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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실비아 플라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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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비극이라 상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삶을 시작한다. 
                                                                      -W.B. 예이츠 

영국의 계관시인이었던 테드 휴즈의 전처이자 그 자신 유망한 여류시인이었던 실비아 플라스는 테드 휴즈의 외도와 잇따른 별거 후 하필 백년 만에 찾아온 영국의 혹한 속에서 옆방에서 노는 두 살, 한 살의 아이들이 먹을 것을 준비해 두고 가스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을 한다.
 

그녀의 이러한 최후로 인해 실비아는  창조의 뮤즈가 되기 위한 그 금제의 벽을 뚫고 스스로가 증여물이 되는 신화 속으로 걸어 들어간 시인처럼 여겨졌다. 비극과 장렬한 최후와 치사한 치정극까지 버무려 윤색된 그녀와 그녀의 삶에 대중들은 열광한다. 아름답고 젊은 시인 부부. 한 명의 배신. 그리고 남겨진 자의 자살. 아이를 옆방에 두고 홀로 가스를 마시며 존재를 흩어버림으로써 어쩌면 남은 자들을 가장 극적으로 단죄해버린 그 간접적이고 슬픈 복수. 

결국 나를 파멸로 이끌고 말 것을 나는 욕망한다...... p.69  

이 일기는 그녀의 사후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했던 남편인 시인 테드 휴즈의 자의적인 검열을 거쳐 발간된다. 또한 죽기 직전의 일기는 그의 말을 빌리자면 아이들이 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소각된다. 그러니 우리는 조금 역겹게도 그녀의 휴즈에 대한 열렬한 경탄스러운 애정의 표현만을 내키지 않지만 꿀꺽 삼켜야 한다. 한편 세상에 나온 이 일기는 일순간 그녀를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인 남성 문화의 폭압하에 순교한 여성해방운동의 아이콘으로 등극시킨다. 또한 생전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단어하나하마다 그녀의 피가 밴 시들이 제대로 평가받게 된다. 그러니 그녀의 죽음은 남겨진 아이들의 아픔만을 제외한다면 어쩌면 그녀가 그렇게도 소망하고 기다렸던 세상의 상찬을 받는 역설적 계기가 되고 만다.
 

칠백여 페이지의 때로는 내면의 의식의 흐름에 침잠하여 읽는 이를 염두해 두지 않고 써내려간 일기를 읽어 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잡을 듯 해도 순간 나의 둔탁한 감수성의 그물코로 빠져 나가고 마는 그녀만의 독특한 어휘들과 그것들의 배열, 창작에 대한 강렬한 욕망들과 상치하는 일상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지속적인 경멸, 때로는 분노들을 단지 읽어내려가는 것만으로 그녀의 십분지 일도 이해할 수 없음을 통감했다. 그럼에도 한 여류시인의 전 생애(그래봐도 삼십 년 남짓이지만)를 관조하는 일은 그것도 적법하게 훔쳐보는 일은 나의 삶들과도 맞물려 깊은 통찰과 어쩔 수 없는 애수를 자아내게 했다. 야금야금 그녀의 고백들을 갉아 먹다 보면 어느새 인간의 삶의 유한성과 그 불가항력적 비극의 무게에 짓눌려 치사한 질투와 자잘한 오만과 욕심들을 슬그머니 내려놓게 된다.  모든 이들이 삶의 그 강퍆함과 빈곤하지만 무자비한 서사 앞에서 연민과 용서와 이해의 대상으로 재편되는 순간 그녀의 일기를 읽는 일은 작지만 의미있는 깨달음의 새순이 움트는 경이로운 체험으로 승화된다.

