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데려다 주고 오는 길, 오랜만에 미세먼지도 없고 완연한 봄이다. 사계절이 있는 것에 장단점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봄은 다른 공기 좋고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나라들과는 다른 특별한 감흥이 있는 것 같다. 더 농밀하고 무언가 가슴에 와닿는 뭉클함이 있다. 집 앞의 아련한 흔적 같은 산수유를 볼 때마다 뭐라 말로 하기 힘든 감동을 느낀다. 힘든 일을 겪던 와중에 이천의 산수유 축제에 갔던 기억. 난만한 꽃들은 바람에 흩날리고 나는 계속 걷다 울다 했다. 너무 젊었고 그 만큼 미숙했으니 울 일도 많았다. 다시 보는 산수유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 산수유가 영원할 수 없고 그 산수유를 보는 나도 여기에서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 문득 아득해져버린다. 내 손을 잡고 잘 걸어와주는 아이도 이제 곧 혼자 성큼성큼 걸어갈 거라 생각하면 또 그 미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한없이 아쉬워진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모든 게 영원할 줄 알았던 어린 시절의 철없음이 또 그리워지기도 하고. 꽃나무 한 그루가 온갖 단상을 길어 올린다.


나는 그냥 거리 풍경을 바라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오후의 햇빛, 부드러운 바람, 달리는 자동차, 자전거 타는 사람, 걸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무의미의 시간, 그냥 흘러가는 시간, 순간도 영원도 아닌 어쩌면 그 모두인 저무는 휴일 오후의 시간, 생이 농익어가는 셀러브레이션의 시간, 뫼르소의 시간, 니체의 시간-아 여기서 더 무엇이 필요한가.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이 바라보는 생이 찬란하다. 하루하루, 그 평범한 일상의 빛나는 찰나들에 대한 그 어떤 묘사도 철학자 김진영의 그것만큼 생생하게 와닿았던 적이 없었던 듯하다. 소멸하는 과정에서도 그 어떤 고결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저자의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존경스럽다. 생과 존재에 대한 예우를 이처럼 자신의 마지막으로 체현한 사람이 또 있을까.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도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도 프루스트도 이제는 과거의 텍스트가 아니라 저자의 

사그라드는 생에 직접 와닿아 형형히 되살아난다. 머리로만 이해했던 문장들이 생에 돌연 날아와 꽂히면 삶 그 자체가 된다. 언어는 숨을 쉰다. 읽고 쓰는 일이 존재의 마지막까지 본분이자 남겨진 자들에 대한 배려와 책무가 되는 과정이 한없이 숙연해지게 만든다. 그가 인용한 차라투스트라의 "인간은 무르익어 죽는다."는 문장은 저자 자신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 같다. 


"내 마음은 편안하다." 그의 마지막 문장이 왠지 위로가 된다. 그가 남긴 책은 남겨진 자들의 애도 일기가 되었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애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숙제처럼 남기는 대신 스스로가 미리 매듭지어 남겨 두었다. 그래서 이 책은 슬프지만 도처에 사랑이 넘쳐 흘러 따뜻하다. 절망을 얘기하는 대신, 우리가 여기 지금에서 소비하는 일상들의 비의를 부각시켜 사는 일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으로 만든다. 


이 책을 읽고 다시 산수유를 보는 일. 이렇게 서서 산수유를 볼 수 있는 지금은 영원하지 않아 눈물겹도록 찬란하다. 그것을 잊지 않기를 저자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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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31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9-03-31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blanca님의 이 글도 꼭 읽어야할 것 같아요.
마음 한 귀퉁이가 쓸쓸하면서도 너무 포근해지네요.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여전히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9-03-31 20:47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아니었으면 읽지 못했을 거예요. 감사 인사 꼭 하고 싶었어요. 기억해 두고 싶은 대목들 적어두고 두고두고 일상의 귀중함을 잊을 때 읽어보려고 합니다.

Jeanne_Hebuterne 2019-04-21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를 좋아하시는 어머니께 이 책을 보내드렸어요. 아직 택배로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그 글자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요.

blanca 2019-04-21 21:36   좋아요 0 | URL
아, 이 책이 읽는 사람을 아무래도 좀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면이 있기도 하지만 뭐랄까, 오늘 하루를 사는 일에 대한 존귀함,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애정 등이 잘 드러나 있어 어머님도 좋아하실 거라 믿어요. 쟌느님 어머니는 이렇게 사려깊은 책 선물을 하는 딸을 두어 참 행복하겠다 싶어요.
 
