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마지막 수업 - 91세 엄마와 아들이 주고받은 인생 편지
앤더슨 쿠퍼.글로리아 밴더빌트 지음, 이경식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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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죽음을 앞둔 멘토와 멘티의 수업을 표방한 책은 어느새 진부해져 버린 감이 있다. 죽음을 앞두고 각자의 개별성은 확 트인 일반성의 시야 앞에서 해체된다. 우리는 매일 전투를 치르며 삶을 견뎌내며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이라 그들의 고견은 때로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이 책의 리뷰를 쓰려고 마음먹게 된 것은 지금까지의 그런 비슷한 류의 책들과 확실히 다른 차별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92살의 어머니와 오십이 다 된 아들이 일년 여 동안 주고받은 편지 안에는 죽음의 이야기보다는 삶의 이야기가 더 많이 담겨 있다. 게다가 그 주인공 둘은 세속적 의미에서 특별하다. 어머니의 이름은 글로리아 밴더빌트(록펠러, 카네기와 어깨를 겨루던 철도왕 밴더빌트의 후손), 아들은 CNN의 대표 앵커 앤더슨 쿠퍼다. 글로리아의 삶은 겉으로는 화려하게 반짝였지만 수많은 슬픈 체험들을 안고 있었고 이 편지 왕래가 있기 전까지 아들과 진정으로 교감하지도 못했다. 스포트라이트, 언론의 집요한 관심에 가족의 상실과 치부는 거의 생중계되었다. 글로리아는 담담히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아들에게 들려준다. 변호하지도 미화하지도 비하하지도 않는 자신의 삶의 재구성은 그녀 자신이 이미 지난 온 자신의 과거를 제대로 다시 소화해내는 것이기도 하고 그녀의 삶의 대부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대중들에게 한 인간의 삶을 다시  들려주고 공감을 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글로리아의 아버지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한 밴더빌트가였지만 그녀가 십오개월 때 죽고 스무 살도 되기 전에 글로리아를 낳은 친정 엄마는 딸을 외면하고 화려한 사교계의 파티의 유명 인사들과의 자극적인 관계에만 탐닉한다. 그녀를 키운 팔할은 유모와 외할머니였다. 그러나 글로리아를 둘러싸고 그녀의 어머니와 밴더빌트가의 고모가 벌인 긴 시간에 걸친 양육권 다툼은 소녀를 공포에 몰아넣게 된다. 그녀에게 어머니 역할을 했던 내니와는 이 과정에서 강제로 헤어져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다.  글로리아는 어른들에 의하여 때로 전략적으로 이용되었고 정작 조언이나 도움이 필요할 때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나쁜 남자들과 사랑에 빠졌고 학대당했고 아이를 낳고 또 결혼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었다. 당행스럽게도 마침내 앤더슨 쿠퍼의 아버지가 될 성실하고 정서가 안정된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되어 카터와 앤더슨 형제를 낳게 된다. 그러나 남편과는 앤더슨이 열살 때 사별하게 되고 큰 아들 카터는 스물세 살에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자살하는 참상을 겪게 된다. 결국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둘을 제외한다면 이 가족은 모자 글로리아와 앤더슨만 남게 된 것이다. 앤더슨 쿠퍼는 이 상실을 단 하루도 상기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한다.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를 유년기에 잃고 두 살 차이의 형마저 자살로 잃게 된 앤더슨은 이 세상에 안전한 곳은 아무곳도 없다는 자각 속에서 항상 주도면밀하게 자신의 주변을 살피고 통제하고 비관적으로 미래를 전망하는 데에 익숙해져 버리고 만다. 한없는 낙천성과 순수함으로 쉽게 사랑에 빠지고 사람을 믿고 배신당하고 대책없이 미래를 낙관하는 그럼에도 그 결과로 얻은 그 수많은 상흔마저 긍정하는 구십이 넘은 어머니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셈이지만 이렇게 다른 둘의 대화는 진솔하고 담백하고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교차하는 지점에서 빛나는 영롱함들이 있다. 기본적으로 모자는 서로를 믿고 사랑했다. 글로리아는 자신이 과거 양육과정에서 저지른 실수를 용기 있게 인정하고 사과한다. 아들은 아팠던 두려웠던 슬펐던 느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고백한다. 듣기 좋은 말만 하지 않고 하기 쉬운 이야기만 지껄이지 않는 대화가 부럽다.

