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할 수 없는 것을 지켜야 하는’ 시절은 슬프다. 정연주 씨는 미국 생활을 오래 하기도 했지만 전형적인 미국식 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한겨레 시절 조선일보를 맹렬히 공격하곤 했지만 동시에 좌파에게도 그 이상의 혐오를 드러내곤 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적절한 사고와 행태 덕에 KBS 사장이 되었는데, 오늘 그가 방송 공공성의 수호자처럼 일컬어지는 건 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이명박이 KBS 사장을 제 사람으로 갈아치우려는 건 참 꼴사나운 일이지만(그러나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김대중 노무현이 그랬듯) 착한 사람들이 밤을 새우며 고작 정연주 같은 자를 지킨다는 건 슬픈 일이다. 개인 정연주가 아니라 공영방송 사장으로서 정연주? 싱거운 소리들 마라.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한 사람들에겐 KBS가 공영방송인지 모르겠지만 대다수 인민의 처지에서 KBS는 공영방송인 적은 없다. 이를테면, KBS가 FTA나 비정규노동자 문제를 반대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공영방송이란 ‘사장과 대통령이 사이가 안 좋은 방송’이 아니라, 힘없는 대다수 인민의 편에 서서 자본/지배계급과 긴장을 이루는 방송이다. 그래서 세상이 힘있는 자들의 입맛대로 돌아가지 않도록 견제하는 방송이다.

- 냉정하게 말하면, 정연주와 이명박은 원수처럼 으르렁거리지만 ‘미국식 민주주의’와 ‘미국식 자본주의’로 역할을 분담하여, 결국 같은 세상을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왜 이명박과 같은 세상을 소망하는 사람을 지켜야 하는가?

