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민노당 ‘350만 농민에게 올리는 절망의 보고’

350만 농민여러분 그리고 국민여러분,

오늘 민주노동당 의원 9명은 비통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고 드립니다. 오늘 대한민국 국회는 350만 농민에 대한 사망선고를 끝내 집행하였습니다.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은 가증스런 살농대연정에 기꺼이 한몸이 되었으며, 농업 파탄의 공동정범임을 국민 앞에 선언했습니다.

특히 개혁정당임을 표방해 온 열린우리당은 개혁입법 처리에는 무능으로 일관했으나 가난한 농민과 소수의 민주노동당 의원을 협박하고 저지하는 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열린우리당은 성공한 반민생, 반개혁 정당임을 오늘 스스로의 힘으로 과시했습니다.

오늘 우리 국회는 민의의 전당이 아니라 살농의 폭거를 집행하는 최고 심판소가 되길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농민여러분의 죽음의 호소도 소용이 되지 못했습니다. 28일에 달하는 목숨을 건 단식도, 전국에서 불타오르는 나락의 처절함도 농민과 농업의 수의를 짜는 국회의 결정에는 아무런 고려사항도 되지 못했습니다. 거대양당은 농민의 모든 것, 농업의 모든 것을 내쳤습니다.

정치는 사라지고 독단만이 국회를 가득 채웠습니다. 역사는 오늘의 폭거를 또박또박 기록할 것입니다.

그동안 민주노동당은 가능한 모든 대화의 창을 열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돌아 온 것은 거대양당의 냉소뿐이었습니다.

오늘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350만 농민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물리적 저지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마저도 수의 장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농민에 대한 예의도, 동료 의원에 대한 예의도 거대양당은 냉혹하게 저버렸습니다.

350만 농민을 다 버리고, 얻고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식량주권과 귀중한 대지를 팔아 얻은 소수만을 위한, 소수를 위한 일방주의는 어떠한 행복도 풍요도 약속할 수 없습니다.

오늘 좌절하고 짓밟혔지만 이것이 끝이 아님을 스스로 다짐합니다. 결코 이렇게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음을 분명히 천명하고자 합니다. 최악의 조건에서도 최대의 결실을 만들어 내는 농민의 지혜를 빌어, 민주노동당은 농민과 함께 전진할 것입니다.

50년 수탈의 역사를 견디어 온 농민의 생명력으로 싸워나가겠습니다. 당장 내일부터 우리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것입니다. 농업과 농민의 살리는 길에 민주노동당은 항상 가장 앞에 서 있을 것입니다.

2005년 11월 23일 민주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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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5-11-24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안타깝군요. 8.31 대책도 이와 같이 흐지부지할 거라죠. 집값도 오르고, 매물은 다 가져가버리고.. 정말 '개혁'이란 말이 요즘엔 무안해요..

라주미힌 2005-11-24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민들을 고사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이 놈의 나라..
갈아 엎고 싶습니다.
농민 뿐이겠습니까. 엘리트, 자본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무능력한 열성개체로 만들어가는데... 깝깝해요. 농민들 앞으로 우찌 산데요...
 

아직은 망가지지 않은

어느 의대 예과 2학년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했다. 나를 부른 교수의 말마따나 “아직은 망가지지 않은 아이들”이다. 계급과 이념에 대해 풀어서 이야기했는데 간간히 웃음도 터트리며 다들 재미있어 한다. 게 중 몇몇은 눈빛이 초롱초롱한 게 잘 잡아주면 꽤 괜찮은 의사가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의사 고시 합격률이 95%이니 의대에 들어오면 이미 의사인 셈인데, 의대생에 대한 어떤 사회적 대책이 필요하겠구나 싶다. ‘이미 망가진’ 그들의 선생들과 선배들의 작업에 대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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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11-2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반가운 글입니다! 오늘 쓰신 글인가봐요 어제까진 아무것도 없었는데^^

마태우스 2005-11-2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의를 하기보다는 애들한테 질문도 하고 그러니까 안떠들고 집중하더이다. 물론 강의 내용이 처음 듣는 거라 호기심이 더 있었을 수도 있구요.

로드무비 2005-11-2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덩달아 반갑네요.^^

라주미힌 2005-11-23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을 위해서 퍼왔지용..
로드무비님/ 절 보고 반가워 하신 줄 알았어요.. ㅎㅎㅎ
 

기생과 매음녀, 그리고 페티시 클럽 여종업원

박노자-허동현 서신논쟁 3부 <5> 매매춘의 변천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사회 비판적인 발언을 할 때, 그 비판의 대상이 되는 현상에다가 '공화국'을 붙여 일언이폐지의 효과를 얻는 것은 유행이 아닙니까? '골프 공화국', '강남 공화국', '서울대 공화국'…. 비판받아야 할 대상들이 많아선지, 이러한 표현들도 수도 없이 많아 보입니다. 그런데 밤의 거리를 다녀보면 '매매춘 공화국'이라는 말이 왜 많이 쓰이지 않는지 궁금해집니다. '인육(人肉) 장사'에 사회가 이미 하도 익숙해져서 '당연지사'가 된 결과인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육안으로 봐도 성(性)이 주된 거래품 중 하나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정부의 통계로 봐도 노무현 정권 시절의 대대적인 단속작전 이전까지 매매춘으로 생계유지하는 여성의 수는 적어도 약 33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실질적인 숫자가 70만~100만 명 이상 됐다는 것은 관련의 시민단체의 추정이지요. 즉 한국의 성인 여성 15 명 중에서 적어도 1명 정도 매매춘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어떤 매매춘도 여성을 "천천히 죽인다"라고 할 정도로 심신을 피폐하게 하지만 포주들이 부당하게 조작한 빚을 무기로 여성의 인신 자유를 박탈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경제적 착취를 자행하는 사창가의 현실은 여성에 대한 반인륜적 범죄로 불릴 만도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로 하여금 늘 소름 끼치게 하는 것은 전체주의 국가들의 정치범 수용소 이야기지만 인권 유린의 규모로 봐서는 '노예 매매춘'을 하는 업소들을 '민영 수용소'로 부를 만도 하지 않을까요?
  
  물론 '다원적인 시민사회'쯤을 자칭하는 후기 자본주의적 사회에서는 전체 인구의 2% 가까이 '노예'나 '준(準)노예' 일종의 '예속 노동자'로 만드는 이 제도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습니다. 2000년에 감금당하여 성매매를 강요당한 5명 여성을 비극적 죽음으로 몰고 간 군산 대명동 쉬파리 골목 사창가 화재 사건과, 2002년 14명의 현대판 '성노예'를 희생시킨 군산 개복동 화재 참사 등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서 비등한 여론에 힘입은 정부는 2004년에 성매매 방지법을 제정하고 성매매 근절 대책들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선불금 채무 등을 무기 삼아 업주들이 오랫동안 여성들을 마음대로 혹사하고 폭행했던 그 음습한 곳에 드디어 법망이 닿아 약자에게 '구조'의 기회가 생겼다는 것은, 아마도 한국사상 역사적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 자본주의의 '쌍둥이'로 지난 한 세기 동안 자라온 '성산업'이라는 괴물이 한국 근현대사상 최초로 그 존재에 대한 어떤 중대한 위협을 느낀 셈입니다.
  