 

 

누군가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네가 지닌 생각이나 감정 혹은 가치관을 재단하지 마라. 항상 진심을 말해야 한다.

-P.347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는 않아. 우리의 삶도 덧없이 흘러가고 말지. 그런데도 우리는 온갖 것들을 모으려고 하고, 자기 주변에 쌓아 두려 하고, 사람에 돈에 지위에 집착한단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오래 가지 않아.

늘 행복할 수는 없어. 그걸 바라는 사람도 없지. 행복이 영원하다면 이 행복의 의미는 사라지고 만단다.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난대도 당황하거나 놀랄 일은 없어. '하필이면 왜 나에게 이 고약한 일이 일어난단 말이야?'면서 번뇌에 시달릴 일도 없단다. 어떤 일이 너에게 일어났다면 그것은 자연의 섭리란다. -P. 355            

 

 

워즈워스의 <송시>에서 따온 "무지개는 피었다 지고"는 이 책의 원제가 된다. 그것은 삶의 파고의 은유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글로리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지금 이 모퉁이를 도는 그 수많은 사람들도 각자의 삶의 전투를 치르고 있기 때문에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저 위의 사람들도 알았다면 좋겠다. 그래도 아직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의와 신의와 상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요즈음 한 세기에 이를 자신의 삶의 치부까지도 가감없이 노출하며 후손에게 마음이 울리는 조언을 남기고자 한 글로리아와 그것을 경청하며 자신의 한계와 단점을 고백하며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위해 노력한 앤더슨 쿠퍼의 대화가 유난히 큰 울림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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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04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이런 시절 에 무지개가 천국으로 향하는 다리로 생각했었습니다. 워즈워스의 시구가 인상적입니다. 무지개 한 번 보기 힘들고, 운 좋게 본다고 해도 오랫동안 감상하기 힘들어요. ^^;;

blanca 2016-11-06 09:18   좋아요 0 | URL
맞아요. 무지개 참 보기 힘들죠. 저도 손으로 꼽을 정도로만 기억이 나요. 인생에서 좋은 일도 그럴까요. 빨리 우리 나라에 무지개가 떴으면 좋겠어요.

나와같다면 2016-11-04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상실을 단 하루도 상기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한다....

blanca 2016-11-06 09:18   좋아요 1 | URL
저도 이 문장이 참 뼈아프더라고요. 상실은 잊는 게 아니고 안고 가야 하는 것 같아요.
 
너는 특별하지 않아 - 어느 교사의 맵고 따뜻한 한마디
데이비드 매컬로 지음, 박중서 옮김 / 민음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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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보스턴 교외의 웰즐리의 한 공립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졸업식 축하 연설은 특별했다. 연설자인 데이비드 매컬로는 이 학교에서 실제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였고 졸업생들과 비슷한 연령의 청소년을 포함한 아이 넷의 아버지였다. 이제 더욱 커다란 성취, 좌절의 장으로 나아가는 아이들에게 흔히 장밋빛 전망을 그럴듯하게 보여주며 더 많이 욕망하고 성취하라고 독려하는 여느 졸업 연설들과는 달리 데이비드의 연설은 각자가 지나치게 특별하다는 인식에 사로잡히지 않기를, 위대한 업적이나 성과 위주의 사회적 평가 체계에 함몰되지 않기를, 단 진짜 삶을 살게 되기를 기원했다. 이러한 그의 연설은 큰 화제가 되었고 이후 이 책을 집필하게 된다.

 

