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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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 계나보다 몇 살은 어렸을 때였다. 서울 집에서 신도시로 출퇴근하는 길은 사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출퇴근 경로와 반대여서 곧잘 자리가 나곤 했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씻고 지하철 빈 자리에 앉으면 젖은 솜뭉치럼 졸다 목적지 방송에 용케 뛰어 나가곤 했다. 매일이 똑같이 고단하고 때로 고통스러웠다. '생각'이란 걸 할 때는 자학하게 되었고 일요일 오후만 되면 마음에 먹구름이 밀려왔다. 행복하지 않은 생각들은 그것의 원인보다 그것으로 향하는 출퇴근 길에 더 또렷해졌다. 지하철이 들어오기 전에 때로 '사는 것은 지옥 같구나.' 라고 느끼고 그러한 생각에 멈칫 안전선 뒤로 물러난 일도 있었다.

 

오랜만에 그러한 시간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였다. 이십 대 후반의 계나는 가난한 집의 장녀다. 그러한 배경 속 그녀가 흔히 연상되듯 가족 모두를 부양하거나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전적인 유형은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유명한 금융 회사에 취업도 했으니 흔히 말하는 '삼포 세대'도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전형적인 청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녀에게는 직장이 있고 예의바르고 건실한 중산층 출신의 남자 친구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출퇴근 지옥철에 시달리며 느끼는 단상들과 직장 회식에서 부딪히는 일들에 대한 감상은 이미 다 나눠 먹어버려 더 이상 나눌 부분도 없는 사라져 버린 파이에 오늘의 젊은 아이들의 가지는 전반적인 비애감을 뿌리부터 공유하고 있다. 계나가 다른 것은 어떤 명쾌함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주하는 이곳에서 그녀는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이야기는 시작되고 끝난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p.10

 

그녀의 결행은 대단한 명분이나 체제 저항적인 것이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그 지점을 포착하지 못하면 이야기는 오히려 지나치게 가볍게 어그러진다. 호주로 떠나 그녀가 겪는 일련의 실패, 오해들도 거시적인 차원에서 비판하거나 그녀의 결단 자체를 방해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이야기다. 작가는 이 개인주의에 천착한다. 집단주의나 체제에 대한 거창한 해석이나 비판 지점에 대한 집착은 그것 자체가 폭력으로 다가올 만큼 작가 장강명이 그려내는 이야기는 그것의 허위에 염증을 느끼는 듯하다. 젊음이라는 대물 렌즈 밑에 들어오는 것들은 어쩌면 가장 진솔한 속살들이다. 결국 누구나 그럴듯한 명분 아래에 각자가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어하는 것임을 부정하지 않는 데에는 어렵지는 않지만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래야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견디는 것들이 정당화된다. 때로 한국이 싫은 것은 국가라는 울타리가 든든한 방책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추구하는 그 소소한 행복들마저 자본주의의 견고한 서열 아래 가능한 것으로 전락시킬 때다. 이 서열은 내가 추구하고 싶어하는 것들마저 구속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나뉘는 지점에는 분명 돈으로 추구 가능한 쾌락과 안정이 있다. 계나도 이러한 것들 앞에서 경쟁력 없는 자신을 조소한다. 그러니까 그녀가 다수가 추구하는 것들 자체를 상큼하게 외면할 수 있었다거나 사회가 주입한 그 지리멸렬한 가치들에 무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가 떠난 것은 일종의 도피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는 그녀의 친구들처럼 계속 주저앉아 불평하고 불행해하지만은 않는다. 계나는 외부의 시선을 거두어 내면으로 향한다. 자신을 읽.는.다.

 

 

