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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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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기대 이상이었다고 과장하고 싶지는 않고 총평은, 나에게 그럴 자격이 주어진다는 전제 아래, 기대의 지평선 아래 약간 가라앉아 있는 느낌으로 출발했다 역시 그가 밀어올리는  바람에 지평선 위로 와버렸다는 얘기.

그 느낌은 흡입력이 다소 떨어지고 작가 혼자 외쳐대는 것 같은 작품이 한 두개 있었고, 저자를 숨겨두고 보더라도 반드시 김연수의 것이야!,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우주 공간 얘기를 조금 남발한 느낌이 들고(내가 요즘 코스모스를 어렵게 읽고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것일수도) 사회적 맥락 속으로 개인의 삶을 가져다 대려고 한 무리수가 조금 노출되었다는 점 등을 주제넘게 지적하고 싶다. 요새 문학 작품들을 놓고 사회와 유리되어 개인의 삶 속에 침잠하여 문제의식이라고는 없다고 비판들 하지만 이 명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문학 작품 본연의 낭만성이 부옇게 흐려지거나, 지나치게 작위적이 되거나 하는 부작용이 있는 것 같다. 

단점부터 들이밀고 시작하는 후기이지만 김연수라는 작가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하는 작가이고, 도식과 틀 속에 침잠하는 고루한 소설가가 아니라 내일로 열려 있는 문을 가장 먼저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에너지가 넘치는 이 시대의 이야기꾼임은 결코 부정할 수가 없다. 그는 아주 훌륭한 작가이다. 암.^^ 

다 거론하면서 내 취향을 주장하기는 지겹고, 좋았던 단편 두 개와 어느 리뷰어의 말씀처럼 빛났던 평론에 대하여 얘기하고 싶다.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가 개인적인 경험과 맞물려 참 좋았다. 무엇보다 아내의 친구로 피아노를 조율하러 불쑥 찾아온 인도인 친구의 형상화의 리얼리티가 빛났고,그와의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소통 속에 아내의 소망을 세련되게 깔아낸 작가의 섬세함이 돋보였다. 이는 해설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김연수가 직접 번역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의 오마주라고 하는데 간단하게 언급된 그것의 줄거리가 더 매혹적이었다. 맥락의 독서가 시작되는 지점. 나는 아마도 카버의 '대성당'을 읽게 되리라. 대학시절 자원봉사를 하다 간단한 영어로 되지도 않는 소통 속에 실패한 감정의 교류만을 남긴 인도인 친구가 떠올라 더 재미있게 읽었다. 언어가 넘을 수 없는 저 영역의 소통의 영역이 또 있겠지만, 나의 생각들과 감정을 집약할 언어가 마구 엉켜 눈 앞에 둔 상대와 엉뚱한 얘기 끝에 돌연 아름다운 지점에 안착할 때의 기분은 또 색다른 것이었다. 작가도 '고독'이라는 단어에서 이 지점을 발견하고 보여준다.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는 김연수만이 김연수밖에 할 수 없는 얘기들이 마치 여러 색깔의 물감이 물에 풀어져 아름답게 섞이는 듯한 환영을 그려낸다. 자칫 돌연 이별을 선고받은 소설가의 평범한 연애담으로 전락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여자의 아버지의 직업과 그 아버지의 시력을 잃어가는 여정을 통하여 또 그것과 얽힌 권투선수의 링 위에서의 죽음과 얽혀 하나의 장대한 모자이크를 이룬다. 특히나 맹인 도서관장과 함께 여자친구가 녹음한 그 아버지의 흔적을 들으며 그 소리가 끊긴 지점. 거대한 만월을 보고 마는 마무리는 소설이 어떻게 사람의 삶 속에 녹아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지자 같아 가슴이 마구 떨려왔다.  그리고 글이 그림으로 변해 갑자기 시야를 덮는 그 기막힌 경험 해보지 않은 분은 꼭 이 소설을 읽도록.

