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다시 맨덜리로 가는 꿈을 꾸었다."로 시작하는 <레베카>는 놀라운 작품이다. 동명의 뮤지컬로 유명한 대프니 듀 모리에의 서스펜스 소설은 섣불리 장르작품이라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문학적 완성도가 높다. 특히나 이야기의 배경인 영국의 대저택 '맨덜리'의 묘사는 당장 눈앞에 아름답고 비밀스러운 경관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촘촘하고 생생하다. 인간의 내밀한 욕망, 복잡다단한 중층적 심리, 각자의 필요가 상충할 때 빚어지는 우연한 사건들의 파고에 대한 정묘한 표현들은 서사의 상상력의 진폭과 언어의 표현력이 맞춤하게 결합할 때의 최상의 지점을 나타내어준다. 한 마디로 경이로운 작품이다. 















속물에 교양 없는 귀부인의 수행원으로 심부름꾼 역할을 하던 소녀가 영지의 화려한 대저택의 소유주인 맥시밀리언 드윈터를 우연히 휴양지의 호텔에서 만나 드윈터 부인이 되는 이야기는 언뜻 진부한 신데렐라 스토리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레베카>는 오히려 그것의 대척점에 있는 이야기다. 그녀를 맞이한 '맨덜리'에는 이미 죽었지만 그 존재감을 하인들조차 떨쳐내지 못하는 전처 '레베카'의 환영이 떠돌고 있다. 모두가 그녀를 추억하고 추앙하고 그녀의 취향들을 고수하며 '나'를 은근히 소외시킨다. 심지어 남편 맥시밀리언조차 그러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곁을 주지 않는 사람들, 무언가 나는 공유할 수 없는 레베카와의 순간들에 대한 집착은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둘러싸며 점차 그 민낯을 드러내게 된다. 


레베카에 대한 환상이 벗겨지는 과정은 '나'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미덕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단지 이야기의 서스펜스와 흡인력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인물들이 어떤 내면적 갈등을 겪고 그것을 해결하고 나름의 방법으로 삶에서 성장을 이루어내는지에 대한 사려깊은 통찰은 <레베카>가 다양한 층위에서 해석되고 읽힐 수 있는 여지를 확장한다. 소극적이고 소심하던 나는 당차고 야무진 어른으로 나아간다. 핑크빛 환상에만 매달리지 않고 냉엄한 현실에도 두눈을 똑바로 뜨고 나아갈 수 있는 삶의 기본 자세를 배워나간다. 


나는 고통을 겪은 인간이 더 강하고 좋아진다고, 그리하여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불의 시련을 이겨내야 한다고 믿는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우리는 바로 그 불의 시련을 최대한 겪어낸 셈이었다. 우리는 공포와 고독, 그리고 대단히 큰 좌절을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살면서 고난의 순간을 맞게 된다. 자기를 괴롭히는 악마를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맞서 싸워야 한다.

-대프니 듀 모리에 <레베카> 중


'불의 시련'을 통과하는 소녀의 시선은 독자와 함께한다. 그 누구나 그녀의 우유부단함과 공포와 두려움에 동참하여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레베카를 상대로 한판 승을 벌이는 느낌이다. 그 '불의 시련'은 우리가 살며 겪는 위기와 고난의 시간들을 소환한다. 내가 내 자신을 믿지 못하고, 상대의 저의를 의심하게 되고, 내일을 두려워하게 되는 시간들. 그것을 통과하고 남는 평온한 내일들. 그 틈에서 결국 잃어버리고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의 시간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기억해 내는 일. <레베카>를 읽는 일은 그러한 시간들을 다시 사는 듯한 느낌을 준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우리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은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순진하고 어리석었던 그래서 막무가내로 믿고 두려워하고 부서졌던 시간들을 여전히 그리워한다. 이 역설이 성장기를 관통하여 마침내 오늘날의 우리를 만들어낸다. 그러고보면 '레베카'의 환영은 우리 모두에게 나타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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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10 1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베카 진짜 너무 재미있죠! 사랑 얘기인가보다 하고 읽었다가 중간부터 깜짝 놀라서 읽었던 기억이 나요. 지금 제가 쓴 리뷰 찾아보니 2018년에 소설의 기쁨을 알려준 책이라며 별다섯을 주었네요. [나의 사촌 레이첼]도 그래서 잽싸게 샀는데 아직 안읽었어요. 아, 블랑카님. 소설 진짜 너무 좋지 않습니까? 잘 쓰여진 소설 말이에요.

