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스트 Axt 2016.9.10 - no.008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엮음 / 은행나무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레몬옐로색 표지에 뭔가를 올려다보는 듯한 김연수는 슬레이트 지붕 아래 종일 매시간 시를 써냈던 <청춘의 문장들>을 썼던 이십 대는 애저녁에 떠나 보내고 그러한 시간들을 반추하는 <청춘의 문장들+>을 쓰고도 이 년을 훌쩍 통과해 버린 중년으로 돌아왔다. 김연수가 걸어온 길을 묘사하는 이야기는 그의 소설보다 더 핍진성이 있다. 그가 이야기하는 시간들은 설득력이 있다. 지나고 보면 많이 맞다. 번역가 노승영이 인터뷰했고 백다흠이 사진을 찍었고(항상 소설가 백가흠과 형제인가? 혼자 궁금해 한다.) 배수아와 정용준도 합석해서 가끔 이야기에 등장한다. 죽마고우 김중혁과 음악을 공유했던 시간, 내용 없이 에너지만으로 소설가가 되었던 시간, 기본적으로 이야기가 가지는 내러티브로서의 힘에 대하여 그의 문장만큼 유려하고 진지하고 사려 깊게 이야기한다. 그의 소설에서 내용보다 형식에 무게가 실리는 건 결과론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의도였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대목. '내용은 없다'라는 그의 주장에 백퍼센트 공감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 소설적 화자와 실제 삶에서의 자신과 거리와 낙차를 두려는 조심스러운 몸짓은 오히려 그를 더욱 소설적 화자에 가깝게 느끼게 한다. 이런 사람이라면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 소설적 서사에 더 무게를 실은 듯한 느낌이 드는 정유정 작가와는 흥미로운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대하고 만들어 내는 자세의 진중함과 그것을 대하는 겸손한 자세에서는 만난다. 여하튼 언제나 작가적 화자를 충실하게 뽑아 내려고 애쓰는 그 노력이 시들지 않는 인터뷰어와 <Axt>의 가장 장기가 발휘되는 코너가 아닌가 싶다.

 

최민우라는 소설가를 잘 모르지만 그를 분할해서 또 따른 그, 잔루이치 보누치라는 남자를 가상으로 만들어 내어 이야기를 끌어간 소설가 최정화의 최민우에 대한 이야기도 울림이 있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그것을 가감없이 기술하는 작업 못지않게 그에게 어울리는 이야기의 틀 안에서 그의 인격, 성격을 소비하는 과정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누구나 얼마 만큼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 가는 게 삶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 안에 담긴 수 많은 인격들 중 하나를 형상화해서 그를 보여주려는 시도는 무용하지 않을 것이다.

 

권여선의 <봄밤>을 다룬 황현산의 서평은 서평의 경계를 확장시켜 풍요로웠다. 단 하나의 작가의 작품 이야기가 중심이 아니라 그것으로 나아가기 위해 동원한 모파상과 랭보는 황현산이 이야기하는 '현실'의 체적을 한층 두텁게 했다.

 

곽한영의 <작은 아씨들>의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실제 그 가족적 서사에 희생당한 삶을 묘사한 이야기는 놀라웠다. 실제 부정이라는 미명 아래 아버지의 조수이자 거의 하인 역할을 담당했던 작가가 만들어 낸 행복한 가족적 서사는 일견 하나의 허상이자 기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품 그 자체보다 그것을 낳은 작가의 사적 삶의 그 모순적 측면을 가감없이 전달한 측면이 흥미로웠다.