또한 해설에서는 수많은 추천도서목록을 발견하는 멋진 우연에 가닿게 된다. 작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평론가의 평론은 차갑지 않아 좋다. 소위 무조건 까대는 평론은 이미 그 작가에 호감이 있어 책을 펴든 독자들을 진심으로 거북살스럽게 하는 것이다. 평론가가 철저히 중립적 위치에서 작품을 차갑게 쪼아대는 것도 물론 평론의 미덕이 될 수 있겠지만, 그 작가를 너무 사랑해서 그가 낳은 작품마저 예뻐해 주는 모습은 괜히 인간적으로 보여 또 한 명의 독자 친구와 소통하는 듯한 유쾌한 착각을 주기에 또 그 의미가 깊다. 특히나 '삶은 이야기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평론가의 얘기는 김연수를 그대로 집약해 놓은 듯해 가지고 싶은 문장이다. 그가 택한 김연수의 문장은 "그는 어둠 속 첫 문장들 속으로 걸어갔다."는 문장. 사실 내가 제일 지루하게 읽어야 했던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에서 나온 이 문장은 작품은 밀어내고 표현만 쏘옥 빼오고 싶은 욕심이다. 이 문장만 놓고 본다면 이런 문장을 낳을 수 있는 김연수의 그 저력은 대체 좋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대중보다 백만배는 더 깊숙한 가슴께에서 나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남들보다 백만배는 더 무거워 의자에 지긋이 내려누르며 공부할 수 있었던 데에서 나오는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그리고 이 해설에서 나는 정말 빛나는 문장들을 가져오고 말았다. 이를테면, 

오래된 문구가 있죠. 이런 것입니다. "시간은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공간은 모든 일이 나한테 일어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소설은 공간과 시간 둘다의 이상적인 매개체입니다. 소설은 시간을 보여줍니다. 곧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죠. 또 우리에게 공간을 보여줍니다. 곧 어떤 일이 한 사람한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수전 손택,'문학은 자유다') 

이렇게나 소설을 잘 정의하는 또다른 표현이 있을까? 삶이 이야기가 되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고자 하는 보편성을 지향하고자 하는 인간의 슬픈 시도와 다름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슬픈 시도를 끊임없이 떨어지는 바위를 힘겹게 밀어올리듯 해내고 있는 김연수에게 결국은 박수를 보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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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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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다. 정말. 소설이라는 장르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이 책으로 시작해보기를 권한다. 허구의 그 허술한 바람 구멍에 인생의 암팡진 의미를 꾹꾹 눌러 담을 수 있는 현대작가. 언제나 머리가 혹은 발이 차가워 역시 소설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으로 책을 덮게 만들지 않는 유일한 작가. 그를 위화라고 부르고 싶다. 

한 때 소설을 의도적으로 멀리했었다. 그 어떻게든지 비어져 나오는 보기싫은 뱃살처럼 나에게는 결국 소설은 소설이라는 한계를 자각하게 만드는 그 허술함이 거북했다. 베스트셀러작가이든, 심지어 유수의 고전 작가이든, 작위적인 반전, 입체적이지 못한 인간 군상들이 나는 지금 사실이 아닌 허구를 읽고 있다는 뼈아픈 깨달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 진저리가 났었다. 

여러 사람이 권하고 무엇보다 피를 팔아 삶을 꾸려 간다는 남자의 얘기, 학창시절 펄벅의 '대지'를 참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결국 허삼관을 만나게 했다. 이 책 일단 너무 재미있다. 근래들어 시계를 보며 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어질 정도로 소설을 잡았던 기억은 없었는데 조금만 읽다 잔다는 것이 결국 자정을 넘어 억지로 잠을 청해야 했다. 또한 그 결말이 참으로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수미상관처럼 억지로 처음과 맞물리게 하는 결말도 지겨웠고, 쓰다 지친 작가들의 필력이 마구 드러나는 듯한 느낌도 싫었었는데 그 둘다 여기에서는 저리 가란다. 그냥 눈물이 또르르, 웃음이 또르르 굴러나온다. 그 만큼 결말이 참으로 자연스럽고도 훌륭하다. 

허삼관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리얼리티를 획득한 지점은 바로 굉장히 입체적인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전적으로 나쁘지도 전적으로 선하지도 않은 딱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있는 주변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사실 허삼관의 장자 일락이가 그의 아내 허옥란이 결혼전 마음주고 몸 준 하소용의 아들이라고 마을사람들과 허삼관 본인, 또 허옥란까지 다 인정해 버린 다음에 허삼관이 일락이를 대하는 태도는 지극히 비열하기도 하고 모질다. 나는 말미정도 가서 일락이가 허삼관 친아들이라는 반전이 일어날 것을 기대했는데 세련되게도 작가는 그런 단순한 반전을 사양한다. 여하튼 허삼관이 지독한 가뭄 기간에 옥수수죽에 질려 피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국수를 사먹기 위해 일락이만 남겨두고 나머지 두 아들과 허옥란을 데리고 가는 대목은 희극적이면서도 슬프다. 남은 일락이는 고구마를 사먹으며 울먹이며 거리를 헤멘다. 그러나 이 부자의 관계는 이런 일락이를 찾아 헤메다 결국 발견하고 국수를 파는 승리반점 앞에서 극적인 화해를 이룬다. 국수를 사먹이기 위해 승리반점 앞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 온화한 미소를 짓는 그가 일락이가 간염에 걸려 상하이의 큰 병원으로 가야 하는 처지가 되자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며칠상간으로 계속 피를 팔며 상하이로 가는 모습은 피로 맺어지지 않았다고 단정지은 그 관계가 피보다 더 처절하고 진한 관계로 승화됨을 보여준다. 