잘 읽힌다,는 것은 분명 문자 텍스트가 외면 받는 이 시대의 작가로서 무시못할 장점이다. 잘 읽히는 것이 어떤 심오함과 상충되는 지점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깊이가 밀려나갔다고 해서 산만하지는 않다. 시종일관 경쾌한 리듬으로 우리가 순응하고 불평하며 견디는 사회 체제 바깥으로 뛰어 나가 시원한 서사를 구축하는 젊은 여자의 이야기는 왠지 여기에서 언젠가는 꼭 들었어야 할 이야기인듯 반갑다. 그 날 그렇게 지옥철 아닌 지옥철을 기다리며 무서운 상상을 했던 내가 걸어나간 자리에서 불혹을 맞았다고 해서 내가 그 체제에서 탈출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다른 형태의 또다른 불평 거리를 주워섬기며 여기를 배회한다. 그러한 관성에 이러한 이야기는 날카롭게 아프다. 더 나아갔어야 한다고 생산적이고 체제적인 대안을 모색했어야 한다는 그 꼰대스러운 조언을 남발하기에 이 이야기는 너무 현실적이다. 사는 건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당연히 들었어야 하고 당연히 결행했어야 할 일들이 신선하게 들리는 이 사회의 그 이미 결정되어 버리는 모든 것들에 일침을 가하는 가장 자기다운 방법을 작가는 잘 실행했다. 이 이야기는 왠지 자랄 것 같다. 조금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유연해지길 바라 본다. 그것은 나 또한 그래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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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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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이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하다'고 평할 때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떠올리는 그로테스크는 괴괴하고 음습한 분위기다. 서른이 안 되어 새벽의 극장에서 죽어간 시인의 시에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평이라고 생각했다. 그로테스크는 진지하거나 무겁지 않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렇게 보이기 위한 과장이라고.

 

기형도의 시집에는 맞춤하게 김현의 비평이 첨부되어 있다. 그는 다시금 그의 시를 그로테스크하다고 평하고 그것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로테스크라는 말은 원래 무덤을 뜻하는 그로타에서 연유한 말이다"라는 김현의 한 문장으로 드디어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다면 내가 만난 기형도는 충분히 그로테스크하다. 사람은 부수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비평가의 이야기는 기형도의 시와 닮았다.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 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중

 

 

기형도는 세상과 아니 기본적으로 삶과 불화했던 것 같다. 그는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고 표현한다. 불행하다,고 되뇌인다. 공장에 다니는 큰누이, 병든 아버지, 헛된 희망을 가지며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던 어머니를 둔 소년은 학교에서 받은 상장도 마음껏 자랑하지 못했던 아픈 추억들을 가진 그였다. 그러나 그의 개별적 삶은 그만의 "헛것"이나 절망이 아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생명을 가지고 삶을 살아내야 하는 존재가 가지는 본원적 상처와 고통을 철저히 응시한다. 그러니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이라는 자조적인 목소리는 그만의 것이 아니다. 눈부시게 푸른, 푸르렀던 청춘은 조로했다. 그는 이미 늙어서 알아야 할 것들을, 깨달아야 했을 것들을 너무 일찍 농밀하게 가져버렸다. 그러니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는 그의 고백은 곧 유언이 될 터였다.

 

<봄날은 간다>에서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은 어쩌면 너무 많이 느끼고 보고 듣고 알아버린 그가 가져가야 하는 다른 모든 이들의 삶의 환멸, 절망을 이미 이 시인에게 지게 한 우리 모두에 대한 성찰일 지도 모른다.

 

너무 아픈 시. 그의 죽음 앞에서 김훈이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를 거듭하지 말아라.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다시는 삶을 받지 말아라."(김현 해설 발췌) 라는 이야기는 기형도가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 그리고 삶의 그 무수한 희망, 헛된 시도, 생에 대한 끄달림을 한 마디로 다 끌어다 버리는 마침표 같아 스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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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19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처럼 마음 깊숙이 시리게 하는 겨울밤이면 생각나는 시집입니다.

blanca 2016-01-20 18:39   좋아요 0 | URL
이미 읽으셨군요! 두어 번 더 읽어야 좀 이해가 될까 아직 저에게 기형도 시는 낯설고 다가가기 힘든 감이 있더라고요.

희선 2016-01-21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형도는 이름부터 시인 느낌이 많이 납니다 사람들이 많이 아는 건 <질투는 나의 힘>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그런 말 생각하기도 했는데) 맨 뒤에 나오는 <엄마 걱정>은 국어 책에 실렸다고도 하던데, 중학교인지 고등학교인지... 동시 같지만 슬픔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이도 많지 않았을 때 그런 시들을 쓰다니... 제가 기형도 시를 제대로 본 건 아니지만, 그런 어둠이 좋기도 했다고 할까 그런 때도 있었네요


희선

blanca 2016-01-21 09:15   좋아요 0 | URL
아, <엄마생각> 저도 너무 좋아서 몇 번이나 다시 읽었어요. 정제된 간결한 맛이 교과서에 딱 실릴 만한 모습이긴 해요. 저는 너무 뒤늦게 읽어서 그 치기 어린 청춘 특유의 맛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어요.
 