 

편집위원들의 '이런 어리석은 노력은 의미가 있다'는 자평에 손을 잡아 주고 싶었다. 어젯밤 내가 스마트 폰을 보며 잠들지 않게 한 힘을 가졌던 이런 종이 위의 활자들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그 어떤 노력과 그 어떤 에너지가 들어가는 향유에는 나를 지금 여기에서보다 더 한층 나은 것으로 느끼게 하는 환각의 힘이 있다. 그것을 잡아주어 고맙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릴케 현상 2016-09-10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제 맞아요^^

blanca 2016-09-10 13:16   좋아요 0 | URL
어머, 어머!! 그런 거죠? 역시 너무 이름이 비슷하다, 했어요.^^

[그장소] 2016-09-10 13:47   좋아요 1 | URL
백나흠은....없나요? 가나다,이래야 할것 같잖나요? 전 1인2역인줄 알았어요. 사진찍는 필명은 다흠, 글쓰는 필명은 가흠, 아...그럼 본명은 나흠인..^^ㅋㅋㅋ 시답잖게 죄송합니다!^^;

stella.K 2016-09-10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엔 김연수라 저도 사서 읽어보려구요. 김연수 좋은 줄 모르겠던데 작년인가? 소설가의 일 재밌게 읽어 생각을 좀 바꿔보려구요.

그런데 백가흠에겐 동생이 둘이 있지 않을까요? 다흠과 그 사이에 낀 동생 나흠. 그런 상상력도 하게되요.ㅋㅋ

blanca 2016-09-10 13:17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역시 재치 구단이시네요. ㅋㅋ 나흠 ㅋㅋㅋ 괜찮네요.

[그장소] 2016-09-10 13:48   좋아요 1 | URL
아, 같은 생각!! ㅎㅎㅎ

clavis 2016-09-10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 쓰리ㅋ

blanca 2016-09-10 21:28   좋아요 0 | URL
이 댓글들이 다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
 
The Vegetarian : A Novel (Paperback) - 『채식주의자』영문판
Han Kang / Granta Books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채식주의를 선언하는 것이 유별나게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다. 먹는 것이 단순히 허기를 채우고 생명을 유지하는 수준이 아닌 조금 더 고차원적인 수준으로 관리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별안간 그 앞에서 고기를 먹는 나는 어떤 폭력성에 둔감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단지 인간을 위해 대량으로 사육되고 죽임을 당하는 그 동물들의 비명을 망각하지 않고는 사실 그것을 무감하게 먹을 수 없을 것이다. 사는 일은 어떤 둔감함과도 화해해야 견딜 수 있는 지점들과 자주 만난다. 이것은 비극이기도 하고 숙명이기도 하다. 늙어 죽는 일도 사실 대단한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폭력적인 것들을 적어도 감내하거나 피하거나 하지 않고 견디기 힘들다.

 

세 사람의 시선이 있다. 어느 날 채식주의자가 된 아내 영헤의 남편, 하루 하루 꾸역꾸역 잘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던 영혜의 언니 인혜, 그리고 인혜의 남편인 예술가다. 지극히 평범했던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채식주의를 선언하며 돌발 행동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남편의 시선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시선은 따뜻하지도 애정을 담고 있지도 않다. 지극히 건조한 바깥의 시선이다. 회사 임원들 식사 자리에서의 불유쾌한 아내의 의상, 행동은 그를 당혹스럽게 한다. 친정 식구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장인 어른의 폭력적인 행동에 자해로 대응하는 아내의 모습은 그가 아내를 떠나게 되는 변곡점이 된다. 표제작 <The Vegetarian>은 건조하고 소통의 한계가 있다. 우리는 돌연한 영혜의 변신도 거기에 대한 지리멸렬한 남편의 반응도 언뜻 언급되는 영혜의 어린 시절의 폭력성도 그저 잠깐씩 엿볼 수 있을 뿐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공감이나 이해가 역부족임을 깨닫게 된다.

 

<Mongolian Mark>는 영혜의 형부, 즉 인혜의 남편이 성적 금기를 넘어 자신의 예술적 성취를 향해 걸어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은 결론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있던 가정을 해체하는 결과를 낳았다. 처제 영혜를 향한 그의 욕망은 복잡하다. 예술적 욕망과 금기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이끌림과 욕정은 깔끔하게 분리할 수 없다. 자매의 남편들은 모두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거나 욕망하지 않는다.