  그런데 청량리와 미아리, 완월동과 자갈마당, 신포동과 학성동, 이 수치스러운 이름들이 서울과 부산, 대구, 마산, 울산의 역사에서 급기야 사라진다는 것은 중도 우파 정권의 업적이라고 칩시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한편으로는 한국처럼 매우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 체계를 배경으로 하는 정부는, 이익 단체들의 로비를 뿌리치고 자본 계급의 특수 부문 (예컨대 '포주' 계층)에 대한 대대적 '수술'을 강행할 만큼 '관료적 자율성' (bureaucratic autonomy : 필요할 때 자본 계급의 이익단체로부터 거리를 둘 만한 자율성 즉 공적 행정력)을 확보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자본 계급이 정권을 탄생시켰다기보다는 특히 초기에 외세의 힘을 업은 정권이야말로 대자본을 '적산 불하', 특혜 금융 등의 방법으로 탄생시키고 관리, 감독할 만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한국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여론에 힘입은 정부가 집창촌에 경찰을 대대적으로 보내 엄격한 단속을 집행하는 광경은 별로 놀랍지 않지마는, 의식 있는 동유럽 사람에게는 놀라울 뿐만 아니라 부러울 것입니다. 업주의 상납을 '제2월급'쯤으로 아는 저쪽의 경찰 당국도, 여성의 몸으로 인한 외화벌이를 '성장 견인차'로 여기는-그리고 역시 업주와 '줄'이 닿아 있는 저쪽의 정치권도, 한나라당의 모 의원처럼 "성산업이 없으면 젊은 남자의 정력이 어떻게 분출되는가?" 수준의 의식을 가지고 여론을 왜곡시키는 저쪽의 매체도 성산업을 본격적으로 손볼 만한 '자율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저는 집창촌의 해체가 적어도 표피적으로 성공을 거둘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20~30년이 지나면 반라의 여성들을 상품처럼 전시하는 그 빨간 빛의 쇼 윈도우들이 '20세기의 옛날 현상'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미아리와 청량리의 지옥에서 공권력에 의해 '구출'된 여성들은 정말 인간다운 안락한 생활을 살 것인가요? 굳이 '기분 나쁜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솔직하게 의심이 가는 부분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한국의 중도 우파 정권이 비록 자본 계급의 특수 부문('포주' 계층)에게 제지를 당하지 않을 정도로 '관료적 자율성'을 향유하지만 어디까지나 자본가 계급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이윤율을 극대화하는 신자유주의를 신봉, 실시하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의 조건 하에서는 '지옥에서 구출된' 탈(脫)성매매 여성뿐만 아니고 서민층 전체는 점차 중산계층으로 상승할 희망을 잃고 저소득 고(高)불안의 상황에 허덕이게 되지 않습니까?
  
  상당수가 "취직의 길이 막막해서", "동생의 학비/부모님의 치료비가 급해서", "지방에서 마땅히 할 게 없어서 무작정 상경했는데, 쉽게 찾을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어서" '포주'들에게 착취를 당하게 된, 즉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버림 받은 이들에게 지금 정부가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약 1년 전의 여성부의 자료에 의하면, "그래픽운용기능사, 전산회계, 피부관리, 네일아트, 플로리스트(꽃집 창업), 간호조무사, 애견관리 등 직업훈련"을 실시할 예정이고, 창업 지원을 위해 1년 예산 14억 원을 책정해놓은 것이고, 그 훈련 과정에서 소득이 없는 탈성매매 여성에게 월 50만 원까지 지원비로 지급할 예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포주'의 마수를 벗어나려는 여성에게 사회가 도와주기는커녕 '포주'가 경찰에게 부탁할 경우 경찰이 '도주한 채무자'를 잡아주고 업주에게 돌려주었던 암흑의 과거보다 '지원'이 이루어진다는 그 자체가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국가로부터 법률적 지원을 받는 탈성매매 여성이 선불금 채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치더라도 (업주들의 교활한 '회계' 방법들을 생각하면 쉽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부모님의 치료비나 동생의 학비를 고사하고 혼자 한 몸으로 한 달에 50만 원으로 서울에서 살기가 과연 쉽습니까? 영세업체들이 무더기로 도산 당하는 자본의 거대화, 독점화 시대에는, 여태까지 해당 분야에서의 경험이 없었던 탈성매매 여성이 꽃집을 차렸다고 해도 그 생존 확률이 어느 정도 될 것입니까? 간호조무사의 초봉은 수도권은 100만~120만 원이고 지방은 많아야 70~80만 원 정도인데, 가족을 책임질 입장에 있는 여성이라면 그 돈을 가지고 과연 행복한 삶이 될 겁니까?
  
  즉 지금 정부가 계획하는 '탈성매매 지원'은 그 계획대로 잘 이루어진다 해도, 정부의 생각대로 '탈성매매에 성공한' 여성이 저임금과 지속적인 신분 불안에 노출돼 살아야 하는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하층 내지 최하층에 편입되게 돼 있는 겁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 내지 가족의 학비, 병원비 등이 급해진 여성이 다시 한번 성산업의 착취 구조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물론 집창촌이 점차 철거돼 가는 것이라면 그것이 주로 인터넷 등을 매개로 하는 '정보기술 시대다운' 성매매일 것이고, 그러한 종류의 성매매를 경찰이 제대로 단속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결국 이번 중도 우파 정권의 성매매 관련 정책의 실제적인 내용과 영향을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그것은 식민지 시대로부터 이어받은 '집창촌형' 성매매 산업의 공간적 해체와 동시에 공권력의 영향권을 벗어난 인터넷 등을 통한 '선진국형 성매매'로의 일종의 '이행'이지 진정한 '탈성매매'는 아닙니다. 명실상부한 탈성매매가 이루어지려면 성매매의 피해자들에게 중산층으로의 신분 상승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데,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탈성매매 여성이든 하층의 어떤 구성원이든 이미 상향 사회이동이 막히고 만 것입니다. 옛날에 마을의 빈농들이 도시에 들어가서 노동자가 됐듯이, 지금 집창촌을 떠나는 여성들의 상당 부분이 탈성매매하는 대신에 '신형 성매매' 산업으로 들어갈 위험이 큽니다. 물론 법률이 엄격하게 집행되고 사회의 성적 풍경이 다양화된 만큼 이 '신형 성매매'도 과거와 달리 단순한 삽입 성교 중심주의를 떠나 '남성의 다양한 성적 판타지 실현'을–요즘의 일본 성산업처럼–지향할 확률이 큽니다. 예컨대 <스포츠한국> 2005년 5월 16일의 '변칙 성매매'에 대한 보도를 보시지요.
  
