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城) - 김화영 예술기행 김화영 문학선 4
김화영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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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어갈 때면 종종 상상해 본다. 매 순간 내 몸이 허공 속에서 꼭 그 용적만큼만 차지했다가 다음 순간 또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순간적으로 비워놓은 내 몸의 용적만큼과 허공과 그 허공의 연속인 터널을 상상해본다. 여행은 그 터널 속에 내 심신과 열망,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을 가득가득 채우면서 흐르는 일이다.

이렇게 흐르며 세상과 사람을 바라볼 때 어여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며 또한 그 어여쁜 뒷모습 애틋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무엇보다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말해야 한다. " 이 땅 위에 살아서 저것들을 바라본 이는 행복하여라(Heureux celui des vivants qui a vu ces choses)."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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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지는게 이래서 무섭다고 했던가.

여섯시~일곱시 사이에 퇴근하면서 조퇴하듯 눈치를 보며 빠져나가는 팀원들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그나마 좀 늦게 나가는 편인 나로서는 눈치 볼 사람도 없으니 다행이지만. 야근수당 같은건 꿈에서도 못받아보면서 밤 9시 ~ 10시 퇴근은 애교이며, 12시 넘는건 뭐 기본인 분위기라서 요즘같이 정시 퇴근을 하는 며칠이 무슨 봄방학같은 분위기다.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빨리 나가야지, 하고 결심해놓고서도 어찌 그렇게 할일이 많은지 여섯시 반에서야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일을 맡긴 외주 편집자가 출장 및 진행건에 대해 전화를 걸어와 십여분 통화하느라 또 지체, 결국 저녁거리를 사러 마트에 간 시간은 일곱시가 훌쩍 넘었다. 집에 오니 거의 여덟시.

나의 저녁은 간단한 샐러드. 마트에서 사가지고 온 양상추를 씻어서 먹기 좋게 손으로 찢고, 방울 토마토 10개를 씻어 넣은 뒤 올리브 오일을 뿌리고 소금을 쳐서 버무려 먹었다. 새로 사온 물결모양의 볼에 담아서. 레드 망고에서 나오는 그 그릇같이 생겼다. 그렇게 저녁을 먹으며 에프게니 키신의 DVD를 틀어놨다.

쌓여있는 백화점과 마트의 할인쿠폰을 뒤적거리다 구석에 밀쳐두고 잠시 심호흡.

그래, 나는 도무지 눈뜨고 봐줄수 없을만큼 끔찍한 문장을 휘갈겨 대면서 나를 실컷 조롱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하고나 대충 어울리면서 그렇게 한심하게 사는 내 삶을 조롱하며, 이죽거리고 그것을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내 모습을 스스로 자각하게 될 때는 무심결에 거울로 내 뒷모습이라도 본것 마냥 화들짝 놀라곤 한다. 엇, 저게 나야? 정말? 그런 물음표만 떠다니는 순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미 끔찍해져버린, 다시 복구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생겨나고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 삶을 이어나가야만 했고 가면 같은것으로는 도저히 가릴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 끔찍한게 나라는 게 인정하기 싫으면서 역으로 스스로를 더 끔찍하게 해버렸다. 피동이 아닌 능동이 된다는 것 치고는 참 우울하다.

스스로 무척이나 끔찍해져 있는 지금에서야 슬슬 이제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다. 이제 이만큼 끔찍하게 나 자신을 방기하고 조롱했으면 되었다. 다시 돌아가봐야지, 싶은데. 의외로 나는 너무도 멀리 나와버려서 돌아가는 길을 그만 잃어버렸다.

눈만 꿈뻑거리고 두리번거리는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도대체 어디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왔던 길이 어디고 갔던 길은 또 어디며 가려고 하는 길은 대체 어디?? 주저 앉을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고, 달릴 수도 없어서 그냥 서 있기만 한지도 꽤 오래. 그러다 가끔 용기내어 가보는 길은 죄다 막힌 길이거나 절벽을 향하는 길.

아, 나는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너무 민망하고 낯뜨거워 울지도 못하고 입술만 꾸욱 이빨로 누르고 참고 또 참는다. 지금의 치욕도 이전의 치욕도 이젠 그만 일상이 되어버려 무감각해졌다.

그게 가장 수치스럽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에게 사정없이 물려 보는 사람이 경악할 만큼 물린데가 심하게 붉어지고 부풀어 오르고 심지어 퍼렇게 변했더랬다. 너무 끔찍해서 피부과에 갔고, 주사를 맞은뒤 약을 먹었더니 빠르게 가라앉았다. 지금은 그냥 살짝 붉은기만 도는 상태.

벌레 따위에게 물린 상처는 이렇게 쉽게 잘도 드러난다. 그리고 그게 너무 끔찍해 보여서 치료를 안할 수 없게 만든다. 아마 그게 내 육체의 본능일지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물어뜯긴 마음의 상처는 이런 식으로는 알수가 없다. 얼마나 끔찍한지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 치료를 하지 않고 앓다가 그것이 내 모든 것을 점령해버려도 누구도 알지 못하며 심지어 나 또한 알지 못할 수도 있다.