다르마 행려 세계문학의 숲 46
잭 케루악 지음, 김목인 옮김 / 시공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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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하이크로 미대륙을 횡단하는 <길 위에서>의 잭 케루악은 언뜻 불교의 윤회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비추었었다. 약과 여자, 방랑, 재즈에 취해 있던 젊은이의 목소리로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그의 일면이 여기에서는 전면에 부각된다. 여기에서도 작가인 그와의 경계가 거의 희미한 작가 레이 스미스, 그의 불교 수행의 동반자이자 가이드의 역할을 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시인 제피 라이더가 등장하여 마치 <길 위에서>의 불교 수행 버전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더 농축되어 있고 군데 군데 시인 앨런 긴즈버그가 얘기했듯이 하이쿠 같은 간명한 아름다운 문장들이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잭 케루악은 누구나의 마음 속에 잠자고 있는 젊은 시절의 방황, 우정, 꿈을 소환해 내어 손을 맞잡게 한다. 참으로 영묘한 지점이다. 분명 누구나 대학을 그만두고 대륙을 히치하이크로 여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처음 보는 사람과 인생 이야기를 나누고 산정에서 산불 감시원으로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님에도 그의 여정은 무언가 낯설지 않은 것들을 환기한다.

 

 

하지만 제피, 너와 나, 우리는 영원히 알고 있지. 오, 언제나 젊고, 언제나 눈물겨운 무언가를.

-p.347

 

 

지나간 것들은 특히 잃어버린 것들은 얼마간 눈물겨운 것이 사실이겠지만 사실 가장 비실제적으로 살아도 통과가 되는 젊은 시절의 모든 그 무용하거나 헛된 시도들은 더욱 그러하다. 책의 뒷편으로 가 그가 이 책을 쓴 나이를 확인해 본다. 삶의 철학자가 되고 눈 앞에서 휘황하게 빛나는 것들의 그 얄팍한 휘장을 걷어내는 게 과연 젊음과 만날 수 있을런지. 오히려 젊기에 더 가능한 것인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서른 다섯 정도. 스물은 아니고 아직 마흔도 아닌 나이. 그럼 그럴 수도 있겠다. 너무 어리면 이 이야기 속의 레이가 그랬던 것처럼 "커다랗고 맛있는 허쉬 초콜릿 바"를 포기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너무 늙어버리면 그것을 포기하고 더 큰 의미와 본질에 전적으로 삶을 바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기 힘들테니 말이다.

 

우리는 무가 곧 무라는 게 믿기 싫어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들인 걸까. 그래서 사랑하는 것들과 사랑하는 친구들을 하나하나 잃고, 마침내 자기의 인생마저 잃어버린 뒤에야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걸까?

-p.340

 

아버지의 생신, 식사 자리에서 언제나 그렇듯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담담히 부지런히 하는 당신의 모습이 왠지 눈물겨웠다. 이게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순간 순간 의식하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조차도 당연히 '무'로 갈 것이다. 여기 지금에서 오십 년의 시간만 흘러도 많은 것들은 달라지고 스러질 것이다. 당연히 믿어야 하는데 사는 일은 그런 것과 쉽게 불화한다. 아직 자신 안의 이상, 신뢰에 크게 배신당하지 않은 레이 스미스 무리들의 항상 허무와 무를 의식하며 그럼에도 삶과 사람에 대한 아름다운 전망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귀엽게 때로 지나치게 순진하게 느껴지면서도 그냥 믿어버리고 싶어지는 건 나도 사실은 이 모든 게 무라는 걸 머리로는 인정해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들이 결국 무로 가더라도 그 존재 존재마다 의미가 있고 지금도 지나가는 시간들이 충만하다고 그래서 내가 사는 일이 내가 태어난 것이 참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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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5-11-16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은 새벽인데.. 와인 한 잔 하면서 blanca님 글과 함께 하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사는 일이 내가 태어난 것이 참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라는 대목에서 그만 뭉클ㅜㅜ 정말 그럴까요? 정말 의미있는 일이겠지요?ㅜㅜ

blanca 2015-11-16 20:50   좋아요 0 | URL
달밤님, 아, 어디였을까요? 저는 오늘 와인 일잔을 위해 치즈를 미리 사두었답니다. ^^ 그래서 무슨 느낌인 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아요. 저는 이런 생각까지 해 봤어요. 제가 필립 로스를 좋아하는데 이미 그는 완연히 노년이고 절필을 선언했잖아요, 그 나이까지 살아보니 삶이 어떠한지, 죽는 게 두렵지는 않은 지 물어보고 싶어진다니까요.
 