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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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네에서 쭈욱 살며 초중고교를 다 다니다 대학교야 거리가 좀 있는 곳으로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지만 이후 이동이 잦은 직장에서 일하게 되며 나는 내가 참으로 이동을 싫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사람, 장소, 사물에 가까스로 적응했다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절로 힘이 쭈욱 빠지곤 했다. 이미 정들어버린 것들을 떠나보내는 것도 힘겨웠다. 자고로 한곳에서 익숙한 것들에 기대어 변화, 변수 없이 살고 싶다는, 안주하고 싶다는 생각은 사실 나이듦과 더불어 더 진해져 큰 일이다. 이별도 적응도 솔직히 귀찮고 두렵다. 



장소를 옮길 때마다

나는 너무나 큰 슬픔을 느낀다.

추억이나 고통,

즐거움이 있던 곳을 떠날 때 

그 슬픔이 더 크지는 않다.

충격을 받을 때마다 출렁이는 단지 속 액체처럼

이동 자체가 날 흔든다.

-이탈로 스베보, [에세이와 흐트러진 페이지]



기다렸던 줌파 라이리의 <내가 있는 곳>의 첫장에 인용된 이 글을 읽고서야 나는 나를 제대로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그래, 난 그저 장소를 옮길 때마다 슬픔을 느꼈던 거야. 그곳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쌓았든, 진상을 만나 잊고 싶은 경험을 했든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그 불안정, 혼돈이 날 흔들었던 거야, 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목은 이탈리아어로 Dove Mi Trovo. 줌파 라히리는 영어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겠다,는 결심을 공표한 바 있다. 그녀는 십대 때 제 2외국어로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중년이 지나서야 단기로 거주하며 이탈리아어를 비로소 실생활에 직접 쓰며 부딪히는 여러 한계, 좌절,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애정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그것도 언어습득기도 아닌 성인이 되어 체류한 나라의 언어로 아름답고 농밀한 글을 써낼 수 있다니, 조각 조각 떨어진 것같은 짦은 이야기들을 읽으며 믿기지 않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다.


46개의 짦은 이야기가 모여도 그 이야기는 여전히 짧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각각의 독립성은 또렷하다. 결혼하지 않은 중년의 여자의 시선은 줌파의 시선을 통과하여 주변의 사물과 사람과 사건을 그녀만의 독특한 무형질의 색깔로 물들인다. 소설이라지만 에세이 같기도 하다. 그 만큼 누구나 읽어도 동감하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일상에 대한 묘사가 빛난다. 


이따금 내가 사는 동네 길거리에서 함께 어떤 이야기, 어쩌면 인생을 같이 만들어나갈 수도 있었을 한 남자를 만난다.

-<길>

그 남자는 내 친구와 가정을 만든 남자다. 그래서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지점에서 동행한다. 경계는 아찔하고 그 경계 너머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아슬아슬하다. 그럼에도 다시 '내가 있는 곳'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우 모두가 "불길한 목적지를 향해 조용히 나아가는 감금된 죄수들 같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짦은 기간의 빛,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뜨거운 에피소드" 앞에서 물러날 줄 아는 '나'는 지극히 평범하다. 줌파 라히리는 뜨겁고 강렬한 서사를 만들기 위해 무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안온하고 단단한 현실에 착 달라붙어 안주하지도 않다. 그 절묘 한 균형 지점을 간파하는 작가의 저력에 그저 놀랄 따름이다. 외국어의 체를 걸러 건너간 지대는 어쩐지 더 핍진성이 있고 간명한 이야기들로 웅성거리는 것같아 인상적이다. 낭비도 잉여도 결핍도 없다. 때로 말로 주워섬길 수 없었던 그 수많은 모호한 감정들이 그녀 앞에서 비로소 이름과 실체를 얻으며 시원해지는 느낌이 반갑다. 문구점에서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정들었던 주인 가족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것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하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방향 잃은, 길 잃은, 당황한, 어긋난, 표류하는, 혼란스러운, 어지러운, 허둥지둥 대는, 뿌리 뽑힌, 갈팡질팡하는, 

이런 단어의 관계 속에 나는 다시 처했다. 바로 이곳이 내가 사는 곳, 세상에 내려놓는 말들이다.

