다. 소피 마르소의 안나를 알아 버린 것은.
내내 안나 카레니나를 소피 마르소로 치환하여 떠올리고 말았다. 



 

당시 러시아의 시대적 배경들과 인용된 각종 원전들에 대한 친절한 각주들은 그 자체로 돋보였다.
모지락스러운, 숙부드러운 부인(사랑에 빠지기 전의 안나에 대한 세간의 평^^), 잇바디(치열),너나들이(격의없는 사이)
같은 우리말들을 활용하여 정성스럽게 한 번역은 간혹 만연체로 늘어지는 그 지루함에 대한
아쉬움 정도만이 남을만치 훌륭했다.
 

결국 불륜의 로맨스이자 실패한 일탈로 귀결지어질 수도 있는 안나의 사랑만이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는 아니다.
그녀의 오빠 스티바의 불륜으로 문을 열고, 스티바의 처제 키티와 결혼한 친구 레빈의 철학적 성찰로 작품의 문을 닫은 것은
톨스토이가 결국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맞춤한 양단 같다.
온갖 불합리와 감정의 과잉이 판치는 세상사를 가족의 안에서 형상화하고 그 자잘한 불합리와 비극들의 소재들을,
결국 어떤 절대적 존재의 절대선으로 다림질하여 아퀴를 짓는 것.
물론 이런 이상주의적 결론에 아쉬움이 조금 남기도 하지만
그것이 소설의 틀 안에서 완성되는 모습이 그 자체로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가지는 것 같다. 
소설은 철학서가 아니지만, 그래서 어쩌면 이 아쉬움이 그대로 미결인 채로 아름답게 빛나지만
허구 안에서 진실의 사금파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유쾌한 경험이다. 

세 권의 두툼한 분량이 아쉬울만큼 재미있다. 뒤로 갈수록 더 속도가 나고, 안나의 내면에서, 또 레빈의 내면에서
들고나는 그 수많은 사고의 편린들이 긴박감 있게 묘사되어 전혀 지루하지 않다. 톨스토이는 꼭 인간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한번 휘휘 저어보고 나온 이처럼 예리하게 우리의 마음 속을 지나가는 그 수많은 상념들을 집어낸다.
그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사고나 감정의 조각들도 그의 펜 끝에서는 하나의 서사가 되어 나오니 놀라울 따름이다. 

 

표지의 라일락빛도 안나에게 사돈처녀 키티가 상상으로 입혀보고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라일락빛에 대한 암시인 것 같아
기억해 두고 싶다. 물론 안나는 그 파티에 키티의 기대를 저버리고 검은 드레스를 입고 와버리지만. 아주 자상한 북커버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뭐든지 필연으로 감치는 것도 재미있는 습관이라고 합리화하련다. 

다 읽고 나서는 1권의 중반까지 걸치고 오만하게 내렸던 결론을 뒤집고도 한참을 어안이 벙벙하게 할 정도로
임팩트가 컸다. 고전이란 이런 것이구나. 소설적 성취가 여기까지도 올 수 있구나.
답답하게 엉켜 있던 실타래를 마구 끄집어 내어 풀리는 데까지 막 흔들면서 풀어내고 마무리를 넘겨준 사람을 만난 느낌.
삶에 던지고 싶은 수많은 질문들을 들키고 그 해답을 차근차근 함께 연구하다 갑자기 내처진 느낌.
안나의 그 무모한 사랑과 그 사랑에 던진 과잉된 무언가의 그 극적인 마력에 이끌리다가도
심심하게 일상을 영위하고 항상 질문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레빈에게 결국 끌려가고 마는 아이러니는,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을
그가 농부들과 더불어 풀베기를 하는 그 노동의 무아의 지경으로 기억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충동과 순간을 뚫고 나가는 과잉된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랑의 피곤함보다는 사물에 대한 우직한 투신과 연마가 남기는
담백한 만족감을 원한다면 자기기만일까, 아님 늙어버렸다는 방증일까.
이렇게 또 질문들은 또 숱하게 남고 만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10-01-16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다...안나 카레니나를 독파한 사람이 우리나라에 몇명이나 있을까요?

blanca 2010-01-16 22:03   좋아요 0 | URL
아...침울했는데 노자님 칭찬에 기분이 급좋아지는 이 단순함이라니. 책 다 읽었다고 칭찬받기는 또 처음이네요^^ 좀전에 우리나라에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다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알아버렸답니다.ㅋㅋㅋ

노이에자이트 2010-01-17 14:53   좋아요 0 | URL
율리시즈...유명하긴 하지만 실제로 읽기는 힘든 책들에 관심이 많으시군요.저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정도라면 몰라도 율리시즈는 좀...

