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쇼의 정치', '삶의 정치'

최근 강준만 전북대 교수, 조기숙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 윤평중 한신대 교수 등이 '지식인의 현실정치 참여'를 주제로 공개 논쟁을 벌였다. 다만, 강 교수의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반박글을 발표했던 조 수석이 윤 교수의 재반박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논쟁은 더 이상의 동력을 상실한 듯하다.
  
  지금까지 진행된 논쟁의 초점은 정치학자 출신인 조 수석의 '변절' 여부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지식인의 역할', 또는 '현실정치와 지식인의 상관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 수석의 행보만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 자체가 이 정권의 출범과 그 이후의 활동에 환호하거나 최소한 지지했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오늘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보인다.
  
  <프레시안>은 이런 화두와 관련해 칼럼리스트 김규항 씨(어린이 잡지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에게 글을 부탁했다. 김규항 씨의 글은 앞선 세 사람의 글과는 맥락을 달리하지만 2005년 한국사회의 현실을 전제로 우리 모두에게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비수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앞으로도 이 논쟁이 보다 풍부하고 현실정합성을 갖는 형태로 진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지식인이란 적어도 자기 세계관에 따라 발언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제도정치에 뛰어든 지식인들은 으레 자기가 속한 '정치적 형편'에 따라 제 세계관을 재조정하곤 한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는 따위 변명은 그나마 낫다. 김대환 씨처럼 방귀 뀐 놈이 성내는 식으로 날뛰거나 유시민 씨처럼 "세상은 다 그런 거야"하며 느물거리는 꼴을 보면 도리 없이 환멸감이 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들은 정치판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세상을 알게 되었다는 걸.
  
  기자와의 한담이 빌미가 되어 이 글을 쓰고 있지만 행여 강준만, 조기숙, 윤평중 씨들이 연루된 논의에 끼어들려는 건 아니다. 개인적인 이유로 당분간 시사 현안에는 관심을 접고 있기도 하거니와, 나는 조기숙이라는 분에 대해 학자로든 청와대 직원으로든 아는 게 없다. 이 글은 강준만 선생에게 쓰는 글이다. 강준만 선생이 조기숙 씨에게 쓴 글을 읽고 나는 진작부터 강 선생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하기로 했다.
  
  내가 하려는 말은 언젠가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지식인과 현실 참여'라는 매우 고전적인 주제와 관련한 것이다. 대체 이런 세상에서 지식인이 뭘 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 사회의 지식인을 통털어도 특별한 능력과 열정을 가진 지식인이라 할 강 선생은 대체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이다.
  
  몇 해 전 나는 홍세화, 진중권 씨와 함께 강 선생의 '<조선일보> 반대운동'에 연대했었다. 굳이 말하자면 <조선일보> 반대운동은 좌파적 운동은 아니었다.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조선일보>에 대한 계급적인 접근이라기보다는 윤리적 접근에 가까웠다. 최상층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선일보를 중간 이하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신문으로 만들자든가 하는 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세 사람이 거리낌 없이 그 운동에 연대한 이유는 <조선일보>라는 '사회적 암'을 '발견하여' 골리앗에 맞선 다윗처럼 고군분투하는 강 선생을 존경했기 때문이고, 좌파 진영(특히 강단 좌파들)이 <조선일보>에 보이는 모호한 태도를 앞장서서 성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사람은 <조선일보> 문제가 "좌파고 우파고 떠난 문제"라는 강 선생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랐다.
  
  그 운동이 대중적으로 어지간히 확산되었을 때 세 사람은 다시 본연의 좌파적 행보에 좀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운동은 폭발을 거듭하며 대대적인 사회개혁 운동으로 발전했고 결국 정권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정권은 이제 임기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다. 자 이제 한번 살펴보자. 그래서 세상은 변했는가? 언론이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고 했고 정치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고 했는데 세상은 정말 변했는가?
  
  그렇다면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참혹은 무엇인가?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빈곤층을 비롯한 빈곤의 확대, 가장 충성스러운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시장 개방과 공공영역의 사유화, 이어지는 민중의 삶의 파탄, 제국주의 침략 전쟁 동조와 평택 미군기지를 비롯한 반민중적인 국방 외교 정책…. 끝없이 나열되는 이 참혹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이제 개혁의 가장 중요한 기획자였고 여전히 그러한 강 선생에게 이 참혹에 대해 묻고 싶다. 나는 그에게 여전히 이 참혹이 '개혁의 후퇴'에서 일어났다고 보는지, 혹은 이 참혹이야말로 개혁의 정체라고 보는지, 개혁이란 "사회문화적 표피를 변화시키지만 경제 질서와 계급 관계라는 본질은 끝없이 후퇴시킨다"는 내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덧붙이자면, 나는 강 선생이 왜 오늘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따위 보수 정당들을 주요한 출연자로 하는 기만적인 쇼에 왜 그리 적극적인지 묻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조차 "이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정책이나 이념에서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고 고백하는 판에 왜 강 선생이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차이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한낱 청와대 직원이 된 지식인의 행보에 왜 그리 관심을 갖는지 묻고 싶다.
  
  나는 매우 성실한 미디어 학자인 그가 이 쇼가 갖는 진정한 의미를 모를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보수 정당 간의 존재하지도 않는 차이를 부각하고 사소하기 짝이 없는 에피소드들을 끝없이 만들어냄으로써 대중들로 하여금 마치 그런 문제들이 세상의 실체이거나 정치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대중들로 하여금 정작 자신들의 문제인 오늘의 참혹은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여기게 만드는 쇼의 의미를 말이다.
  
  나는 알 수 없다. 대중들을 미궁에 빠트리는 <조선일보> 문제에 대해 그토록 열정적이던 강 선생이 왜 오늘은 대중들을 미궁에 빠트리는 그 쇼에 없는 역할까지 만들어가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오랜 휴식 없는 싸움에 지친 걸까? 강 선생이 그 기만적인 쇼의 정치에서 삶의 정치로 돌아오길 기대한다. 나는 강 선생이 오늘 우리 눈앞에 펼쳐진 참혹을 "좌파고 우파고 떠난 문제"로 여기고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최초의 우파 지식인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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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롬이  (2005-09-21 16:48:55, Hit : 422, Vote : 16)
Subject  
   '0.7% 정권', 바로 노무현 정권이다
노무현 정부가 서민들을 위해서 정책을 편 것이 뭐가 있는지 이제는 물어보아야 한다. 그럴 때가 되었다. 지난 대선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불법 파견 문제에 대해서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않고 있다.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음에도 이를 치유하기 위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참 기가 막힌 일이다.

X파일 문제가 국민들의 전관심사가 되었을 때, 노무현 정부는 연정론을 흘려서 X파일 문제를 희석시켰다. 대단한 삼성공화국 정권 답다. 대단한 물타기가 아닐 수 없다.

어제 국무회의에서 소주세율을 72%에서 90%로 인상하는 주세법을 의결했다. 명분이야 아주 거창하다. 술을 많이 마시는 국민들을 위해서 세금을 높여 소주의 과소비를 막겠다고 한다. 참 대단한 정권이다. 국민의 건강을 생각하는 정권이 공공의료를 확대할 생각은 하지않고 세금을 올려서 건강을 해치는 주요 원인을 제거하겠단다.

그러나 소주세율이 오른다고 소주를 마시는 일이 줄어들겠는가?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소주세율을 올려서 부족한 세수를 채우겠다는 것이다. 세금 올려서 서민들 복지에 쓴다면 마다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에게서 서민들 복지를 확충한다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없다.

노무현 정부는 소주 세율인상과 더불어서 서민들 가정에서 사용하는 LNG 액화천연가스를  킬로그램당 40원에서 60원으로 올리는 법안도 의결했단다. 무려 50%를 인상한 것이다. 부족한 세수를 서민들에게서 빼앗아 오겠다는 정권이다. 참으로 기가막힌 정권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부족한 세수를 마련한다던 노무현 정부는 국무회의세어 조세특례제한법도 슬그머니 개정했다. 부모로부터 사업자금을 증여받을 경우 30억원까지는 최고 50%까지 납부해야할 증여세를 10%로 낮추자는 것이다. 정말로 놀라운 정권이다.

세수가 부족하다고 말했던 정부가 서민들에게는 소주세율 인상, LNG 액화천연가스 50% 인상을 이야기 했는데 '소수'기득권층에게는 40%의 세금을 깍아주는 법안을 의결했다.

재경부 통계에 의하면 작년에 상속세를 낸 사람은 사망자의 0.7%에 불과하단다. 0.7%를 위한 정책을 노무현 정부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추진하고 있다. 그렇다 노무현 정부는 삼성을 비롯한 '0.7%' 정권이다.

상속세는 5억원까지 공제가된다. 30억을 미리 자녀들의 창업자금에 투자하면이라는 조건을 붙이기는 했는데 그 조건도 그리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창업이라는 것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업자등록증 내는 것 아주 간단한 것이다.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서 생산적인 부분에 창업한다는 것을 전제하겠지만 한국사회에서 사업자등록증 받아서 그 사업 안하는 것 정말 많이 존재한다. 벤처 사업자 등록증 받아서 건물을 산다면 무슨 수로 규제하겠는가? 사업자등록증은 벤처사업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건물 관리 사업을 할 수 도 있다.  이렇게 한다고 경제가 활성화될리는 난무하다.

결국은 '0.7'를 위한 정책을 펴겠다는 생각에 불과하다. 한국사회 50% 상속세율 높은 것이 아니다. 가뜩이나 직접세 비중이 낮고 조세부담율이 낮은 나라에서 상속세를 40%나 깍아주겠다는 발상을 도저히 이해못하겠다.

앞으로 노무현 정권은 '0.7%' 정권이라고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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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4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혜신의 어슬픈 지적과 유시민의 비껴치기

유시민이 예의 또다시 뭉뚱그려 핵심을 비켜가는 코미디를 선보였다. 그는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나는 더 중요한 정치인 되고 싶지 않다"라는 글을 통하여 곡학아세와 '자다가 봉창 두들기기'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는 형식적으로는 최장집과 정혜신의 문제제기에 대한 답글의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그가 자신의 글 전반에 걸쳐서 의도하는 바는 노무현에게 저작권이 있는 희한한 연정론에 대한 '죽어가는 불씨지피기'에 다름이 아니다. 오직 차이점이 있다면, 그는 노무현식의 흘러간 옛노래를 다시 유시민 버젼으로 편곡하여 노빠들의 시장에 리메이크 상품으로 재출시했다고 비유할 수가 있겠다.

먼저 그의 정혜신의 글에 대한 반론은 장황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굳이 따지고 보면 유시민의 정혜신 반론글에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것은 전적으로 정혜신의 탓이 크다. 바로 정혜신의 원글은 그 내용이 유시민에 대한 '~카더라'식 인상비평이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유시민 역시 딱히 무엇을 가지고 반론을 해야할 지 막막했을 것이다. 그래서 유시민은 마지못해 '어머머, 난 사심이 없어요'라는 방식으로 완곡한 손사래를 치기에 바쁠 뿐이다.