결국 내가 떠나고 싶었던 그 지대가 결국 내가 사는 곳이다. '내가 있는 곳'이다.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가 돌아오는 곳이 내가 있는 지점이라 안심이 된다. 흔들리고 당황하고 표류하며 일상을 사는 것. "불길한 목적지"가 종착점이라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나날이 늙어가는 그 시간들의 무게에 대한 사려 깊은 담담한 이야기가 깊이 와닿는다. 역시 그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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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3-26 1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님. 이 책 벌써 읽으셨군요!
저도 줌파 라히리의 신간이라며 좋아하면서도 이탈리아어로 쓰여진 소설이라 해, 아아, 그전 소설보다 좋지 않을 수도 있으려나? 살짝 의심했는데 읽어야겠네요. 읽겠습니다.
줌파 라히리의 글만큼 좋은 페이퍼네요, 블랑카님.

blanca 2019-03-26 16:3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는 줌파 라히리가 너무 부러워요. 자기가 사랑하는 외국어로 이 정도의 글까지 쓸 수 있다니 문학적으로 좀 다른 차원이긴 한데 원하는 대부분의 것을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기대이상이어서 너무 짧아서 아껴 읽느라 딴 곳에 던져두기까지 했답니다. ㅋㅋ 그렇지만 너무 짧으니까 어쩔 수 없이 다 읽어버리고 말았어요. 여하튼 저도 의구심을 품고 읽기 시작했는데 이 작가는 정말 특별하구나, 그걸 부정할 수는 없겠다, 싶었어요.

무해한모리군 2019-03-26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어서 이책 읽고 싶어요. 금요일쯤 받을거 같은데 기대기대

blanca 2019-03-26 16:40   좋아요 0 | URL
도착일이 금요일이라니 딱이네요. 야식과 함께 이 책이라면 진정한 의미의 행복한 불금이 될 거라 믿어요.

붉은돼지 2019-03-26 1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저는 또 리하리로 읽고 말았습니다.
이게 한 번 입에 붙어버리니 쉽게 고쳐지지 않는군요..음..

blanca 2019-03-26 16:4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게 많아요. 지금 바로 떠오르지는 않는데 한번 굳어버리면 영 고치기가 힘들더라고요. 몇 가지가 있어 예를 들고 싶은데 생각이 안 나 아쉬워요.^^;;
 
[eBook]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18 - 모르는 영역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권여선 외 지음 / 생각정거장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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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단편집은 그 작가를, 작품을 좋아해야 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가의 지문만 남긴 채 작품이 사그라지면 때로 읽기를 멈춘다. 그래도 계속 이 작가를, 이 작가의 이야기를 기다릴 수 있을까? 질문이 시작되면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좋아하는 작가들, 모르는 작가들, 썩 내키지 않는 작가들이 한데 모인 단편집은 읽는 일을 포기하지 않게 한다. 어조도 내러티브의 성문도 달라 각각의 풍경의 초입이 서걱거리지만 그곳만 통과하면 새로운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적응이란 요원하고 새로운 이야기마다 자세를 고쳐 앉아야 한다. 긴장을 늦출 수 없고 실망할 각오와 새로운 발견에 놀랄 태세를 갖춰야 한다.


대상작인 권여선 작가의 <모르는 영역>은 어긋나는 부녀의 현실적인 조우가 편안하다. 딸과 아버지를 매개했을 어머니의 부재는 의외로 딸과 아버지의 본격적인 소통을 가능케 하는 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부모와 장성한 자식의 소통의 빈 틈은 구체적이고 진부하지 않다. 섣불리 화해하는 갑작스런 소통의 지점 대신 어느 지점에서 멈추는 절제가 좋았지만 아쉬움도 남았다.  개인적으로 오히려 대상작보다  자선작인 <전갱이의 맛>이 더 좋았다. 전남편이 성대낭종 수술을 받은 후 함께 전갱이 구이를 먹으며 나누는 '말'이 발화자에게 가지는 의미에 대한 이야기가 무심코 내뱉는 그 수많은 '말'들이 결국 나를 향한 것이었다,는 그의 고백으로 이어질 때 수긍이 갔다.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생의 비의를 찾아내는 작가의 재능이 부러웠다.


김미월의 <연말특집>은 우연한 기회에 소식을 듣게 된, 대학 시절 한동안 룸메이트였던 엉뚱한 아웃사이더였던 선배 언니를 회고하는 이야기다.  그녀가 집단에서 소외되고 버려지는 데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게 된 화자의 복합적인 심경에 대한 묘사가 흥미로웠다.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풍경의 당사자가 되거나 방조자가 된 경험에 대한 기억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죄책감과 거리낌을 느끼지만 결국 화자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에 대한 암시가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포기하거나 방관하지 않고 나아갈 길을 찾는다는 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일 테니까.


"새로운 삶은 급작스러웠지만, 급작스럽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았다."는 놀라운 통찰이 담긴 문장을 안긴 이야기는 김봉곤의 <컬리지 포크>였다.  문장이 진부하지 않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리듬의 탄력이 놀라워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근래에 발견한 가장 신선하고 귀여운 이야기였다. 내용이 무겁다면 무거울 수 있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를 무겁거나 지리멸렬하게 만들어버리지 않는 능력이 놀라웠다. 