  "서울 강남역 인근에 문을 열었다는 한 '페티쉬 클럽'이 입소문을 타고 남성들 사이에서 뜨거운 화제가 되고 있다. 인터넷 성인커뮤니티에 올라온 경험담을 보면 성매매 특별법 이후 유행처럼 번진 이른바 '대딸방'(여대생이 자위행위를 해주는 곳이란 뜻의 은어)은 아닌 듯싶다. 국내 최초의 '페티쉬 클럽'이라는 I업소는 오히려 일본의 풍속업소인 '이메쿠라'를 한국화 시킨 인상이 짙다. 거실, 자취방, 공부방 분위기로 단장된 작은 방에는 소파와 테이블, 책상 등 평범한 가구 몇 개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남자 손님이 방으로 안내되고 나면 정장 혹은 특정 유니폼을 입은 여성이 등장한다. 물론 이들은 대부분은 미니스커트 차림이고 스타킹을 신고 있다고 한다. 여성들 역시 페티쉬 마니아라고 하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방에서 마주 앉은 남녀는 적당히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성 취향을 확인한다. 남성들은 대개 '치마 속을 훔쳐보고 싶다' '스타킹 신은 다리를 만지고 싶다'는 욕망을 고백한다. 여성들 역시 '발을 빨아 달라'거나 '성기부분을 짓밟고 싶다'는 색다른 성적 욕망을 드러낸다고 한다.
  
  커플에 따라 가학과 피학적인 역할을 맡기도 한다. 서로의 욕구를 파악하고 나면 속칭 '플레이'에 들어가는데 직접적인 섹스는 없다고 한다. 치마 속을 훔쳐보고 싶은 남성이 있다면 파트너인 여성은 팬티가 보이도록 다리를 벌려주는 식이다. 대부분의 커플은 얌전한 행위에서 시작해 더 과격한 행위로 발전한다.
  
  남성 중 상당수는 스타킹을 찢거나 스타킹 신은 여성의 발을 입으로 애무하며 성적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여성이 발로 남성의 성기를 애무해 주는 '풋잡'같은 서구의 성 행태도 이곳에서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주목 할 만한 점은 의외로 젊은 직장인이나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성들이 여기에 열광하고 있다는 것이다.
  
  '플레이'가 절정에 이르면 서로 자위행위로 마지막 욕구를 채운다고 한다. 성매매 특별법을 교묘하게 피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삽입 성교가 아니기에 이 '변칙 성매매 업자'들을 처벌할 길이 없지만 여기에 커다란 문제가 내재해 있다는 것이 제 느낌입니다. 물론 이러한 산업에 선두를 서고 있는 일본의 업자들처럼 한국 업자들도 "여성 종업원들도 자신들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니 정확한 의미의 성매매라기보다 성적 교환"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여성들의 욕망의 세계야 저로서 어떻게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들이 비록 과거와 같은 선불금 채무자, 즉 '준(準)노예'가 아니더라도 남성의 성 판타지를 실현시켜주고 금전적 대가를 받는, 그리고 그 대가 중에서 상당 부분을 업주에게 빼앗기는 피(被)착취자들입니다. 비록 그들에게 애당초에 가학적, 피학적 욕망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이 일을 하면서 자신들의 주체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보다는 남성의 욕망을 발견하고, 심화시키고 대리 충족시키는 타율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는 것이지요.
  
  그들이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자본의 세계에서 자신의 가장 은밀한 부분, 즉 성적 상상의 영역을, 돈을 가진 지배자적 남성을 위해 팔아야 하는, 비주체적이며 반(反)주체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지요.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한국에서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정착되면 될수록 이 사회가 돈이라는 무기로 자신의 가장 '엽기적인' 성적 욕구를 다 채울 수 있는 '만족 만점'의 부유하고 안정된 극소수의 고급 화이트 칼러 남성과, 돈을 받고 남의 성기를 밟아주어야 하는 하층 여성이라는 두 극단으로 갈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 사회의 성 풍토를 보시면 제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금방 아실 것입니다.
  
  위의 이야기는 주로 한국 성매매 산업의 현재, 그리고 그 신자유주의적인 재편의 전망을 다룬 것이었는데, 이제부터는 그 역사적 뿌리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량 산업으로 성장된 매매춘이 대다수의 근대 국가에서 번창하지만 우리 '매매춘 공화국'의 경우에는 그 규모(국내 총생산의 4,1%)나 가시성, 일반화의 정도는 유럽이나 미국을 능가하고 '매매춘의 제국' 일본의 수준에 더 가깝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에게 여러 형태의 매매춘의 이미지가 현대사의 여러 페이지들을 쉽게 연상시킨다는 것이겠지요.
  
  전쟁 과부들이 대량으로 사창가로 몰렸던 1950년대, '양공주'들이 "외화 벌이의 주역", "애국자"로 당국의 칭찬을 받고 일반인으로부터 "양놈의 걸레" 소리를 들었던 1960년대, 일본인들의 '기생관광'이 '민족적' 공분을 일으켰던 1970년대, 인신매매의 문제가 신문 지상에 공개되기 시작한 1980년대, 그리고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 동남아 '기생 관광'의 주체가 되었던 1990년대….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한국 공업화 자체도 그랬지만 성산업의 성장도 국가가 계속 주도, 관리해 온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1947년에 일제시대의 공창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1961년 11월에 군부 정권이 '윤락행위방지법'으로 여론을 무마시키고 자신들을 "불쌍한 윤락녀의 구제자"로 미화, 부각시켰지만, 또 한편으로는 미군이나 일본 등지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외화벌이'형 매춘이 늘 국가의 보호와 장려를 받았으며 국가의 관리 기능까지 전제로 했습니다. '윤락'이 불법화된 나라에서는 1970년대부터 미군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을 상대로 국가가 정기적인 성병 검사를 하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까? 청량리와 미아리의 존재도, 사실상 관할 경찰서의 '이해'와 '협조'를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공권력이 전지전능한 규율국가에서는 가능했겠습니까? 즉 2000년대 초까지의 한국의 '성산업화(性産業化)'도 어디까지나 '국가주도형'이라고 분류해야 할 듯합니다.
  
  담론적 차원에서는, '민족'과 '국가'가 신성시되는 상황에서는 성산업에 대해 애증이 엇갈릴 수밖에 없었지요. 예컨대 '민족'의 입장에서는 일본 관광객들이 한국 성매매 여성을 "돈으로 산다"는 것이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지만, '국가'의 입장에서는 '특수 관광'은 "애국적인 외화 획득 사업"이었습니다. 또는 '양공주'나 '일본인 기생 관광'의 이야기가 "민족적 수치"가 되는 반면, '우리'도 외국 여성의 성을 매매할 수 있게 된 1990년대의 풍요에 대한 "민족적 긍지"가 느껴지는 등, 매매춘의 여러 이미지들이 '민족'이라는 근대적 '상상의 공동체'의 집단적 기억 만들기에 아주 다양하게, 그리고 크게 기여합니다. 그런데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여성을 "애국자"로 보든 "민족의 수치"로 보든 남성 주도적인 거대 담론에 여성이 부차적인 일부분이 되고 예속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국가'가 중요하느냐 '민족'이 중요하냐가 다를 수 있었지만 몸을 팔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구체적인 한 여성의 아픔이 중요시되는 것보다는 그 여성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우리'의 테두리가 중요시되었던 겁니다. 집창촌 해체의 하나의 중요한 배경으로 "국제적 이미지 제고", "인신매매 국가 이미지 탈피"가 작용되는 오늘날에는, 그게 과연 크게 바뀌었는가요?
  