사실 유시민과 같은 지적 승부욕이 충만한 사람에게 '당신은 똑똑한데 싸가지는 없어'라고 말해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보라. 당장에 유시민은 '그래, 난 싸가지가 바가지인 놈이예요. 그리고 그 못된 싸가지가 전적으로 내 탓만은 아니예요. 오히려 그것은 나의 냉소를 외화시키는 방식일 뿐이랍니다. 제발 나의 싸가지 없음에 주목하지 말고, 나의 냉소가 가지는 원천에 주목해 주세요.'라고 나자빠져 버린다. 바로 정혜신은 유시민을 어설프게 건들다가 본전도 못건지고 헛다리만 긁은 셈이다.

유시민의 골때리는 논리와 독선

유시민은 이어서 최근의 대연정 정국을 "대통령이 기득권을 내던지고 벌이는 선도투쟁"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심없는 "대통령에게 훈계부터 해대는 일부" 지식인들에게 비수를 겨눈다. 여기서 우선 우리들은 유시민의 인식 자체를 통채로 비난하거나 백안시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가 규정하고 있는 상황인식의 적절성과 소위 "대통령에게 훈계부터 해대는" 대표적 지식인인 최장집의 문제제기가 가지는 타당성을 따지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유시민은 세간의 노무현 선도투쟁론을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아무도 하지 않자 대통령이 나선 것일 뿐"이라고 진단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천하의 유시민마저도 그동안 "대통령의 기득권을 버리고...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모르는 채 방치한 사람이었노라고 자기반성을 하는 셈이다. 아니 이것이 어찌된 일일까? 유시민을 필두로 대통령의 의중과 행위를 앞장서 해석하고 대통령과 완벽하게 '코드가 일치했던' 그 수많은 지지자들은 대체 그동안 무엇을 했다는 말일까? 굳이 대통령이 선도투쟁까지 불사하며 선봉장이 되어 눈터지게 싸울 수 밖에 없도록 만든 희극적인 현실 앞에서 우리는 퇴행성 노빠증후군의 한 측면인 '노무현이 결심해야 우리는 따라한다'는 피동성을 재확인한다.  

아무튼 유시민은 꽤나 다급했나 보다. 그는 80년대의 '선도투쟁'이 역사를 바꾼 동력이었으며, 그들의 '선도투쟁'이 없었다면 양김도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면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똑똑한" 유시민은 자신의 전매특허인 지조때로 비유를 또 늘어놓기 시작한다. 유시민에 따르면 80년대의 '선도투쟁'과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에 "기득권을 내던진" 대통령의 반개혁적 몰역사성이 같은 용어로 등치가 되는 것이다. 불과 며칠 전에 생방송에서 한 시민의 문제제기를 '부적절한 비유와 논점없는 말꼬리잡기'라고 평가절하하던 유시민이 이래도 되는 것일까? 유시민처럼 이런 괴상한 용어사용에 무감각해진다면, 막말로 조갑제나 김용갑의 빨갱이쑈마저 "선도투쟁"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도 없어지는 셈이다. 참으로 희한한 "선도투쟁"이다.

하지만 "천하의 유시민"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직 중요한 것은 "해결하려는 문제가 정말로 국가적 중대성을 가진 것이"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지 않고서는 그 문제를 공론화하고 해결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대통령이 고독한 "선도투쟁"을 하는 것이며, 그 "기득권마저 내던진" 대통령의 진실성을 몰라주고 무려 "훈계" 씩이나 해대는 최장집류들만 골치거리일 뿐이다. 더 나아가 그는 최장집류들에게 "단죄하고 비난하고 훈계하기 전에 먼저 실사구시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충분히 토론해 보자"고 제안한다. 막말로 왜 최장집류들만 자신의 주장을 말하기 이전에 "천하의 유시민"과 "토론"을 거쳐야 하고, "천하의 유시민"과 대통령은 "토론"이라는 형식에 침을 뱉으면서 막바로 "선도투쟁"에 돌입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동안 집권 절반이 지나도록 노무현과 "천하의 유시민"은 최장집류들과 진지한 "토론"을 제대로 단 한 번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자신들에게는 적용하지 않고 남에게만 주문하는 고약한 버릇은 이제 그만 둘 때도 되지 않았는가.

정작 손가락에 얽매어 있는 사람은 유시민이다

유시민은 계속해서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1노 3김이 합의해 만든 '1987년 체제'를 종식하고 한국정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데 필수적인 정치제도의 변경을 이루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굳이 그가 "비난받고 상처받는다고 해도 나는 이 목표를 향해서 간"다는 비장함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매우 아름답고 유의미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유시민을 비롯하여 많은 전사들이 "앙시앙 레짐을 유지하는 데 동원되는 사고방식과 논리적으로 싸우는 역할"에 충실하기를 바라고, 이 땅의 민주주의와 진보를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나 자신이 처해있는 조건과 공간에서 이를 위하여 최대한 노력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유시민은 계속해서 딴청을 부린다. 그가 "지금 이 순간 달리 선택할 여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대통령의 대연정론"에 대하여 그가 무엇을 말했다는 말일까? 도무지 "대통령의 대연정론"과 관련하여 진보개혁진영의 문제제기에 접근하는 어떠한 답변도 말하지 않은 채, 유시민이 계속하여 구사한 논지는 오직 '기득권을 내던지는 대통령에게 감히 훈계하지 말라'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던가?

유시민이 바로 이런 것을 "토론"이라고 믿었다면, 아니 더 나아가 '나는 대통령의 진정성을 믿는데, 왜 당신들은 훈계부터 하려고 그러느냐?'는 것을 "토론"이라고 생각한다면 비극적인 일이다. 그리고 그런 유시민을 "천하의 유시민"이라고 상찬하는 대한민국의 논리지수와 감성지수는 엉터리라고 단언할 수 밖에 없다. 막말로 표면적으로는 대통령의 대연정이 어떻게 지역주의를 극복할 대안이라는 것인지, 나아가 폭을 좁혀서 선거구제 개편이 대연정의 전제조건으로 어떠한 타당성과 당위성을 갖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반론에 대한 그의 답변은 여전히 지극히 미흡하다. 어쩌면 정작 달을 쳐다보지 못하고 손가락에 집착하는 것은 유시민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최장집의 지적대로 애초부터 '달'은 없었던 것은 아닐까?

보수정치판의 눈으로 바라보는 유시민의 지역주의

이제 본격적으로 눈터지는 계가싸움을 해보자. 바로 유시민이 최장집의 논지에 대해 행사한 반론부분이 그 대상이다. 우선 유시민이 최장집의 텍스트를 요약한 부분을 보면 그가 "싸가지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똑똑한"것은 맞는 말인 것만 같다. 최장집의 글을 못구해 본 사람들을 배려하는 취지에 국한한다면, 유시민의 이해도는 매우 훌륭하며 써머리 역시 잘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유시민이 "지금 이 순간 달리 선택할 여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대통령의 대연정론과 직접 연관이 있는 부분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쪼록 유시민은 기회가 닿는대로 전술한 그 부분에 대한 의견이나 "토론"을 회피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유시민은 최장집의 텍스트를 7가지 분야로 분석하며 제 부분에 대한 인식의 공유를 언급하고, 5)~7)에 대한 반론에 집중하고 있다. 우선 편의상 유시민이 정리한 반론대상을 먼저 공유하고, 이후에 유시민의 반론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온당한 순서이겠다.


다음은 최장집의 텍스트에 대한 유시민의 요약 정리 부분이며, 나아가 이는 유시민의 반론대상이 된다.

5)지역주의: 한국정치가 가진 문제의 궁극적 원인을 지역주의라고 말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집권정부이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태도는, 현실로 존재하는 사회갈등과 균열요인을 제대로 대면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한국의 지역주의는 권위주의 지배의 한 산물로서 반호남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바 민주화의 진전과 더불어, 특히 김대중 정부의 집권과 더불어 괄목할 만큼 완화되었다.

지역주의는 그 자체가 독자적이고 지배적인 균열이 아니라 권위주의의 잔여 범주로서 정당체제의 이념적 협애성과 사회적 기반의 약함, 시민사회의 강한 보수 헤게모니 등으로 인해 작위적으로 동원될 수 있었고 영향력을 가졌던 일종의 종속변수였다. 문제는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역주의를 만들어내고 유지시키는 현재와 같은 정치적 대표체제를, 보다 민주화하고 갈등의 이념적·계층적 기반을 넓히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6)선거제도 변경: 지역갈등 극복을 정치개혁의 최우선 의제로 삼고 선거제도를 바꾸게 된다면, 기존 거대정당들은 규모의 이점을 나눠갖게 되고, 보수 독점적 양당체제는 강화되며 오히려 약화되고 있는 지역갈등구조를 다시 불러들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사회의 이익계층들이 대표될 수 있는 보다 민주적 제도개혁의 가능성은 사전에 봉쇄될 것이다.

7)결론: 오늘의 시점에서 지역문제가 정권의 운명을 걸고 추구해야 할 최우선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진 정치적 알리바이일 가능성이 크다.


유시민은 최장집의 5)에 대하여 "이런 논리를 원인과 결과, 또는 제도적 환경과 그 환경의 산물을 혼동한 데서 나온 것으로" 진단한다. 그리고 그는 구체적으로 최장집류에게 "과연 김대중 정부 이후 지역주의는 약화되어 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정치의 현장에서 느끼는 지역구도는 여전히 철벽처럼 강고하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은 지역주의에 전적으로 또는 크게 의존하는 정당이며, 열린우리당 내부에도 그와 같은 경향성은 뿌리 깊게 존재한다."고 자문자답을 한다.

우선 현실정치권의 영역에서 지역주의는 "여전히 철벽처럼 강고"할 것이다. 그러나 입은 비툴어졌어도 말은 바로하랬다고, 현실정치의 지역주의는 엄밀하게 분석하면 지역 유권자들의 투표성향과 이를 핑계로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하는 현실정치인들의 보신주의가 서로 복합적으로 뒤엉킨 문제이다. 당장 대통령과 유시민이 열망하는 중대선거구제 역시 열린우리당 내부에서부터 찬성받지 못하는 경향은 이를 뚜렷이 반증한다.

문제는 이런 것이다. 유시민이 지적했듯 구체적인 개인의 차이를 떠나서, 제도 자체를 변화시키는데(사실 그런 점에서 열린우리당 역시 기득권 정당의 원리와 구조를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게 답습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기득권적 이해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을 에둘러 피해갈 생각은 말라. 어쩌면 대통령이 생각하고 있다는 "가장 중요한 과제"마저 내부의 덫에 빠져서 외부와의 "선도투쟁"으로 떠밀리는 기괴한 현상의 일차적인 원인제공자이자 모순은 자신에게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불과 1년 남짓 전에 바로 그것을 하겠다고 울며 불며 유권자들에게 협박을 마다않던 열린우리당이 바로 자신이란 말이다.