이 책은 기대를 뛰어넘는다. 무엇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이 유한한 삶을 다시 한번 제대로 고쳐 사는 것이 되기를 은연중에 바라는 부모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아이들의 좌절 경험까지 통제하려는 것이 얼마나 그 아이들의 삶에 무익하고 심지어 위해를 가하게 되는지를 깨닫게 한다. 아이들에게 했던 졸업 연설은 기실 그 아이들을 통해 성취의 트로피를 착복하려 했던 수많은 부모들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오직 대학에 가기 위한 과도기적 단계로서 학교 수업을 심드렁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들에게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통해 선문답을 하는 식으로 학문의 정수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깨워주는 정경의 주인공의 이야기는 매혹적이고 유머러스하다. 진지할 것 같지 않은 장난꾸러기들은 하나씩 호기심을 가지고 졸던 고개를 들어 데이비드 매컬로 선생을 쳐다보며 수업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성적이 우수한 아이도 중간인 아이도 느린 아이도 모두 그에게는 하나 하나의 개별적인 아이들이었다. 교육계에 점차적으로 만연하는 그 수많은 불평등을 출발선부터 배치하는 입시 제도에 대한 일갈은 우리나라에도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이 책이 그의 명연설의 늘어지는 버전으로 폄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기본은 그것에서 출발하지만 이미 고등학교 교실을 떠난지 한참 되어 이제 우리의 녀석들을 거기에 들여놓아야 되는 나이의 사람들까지도 이 노교사의 위트 있는 수업 광경에 대한 묘사와 삶, 성장, 교육에 대한 직설적인 이야기들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학적 진격 명령으로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소환한 것은 이 이야기의 마무리로 맞춤하다.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곧 기대로부터, 금지로부터, 부러움으로부터,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배움은 끝이 없다. 끝이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부터 인간의 나이듦이 성숙이 아니라 아집과 독선과 망령과 뒤섞이기 쉽다. 실제 작금 벌어지는 상황들도 그렇지 않은가. 기대와 금지와 부러움과 두려움에 꽁꽁 묶여 학교 교실에서 영희와 영수로부터 출발했던 그 단순하고 쉬웠던 기본적인 도덕률마저 망각하고 벌이는 작태들이 역겹다.

 

사는 것은 준엄하고 어렵다. 항상 이런 교사의 조언과 질책을 둘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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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1 0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1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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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하여 죽을 때까지 과연 공부를 다 마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죽음을 더 안다고 해서 죽음이 덜 두려워지거나 삶이 더 의미 있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동갑인 이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죽음도 결국 삶의 일부이고 내 안에 쌓여 가고 있고 삶의 의미를 결정짓는 건 그 종결의 무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문장들, 담대하고 따뜻하고 고귀한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 그 만큼이나 성숙하고 진중한 아내의 후기까지 아련한 여운이 오래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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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6-08-28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분과 동갑이라 더 읽고싶었는데 blanca님도 닭띠?^^리뷰 감사합니다

blanca 2016-08-29 10:32   좋아요 0 | URL
아...clavis님 제가 지금 서른여섯이라면 흠, 너무 좋겠지만 이 책 출간 당시의 나이인 듯해요. --;; 과거형이랍니다. 나이가 들통나네요. ㅋ

cyrus 2016-08-29 13:46   좋아요 0 | URL
글을 쓸 때 나이와 관련된 간접적인 언급을 해도 쉽게 들통나는군요.. ^^;;

수이 2016-08-28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막 펼쳐요_

blanca 2016-08-29 10:34   좋아요 0 | URL
아, 야나님도 이 책 보고 계세요? 솔직히 너무 다운되는 책은 읽지 않으려 하는데 결국 이 책 읽고 어젯밤에 눈물을 줄줄...요새는 생로병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막막해져요. 어른들이 죽고 나면 다시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는 게 좋은 거라는 불교적 윤회관도 이제는 수긍이 갑니다. 삶에는 반드시 소멸과 종결이 있으니까요.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서 야나문에 가보고 싶게 만드네요...언젠가 용기내어 꼭 가보고 싶어요.

자목련 2016-08-29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쯤 도착할 것 같아요. 펼치기가 두렵기도 하고, 그 아름다운 문장에 궁금하기고 하고...

blanca 2016-08-29 10:59   좋아요 0 | URL
저자가 학부에서는 문학을 전공했어요. 문학적 소양이나 삶에 대한 통찰이 정말 놀라워요. 너무 아까운 사람이지만 또 어쩌면 그렇게 불꽃처럼 자신의 재능을 순간에 발산하고 간 것 같기도 해요. `죽음`에 대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이렇게 사려 깊고 예리하게 응시하며 표현한 책이 또 있을까 싶어요. 자목련님의 리뷰 기다릴게요...

stella.K 2016-08-2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읽고 싶어지네요. 아름다운 문장이라니...!
읽고 싶은 책은 쌓여만가고 읽는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ㅠ

blanca 2016-08-30 12:42   좋아요 0 | URL
이 책 정말 좋아요. 스텔라님도 좋아하실 듯해요.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힘든 일 중 하나가 `책참기` 아닐까요?^^;;