스미스여대의 9월 새학기가 시작되기 직전부터 테드 휴즈와 결혼하여 둘때 니콜라스를 낳고 데번에서 사는 얘기까지의 일기들이 그녀의 자살행에 대한 유효하고 직접적인 설명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기의 문구하나하나에서 흘러넘치는 자기 완성와 시창작에 대한 높은 지향과 괴리되어 있는 현실들의 간극 속에서 유영하며 치열하게 고뇌하는 그녀의 모습과 남편 테드를 자신이 설정한 완벽한 남성성의 현현으로 숭모하는 대목들은 결국 그런 남편의 배신과 두 아이를 홀로 떠맡아야 했던 그녀가 느꼈을 그 처절한 고통의 무게를 헤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글쓰기 작업을 종교적인 아우라로 휘감고 그것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삶을 희생할 용의가 있었던 이 여인의 사춘기 시절의 빛나던 영감들과 통통 튀는 재기들이 점차로 흐느적 거리는 자기 비하와 생계를 위하여 읽고 쓰는 시간을 때로는 포기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절망하는 모습들로 변질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를 보게 된다. 때로는 사랑이 어떤 목표가 세계 전부를 덮어버리고 우리를 중심으로 지구가 돌던 그 시간들. 순간순간이 너무나 명료하고 너무나 지루해서 우리는 당연히 영원을 끌고 가는 아주 긴요한 중심축이 될 줄 알았던 그 시간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안다. 더이상 영원한 것은 없고 기쁜 일의 당사자가 되기 보다는 슬프고 짜증나는 일들의 예외가 되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그럼에도 살아 나가야 한다는 것을.   

날마다 색색깔의 구슬이 꿰어진 한 줄 목걸이처럼 살고 싶어. 미래에 타지마할 같은 대건축물을 짓겠다고 악다구니같이 노력하며 그 설계도에 맞추려고 현재를 잔인하게 조각조각 찢어버리고 싶지는 않다.-.p.202 

그래, 실비아. 마치 나에게 하는 전언 같은 이 말들을 꼬옥꼬옥 눌러 담아 항상 기억하며 살아야 겠어. 당신도 이제는 편안한 휴식을 제발. 테드의 그 여인도 결국 당신과 같은 전철을 밟고 말아. 그러니 당신이 떠나고 간 그 자리 해피엔딩은 없어. 그 예쁜 당신의 두 눈이 또 당신의 손 끝에서 그렇게나 힘겹게 태어났던 그 수많은 시구들이 당신의 딸 프리다에게 연결되고 있어.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 그리고 테드는 말년에 당신과의 그 수많은 오해들과 슬픈 어긋남 대신 처음 공명했을 때의 그 눈부시도록 고귀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에 헌사를 바치게 되. 용서할 수는 없어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기네스 펠트로 주연의 영화 <실비아> 

 

p.s.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또 그녀의 딸이 그 아픈 기억을 상기시키는 이 영화에 공식적으로 악언을 퍼부어댔지만 이 장면만큼은 눈물없이 볼 수가 없다. 그녀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아이 둘을 데리고 나와 하루 종일 육아와 가사에 시달리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그녀의 존재의 이유였던 시를 썼다고 한다. 그녀의 아이들은 그럼에도 아름답게 자라났지만 둘째 아들 니콜라스도 결국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에 마침표를 찍었다. 자신들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우유와 빵을 준비해 놓고 가스가 샐까봐 문틈을 꼭꼭 여며놓았던 어머니처럼.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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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3-16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자녀를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용서되지 않아요.ㅜㅜ
책은 보기 어렵고 영화를 구해 보면 좋겠네요. 기네스 펠트로가 맡았다니 더욱 더.

blanca 2010-03-16 20:39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러니 딸은 아직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들도 자살하고.... 책은 솔직히 인내를 요하는 독서였습니다.--;;

프레이야 2010-03-16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문단, 콧등이 시큰하네요.
우리의 순정과 사랑도 어쩜 그리 변색될까요.
테드와 실비아의 고드름처럼 명징했던 감정이 영화를 보며 뒤로 갈수록 안타깝고 가슴 아팠어요.
집요하게 집착하며 흔들리던 실비아의 영혼도 그렇구요.
결국 테드 위주로 삭제되었던 부분이 많았던 것도..