다락방 2010-01-19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이에자이트님과 blanca님의 이 댓글들을 보니, 반드시 율리시스를 완독해야겠다는 의욕이 불타올라요. 2010년에는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어요. 불끈!

blanca 2010-01-19 14:36   좋아요 0 | URL
아. 저 다락방님이 이거 산거 페이퍼 검색하다 보고 저도 사고 싶지만 읽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정말 다 읽고 리뷰 올려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당!

프레이야 2010-01-24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페이퍼에요.
소피 마르소는 착해보이는 약간 처진 눈꼬리가 어떤 경우엔 단점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나이 들어갈수록 오히려 더 분위기가 풍성해지는 배우 같아요.
저도 라일락색 참 좋아하는데요, 북커버에도 필연이^^

blanca 2010-01-24 20:2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소피마르소는 언제나 착해보이잖아요. 그래서 좋아하기도 하구요. 라일락색 참 묘하게 이뻐요^^
 

요새는 인간 관계의 위선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인간 간에 모든 허위와 위선을 다 솎아내고도 남는 아름다운 부스러기들이 있기는 한 걸까?
친구, 우정, 연인, 사랑. 이게 정말 실재하는 것들일까?
아니 다만 살아나가기 위해 견디기 위해 그냥 모래 위에 쌓아놓은 하나의 허상의 탑이 아닐까,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 영롱하고 빛나는 감정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완전 착각하며 행복해하던 어리석은 시간들도 있었지만.
이제 삼십대 중반으로 와보니 그런 모든 것들이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좀더 솔직한 관계가 추악하지만 담백하다면
좀더 위선적인 연극적인 관계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제는 덜 위선적이려고 한다.
이제 더이상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에 연연하지 않고
나만은 다른 사람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착각의 삶의 유인을 던져버리려고 한다. 

인간은 다 고만고만한 존재다.
다만 더 솔직해지느냐(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흔히 싸가지가 없다고 폄하하지만), 더 위선적이냐의 차이뿐. 
 

우리는 친구들이 우리가 그들을 위해 마련해 준 논리적이고 관습적인 패턴에 따라 움직여주기를 바란다. (중략)

우리는 그런 것들을 속으로 미리 다 정해 놓고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가 우리 생각을
얼마나 잘 따르고 있는지 확인하며 만족해 한다. 덜 만날수록 더 그렇게 된다. 우리가 정해 준 운명에서
빗나가는 경우 반윤리적이고 변칙적이라고까지 생각한다.
                                                                                         - 나보코프의 <롤리타>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랜만에 탄 지하철 안 붐비는 사람들을 등지고 펼쳐든 한겨레21에서 무척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표제는 악마라는 '종족'은 태어나는가
기사 링크는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6380.html 
희대의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를 다루면서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가 언급되어 있었다. 

전직 경찰이었던 앤 룰이라는 여성이 봉사활동 단체에서 테드 번디라는 젊은 심리학도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당시 암으로 시한부선고를 받은 남편과의 이혼을 고민하고 있었고
결단을 내리도록 친근하게 조언해 준 그와 친구가 된다.
그런데 이 당시부터 번디는 젊은 여성을 살해하기 시작한다. 첫사랑의 실패 이후 시작된 이 연쇄살인은
결국 번디의 사형으로 막을 내리지만 경찰도 대체 그가 몇 명의 여성을 살해했는지 정확하게 밝혀 내지 못하고
3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고 하니 그 극악무도함에 몸서리가 처진다. 

평범한 우리와는 다른 종족. 언제든 우리의 평화를 깨고 우리의 당연한 가치들을 파괴할 그들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가 적나라하게 해부된 작품. 노벨상 수삭작가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는 그렇게 왔다. 

 200페이지도 안되는 이 얇은 소설은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두 남녀가 빅토리아풍 대저책에 건설한 그들만의 대가족이 어떻게 그들의 꿈을 기만할 수 있는지 낱낱이 지적해 준다. 

다복한 가정의 틀처럼 그들이 계획한 다산은 폭력적이고 일상에 적응이 불가능한 다섯째 아니 벤이 태어남으로써 결렬된다. 다섯째 아이는 잉태부터가 불길했고 물고기의 유영처럼 아름답고 간지러운 그 태동이 끔찍하게 여겨져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할 만큼 유별났다. 그리고 태어난지 얼마 안되 집단보호시설에 보내졌다 껍질뿐인 모성애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온다. 