Jeanne_Hebuterne 2016-09-04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어느 정신분석의와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묻더라고요. 죽는 게 두렵냐고.
전 단박에 아니요, 전 지금 죽어도 좋아요. 했더니 그가 다시 묻지 뭡니까.
그럼, 오랫동안 안죽고 많이 아픈건요? 가령 치매, 반신불수, 그런 걸로 늙어서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죽는 건요?
말문이 막히고 숨이 막히고 기가 막히더라구요.
그의 핵심이 너무나도 단호하고 간결해서요.

blanca 2016-09-05 11:10   좋아요 0 | URL
사실 최근에 이르기까지 저는 죽음의 주체로 저를 상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랬더라도 그건 지극히 추상적이었죠. 그런데 주변에서 아프고 죽기도 하고 이런 구체적인 죽음을 목도하게 되니까 이제 자꾸 나를 대입해서 생각해 보게 되고 또 `죽음`은 결국 `죽기까지의 그 지난하고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해야 나오는 결론이라는 것에 이르니 너무 두렵고 이 생의 모든 일들이 좀 사기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굉장히 혼란스러워요. 그래서 쟌느님이 얘기하신 그 의사의 핵심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해 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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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소설적 자아와 에세이에서의 자아의 낙차가 흥미롭다. 하루키의 '나'는 도덕적으로 지탄 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적으로는 비교적 자유롭고 내면의 심연을 응시하는 지점에 가 있곤 하는 하는 젊은 남자다. 수많은 관계가 있고 때로 일탈이 있다. 하지만 실제의 하루키는 벌써 육십 대 중반에 하루에 한 시간을 삼십 년이 넘에 달려 온, 자신이 쓴 원고를 가장 먼저 보여주고 의견을 청취하는 대학 시절 만난 아내가 곁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다. 소설에서는 때로 이해할 수 없는 남자이지만 자기 고백적인 하루키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평범한 나도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그에게는 삶에 대한 어떤 예우가 느껴져 터덜터덜 걷다 갑자기 무릎을 굽혀 운동화 끈을 다시 매게 하는 견인을 얻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때로 마음이 휑해지기도 하지만 그의 고백을 듣고 나면 산다는 일을 다시 한번 어루만지게 된다.

 

이번 책에서는 그가 언제나 그러했듯 사생활에 대한 내밀한 고백 대신 그가 쓰기 시작한 일, 쓰게 된 일,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느낀 생각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어디에선가 반복된 이야기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것들을 묶어 내는 리듬은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청량한 것들이다. 번역자는 하루키의 그 문장의 리듬을 간파하고 살리려 노력한다. 시종일관 어떤 하루키적 경쾌함이 '하루키'라는 숲을 기분좋게 순례하게 하는 기분이다. 그냥 읽기만 해도 하루키적이 되는 느낌은 원래의 하루키의 그 단순 명쾌하면서도 '아님 말고' 식의 쿨한 목소리와 또 그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나름 찾아 낸 번역자의 협업이 비교적 성공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키가 스물 아홉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 유명한 진구 야구장에서의 돌연한 순간에 대한 고백은 또 다른 형태로 재생된다. 그런데 또 들어도 시원하고 부럽다. 1978년 4월의 어느 쾌청한 날 오후에 하루키는 그렇게 작가가 된다. 쓸 것이 없었던 그 평범하고 단조로운 삶과 주변 환경에서 불필요한 수식을 제거한 리드미컬한 자기만의 문체를 발견하게 되는 과정이 흥미롭다. "뭔가를 써 내는 것을 고통이라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라는 고백은 오만이 아니다. 그 자신만의 고유한 비전과 그것을 향한 프로세스에 대한 확신은 시간의 퇴적을 이겨 내고 그에게 남은 자부심이었다.

 

만일 당신의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p.110

그가 소설 창작의 비법을 으시대며 전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주변의 사람과 사물과 일들을 면밀히 관찰하여 머릿속의 서랍에 넣어놓은 다음 그것을 다시 열어 쓰고 묵혀두었다 끊임없이 고치고 또 고치는 과정으로 공력을 들이고 또 그러한 노력은 시간을 통해 진가를 발휘한다는 자신감에 대한 고백은 기억해 둘 만하다.