blanca 2010-03-16 20:4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영화 보셨군요. 저도 너무 보고 싶어요. 테드는 얼마나 일기장을 교묘하게 삭제해 놓았는지 자신에 대한 헌사로 그득찬 부분만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아니면 그 정도로 실비아가 그를 사랑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마녀고양이 2010-03-16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저는 읽다가 포기한 책인데, 다 읽으셨네요. 조금 읽다보니 같이 늪 구덩이에 빨려드는 느낌이라 덮어버렸던 기억이 있네요. 너무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었던거 같아요. 얻는게 많으면 잃는 것도 많다.. 저는 천재들을 보면 그런 문구가 생각나요. 세상을 찬란한 색채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얻은 대신, 인생을 잃는게 아닐까 하는..

blanca 2010-03-16 20:41   좋아요 0 | URL
그죠.. 저도 중간 이후부터는 솔직히 참 힘들더라구요. 읽어온 장이 아까워서 꾹 참고 읽었답니다.^^;; 인생에서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어는 없는 것 같아요. 언제나.

stella.K 2010-03-22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일이 연속이로군요.
저도 이책 읽다 포기하게 될까 봐 못 읽겠던데 그래도 다 읽으셨네요. 축하합니다.^^

blanca 2010-03-22 14: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한동안 너무 책을 사서 지금은 있는 책 소진중이랍니다. 적립금을 조금 아껴 보려구요^^;;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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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토요일 오후 두시 대형서점 풍경. 수많은 책표지에 떨어지는 그 수많은 무심한 시선들. 그 시선들은 약간의 설레임과
아주 약간의 책 그자체에 대한 관심과 그리고 또  익명의 옆사람들에 대한 무해한 호기심들을 담고 있었다. 

나는 메뚜기처럼 서가 사이를 요령좋게 뜀박질하는 아이와 책 표지를 동시에 챙기느라 분주해서 그 대열에 참가할 수는 없었다. 너무나 많은 책들. 그래서 되레 개별의 특별한 관심을 받을 수 없고 그저 반지르르한 표지만으로 자신을 호소해야만 하는 그 가벼운 한계. 그 속에서 나를 이끌던 이 책. 프랑수와즈 사강의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슬픔이여 안녕''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나서 적잖이 실망했었다. 줄거리 대신 가벼운 그 솜사탕 같은 느낌만 남았고 나는 사강을 그 시대의 패리스 힐튼 정도로 기억하게 되었다. 파티걸. 과대평가된 미모의 작가. 그러니까 문단계에도 항상 젊고 도발적이고 사랑스러운 요정을 필요로 하니까. 열아홉살의 베스트셀러 작가는 스피드,마약, 도박에 중독되어 수많은 스캔들의 중심에 서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문학은 그 자체로 전부였다. <중략> 문학은 모든 것이었다. 최선의 것, 최악의 것, 운명적인 것이었다. 일단 그것을 알고 나면 해야 할 다른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p.204 

이런 문학에 대한 열정을 지닌 그녀가 도박에, 스피드에, 그리고 운명에 중독될 수밖에 없었던 그 자신을 변호하는 책은 아니다. 그녀는 변호하지 않는다. 합리화하지 않는다. 도박과 스피드가 우리가 흔히 연상하는 악덕과 무모한 광기의 대명사가 아니라 섬세한 사려깊음과 미덕과 용기로의 이끌림을 포함한다는 얘기가 그녀의 매력과 맞물릴 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아주 위험한 동조를 자아낸다. 기약 없는 사랑과 의미 없는 무분별에 도착되어 있는 그녀의 얘기는 빌리 홀리데이, 테네시 윌리엄스, 오손 웰스, 장 폴 사르트르에게 가 닿는다. 특별하고 의미있는 추억들은 그녀만의 청량하고 달콤한 문장들에 둘러싸여 하나 하나의 인물에 대한 아름다운 오마주가 된다. 특히나 정확히 삼십년 전 같은 날에 태어난 사르트르가 죽기 일 년 전 그녀와 가진 아름다운 추억은 너무 아름다워 기억의 갈피짬에 꼭 끼워두고 싶어진다. 

