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벗에게,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성격으로 볼 때, 당연한 귀결일 수 있습니다. 보수는 이념보다 이권을 중심으로 모입니다. 진보는 이념을 중심으로 모입니다. 이권이 있는 곳에서 부패가 생길 수 있다면, 이념을 중심으로 모이는 진보는 서로 이념의 동질성을 확인하려고 하므로 분열의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사회를 볼 때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이 적용되지 않는 듯합니다. 보수는 부패로도 망하지 않는데, 진보는 그 백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부패로 지리멸렬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문시장을 보면 ‘수구는 선동으로 흥한다’라고 말해야 할 듯합니다.

   시간이 지난 사안일수록 선동의 성격은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강정구 교수의 발언으로 빚어진 소란에서 조중동은 서로 뒤질세라 이념 공세를 펼쳤습니다. 동아일보는 “대한민국 자살을 강요하는 숭김파의 체제 물 타기 공세는 멈출 조짐이 아니다”라고 했고, 중앙일보는 “적화는 됐고 통일만 남았나”라고 했으며, 조선일보는 “가만히 앉은 채 당하느냐, 혼신의 힘으로 결사항전을 하느냐가 대한민국 세력’에 닥친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다”라고 결의를 다졌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 견해를 간직할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라고 했던 볼테르의 말을 되돌아보기엔 그들이 벌이는 선동의 수준은 너무 저질입니다. 선동에 고급한 게 있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지나치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전교조에 대해선 어떤가요? 전교조 죽이기에 앞장서는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전교조에게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훈계조로 말합니다. 조선일보가 애당초 ‘전교조의 초심’에 찬동했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고, 오늘 많은 독자들은 과거 조선일보가 “교사가 노동자냐?”라고 선동하면서 전교조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점을 잊고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전교조의 연가투쟁 연기에 대해 ‘여론 악화에 사실상 백기를 든 것’이라는 나름의 해석을 달았습니다. 그들의 수치 해석법은 71.4%의 지지를 전폭적인 지지로 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중앙일보라고 조선이나 동아와 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이렇게 다른 입으로 같은 목소리를 내는 조중동의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있습니다. ‘밤의 대통령’이라던 조선일보와 중앙-동아의 선동은 국민이 그들이 꾀했던 대통령, 국회 구성과 다른 선택을 하면서 오히려 더 심해진 듯합니다. 놀라운 점은 그들의 선동이 저질이라는 점보다, 조중동이 꾀했던 정치구도와 다른 선택을 했던 국민과 시민사회가 조중동의 헤게모니를 계속 용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한국사회의 수준이라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젊은 벗이 그리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에선 조중동 헤게모니가 관철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조중동 헤게모니를 극복하지 않는 한, 젊은 벗이 그리는 사회는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회에선 적어도 ‘수구가 선동으로 흥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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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무지개 > "어느 페미니스트의 유니크한 도발"

극좌파에 에코이스트를 자처하는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정희진씨
“계급의식 없는 페미니스트보다 젠더의식 없는 마르크시스트가 편할 때도”

▣ <한겨레21> 인터뷰 (2005-11-17)  

여성학자 정희진(38·서강대 강사)씨는 주목할 만한 여성주의자다. 무척 독특하고 도전적이어서 ’유니크’(unique)하다는 단어는 그를 위한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도 “정의되지 않는 사람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급속히 제도화하고 주류화하는 페미니즘의 지형 속에서 그는, “똑똑하지만, 뭔가 어렵고 위험한” 여성주의자로 통한다. 어떤 토론회에 가더라도 “대판 싸우는 일이 많다”. 그가 여성주의를 다루는 방식 때문이다.

성(섹슈얼리티)를 공부하는 그는 “여성의 피해나 처지를 논하는 여성주의, 공적인 영역의 이슈에 머물러 있던 여성주의를 넘어 여성의 시각과 여성의 언어로 인간과 세계를 다르게 볼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힘으로 여성주의는 물론이고 그와 연관된 기존 담론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데로까지 나아가려 한다. 그의 이런 철학을 다룬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펴냄)은 그래서 급진적이며, 근본적이다. “여자들이 출세해야 빌붙어살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다가도 여성주의 조직의 문제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비판하는 직설화법의 소유자인 그를 11월11일 오후에 만났다

왜 나는 <그날이 오면>노래를 싫어하나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제목보다 ‘경합하는 페미니즘’ 또는 ‘모순 속의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을 원했다고 책에서 밝혔는데, 어떤 의미인가. 

= <민족경제론>도 애초에는 그 제목이 아니었는데 나중에 그 이름으로 학파도 생긴 것 아닌가. 출판사 쪽에서 처음에는 ‘정희진의 페미니즘 선언’이라고 하자고 해 질겁했다. 훌륭한 선배들이 얼마나 많은데. 출판사 쪽에서는 독특하고 도전적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어한 것 같다. 복잡한 현실을 복잡하게 설명하는 게 여성주의다. 정답이나 대안보다는 기존 질문에 의문을 제기한다. 또 여성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침묵을 강요받았던 다른 목소리도 가시화하는 데 초점이 있다. 그러니까 목소리들이 경합한다. 내가 가장 반대하는 패러다임이 뭐냐면, 노랫가사에도 나오지만, “한꺼번에 되찾으리라” 하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아웃사이더>나 <당대비평> 같은 매체가 나오는 등 기존 진보 개념이 넓어졌다. 계급이나 민족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의 목소리들이 가시화하고 경합하는 과정이 민주주의다. <그날이 오면>이란 노래도 싫어한다. ‘그날’은 안 오고, 와서도 안 된다. 그날은 노무현의 ‘그날’이거나, 이성애자의 ‘그날’이거나, 경상도 남자의 ‘그날’일지 몰라도, 모든 사람의 그날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완성되어서는 안 된다. ‘그날’을 추구하는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다. 나는 소수자를 나누는 경계나 기준에도 도전한다. 누구를 ‘소수자’라고 규정하는 권력에 대해서 문제제기하는 것이다.

