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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이야기를 복잡하게 하지 않으려면 '진실'을 말하는 것이 가장 좋다.
"아직 백 살 까지는 시간이 있지. 소설도 주제보다는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면 쓸 생각이야."
"끝까지 못찾을 수도, 있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소설가로 살겠다는……"
"그렇게 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거다."
소설이 아니다. 지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장남 히까리와 걷기 훈련 도중에 나눈 이 대화 속에서 오에 겐자부로는 이 소설이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고 현재를 고백하는 일종의 자서전 형식을 띨 것을 예고한다. 그리고 주제보다는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고
싶어하는 그의 소망은 전언처럼 실제 이 작품에서 시험된다. 산책길에서 조우하게 된 대학동창이자 영화프로듀서인 고모리의 손에 이끌려 그는 30여년 전으로 연착하며 그 담담하고 현재적인 고백을 시작한다.
그 고백 속에는 오에 겐자부로 자신의 전작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문학 작품에 대한 오마주가 녹아 있다. 그 문학 작품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전무하다면 사실 이 소설은 굉장히 난해할 수밖에 없다. 특히 여배우 사쿠라의 인생 전반을 지배하게 된 소녀시절 찍은 8밀리 영화와 동명의 제목인 시 <애너벨 리>와 그녀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미군 장교의 성적 유린과 맞물리는 지점이 있는 <롤리타>를 이해하고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밖에도 <미천한 사람 주드>, 작가 자신의 <싹 들고 아이 치기>,<만연 원년의 풋볼>과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 등은 실제 이 소설의 전개의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하므로 해설의 '소설에 대한 소설'이라는 이 작품의 성격 규정은 적절한 것 같다. 다만 이 풍요롭고 다채로운 인용 및 매개의 역할을 수여받은 이 작품들은 역으로 이 소설 자체의 본질을 모호하고 약간 난삽한 것으로 휘저어 놓고 말 위험 요소를 안고 있는 것 같다. 언급된 작품 전체를 최소한 통독이라도 해 보지 않은 나 같은 평범한 독자들 앞에서 그의 소설은 더없이 매혹적이지만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불친절한 위엄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19세기 초 독일의 작가 클라이스트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중편소설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을 영화화하는 프로젝트가 진행중이었는데, 화자가(나는 오에 겐자부로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이 프로젝트(이하 M프로젝트)의 아시아판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아역배우 출신 여배우 사쿠라, 제작자 고모리와 풀어 나가는 이야기다. 이 소설이 치유라는 관점에서 조명될 수 있는 중추에는 이 여배우 사쿠라가 있다. 사쿠라는 일본의 패전직후 전후 점령군 미군 장교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게 되다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배우 생활을 계속 하게 된다. 일본의 소녀 시절 그 장교가 8밀리로 찍은 <애너벨 리>라는 영화는 에드거 앨런 포의 동명의 시낭송을 배경으로 사쿠라를 성적으로 유린하는 마지막 장면이 삭제된 채로 사쿠라를 혼란스러운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그녀는 그 기억을 잠재 의식 속에 숨겨 두고 망각하고 있다. 이런 그녀에게 화자인 '나'는 신성로마제국시절의 영주를 대상으로 일어난 민중봉기를 다룬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을 일본의 메이지 유신 전후 일어난 농민봉기로 재해석하여 보여주고, 그녀가 그 주동자의 어머니 역할을 주도적인 것으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이 바로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되게 된다. 사실 이 농민봉기는 '나'의 고향마을에서 전승되는 이야기로 그 주동자의 어머니와 마을 여자들이 그네들의 고난와 분노를 일종의 넋두리로 합창하는 장면이 하이라이트다. 실제로 이 영화제작이 중단되고 30년이 흐르고 난 지금에서 사쿠라는 이 장면만을 영화화하자는 절충안을 내놓는다. 넋두리, 이건 우리의 정서 한과도 닮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프로젝트의 아시아판을 한국이 제작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시인 김지하가 추진하기로 했었다는 대목이다. 김지하는 그 민중봉기를 동학농민전쟁으로 재해석해서 영화화하기로 했었는데 투옥됨으로써 중단되는 것으로 얘기된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특히나 그의 어머니, 할머니, 사쿠라의 상처, 한, 그리고 그것의 배설을 통한 치유에 주목한다. 억압받는 민중의 항거 뒤에 숨어 있는 여인네들의 그 울음을 소설 밖으로 흘려 보내며 그는 그 생채기를 어루만진다. 그것은 수동적으로 엎드려 있던 그녀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녀들의 억압받은 감정의 물꼬를 튀워 줌으로써 그들의 몸에서 태어난 남성들까지도 그 삶이 가진 본질적 상처를 위무받는 대승적 차원의 치료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에 대한 문체에 대한 작가의 실험과 개방성이다. '나'는 자신의 시나리오가 젊은 영화인 그룹에 의하여 난도질 당한 것을 보고 처음에는 의아해 하지만 자신의 문체를 수정해 나가면서 도발적인 자극과 재미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이 얼마나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인가. '나'는 주제가 아니라 형식이 중요하다는 역설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형식 실험이 가능할 때 다시 쓰겠다고 얘기한다. 그것은 형식이 소통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주제는 누구나 하고 싶은 얘기들을 마음대로 집어들수 있지만 형식의 실험은 자신의 틀을, 문체를 깨어야 하는 혁명이기 때문에 저어하게 된다. 여기에 노년 소설로서의 이 작품의 가치가 드러난다. 실제로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그 과정에 대한 소설적 형식의 실험, 또 그 과정에서 화자가 청자와 함께 소통하는 형식 등이 앞서 그의 전언을 현실화해나가게 된다. 노년 자체의 그 을씨년스러움 앞에서 그래도 죽는 날까지 소설을 쓰겠다는 작가의 의지는 소통에 대한 열린 귀가 있었기에 돌올할 수 있었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쉽게 책장이 넘어 가지 않는 소설이다. 수많은 텍스트의 맥락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익숙치 않은 작품들의 인용과 심지어 그 인용이 단순한 참조가 아닌 소설을 끌고 가는 구심점 역할을 할 때는 아득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문학작품들이 독자의 말랑말랑한 오감을 충족시켜 주는 그 촉수적 견인에서 진화하여 인생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차마 말못할 그 아픈 상처들을 돌보고 위무할 수 있다는 것은 황홀한 성취의 지점이 아닐까. 넘어져서 다친 상처를 혼자 약바르고 대충 기워 놓았다고 해도 결국 그 상처는 누군가 어루만져 주어야 상흔을 남기지 않는다. 아니, 그 상흔을 다시 보며 울지 않을 수 있다. 그 누군가에 꼭 대답없는 그가 아닌, 이 책을 가져다 놓아도 괜찮지 않을런지.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의 제목을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