사르트르는 이미 그녀와 재회했을 때 실명 상태였다. 이 사려깊은 맹인과 이 아름답고 도발적인 젊은 작가가 열흘마다 저녁 시간을 함께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 이 책은 충분히 그 역할을 다했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사강이 사르트르에게 보낸 편지를 여섯 시간에 걸쳐 녹음하여 건네 주었다는 얘기. 사르트르는 그 녹음 테잎을 들으며 저녁 시간을 보낼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이별. 영원한 이별. 둘이 만났을 때 그 둘을 제외한 그 어떤 다른 사람의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는 그들의 그 충만한 시간도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기억의 창고를 제외하고는. 

때때로 무엇을 해야 할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 답을 나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벼락 맞은 남자밖에 없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다. 사르트르는 1905년 6월 21일에 태어났고, 나는 1935년 6월 21일에  태어났다. 이 지구에서 그 없이 삼십 년을 더 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p.192  

 

독서에 대한 얘기도 매우 인상적이다. 프랑스인들이 밟는 고전적인 독서의 경로가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카뮈의 '이방인', 랭보의 시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며 그 지점마다의 그녀의 깨달음과 추억들을 보여준다. 특히 그녀가 우리가 사랑에 빠지면 흔히 저지르는 오류인 연애 관계 속에서 상대방의 눈에 비친 자신의 미화된 영상에 대한 집착이 아닌 상대방의 진정한 본성을 추구하는 길을 걸어야 함을 책과 독자의 관계에서도 강조하는 것은 기억해 둘 만하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책에 경도되어 있는 나 자신의 모습에 흠뻑 빠지게 되니까. 그래서 특히나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그 책에 그 사람에 경도되어 있는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그 행위에 중독되기 마련이니까.  

사춘기 소녀가 무신론자의 그 아슬아슬한 공포 속에서 기우뚱대다 기댄 어깨는 카뮈였다고 한다. 솔직히 카뮈가 대머리였다면 그렇게 '반항인'에 깊이 경도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대목은 무척 귀엽다. 산비탈 위 하얀 설원 위에 앉아 카뮈의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 안에 편하게 기대는 그녀의 모습은 영롱하다. 누구나 독서에 얽힌 특히나 유년이나 사춘기 시절에는 더더욱 소중한 추억들을 가지게 마련이지만 그녀의 추억은 더 강렬하고 더 의미있는 표지자 같다.  

나는 사강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를 파티걸이 아닌 문학 그 자체를 아주 진지하고 사려깊에 받아들이는 예술가로서 기억하게 되었다. 다시 '슬픔이여 안녕'을 읽어보게 될 것 같다. 이제는 열아홉살 그녀가 하고 싶었던 그 얘기가 사실은 그 시대의 달콤한 꿈에 대한 것이었다는 사연을 가지고. 

나는 지나치게 나 자신으로서 강렬하게 살았던 것이다. 그런 만큼 다른 누군가가 내 대신 살게 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의 존재가 완벽하게 느껴지도록, 다른 누군가가 살아가는 모습을 책을 통해 읽을 필요가 있었다.-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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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2-08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강~ 그녀는 우리 여고시절 에밀 아자르와 더불어 열광하게 만들었죠.
하지만 한때 유행처럼 지나친 작가라 그후 다시 찾지는 않았는데 이 페이퍼를 보곤 솔깃하네요.
님이 쓰는 글들은 어찌 그리 맛이 나는지...너무 좋아요.^^

blanca 2010-02-07 19:24   좋아요 0 | URL
근데 순오기님 저는 왜 여즉까지 에밀 아자르를 몰랐나 몰라요. 어디 갔다 온건지^^;; 순오기님이 너무 좋다니 제가 더 좋네요^^;;

후애(厚愛) 2010-02-08 0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 방문해 주시고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blanca 2010-02-08 13:52   좋아요 0 | URL
이렇게 또 친절하게 와주셨군요. 이미 반나절이 지나갔는데 지금부터 행복하게 지내겠습니다.^^ 후애님은 지금 취침중이시겠죠?(아마도 시차가) 행복한 꿈 꾸고 계시기를....

