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퍼주되 안전벨트는 매라

실연과 연애를 반복하는 이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연애교본’들… 어줍짢은 밀고 당기기 기술이 아닌 당신의 자존감을 높여줄 책을 찾아서

▣ 김양 실연 8개월차 olddochy@paran.com

또다시 이별이다. 그래 정론직필한다. 또 차였다.

필드 경력 10여 년. 남자도 만날 만큼… 은 아니지만 꾸준히 만났고, 6개월 미만의 연애까지 더하면 열 손가락으로 헤아리기도 버겁다. 이른바 ‘비연애 체질’은 아니란 뜻이다. 그런데 왜! 스물다섯 이후의 연애 승률은 1할2푼5리에서 머무느냐 말이다. 코스도 항상 비슷하다. 처음 상대방이 적극적으로 들이대면 못 이기는 척 만나다가 내가 눈이 뒤집힐 때쯤엔 그의 연락이 뜸해지고 결국 떠나간다. 헤어질 때의 상황은 이젠 유형별로 정리할 수 있다. 전화 오는 횟수가 줄어드는 게 으뜸이요,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주체할 수 없는 바람기로 정신적인 학대를 일삼는다면 갈 데까지 간 관계다. 헤어질 때 날리는 멘트도 눈빛만 보면 대충 안다. “내가 나쁜 놈이야…”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 “넌 나한테 과분해” 등인데 한마디로 정리하면 “너 싫다”다. 누가 먼저 끝을 냈는지에 연연하는 것은 어리석다지만, 그건 정말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다. 차이면… 정말 기분 더럽다.

발에 맞지 않는 구두는 집어던져!

500일 기념일을 앞둔 지난해 여름, 오동통한 MSN 메신저 아이콘과 꼭 닮은 그가 전화기 너머로 뒤통수를 쳤다. “널 평생 사랑할 자신이 없”단다. 아침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게 분명하다. 그런 진부한 멘트를 날리다니. “×새끼”라며 쏘아붙였지만, 길고 긴 불면의 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밤마다 애꿎은 베개를 주먹으로 치며 “이럴 순 없는 거야”라며 대성통곡했고, 눈에서 레이저빔이 나올 정도로 휴대전화만 쏘아봤다. 며칠 밤낮 동안 그렇게 머리를 싸맨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일이 너무 힘들어서 머리가 살짝 돌았던 거야. 그럼그럼. 막상 내 얼굴을 보면 맘이 달라질걸? 나만 한 애가 어디 있다고…(으쓱).”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하며 콩닥대던 가슴을 달래던 날, 그 책을 만난 것은 필시 하나님의 계시였다. <끝났으니까 끝났다고 하지>(그렉 버렌트 & 아미라 루오톨라 버렌트 지음, 해냄 펴냄). 이 책은 막 실연당해 하늘이 노래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한 언니들에게 바치는 글이다. 첫 장을 열었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은 아마 누군가에게 버림받았거나, 이제 막 실연당했거나, 여전히 옛 애인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앞에 나열된 이유 모두를 떠안고 있을 것이다.”

오 마이 갓, 어떻게 아셨나요.

“당장은 헤어져서는 안 될 이유를 찾아내느라 정신이 없겠지. 가슴이 갈기갈기 찢긴 듯 아프고, 머릿속에선 그 고통을 없앨 방법을 찾아내느라 급급하리라. 하지만 잊지 말라! 어떤 이유를 댄다 해도 결국 말도 안 되는 핑계란 사실을. 현실은 냉정하다.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것을 송두리째 뒤엎을 차이점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둘의 관계가 영원하리라는 믿음의 있음과 없음이다.”


△ 각 서점마다 연애실용서 코너는 가장 붐비는 곳 중 하나다. 현란한 테크닉을 나열한 책보다는 깨달음을 주는 책이 두고두고 도움된다.(사진/ 곽윤섭 기자)

들고 있던 펜으로 줄을 쳤다. 어찌나 기를 집중했던지 뒷장까지 자국이 남았다. 그래, 끝났으니까 끝났다는 거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체념의 단계로 진입은 했는데,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체 이 시간이 지나긴 할까.