blanca 2020-06-10 14:54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님은 역시 알고 계셨군요! 저 이 소설 읽고 너무 놀라서, 안 그래도 작가 소설 다 읽어볼까 이러는 중이랍니다. 진짜 너무 정말 잘 썼어요. 그리고 작가 사진! 와우, 뭐 이건 할 말을 잃었어요. <나의 사촌 레이첼> 괜찮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 저도 왠지 사면 안 읽을 것 같아요. 이게 또 꼭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단편집을 도전해볼까 하는 중이랍니다. ˝소설의 기쁨을 알려준 책˝ 이 표현 정말 정확하네요. 흑, 너무 좋아서 안 읽은 눈 사고 싶어요.

moonnight 2020-06-10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프니 듀 모리에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참 독특한 매력이 있다고 느꼈어요. 레베카는 아직 못 읽었는데 blanca님 리뷰 너무 멋집니다. 꼭 읽고싶어요^^

blanca 2020-06-10 15:03   좋아요 0 | URL
달밤님, 꼭 읽으셔야 합니다. 분명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게 책을 손에서 못 내려놓을 정도인데 작품성까지 탁월해요. 재미있는데 우아하고. 이 작가는 뭐지? 싶다니까요.

테레사 2020-06-10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레베카가 그 레베카인가요?
히치콕이 만든 그 놀라운 레베카.......와우..놀랍네요..원작이 있었다니..저도 바로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히치콕의 작품 중에 아주 많이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blanca 2020-06-10 15:05   좋아요 1 | URL
테레사님, 그렇다니까요. 게다가 ‘새‘ 원작자도 이 작가랍니다. 그건 단편집에 있다 해서 찾아 읽어보려 합니다. 저는 ‘새‘도 참 좋았어요. 그냥 타고난 작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저는 원래 흑백사진이 너무 영화배우처럼 예뻐서 선입견이 있었는데 <레베카> 읽고 그냥 인정해버릴 수밖에 없는 작가더라고요.

테레사 2020-06-10 15: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덕에...즐거운 일이 한개 생겼네요 ㅎㅎ 요새 즐거운 일이 없어서..꿀꿀하던 차에...ㅎ 고맙습니다..

blanca 2020-06-11 09:07   좋아요 1 | URL
테레사님 즐거운 일에 일조를 담당했다니 으쓱합니다.

페크pek0501 2020-06-10 15: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영화로 보았던 작품이네요. 반전이 일어나서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있어요.
저도 책을 사 봐야겠네요. 좋은 소개에 감사^^

blanca 2020-06-11 09:06   좋아요 0 | URL
책과 영화가 약간 다르다고 하네요. 페크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간만에 참 몰입해서 읽었어요.

테레사 2020-06-26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러분, 히치콕의 레베카를 7월1일 저녁 7.30 광화문 씨네큐브서 한답니다^^

blanca 2020-06-27 09:03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몇 년 전인지 정확한 기억은 안 나는데 이비에스에서 히치콕 특별전으로 영화를 쭈욱 보여준 적이 있어요. 그때 ‘이창‘도 참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나요. 기대되네요.
 

아프기 전까지 몸과 의존의 문제는 타인의 것, 다른 영토의 일이다. 작은 수술로 입원하며 수술에서 깨어나던 시간, 옆병실 환자의 절규를 들으며 인간은 아무리 지성과 관념을 얘기해도 결국 한 평도 안 되는 육체에 갇혀있다는 뼈아픈 인식과 더불어 '돌봄'이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수술 당일 나는 화장실을 스스로 갈 수 없었고 다음 날 모든 일상이 갑자기 대단한 일이자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변했다. 많은 환자에게는 보호자가 있었고 그들의 투병은 누군가의 간병, 희생과 얽히고설켜 있었다. 생각해보면 인간이 생애 주기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사회는 그 기간의 생산성과 독립성을 전제로 삶을 규정한다. 그 나머지 기간, 우리는 소위 민폐가 된다. 비용이 되고 성가심이 된다. 건강하고 젊은 사회의 성원으로서의 우리 모습만이 반드시 어떤 생산력을 보이고 타인에게 돌봄을 구걸하지 않아도 될 때의 기간만이 진짜 삶처럼 얘기될 때 우리는 두려울 수밖에 없다. 누구나 아프고 누구나 늙고 누구나 죽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아프고 늙고 의존하는 몸으로 사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의미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김영옥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이 책은 다분히 도발적이다. 낯설다. 여섯 편의 글은 새벽 세 시, 우리가 가장 유약해지고 감상적이 되는 시간, 가장 고독해지는 시간 감당해야 하는 늙음, 고통, 투병, 간병 등 이 모든 육체의 쇠락, 고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가족 안에 가두어두는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의 담론의 현장으로 드러내고 있다. 환자나 보호자, 노인이나 장애인이 되어도 여전히 우리는 '시민'이고 그 돌봄이 오롯이 사적인 영역으로만 할당되지 않는 그곳에 대한 지향과 소망이 펼쳐지는 장이다. 특히나 이러한 돌봄노동이 성차별적으로 가부장 제도 안에서 여성의 희생이자 도리로 간주되는 폭력성에 대한 고찰이 두드러진다. 병실에서 아내나 부모를 간병하는 남성의 모습은 흔하지 않은 풍경이다. 남자 간병인들도 보기 힘들다. 