그러나 최장집에 대한 유시민의 반론은 절반만 수긍할 수 있다. 오히려 최장집은 현실정치의 영역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삶과 사회적 인식의 정도를 포함하는 광의의 지점에서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과연 유시민은 개인의 참정행위를 제외한 여타의 다른 영역에 있어서도 지역주의가 시간을 다투는 제일의 관심사로 비춰지는 것일까? 만약 유시민의 두뇌가 이를 긍정한다면, 그는 지나치게 '현실정치 강박증'에 빠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쩌면 "한나라당과 민주당, 그리고 열린우리당 기득권자들이 지역주의적 경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대연정의 당위로 작동될 이유는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유시민이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그리고 보수정치인들의 행태에만 집착하는 한, 점차 한국사회의 패러다임이 계층적 이해와 다면적인 문제제기와 수용과정으로 변화하는 지점을 인식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지역주의와 정당체제, 그 끝없는 '닭-알논쟁'

이제 더 나아가 유시민은 난데없는 '닭-알논쟁'을 시도한다. 유시민은 최장집의 6)논지를 "정당체제의 이념적 협애성이 지역주의의 위력을 키운 것이 아니라 지역주의적 정당구도와 거대정당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선거제도가 한국 정당체제를 보수일색의 협애한 공간에 묶어둔 원인이요, 제도적 환경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지 않은가?"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최장집의 견해를 "원인을 그대로 둔 채, 어떤 알 수 없는 신묘한 방법으로 결과를 개선함으로써 원인을 없애라고 하는 도착된 논리"로 진단한다.

그러나 유시민의 입장은 본질적이고 순환론적 문제를 굳이 인과관계로 존치시키려는 억지에 다름이 아니다. 어쩌면 최장집의 문제제기는 유시민의 반론보다 훨씬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것이며, 다만 유시민 논지의 유의미성은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에 국한된 알리바이로는 손색이 없는 논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역주의와 정당체제에 대한 최장집의 텍스트와 유시민의 반론은 전략과 전술의 쌍두체제로 결합될 수 있는 성질이라는 말이다.

최장집이 갈파하듯, 한국 정당체제의 보수일색 "이념적 편애성" 속에서 유권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조건과 기준은 지극히 단순하고 본성적일 수 밖에 없다. 바로 지역 보스와 그가 소속되고 움직이는 정당이 우선적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념과 정책의 차별성이 거의 전무한(대통령 발언 인용)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을 되돌아 보라. 또한 앞서 유시민이 개탄했던 여타 지역주의 정당들을 보라. 도대체 비슷한 상품을 좌판에 벌여놓고 서로 사투리만 다른 상인들이 호객행위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막말로 나부터서도 월미도 횟집타운에 가면 더 익숙한 지명이 상호에 걸려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닌가 말이다.

옹졸한, 너무도 옹졸한...

이제 급기야 "천하의 유시민"이 바닥을 보이고 말았다. 물론 각론이라 하더라도, 그는 "선거구제 변경이 보수 독점적 양당 체제를 강화할 것이라는 최교수의 주장은 대통령이 제안한 '지역구도를 극복하는 선거구제 변경'의 내용을 모르고 한 말"이라고 우긴다. 나아가 최장집의 글을 인용한 <한겨레신문>마저 "논리적 도착과 사실관계의 오인"을 "무비판적으로 인용 보도"했다는 힐난을 듣는다.

유시민에 의하면 선거구제의 개편은 "보수 독점적 양당 체제의 강화"가 아닌 "민주노동당 40석"을 가능케 하는 좋은 제안이란다. 평소부터 진보정당의 성장과 집권을 위한 노력에 헌신적인 지지를 보내주었던(?) 유시민의 선의에 눈물이 찔끔거릴 정도로 감명을 받던 터에, 이렇게 세세하게 당의 의석수까지 챙겨주는 자상함을 대하니 오금이 저릴 지경이다.

물론 유시민 역시 민주노동당의 당론인 <독일식 정당명부제>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인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유시민이 천작하듯, 유권자의 지지율과 의지가 온전하게 입법기관에 반영되는 합리적인 구조를 갖추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이는 민주노동당이 "40석"을 갖든 10석을 갖든, 아니 100석을 갖는 지의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라는 말이다. 알아듣겠는가?

이제 그러면 어떠해야 하는가? 유시민도 동의하다시피 오차율이 가장 작은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그러나 또한 유시민이 동의하다시피, 정치 기득권자들의 지역주의를 핑계로 한 보신주의 때문에 정답을 향해 직진하기에는 난망하다. 그렇다면 차선은 무엇인가? 지역과 비례를 동수로 하는 '중대선거구제-순수 정당명부제'이다. 하지만 차선 역시 열린우리당 내부의 지역주의자들 때문에 난망한 실정이다. 그렇다면 마지노선은 지역과 비례를 동수로 하는 '소선거구제-권역별 정당명부제'인가? 아, 솔직히 머리가 아프다.

국회의 정개특위는 바로 이런 것을 협의하고 조정하라고 만든 기구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열린우리당은 무엇을 했는가? 또한 전임 국회 정개특위 열린우리당 간사였다는 유시민은 어떤 노력을 했으며 어떤 내용을 담아 냈는가? 그러고도 지금에 와서 이를 대연정의 전제조건이니 하는 것은 낯부끄럽지 않은가 말이다.

이제 유시민은 회피하면 안된다. 난데없이 "앙시앙 레짐"을 운운하며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의 사이비 개혁의 종착역에서 진흙탕 싸움을 주문하지 말란 말이다. 그러나 유시민은 예의 '속죄운동' 혹은 '뒤집어씌우기'에 돌입한다. 그에 따르면 한나라당도 열린우리당도 유시민도 최장집도 민주노동당도 모두 '구세대의 후예들'이란다. 잘만하면 보수일색의 정치판에서 한바탕 눈물나는 <내탓이오 부흥성회>가 열릴 판이다. 그리고 이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털어서 먼지 안나는...'이라고 운운하며 똥묻은 개와 재묻은 개를 구분할 셈인가?

직진이 두려운 사람들, 그들이 바로 "앙시앙 레짐의 후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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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국 민중투쟁은 깡패짓이냐

전쟁할 수 있는 권리를 국가에게만 부여한 것은 제국주의의 악법
국민교육이 ‘병사 만들기’였음을 증명한 책을 읽다가 분이 치솟다

▣ 반이정/ 소설가


이치석의 <전쟁과 학교>(삼인, 2005)를 읽는 도중에 서점에서 존 키건의 <전쟁과 우리가 사는 세상>(지호, 2004)을 발견했다. 두서없이 책갈피를 넘겨가며 읽다가 프랑스혁명 이후 “의무교육이 도입되면서 신병으로 충원될 자원(학생)들은 규율과 징계에 익숙해졌고, 군사훈련에 적합하도록 훈육되었다”라는 구절을 보고서 책을 샀다. 인용된 대목은 이미 반쯤 읽은 <전쟁과 학교>의 주장과 부합했다. 프랑스혁명이 점화해놓은 민족주의적 열정은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고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방위하기 위해 상비군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근대적 공교육을 떠맡은 학교가 ‘국민 만들기’와 ‘병사 만들기’를 동시에 수행했다.

제네바협약, 그들만의 리그

집으로 돌아와 한 시간 만에 읽어치운 이 책에 대한 소감은, ‘분(糞) 밟았다’고밖에 더 할 말이 없다. 전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서구식 민주주의가 정착된 국가에만 부여하면서 그들만이 평화의 일꾼으로서 전쟁을 할 자격이 있다는 어조와, 민중이 주체가 된 모든 투쟁을 ‘페어플레이’가 실종된 공명정대하지 못한 ‘방해행위·암살·학살’로 몰아붙이는 논리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전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국가(정부)에만 부여하는 것은 원래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만든 악법이다. 근대 이전의 전쟁은 왕이 항복하는 것으로 종전이 됐다. 하지만 민족 단위의 국민국가가 생겨나면서, 왕은 항복을 해도 민중이 계속해서 저항하는 일이 생겨났다. 게릴라 혹은 파르티잔이 탄생한 것이다. 유럽의 공법은 그런 귀찮은 일을 막기 위해, 전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국가에 한정했고 정규군만이 교전의 주체라고 못박았다.

흔히 전쟁포로에 대한 인도적 보호장치라고 알려진 제네바협약은, 이를테면 정식으로 군복을 입고 견장을 갖춘 정규군만을 전쟁포로로 예우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부당한 외세의 무력에 굴복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민중투쟁이 모조리 범죄자에 의한 범죄행위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강대국들끼리 정해놓은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약소국가 민중투쟁은 한낱 불량배의 그것으로 격하된다.

2003년 미국이 벌인 제2차 걸프전에서 개전 초기에 미군의 포로가 된 이라크군은 현재 유엔이 정한 국제 전쟁포로재판소가 아닌 쿠바에 있는 관타나모 미군기지에 구금돼 있다. 미 국방성에 따르면 이들은 전쟁포로가 아니라, 범죄자들이다. 까닭은 교전 당사국이었던 미국에 의해, 이라크가 ‘국가’로 인정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편의주의는 이라크를 국가가 아닌 범죄집단, 즉 ‘악의 축’이라고 명명했던바, 이라크 포로들에 대한 인권침해가 끊이지 않는 것은 애초부터 이들이 포로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존 키건의 담론화된 제국주의

“국제협약을 통해 우주는 비군사화되었다” “미국과 구소련은 핵무기 수를 줄여왔고 계속해서 줄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또는 “거의 모든 국가가 대인 지뢰 사용을 금지하는 데 서명했다”와 같은 언명은 지나치게 설명이 부족하다. 저자는 미국이 방금 거론된 세 가지 국제협약을 지속적으로 어겨왔으며 준수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전혀 지적하지 않는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번도 추악한 전쟁에 가담한 적이 없었다고 공표하는 이 책은, 놀랍게도 영국이 자랑한다는 라디오의 강연물이라고 한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라는 말을 비틀어 “국민교육은 정치의 연장이요, 전쟁은 국민교육의 연장”이라는 것을 증명한 <전쟁과 학교>를 읽다가, 갑자기 분(噴)이 치밀어 쓴 이 독후감은 “내가 말했던 것은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다”라던 푸코의 말을 떠올려준다. 25년간 영국 육군사관학교에서 강의했던 존 키건은 영미 제국주의 담론에 사로잡힌 가엾은 복화술사일 뿐이다. 존 키건의 담론화된 제국주의 또는 제국주의화된 담론이 불러온 재앙이 7·7 런던 테러였다고 믿는 사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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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다함께'가 주최한 '박노자 초청강연회'의 강연 내용과 사회자와의 대담을 녹취한 것입니다.
이 강연은 2005년 7월 2일 오후 4시에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의 민족주의와 좌파운동'이라는 주제로 열렸고, 1천여 명이 참가했습니다. 강연과 대담 녹취록을 꼼꼼히 검토해 주신 박노자 선생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의 민족주의와 좌파운동

  전문 내려받기


<강연>
방금 소개를 받은 박노자입니다. 오늘 강연의 주제는 보시다시피 민족주의와 좌파사상, 사회주의 사상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제가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한가지 말씀드려야 할 것은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이나 분석적인 이야기를 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대목이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이라크에서 미 제국의 침략을 반대하는 무장투쟁이 전개중인데, 그 투쟁의 성격이 미국 신문에서 얘기하는 바와는 달리 실제로는 다분히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거죠. 종교적인 성격보다는 그쪽 독립군의 주된 세력들이 세속적인 민족주의자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에는 그분들의 투쟁을 현실적인 입장에서 전폭적으로 지지하는데 그분들의 투쟁을 지켜보면서 그분들의 민족주의적인 신념을 문제삼기가 정말 힘듭니다.