최옥정의 <고독 공포를 줄여주는 전기의자>는 죽음을 앞둔 화자의 심리 묘사가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어 몇 번이고 멈추어야 했다. 본인이 경험하지 않고는 결코 쓸 수 없지 않을까 싶은 문장들에 작가가 이미 고인이 되었다,고 덧붙인 이야기에 그래서 그렇게 묘사할 수 있었구나,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몸 안에 가두어진 우리의 한계에 대한 자인은 슬프도록 절절하다. 쓴다는 것은 그러한 것이구나, 이토록 죽음 앞에서 그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까지 꾹꾹 눌러 쓸 수 있는 것이구나, 싶어 더더욱 숙연해졌다. 


좋아하는 두 작가의 만남, 시인 백석의 분단 이후 북한에서의 삶을 그린 김연수의 <그 밤과 마음>은 한 편의 단편보다는 중편이나 장편으로  더 나아가야 할 것 같은 아쉬운 지점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의 하루가 그가 북한에서 보낸 중년 이후의 삶 전체를 압축하기에 너무 짧아 보였다. 


최은영의 <아치디에서>는 그의 단편집에서 이미 만났던 작품이었지만 다시 읽어도 역시 또 좋았다. 완성되지 못하는 사랑이 남기는 여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기는 각자의 생에 찍히는 화인이 몽환적이고 아름답다. 


햇볕 아래에서도 읽고 어두운 밤 속에서도 읽어낸 이야기들의 여운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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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1-08 14: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계속 내리네요.
비 때문인지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바람이 차갑습니다.
blanca님, 따뜻하고 좋은 오후 보내세요.^^

blanca 2018-11-09 03:5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요.^^
 
[eBook] 너 없이 걸었다 - 뮌스터 걸어본다 5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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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길을 걷는데 뜬금없이 어딘가에서 탄내가 났다. 화재를 감지하게 하는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낙엽 태우는 냄새 같이 군고구마를 굽는 향기처럼 따스하고 그리운 느낌이 나는 냄새에 순간 멈칫했다. 설명하기 힘든 느낌의 정체를 더듬어 보니 분명 어렸을 때 추운 겨울이 오면 으레 거리에서 맡아지던 냄새였구나 싶었다. 프루스트의 마들렌 같은 그 냄새에 갑자기 내 기억이 찻잔의 꽃잎처럼 펼쳐지며 돌아오진 않았지만 지금 읽고 있는 허수경의 <너 없이 걸었다>를 재촉하게 되었다. '걸어본다' 시리즈 중 네번째. 시인이 공부를 위해 우연히 찾아와 이십 년 넘게 살게 된 독일의 도시. 그녀의 시선은 미처 거기에서 태어나 산 사람들에게 동화되지 않은 거리두기의 지점에 가 닿아 있고 이곳은 그 도시를 들어보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한 우리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어서 다행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에 대하여 쓴다는 것은 너무 다가가서는 곤란한 일이다. 한 발짝 떨어지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있고 그녀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최근 고인이 된 시인이  살고 있던 독일의 뮌스터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의 초입에는 그녀가 직접 번역한 독일 시인들의 아름다운 시가 의외의 덤이다. 거리의 풍경은 독일 전후의 역사, 시인 자신의 삶, 인용한 시인의 생애와 어우러져 한 편, 한 편이 망설임 없이 손을 내민다.  나는 그 손을 어색해하며 반가워하며 잡는다. 


모든 살아온 장소들이 어쩌면 지나간 꿈이거나 다가올 꿈인지도 몰랐다. 라일락 향기 속에 밤하늘의 별들은 하염없이 빛났다. 저 별에도 우리는 갈 수 없으리.


이제는 전쟁으로 갈 수 없게 된 시리아에서 함께 고대 도시의 유적을 발굴했던 스승이 은퇴 후에 사들인 자그마한 집에서 묵게 된 시인이 밤에 라일락 향기를 잡으려다 못 잡고 내뱉은 탄식은 그녀 자신의 에필로그를 장식하는  시처럼 빛난다. 그녀가 끝내 경유지로 여겼을지 모를 장소에 몸을 누이고 남은 이야기. "세계의 노예가 될 수 없어서 나는 내 자의로 이방인의 위치를 만들었다."는 그녀의 고백은 왠지 좀 근사하다. 고독할 때 시를 베낀다는 그녀의 스승처럼 제자는 자신의 고독을 지워지지 않을 시로 승화시켰다. 