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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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아이는 팔 년 전에 알았지. 내 수업을 들었어."라고 시작하자 멈칫했다. 음, 사회적으로 탄탄한 성취를 이룬 나이 든 남자와 아직 세상에 나가기 전의 젊은 여자와의 이야기의 도식. 필립 로스가?

 

"나는 이미 예순둘이었고 그 아이, 콘수엘라 카스티요는 스물넷이었어." 아, 솔직히 이 대목에 이르렀을 때 벌써 지겨워져 버렸다. 대체 이 나이 차와 이러한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진폭이 얼마나 넓을 수 있을까? 이런 단정 뒤에 이어지는 본능적이고 에로틱한 관계로 가는 그 경로의 세밀한 묘사가 결국 도착한 곳은 나의 편협한 예상을 배반했다. 이것은 단순히 노교수와 젊은 여제자와의 욕정에 기반한 그렇고 그러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야기가 거치는 여러 변곡점에는 찬란한 찰나적 젊음이 가지는 그 아름다움과 덧없음, 사회적 기대치에 순응하며 자기를 죽이는 삶의 기만성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늙어간다는 것, 죽어간다는 것, 언제나 인간의 예상과 기대를 여지없이 비웃어 버리는 그 커다란 운명의 무작위성에 대해 생각과 감정과 언어가 들어가고 헤집고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을 포착하려 한다. 그러니 너무 힘겹다. 그냥 무시하고 잊고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마주해야 하니까. 남녀 간의 관계가 가지는 근본적인 불안정, 불균형, 가족제도의 그 허약하고 불합리한 지점, 모든 것을 파괴하고 허물어 버리는 시간, 그리고 근본적인 존재의 유한성으로 가는 그 처절하고 초라한 늙음.

 

노년을 상상할 수 있어? 물론 못하겠지. 나는 하지 않았어. 할 수 없었어. 그게 어떤 건지 전혀 몰랐어. 잘못된 이미지조차 없었어-아무런 이미지가 없었어. 사실 누구도 다른 것을 원하지 않아. 어쩔 수 없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가운데 어떤 것과도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아. 이 모든 게 나중에 어떻게 될까? 여기서는 둔감함이 관례야.

 

이미 지나온 궤적인 젊음조차 때로는 현재가 아니기에 또렷이 떠올릴 수 없다. 그러니 그 반대편에 자리한 노년의 이미지는 흐릿하다. 아니, 또렷이 떠올리고 항상 의식하며 산다면 그 자체가 때로 고문이 될 것이다. 그러니 필립 로스가 케페시 교수의 입을 빌어 '둔감함'에 대한 요령을 가르쳐 준 것은 적절하다. 예민하고 예리하게 늙음과 노년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지성이 될 수는 있지만 삶의 요령은 될 수 없다. 이것은 메멘토 모리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케페시는 누군가에게 자신과 콘수엘라와의 이야기를 고백하지만 그 누군가의 존재는 끝까지 은폐된다. 그리고 콘수엘라와의 이야기는 팔년 전의 일이다. 그 어떤 때보다 나이차를 통해 케페시는 이 부유하고 보수적인 쿠바 출신의 '아이'에게 매혹당하지만 또한 자신이 생의 후반부에 다다르고 있음을, 이제는 상승이 아닌 하강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강하게 의식한다. 보편적인 결혼제도 안에 안착하지 못하고 아들이 여덟 살 때 가족을 떠남으로써 그 아들과의 관계에서 거의 척을 지다시피 한 케페시는 '미덕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정직의 유토피아'에 입성한다. 케페시의 입장에서 이것은 도덕적인 잣대 하에 재단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한 존재로서 자기 크기를 갖고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성적 방종은 케페시에게 하나의 표현 경로에 지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는 사회적 베일을 걷어 버리고 그 아래의 욕망의 속살을 직시한다. 케페시의 고백은 우리의 내면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는 반항아를 깨워 일으킨다.