gimssim 2010-02-08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강의 책이 새로 나왔군요.
고백하자면 먼 옛날 사강에 열광한 건...아마 그녀의 보이시한 모습 때문이 아니었나 싶군요.
나이들어 읽는 <슬픔이여 안녕>은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지금에 와서 고백하는 <고통과 환희의 순간>은 또 어떨까? 기대가 됩니다.

blanca 2010-02-08 22:2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중전님. 반갑습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짧은 머리, 그리고 당돌한 행동들. 전형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보이쉬한 모습인 것 같아요. 안그래도 제가 너무 뭘 몰랐을 때 대충 읽고 평가한 것 같아 조만간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고통과 환희의 순간>은 생각보다 훨씬 진지한 책이더라구요.
 
작가의 집 - 책들이 탄생한 매혹의 공간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 지음, 이세진 옮김, 에리카 레너드 사진 / 윌북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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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은 우리를 볼 줄 아는 눈과 마음과 혼이 있었다. 그 집에는 합의, 요청, 깊은 공감이 있었다. 그 집은 우리의 일부였고 우리는 집의 신뢰를 얻어 은총과 축복의 평화 속에 살았다. -마크 트웨인 p.128  

죽어있는 사물의 틈새 마다 삶의 숨결을 불어넣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사물이 살아서 삶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우리는 그래서 집을 예사롭게 보고 지나갈 수가 없다. 특히 읽고 쓰는 것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것의 역사를 부려 놓는 서재에 대하여 가지는 그 소망과 애정의 깊이는 한정없다. 아름답고 특별한 서재를 가진 이들의 사연과 더불어 그것을 염탐하는 재미는 황홀하다.  

『보그 이탈리아』의 편집장을 지냈던 저자의 글과 『엘르 인터내셔널』등에 사진을 싣는 작가의 사진이 만나 이루어낸 공동성과는 아슴푸레한 추억의 그리움이 감싸는 반짝이는 사연들의 향연이다. 버니지아 울프, 마크 트웨인, 헤르만 헤세,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을 제외하면 생소한 작가들이지만 그들의 독특한 서재와 각각 말미에 실린 작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만나는 지점에 서는 것은 안온하고 유쾌했다. 더불어 새로 알아가는 작가들의 생애와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축약된 그들의 저작에 대한 관심은 부록으로 얻는 셈이다. 



 

이탈리아의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서재가 인상에 남는다. 바다를 면한 통유리창 앞에서 읽고 쓰는 것에 대한 로망은 누구나 한번쯤 가져봄직하다. 하지만 그의 서재가 뇌리에 박힌 것은 친구 파졸리니와의 '두 집 살림'덕택이다. 

두 친구는 집을 반쪽씩 차지했다. 파도의 리듬처럼 이해,우정,애정이 갈마드는 짧은 시기가 시작됐다.-p.446 

연인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친구와 공간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영역과 인생을 존중해 주는 일은 특별한 지향처럼 받아들여진다. 나의 절친한 친구와 각자의 연인을 둔 채 함께 읽고 쓰고 한다는 것은 각자의 인생이 평행선처럼 나란히 놓여지며 때로 교차하는 일이라 어렵고도 특별히 충만된 삶이다. 모라비아는 이 친구 파졸리니의 죽음으로 비극을 맞게 되지만. 

항상 하늘색 종이에 글을 썼다는 버지니아 울프와 한 때 그의 동성 연인이었던 비타 색빌웨스트의 집,서재를 같이 놓고 비교해 보며 읽는 재미도 가질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클링소어의 마지막 여름'의 배경이 된 카사카무치의 집 사진을 같이 펼쳐 놓고 작품의 배경을 받아들인다면 생생하고 절절한 독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들이 가고 남아 그들의 펜끝에서 흘러나오던 수많은 이야기들의 마침표 만큼 허전하고 아쉬울 그 공간은 때로는 연인이, 때로는 자식들이 남아 그들의 삶 자체로 갈무리하고 있다. 과거로 흘러간 이야기들은 언제나 한 겹의 환상이 덧씌워져 꿈처럼 아득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삶이 꺼지고 남은 그 잔영이 드리워진 그들의 서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서재에서 시작하고 끝났을 그들의 읽고 쓰는 것에 대한 사랑이 전해져 와 그들의 문장들을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 없게 된다. 아름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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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2-06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외국 작가들의 집, 책들이 탄생한 매혹의 공간이라니 관심이 확 쏠리네요.^^
서해문집에서 나온 '작가의 방'에서는 우리나라 대표작가 6인(이문열, 김영하, 강은교, 공지영, 김용택, 신경숙)의 서재를 보여주지요.