아무래도 그분들의 현실적 입장이라든가 미 제국의 침략을 받고 싸우는 지금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그분들에 대해서 지지한다는 말씀 빼고는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 부분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제3세계의 저항적 민족주의에 대해서 얘기할 때, 제3세계에서 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전개되는 각종 해방운동들에 대해서 얘기할 때, 아무래도 비난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 발언을 하기가 대단히 힘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민족주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포함한 민족주의를 놓고 보면 사람들을 쉽게 끌고 갈 수 있는 여러 가지 소지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민족주의는 도덕론이 대단히 강한 사상의 복합체 아닙니까? 구한말을 생각해보면 신채호 선생이나 박은식 선생 같은 분들이 유림에서 민족주의자로 쉽게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은 실제로는 그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교 사상 못지 않게 그들의 민족주의는 민족의 국가에 봉사하는 일종의 공공 도덕, 일종의 헌신적 도덕을 많이 강조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도덕론을 중심에 놓고 보는 사상 체계인 만큼 유림에서 민족주의자로의 전환이 어떤 분들 같은 경우에는 가능했던 것이죠. 물론 끝까지 민족주의자로 전환하지 않았던 유림들이 대다수였지만 말씀입니다.

그런 도덕론, 민족주의 도덕론은 민족주의의 하나의 강점이지만, 사실 그것은 위험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민족주의는 도덕을 완전히 전유,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결국에는 민족주의와 무관하거나 약간의 관계만을 갖고 있는 운동들이 비민족적 내지 반민족적 운동으로 치부되기 쉽습니다. 민족주의의 도덕의 독점화는 대단히 위험한 현상이기도 한데, 어쨌든 민족주의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끌고 갈 수 있는 부분이죠.

또 하나는 민족주의의 현실성이라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제국주의 침략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당장 투쟁에 투신하는 민족주의자들은 당연히 현실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영웅으로 보이기가 쉬운 것입니다. 일제시대 말기에 김일성이 거의 신화적인,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서 일종의 전설적인 영웅처럼 조선 각지에서 찬양됐던 것을 생각해보시면, 제국주의 억압을 받는 민족의 입장에서 민족주의적 투사가 어떻게 인식되는지 상당히 잘 알 수 있습니다.

민족주의의 힘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예컨대 주체사상에도 소위 품성론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지도자의 성격, 지도자의 품성, 또는 지도자를 따르는 일꾼의 품성을 강조합니다. 지도자를 일종의 이상적인 어른으로 만드는 것인데 그건 주체사상뿐 아니라 대다수의 민족주의 사상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의 보편적인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히 어른에 대해서 굶주림을 가지고 있는 사회,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는 사회에서는 그런 부분이 상당한 매력으로 작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말로 매력 포인트라고 하나요?

1980년대 후반을 생각해 보시죠. 수많은 학생운동가들한테 남한 사회가 거의 어른이 없는 사회, 어른이라고 하면 다 어용화되고 존경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보였을 때 주체사상의 품성론이라는 것이 어른에 대한 굶주림을 약간 해결해 주는 것으로 작용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1980년대 후반에 주체사상이 남한 운동사회 일각에서 퍼질 수 있었던 기반 중의 하나는 바로 이와 같은 어른 없는 사회에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 어른의 이미지를 조작하고 반포시키고, 그런 식으로 영웅이 없는 사회에 영웅을 만들어 주는 것도 민족주의의 대단한 힘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모든 여러 요소들이 민족주의를 상당히 매력이 있는 사상으로, 수많은 운동사회들에게 매력 있는 사상으로 만드는데, 그런 측면에서는 민족주의에 대해서 정말로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민족주의 사상을 믿고 계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또는 민족주의 사상을 반제국주의 운동의 하나의 방편이라고 생각하고 반제국주의 운동의 일환에서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이 사상의 문제점 그리고 이 사상이 과연 제국주의라는 세계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사상인가라는 부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라크에서 미 제국의 군대를 축출하는 것이 당장 단기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의 목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베트남의 전례도 있고 하니까 이라크의 독립군이 장기적인 게릴라전을 통해서 미군의 축출이라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민족주의라는 사상을 가지고 이라크를 미국으로부터 해방시킬 수는 있지만, 과연 이라크인을 계급 사회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가 또는 제국주의라는 세계 체제를 전복시키는데 그것이 도움이 되는가에 대해서 아무래도 얘기를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시간이 없으니까 민족주의에 대해서 이론적인 검토로 들어가서 장황하게 얘기하기보다는 단적인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민족주의의 가시적인 문제점이 무엇인지, 민족주의가 왜 인간의 해방과 지구의 해방, 이 두 가지 과제에 모자라는 부분이 있는지에 대해서 제 생각을 얘기할까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한겨레> 구독자가 많이 계시겠죠? 아마도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라고 생각하는데, <한겨레 21>이라는 잡지를 잘 아시고 계시겠죠? 그 잡지의 557호를 보시면 상당히 재미있는 특집이 있었습니다. 무슨 특집인가 하면 사이공 함락 또는 베트남 해방 30주년이 돼서 구수정 특파원이 베트남인들의 해방 전쟁 총사령관이었던 보응웬잡 장군이라는 전설적인 인물을 인터뷰한 것입니다. 보응웬잡 장군의 인터뷰를 보셨죠? 만감이 교차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을 보면서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됐어요.

만감이 교차됐다는 것이 무슨 얘기인가 하면 한편으론 보응웬잡 장군이 이끌었던 베트남 해방군이 남베트남을 해방시킬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그 당시에 미 제국의 패배가 결국에는 미 제국 헤게모니의 종말을 고했다는 것에 대해서 저는 당연히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기쁨을 느끼는 동시에, 보응웬잡이 인터뷰에서 자기 생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을 보면서 한가지 질문이 생긴 것이죠.

보응웬잡의 인터뷰를 기억하는 분이 계시겠지만, 보응웬잡이 초기 반프랑스 항불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아주 재미있는 발언을 했습니다. 아마 그 발언을 눈여겨본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 같은데, 상당히 재미있었어요. 그게 어떤 얘긴가 하면, 처음에 정글에 들어가서 항불 무장 독립운동을 시작했을 때 보응웬잡이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가 하면, 본인 말대로 "우리가 프랑스 군대한테 거의 모든 것을 배웠다. 특히 우리가 프랑스 군대한테 배웠던 것이 제식훈련이었다."[는 겁니다.]

제식훈련이란 말, 다들 아십니까? 행진이예요, 행진. 학교 교련시간 때 해보신 분들이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소련 말기에 좀 해보긴 해보았습니다. 제식훈련이라는 것이 다들 열을 정리하여 동시에 행진하는 훈련인데, 보응웬잡 인터뷰에 의하면 본인이 자기 게릴라한테 훈련을 시킬 때 아예 프랑스식으로 '하나둘 하나둘' 이렇게 맞춰서 행진하도록 한 것이죠.

사실, 어찌 보면 논리가 없는 것 아닙니까? 프랑스 군대를 이기려면 프랑스 군대의 규율, 프랑스 군대의 훈련법, 프랑스 군대의 제식훈련까지 배워야 된다면 어쨌거나 논리가 되기는 되지만,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제식훈련이라는 게, 하나의 열을 이루어서 행진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상징하고 인간의 신체에 어떤 미시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생각해보면, 사회주의 10월 혁명 이후에 초기 소련에서는 적군에서 제식훈련이 폐지됐습니다. 왜 폐지되었는가 하면 그 내재적인 억압적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제식훈련이라는 것이 일체의 병졸들이 장교의 말 몇 마디에 따라 동시에 로봇처럼 행동하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결국에는 신체의 자동화, 신체의 기계화를 뜻하는 거죠.

그런데 보응웬잡 같은 경우에는 자기 게릴라부대를 훈련시킬 때 제식훈련을 시킨 데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는 ― 그 당시에 보응웬잡은 좌파적 민족주의자로 받아들여졌는데 ― 프랑스식 훈련법으로 프랑스를 이긴다는 데 대해 의심이 없었던 거죠.

보응웬잡의 전기를 읽어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보응웬잡이 미국을 이긴 몇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보응웬잡 장군의 전기가 여러 가지 많이 나옵니다. 하도 드문 경우니까요, 아무래도. 그분의 전기를 보면 어렸을 때 가장 흠모했던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그분이 항불운동 하시는 분인데, 프랑스를 반대하는 운동을 하시는 분인데, 가장 흠모했던 사람이 나폴레옹이었답니다. 그것은 사실 초기 민족주의 사상으로서는 아주 이색적인 것은 아니예요. 실제로 한국의 초기 민족주의자들, 구한말의 민족주의자들을 보면 가장 존경했던 사람이 대개 비스마르크와 나폴레옹이었습니다. 그건 그 당시의 계몽 잡지에서는 확연히 나오는 이야기이고,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좌파를 제외한 1930년대 후반의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이 무솔리니를 대단히 존경하기도 했습니다.

보응웬잡이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레옹의 전쟁을 분석하고 본인도 그렇게 해보고 싶다고 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배경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그 아버지가 부유한 지주였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베트남의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을 보면 대다수는 유교적 관료나 지주들의 자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처럼 싸우고 싶고 나폴레옹 군대처럼 자기 군대를 훈련시키려고 했던 보응웬잡이나 그 동료들이 과연 자기 휘하의 병졸을 자기와 동등한 사람으로 볼 수 있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선 우리가 약간 의심을 가져볼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보응웬잡의 <한겨레21> 인터뷰를 보면서 제가 또 한가지 질문을 발견을 하게 됩니다. 호치민으로부터 보응웬잡이 들었던 가장 감동적인 말이 하나 있었다던데 그것이 뭐였는가 하면, 한문 고사성어로 이공위상(以公爲上), 공적인 것으로 가장 높은 것을 삼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 베트남의 좌파 민족주의자들한테 유교적 사상이 얼마나 강력하게 남아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유교적 사상에서는 호치민 같은 아주 청렴결백하고 개인숭배 같은 것을 전혀 허락하지 않았던 지도자가 나올 수는 있지만, 유교사상에 평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베트남 혁명 지도부의 사상적 성격 또는 그들이 프랑스나 제국주의를 봤던 그 세계관을 보면 민족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개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평민의 자손일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고, 평민이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자수성가한, 교육이라는 채널을 통해서 어느 정도 신분 상승한 평민들입니다. 이와 같은 유식층, 유산층 중심의 민족주의자들이 대개 이상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제국주의 열강을 모범으로 해서 하나의 국민국가를 만드는 것이고, 그 국민국가의 독립을 위해서 제국주의와 싸우는 것입니다. 즉, 제국주의와 싸우는 것이 계급 사회를 없애고 모두가 완전히 평등하게 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열강을 참작한 또 하나의 국민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이 민족주의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되는 겁니다.

