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난로를 틀어 놓고 책 속으로 푹 빠져들 때의 기분을 여러분도 알 것이다.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는 책장을 느끼며 읽고 또 읽다 보면 어느덧 왼쪽으로 넘어간 책장이 오른쪽에 남은 책장보다 많아지고, 속도를 늦추고 싶지만 그래도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면 하는 결말을 향해 돌진하는 기분. 나는 그것이 탐정 소설의 남다른 매력이고, 문학이라는 보편적인 카테고리 안에 탐정 소설만의 특별한 자리가 있따고 생각한다. 모든 등장인물 중에서도 ㅏㅁ정이야말로 독자와 사실상 독특한 관계를 맺지 않는가 말이다.

(탐정 일 中)

- P223

탐정 소설의 핵심은 진실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불화실로 가득한 세상에서 모든 게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면 자동적으로 속이 시원해지지 않는가. 이야기는 우리가 실생활에서 경험하는 일들을 모방한다. 우리는 긴장과 애매모호 속에서 살아가며 그것들을 해결하려고 애를 쓰는 데 인생의 절반을 투자하지만 임종을 목전에 두고서야 모든 게 명확해지는 순간에 다다른다. 그런데 거의 모든 탐정 소설이 그런 희열을 제공한다. 그것이 탐정 소설의 존재 이유다.

(탐정 일 中)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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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이 잔일에 부려먹기에는 다소 기능이 과하다 싶은 고가의 로봇보다 중요하거나 피곤한 일들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빨래처럼 일상 곳곳에 널려 있다. 세상은 한 통의 거대한 세탁기이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젖은 면직물 더미처럼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닳아간다. 단지 그뿐인 일이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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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찾는 사람들이 말하는 남아의 효용에는 실체가 없다. ‘든든하다‘ ‘대를 잇는다‘ 같은 정신적 만족감은 남아의 출생과 동시에 충족된다. 즉, 남아는 존재만으로도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여아 선호 시대의 부모들은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린다. 딸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갖고 싶은 딸‘에 관한 구체적인 서사가 있다. 태어나서는 키우기 편하고, 어려서는 눈을 즐겁게 하고, 자라서는 가사노동에 손을 더하고, 머리가 굵어서는 부고의 말동무가 되고, 죽기 전까지 간병을 책임지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그 ‘좋은 딸‘의 심상 말이다.

(우리 ‘탈가정‘ 할 수 있을까 中)

- P28

여자들의 고민은 상비, 하뚱, 부유방, 승모근, 승마살, 엉밑살, 셀룰라이트 등 디테일한 영역으로 가지를 뻗었고, 모두가 거슬리는 근육이나 지방 덩어리만 부분적으로 감량하는 꿈을 꾸었다. 여성 신체의 파편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이상향이 실현될 가능성은 낮아지고, 현실의 몸을 감시하기는 수월해졌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여성의 육체를 더 꼼꼼히 혐오할 수 있게 되었다.

(코르셋 밖으로 中)

- P55

형님이 거부한 전통적 며느리 문화를 계승할 사람, 아들이 미혼 시절 소홀히 했던 효도를 대리 수행해줄 사람, 집 나간 시어머니 대신 시아버지에게 밥을 차려줄 사람이 외어달라는 다각도의 요청이 불쑥불쑥 민사린을 옭아맨다. 문제는 며느리가 ‘화목한 가족‘ 판타지를 완성할 최후의 조각으로 여겨질 때, 며느리의 고유한 인격은 박박 문질러 없애야 할 이물질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맘카페에서나 하라던 이야기 中)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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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에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자신이 취해야 할 다음 단계들이 각각 어떠해야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그는 그녀의 모욕적인 언사에도 가슴 아파하지 않았고, 부당한 비난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페르미나 다사의 성격과 동기의 심각성을 생각할 때 그렇게 하면 사태가 더욱 악화될 수도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관심을 보인 대목은 편지 그 자체가 그에게 답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럴 권리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실제로 답장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제 그의 인생은 그가 도달하고자 한 경계 안에 들어온 셈이었다. 나머지 모든 것은 그에게 달려 있었다. 그는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 온 자신의 지옥이 아직도 많은 치명적인 시련을 요구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과거보다 더 뜨겁고 더 아프게, 그리고 더 사랑스럽게 그런 시련과 맞설 각오가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이 기회가 마지막일 것이기 때문이다.

- P230

(...) 결국 그녀는 매달 한 번씩 일요일에 가족 묘지를 찾아가던 습관도 버리고 말았다. 그가 관 안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소리치며 내뱉고 싶은 욕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에 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 그러니까 그녀는 죽은 사람과 싸운 것이었다. (...) 로렌소 다사에 관한 기사에 대해서는, 그 기사가 실린 것과 자기 아버지의 진정한 정체를 뒤늦게 발견한 것 중에서 어느 쪽에 더 충격을 받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둘 중의 하나, 아니면 둘 다가 그녀를 완전히 절망의 상태로 몰고 간 것은 틀림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그토록 고상하게 보이게 만들었던 깨끗한 강철색의 머리카락은 누런 옥수수수염처럼 보였고, 암표범처럼 아름답던 눈은 과거의 광채를 회복하지 못했으며, 분노의 불꽃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행동에서는 더이상 살지 않겠다는 결심이 눈에 띄었다.

- P283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아닌 다른 남자였다면, 다리를 절고 당나귀처럼 가죽이 벗겨져 따끔거리는 등을 가진 노인네와 죽음 이외에는 그 어떤 행복도 갈구하지 않는 여자에게 무슨 미래가 기다릴 수 있겠느냐고 마음속으로 물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재앙의 잿더미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찾아냈다. 왜냐하면 페르미나 다사의 불행은 그녀를 더욱 멋지게 만들었고, 분노는 그녀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으며, 세상에 대한 원한은 스무 살 때의 망나니 같은 그녀의 성격을 외돌려 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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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아버지의 손을밀쳐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떨쳐낼 수 없었다. (...)
하지만 나는 이 작은 사건의 진상을 고민하는 일에서 마침내 해방될 수 있었다. 이 해방은 예고도 없이 문득 나에게 찾아왔다. 아버지도 무덤 안에서 당사자들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미묘한 접촉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싶었을 때 나는 갑자기 자유로워지는 듯했다. 아버지도 저세상에서 작은 물고기가 꿈틀하던 느낌을 두고 생각에 잠겨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 생전에 느끼지 못했던 자식으로서의 자의식을 느꼈다. 새삼스레 나는 아버지의 자식이며 아버지는 내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꽃나무 아래서 中)
- P17

나는 그것을 들고 맨 나중에 영구차에 올랐다. 맨 뒤쪽 내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나는 거기에 앉아서 어머니의 뼈가 들어 있는 항아리를 무릎 위에 놓고 두 손으로 좌우에서 눌렀다. 그때 나는, 어머니는 길고 격렬한 전투를 혼자서 치르고 싸움이 다 끝난 뒤 몇 개의 뼛조각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설면(雪面) 中)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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