 

<Flaming Tree>는 언니 인혜의 시선의 이야기다. 무너진 가정, 정신병원에 가서도 음식을 거부하며 무너져가는 여동생 영혜 앞에서 모든 공고하다고 여겼던 삶의 지축이 흔들리며 자매의 파멸은 섞인다. 음식을 거부하며 죽어가는 영혜가 이 세상의 모든 강압과 폭력적인 것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듯, 지금까지 잘 견뎌왔다고 여기던 모든 것들도 기실은 하나의 교묘한 위장이었음을 깨닫게 되며 인혜는 절규한다. 누구의 시선보다 인혜의 시선은 깊고 공감 지대가 넓다. 우리 모두가 견디고 있다고 여기던 것들이 어느 한 순간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각성은 슬프지만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존재는 깊지만 도저히 단단해질 도리가 없다. 그냥 그렇다고 여기며 토닥이며 속이며 나아갈 수 있을 뿐이지 않을까.

 

데보라 스미스가 원작을 영국인의 시선으로 변주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미묘한 것들을 충실히 이해했음을 느낄 수 있다. 한강의 목소리는 두 언어 사이를 왕복하며 자신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충분히 살지 않았는데도 삶이 훓고 가며 남기는 그 상흔과 삶이 품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그 자비의 한계를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다르면 약하면 결국 견딜 수 없는 지점에서 방황하는 모두에게 이 이야기는 헌정될 수 있을 것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psan 2016-07-2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고기를 먹지 않는 1인이라 책 내용이 많이 궁금합니다. 전 고기 달걀 우유 일부 생선 이런 것만 안 먹어요 ^^

blanca 2016-07-21 14:26   좋아요 0 | URL
채식주의자도 단계가 세분화되어 있더라고요. 달걀,우유까지 안 드신다면 거의 채식주의라 하셔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 책에서 채식주의는 세상의 폭력적인 것들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그려져 있어요. 나중에는 음식 그 자체까지 거부하게 된답니다. 사실 걷고 먹고 살아나가는 과장 자체가 작든 크든 어떤 형태의 폭력이 끼어들지 않고는 안 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그 부분이 극대화되어 그려져 있습니다.

mipsan 2016-07-21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 음식 거부는 안 할거 같아요 ^^ 애초 꺼리게 된 이유가 동물사랑이나 폭력거부, 이런 거창한 게 아니었구요. 술 담배도 안하는걸요 ㅎㅎ
 
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지음, 정영목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야기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언어의 그물코는 듬성해서 때로 많은 것을 놓치고 현실과 유리된다. 그 지점부터 이야기는 공허해진다. 사람들이 더 이상 이야기를 원하지 않게 된다면 때로 현실이 이야기보다 더 지루하고 아무것도 아닌 듯하면서도 이어져 나가고 더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면서도 그 사슬 고리를 결코 끊어버리지 않는다는 엄혹한 진리를 이야기가 외면했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기 때문이다. 삶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거나 만만한 게 아니다.

 