돌봄위기는 '독박'의 구조로부터 온다. "늙고 아프면 가족밖에 없는" 사회는 모두게 불안하고 힘겨운 사회일 뿐이다.

-<세벽 세 시의 몸들에게>


가족의 돌봄은 정상적이고 바람직하지만 간병인과 전문 요양 기관에서의 삶은 어쩐지 좀 서글픈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잔인하다. 그것은 간병을 하는 가족에게도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도 어긋난 역학 관계, 죄채감, 부책감, 억울함을 남긴다. 우리 나라에서 공론화하기 참 힘들고 민감한 사안이다. 할머니의 말기암과 치매를 온전히 감당해야 했던 가족은 불화했다. 그것은 이미 중년이 된 손녀인 나에게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가족 전체가 감당하려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타인의 손길을 좀 빌려도 괜찮지 않았을까? 누군가 온전히 자식이라는 몫으로 감당하려다 했던 실수들, 감정의 예기치 않은 표출들이 효의 연장선상에서 다 용서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가족이 다 감당하려 했을 때의 비극을 나는 안다. 그로부터 이십 년이 훌쩍 흘렀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아픈 사람, 약자를 가족 안에서 감당하지 못할 때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러한 얘기들이 담론화되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치유의 느낌이 있었다. '시민적 돌봄'이라는 용어가 낯설고 생경하면서도 위로가 된다. 모든 돌봄이 가족 안에서 감당되어야 하는 사회는 상상력이 빈곤한 사회라는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이 갔다. 


이지은의 <치매,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에서 소개된 알라나 샤이크의 TED 강연을 직접 찾아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녀의 학구적인 아버지는 치매에 걸렸다. 그러나 그의 치매는 공격적이지도 폭력적이지도 않다. 그의 생을 그대로 닮은 듯다정하고 부드럽다. 못 알아보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전면에 나서는 치매의 풍경에서 아버지의 차분하고 너그러웠던 마음은 그대로 남아 돌보는 사람들과 감응하고 조응한다. 아무리 지적인 작업을 의식적으로 계속한다고 해도 치매에 걸리지 않을 거라는 논리적인 확신은 없다면 그녀는 소위 '착한 치매' 환자가 되기 위해 미리 준비하기로 했다. 손으로 하는 종이접기 취미들, 몸의 독립성을 연장시켜 줄 운동, 그리고 착하고 아름답게 살기, 이 세 가지의 준비는 그녀의 인지 기능이 쇠퇴해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들을 예비시켜 줄 것이었다. 취약하고 의존적인 자신의 내일을 아예 상상하지도 못하는 우리들에게 울림이 큰 대목이다. 인간의 취약성을 직시하고 그것에 대비하는 모습은 슬프지만 현실적이다. 언제나 건강하고 항상 독립적인 나의 모습이 나의 자아의 본질이라 여기면 우리는 제대로 잘 늙고 아프고 죽을 수 없다.


그래도 여전히 나이듦은 어렵다. 아픈 가족을 나이 든 부모님을 보는 것은 언제나 가슴 시리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외면한다면 우리가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 자라고 늙고 아프고 죽는다. 이 명확한 생애 주기를 외면하는 사회는 기만이다. 언제나 생산하고 소비하고 활력 징후가 뚜렷한 구성원만이 대우받는 사회는 무섭도록 잔인한 곳이다. 아프고 늙고 유약해지는 게 반갑지는 않지만 적어도 두렵지는 않은 사회로 나아가는 데 이 책은 큰 이정표가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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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과 불운에 대처하는 법 상냥한 지성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임희근 옮김 / 유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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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위대한 시인의 말대로라면 삶 자체가 "앞이 안 보이고 어두컴컴한 감옥"37) 이야. 자네가행복하게 풀려나고 싶다면 비좁은 감옥에도, 고문에도, 죽음에도,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그 어떤 일에도 압도되지 말게.