 

무엇보다 그가 그러한 창조력과 순발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몸과 삶에 들이는 그 사려 깊은 자세는 닮고 싶다. 하루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그 성실함이 결국은 그가 삶을 대하는 하루 하루의 무게에 대한 경의이기도 하고 쓰는 일에 대한 예우이기도 하다. 나이듦은 몸의 무게를 실감하는 일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몸의 무게는 엄청나다. 삶을 이야기할 때 몸에 대한 화제는 어쩐지 지나치게 비속한 것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는데 결국 우리가 삶을 사는 일은 몸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움직이게 하는 일에 편승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때로 깨닫는다. 그렇다면 그러한 몸을 제대로 대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삶에 대한 기본 자세 같은 것이 아닐런지. 그에게 있어 '강함'은 이러한 것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부의 심연으로 들어가 그 온갖 깊은 좌절과 악과 욕망의 잔재를 들쑤시며 언어로 형상화하는 일에는 엄청난 강한 힘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사실 강하고 건강한 몸에 기반하고 있다는 그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고작 마흔 언저리에서 어떤 결론과 체념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던 나에게 아버지 연배의 하루키의 이야기들은 가장 뻔한 것 같으면서도 필요한 이야기들을 리드미컬하게 상기시켜 주었다. 언제나 그렇듯 어떤 사안에 대한 유예적이고 자기 변명적인 대목들이 불거져 나오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 그 나름대로 하루키다운 모습이다. 내면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간 작가의 그 지극히 개인적인 삶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가 응시하고 마침내 이야기하는 것들에 위로와 힘을 받는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도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이러한 조응이 결국 하루키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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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5-02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살까말까 망설이고 있어요. 그동안 하루키 연구서도 많이 나왔고, 여기저기 겹칠 것 같아서 뭐 새로울 게 있을까 싶어요. 누구는 예전에 나온 책 제목만 바꿔서 나왔다고도 하던데...

blanca 2016-05-02 19:40   좋아요 0 | URL
저도 하루키는 에세이 위주로 읽어왔는데 복간된 것도 있고 겹치는 부분도 있고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이 책은 최근의 하루키가 집필한 내용이라 저는 처음 보는 글들이었어요. 마지막 고인이 된 심리학자 부분만 제외하고요. 여하튼 저는 흥미롭게 읽었어요. 물론 하루키적인 한계나 변명은 여전히 반복되지만 그게 또 하루키니까요. ^^;;

alummii 2016-05-02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까 말까 읽을까 말까...^^

blanca 2016-05-02 19:41   좋아요 0 | URL
읽어 보시는 게 어떨까요?^^

단발머리 2016-05-02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어요.
역시 하루키,하고 있지요^^

blanca 2016-05-02 20:45   좋아요 0 | URL
아흑, 빗소리와 너무 잘 어울리죠.

기억의집 2016-05-02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있는데 단발머리님처럼 역시 하루키! 이러면서 읽고 있어요. 하루키 글은 사물을 보는, 세상을 보는 자신의 세계관이 본인이 의도한대로 쓰는 것 같아요. 어제 하루키 읽으면서 문득 나보코프도 문장이 어려웠는데..그도 하루키처럼 곱씹은 사유의 결과물일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루키,,참 설명하기 힘든 멋진 작가에요.

blanca 2016-05-03 11:51   좋아요 0 | URL
하루키, 어쩔 수 없이 이 사람은 정말 특별하구나, 정말 글을 쓰는 사람이구나, 싶어요. 사물을 보는 눈, 그리고 그것을 언어화하는 작업에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타고난 재능이 있어요. 육십 대 중반 넘어서도 건강한 몸도 부러워요.--;; 몸에 대한 이야기도 참 배울 게 많더라고요.