하지만 윌리엄 트레버는 달랐다. 그의 이야기는 그런 우리 청자들의 갈급함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대응한다. 그의 이야기는 삶과 철저히 닮아 있으면서도 삶을 함부로 폄하하거나 유치하게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제 할 말을 다 하고 제 갈 길을 유유히 간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읽다가 멈춘다면 반칙 같다. 그의 이야기를 읽는 행위 자체가 삶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첫 이야기의 첫 문장은 수수께끼 같다. "바이얼릿은 피아노 조율사가 젊은 시절에 결혼했다. 벨은 그가 늙었을 때 결혼했다." 다시 돌아가 읽는다. 그러다 거의 한 대목을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조율사의 아내들>의 이 첫 문장을 이해한다. 늙은 맹인 피아노 조율사는 아내 바이얼릿과 사별한 후 비로소 자신을 내도록 지켜보았던 벨과 재혼한다. 이제 이미 죽어버린 바이얼릿과 살아 있는 벨은 한 남자를 공유하게 된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바이얼릿은 남편에게 세상을 묘사하는 눈의 역할을 맡아 세상 그 자체의 인상을 자신의 눈과 언어로 만들어 조율사에게 각인시켜 놓는다. 맹인이 보는 세상은 아내 바이얼릿이 묘사한 그것이었다. 벨은 그러한 세상에 대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섭섭하고 괴로운 일이다. 남편은 죽은 아내의 눈으로 세상을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는 벨을 아프게 한다. 트레버의 위트는 날카롭다. "살아 있는 사람이 늘 이기는 법"이라는 그의 말은 벨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다. 덧붙이는 이야기는 더 젊은 더 나은 시절의 남편을 소유했던 전처 바이올렛의 이점이니 말이다. 그래서 아내들은 비로소 동등해지는 것일까.

 

트레버의 노부부들에게는 찬란한 시절, 어려운 시간들을 통과한 삶의 동지애적 유대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웬만한 일에는 놀라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하나뿐인 아들이 동성애자로 나이 든 남자가 남겨준 재산으로 먹고 살며 자신의 생일날에도 건달 같은 친구를 대신 보내 부모가 아끼는 물건들을 훔쳐가더라도 <티머시의 생일>, 딸이 아버지의 늙고 무능력한 한량 친구와 사랑에 빠져도 <데이미언과 결혼하기>, 그들은 "있는 것은 있는 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가슴앓이는 해봐야 소용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기력한 체념과도 또 다르다. 교통사고처럼 벌어지는 비보들 앞에서 시간과 세월의 무게는 때로 지혜가 된다. 아등바등 안달하고 이미 일어나버린 일들을 뒤집어 보려 억지로 삶과 겨루려 하지 않는다. 받아들이는 것에는 그들이 낳았지만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닌 자식이 포함된다.

 

실연하고 어린 시절 묵었던 숙소 '펜시오네 체사리나'에 홀로 체류하게 된 젊은 해리엇 <비온뒤> 도 남편의 외도를 눈치챘지만 그가 어쩌면 낳아 올지도 모를 혼외 자식이 성장하는 미래를 그려보며 저녁을 준비하는 중년의 레스웨스 부인 <하루> 도 고통스러운 상실과 결핍에 압도되는 대신 묵묵히 평범한 하루로 돌아오고 내일로 걸어들어간다. 현실의 엄혹한 진실의 핵에 가 닿을 때 비수처럼 찌르는 그 칼끝도 결국은 살아내는 일 앞에서 무뎌지는 것임을 트레버는 담담히 변주한다.

 

사는 것은 때로 비루하고 치사하고 비참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니다. 결국은 그것을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 것임을 윌리엄 트레버의 결곡하고 간명한 음성으로 듣는 일은 그러한 삶의 막간을 채우는 아름답게 채우는 일이다. 충분한 위로가 된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이소오 2016-06-17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이 별 다섯을 던지시다니
읽고싶어지네요^^

blanca 2016-06-17 15:00   좋아요 0 | URL
이것은 정말 너무 좋더라고요.^^ 제가 단편의 정점은 카버,체호프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 트레버로 바꾸렵니다.