“당신이 함께했던 그 사람은 당신을 ‘내 여자’가 아니라고 결정했다. 혹은 당신이 결정했다. 아니면, 두 사람 모두 그렇게 결정했다. 어느 쪽이든 이미 끝난 일이다. 그 구두에 아무리 발을 구겨넣어도 맞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당장 벗어던지길.”

이별을 잘하는 법 7가지

책은 ‘이별을 잘하는 방법 7가지’ 처방을 내렸다. 그리고 ‘그놈’이라는 독을 빼기 위한 처절한 사투가 시작됐다. 웅녀 언니가 동굴에 처박혀 쑥과 마늘만 먹을 때 심정이 이랬을까. 33년 인생에서 얼굴도 모르는 이의 조언에 올인한 것은, 돌아보면 ‘생존본능’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원칙 1. 60일 동안은 그와 절대 만나지 않기. 두 달은 완전한 회복에 필요한 정서적 거리를 만들어주는 기간이란다. 미친 척하고 전화할까봐 집 전화기는 치워두고, 그 자리에는 메모를 붙였다. ‘침묵하는 자가 승리한다.’ 휴대전화 첫 화면에는 “안 돼!!”라고 써넣었다. 술 마시고 실수할까봐 그 좋아하는 술까지 줄였다.

원칙 2. 이별친구 만들기. 그동안 속없이 시시덕거리고 다닌 덕인지, 다행히 주변에는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한 친구는 초저녁부터 집에 엎어져 있던 나를 찾아와 빈대떡 2장을 수줍게(?) 건넸고, 내가 먹는 것에 약하다는 걸 빤히 아는 다른 친구는 “연애할 때도 연락 좀 하고 살아라”라며 눈은 흘겼지만 맥주와 된장찌개라는 퓨전식 조합으로 날 위로했다. 너무나 점잖고 진중했던 또 다른 친구는 ‘그놈’한테 전화하고 싶을 땐 차라리 자기한테 하라며, 처절한 경험담을 털어놓아 놀라기도 했다. (얘들아, 고마워~!)

원칙 3. 지나간 사랑을 떠올리는 물건은 다 버리기. 처음에는 모든 것에 상처받는다. 함께 듣던 음악, 같이 본 영화, 심지어 MSN 메신저 아이콘만 봐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우선 컴퓨터에 저장돼 있던 사진, 책상 앞에 세워둔 사진을 싹 없앴고, 미니홈피의 문도 닫았다. 빌린 책과 CD, 선물은 돈 되는 것만 빼놓고는 몽땅 상자에 넣어 그의 집으로 보내버렸다. 착불로 했다. 소심한 복수였다.

원칙 4. 끊임없이 움직이기. 주말이면 이불로 동굴을 만들고, 절대 100m 이상은 걷지 않으며, 운동이란 숨쉬기 운동과 새마을 운동밖에 몰랐지만, 이별 뒤 취미생활이라는 걸 시작했다. 뜨개질이다. 허벅지에 십자수 놓는 대신, 목도리의 겉뜨기, 안뜨기에 집중했다. 목도리 5개가 금세 생겼다.

원칙 5. 잘 입고 잘 먹고 잘 자기. 홈쇼핑은 폐인 수준이요, 인터넷 쇼핑은 중독 수준인 터라 이 원칙을 지키기는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위로한답시고, 나에게 너무 많은 선물을 사주는 바람에 그 다음달 날아온 카드 영수증에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다.

원칙 6. 헤어진 연인에게 돌아가지 않기. 두말하면 잔소리.

원칙 7. 자신감 되찾기. 거울을 봤다. ‘흠… 이 정도면 쓸 만하군(이건 주변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는 나를 ‘세뇌’시켜준 덕임). 게다가 성격이 좋잖아. ‘메신저’에 나를 던지기는 좀 아깝지.

그들은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터질 것 같던 심장도, 멈춰버릴 것 같던 시간도 해독 기간 한 달차로 접어들면서 무뎌지기 시작했다. 두 달째부터는 그 아이의 얼굴이 가물거리더니, 셋째·넷째 달 지나면서는 “내가 미친년이었지” 하며 혀를 내두른다. ‘시간이 약’이라는 옛 어르신들의 말씀은 지당하고 현명했다.