허옥란에 대한 그의 태도는 또 어떠한가. 겉으로는 허옥란은 혼전 관계를 가지고 자식까지 낳아 뻐꾸기 둥지에 몰래 알을 숨겨 높는 철면피에 부정한 여자라 충분히 비난받아 마땅하며 그를 자라대가리로 전락시킨 장본인임에 틀림없다는 점에 그도 동의한다. 그럼에도 이런 그의 비자발적인 동의 속에 숨어있는 그녀에 대한 진한 애정과 신뢰는 문화대혁명당시 대자보에 '화냥년'으로 비난받아 사람들에게 삭발까지 당하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아내에게 꼬박꼬박 밥 속에 반찬을 숨겨 가져다 주는 모습에서 비어져 나온다. 또한 가족끼리 그녀를 비판하는 형식(여기에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작가의 신랄한 비판이 희화화되어 있다.)에서 자신이 유부녀 임분방과 관계를 가진 것을 고백함으로써 아내의 부정을 덮어주려는  오버스러운 용기까지 발휘한다. 그는 아내를 사랑했다. 이상적으로 소설적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지난한 삶 속에서 지루하고도 생생하게 아내를 사랑했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명제를 더 추상적으로 박제의 틀 안에 가둬버리는, 문학적 이상화의 틀을 위화는 박력있게 부숴 버리고 그 안에 새로운 사랑을 쓴다. 우리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 지지고 볶고 예쁘지 않은 사랑, 그러나 숨쉬는 사랑, 쉬이 스러지지 않는 사랑. 

그의 매혈은 비극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희극적인 요소가 섞여 희비극의 절묘한 직조물을 보는 것 같다. 마치 인생처럼. 그가 피를 파는 명분은 여러가지이다. 아들 친구의 병원비를 물어주기 위해, 맛있는 것을 가족에게 먹여야 겠기에, 아들들의 상관을 잘 대접하게 위하여, 아들들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공통의 목적은 바로 '자식'의 안위를 위해서이다. 핏줄인  아들들에게 그 피를 팔아 더 나은 내일을 선물하기 위하여 몸이 다 망가져 가더라도 오직 피를 팔기 위해 헤메는 허삼관의 모습은 부성의 상징이다. 멋있지도 사회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한 사회의 뒤켠에서 이리저리 치여 한없이 초라하고 남루하게 늙어가는 아버지들. 그 아버지들은 대단히 도덕적으로 훌륭하지도 않고 무조건적인 자식에 대한 희생을 목적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지도 않고 그저 누구는 피를 팔고 누구는 때로 상관에게 영혼을 팔고 자존심을 포기하며 오늘도 발 디딜 곳 없이 이리저리 흐느적대며 헤메고 있다.  

인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질곡 있는 서사는 실종되고 단지 방대한 독서량을 전시하고 언어유희에 도착하여 독자를 어렵게 하는 작품을 내놓고 그것이 소설이라고 한다면, 또한 이해하지 못하는 다수에게 내공이 부족하다고 폄하한다면, 그들에게 허삼관이 허옥란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로 대응해도 되지 않을까? 그 말은 마지막 문장에 있다는 ㅋㅋㅋ 너무 과해서 숨겨두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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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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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추천도서목록에서 조르바는 꼭 현학의 과시처럼 포함되어 있다. 고전이고 다수의 추천을 받는 책들은 제목만으로 내용을 결정지어 버리는 묵은 습관이 있기에 나의 생각은 음. 그리스인 조르바가 젊고 아름다운 그리스 청년인 줄 알았고, 어떤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한 신에 가까이 닿은 그런 존재일 거라 상상했다. 

책을 펼쳐봄과 동시에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그는 육십이 넘은 노인이고, 오히려 젊은 청년은 작중 화자(작가)이고,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철저한 현실주의자이며 욕망과 육체를 묶어 놓는 인습, 관념, 사회적 속박의 고삐를 완전히 풀고 망아지처럼 날뛰는 인간상이었다.  