시이소오 2016-06-17 15:48   좋아요 0 | URL
저역시 단편의 정점은 카버,체홉이라고 여겼는데요. 우와,읽고시포라ㅎ ㅎ

단발머리 2016-06-17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트레버라는 작가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예요.
정영목 번역자님이 더 눈에 띄네요. (우리의 필립 로스^^)
진짜 별 다섯인가요?
그럼 저도..... ㅎㅎㅎㅎ

blanca 2016-06-17 15:01   좋아요 0 | URL
영미권에서는 대단히 유명한 작가인데 우리나라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가로 알아요. 저도 처음 만났는데 과장 좀 해서 너무 놀라웠어요. 저도 좋아하는 번역가인데 이번 책에는 몇 가지 아쉬운 대목이 있어요. 직역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트레버의 문장 자체가 그런 것인지 몇 번을 되풀이 읽어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양철나무꾼 2016-06-18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추천인데다가 정영목 님의 번역이라니, 저도 당근 장바구니로 직행입니다.
정영목 님이라면 꼼꼼한 번역으로 출판가에서 소문이 자자하다죠.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출판사 사장님께서 이분이랑 작업을 해봤는데,
좀 대충 빨리 하자고 해도, 시종일관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신답니다.
덕분에 제가 아는 사장님도, 그때 이분도 주머니가 아주 홀쭉하셨다는데...지금은 어떠시려나 모르겠네요~^^

이런 분들의 처우가 개선 되어야, 우리나라 출판, 번역 계의 앞날이 밝을텐데 말이죠~--;

blanca 2016-06-18 13:45   좋아요 0 | URL
아, 트레버 할아버지 아직 생존해 계신다고 하네요. 필립 로스와 더불어 이야기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라는 전범이 되어 줄 것 같아요. 이야기와 관련된 사람들이 좀 경제적으로 너무 시달리지 않아서 쓰고 번역하고 노래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게 되었으면 합니다.

자목련 2016-06-21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려고 곁에 둔 책인데, 더 빨리 읽게 만드는 리뷰네요.

blanca 2016-06-21 17:11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은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이런 작가라니, 정말 어디 숨어 있다 이제 나오셨는지... 그런데 이미 충분히 유명한 작가였더라고요.

Jeanne_Hebuterne 2016-07-04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즈음 제가 사는 곳에서는 앤 타일러와 줄리언 반스라는 대가들의 신작이 나와 꼭 잔칫날 같아요. 앤 타일러는 작년 이맘때 푸른 실타래를 내고서 한동안 신작이 없을 것으로 알았는데 지난주에 한 권이 출간되어 얼른 장바구니에 넣었는데, 그 필력이 마치 이런 것은 수천 번도 더 써보았다는 양 당당하게 스타일을 유지해서 역시나, 싶어요. 우디 알렌, 앤 타일러, 줄리언 반스, 필립 로스(더이상 신작을 쓰지 않지만..) 이 작가들의 글을 천천히 읽고 있어요. 이 책 다음에 무엇을 읽을까, 생각해 봤는데 블랑카 님의 리뷰에 아마존과 동네 서점을 뒤적일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blanca 2016-07-04 08:25   좋아요 0 | URL
저는 앤 타일러는 못 읽어봤는데 좋은지 궁금하네요. 아, 전 우디 알렌의 영화도 너무 좋아요! 쟌느님, 혹시 <블루 자스민> 보셨어요? 필립 로스는 대중 강연도 안 한다고 선언했다는데 왜 그런지 이야기 좀 들어보고 싶어요. (마치 아는 사람처럼 ) 쟌느님 어디 사시는 지 궁금하네요. 어디 살아도 잔느님 계신 곳은 여기보다 한뼘 쯤 더 근사해 보인다고요.^^;;