  성이 상품화돼도 그 상징성은 어느 상품보다 더 깊기에 성매매의 변천이 역사상의 계승과 두절을 상징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사실, 성매매 풍토의 엄청난 변화야말로 한국 전통사와 근대사 사이의 두절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두절'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반박할 것 같습니다. 기둥서방(妓夫, 포주라고도 불렀음)에게 손님으로부터 받은 화채를 다 주어야 하고, 기둥서방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속량(贖良)'의 값으로 큰돈을 물어주어야 했던 구한말의 유부기(有夫妓)의 생활을, 그 때도 '노예 매춘'이라고 불렀지요. '포주', '유곽(遊廓)', '화류계(花柳界)' 같은 단어들을, 삼패(三牌)기생들의 매음업과 관련해서 100년 전에 이미 썼던 것이지요. 즉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인신 자유의 박탈이나 경제적 착취는–그 규모는 물론 달랐지만–이미 그 때도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일제 시대의 지식인들의 시각으로는, 근대의 매춘과 전근대적 기생 문화는 서로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그 당시 매춘업 상태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의 시도로 불러질 만한 익명의 논설 '경성의 화류계"'(<개벽>, 제48호, 1924년06월, 95-100쪽)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은 관심을 끕니다.
  
  "어제의 기생은 귀족적이나 오늘의 기생은 평민적이다. 어제의 기생은 비록 천한 일을 할지라도 예의염치를 숭상히 여기더니 오늘의 기생은 오로지 금전을 숭배한다. 금전만 주는 이상 예의도 염치도 다 관심 없다. '노래를 팔아도 성을 팔지 않는다(賣唱 不賣淫)'는 말 자체가 이미 없어졌다. 순연히 상품화된 것이다. 속류의 노래를 들을 수 있어도 고상한 시, 시조, 가사를 알지 못하고, 장구나 꽹과리를 잘 만질지언정 거문고, 가야금 줄도 고를 줄 아는 이들은 적다. 반(半)벙어리 일본 노래를 들을 수 있어도 옛날 황진이의 시 같은 것을 볼 수 없다. (…) 어찌 기생의 타락이라 말하지 아니할까?"
  
  이 주장을, 한성 토박이의 옛날에 대한 단순한 향수로 치부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전통 시대의 기생의 위상과 근대 매음녀의 위치의 차이를 아주 잘 표현한 듯합니다. 속박과 착취라는 공통점이 있고 늘 남성, 그리고 남성들의 국가의 욕구가 중심에 서 있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전통 시대의 기생 (특히 고급 연예인으로 인식됐던 일패기생)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성적인 대상물이 아니라 자존심과 사회적 발언권이 있는 문화의 전수자였습니다. 황진이의 시작(詩作)을 다들 알지만, 변방 함경도 경성(鏡城) 출신이라 해도 홍랑 (洪娘, 16세기)과 같은 무명의 기생이 우리의 심금을 지금도 울리는 "묏버들 가지 가려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쇼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나라고 여기쇼서"와 같은 그 애절한 아름다움이 뛰어난 작품을 쓰지 않았던가요? 물론 기생과 시를 교환하고 풍류를 즐기는 것도, 결국 남성 본위의 일종의 "감정적 이용/착취"에 해당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도 적어도 일패 기생의 경우에는, 청량리, 미아리의 현대판 '성노예'보다는 훨씬 더 많은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듯합니다. 유교 경전, 서화, 행의(行儀)에 능숙했던 전통 시대의 기생들은, 고급 문화의 체화의 수준에서 사대부 정도로 꼽히는 문화의 주체들이었지요. 그런데 일본식 공창 제도가 도입돼 일본인이나 송병준과 같은 거물 친일파들이 뒷배 봐주는 '권번(券番)' 조직들이 유곽의 주인이 된 뒤에 '귀족적이었던' 기생은 하나의 돈벌이 기계, 성욕과 위생 관리와 계몽주의자들의 규탄의 대상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시작(詩作), 가창, 가무의 고급 기생 문화가 사라져버리고 여성의 몸이 자본의 확대 재생산의 도구가 되고 지금도 근본적으로 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어떻게 보면 봉건적인 인권 박탈이 그대로 존속된 채 고급 문화를 말살시키고 인간의 몸과 마음을 도구화시킨 근대적 유곽이, 일본과 한국이 대표하는 보수적인 권위주의적 근대화의 모습을 가장 잘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요?
  
  구름이 낀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도움 받은 책들

  
  가와무라 미나토 (川村湊) 저/유재순 역, <기생: 말하는 꽃>, 소담출판사, 2002
  박종성, <백정과 기생: 조선천민사의 두 얼굴>, 서울대출판부, 2003
  문정희 편, <기생시집>, 해냄, 2000.
  고미숙,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 민족, 섹슈얼리티, 병리학>, 책세상, 2001.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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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노예인가 성노동자인가?

박노자-허동현 서신논쟁 3부<6> 한 세기 전과 오늘 매춘 여성의 꿈

"강산은 좋은데
이쁜 다리들은
털난 딸라들이
다 자셔놔서 없다." (신동엽, 「발」(『현대문학』1966.3)
  
  1960년대 군사독재에 맞선 반외세·민족 자주를 꿈꾼 저항시인 신동엽은 "털난 딸라"들에게 순결을 앗긴 이 땅의 여성에게서 민족의 종속을 보았습니다. 반외세·민족자주를 꿈꾼 시인에게는 민족이란 거대 담론이 지배적 가치였기에 그의 눈에 여성은 종속적인 존재로 비칠 뿐이었습니다. 반독재·반외세 투쟁의 구호가 계속 울려 퍼지던 1980년대까지도 남성들에게 여성은 주체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이"이자 "마누라"인 이 땅의 여성들이 "관광기생"과 "양공주"로 외세와 자본과 국가권력에 유린당하도록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던 시인은 자신의 거세된 남성성을 한탄하곤 했습니다. 아래 공광규 시인의 시에서 가부장적 남성 우월의식의 냄새가 느껴진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요?
  
  "해서 제국주의 성기가
  누이들의 속살 팍팍 헤집는 신음이
  황홀한 창으로 나와 호수에 빠지는 불빛 보며
  호변 가로등 밑을
  다리 이쁜 여자와 서정시로 껌 씹으며 걸어가다
  이 여자(장차 내 마누라가 될 여자)를
  당당한 중진국 애국 지식인 양심으로서
  외화수입을 위해 옷 벗겨 관광기생으로
  나라에 바쳐볼까 하지만
  
  글쎄
  그럴 때마다 이화여자대학교 총학생회에서
  지역 어느 대학 남자 총학생회장에게 보냈다던
  썩은 고구마(어떤 놈은 고추 또는 쏘세지라고도 한다)와 면도칼(어떤 놈은 가위라고도 하고)을 생각하며
  섬뜩섬뜩 가운데 다리를 움켜쥔다
  
  누이들의 몸값으로
  GNP 계산하는 나라에
  세 개의 다리로 서 있는
  불쌍한 나여
  내 나라의 여자도 못 지키는."
  (공광규, 「대학일기 · 4」, 『대학일기』, 실천문학사, 1987)
  
  근대 국민국가에서 여성은 국민이 아니라 비(非)국민이었습니다. 지난 시절 "성공"한 국민국가, 제국(帝國)의 여인들도 군인으로서 남성을 낳고 기르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현모양처일 뿐이었습니다. 반면 식민지 조선의 여성은 자국의 남성 가부장권과 제국군대의 성 착취라는 이중의 수난을 감수해야 할 피침략 민족 구성원 중 가장 약한 존재였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주변부에 머문 한국의 여성들은 "제국주의 성기"들이 들고 온 달러나 엔과 교환되는 성 노리개이자 "위축된 성기"인 자국 남성의 가부장권 앞에 여전히 무릎 꿇고 있던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왜 신동엽과 공광규 같은 남성 시인들은 외국인에게 유린당한 외국인 상대 매춘여성들의 존재에 절규하면서도 내국인 상대 매춘 여성의 아픔을 주목하지 못했을까요? 이들의 시를 흔들리는 가부장권, 상처받은 남성성에 대한 자기 연민의 넋두리라고 한다면 지나친 논리 비약일까요?
  