최근의 언론 보도 가운데 두 가지를 유심히 봤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출산 통계를 보면 셋째 아이의 성비(여자아이의 수를 100으로 하고, 남자아이의 여자아이에 대한 비를 나타내는 수치)는 132로 여전히 높았다. 그나마 10년 전인 1994년엔 202였더라. 남아선호 현상은 여전한데 학력에서의 ‘여고남저’ 현상은 급속도로 도드라진다. 사법시험(32.3%), 예비판사(49.1%), 의사국가시험(31.8%) 비율도 그렇고, 주요 국가자격시험 8개 수석자가 모두 여성이다.

= 한국의 남성과 여성 관계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인권국가라고 부르지만, 밖에서는 그렇게 안 본다. 한국은 국제적으로는 (‘낙태’가 아니라) ‘여아 살해’와 가정폭력으로 악명이 높다. 국제회의를 가보면 가정폭력은 남한이 1등, 북한이 2등이다. 지역별로도 성비는 다르게 나타나는데 1988년 대구·경북 지역 여아 살해가 가장 많았다. 박철언씨가 황태자로 등극할 때다. 여성 문제와 정치적 문제는 동전의 양면이다. 모든 사회문제는 여성 문제에 기반해서, 또는 매개해서 작동한다. 한국 여성들의 고등교육 수준은 세계 5위 안에 들지만, 노동시장 진출은 100등 밖이다. 많이 가르치는데 사회에 환원이 안 되고 결혼시장으로 흡수된다. 그러면서 여성들이 모든 자아실현을 자녀들 좋은 대학 보내는 데로 ‘올인’한다. 성차별, 교육(학벌), 계급 문제가 연동하는 것이다.

평등이란 ‘같음’이 아니라 ‘공정함’


당신의 책에서 “내 강의를 쉽다고 평하는 사람들은 주로 전업주부, 폭력 피해 여성, 저학력 생산직 여성노동자이며 어려워하는 사람은 전문직 종사자나 이른바 ‘여론지도층 인사들’”이라고 했다. 나도 책을 읽으면서 쉽지는 않았다. 남성이 여성주의 시선을 가져야 세상이 발전한다고 믿는 것 아닌가.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어떻게 하면 되나.


= 질문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마르크스는 중산층 부르주아지만 어떻게 노동자의 시선을 가졌나. 우리나라에서도 마르크시스트는 중산층이 대부분 아닌가. 우리 사회도 많이 변했다. 요즘 남자 복학생들이 내 강의를 듣는다. 군대에서 영혼이 망가졌는데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서 여성학을 듣는다고 한다. (웃음) 페미니스트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을 뜻하는 건 아니지 않나. 피메일(female)이 중요한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박근혜를 반대한다. 그러나 간단하지는 않다. 박근혜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피메일이지만, 피메일로서의 진보성이 있다. 생물학적인 여성은 성폭력에 반대한다. 성폭력의 위협을 24시간 느끼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절대로 알 수 없는 지점이다. 페미니즘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 입장 가운데 하나다. 나는 페미니스트에, 극좌파에, 에코주의자에, 반연령주의자다.

 

전복적 시각과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곳곳에 보인다. ‘평등’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도 신선하다.

= 내가 처음이 아니다. 나의 언어는 ‘또하나의 문화’를 비롯한 선배 여성주의자들의 지적 세례와 여성운동에 크게 빚지고 있다. 평등은 ‘같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공정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공적 영역인 노동시장에 많이 진출해 있는 만큼 남성들이 사적 영역에 들어가 있는가. 육아노동·가사노동·감정노동 같은 것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양성평등’은 여성들의 이중노동일 뿐이다. 남성 중심의 같음, 비장애인 중심의 같음, 미국 사람 중심의 같음은 ‘같음’이라기보다는 ‘폭력’이다. 예를 들어 이주노동자 문제는 노동 문제라기보다는 인종 문제를 중심으로 봐야 한다. 우리의 시각에서 그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각에서 한국사회를 문제화해야 한다.

민주화운동은 여성운동에 빚졌다

한국의 여성운동은 스스로 피 흘려본 적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 참정권, 발언권 등을 민주화운동에 편승해서 얻었다는 얘기다. 페미니스트들의 헌신성과 실천성이 사회적 관심을 얻는 일도 드물다.

= 현재 여성운동의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할 지점이 있겠지만, 이런 식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지금도 미인대회를 반대해서 분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근대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외부에서 왔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 아닌가.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애 낳으면 민주화운동 했겠나. 민주화운동 내부의 성별 분업이 얼마나 심한가. 복잡한 논쟁이지만, 여성운동이 민주화운동에 빚진 게 아니라 민주화운동이 여성운동에 빚진 것이다. 의존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 약자가 강자에게 의존하는 게 아니다. 강자가 약자들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사장님은 많은 사람을 먹여살리는 게 아니라 비서와 운전사와 가사노동자에 의존하는 것이다.

