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 기고한 단편 모음집.
성석제다운 박학다식한 흥겨운 입심이 바람처럼 빠르고 예리한 칼날같이 페이지를 채운다.
신명 나게 그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아리한 비극을 느끼게 되나 작가의 뚝심은 그 비극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건네줌으로써 미소와 훈훈함으로 가슴을 채워준다.
결국 따뜻해지는 게 내가 성석제를 좋아하는 이유다.
내 딸이 이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름다운 삶의 정신을 알아본 한 사람의 말을 통해 그의 생애를 되살려낸 묘비명의 형식을 따른 작품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동네 사람 누구든 한두 달 집을 비울 수도 있지만 모두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아니다. 황만근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모든 사람이 그의 부재를 알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았다. 있으나마나한 존재이면서도 있었고,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이면서 지금처럼 없기도 했다.
다른 사람을 통해 허락을 얻은 후에야 화자에게 연락을 취하는 묘한 습성을 가진 <천애윤락>의 동환, “책은 당숙을 희미하게도 만들고 당숙은 책과 사물의 경계선을 흐렸다. 그러면서도 둘은 섞여서 존재했다.” 당숙을 書淫으로 만든 <책>
눈빛과 냄새로 사람들을 우울하게, 또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마력을 지닌 <천하제일 남가이>
처음 시작하는 도박에서 언제나 이기는, 그런 확신의 존재가 말하는 “노름은 믿음이다. 자신의 운에 대한 믿음” <꽃의 피, 피의 꽃>
현실세계의 지리멸렬함, 권력의 폭력성, 인간의 속성이 끔찍한 세계를 야유적 제목으로 비웃은 <쾌활 냇가의 명랑한 곗날>
‘돈 많은 과부하고 결혼하여 평생 놀고 먹는 것’이 꿈인 그 꿈을 세상 탓으로 돌리는 주인공이 부잣집 과부, 부잣집 딸, 사장의 놀이개 등의 여자들에게 안주해 부려던 청춘을 흐렬보내고 나서 더럽고, 차가운 눈물을 흘리는 <욕탕의 여인들>
성석제가 소설 중 되뇌인 구절 “그들도 나름대로의 인생을 산다.”
소수이며, 예외적인, 그늘진 삶을 감싸는 그의 시선이 좋다.
“이 책을 당신, 천지의 붉은 물고기처럼 유유한 존재께 바치노니, 나는 당신들과 다르고도 상관없어 보이는 모든 것, 나무와 돌, 하늘, 바람, 아카시아꽃에서 언제나 당신들을 느낀답니다.”(2002. 6. 노음산 왕벚나무 아래서 성석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