blanca 2010-02-06 23:59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이 얘기하신 비슷한 책을 읽었던 것도 같은데 작가 이름들을 보니 다른 책이군요. 솔깃합니다. 이런 류의 책은 그저 보는 것 만으로도 괜히 흐뭇해져요. 언젠가는 저도 아담한 서재를 꼭 가지고 싶어요.

순오기 2010-02-07 16:56   좋아요 0 | URL
작가들의 서재는 정말 부러움의 절정이지요.^^
 
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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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태인 수용소에서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그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나의 놀이로 제안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처연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삶의 고통의 격자 속 틈바구니에 유머를 불어넣는 것은 가볍고 경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삶과 인간자체를
긍정하는 일이다. 

스티븐 킹은 소위 잘 팔리는 작가다. 잘 팔린다는 말만으로는 어쩌면 그의 상업적 성공의 폭을 온전하게 담아낼 수 없을 만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저리>,<쇼생크탈출>,<스탠 바이 미> 등 영화화되어 이중의 성공을 거둔 작품만도 상당하다.
이런 잘 팔리는 작가가 글쓰기에 관련한 책을 낸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자
지극히 상업적인 계산에서였을 공산이 크다는 단정은 아무리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극찬을 해대도 거부감만 더해갔다.
그러다 갑자기 정말 욱해서 시작한 독서는 이 책이 단조롭고 그저그런 창작법 강론이 아니라 그의 미니자서전이고
오늘날 소설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정찬에 인생 전체를 관조하고 때로는 그것에 대한 깨달음들이
묻혀 있는 작은 철학서이도 했다는 깨달음으로 잠시 숙연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뻥' 터지는 책이라는 데에
무조건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마구 강요하고 싶어진다. 



자, 그저 놀겠다는 일념으로 동생의 배설욕구를 존중해 주지 않았던 형 덕택에 덩굴옻나무로 밑을 닦아 녹말물에 6주를 좌욕해야 했고, 킹왕짱 전자석을 만들겠다고 의기충천한 형을 뒷받침해주다
건물전체 전기가 나가 경찰이 출동하고 자동차전용극장에 가 있다 "스티븐 킹, 부인이 진통중입니다!"라는 방송을
들어야 했던 사내의 이야기들 앞에 진지한 척 터지려는 웃음을 꾹꾹 누르지는 마시라. 그리고 '그게 전부다'라고 섣불리
단정짓지도 말고. 가출한 아버지 덕택에 청소 일을 해서 두 아들을 키워낸 엄마 밑에서도 유머와 익살을 소중한 보석처럼
그러안고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낳을 수 있었던 그의 얘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장담한다.
'톰 오소여의 모험' 보다 더 재미있다.

어린 아들이 표절한(^^) 만화를 보고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 보라고 독려하고 실제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자매들에게
돌려 읽게 한 엄마의 사려깊은 배려가 있었기에 오늘의 그가 있지 않았을까. 이 사랑스러운 개구쟁이 형제가 장성하여 어머니의 임종을 맞는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이 대목에서는 스티븐 킹의 감정표현이 전혀 없다. 그저 그날의 정경과 그날의 행동을 담담하게 얘기하고 있을 뿐. 

어머니의 눈길이 데이브(형)와 나, 데이브와 나, 데이브와 나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72㎏이던 어머니의 체중이 40㎏으로 줄어 있었다. <중략> 우리는 번갈아가며 어머니께 담배를 물려드렸다.
"내 새끼들." 