이러한 인간에 그토록 열광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머리로 지향하는 케케묵은 이상적인 인간상에 대한 진저리와 무조건 욕망과 육체를 하위의 것으로 치부하고 꾹꾹 눌러담아 수단화 하려는 거대담론에 적극적으로 반항할 수 없는 답답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나의 전체적인 감상평은 기대이상은 아니었고, 딱 기대 만큼, 아니면 조금 덜한 정도. 일단 조르바보다 주인공의 나약한 선병질적 기질과 조르바를 지향한다고 하면서 관념론에 기대어 현학적인 어휘를 마구 섞어 대는 것이 진부하게 보였고, 친구의 언급이 지나치게 소설적이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이 소설은 충분히 매력적인 면이 있다. 고전은 반드시 고전인 이유가 있다. 절대 시간 낭비가 아니라 서사 구조가 조금 지리하더라구도 꾸욱 참고 읽으면 차를 타고 가다 차창 밖의 수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눈물겹게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정말 그랬다. 기억하고 싶은 대목들. 

조르바가 늙은 할머니가 토요일이면 이웃집 처녀를 우르르 찾아오는 청년들을 의식해 곱게 단장하는 모습을 철저하게 비웃고 무시하는 대목. 그것으로 할머니는 종말을 맛본다. 여자는 언제까지나 남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본성을 지녔다는 것을 희화화해서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독자는 포복절도하게 된다. 유언이 조르바를 붙잡고 "나를 끝장낸 건 바로 너다." 라고 했다면 여기에서 배꼽을 쥐어잡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조르바의 여성에 대한 폄하가 조금 거북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 대목에서는 기탄없이 박수를 칠 수 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조르바의 외할아버지가 항상 갓 도착한 나그네를 탐색하여 찾아내어 대접하고 "말하소!"라고 외치는 부분. 나그네를 따라 간접경험의 길을 떠나는 조부에 대한 회상이 너무나 몽환적이면서도 아름답다.    

조르바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답답한 가슴팍에 시원한 얼음물을 마구 들이부어주는 기분이었지만, 특히 이 말은 꼭 메모해 두고 싶었다. 이 얘기를 심장에 박아 두어야지. 사람이 미워질 때마다. 열어 보아야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그리고 이 책에서 나는 그 누구보다 오히려 조르바보다 마치 퇴물 기생처럼 묘사되고 있는, 그러나 조르바 앞에서 여자이고 싶어 우스꽝스런 치장으로 다시 여자로 태어나고 미래를 꿈꾸는 가련한 부불리나를 제일 사랑하게 되었다. 크레타의 혁명당시 온 네 나라의 제독을 무릎위에서 가지고 놀았다고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그녀의 허풍이 너무 귀여워 볼을 꼬집어 주고 싶었다. 그녀는 조르바와의 결혼을 꿈꾸다 비참하게 죽는다. 그녀의 죽음을 기회로 그녀의 하찮은 물건들을 어떻게든 훔쳐가려고 전전긍긍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추한 인간 원형의 밑바닥 욕망을 극대화해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려 나의 사소하고 추잡스러운 작은 욕심들을 채우려는 인간의 가장 저급한 모습.    

 

조르바가 추진한 케이블 고가선이 다 무너지면서 그들의 갈탄광 사업은 망한다. 그럼에도 그 지점에서 그들은 마음껏 마시고 춤추며 그 순간 오히려 해방감을 느낀다. 나는 이 결론이 좋다. 리얼리티. 실존 인물이었다는 조르바와의 아름다운 인연은 여기에서 끝이 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번역자의 후기에서 보면 조르바의 딸이 환갑이 넘어 카잔차키스의 무덤을 찾아온 얘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유대는 사후에도 피가 되어 흐르는 것 같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철학서를 대한 느낌이었고, 나에게 조르바 같은 인연이 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리게 하였으며, 고전을 읽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게 한 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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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1-1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도 많이 들어 읽은듯한 이 책을 읽기로 이 연말에 문득 결심을 한 것은 누군가 나를 조르바 같은 인간이라고 불렀기 때문인데, 이 리뷰를 읽으니 읽을 힘이 나네요ㅎ (땡투를 드리며 휙)

blanca 2009-11-12 13:40   좋아요 0 | URL
저도 읽었는지 안읽었는지 모르는 책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올해부터 리뷰를 꼭 쓰기로 결심한 거구요. 읽기만 하고 기록을 안남기니 참 허무하더라구요. 조르바 같은 인간은 극찬인데요? 꼭 읽어볼만한 책인 것만은 분명하답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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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나는 작가. 감히 전업작가에게 경쟁심 생긴다면 참으로 시건방지게 들리겠지만 이 작가는 정말 대단한 사람임이 분명.  