  군사독재의 긴 터널을 넘어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여성들도 더 이상 남성들의 "인형"으로 머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매매춘을 가부장제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이자 남성들이 저지르는 비윤리적 범죄행위로 규정한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으로 2004년 유사 성행위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매매춘을 불법으로 규정해 금지하는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되었지요. 여성 여권 운동가들에게 "성매매" 여성은 외세와 그에 야합한 부당한 국가권력과 외국과 자국 남성 모두에게 착취당하고 짓밟힌 희생자로서 구출되어야 할 대상이었으며, "성매매"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산물로 법으로 막을 수 있는 범죄로 보았습니다. 아래 20여 개의 "성매매" 근절운동 단체들의 연합체로 1986년에 세워진 "한소리회"가 만든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의 시행령·시행규칙 제정에 대한 의견서"의 서두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올해는 일제에 의해 공창제가 시행된 지 꼭 1백 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난 백 년 동안 우리는 가난을 이유로, 순결한 대다수 여성을 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심지어는 외화를 벌어들여야 한다는 이유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화할 수 있고 따라서 여성의 몸도 사고팔 수 있는 것이라는 이유 등을 들어, 가난에 찌들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이들을 이 사회의 가장 끝으로 내몰았고 그들의 몸을 이용하고 착취해 먹고사는 수많은 불필요한 사람들과 구조를 만들어냈습니다. 잔인하고 착취적인 성매매는 즐거움을 위한 또 하나의 서비스업으로, 일정 부분 사회에 순기능을 하는 필요악으로 인식되었고 성매매 피해여성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이 사회의 모든 더러움을 받아내는 자발적 희생양으로 자리 잡아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이 가난과 차별에 의한 구조적 희생양이며 이들이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성매매를 방관하는 것은 사회를 바로 이끌어야 할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매매 근절과 성매매 피해여성들의 재활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착취적이며 인권침해적인 성산업의 고리에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며 피해여성들이 그 고리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옥죄고 있는 포주와 소개업자 등에 대한 엄정하고 준엄한 처벌과, 성매매 피해여성에 대한 사회 적응 훈련과 아울러 이들이 스스로 벗어나기 힘든 차별과 빈곤의 고리를 끊어주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끊임없이 악의적인 필요를 만들어내 성매매를 방조하고 조장하는 이 사회의 구조와 의식에 대한 변화와 구조적 범죄에 편승해 다른 사람의 처절한 빈곤과 차별을 짓밟고 스스로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성구매자에 대한 엄격한 처벌과 교정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난 10월 25일 서울시 미아리 자립지지공동체 소속 여성단체 회원 등 여권운동가들과 춘천시 근화동 인근 성매매 집결지인 속칭 '난초촌'의 성매매 여성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다는 신문 보도와 올해 6월 만들어진 "전국 성노동자 연대(전성노련)"과 9월에 평택지역 매춘 여성들이 따로 만든 "민주 성노동자연대(민성노련)"의 작은 외침에 귀를 막기 어렵더군요.
  
  이들은 자신들은 강제적인 인신매매에 의해 착취되는 "성노예"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성산업에 종사하는 "성노동자"이자 시민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자신을 "성노동자"로 규정하는 이들 매춘 여성들은 심지어 여권운동가들을 자신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생존권을 위협하는 적대세력으로 보더군요. "전국성노동자 연대" 결성시에 내 놓은 "출범 선언문"을 보시지요.
  
  "한반도에서 역사가 시작된 이래 다양한 이름의 성노동자들이 무수히 존재했지만, 오늘 한국의 성매매 특별법 경우처럼 성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사례는 결코 없었다. 더욱이 성매매 금지주의라는 반인권적인 정책이 이른바 참여정부라는 노무현 정권에 와서 강력히 시행되는 것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 이 모든 기만적인 정책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가. 그 주인공들은 바로 한국의 여성계 권력자들이다. (…) 이제 여성계 권력자들은 성매매 특별법을 통해 우리 성노동자들을 모두 '성매매 피해여성'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이는 말도 안되는 무지한 얘기다. 성매매 피해여성이라는 개념은 성(性)과 관련한 인신매매를 지칭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스스로 일하는 성노동자다. 누가 우리를 인신매매 했다는 말인가. 국제사회에서도 '인신매매'와 '성노동'은 엄격하게 구분하건만 한국에서는 배웠다는 사회지도층들이 그 정도 분별력도 없단 말인가. (…)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현행 성매매 특별법 아래서는 불법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우리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단속과 오명과 낙인으로 생존권을 잃고 극도로 고달픈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성노동자들은 엄연히 인간이다. 그리고 노동자고 비정규직이다. 더 이상 이 억압의 굴레에 승복할 수 없다. 우리에게 돌을 던지고 싶은 자는 우리를 옥죄는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향해 돌을 던지기 바란다. 우리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성노동을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이 판단해서 적절한 시점이 되면 탈 성노동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따라서 이는 여성계 권력이 법을 매개로 위계에 의해 강요되어질 사안이 아닌 것이다."
  
  박 선생님께서는 성매매 여성들을 "성노예"로 보고, 이들이 자본주의 체제와 남성 중심사회의 구조적 산물이자 희생자로 보는 점에서, 성매매 문제를 보는 시각이 "성매매 방지법"을 시행한 페미니스트들과 비슷한 입장이신 것 같습니다. 허나 저는 선각한 이의 의무로 깨닫지 못한 우중을 계몽하려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은 페미니스트들의 담론이 깨우쳐 주어야 할 대상을 낮추어 보는 근대 계몽주의자의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그들은 여권의 신화화를 통해 여권운동가 자신을 계몽의 주체로, 매춘 여성을 그 대상으로 나누는 잘못을 범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들의 오류를 지적하는 여성민우회 국제위원인 이성숙 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열린 생각에 공감합니다(『매매춘과 페미니즘, 새로운 담론을 위하여』, 책세상, 2002).
  
  "페미니스트 매매춘 정치 이론가들의 가장 큰 오류는 당사자인 매춘 여성들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페미니스트들은 섹스 노동자들을 가리켜 여성의 육체를 시장에 내다파는 성노예라고 주장하는 반면, 매춘 여성들은 매춘을 성적 서비스 또는 성적인 친밀성을 판매하는 성노동이라고 주장한다. 매춘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매매춘 사회와 문화에서 벗어나 있는 제3의 집단인 페미니스트 학자나 이론가들이 남성 주류문화나 기득권에서 정해놓은 개념과 논의들을 답습하기 때문이다."
  