물론 베트남이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북의 경우에는 열강을 모방할 필요가 없이, 그 당시 국가자본주의 사회들인 소련이나 동유럽에서 하나의 모델을 찾을 수 있었고, 또 그것을 독자적으로 본국의 조건에 잘 적용시켜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눈여겨볼 만한 것이 좌파적 민족주의자들이 세운 사회들이 ―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나서 베트남이 그렇게 했고, 동유럽 사회가 무너지기 전에 중국이 이미 그렇게 했지만 ―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세계 제국주의 체제,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손을 잡을 수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1970년대 경제 개방이 완전히 되기 전까지 등소평을 대단히 나쁘게 묘사했던 서방 언론들은 1980년대 들어 등소평을 금년을 여는 [인물로] 선전합니다. 참, 공산당의 당수라는 사람이 자본주의 언론의 영웅이 된다는 것은 문제가 큰 겁니다. 그런데 중국 같은 경우에는 구공산당 관료들에 의한 자본화의 속도, 또는 제국주의 세계와의 화해 속도가 정말 놀라웠습니다.

실제로 중국의 자본화는 1980년대 후반에 서구 국가들도 생각하지 못한 수준으로 발전됐습니다. 예컨대 중국에 가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중국 대학교에는 등록금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상교육이 아닌 것이지요. 1980년대 후반부터 그래왔습니다. 사실, 서구의 경우에는 대다수 국가에서 대학까지 무상교육을 보장하는데, 중국은 아직 혁명의 열기가 남아 있었을 때는 그렇게 했다가 세계 제국주의 체제와 화해에 들어갔을 때는 그것을 아주 빨리 폐지시켜 버렸습니다.

등소평은 초기에 좌파적 민족주의 혁명가라고 봐야죠. 물론 본인은 자기를 공산주의자라고 불렀지만, 조금 더 학술적으로 분류하자면 일종의 좌파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국민국가 건설자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미 많은 연구가 돼 있습니다. 좌파적인 민족주의자, 좌파적인 국민주의자들이 얼마나 빨리 제국주의 세계와 손을 잡을 수 있는가를 보면, 자기 민족의 국민국가를 이상으로 꿈꾸는 사람들이 얼마나 제국주의 세계로부터 멀리 가지 못했는지, 얼마나 제국주의 세계에 대한 흠모가 많이 남아 있었고, 얼마나 제국주의를 많이 의식해서 혁명 사업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베트남만 보더라도 김우중을 그렇게 오랫동안 체류시켜 준다든가, 가끔 <한겨레>나 다른 한국 언론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해외, 즉 일본·한국·서양 남성들의 섹스 관광에 대해서 일년에 하루나 이틀은 단속을 해도 나머지 날들은 단속을 하지 않는 태도라든가 … 그러니까 섹스 관광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제국주의 세계와 이 구공산당 관료들의 유착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또는 구공산당 관료들이 평등세상이나 여권, 인권에 대해서 처음부터 얼마나 자각이 없었는지를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사실, 베트남 혁명이 적어도 항미 투쟁에 성공해서 미제 군대를 축출시킬 수 있었던 것이 세계 민중의 경사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경사였죠. 지금도 세계 민중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이미지는 그 이미지 아닙니까. 사이공의 미국대사관에서 마지막 헬기들이 마지막 남은 미군들을 끌어넣고 도망치는 모습,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항미 투쟁이 성공해도 혁명이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혁명이 실패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그것이 계급적인 차원에서는 성공할 수 없는, 처음부터 계급 문제가 아닌 민족 문제를 놓고 일으켰던 혁명이라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호치민을 영웅으로 생각하고 저도 그런 면모가 있다고 보지만, 호치민의 또 하나의 일면을 이야기하자면 그는 소련의 노선을 그대로 따라서 남베트남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총살하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혁명가라 하더라도 새로운 소련형 국민국가를 만들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대해서 호치민은 무자비했습니다. 왜 그 혁명이 성공적인 항미 전쟁이 될 수 있었어도 성공적인 계급 혁명은 될 수 없었는지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제, 저희로서 가장 어려운 얘기 중 하나인 이북의 혁명을 생각해 보죠. 이북 혁명의 과정에서도 제국주의 유산 또는 민족주의의 사상적인 유산이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는지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북의 혁명이 심하게 일인 독재체제로 들어가기 이전이라 하더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북 같은 경우에는 1940년대만 하더라도 이남에 비해서 훨씬 선진적이고 민중 지향적인 사회로 보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1940년대 후반에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월북했던 것은 그만큼 이북의 혁명이 매력적이었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다. 월북한 사람들의 상당 부분은 정확한 의미의 공산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렵고 민족적 또는 민중적 성향의 상당히 선량한 지식인들이 이북으로 많이 간 것입니다. 그 당시 이북의 토지개혁은 실제로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이북의 토지 개혁이라는 모범이 있었던 것이고, 이승만 정권이 '우리도 어느 정도 안 하면 이북과의 경쟁에서 진다'는 위기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북의 혁명에 대해서 역사적 기여를 대단히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1946년 말부터 1948년까지 이북에서 전개되었던 일련의 캠페인들을 보면 우리가 조금 이상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1946년 말부터 '건국사상총동원교양캠페인'이 시작됐는데, 건국사상의 교양을 위해서 모든 국민을 총동원해서 교육을 시킨다는 이야기죠. 그 당시 김일성의 말에 의하면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졌던 운동인가 하면, "새로운 민주조선의 일꾼들, 국민다운 정신과 풍습과 도덕과 전투력을 창조하기 위한 사상 혁명"이라는 운동입니다.

그런데 국민정신 또는 총동원이 과연 어떤 의미입니까? '총동원'은 일제가 일제 말기에 계속 이용해 왔던, 일제 말기 파시즘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총동원해서 사상 학습을 시킨다는 것이 일제 말기의 상투적인 표현입니다. 국민다운 정신, '국민정신', '정신'이라는 말은 일본 유학생들이 한국에 처음 들여온 일본말입니다. 그런데 '국민정신'이라는 말이 민족주의 패러다임에서도 일본을 모방해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이북에서 그 당시에 국민정신이라는 말이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초기 민족주의 사상의 영향이기도 하고 아마 소련의 영향도 있었지만, 일제 말기에 상투적으로 이용됐던 말을 이북 정권이 거의 이어받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일제 말기에는 다른 나라 국민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건국사상총동원교양캠페인'도 그렇고 다른 캠페인들도 그렇지만, 캠페인 진행 방식이 일제 말기의 '총후 보국 캠페인' 같은 대중 캠페인들하고 구별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선전원들을 대대적으로 보내고,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동원시켜 학습시키고, 학습이 안 되거나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자아 비판시키고, 사상을 개조시키고 …. 그런데 일제 말기의 대화숙이라든가 하는 사상교양 기관에서 진행되었던 캠페인을 보면 그다지 다른 모습이 아니라는 게 눈에 띠는 대목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국가를 만들 적에 국민국가의 규율, 국민국가의 억압과 통제장치들의 상당 부분은 김일성 장군이 그 때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일제의 통치 메카니즘을 참작해서 들여온 것이 아닌가, 즉 민족주의자들이 만든 국가가 어쩌면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너무나 많은 유산을 받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을 우리로서는 지우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 캠페인은 최초의 캠페인 중 하나였고 1950년대에도 계속 진행됐는데, 캠페인들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역사책이 ≪조선전사≫입니다. ≪조선전사≫를 학생 때 읽은 적이 있었어요. 권수가 하도 많으니까 다는 못 읽었는데, 상당 부분은 저도 '학습'을 받아서 상당히 향수 어린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1955년 4월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기본 사상교양에 대한 기본 방침을 세웠는데, 사상 교양이라는 것은 '당원에게 사회 발전의 법칙을 인식시키며, 사회주의 승리에 대한 필요한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시키고, 불굴의 혁명 투사로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무엇입니까? 한국어의 언어적 구조를 한번 보시죠. '시키다'는 말이 가장 자주 나오는 거죠. 주민들이 스스로 터득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무장시키고', '인식하게 만들고', '훈련시키고'라는 '시키다'는 말이 계속 등장합니다. 그런 언어를 써도 무방하다고 생각되는 사회에서 개인의 해방은 물론이거니와 개인보다 공동체가 우선이라는 것이 1940년대 후반에도 이미 주된 슬로건이었습니다. '공동체'라는 말은 일본에서 들여온 것인데, 사실은 그것도 일제 말기 파시즘의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소련의 영향으로 치부할 수 있기도 합니다.

1950년대 캠페인들을 보면 개인 해방은 이미 꿈도 꿀 수 없는 것이고, 얘기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계급적 해방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사회주의 조국 건설'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어디까지나 강조하는 것은 조국, 국가, 민주조선의 통일과 해방의 기지, 그러니까 국가 건설이지 노동자들의 문화적 개인 발전이라든가 생산관계에서의 소외로부터 해방이라든가 하는 부분은 별로 강조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노동자들이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고, 국가 통일을 위해서 살고 죽어야 하고, 그 과정에 일꾼이자 희생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맑스가 생각했던 개인과 사회의 자율적인 발전하고는 이미 거의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됐던 겁니다.

사실, 민족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이북의 역사에서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보면 대단히 재미있어요. 이북에서 나오는 책 중에 ≪철학사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1973년 ≪철학사전≫에서 민족에 대한 정의를 보면, 민족은 언어나 경제의 공통성을 위주로 한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1985년에 새로운 ≪철학 사전≫에서는 민족에 대한 규정이 달라져요.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면 혈통, 공통의 혈통이 드디어 우위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북 같은 경우에는 1940년대 말,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민족주의라는 말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고, 대개는 사회주의적 애국심,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라는 언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부터는, 위기에 봉착되고 동유럽권이 무너진 뒤에는 민족주의·민족에 대한 이야기도 그 위상이 확 달라졌습니다. <로동신문> 1991년 8월 5일에 '우리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자'라는 김일성의 담화문이 나왔는데, 여기에는 이북 체제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는 재미있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민족이 있고서야 계급이 있고, 계급적 이익을 민족적 이익 위에 올려 세우거나 계급 투쟁을 통일 투쟁과 대비시키는 일이 없어야 한다."