일단 그의 인문학적 지식의 깊이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음. 운동권이라야 작가 연배가 설명해 주니 넘어가고, 대체 일제 치하 및 독일 전후 상황, 또 천체 관련 지식까지(물론 이는 '코스모스'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임.) 그 절대로 대충 넘어가는 법 없는 지식의 깊이와 정확성에 소설은 치열하게 탐구하는 것이라는 명제에 충실한 작가2로 임명함.(이미 한 평론가가 오정희님에게 써 먹었으므로) 

또한 그는 시대 의식 있는 소설과 더불어 말랑말랑한 연애 소설에도 상당한 저력을 보여 주는 보기 드문 작가인 것 같다. 소설도 결국은 작가의 인생을 뛰어넘을 수 없다지만 그는 그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치열한 공부로 가능한 것임을. 

이 소설은 보기에 따라 상당히 난삽할 수 있다. 일단 시점의 이동과 시대의 이동이 분주하고, 시대 배경에 대한 개관이 있다지만 관심이 없는 부분이라면 모조리 지루한 것으로 폄하되어 가독성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다. 진지한 소설이고 ,흥미 본위의 통통 튀는 서사를 기대한다면 글쎄 강추는 못하겠다. 그러나 소설이 소설이상으로 눈을 맑게 하는 경험을 한 번 해보고 싶다면, 그래도 시대를 고민하는 무리들이 언제나 있어 왔다는 데에 안도감을 느끼고 싶다면, 지루한 생활에 청명한 사랑의 추억을 되씹어 보면서 응큼하게 툭툭 웃어보고 싶다면 이 책을 펼치라. 

운동권 학생인 '나'가 또 같은 사회에서 만나게 되는 여자 '정민' , 끊임없는 단서의 결정체로 작용하는 여체의 누드 사진을 불태워 버리려 했던 '나의 할아버지', 한밤에 정민을 오토바이 뒤켠에 태우고 지금 아니면 벗꽃이 절하듯이 고개를 숙이는 터널을 통과할 수 없다고 꼭 지금이어야 한다고 얘기했던 '정민의 삼촌', 그리고 우연히 만난 사내의 분신자살로 인해 인생 통째를 시대에 저당잡혀 버리는 프락치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이길용.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은 헬무트 베르크. 유태인으로 사랑하는 아내 안나를 두고 수용소의 가스실로 들어가는 동족을 위해 역설적으로 더 즐거운 음악을 연주했던. 그리고 결국은 안나에게 버림받는. 이들을 통해 작가는 얘기한다. 시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 군상. 우연의 사회. 그 사회에서 그러나 행복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인간의 고귀함. 시대적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철학적 성찰까지 나아갈 수 있는 작가의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게다가 그의 제목들은 그 하나하나가 시구같다. 책의 제목도 그렇지만. 제목 짓기에 상당히 능한 듯. 시로 등단했었다는 약력 덕택인지. '지옥불 속에서도 붐붐할 수 있는', '건포도 폭격기와 낙타의 역설'. 이런 제목들은 대체 어떻게 터지는 거지? 질투난다. 서사 전개의 다이나믹함과 문체의 유려함, 둘 다가 능통하니 이건 모. 다만 우연의 남발. 그 누드 사진으로 등장 인물들을 다 엮어 버린 것은 지나친 도식화의 집착으로 보임. 사실 소설적 허구의 가장 취약한 지대에서 김연수도 자유로울 수는 없는 듯. 그렇다고 자기 얘기만 이름 바꾸고 주위 사람들이락 섞어 줄창 해댈 수도 없고. 허구는 그 간들간들한 허리를 툭 치면 바로 쓰러지는 형상이고. 소설이 붙들어야 하는 화두는 참인생 같으면서도 그 스토리가 다들 한 번쯤 살아 보고 싶게 탐나게 만드는 것.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대중들의 요구인 것을. 간질간질한 연애담도 잘 쓰고 여하튼 아주 훌륭한 작가임은 분명한 듯. 아마 팬이 될 것 같다.  

간질 간질 발바닥 긁고 싶은 표현은 이런 것. 