책에서 언급했지만, 페미니즘은 남성을 불편하게 한다. 거기에 더해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정도 이상으로 욕을 먹는 면도 있다. 그렇다고 욕하는 이들을 마초라고 몰아붙일 수 있는가. 페미니스트들의 어법이나 실천 양식에 문제가 있다거나 페미니스트들의 숙련도의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의 문제라고 본다. 그런 식의 접근은 활동가 개인의 품성 문제로 환원되는데 무척 비과학적이다. 페미니즘이 지니는 전복성도 고려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어떤 면에서는 근대 사회과학 담론을 뒤집는다. (여성운동을 비판하는) 김규항씨 같은 이는 여성 의식이 없는 게 아니라 계급 의식이 없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계급의 반은 여성이다. 나의 주장은 계급보다 젠더가 중요하다는 게 아니라, 성차별 없이 계급이 작동하지 않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투사 심리라는 게 있다. 내 짐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자기 문제를 보지 않기 위해 타자를 찾는 것이다. 인종차별은 백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데 흑인이 피해를 본다. 김씨는 투사 심리로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씨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그런 남자들이 너무 많다는 얘기다. 김씨는 부르주아 남자들에게 픽업되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계급 의식이 없는 거다. 김씨의 심리는 군가산점을 얻기 위해 싸우는 남자들의 심리와 같다. ‘신의 아들’이라 군대를 안 가는 사람, ‘어둠의 자식들’이라서 가는 사람, ‘아예 사람이 아니라서’ 나처럼 못 가는 사람이 있다. 가는 사람들은 자기를 보낸 사람과 싸워야 한다. 못 가는 사람하고 싸우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부르주아가 그렇게 싫은 김씨는 부르주아 남성을 비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부르주아 남자를 비판하면 자기가 위험해지니까 안 한다. 그러니까 여성을 비난한다. 그의 ‘중산층 여성 혐오’는 계급 혐오가 아니라 여성 혐오다.

여성단체들은 국가의 가부장성을 비판하는 동시에 상담소 운영, 피해·가해자 프로그램 등을 통해 국가정책의 하부 집행자가 됐다. 여성운동의 힘으로 대표성을 갖는 여성부 장관이 큰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한다. 여성운동은 어떻게 가야 하나.

= 여성부나 여성운동단체에 물어볼 일 아닌가. (웃음) 법이나 제도를 만드는 것은 여성운동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전략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법이 있어도 간통·낙태·성폭력 등 ‘무늬만 불법’인 게 많지 않나. 국가가 법만 제정하고 돈을 안 쓰는 면도 있다. 여성운동이 그 법을 지탱하고 보완하는 일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처지다.

남녀 조화 깨는 건 페미니즘 아닌 가부장제

“여성주의가 중요한 것은 성차별이 가장 중요한 모순이어서가 아니라 지배-피지배의 관례를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당신의 견해는 너무 앞서나가는 것 같아 세상이나 남성들과 타협하기 어려워 보인다.

= 남녀의 조화를 깨는 것은 가부장제이지 페미니즘은 아니다. ‘남성과 조화로운 페미니즘’을 말하는 이들에게 나는 ‘장애인·이주노동자·레즈비언과 조화로운 페미니즘은 안 되느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자주 싸우는 것 같다. (웃음) 내가 지니는 정치적인 입장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지 간에 자극이 된다거나 재미있다고 하는 이들이 많아서 반갑다. 모든 이가 페미니스트가 될 수도 없고,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도 없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지만, 한 번 페미니스트는 영원한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어떤 때는 계급 의식이 없는 페미니스트보다 젠더 의식이 없는 마르크시스트와 얘기하는 게 더 편할 때도 있다. 남성들한테는 상처를 덜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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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과 노무현 그리고 ‘국익우선론’
[비나리의 초록경제] 난자에서 추출하는 줄기세포, 산업아닌 윤리의 문제
 
우석훈
 
예전에 총리실에 있을 때 과학기술 담당과장이 바로 내 옆자리에 있었다. 그 때 내가 있던 방에서 처리하던 일들이 생명공학 문제, 통신위성 문제와 잠수함 도입건 등이 한참이었고, 외국인 노동자 문제도 한참 머리 아픈 문제들이었다. 그리고 그 때에는 황우석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국민적 스타로 전면에 나서게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그 시절의 기억과 그 이후의 사건 전개를 돌아보면 사실 뜻밖이다.
 
황우석에 대한 입장 중에서 가장 적당한 답이라고 생각되는 건 서울대 총장인 정운찬 교수의 입장이 제일 속편하면서도 정답에 해당된다고 생각된다.
 
사실 생명공학이라는 특별한 과학분야에 넋이 나간 건 우리나라만은 아니다. 가장 심한 건 싱가포르인데, 전기나 화학 같은 일반 엔지니어링을 전공하는 대학생의 숫자가 우려되어서 전부 생명공학만 하면 싱가포르는 누가 먹야살리느냐는 질문이 싱가포르 국회에서 제기되었고, 싱가포르 교육부 장관이 그래도 다른 분야에도 아직은 전공자들이 많이 있다고 답변하는, 정말 희대의 해프닝이 벌어졌다.
 
황우석 사건은 정말 우연한 일들의 연속인데, 내가 기억하는 한도로는 이렇게 사건이 벌어지게 된 맨 앞의 사건은 보통은 '바보 코리아'라고 부르는 BK 사업이 이상하게 전도된 결과이다.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생물학과의 지평을 조금 알 필요가 있다.
 
Molecular biology라고 부르는 분자생물학이 나름대로 학문으로 기틀을 잡은 것은 50년대의 일인데, 쟉크 모노(Jacques Monod)가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이 길이 세상에 전면적으로 알려지고 유행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 생물학과에서는 서울대와 연대 사이에 좀 격차가 심했는데, 서울대는 약간 백화점식으로 각 분야를 다 잘했고, 연세대는 대부분의 분야를 조금씩 못했다. 그러다보니까 이 차이를 좀 시정해보겠다고 분자생물학 쪽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그렇게 된 데에도 약간의 연유가 있다.
 