  남성 중심주의를 극복하려 하면서 남성 주류문화의 담론을 그대로 답습해 매춘여성을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교화대상으로 낮추어 보고 있다는 점에서 매춘 여성들을 선도하겠다고 나선 페미니스트들이 지난 시절 현모양처를 강요하던 남성 우월주의자들이나, 약자인 여성을 외세에 의해 순결을 뺐긴 무기력한 존재로 타자화함으로써 주눅 든 남성성의 열등감을 드러낸 권위주의 시절 남성 시인들과 놀랄 만큼 닮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또한 저는 페미니스트들이 매매춘의 두 당사자 중 여성의 몸을 돈을 주고 산 남성들만을 범법자로 규정하는 것을 비판해 "매춘 여성을 제외한 남성들을 범법자로 규정하는 역차별은 남녀 평등사회를 요구하는 페미니즘을 여성 지상주의로 오도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이성숙 선생님의 지적에 생각을 같이 합니다.
  
  "여성가족부"라는 정부부서의 영어 이름은 "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더군요. 그러나 "양성평등과 가족부"로 번역되는 부서명이 훨씬 더 제 가슴에 와 닿습니다. 우리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지상주의자라는 오해를 사지 않으려면 세계 기준의 보편성을 보이는 영문명에 준하는 양성평등부로 부서명을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양성평등의 사회를 지향하는 이성숙 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제안을 마음을 열고 고려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성 중심의 사유체계를 재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듯이, 또한 그러한 능력과 의무를 지니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은 매매춘에 대한 우리의 가치와 태도를 바꿀 수 있는 담론을 창출해야 한다. 적어도 매매춘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므로 추방되어야 한다는 기존의 논의 틀에서 벗어나 광범위하고 유연한 페미니스트 매매춘 이론을 정립해야 한다.
  
  건전한 매매춘 형성에 필요한 페미니스트 이론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할 것이다. 매춘 여성들이 성병 감염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남성 고객의 성기를 검사할 수 있는 권리, 남성 고객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남성 고객의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의 강조, 매춘 여성은 성노동자라는 개념 인식,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다양성 강조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페미니스트 매매춘 이론은 남녀 불평등을 창출하고 견고하게 만든 서구와 남성 중심의 사유체계에 대한 거대한 도전이 될 것이다.
  
  (…) 현재 우리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매매춘 그 자체가 아니라, 매매춘을 바라보는 우리의 적대적인 태도이다. 건전한 매매춘을 형성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적대적인 태도가 아니라 현상을 인정하는 열린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되면 매춘 여성에게 가해지는 여러 가지 폭행과 인권 유린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며,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매매춘의 문제가 아니라 성격이 완전히 다른 범죄 행위가 될 것이다."
  
  자! 그러면 매매춘 문제에 대한 박 선생님의 생각과 제 생각이 다른 지점 몇몇을 짚어 봅시다. 박 선생님은 조선시대의 기생은 "단순한 성적인 대상물이 아니라 자존심과 사회적 발언권이 있는 문화의 전수자"로서 "사대부에 버금가는 문화의 주체"였던 반면 일본식 공창 제도가 도입된 일제하 기생은 "돈벌이 기계"이자 "자본 확대의 재생산 도구"에 지나지 않는 비천한 존재로 전락했기 때문에 이러한 매매춘의 변천이 "전통과의 두절"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파악합니다. 따라서 박 선생님은 오늘 한국의 매매춘은 일본의 공창제도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보며, 그 유산인 오늘의 매매춘은 근대국가 특히 자본주의 국가들이 태생적으로 갖게 되는 병폐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전통시대의 기생이 사대부에 필적하는 고급문화의 주체였다는 데 생각을 달리합니다. 몇몇 기생들이 남성 양반들의 지배구조를 조롱하는 시조를 남겼다 해도 그녀들은 사회적 천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당시 기생들은 사대부의 "말귀를 알아듣는 꽃"이라는 의미인 해어화(解語花)로, "누구라도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장 밑의 꽃"이란 뜻인 노류장화(路柳墻花)로 불린 것이지요.
  
  일례로 성종 임금 때 명기 소춘풍(笑春風)은 임금을 모신 연회석상에서 문반을 치켜올린 시조로 무관의 노여움을 사고 다시 이를 풀어주기 위한 시조로 문관의 핀잔을 듣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맞아 곤혹스런 자신의 처지를 춘추전국 시대 강국 제(齊)와 초(楚) 사이에 끼어 있던 약소국 등(滕)나라의 입장에 비겨 "두어라 누군들 섬기면 임금이 아니겠는가 제나라도 섬기고 초나라도 섬기리라"고 노래하는 기지로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의 몰락과 함께 양반은 제3인칭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 양반이… 저 양반이…"하며 시비를 다툴 만큼 양반의 권위가 실추된 일제시대에 "개쌍놈의 아들이라도 황금만 가졌으면 일류 명기를 하루 밤에 다 데리고 놀 수 있게 된 기생의 민중화" 시대가 열렸고, 이러한 세태는 근대주의자들의 눈에 기생은 "노예매매제의 유물"이자 "가정의 파괴자"요 "국민 원력의 소모자"로 철폐되어야 할 "규탄의 대상물"로 비쳐졌지요( 한청산, 「기생철폐론」, 『동광』1931. 12).
  
  박 교수님 말씀대로 기생들은 "보수적인 권위주의적 근대화"에 소리 없이 짓밟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희생자이며. 근대의 매매춘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병폐로 볼 수 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의 개시와 함께 시작된 매매춘은 전통시대는 물론 근대 자본주의 국가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체제를 갖고 있던 나라에서도 성행하였기에, 매매춘의 존재를 경제적 측면에서만 해석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봅니다.
  
  제가 보기에 박 선생님은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하층 여성들이 주로 매매춘에 나서며,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설사 그녀들이 "탈성매매에 성공"한다 해도 최하층 신분을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시는군요. 그런데 저는 신자유주의가 진행될수록 "부유하고 안정된 극소수의 고급 화이트 칼러 남성들"이 "돈을 받고 남의 성기를 밟아 주어야 하는 하층여성"들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것이 심화될 것이라고 본 박 선생님의 진단에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가난한 빈곤층 여성들은 모두 매춘부가 되는 것이 아니듯, 박 선생님도 지적한 것처럼 요즘 유행하는 "페티쉬 클럽" "대딸방"의 종업원이 대학생이라면 그녀들을 하층민이라고 볼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실증적인 자료에 의하면 부르주아라 할 수 있는 화이트 칼라 남성들은 교육받은 중간계층 출신의 고급 콜걸을 찾고 오히려 노동 계급의 남성들이 하층민 출신 매춘여성의 성적 서비스를 이용한다고 합니다.
  
  사실 집창촌을 벗어나 인터넷을 매개로 확산되는 신종 성매매 산업의 주역들은 교육받은 중산층 출신 여성들이 대다수인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또한 호스트바와 남창의 존재도 매매춘은 남성들만의 전유물이라고 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생각에 반하는 사회현상이지요. 제 귀에는 매매춘에 대한 박 선생님의 비평은 매매춘 자체 보다 어쩌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들리는 것 같습니다.
  