언젠가는 그녀가 걸었던, 온갖 전쟁의 상흔과 학문의 열정과 시대와 결별할 수는 없었지만 자기만의 거리를 두며 자기 갈 길을 가는 그 꼿꼿한 성정이 한데 다 뒤섞여 한 겹씩 벗겨내어 읽어주기를 기다리는 그곳에, 뮌스터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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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소년이 온다 :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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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한 역사 속에서 인간을 본질적으로 신뢰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을 긍정하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훼손하고 폄하하고 사람이 타인의 삶을 유린하고 파괴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여전히 그러한 것들이 종국에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항변할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으로 복합적이고 그의 생은 읽기 어려운 텍스트입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단문으로 인간을 정의하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합니다. 어제는 고귀한 일을 행했던 오른손으로 오늘은 잔인하도록 이기적인 비겁한 행동을 하는 왼손을 숨기는 인간의 치사한 면으로 인간 전체를 매도하거나 역사 전체를 악으로 규정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배우는 중입니다. 나는 여전히 의심하고 회의하고 반문합니다. 아주 많이 늙어 깊이 성숙하여도 나는 똑 떨어지는 답을 얻을 거라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오늘은 여전히 많은 질문과 돌아오지 않는 답들을 더듬어 봅니다.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젊은이들의 잊혀진 잃어버린 목소리를 각자의 시선에서 복원해 낸다. 비단 열여섯 살 소년 동호 한 명의 이야기가 이야기가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뜻하지 않게 역사의 격랑에 휩쓸리게 된 청년들의 그 날의 경험, 그 일이 남긴 상흔이 그들의 이후의 삶에 어떻게 드리워졌는지에 대한 천착은 실제 그들의 떨리는 목소리를 귓전에서 듣게 하는 착각을 낳게 할 정도로 생생하고 처절하다. 작가가  그들을 '너', 혹은 '그녀'로 거리두기를 하며 객관화와 중립의 거리두기를 하려 했던 시도는 역설적으로 그럼에도 완강히 버티는 그 믿기 힘들 정도의 잔인한 사실들을 더욱 또렷이 부각시킨다. 모두가 대단한 명분이나 현학적 가치를 지향하여 온몸을 던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날, 그 장소에서 그들은 선의와 상식을 가진 인간으로서 함부로 도륙된 같은 인간들의 몸을 수습하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폭력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비슷한 죽음을 맞이하거나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어야 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단지 그랬다는 이유만으로 부책감을 느껴야 했다.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절규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 프리모 레비가 증언의 욕구와 남은 자의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여름을 견딘 자들은 결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을 유린하고 파괴하려 했음에도 끝까지 남는 건 무얼까? 이 질문은 내도록 읽는 일을 힘들게 했다. 무고한 젊은 아이들을 아직 꾸지 못한 꿈, 만나지 못한 사람, 미처 경험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함부로 도륙하고 파괴한 저들도 과연 여전히 인간일 걸까? 그들을 이미 만나버리고 살아남은 남은 자들은 대체 그 절망을 어떻게 수습하고 살아나갈 수 있는 걸까? 이러한 질문들은 끊임없이 떠오르고 잊혀졌다 다시 돌아왔다.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운다." 이야기에는 가해자들에 대한 설명이 없다. 거대한 악의 현장은 빈곤한 명분과 허접한 논리들로 뒤덮이지만 악은 여전히 악이고 그것이 짓밟아버린 선에 대한 사과나 해명은 여전히 멀다. 


"우리는 고귀해" 노동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소녀의 이야기가 긴 여운을 끌고 지나간다. 아무리 파괴하고 앗아가려 해도 결국 절대 함부로 갈취할 수 없는 그것의 고결한 핵에는 깨끗하고 절대 오염되지 않는 성역이 남는다. 그것을 어떻게든 짓밟으려는 거대한 악의 빈곤한 행사에 도취된 저들도 역시 같은 인간의 또다른 이름이라는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모순이다. 한강은 그것을 머리로 해석할 수 없고,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는 피해자들의 증언이 담긴 진혼제를 정성껏 지낸다. 소년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또 다시 그 역사를 망각하고 그 실수와 그 상처와 그 훼손을 묻어버리고 정치와 권력행사를 혼동하고 공권력의 남용에 무감각해져 무고한 생명과 인권을 유린할 가능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때로 위험하다. 자신의 욕망과 무지와 폭력이 만날 때 빚어질 비극은 인간의 존엄 그 자체를 위협한다. 이야기의 힘은 여기에 있다. 흩어진 비극적 사실들의 파편을 수습하여 이야기로 만들어 증언한다는 것은 그래서 엄중한 무게를 가진다. 경청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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