하지만 매번 이런 아픔을 견딜 순 없는 법. 실연을 극복(!)한 뒤, 나의 연애를 되돌아봤다. ‘난 왜 안 될까.’ 내 사연을 시시콜콜 아는 주위의 독한 인간들이 “너 책 하나 써라. ‘까이기 전에 까라.’ 제목 나오네”라며 놀려대는 지경에 이르니, 과거의 연애 패턴을 되새김질해볼 필요가 있었다. 연애교본의 고전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그렉 버렌트 & 리즈 투칠로 지음, 해냄 펴냄)에 따르면, 그동안 내가 만나고 헤어진 그 남자들은 모두 나에게 반하지 않은 남자들이다.

“당신에게 접근하지 않는다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전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당신과 데이트하지 않는다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당신과 섹스하지 않는다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다른 여자에게 한눈판 남자라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술기운에만 당신을 찾는다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결혼 이야기를 피한다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헤어지자는 말을 쉽게 한다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를 독차지할 수 없다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당신의 감정을 무시한다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 책을 보니, 그동안 내가 만나고 차였던 그들은 모두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나를 떠났다가 5년 뒤 다시 연락해 두어 달 만나다 딴년이랑 결혼해 날 두 번 차버린 그놈, 결혼 얘기만 나오면 슬금슬금 말꼬리를 돌리던 그 녀석, 양다리 걸치다가 제대로 걸렸던 그 자식 모두 나에게 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내 인연이 아닐 수밖에. 내 안목은 특별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도 특별하며, 내 연애도 특별하다는 생각은 망상이었던 걸까. 어떻게 알았는지, 이 책은 마지막에 “당신이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다”라며 쐐기를 박는다. 젠장, 나한테 반한 남자는 어딨냐고요.

하지만 나는 정녕 ‘파블로프의 개’였던 것이다. 아무리 차이고 까여도 새로운 사랑이 오면 침 질질 흘리며 언제든 올인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나이 서른이 훌쩍 넘으니 매물의 수가 현저히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인다는 점이다. 괜찮은 남자들은 이미 몇 년 전에 딴 여자들이 다 채갔다. 그리고 행여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매번 반복되긴 하지만) 또 상처받기는 싫다. 이 점에서 <연애본능>(임경선 지음, 더북컴퍼니 펴냄)은 솔직하다. 지은이는 “나 같은 여자들이 전화는 벨이 세 번 울리기 전에 받으면 절대 안 되고, 두 번에 한 번은 튕기기라는 식의 현란한 연애 전술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대신 조언한다. “마음껏 사랑해라. 쩨쩨한 사랑보다는 퍼주는 사랑이 낫다. 대신, 안전벨트는 매라.”

집착하지 말 것, 사랑은 머리로 할 것!

나의 문제는 내가 안다. 내 문제는 ‘콩깍지’다. 평소에는 멀쩡하지만, 한번 연애를 시작하면 맹목적으로 사랑을 퍼준다. 그리고 자아상실 단계에 이른다. 이건 병이다. 다음 연애를 위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집착하지 말 것, 나를 버리지도 말 것, 사랑은 머리로 할 것. 음… 솔직히 지키지 못할 것 같다.

실연과 연애를 반복하고, 그 와중에 틈틈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연애교본’을 밑줄 쳐가며 읽다 보니, 결국 주제는 한 가지로 모아졌다. “당신같이 괜찮은 여자가 당신을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 때문에 마음고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어쭙잖은 밀고 당기기 기술은 이제 그만. 좋은 연애실용서는 읽은 이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책이다. 서른세 살 내 가슴에도 또다시 개나리는 핀다.