그 순간, 그때까지의 내 인생은 물론이고 과연 있을지 없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내 전생과, 그 전생의 전생과, 그 전생의 전생의 전생과, 그 나머지 모든 전생들까지도 아주 근사한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진정을 고마움을 느꼈다. 

정민과 프렌치 키스를 하면서. 이런 표현 정말 근사하다. 좀 일찍 읽어둘 것을 ㅋㅋㅋ 

섭동에 대한 문장도 그때 외웠다. 별들의 집단 내에서 각별들은 중심주위를 돌게 되는데. 이런 운동을 일으키는 주된 힘은 집단 전체의 중력이다. 그러나 별들은 가까이 지나가는 다른 별들로부터 계속 인력을 받는다. 이때 두 전체가 서로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충돌이라 하고, 진행경로를 바꾸면서 서로 비켜가는 경우를 조우라고 한다. 조우가 일어날 때에는 섭동을 통해 서로간에 에너지의 주고받음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진행경로와 속도가 변하게 된다. 그게 바로 섭동이다.  

'섭동' 작가는 이길용이 막무가내로 외운 개념으로 가장 중요할 것 같은 이 대목에 설명을 생략했다. 의도적으로. 사실 이 부분에 이 작품의 주제가 함축되어 있다. 집단 전체의 중력. 시대의 영향. 별들은 인간. 섭동과 조우는 인간들 간의 관계. 그가 가장 지향하는 관계는 섭동 같은 관계가 아닐런지. 충돌하지 않고 비켜가면서도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서로의 에너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이 아름다운 개념의 발견 만으로 심 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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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뜰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4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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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년의 뜰은 오정희 연작 소설 중 하나이다. 중국인 거리를 포함하여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대부분의 성장 소설이 그녀의 소설의 재탕 삼탕이라는 얘기 및 꽤 한다는 소설가들의 추천도서 목록에 대부분 포함되어 있어 언젠가는 읽어야 겠다고 벼르고 있었던 소설인데. 세상에  이 책 속의 단편들 너무 낯익다. 분명 읽. 었. 다. 나는 읽는 데에만 미쳐 기록하지 못한 업보로 읽었던 책도 읽은지 모르고 또 읽고 안 읽은 책을 읽은 줄 알고 이런 식이다. 다행히 정신차리고 최근들어 리뷰를 열심히 쓰고는 있지만 분명 읽었던 책을 벼르고 별러 다시 읽는 느낌은 그닥 상쾌하지 않다. 

'유년의 뜰'과 '중국인 거리'가 참 좋았고, 나머지 단편들은 어떤 체험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성. 특히나 전업주부의 외출의 기본 구도. 1인칭 시점. 서사가 빠진 듯한 문체의 유려함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아주 기가 막힌 상상력력의 소유자이거나, 인간관계가 펄럭이는 너울 같아서 다양한 간접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바에야, 그 자신 삶이 지지부난하다면 훌륭한 소설가가 되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다. 그녀의 삶이 비교적 안온해서 후기작이 초기작보다 못하다는 얘기를 언뜻 읽은 기억이 난다. '유년의 뜰'과 '중국인 거리'를 읽게 되면 은희경의 '새의 선물'과 신경숙의 '외딴 방' 등이 다 기본적으로 오정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게 된다. 그 정도로 수작이다. 작중 화자. 그리고 철저히 관찰자의 입장 견지, 뜬금없이 등장하는 언니나 친구들의 분방한 삶. 이 정도의 구도.  

시적인 소설은 이 작가에게서 비롯되었나 보다. 수많은 의성어, 의태어 들의 활용과 공감각적 표현 들은 경탄할 만하다. 평론가의 말처럼 소설에 탐구적 명제를 실천한 이 작가에 쏟아지는 찬사들에는 진정성이 있다. 이런 표현들. 

   
 

모처럼 잠이 들었을 때에도 힘없이 벌린 입에는 잔울음 끝이 물려 흐득였다.

 
   
   
  햇빛이 교장 선생님의 안경을 가로지르고 그 뒤 흑판에 아아아아아아 떨며 금을 긋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의 수많은 의성어와 의태어를 정리하다 보니 상당수가 북한말이라는 것. 의성어와 의태어는 흔히 자의적으로 만드는 실수를 금하기 쉬운데 그녀의 것들은 모두 사전에 실려 있는 표준어였다. 소설도 치열한 공부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예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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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e24 2017-06-13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공감합니다!

blanca 2017-06-14 14:22   좋아요 0 | URL
예전 글에 댓글이 있으니 반갑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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