태어나서 삼십년이 넘도록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 벌레 따위에게 심하게 물려 병원신세까지 지는 일을 겪으며 나는 스스로 마음이 아파 그만 혼자 밤에 울어버렸다. 물린데가 가렵거나 불편하고, 부풀어 오른데가 흉칙해서 겁이 나서가 아니라 이전에 아팠던 그 마음이 생각나 스스로가 안스러워 눈물이 났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 마음이 아팠을 때도 이렇게 어딘가에 두드러기라도 나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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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8-09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음이 아프면 몸이 같이 아파주었더랬습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종종 마음 아픈지 모르고 있다가 몸이 아픈 걸 보고 `아, 아픈 거였구나' 할 때도 있었더랬어요.

달콤한책 2006-08-10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뚱한 소리 할게요. 저는 불개미도 아니고 까만 개미에 물려 쇽까지 일어났었지요.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외국에서 개미에 물려 죽었다는 말은 있어도 우리나라 개미는 그런 종이 아니라는데....어떻튼 저는 그랬단 말이죠...그래서 야외에 앉게 되면 온 식구가 개미만 나타나도 제게 주의를 줘요^^

마태우스 2006-08-10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추상적이라 상황은 모르겠지만...전 님 편이어요

2006-08-10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8-10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리스 2006-08-1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드님 / 아, 저도 물론 몸도 아프긴 했어요. 하지만 그냥저냥 아픈거죠. 완전히 뭔가를 못할만큼 고꾸라지지 못하는 걸 보면 제가 꽤 독한가봅니다. ㅠ.ㅜ
달콤한 책님 / 아, 저런. 많이 고생하셨겠어요. 개미라니.. 앞으로도 계속 조심하셔요.
마태님 / 감사합니다. ^^
속삭님 / 흐.. 네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슬슬 또 바빠지는 주간, 이번엔 한젬마씨 인터뷰 약속이 잡혔다. 다음주 월요일 장흥에 있는 한젬마씨 작업실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흐어.. 시간도 별로 없네.

샘터에서 편집자가 책을 보내주기로 했다.

크엑, 이건 서평단 책 읽기의 부담감하고는 도저히 비교가 안돼!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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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06-08-09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한젬마씨 인터뷰! +_+; 신간에 관심이 가던데. 솔깃솔깃. 후기 꼭 올려주시와요. 글고 힘내셔요. ^^;

울보 2006-08-09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저 두권 신간 모두 읽엇는데 저도 기대기대,,

이리스 2006-08-11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나잇님 / ㅋㅋ 넵.. 감사합니다.
울보님 /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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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6-08-09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져.
사랑에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겠져?

비로그인 2006-08-09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

아멘-.

이리스 2006-08-15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호인님 / ㅋㅋ
체셔고양이님 / 넵, 반가워요.. ^^
 

아, 다음주에 김화영 선생님을 인터뷰 하게 되었다.

일이 밀려서 인터뷰를 못할 것 같다는 변명은 편집장에게는 손톱 만큼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해!'

-_-;;;;; 사실 변명은 부담감에서 온 것.

아, 여섯페이지 짜리 인터뷰다. 두근두근.. 마치 카뮈를 만나는 것과도 같달까? ㅎㅎ

안그래도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카뮈 사진을 크게 판넬형으로 만들어서 선생님댁 서재에 걸어두고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페이지를 꾸미려고 구상중에 있다.

하여 다음주까지 부지런히 선생님의 작품들을 읽어야지. 직접 저술하신 것 위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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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8-08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뷰가 어디에 실리는지 나중에 꼭 알려주시길.^^

깐따삐야 2006-08-08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은구두님, 안녕하세요. 카뮈, 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인터뷰 내용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넘넘 부럽습니다. ^^

라주미힌 2006-08-08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눈이 이상해요..
키위로 보였어요 ... 신게 먹고 싶고, 자꾸 헛구역질이 나고.. 므흣.

기인 2006-08-09 0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쫌 무섭잖아요~~ 까뮈를 이렇게 더운 날 만나면!!!
몸 조심 하세요 ㅋ ;)

플로라 2006-08-09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화영 선생님이 바람구두 신고 알제리 다녀오신 이야기도 듣고 오시겠네요~ 아무래도 낡은구두님과 김화영 선생님은 만날 운명이었던거 같아요! ^^

이리스 2006-08-09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 넵, 그럴게요.
깐따삐야님 / 으흣, 제목이 님을 이끌었꾼요. 네네.. 그렇게 할게요. ^^
라주미힌님 / 이런이런.. 몸이 허하신거에요. 보양식을 드세욤.

기인님 / ㅎㅎ 그런가요? 조심할게요. --;
플로라님 / 엇, 님의 코멘트를 읽고 보니 정말 그런것도 같아요. 감사! ^^

비연 2006-08-09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