연애 교본 가려읽기 노하우

어디까지나 참고서, 읽다 보면 깨달음은 내 안에서 솟구칠지니

제아무리 주옥같은 실용서라도, 고매하신 작가의 소설이라도, 1만 부 이상 팔리기 어려운 출판계를 요즘 먹여살리고 있는 게 ‘연애 교본’이라지만, 옥석은 가려야 한다. 솔직히 누가 누구의 연애에 ‘코치’해준다는 것 자체가 부조리한 일이다. 말하자면 바로 당신이(필자 당신 말이야!) “그놈과 사귀지 않은 담에야” 여러 케이스를 수집해 개연성 있는 평균치를 얘기해주는 것은 ‘국·영·수 중심으로 암기과목 열심히 하면 대학 간다’는 얘기와 똑같다. 특히 나처럼 실연의 상처에 끙끙대는 이들에겐. 더 억울한 건, 연애 교본의 70%는 20대 여성들이 주 소비층이라는데, 내가 20대 때는 책도 없었단 말이다. 세상이 온통 나만 ‘따’시키며 연애하는 분위기에서 소외감 느끼는 이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연대감을 피력하며, 나의 소박한 ‘연애 교본 가려읽기 노하우’를 밝힌다.

① 나와 비슷한 친구가(특히 동성 친구가) 좋다는 책은 일단 경계심을 갖고 본다. 7만 부, 10만 부 팔렸다고 다 나의 실전에 도움되는 건 아니다. 그런 식이라면 연애에 가장 도움되는 책은 불서 아니면 성경일 것이다.

② 한꺼번에 몰아서 사지 마라. 쌓아두고 있으면 더 우울해진다. 새로운 사랑이 시작됐다고 싸그리 휴지통에 버리지도 마라. 재활용할 순간 분명히 또 온다.

③ 읽으면서 느낀 점을 꼭 여백에 메모해둔다. 나중에 경계경보 기능을 할 수도 있다. 혹시 두 번째 읽는다면 다른 색깔 펜으로 써놓길. 일신우일신하도록 자신을 마인드컨트롤할 수 있다. 주변에 빌려줄 일이 있어도 노하우를 ‘카피레프트’해주니, 나름대로 세상에 ‘보시’하는 셈이다.

④ 무슨무슨 기술에 혹하지 말라. 아무 짝에도 쓸모없더라. 100만 명의 사람에게는 100만 명의 연애가 있는 법. 연애 교본은 어디까지나 참고서다. 1, 2, 3, 4 순서대로 알려주는 테크닉일수록 별 볼일 없다. 마음을 비우고 읽다 보면 깨달음이 내 안에서 솟구친다.

⑤ 밤샘 공부하고 시험 보면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아는 것도 틀리는 것처럼, 몰아치기로 읽는다고 새 사랑을 시작할 때 도움되는 건 아니다. 솔직히 연애 교본은 지난 사랑을 잊기 위해 읽는 것이다. 연애가 잘될 때라도 예방 차원에서 틈틈이 읽어두는 게 좋다는 사람들이 있던데, 꽃시절에 꽃 즐기지 왜 책 즐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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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4-25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문득 궁금하다. 연애에 승률을 매기는 기준은 뭘까. 연애에서 성공한다는건 상대랑 결혼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인가? 글쎄다..

라주미힌 2006-04-25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애의 성공이라.. 좋은 기억이 나쁜 기억보다 많으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뎅... 흡. ^^;

해적오리 2006-04-26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참고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단 생각에 퍼갑니다. ^^

이리스 2006-04-26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 / 아, 그런가요? 그럼 내 승률은 얼마일까나.. 흠흠..
날나리님 / 넵 ^.^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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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만이 세상 살아가는 이유이며 희망"
[오마이뉴스 2006-04-24 18:00]    
[오마이뉴스 김현자 기자]
 
[면도하는 소년-홍경표]
ⓒ2006 홍경표
"사진만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이며 희망이다"

사진이 얼마나 좋으면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 포토 에세이 <감동이 오기 전에 셔터를 누르지 마라>를 보면 이 말이 실감난다.

사진이 좋아 사진으로 만난 사람들. 포토 에세이 <감동이 오기 전에 셔터를 누르지 마라>는 10명의 '블로그 이웃지기'들이 공동 저자인데, 이들은 그야말로 사진으로 세상과 소통을 하는 사람들이다. 사진이라는 매개와 블로그를 통하여 마음 나누었던 이들은 공감대가 깊어지면서 그간 함께 나누었던 사진을 공동 전시하자고 마음 모은다. 이런 전시회와 함께 기획한 것이 바로 이 포토에세이다.

