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의미가 뭐예요?" (...) 아버지는 쌍안경 뒤에서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씩 웃는 얼굴로 내게 돌아서면서 이렇게 단언했다. "의미는 없어!" (...)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밎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3. 신이 없는 막간극 中>
- P54
철학에는 어떤 것들이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이 있다. 이 사상은 정의, 향수, 무한, 사랑, 죄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이 천상의 에테르적 차원에 머물면서 인간이 발견해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가 그것들의 이름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개념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재"가 된다. 우리는 전쟁, 휴전, 파산, 사랑, 순수, 죄책감을 선언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 이렇듯 아이디어를 상상의 영역에서 세상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운송 수단인 이름 자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5.유리단지에 담긴 기원 中>
- P93
완모식 표본에 관해서는 아주 중요한 규칙이 하나 있다. 만약 완모식 표본이 소실되어도 새로운 표본을 그 성스러운 유리단지에 대체해서 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안 될 말이다. 그러한 상실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고 애도하고 상실되었다는 표시를 남긴다. 이제 이 종의 계통은 영원히 순수성이 훼손된 채, 그 종을 만든 최초의 존재가 없는 상태로 남겨져야 한다. 그 종을 물리적으로 대표할 새로운 표본이 선택될 테지만, 이 표본은 "신모식noetype"이라는 더 낮은 지위를 부여받는다. 신모식 표본은 최초의 완모식 표본이 상실되었거나 파괴된 후에 그 종을 대표하는 표본 역할을 하도록 선택된 표본을 말한다.
<5.유리단지에 담긴 기원 中>
- P96
무엇보다 이견의 핵심은 <종의 기원>에 있었다. 어째선지 데이비드와 프랜시스 골턴은 둘다 그 결정적인 사실을 흘려버렸다. 한 종을 강력하게 만들고, 그 종이 미래까지 지속하게 해주며, 혼돈이 홍수, 가뭄, 해수면 상승, 기온 급변, 경쟁자, 약탈자, 해충의 침략 등 가장 강력한 형태의 타격을 가해올 때도 그 종이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다윈은 무엇을 꼽았을까? 바로 변이다. 행동과 신체의 특징에 변화를 일으키는, 유전자에 생긴 변이 말이다.
<10.진정한 공포의 공간 中> - P187
나는 애나의 배에 불거진 흉터에 대해 생각했따. 자기 몸을 내려다볼 때 대법원이 인정한 무가치함의 스탬프가 보이는 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보랏빛 리본 같은 그 흉터가 사실은 하나의 선물로 의도된 것임을, 아마도 그들이 원한 방식이었을,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생을 끝까지 살도록 허용해주는 국가의 자비였음을 아는 건 어떤 느낌일까.
<12.민들레 中> - P221
큰언니는 물고기를 놓아버리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언니는 어류라는 범주 전체를 바로 손에서 놓아버렸다. 왜 언니한테는 그게 그렇게 쉬운 거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인간은 원래 곧잘 틀리잖아." 언니는 평생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늘 반복적으로 오해해왔다고 말했다. (...)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13. 데우스 엑스 마키나 中> - P252
우리가 쓰는 척도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특히 도덕적, 정신적 상태에 관한 척도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모든 자ruler 뒤에는 지배자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
<에필로그 中>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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