자넨 노년을 맞았으니 삶이라는 여행을 잘해낸거야. 순풍이 불어와 거친 세파에 시달리지도 않고 이제 항구에 들어오는 거라고, 목적지가 어디건 이제는파도에 시달리던 쪽배를 해변으로 끌어당겨 끝을 잘 맺을 일만 생각하면 돼. 좋았던 시절을 생각하며 바보처럼 울고 가장 좋은 어머니인 자연을 탓하고 푸념하는 것보다는 어쨌든 그게 더 유용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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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여든이 훌쩍 넘으셨고 몇 년의 폐암 투병 후라 갑작스런 죽음은 아니었다. 대학 새내기였던 나는  먼저 본가에 내려간 부모님 연락으로 할머니의 시신을 마주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죽어서도 할머니였다. 나에겐 죽은 할머니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고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할머니와 유대가 긴밀했지만  슬픔으로 오열하지도 않았다. 그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처럼 다가왔다. 할머니와의 이별은 시간이 지나서야 오히려 점점 더 실감이 왔고 상실감은 천천히 스며들어 오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도 물러날 기미를 안 보였다. 좋은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 병원에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연명되는 죽음 대신 딸의 집에서 죽음을 맞고 자식들과 손주들의 마지막 촉감을 간직한 채 떠난 할머니의 죽음이 전적으로 좋았다고 감당할 만한 것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솔직히 그 대목에도 확신은 없다. 죽음은 언제나 두렵고 슬프다. 죽음을 앞두고도 죽음을 이야기하는 건 왠지 불경스럽고 부담스럽다. 이제 우리는 죽음의 과정에서 소외된다.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상조 업체가 있고 병원 장례식장과 연계된 서비스가 매뉴얼화되어 더이상 유족들이 시신을 가지고 의사 결정을 하거나 그 번거로운 절차에 직접 참여할 필요가 없다. 이제 손주가 할머니의 시신을 어루만지며 오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기회는 많지 않다.

















솔직히 이십 대 여자 장의사가 죽음을 가볍게 흥미롭게 다룬 책이라 여겼다. 이십 대가 바라보는 죽음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지평선은 머나멀고 생의 부박함은 와닿을 리 없는 연령대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죽음을 앞둔 사람이 쓴 죽음에 관련한 책들 못지않게 이 젊은 여성이 실제 시신들의 화장 과정에 참여하는 이야기는 깊은 통찰력과 예리한 식견을 보여준다. 그녀가 경험하는 죽음은 대단히 실제적이다. 그녀는 시신을 나르고 실제 화장장에서 태워 그 유골을 수습한다. 


사업으로서 장의업은 일정 유형의 '존엄성'을 팔아서 발전했다. 가족들에게 존엄성이란 잘 조율된 마지막 순간, 잘 매만져진 시신으로 완성된 순간을 누리는 것이다. 장례를 주도하는 사람은 무대 감독처럼 그날 저녁에 있을 전시 행사를 책임진다. 이 쇼의 스타는 시신이며, 감독은 제4의 벽이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관객이 시신과 소통하다가 환상이 깨지는 일은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고통을 감수한다.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하루 일과가 끝날 때쯤 이 중세역사를 전공한 유쾌한 아가씨는 성인들을 태운 잔열로 아기들을 "해치운다" 때로는 골든게이트에서 투신한 과학자와 노숙자를 화장하며 "당신의 재와 나의 재는 같고, 남는 것은 1.8~3.2킬로그램의 회색 재와 뼈뿐 임을 절실히 실감한다.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는 평등함을 그녀 만큼 체감할 수 있는 직업이 있을까. 물론 그녀에게도 죽음을 개별화하고픈 열망은 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평등하지만 각자의 의미와 개별화를 가진 저마다의 죽음을 가질 자격이 있음을 그녀는 꿰뚫는다. 모든 죽음을 간접적인 것으로 나쁜 것으로 은폐하는 현대 사회에서 죽음을 공론화하고 드러내지 않는한 물론 이러한 개별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 자신의 죽음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대도 그건 결코 이른 일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는 아프다. 나는 아무리 죽음에 관하여 읽고 의식해도 여전히 그 순간에 숨이 막힌다. 그래도 이러한 죽음이라면 견딜 만한 것이 될 것 같다.


그렇다. 노인은 숨을 거두었다. 사지 하나 꿈쩍하지 않은 채 마지막 숨을 똑바로 내쉬었다. 그로써 넓디넓은 시골에 또 하나 더해진 입김, 마치 숨어서 동정만 살피가 점잖게 사라지는 짐승처럼 이웃을 귀찮게 하지도 않고 혼자 조용히 마무리했다. 