Jeanne_Hebuterne 2016-07-07 22:00   좋아요 0 | URL
blanca님, 앤 타일러는 제게는 미국의 박완서 같은 느낌이에요. 두 사람 다 수다를 뼈대를 가진 이야기로, 옛시절의 향수와 그분들이 살았던 무섭게 추운 겨울, 숨막히게 더운 여름을 생동감 있게 살려내곤 하거든요. 박완서의 글을 읽으면 늘 창밖 어딘가에 찹쌀떡이나 군밤장수가 있을 것만 같고, 앤 타일러를 읽으면 음악소리를 내며 아이스크림 트럭이 지나가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해요.
블루 자스민, 봤지요! 기본 아이템은 좋은 걸로 살수록 좋다는 교훈(샤넬 트위드 자켓을 야무지게도 돌려 입더라고요 호호)은 둘째치고, 우디 알렌 특유의 인물을 수렁에 빠져들게 하는 개미지옥같은 솜씨라니...젊은 시절 순이와의 스캔들에 대해 물어보니, 미국인들도 난감해 하더라고요. 그래, 정말 미친짓이었지..관계도 깨어버리고 여간해서는 벌일 수 없는 짓이었잖아? 용서받아선 안될 일이었어. 그런데 그게 또, 그래도 우디 알렌이잖아? 어쩌겠어. 라고 말하는 걸 보니, 이 양반의 세계가 얼마나 독보적인지가 보이더라고요. 스캔들과 영화라는 작업의 접점보다는, 한 개인의 스타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장난꾸러기 같은 그의 영화가 정말 좋아요. 히힛

제가 사는 곳은요, 길에 사슴도 다니고 아이스크림 트럭도 다녀요. 스컹크, 너구리, 엄마 사슴, 아기 사슴, 고양이도 길에서 봤지 뭐여요. 햇빛이 타들어가고 밤은 서늘하죠. 그치만 언제나 일상은 무채색이고 반짝임은 찰나같아요. 잘 지내고 계시죠, 그리운 블랑카님? 늘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6-07-08 16:16   좋아요 0 | URL
호옥시...텍사스 주 오스틴 아닌가요? 두근두근 ㅋㅋ 아, 쟌느님이 박완서에 비유해 주시니 앤 타일러의 색깔이 확 와닿으면서 빨리 시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잠자냥 2016-07-23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오히려 번역이 별로인 것 같더군요. 트레버 팬이 되셨다면 이 책보다는 현대문학 세계단편 15번째 <윌리엄 트레버 - 그 시절의 연인들>을 추천합니다. 저는 현대문학 버전으로 트레버를 먼저 만나고 최근에 이 책을 읽었는데....<비 온 뒤>에서는 이상하게 문장이 읭? 스러운 부분이 많더라고요.

blanca 2016-07-23 19:34   좋아요 0 | URL
아, 잠자냥님, 꼭 읽어볼게요. 안 그래도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있었는데 곧 주문해야겠습니다.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많은 예술 작품들이 악을 형상화한다. '선'에는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크게 없다. 경로도 한정되어 있다. 기대치도 있다. 평면적이다. 그러나 악은 바닥도 경계도 없다. 살아 숨쉬는 우리 모두에게는 끝도 없는 상승보다는 미담보다는 무한추락과 비극과 범죄 이야기가 더 가깝다. 그게 엄혹한 현실이다. 사람을 믿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희망일지도 모른다.

 

정유정의 이야기에는 그렇게 태어난 아들의 이야기다. 아들은 화자가 되어 자신을 설명하지만 그의 악행은 설득력도 이해도 얻기 힘들다. 단지 그렇게 타고 난 사이코패스적인 기질이 근거일 따름이다. 정신병,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면죄부라기보다는 그의 범죄를 설명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 최선을 다했지만 양육 과정이 아들의 삶을 통제하고 아들의 꿈을 파기하여 결국 아들의 범죄를 막지 못한 실패로 결론이 난 어머니는 그리고 그들과 같은 여자들은 이 청년의 잔인하고 무감각한 악행의 조준점이 된다.