- 알다시피, KBS 사장은 원래 강준만 선생에게 제의되었고 강선생은 거절했다. 강선생은 지금 아이들과 선샤인뉴스를 만든다. 강준만. 세상을 보는 눈이 좀 다르지만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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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발행인 노릇을 하고 있는 어린이잡지 <고래가그랬어>에 최규석이 ‘코딱지만 한 이야기’라는 꼭지를 연재했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보는 우화 같은 것이었는데 분량은 짧아도 함축과 은유가 많은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연재를 쉬기 얼마 전에 실린 ‘불행한 소년’이라는 작품이 말썽이 나서 몇몇 독자가 항의하고 정기구독을 취소하는 일이 있었다. 내용인즉슨 아주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나 참고 또 참으며 평생을 죽도록 노동했으나 결국 비참하게 인생을 마치게 된 사내가 제 정당한 분노를 늘 삭이게 했던, 그리고 이제 죽어가는 그에게 “비참해하지 말아요. 당신의 삶은 가치 있는 삶이었어요.”라고 말하는 천사를 죽인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천사는 그저 천사의 탈을 쓴 악마에 불과했지만 기독교(개신교)가 비공식적 국교이다시피 한 국가인 한국에서 발행하는 어린이 잡지에서 천사를 죽이는 장면을  실었다는 것은 문제가 될 만한 일이었다.
실은 그 작품이 편집부에 들어왔을 때 편집장이 걱정이 된다며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문제가 되겠지만 문제없는 작품”이니 싣자고 했다. 싣지 않았으면 말썽도 없었을 테니 작가에겐 책임이 없었지만 <고래가그랬어>의 지지자인 최규석은 독자수를 늘이는 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줄였다는 데 대해 몹시 미안해했다. 그때 최규석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게 그렇게 충격적인가요? 저는 늘 소 잡고 돼지잡고 하는 것 보고자라서 그런지 잘 모르겠는데..” 미안해서 하는 말이었지만, 그 말 속엔 얼마간의 야유가 들어 있었다. 제 새끼들을 볼 것 안 볼 것 들을 것 안 들을 것 알뜰하게 다 가려가며 키울 수 있는 안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야유. 최규석은 그런 야유를 할 만한 사람이다. 그는 늘 소잡고 돼지잡고 하는 것 보고자란 사람, 볼 것 안 볼 것 들을 것 안 들을 것 다 가리며 키울 수 없는 조건에서 성장한 사람이다. <대한민국 원주민>은 바로 그 기록이다.
나는 이 책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보았다. 잡지에 연재될 때 몇 번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을 보니 본 게 거의 없었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매우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 만화가 후배의 소개로 대학 졸업작품집에 실린 최규석의 작품을 본 이후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습지생태보고서> 등 그의 주요한 작품들을 모두 보아왔지만 이번처럼 강한 인상을 주는 적은 없었다. 두어 시간 그렇게 빠져서 책을 다 보고나서야 난 그 두어 시간 동안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참, 이게 다 지 이야기지.’ 그 이야기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한 아이의 체험임을 되새기며 난 가슴이 저렸다.
그리고 이삼십년 전이었다면, 말하자면 한국의 인텔리들(이를테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민중이 각별한 의미를 갖던 시절이었다면 이 책은 지금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졌겠구나 싶었다. 어쩌면 이 책은 ‘민중의 자식이 그린 가슴 아픈 성장기’라 수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90년대 이후 한국의 인텔리들은 더 이상 민중이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시민이라는 말을 즐겨 쓰게 되었다.(그렇게 된 사연과 과정은 생략하기로 하자. 다만 분명한 사실은 민중은 예나 지금이나 민중이라는 것. 그리고 민중은 인텔리들이 자신들을 위해 ‘투신’하던 시절이나 자신들을 ‘배신’하고 시민을 말하는 지금이나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인텔리들의 민중과의 관계는 실재했던 게 아니라 단지 인텔리들끼리의 가상극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오늘 한국의 인텔리들에게 민중은 그들이 오래 전 외치던 대로 ‘역사의 주인공, 생산의 주인공’이 아니라 단지 부인할 순 없지만 애써 외면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런 변화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원주민>은, 이른바 진보적인 성향의 인텔리들이 즐겨 읽는 잡지에 연재되고 역시 진보적인 인텔리들을 주요한 독자로 하는 출판사에서 발행된 이 책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사실 이런 질문은 매우 싱거운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이미 그에 대한 답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은 ‘한 민중의 자식의 가슴 아픈 성장기’를 이젠 제 세계관이나 사회적 실천에 결코 연결시키지 않은 채 잠시 구경하려는 인텔리들에 대한 야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미덕은 그 야유가 작가 자신에게까지 뻗어있다는 점이다. 최규석은 이젠 모든 면에서 ‘원주민이 되어버린 민중’에서 떨어져 나와, 단 한 번도 입신양명을 꿈꾼 바 없으나 어느 새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만화가가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야유를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야유는 사회적 지위와 문화자본이 갈수록 늘어가는 제 삶의 추이와 속도에 정직하게 맞추어져 있다. 부모와 누이들과 형에 관한 이야기들을 가까스로 마친 작가는 책의 끝 무렵 제 옆얼굴을 그린 페이지 왼편에 ‘어쩌면 존재하게 될지도 모를, 나와는 꽤 다른 환경에서 자랄 내 아이’에 대해 적는다.
“그 아이의 환경이 부러운 것도 아니요, 고통 없는 인생이 없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니다. 다만 그 아이가 제 환경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것으로 여기는, 그것이 세상의 원래 모습이라 생각하는, 타인의 물리적 비참함에 눈물을 흘릴 줄은 알아도 제 몸으로 느껴보지는 못한 해맑은 눈으로 지어보일 그 웃음을 온전히 마주볼 자신이 없다는 얘기다.” ‘근래 보기 드문 민중 출신 작가’가 제공한 ‘모처럼의 민중 구경’이 되었을지도 모를 이 책은 작가 자신에 대한 야유, 심지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야유를 포함하면서 ‘그들’에 관한 책이 아니라 ‘우리(인텔리들)’에 관한 책이 된다.
말하자면 이 책은 우리의 잃어버린 야유를 복원하는 책이다. 이 책은 우리가 민중에 대해 ‘우리끼리’ 해치운 개연성 없는 투신과 배신에 대해 정당한 야유를 받은 바 없이 살아왔으며, 우리의 삶이 이렇게 욕지기가 날 만큼 졸렬해진 것 역시 우리가 세상에 대해 스스로에 대해 야유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면서부터였음을 복원하게 한다. 모든 ‘우리’에게 이 책을 권한다. 모처럼의 구경은 어느새 모처럼의 정화가 될 터이니. (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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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8-11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글이 있었네요~ 야유하는 능력을 되찾아야 인간다운 인간이 되겠군요.
 