  또한 저는 예나 지금이나 하층민 출신 매춘 여성을 계몽 대상으로 낮추어 보는 것에 반대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매춘 여성들이 성노동자이자 시민으로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하듯, 한 세기 전 이 땅의 매춘 여성들도 남성 지배사회와 식민지라는 이중의 질곡 아래에서도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낸 근대 국가 건설을 염원한 국민의 한 사람이자 남녀 동권 운동의 선구였으며, 나아가 대중문화 건설의 새로운 주체로 거듭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이 국민의 일원이 되려 했음은 국망을 몇 달 앞둔 1910년 5월 대구 기생들이 국가 발전을 위해 "학업 발흥과 군사 양성" 둘 중 무엇을 먼저 해야 하나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려 했다는 『대한매일신보』(1910. 5. 31)의 보도에서, 그리고 거족적인 민족운동인 3·1운동에 수원·해주·진주·통영 등지의 기생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한 역사적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1930년대 카페의 여급으로 진화한 기생의 후예들은 조선청년들의 가슴 속에 독립 사상을 불질러 준 "불령선인(不逞鮮人 : 독립운동을 하는 불온한 조선인)"이자 "불령스타"로 경찰의 감시대상이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그녀들은 "마음을 파는 신사들보다 살을 파는 기생생활이 못하지 않다"는 자기 정체성을 갖고 "여성의 인간성을 제약하여 남성들의 완구, 씨(받이)통을 만드는"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반항의 기치를 높이 든 주체적 인간들이었습니다(화중선, 「기생생활도 신성하다면 신성합니다」, 『시사평론』, 1923. 3).
  
  이러한 각성은 몇몇 기생들에 그친 것이 아니라 는 점은 "우리도 눈을 떴습니다. 우리도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사회적으로 평등적으로 살아보겠다는 부르짖음! 그의 첫 소리가 『장한(長恨)』이란 우리의 기관잡지로 인하야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고 한 기생 김채봉의 「첫소리」(『장한』1, 1928, 1.)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매춘여성이 성산업에 종사하는 성노동자이자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길 꿈꾸듯, 민족과 국가가 최우선 가치이던 한 세기 전 시절 이 땅의 매춘 여성들도 민족과 국가의 동등한 일원이길 꿈꾸었던 것이지요.
  
  어찌 보면, "일본 제국의 온갖 판도와 아시아의 문명도시 어느 곳이든 다 있는 댄스홀"을 서울에도 허용할 것을 촉구한(「경성에 댄스홀을 허하라」,『삼천리』, 1937. 1) 기생 오은희·최옥진·박금도는 그들과 연명으로 글을 쓴 끽다점 "비너스"의 마담 복혜숙, 바 "멕시코"의 여급 김은희, 그리고 영화배우 오도실과 최선화와 함께 새로운 대중문화를 만들어 나간 당당한 주체였다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시적으로 볼 때, 일제하 기생들의 움직임도 대중사회의 새로운 문화주체로 거듭 나려 한 신여성들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이러한 여성들의 주체적 문화창조 노력이 모두 모여 오늘의 대중문화라는 새로운 영역이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매춘 여성을 성노예로 보아 이들을 구제하려는 사명감을 갖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이나 자신을 성노동자로 규정하며 인권과 생존권 찾기에 나선 매춘 여성이나 앞으로 남녀 양성 동권 사회가 도래하길 꿈꾸는 데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소망하는 미래를 앞당기기 위해 힘 있는 쪽에서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같이해 매춘 여성들의 작고 낮지만 강한 외침을 듣고자 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인류 역사가 열린 이래 가장 오래된 직업인 매매춘 문제 해결을 위한 보다 나은 사회적 처방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도움이 된 책

  
  이경민, 『기생은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사진아카이브연구소, 2005.
  이성숙, 『매매춘과 페미니즘, 새로운 담론을 위하여』, 책세상, 2002.
  후지메 유키 저, 김경자 · 윤경원 역, 『성의 역사학--근대국가는 성을 어떻게 관리하는가』, 삼인, 2004.
  전성노련 카폐 http://cafe.daum.net/uavenus
  민성노련 카폐 http://cafe.daum.net/gksdudus
  성매매 피해여성 자활지원을 위한 다시함께 센타 홈페이지 http://www.dasi.or.kr/

   
 
  허동현/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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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가 ‘애국 경쟁’을 벌이던 일본에서 사회주의를 발견한 승려들…주류 교단에서 마르크스를 멀리한 이유는 붓다의 진정한 정신을 잃었기 때문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폭력을 쓰지 않고서 얻은 재물로 자신을 안락하게 하는 동시에 남에게도 골고루 분배해 복을 짓는 사람, 재산을 탐내지 않고 재산에 미혹되지 않으며 재산 때문에 죄악에 빠지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은 근심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얻는다.”

‘천황 암살 음모사건’에 말려든 승려들

이 인용문은 나눔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오늘날의 사회운동가의 말이 아니라 초기 불교의 근본 경전인 <상유타 니카야>에서 따온 붓다의 말이다. 인간·사회 혁명의 사상가 붓다는 전쟁을 일삼는 군주와 재물을 나눠가질 줄 모르는 부자를 최악의 악인으로 파악하고, 생활이 곤궁해서 도적이 된 빈민들이 법망에 걸리더라도 벌주지 말고 생활비를 주어서 그냥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가난뱅이들에게 형벌을 주는 재판관을 나쁜 직업으로 생각했다. 지중해 세계의 원시 사회주의자라 불릴 만한 예수만큼이나 강렬한 것은 아니었지만 붓다에게 사유제도·국가권력은 사회적 죄악의 한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승려는 왕궁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하고, 칼 찬 사람에게는 설법하지 말아야 하며 몇 개의 필수품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거나 탐내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붓다의 제자들은 오늘날 한국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스님까지 군에 끌려가서 살인 훈련을 받으니 칼 찬 사람에게 설법하는 것은 문제 설정조차 안 되고, 지배층·권력자들과의 접촉은 교단의 ‘문제’라기보다는 자랑거리다. 집착을 버려 고통에서 벗어나라는 해탈의 종교 안에서 학벌에 대한 집착에 의한 돈벌이, 즉 ‘대입 기도’가 거의 제도화된 지 오래다. 자본과 폭력에의 포섭 차원에서 불교에 비해 덜하지 않은 이웃 종교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면서 “우리만 그런 게 아니지 않느냐”라고 항변할 수도 있지만, 사회주의적 성격을 띤 종교가 돈과 권력의 포로가 됐다는 것은 부끄럽고 아쉽다. 사찰들이 장례식장이나 대기업 직원 훈련장으로 이용되는 등 종교적 서비스업으로 전락한 이웃 일본도 불교 자본화의 추태를 보이고 있다. 과연 동아시아는 붓다의 가르침과 국가·자본주의는 ‘공존’할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없었나? 국가와 자본에 맞선 불교 지도자들은 없었던가? 만약 있었다면 어떻게 제도권 불교가 지금과 같은 지경에 이르렀는가?