연세대학교는 이과대학교와 공과대학교가 옆 건물이다시피 하기 때문에 다른 대학교보다는 교류가 좀 많고, 여기에 예전 가정대였던 식생활학과의 식품영양학 교수들까지 연결되어서 콘소시엄이 쉽게 형성이 되었고, 여기에 대기업의 길을 가고 싶어하던 풀무원의 돈이 흘러들어왔다. 풀무원만 돈을 댄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렇게 식품회사들의 돈을 받으면서 공대와 생물학과와 식품영양학이 연결되면서 90년대 중반에 분자생물학만은 연세대학교가 서울대랑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갔는데, 바로 이즈음에 '브레인 코리아'라고 하는 교육사업이 돈을 왕창 풀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생명공학은 이렇게 해서 연세대학교로 낙착이 되었고, 여기에서 분자생물학은 식품산업에서 시작하는 길로 접어들게 된다.
 
워낙 설비에 돈이 들어가는 일인데 BK에 떨어진 서울대 생물학과는 분자생물학 쪽으로 주력을 투입하기가 좀 어려워지고, 그러다보니 수의학과에서 오히려 분자생물학에 주력할 여건이 좀 형성되었다.
 
그런데 역시 돈이 좀 들어가니까 학교 당국에 여러 가지로 신청을 하고 시도를 했는데, 좀 남사스럽고 또 사실 별 기술도 아니지 않느냐고 소위 어벙떨면서 못본척 한 사람이 정운찬 교수이다. 대체적으로 유전자 조작기술 중 클론 프로젝트라고 흔히 부르는 줄기세포에 대한 연구는 물론 나름대로는 기술이기는 하지만 기술 자체의 난이도 때문에 발전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이유로 선진국들이 꺼려하는 기술 분야이다. 중진국들이 핵기술을 개발하지 못하는 것과 메카니즘 상으로는 다를 바가 없다고 인식되고 있던 분야이다.
 
태양광이나 연료전지와 비교하면 생명기술은 윤리적인 특징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데, 기술이 어려운 것은 나머지도 마찬가지이다. 태양광 기술에도 아무런 기술적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석유기술에 대한 대체가능성과 함께 이게 삼성 기술이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정부가 약간 목숨을 걸었다. 태양열과 태양광은 똑같이 태양에너지를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같아 보이지만, 반도체를 사용해서 발전을 한다는 점에서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90년대 중반 이후로 재벌사들이 목숨 걸고 반도체에 투자하다시피해서 반도체 기반이 괜찮은 편이다. 그래서 아직 발전단가가 몇 배나 높은데도 불구하고 태양광이 국가 기반기술로 분류된 것은 결국 반도체에 국가적 차원으로 집어넣은 투자비를 다른 기술로 뺄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는 설득력이 있었다. 연료전지의 경우는 이게 과연 환경기술인가라고 물어보면 전해질과 전해질 회수 그리고 전환 에너지라는 측면에서는 여전히 좀 논쟁거리가 남아있다.
 
연료전지는 원래 아폴로 기술이었는데, 달나라 갈 때 좁은 공간에서 발전을 하기 위해서 생겨난 기술이다. 그리고 이 연료전지가 다시 중요해진 것은 냉전 시대에 핵발전 잠수함을 대체하기 위해서 조금 더 조용하고도 밀폐된 공간에서 전기를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독일 같은 곳에서 먼저 연료전지를 잠수함에 접목시키게 되면서 새로 빛을 보게 되었다. 지금은 모바일(핸펀) 기술과 노트북 기술에 더 가깝다. 현재로서는 상용화 바로 직전 단계에 있다.
 
생명공학의 경우에는 다국적기업을 중심으로 한 종자시장과 의료시장을 그 기반시장으로 하고 있는데, 물론 이론적 기반은 분자생물학이다. 클린턴에 미국이 생난리를 친 게놈 프로젝트나 70년대와 80년대 미국에서 우리나라 생물종을 싹 모아서 연구하는 것들 혹은 제 3세계 국가의 밀림에서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미생물종을 찾는데 목숨거는 일들이 대개는 같은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연구 기반같은 것이다.
 
이 중에서 줄기세포에 관한 연구는 인공적으로 인체의 특별한 장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클론 논쟁을 피해나가기 위해서 생겨난 연구인데, 난자 상태에서 직접 추출하는 배아 줄기세포와 성인의 몸에서 추출하는 성인 줄기세포로 나누어져 있고, 황우석 교수가 연구하는 것이 바로 이 배아줄기세포이다. 클론은 사람 자체를 복제해서 이 복제된 인간으로부터 직접 장기를 떼어내는 산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데, 간단히 말해서 이건 살인에 해당된다.
 
그래서 사람을 만들지 않고 장기만 만들면 될 거 아니냐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기술적으로는 성인 줄기세포는 이미 분화가 끝난 상태라서 특정 몇 가지 부위로만 발육하게 되고, 배아 줄기세포는 이것 자체가 사람이 만들어지는 첫 번째 상태 즉 난자 상태에서 직접 조작이 시작되기 때문에 가능성이 좀 더 다양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는 성체 줄기세포를 이용해서 필요한 장기를 만드는 게 더 고급기술에 해당하는데, 이건 좀 더 연구가 필요하고 임상적으로 조금은 시기가 빠를 수 있는 것이 배아줄기세포이다.
 