물신주의 배격한다고, 신자유주의 몰아내자고, 승자 독식이 싫다고 백날 중얼거려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힘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소한 욕심을 차단하는 것, 소박한 삶을 각오하고, 더 용감하고 더 행복해질 것.

나는 대구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서울에서 살기는 했지만 친척이 죄다 영남권에 거주하므로 가족과 합류하는 즉시 ‘제2외국어’권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런데도 “오빠야~”로 시작하는 살갑고 애교 넘치는 대구 계집애의 말투는 전혀 구사하지 못하며, 대구 남자의 사투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자고로 경상도 남자 말투란 부산과 구미야말로 제 맛이다, 하는 다소 편협한 취향이 있으며, 실은 전라도 오빠들의 걸쭉한 사투리에 꺅꺅 자지러지는 소녀의 마음 역시 남몰래 간직하지만, 서울에서 산 지 25년이 넘어도 영혼 어딘가에 화인처럼 짙게 새겨진 경상도 사투리 한마디는 해가 갈수록, 고단한 신자유주의가 깊어질수록 더 진해진다. 그것은 바로, “마, 괘앤~찮타”이다. 최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백수가 되고 나니, 더욱더 그 말을 주문처럼 되풀이하게 되었다. 마, 괘앤~찮타.

신자유주의가 깊어질수록 주문처럼 되뇌는 말

회사를 그만두기까지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상사가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데?” “만 2년6개월 다녔으면 제대할 때가 됐습니다.” “두 번 생각 안 해볼 거냐?” “소도 30개월 이상이면 광우병 걸립니다.” “그만두면 뭐 할 건데?” “대형 바이크 면허도 있고, 오토바이 있으니까, 퀵서비스나 할랍니다.” “웃기지 말고.” “정말입니다. 밥 먹을 수 있으면 뭐든 해야죠.” “….”

무심코 한 말이었지만, 그날 퇴근 뒤에도 그 말 한마디를 종일 생각했다. 밥, 밥, 밥. 밥이 다 뭐라고. 밥만 먹으면 될 거 아닌가. 괘앤~찮타, 밥만 먹으면 된다. 밥만 먹으면 된다는 거, 이것은 사실 그토록 오랫동안 내가 애써 무시해왔던 진실이었다. 밥만 먹으면 될걸, 자꾸 더 바라니까 그토록 인생에 잡다한 고뇌가 많았다 싶다. 월급 타기 위해 하는 노동이 그 노동으로 인한 고통을 풀기 위한 소비를 낳고, 그 소비가 다시 월급을 타기 위한 노동을 운명적으로 부르는 광경을 수없이 겪고 또 보았다.


   

ⓒ난나그림
밥만 먹으면 안 될 게 없을 텐데, 밥만 먹으면 되는 건데 밥벌이의 고통을 소비로 푸는 것은 간결하며 신속하고도 비겁한 방식이었다. 그렇게도, 돈을 쓰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쉽고 재미있다. 밥 먹고 나면 커피도 마시고 싶고, 유행하는 청바지도 하나 사고 싶고 아찔한 하이힐도 하나 사고 싶고, 예쁜 색깔의 립글로스도 하나 사고 싶고, 거기 어울리는 마스카라도 갖고 싶고, 여기 잘 어울리는 핸드백도 하나 갖고 싶고, 하는 식으로 인생은 사소하고도 귀엽기까지 한 욕심으로 인해 순식간에 번잡스러워진다. 사표를 쓰면서 생각했다. 이제 밥, 밥만 생각해야지. 밥만 먹으면 된다.

속으로 외웠다. 괘앤~찮타. 밥이면 됐지. 비싼 반찬 못 먹어도 된다. 밥만 먹어도 사람은 산다. 커피 못 마셔도 안 죽는다. 30년 된 다세대 셋방 살아도 안 죽는다. 아직 젊은데 경사 급한 산동네 좀 올라간다고 안 죽는다. 비싼 밥 먹는다고 천년만년 사는 거 아니다. 드럼 세탁기에 돌린다고 옷에 금칠 되는 거 아니다. 명품 화장품 바른다고 갑자기 절세미인 될 것도 아니고, 프리미엄 진 입는다고 순식간에 제시카 알바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어깨 펴고, 괘앤~찮타. 물신주의를 배격한다고, 신자유주의를 몰아내자고, 승자 독식이 싫다고 백날 중얼거려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으니 무력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은 사소한 과욕을 차단하는 것, 그리고 하얗고 예쁜 밥알만 생각하는 것. 그러면서 그 밥알처럼 소박한 삶을 각오하고, 더 용감하고 더 행복해질 것. 행복이라는 것도, 각오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까. 모든 88만원 세대 여러분에게도, 괘앤~찮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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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8-08-08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히.. 상큼..