△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반발하는 승려들. 마르크스와 붓다는 도반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진/ AFP 연합)

일본의 초기 자본주의가 국내를 착취 공장으로, 동아시아 이웃 나라를 처참한 전장으로 만드는 상황에서 ‘국민’이라는 환상의 벽을 뚫어 국가·자본과의 투쟁에 나서는 스님들이 있었다. 일찍이 다카시마 베이호(高島米峰·1875~1949)와 같은 불교 개혁가들이 러일전쟁에 반대하면서 초기의 노동운동을 지원했으며, 우치야마 구도(內山愚童·1874~1911)라는 사회주의적 승려가 <평민신문> 초기 사회주의자 그룹의 일원이 되어 “군인들이여, 착취자 군대의 장교들에게 복종하지 말고 탈영하라!”고 외치는 등 급진적 반국가 활동을 하다가, 1911년에 경찰이 조작한 ‘천황 암살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불교 자체의 평등주의적 지향에 대한 각성도 있었지만 기독교계도 1920년대 조선의 진보적 기독교인에게도 잘 알려졌던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1888~1960)와 같은 기독교적 노조 활동가를 낳게 되니 참고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불교와 사회주의의 초기 만남은 현실적으로는 순탄치 않았다. 중산계급 사이에서 경쟁자 기독교의 확산을 우려했던 제도권 불교 세력들은, “외래 종교인 기독교보다 불교가 더 애국적이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1889년에 불교를 천황주의적으로 왜곡한 ‘존황봉불대동단’(尊皇奉佛大同團)이라는 이름의 어용 단체를 만들고 그 뒤 청일, 러일전쟁 때 종군 포교사를 보내 애국주의의 광풍을 일으키는 데에 적극 동참하는 등 기독교와 웃지 못할 ‘국가에의 충성 경쟁’까지 벌였다. 붓다 정신이라고는 안중에 없었던 그들은 당시 당국에 체포당한 순교자 우치야마 구도를 제적시키는 등 불교 사회주의 탄압의 선봉이 되었다.

세노 기로, 전향 뒤 폐인되다

제도권 집단으로부터의 고립을 두려워했던 다수 승려들의 ‘과격 사상’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차단됐지만 사회주의에 눈을 돌린 소수마저도 마르크스주의를 체계적으로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해 사회주의 사상을 순박한 ‘경제결정론’쯤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다 1920년대 이후 소련의 교조주의적 ‘반종교 운동’의 영향으로 불교를 도외시하는 일본 공산주의자들의 태도까지 생각하면 불교와 사회주의의 만남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상상이 간다. 식민지 조선의 역사를 보더라도 승려로서 일찍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1923년에 중국으로 망명한 뒤 무정부주의자가 되고 독립운동에 큰 공로를 세운 김성숙(1889~1969)의 경우에는 사회주의자가 된 뒤로 불교에 대한 탐구를 저버린 듯하고, 반대로 신간회(1927~31)를 이끌던 시절부터 공산주의자들과 절친해 ‘평등한 분배’를 지지하고 ‘불교사회주의자’를 자임했던 한용운(1879~1944)은 마르크스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불교와 사회주의라는 추구하는 공통점이 많아도 구조가 이질적인 두 체계에 감성적인 만남은 있어도 이성적인 만남·교류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까.


△ 동아시아에서 국가와 자본에 맛선 불교 지도자들은 없었는가. 일본 교토에 있는 한 절에서 승려들이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다. (사진/ EPA)

불교가 어용화되고 사회주의가 ‘반종교 운동’에 물드는 지난한 상황에서 동아시아에서의 붓다와 마르크스의 만남을 위해 누구보다 헌신한 사람은 일본 불교사회주의의 ‘대부’인 세노 기로(妹尾義郞·1889~1961)였다. 니치렌종(一蓮宗)이라는 국수주의적 종파의 출신으로 원래 마르크스주의를 혐오했던 그는 1920년대 중반에 농촌의 소작쟁의를 중재하면서 계급적 질서의 폭력성을 체험한 뒤 점차 “마르크스와 붓다의 뿌리가 달라도 민중 고통을 극복하려는 휴머니즘은 같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불령(不逞) 분자’의 딱지가 붙어 종단에서 쫓겨난 그는 1931년 4월에 “붓다를 모독하는 시체”인 기존 종단과 대립의 각을 세운 신흥불교청년동맹(新興佛敎靑年同盟)을 결성했다. 이 동맹은 소작인 쟁의·노동자 파업을 지원하고 사회대중당 등 진보정당과 협력하는 한편, 사상적으로 세노의 독특한 불교사회주의 철학을 전파하려고 노력했다. 불교의 연기법에 의거한 세노는, 착취·탐욕·고통의 사회를 나 몰라라 하고 입산해 해탈을 얻는다는 것은 뭇 중생이 서로 연관돼 있는 상의상관(相依相關)의 세계에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나’와 ‘남’ 그리고 ‘물질’ 과 ‘정신’이 하나인 불교의 가르침대로라면, ‘나의 정신적 해탈’의 전제조건은 ‘남의 물질적 해방’, 즉 착취의 철폐를 위한 투쟁이라고 주장했다. 사회 전체가 소유욕이 없고 민주적으로 운영됐던 붓다 생전의 승려 공동체처럼 사회주의적 형태를 띠지 않는다면 자비로운 보살의 입장에서 ‘나만의 깨달음’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법화경>의 행자 세노의 사회주의관이었다.

물론 일본이 파쇼화돼가던 시절에 이러한 단체를 경찰이 가만둘 리는 만무했다. “붓다와 같은 의지력을 키워 절대 전향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매일 했던 세노가 1936년에 체포돼 오랜 고문 끝에 전향을 선언했으며, 동맹의 간부·조직원들이 줄줄이 검거돼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전향 선언에도 불구하고 1942년 반 폐인으로 감옥을 벗어난 세노가, 여생 동안 “전향자로서 붓다와 동료들을 뵈올 면목이 없다”는 자괴감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고, 그를 ‘큰 바보’로 여겼던 제도권 종단들은 1980년대 후반까지 불교적 사회주의는커녕 전쟁에의 협력에 따른 책임 문제마저도 거론하려 하지 않았다. 과거 청산의 실패는 일본 종교계의 진보적 발전의 길을 원천 봉쇄한 것이었다.

사유제도에 대한 두 가지 깨달음

인간의 노동이 사유제도에 의해 인간으로부터 소외돼 상품으로 팔려 인간을 억압하는 자본 축적의 원천이 된다는 사회적인 고통의 순환을 파악한 마르크스와, 사회적 연관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인간의 탐욕·노여움·어리석음이 개별적인 인간에게 망상과 고통으로 돌아온다는 개인적 고통의 순환을 파악한 붓다…. 사유제도가 탐욕과 어리석음이 뒷받쳐주는 조작된 ‘사회적 합의’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마르크스와 붓다의 사고 방법·관심 영역·실천 방식이 아무리 달랐어도 궁극적·심층적 차원에서 보자면 그 둘은 도반(道伴)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제도권 종교계에서 이와 같은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거기에는 한용운이 ‘우주적 혁명가’라고 했던 붓다의 진정한 정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참고문헌

여익구, <민중불교철학>, 민족사, 1988.

모리나가 에이자부로, <우치야마 구도>, 論創社, 1984.

이나가키 마사미, <붓다를 등에 업고 거리로: 세노 기로와 신흥불교청년동맹>, 岩波書店, 1974.

이치카와 하쿠겐, <일본 파시즘 밑의 종교>, エヌエス出版社,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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