결국, 민족 투쟁을 지배 이념으로 삼는 사회에서 북한 노동자들 개개인의 이해관계라든가 계급으로서의 이해관계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북한 체제의 민족주의가 실질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던 것이 1950년대 중반부터이지만, 그것이 표출되어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 1980년대, 특히 1990년대 초반이 아닌가 싶습니다. 1960년대만 해도 이지린 선생 같은 이북의 유명한 학자들이 단군에 대해서 썼던 이야기[를 보면] 그 당시에는 단군을 신화로 봤습니다. 1990년대 단군릉을 보면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역시 이데올로기의 변천이 이 체제의 속성, 민족주의적 속성을 얼마나 잘 보여주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 민족주의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겠습니다. 결국, 민족주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3세계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얘기하자면, 열강을 모범으로 삼아 열강에게 배워서 우리도 한번 열강처럼 돼 보자는 토착 지배층 일부분의 이해관계가 상당히 반영된 사상으로 볼 여지가 있습니다. 결국 대다수의 저항적 민족주의 운동들이 성공한 뒤에는 토착적 유식층, 유산층 중에서 이 운동을 지도할 만한 지적 능력, 재산, 또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가장 득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항적 민족주의가 승리해서 제국주의 점령군을 축출한 사회는 재미있게도 나중에 식민 모국과 가장 친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예를 들어서, 항불 저항의 전통을 계승한 알제리 정권들이 가장 친한 국가는 프랑스이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누구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이북의 한 지도자의 최근 발언으로 기억이 됩니다. "만약에 미국이 우리 체제를 보장해 주면 미국을 우방으로 생각하겠다." 이것은 이북의 지도층, 이북 지배계급의 심사를 대단히 잘 반영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직까지 [북한이] 미국하고 대결하는 것은 미 제국주의가 헤게모니를 잃어가면서 발악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또 북한에 대해서 실제로 갈등, 어찌 보면 거의 전쟁 분위기를 획책하는 미국 쪽의 사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 지배계급은 웬만하면 세계 제국주의 체제의 맨 위에 서 있는 미국과의 관계를 사실은 우방 관계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나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민족주의의 내부 모순성, 저항성과 협력성, 저항성과 모방성의 그 역설적인 이중성을 아주 잘 표현하는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도 말할 수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상당히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현실적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북한의 지배층과 남한의 지배층, 미국 지배층이 서로서로 화친을 하고 평화공존 체제를 이루고 결국에는 통일로 가면 정말 좋은 것입니다. 저도 현실적인 차원에서 남북 지배층의 소위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평화공존 정책을 당연히 지지합니다. 남한 기업이 이북에 진출해서 거기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것도 현실적이고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남한에서 심지어 민주노동당이라 해도 남한 기업이 이북 지역에 진출해서 이윤 추구하는 것이 노동자에 대한 착취라는 생각을 별로 안 갖고 있다는 데 대해서 약간의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양쪽의 지배층들이 백성을 총알받이로 삼아 전쟁하는 것보다는 화친을 해서 폭력 없이 진행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 과정에서는 한편으로는 우리가 총알받이가 안 되니까 득을 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계 제국주의 착취 체제가 이제는 북한의 노동자층 역시 삼키고 말겠다는 것도 현실이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저로서는 우리 사회자분께 던져야 할 질문이 아닐까 싶은데, 과연 남한의 운동 사회에서 이 부분에 대한 의식이 있는가 하는 것을 [묻고 싶습니다.] 원래 사회자가 저에게 질문을 해야 하는데 약간 반대가 됐죠? 이제 이야기가 장황해져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회자와의 대담>

김하영*:
 

노자 선생님께서 오늘 강연해주신 내용이나 그 동안 민족주의와 좌파 운동에 관해 여러 책에서 주장하셨던 내용들 가운데서 제가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던지고 선생님의 답변을 들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저한테 던지신 질문도 시간이 있으면 답변을 하죠.

오늘 선생님께서 저항적 민족주의자였던 제3세계 지식인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새로운 계급 질서가 세워지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지적을 해주셨는데, 굉장히 공감이 됩니다.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어쨌든 자국의 노동자·농민을 착취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비판을 하면 그 나라들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 나라들이 제국주의 세계 질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많이 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답해야 할지 한번 생각해 봐야 되는데요, 선생님은 ≪나를 배반한 역사≫라는 책에서 "비록 한 국가의 울타리 안에서제국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 해도 지구 전체의 차원에서는 대안 마련이 꼭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고 지적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제국주의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을 하시겠습니까?


*사회자 김하영은 '다함께' 운영위원이자 편집팀원이다.

저서로는《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책벌레, 2002)가 있다.

박노자: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노움 촘스키입니다. 그런데, 아시겠지만, 촘스키는 지식인으로서 또 정치사상가로서 출발점이 베트남 침략 반대였습니다. 1970년대, 특히 베트남이 해방된 뒤에 촘스키는 미국 침략이 성공했다고 보는 관점에 섰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미국이 축출을 당했다 해도 거의 4백만 명에 가까운 인명 피해를 봤고, 거의 전 국토가 초토화됐고…. 그 당시 촘스키가 한 얘기가 무엇인가 하면, '미제에 의해서 이처럼 초토화된 베트남은 더 이상 하나의 매력적인 모델이 될 수 없었다. 다른 제3세계의 종속화된 민족들에게 베트남이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없게끔 만든 것이 바로 미 제국이 바라는 바였다'는 것입니다. '베트남 혁명 노선은 올바랐는데, 미 제국의 무자비한 전쟁에 의해 황폐화되어서 다른 피억압 민족의 모델이 될 수 없게 됐다'고 은근슬쩍 얘기하는 것이죠.

물론 미 제국의 침략에 의한 피해가 엄청났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그 피해에 대해 보상하기는커녕, 재수교 협상 때 베트남을 강요해서 남베트남이 미국한테 졌던 빚까지 다 받아냈습니다. 미국에 의해서 황폐화된 나라가 미국에 돈을 지불하는 격이 됐으니, 이건 인간의 세상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수준이죠. 이런 게 다 맞는 얘기이고 촘스키 얘기에 찬성할 수 있습니다만,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예컨대 베트남이나 중국에서 노동자들은 자립적인 노조를 만들 수 없습니다. 자립적인 노조 활동이 불가능하고, 노조들이 당의 아주 심한 간섭을 받고, 중국의 경우 노조 활동가 중에 공산당 간부 출신이 거의 50퍼센트가 넘죠. 그러니까 실제로 노조가 있다 하더라도 유명무실하고, 독립적 노조를 산발적으로 만들면 당장 탄압을 받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유럽이나 미국에서 일어났다면, 유럽이나 미국의 좌파한테 그런 파쇼적 탄압을 분명히 비판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이런 것을 단순히 미 제국과의 대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것을 단순히 미군의 폭격이나 황폐화 작전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지금으로선 사실 대결하지도 않지만 말씀입니다. 물론 한 나라가 요새처럼 되는 분위기를 만든 것이 분명히 미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심한 피해를 본 지역이 아니더라도 새롭게 집권한 민족주의자들이 역시 계급 질서를 그대로 재현시키지 않습니까?

우리는 민중이 어느 정도 주체화가 됐는가 하는 문제부터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국가들의 주체화된 민중과 연대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베트남의 경우는 제가 잘 모르지만, 중국은 요즘 인민 저항이 많이 활성화됐습니다. 저항의 횟수만 해도 작년에 거의 5만 건에 가까웠고, 대규모 파업을 주도하는 지역적인 노동자들의 자율적 조직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사실, 전 세계를 위한 가장 나은 대안은 서구의 민중운동가들과 중국 등지의 운동가들이 서로 소통을 해서 연대하는 것입니다. 이게 가장 좋은 대안인데 아직까지 갖가지 제한이 대단히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베트남이나 중국의 좌파적 민족주의 세력의 승리에 대해서 단순히 기뻐하기만은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하영:
    이제, 구한말과 일제시대의 민족주의자들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은 당시의 주류 민족주의자들이 "적자생존", "우승열패"의 논리를 받아들였다는 점을 여러 책에서 지적해 오셨습니다. 유럽 자본주의의 가치를 받아들인 것이었죠. 그런데 이런 주류 민족주의자들은 식민지 지배 아래서 자신의 뜻을 이루지도 못했고, 결국에는 상당수가 일제에 투항했습니다. 강연에서 베트남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계급적 한계를 지적하셨는데,  구한말과 일제시대 주류 민족주의자들의 한계도 계급적 한계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박노자: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식으로 역사를 본다면, 한 행위자의 역사적인 행동을 단순히 자율적이라고 볼 수는 없고, 그 행위자가 어떤 사상 체계를 왜 습득했는지, 어떤 계층의 지지자를 얻었는지, 어떤 계층을 대변했는지, 그 계층의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는 무엇인지]를 봐야 하지 않습니까?

실제, 구한말의 소위 민족주의자들을 보면, 재미있는 것이 대다수가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장지영 선생 같은 경우에는 구미 지역의 장씨인데, 나중에 장직상1) 같은 친일 지주를 배출했던 유명한 문중입니다. 부유한 문중의 출신도 있었는가 하면, 물론 신채호 선생이나 박은식 선생처럼 비교적 가난한 선비 가정에서 태어난 분도 있었죠. 그렇다 하더라도, 신채호는 신기선2) 학부대신의 도움에 의해서 진출할 수 있었고, 박은식은 민병석3), 즉 당시 민씨 족벌의 핵심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의 문객이 돼 서울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사대부 사회의 관계자본, 관계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진출하신, 그 사회의 생리를 거의 내면화하신 분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본인들의 문화 상징자본을 갖고 진출할 수 있었던 분들이었습니다. 즉, 초기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보면 경제적 자본이든 문화자본이든 관계자본이든 그 사회에서 어느 정도 밑천을 갖고 살았던 사람들이고, 어디까지나 가진 쪽을 대변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박은식 선생은 나중에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을 대단히 반겼어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과거 중국의 삼대사회와 같이 폭력이 없고 화목한, 침략적이지 않은 새로운 사회가 드디어 출현했다는 일종의 유교적인 이상을 떠올린 것입니다. 그런데, 박은식 선생님의 계몽기의 글들을 보면 소위 '식산흥업'에 대한 글이 꽤 있어요. 교육 입국에 대한 글도 있구요. '식산흥업'에 대한 그 분의 글이나 그 분이 발간했던 <서우>(西友)라는 잡지에 나왔던 글들을 보면, 가장 재미있는 것이 노동자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노동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씀입니다. '식산흥업'에 대한 글들의 논점은 대체로 산업을 위주로 해야 하는지, 농업을 위주로 해야 하는지였습니다. 이에 대한 그 당시 유산층 사이의 갈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농업을 위주로 한다면 농지개량·가축개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이 논점이었습니다. 노동자에 대해서는 단순히 노동력을 훈련시켜야 한다거나 노동하는 사람들한테 기초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정도의 언급이 있었지, 노동자가 거의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 같은 운동의 계급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초기 민족주의자였던 유길준은 노동야학을 위해서 교과서를 쓴 사람이에요. 그 당시 조선에서 노동자라고 해봐야 합방 시절에 약 1만 명, 회사는 약 250개 정도였습니다. 노동자라면 인력거꾼이라든가, 여러 가지 잡직, 인부 같은 사람들이었죠. 유길준은 노동자들의 야간학교를 위해서 <노동야학독본>이라는 교과서를 썼는데, 그것이 1907년에 나왔어요. 그 교과서를 보면 그 당시 유길준 같은 대지주 출신의 유식한 관료가 노동자들한테 어떤 사상을 심고 싶었는지 볼 수 있는데, 대체로 임금에 대한 충성, 국민으로서의 직분을 다하고 임금을 위해서 분골쇄신하는 정신 같은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당시에 임금은 이미 일본의 괴뢰에 지나지 않았고, 유길준 본인도 그 상황을 타개하려 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어쨌거나 그들이 계급적 질서를 노동자들한테 얼마나 내면화시키고 싶었는지 그 책에서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구한말의 교과서를 읽어보시면 상당히 재미있을 겁니다. <노동야학독본>뿐 아니라 <여자독본>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 여학교는 약 120개 정도 있었는데, 부유층 여성들만 다닐 수 있는 특수 기관이었죠. <여자독본>이라든가 <여자초등수신서>, 즉 여자 초등학교의 윤리 교과서에서 여자가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되는지[를 규정하는] 여자 덕목의 맨 첫 부분이 뭔지 아십니까? "여자가 얌전해야한다."(청중 웃음) 이것을 다 읽으면 요즘에는 아마 커다란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1) 장직상(張稷相, 1883∼1947): 구한말 경북 관찰사 장승원(張承遠)의 둘째 아들. 그는 일제 초기 하향, 선산 군수를 지내다가 독립군 군자금 제공을 거부한 아버지가 대한광복회의 손에 살해된 뒤 공직을 떠났다. 1920년에 경일은행을 대구에 세웠고, 1930년에 내선일체를 선전하는 총독부 중추원의 참의가 됐다. 1940년에는 일본 전시 동원체제의 앞잡이였던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이 됐다. 하리모토(張元稷相) 로 개명한 그는 1945년 일제의 전쟁자금을 조달하는 데 몰두했다. 해방 뒤 남선전기 사장으로 대구·경북 지역에서 사업을 하다가 1947년 사망했다. 동생 장택상은 미군정의 수도 경찰청과 초대 외무장관을 지냈다.