 

이 불편한 이야기의 경로에는 가파른 호흡을 물고 적확한 언어를 찾아 분투했을 작가의 지난한 시도와 그 시도의 궤적이 있다. 그가 이야기가는 인물들의 개연성, 관계, 매력을 떠나 그들의 어떤 행동도 정유정의 손끝에서 나온다면 살아 움직이는 힘을 얻는다. 소설적 언어의 지루함도 종이의 그 생래적 한계도 그녀 앞에서는 밀려나간다. 읽는 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이 남자의 범죄 현장에 동행하며 어느덧 그의 행동 하나 하나를 바로 손 닿을 만한 거리에서 느끼며 멈칫하게 된다. 그 현장에서 말 없이 그의 행동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느덧 공범이 된 듯한 죄책감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폭력성 때문일까, 아니면 그러한 악행을 적극적으로 말리고 개입할 자신이 없는 비겁함이 들킨 때문일까. 그를 끝까지 말리려 하다 결국 죽게 되는 형을 대신하는 존재였던 친구의 모습에는 우리가 용감한 시민이 되지 못하게 되는 어떤 참조점이 말라붙어 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있다. 어머니와 아들의 이미 한계와 거리를 가지고 시작하는 관계, 형제에 대한 묘한 경쟁심, 그리고 죽음, 일을 저지르고 돌아온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양가적 감정, 이미 그렇게 태어난 아이와 묘한 긴장 관계에서 시작하는 통제권을 가지고 싸우는 과정 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닫힌 가정 안에서 일어나다 마침내 밖으로 비어져 나와 애꿎은 희생양을 만드는 비극.

 

이러한 이야기는 이제 이야기에서도 현실에서도 낯익은 것이 되어버렸다.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라는 명칭으로 그들을 한정하는 것은 그러한 악행을 감치고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이야기를 동어반복적으로 완성시키고 끝내버리는 일이 아닌가 싶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거야. 어쩔 수 없어. 이미 그랬다면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당분간 나이가 들 때까지 격리시켜 버리고 우리는 우리대로 사는 거야. 그럼 그런 애가 나의 아이가 된다면? 우리 가족이라면? 여기에서부터 출발한 이야기의 결론은 또 다른 물음표와 말줄임표로 가고 만다. 인간의 악은 그렇게 동어반복적이고 자기복제적으로 끊임없이 순환한다. 이야기는 남의 것으로 소비되고 나의 것이 되어버리면  추방된다.

 

어두운 이야기의 슬픈 결말은 출구가 없어 답답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스탠퍼드 감옥 실험으로 명성을 얻은 심리학자 필립 짐바도르는 "선량한 사람들을 망치는 것은 나쁜 사과가 아니라 나쁜 통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의 삶에 도덕적 준거를 들이대어도 비교적 떳떳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운이 좋게도 바로 나쁜 사과 옆에서 그것의 부패를 목격하거나 나쁜 통에 함께 짓이겨 들어가 고통스러운 윤리적 결단의 순간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의 고결함은 또한 그 순간부터 발휘되기를 기다린다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고통스럽고 어렵지만 숭고한 시간의 시험 앞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한강의 <눈 한송이가녹는동안>의 마치 오류 같은 띄어쓰기에 멈추게 된다. 문법적 규칙을 넘어서는 붙여쓰기에 따라 읽다 보면 어떤 흐름과 시간성이 밀려온다. 이것은 비범한 시간이다. "그가 나에게 온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로 그 시간성은 펼쳐진다. '그'는 '나'와 '경주'라는 여선배와 함께 했던 직장 동료다. 그리고 이미 그는 고인이다. 죽은 자와의 재회는 그 수많은 이해타산과 오해와 가식의 비늘을 벗겨내고 어떤 실재로 나아가는 데에 유리한 장치다. 그들이 근무했던 직장은 여성이 결혼과 동시에 퇴사해야 하는 불문율이 있었고 그 앞에서 이례적인 투쟁을 한 여직원이 밀려 나가고 빈 자리에 '나의 자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불평등 앞의 예외적인 남자였고 동기였던 여직원 경주는 그러한 그의 자리와 침묵을 상기시킨다. 셋은 함께 어울렸고 저마다의 그 불편한 윤리적 결단의 시점에서 '나'만을 남기고 그 결단에 몸을 던진다. 평범했던 그들이 해야 했던 그 처절한 선택은 공교롭게도 죽음과도 만난다. '나'는 그들의 고통의 바깥에서 '눈 한송이가 녹는동안'만이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것을 기록하고 이해하려 하고 그것을 애도한다.