마녀고양이 2016-05-15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간되었을 때는 조급함으로 구입해놓고는,
손도 못 대고 있는 책이네요. ㅠㅠ. 하루키의 강박적일 정도로 느껴지는 성실한 실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느껴지는 소설의 틀이 모호한 자유로움, 방황이 늘 매력적입니다. 삶의 치열함에 대한 극단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데 블랑카님의 글에서 ˝청량함˝이라는 단어, 꼭 맞게 느껴지네요.

blanca 2016-05-16 14:45   좋아요 0 | URL
하루키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나이듦과는 정말 다른 모습이 있더라고요. 나이들면서 사람이 유연함과 개방성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은데 육십 중반이 되어서도 청년 같은 면면이 죽지 않는 걸 보면 이래서 하루키구나, 싶어요. 저도 하루키 책은 나오면 막 초조해요. 빨리 사서 읽어줘야 될 것 같은 ㅋㅋ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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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첫 문장이다. 한때는 내 삶에 굴곡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삶이 그다지 유별나게 굴곡진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누구나 다 그렇더라. 크고 작은 파문 가운데에 놓여 있다. 많은 서사를 품고 있는 삶은 이제 읽고 듣는 것으로 족하다는 조금은 안일한 생각도 가지고 있다. 변화가 삶의 본질인데 나는 그 변화에 적응이 느리고 겁이 많다.

 

유한함, 덧없음, 불확실성, 고통, 변화의 가능성 같은 것이 찾아와 삶을 그 전과 후로 나누어 버리는 떄가 있다.

-p.223

 

저자 리베카 솔닛은 알츠하이머에 걸려 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어머니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모녀 관계는 어머니가 딸에 가지는 묘한 경쟁심으로 인해 따뜻하거나 교감을 나눈 기억이 없다. 그녀는 어머니를 이해하려고 이야기를 시작한 것일까?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러한 범위로 한정되지 않는다. 생로병사, 사회적 가치, 연대, 공감, 사랑으로 확장해 나간다. 겁이 많은 나에게 '정말 좋은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모험을 거절하지 말자.'는 그녀의 결심과 가족과 지인들의 투병, 죽음 앞에서 자꾸만 닥치지도 않은 온갖 상황들에 매몰되는 나에게 삶에 닥치는 그러한 고통들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그녀의 통찰은 너무 시의적절했다. 마치 리베카 솔닛은 나를 지금의 나의 상황을 알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격려하고 세심하게 조언한다.

 

에세이의 한계는 자기 경험의 범위다. 그것을 넘어서기가 어려워지면 신변잡기로 오그라든다. 리베카 솔닛의 이야기에는 분명 이 경계를 지워버리고 확장하기 위한 지난한 노력이 돋보인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체 게바라의 혁명 전후의 삶, 프시케의 신화,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 등의 이야기와 그녀의 목소리는 한데 어우러져 우리 모두가 삶에서 만나는 암초와 그 암초를 넘어서 꿈꾸는 것들과 시간 앞에서 소멸로 가는 길들에 대해 섬세하고 예리한 시선을 벼린다. 강요도 단정도 과장도 미화도 생략도 없다. 어머니와의 관계, 수술, 친구의 죽음 같은 그녀 삶의 이야기는 도드라지지 않으며 묘하게 어우러져 그녀를 설명한다. 그리고 읽는 이들도 그 이야기로 연결되는 패턴을 따라 함께 섞이고 확장되고 성장하기를 바란다.

 

이야기를 읽고 뛰던 가슴이 좀 가라앉았다. 다들 그렇듯이 삶의 풍경은 다르지만 생로병사와 시간의 경과에 따른 변화, 소멸의 노정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이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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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4-12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 글도 참 좋네요...
저는 레베카를 저만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했어요. 다시 한 번 읽고 싶어 원서도 구입했구요.
그녀의 이야기는 동화 속 이야기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슬픔을 담고 있죠. 그래서 위로가 되요^^

blanca 2016-04-13 13:38   좋아요 0 | URL
제가 지금까지 읽은 여느 에세이와 참 다르더라고요. 그 깊이와 넓이가 참 경이롭기도 하고...원서는 어떤 다른 감상이 느껴질 지 기대가 되네요.

짜라투스트라 2016-04-12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책이죠. 그리고 이 글도 너무 좋네요. ^^

blanca 2016-04-13 13:38   좋아요 0 | URL
아, 벌써 다들 읽으셨군요!

무해한모리군 2016-04-12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어지는 리뷰네요.

blanca 2016-04-13 13:39   좋아요 0 | URL
그저좋은모리군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가볍지 않은데 지나치게 무겁지도 않고, 한 편의 긴 서사시처럼 아름답기도 하고요.

안한샘 2016-04-12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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