난자에서 직접 조작을 하니까 기술적 어려움보다는 윤리적인 문제에 직접 봉착하게 된다. 여기에서의 핵심적인 윤리 문제는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난자 상태인데, 여기에 정자 혹은 세포핵을 이식해서 배아줄기세포를 만들게 되니까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는 이게 사람인지 그냥 세포인지 좀 판단하기 애매한데, 종교적으로는 약간 기형적으로 생긴 거지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들도 존재한다. 결국 난자와 정자가 만난, 즉 착상된 첫 번째 단계가 배아 줄기세포이니까 가능성이 많은 대신에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라고 볼 수 있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진짜 심각한 윤리적인 문제는 이러한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여성'에 관한 시각 자체이다. 난자는 성인 여성이 한 달이 약간 안되는 주기에 '알'을 낳게 되는데, 그 알을 바로 지칭하는 거고, 이걸 구하려면 누군가 좀 희생을 해야 한다. 근데 이게 수술행위에 해당하고, 건강에도 좋지 않고 하여간 좀 문제가 있다는 게 기술적 판단이다.
 
외국에서 이 배아줄기세포의 윤리 문제에 대해서는 주로 이 두 번째 문제에 집중된다. 보나마나 고통과 신체의 손상을 동반하면서 누군가 난자를 주어야 한다면 이 난자를 주게될 여성은 가난한 여성과 어린 여성들이 될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판단이고, 만약 돈을 주고 난자를 구할 수 있게 한다면 흔히 음침한 판단을 하는 것처럼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구조적으로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외국에서는 이걸 별로 윤리적이지 않고, 만약에 이런 실험을 한다면 깡패들이나 지하시장에서 연구하게 될 것이라는게 상식적인 과학철학에서의 판단이었다.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UN이 약간의 제도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인간복제금지협약이라는 걸 만드는 중인데, 그게 늦어지면서 난자 채취에 대한 약간의 안전장치가 있는데, compliance라고 부르는 제재조치는 없다.
 
가난한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commerce를 금지시키고 있고, '이해당사자'라는 조항이 또한 중요한 기준인데, 이는 연구진 중에서 여성 연구인력이 보이지 않는 압력에 의해서 난자를 제공해야 하는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경우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대체적으로 이 정도의 안전장치가 있으면 우선은 여성 보호는 일단 할 수 있게 되는데, R&D의 눈으로 보면 이 정도로 UN까지 나서서 장치를 만들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생명윤리보호법 같은 걸 만들어놓고 있으니까 연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일단은 어디에선가 불법적인 요소가 끼어들어갈 수 밖에 없는 좀 점잔치 못한 연구로 이해되고 있다.
 
쉽게 표현하면 기술이 어려운 건 아닌데, 어지간하면 하지 말라고 국제적으로 분위기를 만들고 있던 것이 바로 이 난자를 이용한 배아줄기세포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걸 깬 사람이 황우석 교수이다. 풀무원이나 제일제당 같이 생명산업에 투자하는 기업들이 왜 이 연구에 돈을 대지 않으면서 좀 복잡한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초연구가 아니라 10년 내에 상용화될 수 있는 기술이라서 어차피 돈 될 거라면 생명산업에 관심있는 업체나 기업연구소가 여기에 자금을 대지 않는 이유는 한 마디로 큰 시장이 되기가 어렵다는 생각 때문이다.
 
성체줄기세포와 달리 배아줄기세포는 세포에서 세포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난자를 채취해야 한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UN이 강해지고, 사회가 부유해질수록 이런 일들을 더 못하게 할 가능성이 많을뿐더러 사람들이 난자 채취가 어떤 것인지 알수록 부도덕하다는 이미지를 뒤집어쓰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한 마디로 부도덕한 산업에서 매번 부도덕하게 돈을 버는 기업이라는, 그래서 앞에서 벌고 뒤에서 밑지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난자를 채취할 때 촉진제를 사용하는데, 이게 여성 호르몬 자체를 심하게 교란시켜서 후유증이 심하고, 심한 경우에는 성격이상이나 불임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쉽게 표현하면 자기 딸이나 자기 부인에게는 시키지 않을 일이라는 점 때문에 다른 세포들과 달리 도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병리학적인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아주 고상한 기술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업이 돈을 제공하지 않으니까 서울대의 학교당국에 돈을 좀 달라고 했는데, 정운영 총장이 주위에서 어떤 말을 들었는지 이 연구에 특별기금을 지원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대로 점잖고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UN 협약에 아직 강제조항으로 발달하지 않고 국내법의 입법이 지연되는 이 동안에 황우석 교수팀이 구워 삶은 게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였다.
 
이 작전은 성공했다. 이 때 내세운 논리가 '국익'이다. 이게 산업으로 성공할까? 다른 기술들처럼 대량보급되는, 소위 mature market으로 들어가기는 어렵다. 난자를 대량으로 제공하는 기술이랑 결합되어야 할터인데, 이건 정의상 불가능하므로 결국 마피아 시장 같은 것이 되고,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아주 큰 일반 기술시장이 되기는 어렵다.
 
그런데 하여간 이게 국가에 도움이 된다는 간단한 논리로 - 산업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끄덕거려지지는 않는다 - 언론에 국회의원까지 총동원되어서 한 일이 뭐냐...
 
BK에 떨어진 이후 서울대가 지원했어야 할 기초연구비용을 서울대가 창피하다고 딴짓하면서 대지를 않는다. 그래서 그걸 열린우리당의 386들하고 연결을 했고, 이제 이게 국가의 보물이고 황우석 교수는 국보급 과학자가 되었다. 물론 나는 여기에 대해서는 별 불만은 없다. 어차피 내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는 실제 과학자들이나 이공계에서 이 연구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거나 진짜 존경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라 잠깐 있다가 사라질 현상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을 비롯한 열우당의 386들이 이 기술에 홀딱 넘어가면서 황우석의 무리수가 생겨났다. 어차피 다음 정권이나 다음에 이게 문제가 될 때에는 자금줄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아마 덩치를 잔뜩 불려서 그야말로 요번 판에 '승부' 보자고 생각한 것 같다.
 