각종 사고에 상상으로 연루되는 그 아이를 지켜보는 엄마 해리엇 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가족 구성원들은 어쩌면 그 외계의 아이보다 더 타락해 있다. 저마다 나름대로의 자기 구역 안에 그 애가 목을 디밀까 전전 긍긍하며 위장된 무심함 밑에 도피한다.  

변경의 시선을 가진 작가로 알려져 있는 도리스 레싱은 이 부적합한 가족 구성원인 다섯째 아이보다는 그 나머지 가족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집단적 위악, 때로는 위선에서 고립되는 나머지 한 명에 대한 비참함에 대한 절제된 연민이 돋보인다. 그녀는 사람들이 그의 본질을 보는 일을 거부하고 있다고 성토한다. 그녀는 인간 본성에 대한 신뢰를 가장 기만적인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성선론을 믿고 싶어하는 나에게는 조금 불편한 대목이다.  

 

가족주의의 허구를 적나라하게 해부한 작품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박완서는 구순하게 인간 간의   정서를 풀어나가는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만큼 인간 본성에 대한 그 교묘한 위선과 위장술, 자기 합리화의 부패를 여실하게 드러낸 작가도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대체로 굉장히 리얼하게 사악하고 위선적이다. 너무나 사실적이라 절망스럽다.  

가족이 가족을 버리고 그것을 합리화해나가는 그 여정이 이 작품의 줄거리다. 결말에서 인간에 대한 신뢰의 가능성을 열어놓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적인 시선은 거두지 않고 있다. 도리스 레싱과 닮은 부분이다. 박완서가 그 위선과 위악에서 소외된 이를 가족과 여성주의 안에서 가두는 한계를 보였다면, 도리스 레싱은 사회의 전체적 틀에서 고립된 이탈자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일보 전진했다. 하지만 도리스 레싱이 지나치게 건조하고 생략된 터치로 독자를 좀 망연하게 한다면, 박완서는 그 세심하고 성찰어린 필력으로 독자들이 철저하게 추체험을 하게 한다는 데에 또 우위에 있다. 

 

가족의 틀 안에서마저 소외되는 이가 있다. 상징적 장치라 해도 결국 집단적 사고의 구획 밖으로 내처지는 이탈자는 항상 있기 마련이다. 물론, 도덕의 절대적 가치의 잣대를 들이댈 때 분명 용서받지 못할 사악한 자는 있다. 그러나 그런 자의 탈선에도 분명 매듭은 있기 마련이라고 믿고 싶다.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그들의 본질을 보기를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안온한 일상에 파문을 던질 지도 모를 그 불가항력이 두려워서. 연쇄 살인범 번디도 사형집행 전날 엄마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내 안에는 엄마가 기억하는 나도 있어"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10-01-08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20여년 전 드라마로 나왔지요.남자 주인공은 임성민 여자주인공에 나영희,김도연이 맡았습니다.도리스 레싱과 비교하시니 더 읽어보고 싶군요.<그해 겨울~>은 읽은지가 꽤 되었어요.
<휘청거리는 오후> 초판을 헌책방에서 본적이 있어요.세로줄에 굉장히 두툼하더군요.결국 구입은 못했어요.요즘 박완서 전집에는 나와있더군요.

blanca 2010-01-09 15:12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어렸을 때 김도연이 나오는 드라마를 엄마랑 같이 봤던 기억이 나서... 남자 주인공이 임성민이었군요 ㅋㅋㅋ 나영희가 언니였겠죠? 읽어 보니까 어렸을 때 본 드라마 기억은 어떻게 하나도 안나더라구요.도리스 레싱은 고작 이 책 한 권 읽었는데 해설만 읽고 후덜덜 했습니다. 공상과학소설부터 완전 손안댄 분야가 없더라구요. 완전 파파할머니인데 지금도 블로그 운영을 혼자 한다고 하더라구요.

노이에자이트 2010-01-09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리스 레싱의 노익장은 대단하죠.
70년대 초의 박완서 초기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는 읽어보셨나요? 자료에 보니 영화로도 나왔고 최불암이 나왔네요.

blanca 2010-01-09 23:01   좋아요 0 | URL
한창 읽기만 하고 정리를 전혀 안하던 시절 몰아 읽었던 작가가 박완서에요. 그래서 제가 대체 어떤 작품을 읽고 어떤 작품을 안읽었나도 모를 정도랍니다. 그 시절의 독서는 하나의 공백 같네요. 영화화된 작품이 있군요. 최불암 ㅋㅋ <휘청거리는 오후>를 한 번 찾아봐야 겠어요. 노자님은 모르는 분야가 없군요.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0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