이 대목.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고 싶다. 남편 없이 밑바닥 육체 노동으로 키워낸 아들들. 그리고 그 옆에서 맞이하는 죽음.
"내 새끼들."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었다. 

한편 그의 성공가도에서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던 알콜과 마약 중독이 유유히 걸어나온다. 그 와중에도 우리의 스티븐 아저씨는 유머를 잃지 않는다. 알콜 중독자에게 술을 참으라고 하는 것은 설사병 걸린 사람에게 똥을 참으라는 얘기라고. 그가 인생에서 쫓겨난 것 같은 기분(이 잘 나가는 사람이 이런 느낌을) 속에서 걸어나오기까지의 작품들 속에는 술과 코카인에 대한 은유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낸 암시들 속에 그의 고통에 대한 상념이 절절히 배어 있었던 것이다. 

창작론 대목도 참 유쾌하고 재미있다. 인위적인 플롯의 도식과 주제를 향한 전진배치 대신 상황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얘기의 선호는 당연하게 대중들의 호응을 끌어내었다. 특히나 부사,대명사,수동태를 혐오하는 장면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한 번 귀기울여봄직하다. 평이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강조하며 좋은 글을 쓰려면 근심과 허위의식을 벗어 던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닐런지. 지옥으로 가는 길은 부사로 덮여 있을 거라고 방방 뛰며 흥분하는 대목에서는 절로 웃게 된다. 갑자기 김훈의 <공무도하>에서 여주인공 노목희의 출판사에서 부사와 형용사의 용례사전을 간행한 대목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 출판사는 음. 

요즘 드는 생각이 한 가지 있는데 글을 잘 쓴다는 것. 특히나 소설가의 역량의 핵심은 그럴듯한 문장 수사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풍요로운 상상의 지도를 그려보이는 것에 있지 않나 싶다.  문장을 현란하게 포장하는 기술이야 연마가 가능하지만 그 문장 속에 진실의 핵이 박혀 있는 이야기를 불어넣는 작업은 직관에게 인도받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만난 스티븐 킹의 창작론은 반가웠지만 그래서 씁쓸하기도 했다. 결국 뛰어난 소설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이 책 집필중에 당한 대형 교통사고가 말미를 장식한다. 이 책이 단순한 창작론으로 매듭을 짓지 않게 된 우연이기도 하다.
쾌감때문에 글을 쓴다는 그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 그 노고를 금전적인 것 뿐만이 아니라 건강으로도 치하받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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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10-02-01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안 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더 보고 싶어지네요 :)

blanca 2010-02-01 22:49   좋아요 0 | URL
이매지님 저도 안볼라다가 슬쩍 본 책인데 대박입니다. 꼭 보세요~

라로 2010-02-02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래서 스티븐 킹의 이 책만 읽고 그의 다른 책은 안 읽었어요~.^^;;;
사실 그의 책들이 제가 좋아하는 쟝르도 아니긴 하지만 말이지요,,,,,

blanca 2010-02-02 21:46   좋아요 0 | URL
nabee님 저도 이 책만 읽고 그의 소설은^^;; 제가 좋아하는 장르가 아닙니다. 이런 책 읽으면 왠지 그 작가의 다른 책들을 읽어줘야 할 것만 같은 부책감이 막 들어요--;;

순오기 2010-02-03 11:56   좋아요 0 | URL
나도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만 읽었지만, 우리 애들이 좋아해서 사주거나 도서관에서 빌려다 줬어요. 샤이닝은 아들녀석이 친구 빌려줬더니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가져 가 버렸어요.ㅠㅠ