 

여기까지. 이게 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케페시가 향한 곳은 너무나 슬픈 도저히 예상할래야 제대로 상상하기 힘든 아픈 결말이다. 그 아이, 몸으로 모든 것을 표현했던 그 아이의 추락 지점은 너무 아프다. 아이는 팔년 만에 다시 한때 자신의 교사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그 교사가 가는 곳은 마지막에 드디어 등장하는 이 모든 이야기를 들었던 미지의 누군가의 반응으로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가면 망하는 거예요."

 

그런 줄 알면서 가니까 인간이다. 필립 로스의 절필이 정말 너무 아쉬워지는 마지막 대목. 아직 할 수 있는 이야기, 어떻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자고 싸면서 놓치는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게 끌어올릴 수 있는 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간파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 이렇게 쓰는 일을 멈출 수 있는 지...

 

번역자가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 가는 길>을 덧붙인 것은 그 대목에서 제목을 따 온 작가 덕분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그 이상이다. 오늘 대학가에서 마주친 그 수많은 아까운 젊음들 앞에서 순간 아연해졌다."저건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는 예이츠의 시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삶은 노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결국 그곳으로 간다는 자명한 명제 때문이다. 젊음을 꿈꾸고 추억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감히 노년을 상상하고 꿈꾸는 사람들은 없는 자리에서 우리는 살아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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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11-03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가 정말 좋아요, 블랑카님. 정말요.

blanca 2015-11-04 09:3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아니었으면 이 책 못 읽었을 거예요. 다락방님 서재에서 보고 읽게 되었거든요.
 
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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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다 미야자와 리에 주연의 영화를 먼저 보았다. 내면의 심리를 영화라는 매체로 보여주는 것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음에도 한때 누드집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그녀는 짧은 숏컷 머리에 담담하고 물기 없는 모습으로 우메자와 리카의 끝간 데 없는 탈선을 적절하게 잘 연기해 내었다. 무채색의 유니폼을 입고 자전거를 힘겹게 구르며 은행으로 출퇴근하고 외근을 나가는 중년의 리카가 자신의 직장에서 거액의 횡령을 저지르게 되고 태국으로까지 도피하게 되는 파국은 그 과정에서 어떤 설득력이나 해명을 요구하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가 오히려 보는 이를 당황케 한다. 아마도 그것은 작가가 또한 영화를 만든 감독이 돈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 그 어쩌지 못하는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간파한 탓일 게다. 또한 누구나 그 지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자각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 판단을 해야 한다. 그것은 분명 경제적 상황이 내 개인적 자유와 어긋날 때 시작된다. 기본적인 의식주 뿐만 아니라 흔히 경험하게 되는 사람 간의 인사나 선의 교환에도 분명 돈은 유효한 매개가 된다. 그것이 부족하거나 없게 되는 지점, 돈의 날카로운 요철은 살갗을 찌르기 시작한다. 분명 인간은 그 위에 있다고 비교대상조차 되지 않는다고 배웠는데 이것이 무언가를 좌지우지하게 되는 순간부터 가치관은 흔들리기 시작할 수 있다. '삶'과 '돈'은 쉽게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메자와 리카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녀의 학교 동창, 신혼 시절 다녔던 요리교실에서 만난 친구, 심지어는 결혼 전 사귀었던 남자 친구 등의 삶이 들쑥 날쑥 끼어든다. 그리고 묘하게 그들의 갈등, 고민은 리카의 횡령과는 또 다른 시점에서 돈과 겹친다. 때로는 너무 그것을 의식하고 아껴서, 혹은 함께 사는 사람과의 돈에 대한 다른 가치관으로, 아이와의 관계에서 돈은 힘을 행사한다. 우연히 듣게 된 리카의 횡령, 지명수배 소식에서 그들 각자는 자신들이 '돈'에 대하여 가지는 그 이율배반적인 감정, 태도를 의식하게 된다. 리카가 그 날 하필 외근을 마치고 직장에 복귀하며 백화점 화장품 매장에서 점원의 유혹에 설복당해 자신이 가진 돈보다 더 비싼 화장품들을 구입하지만 않았더라면,으로 시작되는 가정들은 저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돈과의 힘겨루기의 장면이었다. 받아 둔 고객의 예금에서 일부를 잠시 꺼내 화장품을 사면서 시작되는 그녀의 고객 돈 횡령은 갑부 노인의 손자와의 불륜으로 폭주하게 된다. 어린 고학생과의 그 비현실적인 행복을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리카는 점점 더 대담하게 은행 고객들의 돈에 손을 대게 된다. 그녀는 죄책감 대신 언젠가 반드시 모두 되돌려 놓을 거라는 비현실적인 자기와의 약속에 매달리며 죄책감을 희석시킨다. 은행 문서를 위조하고 거짓말을 남발하면서도 그녀가 정작 맛본 것은 두려움이나 죄책감이 아니라 일종의 비현실적인 '자유'였다. 어떤 상황, 심지어 삶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제대로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 그것은 '종이달' 같은 환각이었다.