누구나 모순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인지하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하고 합리화하면서 주저하는 이들에게... 어떤 용기가 필요할까.. 그건 잘 모르겠넹..
삶의 대안을 스스로 찾을 여유조차 없으니... 따라할 만한 마땅한 모델도 없고..
하얗고 예쁜 밥알... 이젠 돌아갈 수 없는 먼 곳의 얘기같기도 하고..

로쟈 2008-08-08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하얗고 예쁜 밥알만 생각하는 것'이 이명박주의와 먼 거리가 아닌 듯싶은데요...

라주미힌 2008-08-08 09:01   좋아요 0 | URL
쥐박이는 압축적이고 집중화된 욕망의 결정체라서 좀 성격이 다르다고 봐요..

순오기 2008-08-08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먼(뭔) 소리에요?
라주미힌님 글인가 퍼온 글인가 헷갈려서~~~ 누가 백수됐단 건지?
밥 먹고 살기가 얼마나 버거운데요~~~ ^^
앗, 김현진 글이구나~ 깜딱 놀랬다누...ㅜㅜ

라주미힌 2008-08-08 08:58   좋아요 0 | URL
김현진씨 글이에용... 글은 시사인에 실린 거구요..
글, 생각이 맛깔나는 젊은이.. ㅎㅎㅎ
 

앰네스티에서 촛불 집회를 조사한 결과, 시민사회의 평화로운 집회에 경찰의 공권력이 남용되어 인권침해가 발생하였고... 발표하였다.

그랬더니 명박 정부께서, 예의 "그것은 오해입니다" 시리즈의 동문서답 답변을 또 하셨다.

요는, "앰네스티는 정당한 법진행을 이해하지 못했고, 시위대 입장만 주로 들었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명박과 명박측근들이, 말로만 글로벌 스탠다드를 외치지, 국제 감각 정말 깡통이라는 사실이다.

도대체 앰네스티가 뭔지 이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것 같고, '인권'이라는 단어의 층위에 대해서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앰네스티, 국제기구 중에서도 쎈 곳이다.

일단 국제 기구에 대한 간단한 원칙을 알려드리겠다.

국제기구 사이에  UN 기구가 있고, UN 기구가 아닌 것이 있다. 기후변화협약은 UNFCCC, UN 기구이고, 몬트리얼 의정서는 UN 기구는 아니다. 큰 차이는 없는데, UN 을 통하는 것이 빠른 경우 UN 기구로 하고, 그렇지 않고 UN 기구의 제약없이 조금 더 강한 구속력, 예를 들면 무역조치 같은 것이 포함되는 것이 나을 경우 UN 기구 아닌 것으로 한다.

즉, UN 기구가 더 쎄고, UN 아닌 데는 더 약하고, 그렇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UN이 아닌 WTO와 나프타 그리고 UN 등과의 기구 사이의 위상은?

이 질문을 global governance의 문제라고 부르는데, 설이 약간 나뉜다. 간단히 말하면, 더 쎈 게 있고, 그렇지 않은 게 있다는 것인데, GATT를 기본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미국 계열 학자의 설이 일부 있지만, 쪽수로 majority를 만드는 국제 기구의 운용 원칙상 많은 유럽계열 학자들은 no pre-established hierarchy, 즉 사전 설정된 우월성은 없다는 것이다.

WTO와 나프타 사이의 충돌과 같은 WTO 판례에서, 이렇게 조약과 기구들 사이의 충돌 혹은 영역 겹침이 나타나면, WTO가 얼마나 곤란해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판례가 몇 가지 있다.

보니까 명박 정권은 WTO도 잘 모르고, 심지어 FTA도 잘 모를 뿐더러, 대체적으로 21세기 이후의 '글로벌' 속성에 대해서도 거의 모르는 것 같다.