 

김애란의 <애도>는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당사자들의 소외감을 구체화한다. 아득바득 모아 마련한 조그마한 아파트 안에서 해피엔딩은 없다. 대신 젊은 부부는 그들이 포기하고 감수했던 그 모든 것들의 무게를 감당했던  아이를 사고로 잃게 된다.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잘못 보내온 복분자원액이 사정없이 튀어 버린 벽을 새로 도배하며 하필 아내가 그 도배지의 꽃을 머리에 이는 형상으로 자신들의 자식 잃은 슬픔에 대한 타인들의 그 조롱과 무관심이 극화되는 장면은 낯선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는 말은 상실이 내가 아닌 타인의 것이 될 때 그것이 결코 소통되거나 제대로 위무되지 못하고 썩고 이지러지는 것임을 자조한다.

 

손보미의 <임시교사>도 하나의 맥락이다. 그림 같은 중산층 집안의 베이비시터로 그 가족과 소통하고 그 가족의 상실과 불행까지 함께 공유한다고 착각하며 최선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내 주었던 중년의 '임시교사'의 결말은 결국 그 격의 없음의 거리에 아연해진 부부에 의하여 내쳐지는 것이었다. 위로와 소통의 통로는 때로 어떤 경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고 그 경계는 자기 내면의 철책이 되어 방어선으로 구축되는 것이다. 그것이 양방향이 되지 못할 때 감수해야 하는  것들을 여자는 그러나 자기 나름의 치유법의 방편으로 외면하게 된다. 쌉싸래한 이야기였다. "사는 건 다 그런 거지"는 많은 것들을 싸안을 수도 있지만 너무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기호의 <권순천과 착한 사람들>에서의 '나'와 황정은의 <웃는 남자>에서의 '나'는 묘하게 겹친다. 어떻든 여기에서 '나'는 작고 힘이 없는 사람들을 어쩌면 도와줄 수도 있었을 지점에 서 있게 된다. 같은 아파트의 사채업자의 집앞에서 힘들게 모아 어머니 대신 갚아준 돈을 돌려달라고 연일 시위를 벌이는 권순찬 앞의 소위 작가이자 교수인 '나'와 버스 정류장에서의 옆에 서 있다 기절하는 노인에게 어깨를 빌려줄 수도 있었던 '나'는 분명 어떤 도움을 줄 수도 있었지만 슬쩍 외면하고 자신의 길을 가고 남는 그 께름쩍한 기분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나름의 방법으로 찾기 시작한다. 아주 나쁜 통은 아니지만 이 통에는 소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이가 하필 내 옆에 있고 '나'는 그러한 시선이 일견 불편한 것이다. 한강의 <눈 한송이가녹는동안> 이미 다 벌어져 버린 일들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보다 잃어가는 중인 사람들의 옆에서 자신을 챙겨야 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더욱 현실적이지만 그것이 향하는 비겁한 결말과 나름의 합리화가 가지는 한계에 답답하다. 이야기는 이미 끝나고 난 지점에서 짚어가는 게 더욱 쉬운 일이고 듣기에도 더 낫고 그 간극은 결국 요즘 세상에서 사람들이 도리어 이야기를 피하게 되는 불편한 지점이 되기도 한다.

 

조해진의 <사물과의 작별>은 그 한계를 응시한다. "사라졌으므로 부재하지만 기억하기에 현전하는 그 투명한 테두리"에 서서 어슬렁거리며 그 안으로 들어갈 것인지 거기에 머물 것인지 아예 바깥으로 물러나버릴 것인지는 언제나 우리들의 몫이다. 하나의 목소리가 관통하는 것 같은 수상작들이 놓치지 않은 그 경계의 무게가 무겁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