덩치를 크게 늘렸는데, 늘려도 너무 늘렸다. 좀 전까지 내가 알던 바로는 연구교수만 40명 가까이 뽑고, 그야말로 황우석 사단이 되었다. 그러다보니까 끊임없이 돈을 대야 하는데, 아마 정운찬 총장 있는 동안에는 서울대에서는 나오기가 좀 어려울 것 같고, 그야말로 만만한 노 대통령과 386들이 이 돈을 대는데, 실제 시장이랑 연결되기가 어렵다. 기술개발 시간만이 아니라 난자 공급 때문에, 정상적인 시장이 되기가 좀 어렵다.
 
물론 이렇게 기술을 개발하다보면 우연히 - 혹은 의도적으로라도 - 다른 기술을 얻을 수가 있으니까 R&D의 부수적 효과는 있을 수는 있지만, 그걸 위해서 몇 백억씩 돈을 대자면 이제는 국정 기술의 우선효과 같은 것들에 대한 논란이 생겨나고, 다른 기술 분야에서도 슬슬 볼멘 소리가 나오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첫째는, 흔히 대학 R&D 사업에서 보통 보듯이 연구비 유용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황우석 교수야 돈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게 아니지만,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결국 돈과 명예 때문에 하는 사람들이 많을테니까 이걸 일일이 관리하기가 어렵다. 요번 국정감사에서는 1억원의 불법 자금이 문제가 되었지만, 이 덩치가 움직여나가면 일단 자금상의 잡음이 많이 생기게 된다.
 
둘째는, 그리고 이게 실제로 황우석 교수가 두려워하는건데, 도대체 난자를 어디에서 얻었느냐는 것이다. 돈 주고 샀다고 해도 불법이고, 만약 연구진 혹은 관련된 사람이 기증했다고 하더라도, UN 규정 위반이다. 물론 이 경우는 제재조치는 없으므로 이게 감옥갈 일은 아니지만, 진실은 현재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이 연구가 덩치가 커지면서 더 많은 난자가 필요하게 될 것인데,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대체적으로 좀 한동안 시끄럽다가 말 연구에 불과한데, 이 덩치를 끌고 끝까지 가게 되면 결국에는 국회 청문회 아니면 검찰 취조실로 이 연구진들이 가게 될 확률이 높다.
 
이 논의의 핵심은 난소 제공자인 '여성'을 어떠한 존재로 볼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고, 종교계에서 얘기하는 생명의 존엄성은 약간 부차적인 논쟁이다.
 
한 마디로 여성을 '난자 제공자' 정도로 보지는 않겠다는 것이 미국과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의 입장인데, 나름대로 연구를 할 수 있던 수준이 되는 나라 중에서 우리나라가 여성에 대한 인간적 존엄성에 관한 철학이 가장 형평없는 나라라는 것이 사실은 황우석의 연구가 세계적으로 보여준 실체적 진실 같아 보인다.
 
이래서 우선 곤란해진 사람이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다. 부시는 꼴통 우파로 보통 분류하지만, 생명윤리에 대해서는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좀 급진적인 입장도 좀 가지고 있는데, 선진국 사이의 일종의 신사협정을 한국이 깨니까 정치적으로 좀 몰렸다.
 
하여간 황우석이 잘 한다고 박수치는 것은 과학기술 신화론이나 국익 우선론 같은 좀 어려운 얘기가 아니라 여성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관점의 문제에서, 여성은 우선을 좀 해줘야 하는 존재로 간주한다는 비판은 좀 받고 넘어가야 한다.
 
장기적으로 가장 손해 본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조금 지나면 난자 얘기가 언젠가 나오기는 나올텐데, 작년에 황우석 연구에 대해서 박수친 사람들이 이 때가 되면 조금은 머쓱해지게 되는데, 입으로 떠들었던 국익은 실제로 발생하지 않았고, 인권 문제는 이미 발생했을 그 시점이 내년도 혹은 후년도의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그 다음에 그야말로 '새'가 된 집단이 불교집단이다. 기독교는 이유야 어쨌든 아직은 옳지 않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고, 기독교인으로서 황우석의 연구에 박수치는 사람은 어쨌든 교단의 지침 위반에 해당한다.
 
불교는 대체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인데, 화려한 거 좋아하는 스님 몇 분이 해괴한 논리를 만들어내었다. 황우석 교수에게 난자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보시'라는 논리를 불교에서 제공하고, 이게 바로 생명에 대한 보시 행위니까, 많이들 보시하시라고 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이러한 연구는 일반 기초과학의 연구 시스템에 약간의 보조를 받아서 진행하면 되는데, 이걸 지나치게 정치인을 옆에 끼고 언론을 동원해서 덩치를 키운게 지금 문제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는가? 연구교수만 40명이 넘는 이 대집단에 끊임없이 돈을 공급하려다 보니까, 생각보다 일찍 기우는 시점이 왔다. 물론 약간의 이벤트를 통해서 분위기 반전을 시도하겠지만, 언젠가는 여성과 난자의 출처에 관한 질문이 나오면, 연구에 필요했던 난자의 대량공급 메카니즘에 관한 질문이 오게 된다.
 
한국이 이 분야에서 대단했던 것은 실제로는 연구 능력이 아니라 몰래 난자를 채취할 수 있었던 OECD 중에 유일한 국가이고, 그런대로 그게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박수치는 '국익 극우파'가 가장 강력한 국가이고, 그리고 여성은 ‘아이낳는 도구’나 ‘난자 제공하는 짐승’으로 간주한, 도저히 선진국 범주에 넣어주지 못할 나라라는 점을 실제로는 입증한 셈이다.
 