어쨌든 요약하면, 앰네스티는 쎈 곳이고, 여기에서의 권고문을 근거로 국제 압력과 국제 협박 같은 곳이 공공연히 진행되는데, 이런 게 일종의 도덕률처럼 된 셈이다. 물론 악용도 종종 된다. 다른 나라에 대한 압력의 축으로 앰네스티 보고서를 종종 활용하기도 한다.

하여간 이번 사건 이후로, 한국은 앰네스티 기준으로, 인권에 문제 있는 국가가 되었다는 것이 이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강도 높은 인권불량 국가로 이 한 번의 사건으로 전락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정부가 잘 해서가 아니라, 튼튼한 시민사회가 아직 존재하기 때문이라... 는 뉴앙스의 문구들이 이 발표문에 들어가 있다.

한 마디로, 명박, 너는 인권형 대통령은 아니다, 이런 말 되겠다.

그런데 가장 기가막힌 것은, 정부의 답변이다.

"정당한 법 집행"...

이게 국제인권선언에 대한 완벽한 몰이해와 무지의 소치이다. 그리고 앰네스티를 비롯한 여러 기구 및 제도들의 인권에 대한 공유점에 대한, 좀 창피할 정도로 무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원래 인권이라는 말이 지금처럼 국제사회에서 자리를 잡은 것은 2차 세계대전 때 워낙 씨겁해서, 한 마디로 전쟁을 하더라도 '인권은 지켜주자'라는 인식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총질하는 와중에서도 인권은 지켜져야 한다는 판에, '정당한 법집행'이라는, 이 국제적으로 씨알도 안 먹힐 답변을 내놓다니. 도대체 제 정신이냐, 아니냐?

법이 있어도 인권을 무시하면 안된다는 대단히 강력한 원칙 하에, 정당한 법집행이라는 설명은, 글로벌 기준으로 하면 봉창 두드리는 소리 되겠고, 이걸 접한 외국에서는, 저러니까 한국 정부가 인권 위험이 있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보게 된다.

쉽게 말해, 북한에서의 정치적 인권탄압과 총살, 이런 것이 불법이냐면... 불법은 아니다. 북한의 '정당한 법집행'이다.

요 한마디로, 이런 수준의 낮은 인권에 대한 이해를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다.

정부는 싫더라도 반박문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썼었어야 옳다.

신정부의 출범 과정에서 일부 정책적 결정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족이 있었는데, 정부 이전 과정에서 아직 미숙함이 있었다.

앰네스티의 지적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차제에 한국 인권의 개선에 대해서 앰네스티의 많은 기여가 있기를 희망한다.

정부 얘기와 거의 같은 얘기인데, 유감표명을 약간 포함하고 - 즉, 미안하게 되었다 - 하고 똥바가지를 앰네스티 쪽으로 넘기면, 부드럽게 넘어갈 일이다.

물론 이 정도면 국제사회에서는 명박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상식을 가진 사람의 불가피한 조치 정도로 이해하게 되고, 인권에 대해서 신중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로... 넘어가게 될 것 같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예의 "그것은 오해입니다" 시리즈로 삽질을 하니, 그것은 한국 검찰들에게나 통하는 협박이지, 앰네스티나 그 주변에 있는 인권운동가들에게, 정말로 씨알이 먹힐 턱이 없는 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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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7-22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와 나 이거 방금 먼댓글로 연결했는데 ㅋㅋ
갑자기 급 민망 ㅋㅋㅋ

라주미힌 2008-07-22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어때요.... ㅎㅎㅎ
우리는 소유욕이 강하잖아요.

바람돌이 2008-07-22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제적으로 쪽팔리고 있다는걸 지금도 모를뿐 아니라 앞으로도 모를거라는것.
그리고는 계속 자다가 남의 뒷다리 긁는 소리나 대책같은거만 줄줄이 내어놓을거라는 것.
아! 쪽팔려!!
 