 2) 신기선(申箕善, 1851∼1909): 1877년(고종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사간원정언·홍문관부교리·통리기무아문주사·통리내무아문참의 등을 역임했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개화당 정권이 들어서자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으로 임명됐고, 이 때문에 1886년에 전라도 여도에 유배됐다.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호조참판·군부대신·중추원부의장 등을 지냈다. 1896년 을미사변 이후 일본과 친일 개화파 정권을 반대하는 의병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가 되어 의병활동을 진압하는 데 힘썼다. 1907년 대동학회(大同學會)를 창립해 회장을 지냈다.

3) 민병석(閔丙奭, 1858∼1940): 민경식(閔敬植)의 아들이고,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閔復基: 인혁당 사건 당시 법무장관)의 부친이다. 1879년(고종16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1883년에 승지, 1884년에 참의군국사무에 등용됐다. 같은 해 수구당(守舊黨)의 일원으로서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자 장은규를 자객으로 보내 암살하게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대사성·강화부유수·제도국총재·헌병대사령관 등을 지냈고, 1905년과 1909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을 잃은 뒤에는 일본 정부의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이왕직장관이 됐으며, 1939년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부의장을 지내는 등 친일 활동을 했다.

 

김하영:  
   오늘날의 한반도 주변 정세가 1백 년 전의 구한말과 비슷하다는 얘기를 요즘 종종 듣습니다. 물론 당시의 조선과 오늘날 남북한의 세계적 지위가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이라는 점에서 뭔가 비유해 봄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특정 제국주의 세력에 기대거나,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세력균형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겠다는 생각이 많이 유포돼 있는 상황에서 이런 점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백 년 전의 역사가 오늘날 한반도의 상황에 어떤 교훈을 준다고 생각하십니까?

박노자:
   이건 참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1백 년 전의 상황을 아주 쉽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이 지역의 구헤게모니 세력인 중국이 급격하게 약화되고, 신제국주의 세력인 일본이 세계 체제의 중심인 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얻어서 구헤게모니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합니다. 그리고 한반도 민족주의자 중의 상당 부분을 협력자로 매수해 결국에는 한반도를 장악하고, 한반도의 유산계급과 일종의 공존 관계를 만들어 낸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상황[을 보면,] 세계 제국주의 체제의 중심인 미국이 아직 그 당시의 청나라처럼 완전히 이빨이 빠질 만큼 약해지지는 않았지만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특히 쌍둥이 적자를 보면 어쩌면 급격한 하락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달러가 너무 많이 남발됐고 군사예산의 지출이 지나쳐서, 미국에 투자된 외국 자금이 만약 일시에 빠져나갈 경우에는 급격한 하락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즉, 현재 헤게모니 세력인 미국이 상당히 약화돼 가는 것이고, 그 대신 지역의 새로운 헤게모니 세력인 중국이 조금씩 힘을 키워가고 있는 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역에서 헤게모니 세력의 교체가 이뤄질 수 있는 순간인데, 이 순간에 과연 한반도 국가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는 것이죠.

물론 사회자가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날에는 한반도의 이북도 이남도 이미 국민국가가 됐고 만만치 않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한 같은 경우에는 거의 일종의 아류 제국주의로까지 얘기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 있기 때문에 1백 년 전처럼 제국주의 헤게모니 세력의 교체가 식민화로 이어진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1백 년 전에는 두 개의 전쟁을 거쳐서 헤게모니 세력의 교체가 이뤄진 것 아닙니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서 신제국주의 국가 일본이 한반도를 확보한 것이죠. 만약에 한반도가 또 한번 전장화가 된다면 우리가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의 소위 '균형자론'은 어찌 보면 남한 지배계급의 가장 트여 있는 부분의 입장을 잘 대변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차피 헤게모니 세력이 교체되는 상황에서는 한쪽에만 붙는 것보다는 중간에 위치해서 사태를 관망하고, 교체되는 순간에 등거리 외교를 통해서 재빨리 재편을 선언하는 게(청중 웃음)…. 제가 만약 한국의 지배세력이었다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요. 그러니까 그것이 남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가장 압축적으로 잘 표현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민중의 이해관계와 어디까지는 겹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중국의 민중과 남한의 민중, 그리고 미국의 민중이 들고일어나서 혁명을 일으킬 가망성이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상, 전쟁을 방지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우리가 지배계급과 어디까지는 이해관계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국주의 세력 간의 놀음이고, 우리가 아무리 '균형자론'을 십분 적용을 해서, 교체될 순간이 보이자마자 재빨리 바꾼다 하더라도 완벽하게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미국이 지금은 이라크 독립군에게 시달려서 그렇지, 이라크 독립군의 활약이 없었다면 벌써 이란→북한의 순서라든가, 북한→이란의 순서로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 침략을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우리 지배세력을 비롯해서 우리가 이라크 독립군에게 큰 절 한번 올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당장 제국주의 세력들이 우리를 건드릴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청중 박수)

세력균형이라는 말을 1백 년 전에도 많이 써먹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균형이라는 것이 우리의 안보에 완벽한 보장이 될 수는 없는 상황에서, 특히 남한의 진보세력은 중국의 진보세력 또는 미국의 진보세력과 연대하려는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국 같은 경우는 진정한 의미의 민중세력들이 아직 수면 위에서 전국적인 조직 활동을 할 수 없는 단계라서 당분간 현실성이 좀 결여됩니다.
 

김하영: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균형을 잘 맞추는 줄타기를 해야 하지만, 우리들은 다른 나라 진보세력과 연대를 도모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박노자:
   그것이 원론적인 입장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특히 중국은 지배세력이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용해서 민중의 의식을 상당 부분 순치시킨 것도 사실입니다.

김하영:
  그럼 이제 중국·일본·한국 등 동아시아 나라들의 민족주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지난해와 올해 동아시아 나라들의 민족주의가 이목을 끌었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 우익의 독도 망언 등의 배경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박노자:
  동아시아 지배계급들이 민족주의를 통치 도구로 사용한 지 일본 같은 경우에는 이미 1백 년이 넘었죠. 일본은 외부의 적을 하나 만들어서 소위 '국민정서' ― 이것도 사실 1백 년 전 일본말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이 말을 많이 쓰고 있지만 ― 를 거기에 맞춰 모든 국민적 콤플렉스·분노·에너지를 거기에 쏠리게 합니다. 이것은 일본 지배계급이 많이 구사했던 전략입니다.

예컨대 청일전쟁 때 일본내 분위기는 히스테리를 넘어서 거의 집단적인 정신병에 가까웠습니다. 당시 일본 신문의 만화판들을 보면 거의 돼지처럼 그려진 중국병들을 열심히 총검으로 죽이는 일본 군사들이 그려져 있었고, 중국을 비하하는 노래들이 동요가 돼 아이들이 거리에서 불렀습니다. 또, 후쿠자와 유키지 같은 거물이 "이것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다" 하고 한 마디 하고, 지식 사회가 다 재편이 돼서 가장 진보적이다 싶은 기독교인들까지도 '야만적인 중국을 처부셔야 한다'고 한 마디씩 보탰습니다. 이것을 일본의 공격적인 민족주의 대중화의 시초로 볼 수 있습니다.

러일전쟁 [때도 그랬습니다.] 잘 기억하시겠지만, 1905년에 일본 가쓰라와 러시아 비테가 담판을 해서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는데, 실제로는 그 때 한반도의 식민화가 결정됐습니다. 이 때 러시아는 배상금을 물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배상금을 무느니 차라리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했고, 일본은 이미 자금이 바닥나서 더 이상 전쟁을 못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배상금 대신 받아먹은 것이 사할린 남부와 한반도와 만주의 일부 이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에 [일본] 언론들이 만들어 놓은 소위 국민정서상 ― '국민정서'라는 말이 그 때도 많이 쓰였습니다 ―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포츠머스 조약 소식이 알려지자 도쿄에서 대중 폭동이 일어난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배상금도 못 받을 수가 있느냐. 이것은 제국에 대한 배반이다.' 엄청난 폭동이 히비야에서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언론이 대중 정서를 어떤 식으로 끌고갔는지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 당시 도쿄에서 폭동을 일으켰던 일본인들이 외쳤던 슬로건은 '블라디보스토크부터 시베리아 절반 정도를 우리가 얻었어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신문들이 이와 같은 꿈을 심어 민중을 순치시킨 것이죠.

이런 경력이 있는 일본은 지금 이북을 일본을 위협하는 악마적 세력으로 만들고, 민족주의화 또는 재제국화의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김하영: 동북공정 또는 독도 망언에 대한 대응 등에 대해서 지적해 주실 부분은 없습니까?