그래서 국가 이미지가 높아지나? 외국의 과학자들은 윤리적으로 금지된 연구이지만, 국가주의에 의해서 추진할 수 있는 특수 상황을 얘기할 때, "한국이라면..."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이 2~3년 동안에 과학 분야에서 무식한 나라로 그야말로 단단히 찍혔다.
 
달도 차면 기우는데 이 마지막 순간에 한겨레가 황우석과 손을 잡았다... 한겨레는 아직 차 본 적도 없는데, 기우나...
 
목숨 걸고 연구하면 국익에 도움이 되는 기술에 배아줄기세포 기술만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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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11-25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추천하고 퍼갑니다. 감사!
:-)
 
 전출처 : 딸기 > 이상한 나라.

국민학교 때 군인아저씨들한테 위문품 보내라고 해서 치약 치솔 수건 비누 보내고.

위문편지 보내라고 해서 다 보냈다.

반공 글짓기 반공 표어 반공 포스터... 등등등, 상은 별로 못 받았지만 암튼 시키는대로 열심히 함.

국민교육헌장 외우면 좋다고 해서... 다는 못 외워도 대략 앞부분은 외웠다.

"우리는 과일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과즙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달콤한 과육을 자랑하고

밖으로 씨앗을 광범위하게 퍼뜨릴 때다. 이에 나의 나아갈 바를 밝혀 ..."

국민학교 때 평화의 댐 만든다고 서울물난리 어쩌구 해서

벽돌모으기 성금내라고 해서 냈음.

중고등학교 때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한다고

올림픽 포스터 표어 글짓기 기타등등 하라고 해서 했음.

IMF 때 금 모으기....

그건 안 했다.

왜냐? 금이 없었다.

근데 내가 하라는 건 웬만하면 하는데 말이지...

난자모으기.

그건 못하겠다.

줄기세포 연구 찬성한다. 윤리론자들만 드글드글 할 때에도 나는 맘속으로

황우석 박사를 지지했다. 박사님 힘내세요!

근데 난자모으기는 못하겠다.

인터넷에 그런 말들이 떠돈다고 한다.

"아줌마들 머하나, 쓰지도 않는 난자나 내놓지"

누구 말마따나, 난자가 무슨 난자완쓰인 줄 아냐.

난자모으기 하는 김에 아예 난자엑스포도 해보시지.

혹시 아나. 몇년 지나서

"뇌세포가 없어서 뇌 연구를 못한다. 뇌 세포 내놔라. 뇌모으기 운동..."

난자모으기, 불과 몇달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인데

신문들이 국익 운운하면서

"머리 안 쓰는 인간들 뇌세포 내놔라" 할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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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익/인제대의대 교수] 승승장구하던 황우석 박사의 연구가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흔히들 그 위기의 원인이 '생명윤리'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생명윤리적 문제 또는 생명윤리 스캔들이라고 해야 옳지만 지금 떠돌고 있는 네티즌의 의견이나 주류 언론의 논조는 문제를 제기한 과거의 협력자(섀튼)와 언론사(MBC), 그리고 온갖 쓴 소리를 해대는 생명윤리학자들을 이 위기의 원흉으로 몰아붙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캔들의 당사자를 옹호하고 있다. 방송을 통해 이 스캔들의 사실관계가 상당 부분 확인됐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과연 이와 같은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들은 주로 국익을 이야기한다.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국익을 위해 대충 덮고 가는 것이 최선이란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그들의 주장은, 정당하지 않은 전쟁이지만 국익을 위해 파병을 해야만 하고, 재벌의 분명한 위법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경제발전을 위해 쉬쉬하며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과 닮은꼴이다.
  
  절대로 매매된 난자를 사용한 적이 없다고 여러 차례 반복한 능청스런 거짓말도, 카드빚에 쪼들리는 여성에게 난자 채취에 따르는 위험과 고통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은 채 돈 몇 푼 쥐어주고 수많은 주사를 놓고 전신마취까지 해야 하는 수술을 받도록 한 것도, 연구원을 피험자로 삼을 수 없도록 한 국제적 윤리규정을 위반한 것도, 기관윤리위원회(IRB)에 거짓 연구 계획서를 제출한 것도, 공동 연구자가 절대로 참석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기관윤리위원회에 관한 지침을 위반한 것도 국익을 위해 덮고 가잔다.
  
  그들에게 생명윤리는 국익에 역행하는 거추장스런 장식품이거나 쓸 데 없는 잔소리꾼일 뿐이다. 아직 이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여기까지만 보아도 이 이야기는 아주 훌륭한 생명윤리학 교재가 될 만하다. 교과서에서 하지 말도록 가르치는 것만을 골라 아주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명윤리가 국익에 종속된다고 강변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한국적 상황을 들어 반박한다. 우리의 윤리 기준이 서양의 그것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서양인의 오만한 오리엔탈리즘에는 나도 신물이 난다. 황우석 박사를 배반한 섀튼은 나도 무척 밉고 싫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윤리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한국적 윤리의 근거와 내용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돈 몇 푼 받고 아무런 득도 없는 수술을 받는 '성스러운 여인'을 칭송하는 것이 한국적 상황인가? 국익을 위해서라면 힘없는 여인 몇 명의 고통과 위험쯤은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 한국적 윤리인가? 아니면 이 사실을 언론에 알린 실험실 안의 고발자를 용납하지 않는 가부장적 연구실 문화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연구윤리인가?
  
  마법 1 : 복제가 우리를 구원하리라?
  