 

'돈'에 대한 인식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 같지만 기실은 환상, 환각과 가장 가깝기도 하다. 무엇보다 빚을 권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러한 환각은 도처에 난무하며 삶에 게재된다. 무시무시한 고금리를 숨긴 사금융의 광고 노래를 꼬마 아이들은 재미있어하며 따라하고 신용카드를 몇 장식 소지하며 그것의 신용한도가 나의 소비 여력처럼 느껴지도록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카드 회사, 각종 브랜드가 마치 개인의 정체성이나 라이프 스타일인 것처럼 떠들어 대는 매체들. 소비하지 않고 자신을 주장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분위기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종이달>에서 삶과 돈은 대단히 밀착되어 있다. 그 사람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 그 사람이 가진 것과 그 사람이 쓰는 것, 또 돈에 대한 생각 들을 들어낸다면 분명 빈한한 것이 되리라는 것을 작가는 정확히 알고 있다. 이것은 반면 그러한 것들에 밀착하여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삶의 상당 부분을 설명하는 요긴한 시점이 될 것이라는 것과 같은 얘기이다. 그러니 드문 드문 드러나는 리카를 둘러 싼 이들의 생활의 단편들은 상당히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 준다. 이를테면 마트의 전단지의 할인 품목을 체크하고 절약에 집착하는 유코가 사실은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아내와 소통하지 않고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가즈키가 왜 그러고 있는 지, 과소비 때문에 이혼당했으면서 여전히 딸에게 원하는 것들을 안겨 줌으로써 관계를 지탱해 나가려는 아키가 정작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 지를 말이다.

 

시종일관 담담한 어조의 이야기들은 사실 평범한 주부가 어떻게 거액의 횡령을 저지르게 되었는 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명만으로 향하지는 않는다. 아니 많은 것들을 설명하지 않으면서 그저 그러한 리카의 행동들을 영화에서는 갑자기 그 커다란 진폭을 이해할 수 없었던 공백을 과하지 않은 언어들이 채워준다. 그 수많은 어긋난 선택들이 모여 리카의 그 도피의 삶을 만들었음을 그 경로를 찬찬히 보여주는 것이다. 누구의 삶이든 아귀가 꼭 맞는 인과관계 안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슬프지만 처연하지만 그렇구나, 그랬구나, 하게 되는. 그것이 꼭 돈을 매개로 한 것이 아닐지라도 한 사람의 삶의 어느 지점에 가닿으려는 그 무용한 시도에 약간의 의미를 덧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야기일 것이다. 다 읽고 나면 가슴이 먹먹하고 아려온다. 그리고 나를 들여다 보게 된다. 내가 했던 그 수많은 선택들과 지금 하고 있는 이 자잘한 작디 작은 순간 순간의 움직임이 진실로 바람직하고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진정 나의 온전한 의지로 행해지고 있는가? 라는 자문에서 아연해지는 것. 삶은 상당 부분 그렇지 않을 수 도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 드니 때로 참 힘이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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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9-28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지만, 돈으로 얻을 수 없는 것도 있는데... 지금은 돈으로 다 얻을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군요 돈 중요하지만 이것만 생각해도 안 되겠죠 반대로 저는 별로 생각하지 않아서 문제군요 그래도 가끔 걱정합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그저 생각만 할 뿐이군요

돈 때문에 지금을 희생하고 사는 사람 많기도 하죠 리카는 누군가한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걸 돈으로 하려고 하다니...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쓸쓸함도 있었을 것 같네요 사람이 마음을 나누고 살면 좋을 텐데,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끼리도 그게 그렇게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선

blanca 2015-09-30 14: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리카의 학창 시절, 조금 과하게 개발도상국 아이에게 기부를 해서 문제가 되었던 그녀의 에피소드가 나와요. 결국 인정받고 사랑받고 도움을 주고 싶은 욕구가 물질의 형태로 변하여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