안티조선 운동 몇년이 하지 못한 일을 촛불은 단 며칠 만에 이루어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미국산 쇠고기에 섞여 들어온 뼈 조각 하나에도 호들갑을 떨던 조중동. 갑자기 논조를 180도로 바꾸어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떠들어대다가 본색을 들켜버렸다. 촛불집회의 배후에 선동세력이 있다는 보도에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애먼 사람도 졸지에 빨갱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 첫불집회가 보수언론의 본색과 행태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귀한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대중이 갑자기 등을 돌리자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다. 조중동의 지면은 온통 촛불에 대한 원한으로 넘쳐흐른다. 그중의 어떤 기사는 마치 한여름 텔레비전의 납량특집을 보는 듯하다. 특히 공영방송을 겨냥한 <조선일보>의 사설에서는 어떤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KBS,MBC가 전경 어머니들 마음을 매일 밤 인두로 지져댄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기껏 조선시대의 고문방법을 끄집어내는 이 몰취향한 수사학은 그들이 이 정국에서 얼마나 불안감을 느끼는지 보여줄 뿐이다.

 

 <중앙일보>에서는 사진 연출까지 했다. 식당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구워먹는 시민은 <중앙일보>의 기자들로 드러났다. <PD수첩>에는 검사 다섯명. 그럼 이 뻔뻔한 조작에는 검사가 몇명이나 붙어야 할까? 해명에 따르면, 식당에 다른 손님들도 있었으나 촬영을 거부하는 바람에 그랬단다. 하지만 손님 중에 촬영에 응할 사람이 없다는 것 자체가 이미 뭔가 말해주는 게 아닐까? 기사를 쓰는 대신 콘티를 짜는 이 해프닝에서 우리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되도록 빨리 기정사실화하고 싶어하는 그들의 조급함을 본다.

 

 압권은 어느 <조선일보> 꼬마 기자의 기사다. 어느 인터넷 까페에 '집안의 쥐XX를 잡고 싶다'는 농담 글이 올라오자, 그것을 '이명박 대통령 암살 기도'로 규정했다. 이 기사는 충분히 나의 흥미를 끌었다. 촛불집회를 테러리즘으로 낙인 찍으려는 데서 확인되는 거시정치적 의지. 그리고 이런 막장 크리를 통해서라도 사내에서 인정받으려는 젊은 기자의 푸르른 미시정치적 야망. 아마도 이 두가지가 합쳐져 농담을 농담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이 꼬붕 기자의 과도한 해석학적 진지함을 낳은 것이리라.

 

 네티즌은 즉각 '쥐XX=이명박'이라는 공식을 제공해준 <조선일보> 조백건 기자의 해석학적 친절함에 감사를 표했다. 이 해프닝은 이렇게 폭소로 끝났어야 한다. 황당한 것은 그 다음. 그 농담 글을 올린 네티즌에게 경찰에서 수사를 나왔다고 한다. 하니 청와대에서 수사를 지시했다나? 이렇게 농담을 농담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청와대라면, 앞으로 쥐약 파는 동네 약국을 모두 압수수색할지도 모르겠다. '쥐를 잡자'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시민들은 암호로 암살지령을 내린 게 되나?

 

 시청광장에 다시 수십만의 시민이 모였던 지난 7월5일. 광화문에 있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옥은 수십대의 경찰차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시민과 독자로부터 버림받고 검찰과 경찰의 보고를 받아야하는 언론사의 몰골. 경찰 버스의 바리케이드 뒤로 숨은 보수언론의 사옥은 내게 깊은 시각적 인상을 주었다.

 

 어느 여당 인사가 '보수언론이 사회에 기여한 것은 없느냐?'고 했던가? 세상의 미물도 다 존재이유가 있을 터, 보수언론이라고 사회에 기여한 게 왜 없겠는가.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도 촛불집회 중에 동아일보 사옥에 달린 화장실을 두 차례, 조선일보가 있는 코리아나 호텔의 화장실을 한 차례 사용한 바 있다. '사회의 공기'(公器)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최소한 이렇게 사회의 변기(便器)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지의 지퍼를 올리며, 나는 드디어 보수언론에 제 몫을 찾아주었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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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7-15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태희씨의 '쥐를 잡자'라는 청소년 미혼모 문제를 다룬 소설도 있어요.ㅎㅎ
쥐를 잡자 쥐를 잡자 쥐를 잡자~~
사회의 변기는 압권입니다!ㅋㅋㅋ

웽스북스 2008-07-15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지막 문단 ㅋㅋ

라주미힌 2008-07-16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진정한 진중권 배설의 미학... ㅡ..ㅡ;

마노아 2008-07-16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최고!

2008-07-17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