  나는 이 스캔들을 보면서, 그리고 한국적 상황이라는 논리로 대충 덮어버리려는 국민의 반응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심각한 병리 현상을 발견한다. 지금부터는 치명적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는 생명력을 보여주는 황우석 신드롬에 대한 나름의 진단을 해 보는데 그것은 우리가 두 가지 마법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과학이 또는 복제가 우리를 모든 고통에서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의 마법이다.
  
  애초에 이 연구는 스캔들의 가능성이 무척 큰 것이었다. 복제인간의 가능성을 둘러싼 종교계와 과학계의 논쟁, 배아가 생명인지에 대한 논쟁,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 등은 인류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미래에 대한 환상과 불안이 교차하는 무척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논쟁들은 '난치병 치료'라는 명분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채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고 체세포핵이식을 통한 배아생성을 허용하면서 무대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척 중요한 것이 함께 사라져버렸는데 그것은 이 기술이 난치병 치료에 과연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과학자 사회의 민주적 담론이었다. 이러한 과학 담론의 사라짐은 황우석이라는 영웅의 등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언론은 연일 영웅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에 온 관심을 쏟았고 다른 과학자들의 견해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말이 곧 과학이요 진리요 우리의 미래였다.
  
  이 기술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지적은 간혹 있었지만 이 기술의 과학적 가능성에 대한 깊이 있는 검토는 생략되거나 기피되었다. 국민의 기대와 환상이 증폭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모든 관심과 연구비와 찬사가 영웅에게 집중되었다. 심지어는 신진 과학자에게 주기로 계획되었던 연구비마저 그에게로 전용되었다. 언론은 이 기술의 가능성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문제점이나 보완점에는 눈을 감은 채 영웅의 입만 바라보았다.
  
  비교를 위해 세계 최초로 복제양 돌리를 탄생시킨 영국의 영웅 이언 윌머트의 사례를 보자. 아시다시피 영국은 우리와 함께 체세포핵이식을 통한 배아생성을 허용하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세계 최초로 시험관 아기를 탄생시킨 나라도 영국이다. 생명공학을 미래의 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도 우리와 같다. 그런데 그 나라의 언론은 우리와 다르다. 뉴턴과 다윈 같은 수많은 과학 영웅들을 배출시킨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들이 영웅을 다루는 방식은 무척 침착하다. BBC가 제작한 다큐멘터리는 이 기술의 가능성과 문제점을 균형 있게 지적하며 윌머트 또한 흥분하지 않고 가능성과 한계를 담담히 털어놓는다.
  
  다른 것은 우리가 과학을 환상적으로 바라보는 반면 그들은 현실적으로 본다는 점이다. 과학에서 한번도 1등을 해 보지 못한 우리에게 영웅은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환상을 키워서라도 외환 위기 때 온 국민이 벌인 금모으기나 월드컵 때 보여준 한 마음을 재현할 수 있다면 그 가능성을 훨씬 높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학은 감독에게 전권을 주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짧은 시간 안에 세계 4강의 위업을 달성한 축구 같은 것이 아니다.
  
  난치병 치료법의 개발이란 것이 이 인간배아 줄기세포 연구로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 기술의 이점은 조직 거부 반응을 피할 수 있다는 이론적 가능성 하나다. 한계는 있지만 잉여배아나 성체 줄기세포를 통해서도 우리는 세포분화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할 수 있다. 성체 줄기세포는 이미 수많은 난치병 환자를 살려냈다. 과학과 난치병 치료기술의 개발에 필요한 것은 냉철한 현실감각, 그리고 꾸준한 투자와 노력이지 윤리적 스캔들에 눈을 감는 도덕적 무감각이 아니다.
  
  마법 2 : '황우석 음모론'을 맹신하는 대한민국
  
  우리를 사로잡은 두 번째 마법은 우리가 선점한 이 기술이 앞으로 우리를 먹여 살려 줄 동력이며, 윤리적 문제를 지적하면서 결별을 선언한 섀튼은 필요한 기술을 빼간 산업스파이로서 우리의 앞선 기술을 시샘해 윤리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주로 정치권이나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서서 퍼트리는 경향이 있는데 <프레시안>이 몇 차례 강조한 바와 같이 이는 과학연구의 국제적 관행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치다. 섀튼 자신이 10여 년 전에 난자 밀매와 관련해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 중 하나다. 만약 하자가 있는 연구에 참여한 것이 발각되면 그 자신도 과학자 사회에 발붙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그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거래를 통한 연구가 과학 사회에서 철저히 배척된다는 사실을 그렇게도 믿고 싶지 않은 것은 역시 언론과 정치권이 건 마법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무슨 사건이 터질 때마다 거대한 음모의 결과로 해석하는 고질병을 앓고 있는 정치권이야 그 버릇 못 버려서 그렇다 치더라도, 사건의 배후를 심층 취재해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것이 임무인 언론이 나서서 그와 같은 음모론을 퍼뜨리는 현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백번 양보해서 어떤 음모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비윤리적 연구관행을 합리화할 구실이 될 수는 없다.
  
  이제는 마법에서 깨어나야만 한다. 그리고 환상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강신익/인제대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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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5-11-24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교수님의 강연을 한번 들어 본적 있는데, 강연의 1/3 정도는 현재 기술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미친 언론은 환상만 잔뜩 심어줬다. 특히 '돈벌이' 가능성...

비로그인 2005-11-24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가요.

숨은아이 2005-11-24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백 논리 때문인가 봐요. 순도 100퍼센트 백이 아니라고 말했다 해서 그럼 흑이란 말이냐고, 백을 왜 흑이라고 말하냐고 윽박지르는 것 같은... 내 편 아니면 적이란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