302moon 2010-02-02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4년에 구입하고 읽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는.
스티븐 킹의 소설보다는, 그의 창작론이 더 끌리더라고요. :)
애초에 소설을 읽으려 시도도 안 했지만/
친구가 좋아한다고 해서,
미저리는 언젠가 읽으려 계획했다가 아직도=_=

blanca 2010-02-02 23:54   좋아요 0 | URL
저를 비롯 이 책만 읽으신 분들이 많군요^^ 저도 시도도 안했고 솔직히ㅋㅋㅋ 계획도 없답니다. 미저리. 진짜 그 포스가 대단하죠. 그런데 또 원작은 안읽게 되네요. 다 비슷한 것 같아요^^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 최영미 산문집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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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기 같은 눈에 폭폭 발을 담그며 만나러 간 고등학교 동창들의 눈에는 이제 더이상 열망이 없었다.
대신 피곤체념이 버무려진 눈동자가 각자의 고충과 애환들을 드러낼 때만 형형했다. 

난 전세계에서 터졌을 어마어마한 양의 불꽃들을 상상했고, 내가 옛날에 헛되이 쏘아올렸던 마음의 불꽃들을
생각했다. 내 것이 아니었던 열망들에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하고, 난 돌아섰다. 안녕. 무모했던 날들이여.-p.230

에메랄드빛이 바랜 타자기가 잿빛의 물빛을 머금고 오롯이 놓여 있는 표지는 왠지 바랜 열망들과 꿈들을 상징하는 대유로
보여 마음이 끌렸다. 책을 읽다가도 몇 번이나 표지를 다시 넘겨보고 그 타자기를 쓰다듬어 보게 되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표지와 가볍고 화려해 보이지 않는 속지의 재질들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물리적인 책의 외형만으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을 만큼이었다. 북디자인이 가지는 무게를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가벼운 책은 소박한 내용에 맞춤한 옷 같았다. 

한국에서 여류전업작가로, 게다가 시인으로, 독신으로 살아나가는 것에 대한 쓸쓸한 고충들이 서른에 끝난 잔치 타령으로
상처받은 그녀의 입에서 절절하게 나온다. 사실 나부터도 그냥 그 시 제목에 같이 흥청댔던 당시의 기억 속에
그녀를 도발적인 팜므파탈 정도로 찍어 넣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그 소비지향적 이미지에
더하여 더이상 시가 소비되지 않는 역설의 시대에서 자기 집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분투한다. 그 모습이 낯설고 슬펐다.  

그 해 여름, 나는 비를 막느라 비닐포장을 두른 슬레이트 지붕아래 러닝셔츠 차림으로 누워 생각날 때마다 시를 썼다. 매일
쓴 게 아니라 매시간 썼기 때문에 시를 쓸 때마다 옆에다 쓴 시각을 적어놓을 정도였다.-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中

시인은 닮았다. 가난하다. 김연수가 시인이 아닌 소설가로 방향을 틀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도, 조정래가 아내 김초혜를 시인이라 더 예우해 주는 대목도 결국 시는 삶이 아닌 천상의 가치와 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시인들은 생활인으로는
서툴 수밖에 없다. 

그녀가 끝까지 시인으로, 그리고 당당한 여류전업작가로서 이제는 뒤로 했다는 열망을 다시 앞으로 끄집어 내어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이 생이 반드시 먹고 호흡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향하는 가치로 연결될 수도
있음을 믿어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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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09-12-30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분 작품은 책만 사놓고 아직 못 읽고 있네요.
당장(!) 읽어야겠다는 다짐이.. ㅋㅋ

저도 대문 글 보면서 뭔가(!) 느끼고 갑니다. ^^;;

blanca 2009-12-30 20:55   좋아요 0 | URL
빨리 읽어 보세요. 책장이 잘 넘어간답니다.^^ 그리고 저 벌써 오늘 하루 3잔 마셔버렸습니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노이에자이트 2010-01-01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종종 들러서 댓글 남겨도 되죠?

blanca 2010-01-01 16:39   좋아요 0 | URL
고맙죠ㅋㅋㅋ 노이에자이트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그런데 노이에자이트를 줄여 노자라고들 하시던데 사람 이름을 딴 건지 궁금하네요. 오타날까봐 두번이나 되뇌었을 정도로 어렵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1-01 16:44   좋아요 0 | URL
'새로운 시대'의 독일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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