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이 글을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나 그저 차 한잔 나누며 편안하게 풀어나간 어릴 적 회상이라야 옳을 것 같다.
굳이 소설이라 한 연유는 아마도 기억이 희미한 부분이나 엮어나감에 있어 상상력이나 재능을 발휘한 이음새가 픽션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읽기 전, ‘고향을 떠나 성인이 된 후 싱아 맛이 그리워 찾아보았으나 이미, 옛것이 된 귀한, 사라진 풀이더라’는 내용으로 짐작했으나 진작 작가가 싱아를 먹었다는 대목은 없어 한참 의아했다. 박완서의 싱아는 목마르게 그리고 있는 향수를 대신하는 감정 표현의 한 단어로 이해되었다.
40년 전의 유아기의 기억이 얼마나 명확할 수 있을까. 기억이란 자신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이미 걸러지고 정리되어 자기화된 것이 아닐는지.
아무튼 이 글은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로 이어지면서 박완서의 모든 성장기가 세상에 드러내진 셈이다.
작가의 소질은 감정처리에 있어 어릴적부터 각별한 모양이다.
‘등에 업혀 해질녘 붉은 수수밭의 수수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슬픔을 느껴 울어 버렸다’고 작가는 말했다.
등에 업힌 나이의 슬픔은 어떤 색이었을까?
나의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 전부는 익산(그때는 이리)의 외갓집에서의 생활이었다. 입시를 앞둔 5,6학년 전까지.
할머니의 부채 바람을 맞으며 까끌까끌한 멍석에 누워 하늘을 볼 때, 마루 끝에 앉아 두 다리를 흔들며 빗속의 저 너머 집들 사이로 가름마 같이 난 길을 볼 때, 흐드러지게 피었던 분꽃 하나를 두 손끝으로 뽑아낼 때의 짧은 희열, 외숙모가 무쳐 주셨던 서걱서걱한 오이 무침, 노란 달걀찜 위 고소함, 깊고 컴컴한 우물 안에서 동동거리며 맴도는 두레박줄로부터 두 손으로 느껴지던 촉감들......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른채 가슴 속을 차곡차곡 채웠던 가슴앓이들이 나이 들어 ‘드는 생각’을 쓰게 하는 것인가.
작가는 감정처리의 작업에서, 성숙한 인간은 사고처리의 작업에서 나름대로 고된 훈련이 요구되어야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