박노자:
   동북공정[에 대해 얘기하면,] 요즘 중국에서 이북과 상당히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북은 1990년대에 신화를 역사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단군릉이 생겼고, 단군이 역사 인물이 됐습니다. 그리고 개성에서 고려 왕조의 수도라는 인식을 강력하게 심어줄 만한 대대적인 유적 개조, 개·보수가 이뤄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중국은 요즘 황제릉 ― 황제는 단군과 성격이 비슷한 중국의 전설적인 시조입니다 ― 에서 중국 공산당 간부를 비롯해서 동포인 화교들의 대표자까지 같이 제사 지내는 풍경을 연출하고, <인민일보>는 그 이야기를 커다랗게 씁니다. 공산당 간부가 전설적인 인물한테 제사 지내는 것을 생각해 보면 끔찍하죠. 또, 요즘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근대적인 과학적 사학에서는 이미 1920년대부터 역사 인물이 아니라고 봐 온 요(堯)임금 시대 중국의 재복원 같은 프로그램을 실행하기도 합니다. 신화를 역사로 만들고, 중국을 세계 문명의 중심지로 만드는 아주 다방면적인 노력이 진행중입니다. 중국 고고학계의 정설들 가운데 가관 중의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구석기 시대의 소위 시난트로푸스를 중국인의 시조로 보는 것입니다. 시난트로푸스는 40만 년 전의 원인류입니다. 아직 호모 사피엔스도 아닌 것이죠. 그것을 시조로 보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이상 과학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1920년대에 주구점(周口店)에서 발견됐던 시난트로푸스의 해골이 우리 모두의 조상이라는 얘기가 교과서에 나옵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죠.

동북공정은 이런 배경을 깔고 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국내 [논의]에서 제가 조금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동북공정이 공격적이라기보다는 한반도가 통일될 경우 영토적인 요구에 대비하는 부분이 가장 강하지 않았던가 생각합니다. 물론 공격적인 면도 있을 수 있죠. 예를 들어서, 중국의 역사 지도를 보면 한사군(漢四郡)을 유달리 강조합니다. 한사군은 한나라 시대 때 있었지만, 당나라 시대의 지도를 봐도 꼭 보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북공정과 관련된 문건을 보면 한반도에 대한 공격적 야욕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동북지역이 늘 중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국민과 민족국가를 과거에 투사시켜 영원불변의 위대한, 도덕적으로 가장 높고 세계 중심인 존재로 만드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김하영:
   오늘날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한 얘기를 나눠봤으면 합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억압당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 외세의 압력에 대한 반감이 있는 동시에, 다른 민족에 대해 고통을 주기도 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노자 선생님은 "피해의식에 뿌리를 둔 민족주의가 '우리' 지배자들이 다른 나라 또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해 저지르는 행위에 둔감하게 만든다"는 지적을 어느 글에선가 하신 바 있습니다. 좀 전에도 남한이 아류 제국주의 수준에 올랐다고 얘기하셨는데, 남한의 "아류 제국주의"로서의 면모에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노무현 정부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 것도 그런 사례입니까?

박노자:

파병 당시에 <매일경제신문>은 '우리가 단순히 소수의 파병뿐만 아니고, 미국을 화끈하게 도와줘서 미국과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한편, 이라크에서 독립적인 영향권을 확보하자'고 했습니다. 그밖에도 여러 보수 신문, 극우 신문에서 '이라크에서 우리의 독립적인 이해관계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다' 하는 얘기가 적지 않게 나왔으니 아류 제국주의 같은 말이 나올 법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파병은 아류 제국주의라기보다는 오히려 남한 제국주의의 아류성 또는 종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 노무현 정권의 이해타산으로는 파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노무현 정권 자체의 목표로 봐서는, 그리고 지지자들을 이탈시킨 부분이라든가 여러 정치적인 고려로 봐서는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은 계륵 같은 부분이었죠. 그래도 노무현이 파병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노무현 정권의 관료 기구들이 얼마나 미국쪽하고 가까이 지내고,  얼마나 미국적인 논리에 젖어 그것을 내면화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국의 관료기구, 특히 파병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갖고 있는 외교 또는 국방 분야의 기구들이 얼마나 자국의 논리보다 제국의 논리에 충실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않나 싶습니다. 파병에 대한 결정, 정치적 결정은 대통령이 하지만, 실무 작업은 해당 관료들이 하는 것이고, 결국에는 해당 관료의 판단이 정치 판단의 근거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뿌리치려면 노무현으로서는 갖지 못한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결국 노무현이 실무자들의 판단을 따르는 듯한 인상을 많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파병을 한국 자본주의의 종속성 내지 예속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가 분류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피해를 봤다', '우리가 피해를 줬다'는 이야기를 할 때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 당연히 조선 민족 전체의 지위가 강등됐고 모욕과 피해를 봤습니다. 하지만, 잘 아시겠습니다만, 일제시대 때 피해를 안 보고 영달한 사람도 좀 있지 않았습니까? 물론 피해를 본 사람이 대다수였지만  영달한 사람들이 꽤 있었고, 이 사람들이 지금도 일제에 대한 향수 젖은 글도 가끔 쓰지 않습니까? 본인 가문의 출세 배경이라든가 본인 계급의 등장 배경을 생각해서 가끔 일제에 대한 향수 어린 글을 쓰죠. 저는 한국 사학계의 나이 드신 분들 중에서 '나는 일본인보다 일본말을 훨씬 잘 한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청중 웃음) 이건 단순히 피해 본 것으로만 보기는 좀 곤란하죠. 그러니까 '우리'가 피해를 봤다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조선의 민중이 피해를 본 것이고, 유산층 또는 상당수 유식층은 새로운 체제에 적응해서 계급적인 지배를 유지·강화시킨 것입니다. '우리'라는 말이 여기에서 약간 기만적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피해를 준다'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베트남과 한국의 관계를 보면, 한국 남성들이 돈을 지불해서 베트남에서 섹스관광 하는 것이 베트남의 빈민층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이고, 많은 베트남인들에게 정신적인 상처를 남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에 투자하고 교역을 넓히는 것이 베트남 간부층 또는 중간관리자층이나 전문가층한테 하나의 혜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베트남 같은 곳에서 소위 '한류'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경제적 진출이 그 곳 일부 계층에게 혜택을 주는 바가 있기에 한국의 연예인들이 그 곳 중산층 자녀들에게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라는 말이 참 기만적입니다.

김하영:
   몇 가지 질문이 남아 있지만,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청중석으로 마이크를 넘겨서 질문이나 주장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청중석 질의·주장 생략)

 김하영:
    이제, 정리 발언을 해주실 시간인데요, 정리 발언을 하시면서 한두 가지 질문에도 함께 답변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요, 선생님의 지적대로 민족주의는 노동자 계급과 지배계급을 하나로 묶어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배계급이 제국주의에 저항해 싸워주기를 희망하죠. 동시에, 우리 나라 좌파 민족주의자 동지들이 그렇듯이 미국 제국주의와 정권에 맞서 싸우기도 합니다. 저는 이들과 함께 투쟁하면서도 민족주의가 진정한 대안이 아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민족주의의 극복은 어떻게 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두 번째 질문은요, 선생님께서는 "개인주의가 사회·정치적 무관심을 의미한다는 오해만큼이나 지배층에게 유리한 오해는 없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하신 적이 있습니다. 박노자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건강한 개인주의와 사회·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조직적 저항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다고 보시는지, 오늘날 진보적인 젊은이들이 반전·반자본주의적 저항들과 어떻게 연관을 맺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시는지에 대해 얘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박노자:

민족주의가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과연 어떻게 가장 가시적인 방법으로 보여줄 수 있는가. 예를 들어서, 1980년대 후반이나 1990년대 초반에 전대협 등의 학생운동 단체에서 분명한 민족주의적 색깔을 가지고 활동했던 고급 활동가 일부가 지금은 어디에 가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보시죠. 지금 정권과 국회에서 가장 부끄러운 것입니다. 한나라당에도 그런 활동가들이 있다는 것이 더 부끄럽지만요. 이 사람들이 굉장히 쉽게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에게 합류하지 않았습니까? 노무현이 대표하는 중간 자유주의자들, 중간 부르주아지들과 좌파적 민족주의를 표방했던 전대협의 옛 지도자들 같은 분들이 아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배경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동기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자기합리화의 논리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민족을 위해서, 통일을 위해서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헤게모니 장악이다.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서는 우리가 연합을 해야 되고, 중간파 부르주아지와의 연합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는 이라크 파병에 대해서도 할 말을 못하는 것인지…. 이것이 이분들의 실천입니다. 그러면, 민족통일을 위해서 이라크 파병을 해야 한다는 것인지 그분들한테 그냥 물음을 던지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민족주의적 색깔을 가지고 있던 주로 유식층 내지 유산층 출신의 활동가들이 중간파 부르주아지들과 이렇게 쉽게 어울릴 수 있는 배경이 민족주의 사상 자체에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민족주의의 본질이라든가 민족주의의 효과들을 설명하려면, 앞서 얘기했듯이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해방 전쟁에 성공했던 여러 나라들이 과연 나중에 어떤 계급 구조를 이루고,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북한의 역사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것이 문제인 것 같은데, 이북 역사에서 계급 구조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발전했고, 실제 계급 사회의 작동이 어떤지 우리가 조금 더 정확하게 실질적인 사례를 가지고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개인주의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개인자율주의'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레닌이 죽기 직전에 이미 혁명이 왜곡되고 변질돼 가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레닌 전집 제45권인 것 같은데, 1921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우리한테 지금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자기 양심을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그리고 늘 양식과 양심에 기반해서 행동하는 동지들이다. 그런 동지들이 없다면 이 썩어빠진 관료 기구가 결국 당을 장악할 것이다.' 레닌은 혁명이 이미 왜곡돼 가고 있고, 패배의 씨앗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죽은 겁니다. 그리고 레닌은 자기 양심을 거스를 수 없는 사람, 그런 당 활동가들이 있어야 혁명의 왜곡을 방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죠. 레닌이나 볼셰비키의 구지도층이 생각했던 혁명가 상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율적으로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 마르크스주의를 터득하고, 늘 자기 자신의 생각과 양심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는 인간형이 출현하기를 바랐던 것이고, 그런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한 동료로 생각했던 것이죠.

어차피 지금 존재하는 모든 체제들이 불완전한 것이고, 또 어떤 사상도 실현 과정에서는 온갖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권력 관계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어떤 사상도 권력 담론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개인주의는 이런 상황에서 사상의 권력 담론화를 방지할 수 있는 사람, 자기 양심에 거스르지 않고 자기 조직 안에서도 조직의 문제점을 제기해서 조직을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주 역설적인 얘기이지만, 그런 의미의 개인주의자가  어떤 조직 안에 없다면 그 조직은 부패하고 말 것입니다. 조직을 위해서라도 그런 사람이 존재해야 합니다. 결국 그런 면에서는 개인의 행복과 조직의 행복이 둘이 아니고 하나일 것입니다. 불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인데,(청중 웃음) 제가 생각하는 개인주의 그리고 집단과 연대 행동의 가능성은 제가 보기엔 둘이 아니라 하나일 것입니다. 이제 사찰에서 하는 법문 같아져서 마쳐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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