-에밀 졸라 <농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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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20-05-23 0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 책 표지에서부터 저도 좀 가볍게 쓰인 손쉬운 책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블랑카님 리뷰를 보니 제가 오해했군요! 저는 요즘 통증과 죽음이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게 좀 껄쩍지근하고 무섭기도 했고요. 정확히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천차만별인것 같아요. 저자는 죽음의 결과물을 다루었구나 블랑카님의 리뷰를 읽고 추측해 봅니다. 저도 조만간 읽어봐야겠구나 싶어요^^

blanca 2020-05-23 19:34   좋아요 0 | URL
아, 쟌느님. 오랜만이에요. 저 사실 이것 그냥 그런 책인줄 알고 구태여 안 읽으려다 읽게 되었는데 아, 기대 이상으로 좋았어요. 대단히 솔직하면서도 가볍지 않고 재미도 있고 후속작도 궁금해지더라고요. 잘 지내시죠?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는 파리의 1871년 코뮌으로부터 연대기적으로 출발한다. 빅토르 위고, 마네, 모네, 르누아르, 로뎅, 에펠(맞다, 그 에펠탑의), 리츠(역시, 리츠호텔의 리츠), 에밀 졸라, 공쿠르 형제, 드뷔시 등 오늘날도 여전히 빛나는 작가들, 화가들, 명사들 개개의 삶이 태피스트리처럼 정치, 사회적 격변과 얽혀 있다. 저자 메리 매콜리프는 남아 있는 기록 틈새에 자신의 추정이나 상상을 끼워넣지 않으면서 그 공백을 허하게 만들지 않는 재주가 있다. 나열되어 있는 자료들은 건조하거나 서걱거리지 않으면서 당대의 가난하고 다사다난했지만 예술사적 역사적 족적을 남긴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한다. 르누아르와 로뎅이 자전거 타기를 함께 배우는 장면, 거의 대명사처럼 굳어버린 유명한 인상주의 화가들이 함께 그림을 그리고 서로의 결핍을 다독이고 메워주는 정경은 우리가 흔히 연상하듯 위대한 예술은 괴팍하고 고독한 과정이 아니라 사람들간의 지지, 우정, 격려로 가능했음을 알게 한다. 불가능이란 없어 보이는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불꽃 같은 삶도 흥미롭다. 열기구를 타고 올라 샴페인을 마시고 그림을 그리고 심지어 '햄릿'을 연기하는 여배우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이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하면 경탄스럽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에펠탑이 완성되고 자유의 여신상을 미국으로 싣고 가고  반유대주의로 억울하게 누명을 썼던 드레퓌스의 무죄가 드디어 밝혀지던 날, 이 아름다운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된다. 

















마네의 동생의 아내이자 그녀 자신이 화가이기도 했던 베르트 모리조 모녀를 끝까지 의리 있게 보살핀 친구들 드가, 르누아르, 모네의 모습도 감동적이다. 그들은 가난했고 인정받지 못하는 이단아들이었지만 결국 함께 스스로들을 하나의 역사적 존재로 만들어냈다. 때로 오해하고 반목하고 다퉈도 아픈 친구를 간병하고 서로의 그림을 응원하고 그 그림의 자리를 추천하고 남은 가족을 보살피며 끝까지 어려운 예술의 길을 포기하지 않도록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주는 모습이 오늘날 우리가 감상하는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의 하나였다. 벨 에포크는 유달리 예술에 호의적이거나 경제적인 호황이었던 분위기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때로 정치사회적으로 불안정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웠어도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꿈을 허무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믿어주며 사람 간의 교감과 우정, 사랑을 믿었던 그 순수한 무모함이 남아 있던 시대였기 때문이 아닐까. 설사 그것이 망상이고 때로 실패했을지라도 포기하지 말라고 등을 두드려주는 친구가 있었던 모네 또한 결국 눈부신 <수련> 연작을 완성하고 그 친구의 품에서 죽는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2020년에서 1890년 대로 시간여행을 가는 듯한 읽기였다. 죽고 나서 남을 것들을 의식하며 살았던 그들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들의 최후와 그들이 남기고 간 것들을 이미 스포일러로 간직하고 다시 그들의 삶을 함께 하는 경험 또한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외롭고 어려운 시간을 채워준 모네와 마네, 졸라, 드뷔시와 친구들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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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0-05-13 0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지고 임팩트 있는 후기에요. 이 책의 군더더기를 다 떨어내고 정확히 essential 부분을 정리하신 듯, 이 글이면 책 한 권이 다 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