오프라인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온라인을 통해 만남을 갖게 해준 것은 고리는 사진이었다. 사진을 좋아하는 것, 그리하여 사진을 통하여 세상을 보고 세상(사람들)과 소통한다는 것...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과 삶의 목적이 다르지만 공통적인 공감대인 사진은 이렇게 마음을 대신해 주었던 것이다.

그간 개인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낸 경우는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같은 직장이나 동문, 동호회끼리 전시를 하거나 책으로 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인터넷이란 공간에서 사진 하나를 매개로 하여 사진전시를 하고 포토에세이까지 낸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이들에 대한 네티즌의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블로그의 응집력을 잘 말해주는 모범사례라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블로그에서 사진을 매개로 이들이 나누었던 공감은 무엇이었을까? 서로를 하나의 끈으로 강하게 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10명의 일반인이 저마다 다른 빛깔로 담아낸 다양한 세계들

[사랑싸움-신미식][사랑한다...-이재교]
ⓒ2006 이클라세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이렇게 사과할게. 그러니까 그만 화 풀어 응?" 애원하는 꼬마 소년, 이미 속으로는 화가 풀렸지만 아닌 척 짐짓 튕기고 있는 꼬마 소녀... 사진 속 주인공들의 표정만 보면 마치 이러는 듯하다. 이 사진을 한참 보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어린 한때를 떠올렸다. 언뜻 우리들의 어린 시절 같기도 한 이들은 이국의 아이들이다. 세상은 넓다지만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임이 분명하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 사진에는 이렇게 짧은 설명이 붙었을 뿐이다. 사진 속 꼬마의 미소를 보는 순간 세상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말로 표현 할 수 없지만 가슴 뿌듯하게 밀려오는 행복감이라니...꾸밈없고 순수한 아이와 소복하게 쌓인 하얀 눈에 담은 사랑이 맑고 순수하다. 사랑은 모름지기 이래야 할 것 같다. -사진을 보면서


미소를 머금고 한참을 바라보면서 참 행복해졌던 사진들이다. 이런 사랑스럽고 행복한 사진을 담아 낸 이들은 평범한 일상인들이다. 직업도 학생부터 자영업자, 회사원, 영어강사 등 다양하다. 그래서 이들이 담아 낸 사진들도 언뜻 보면 평범하다. 그러나 이들의 사진에서 선뜻 눈을 떼지 못하고 사진에 덧붙여 둔 글에 마음이 아련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엇보다도 평범한 일상을 잘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담아 낸 사진에는 평범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살아가는 세상이 무엇보다 잘 나타나 있다. 아침 이슬방울, 땀 흘리고 난 후의 상쾌함,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연인의 속삭임과 사랑싸움, 노인의 손에 잡히지 않는 세월, 아이들에게 거는 미래 등 이처럼 평범한 일상의 주인공인 우리들을 자주 가슴 설레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주 작은 것이기 일쑤다.

이들은 이렇게 평범한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진솔하게 담아 우리 가까이에 끌어다주고 있다. 사진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가족 간의 소중함을 깨닫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내 주변의 이웃들 같다. 그래서 이 포토에세이에서 만나는 사진들이 자꾸 눈을 잡아 끈다. 사진하나, 글 한 줄에 이끌려 읽다보면 때론 지루해 뛰쳐나가고 싶을 때도 있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였던지 새삼스레 돌아보게 한다고 할까?

10명의 공동 저자는 삶이라는 공동 주제 하나를 두고 각각 자신만의 빛깔과 방식으로 사진을 담았다. 어디 삶 뿐이랴. 삶속에서 펼쳐지는 사랑과 희망도, 이미 아련한 추억과 아쉽게 가고 만 세월도 자신들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다양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책을 읽는 사람으로선 한 가지 주제로 각각 표현하고 있는 것을 비교해보면서 또한 자신만의 표현도 시도해보면서 공감할 수 있다. 저자가 10명이어서 한 작가의 사진과 글로 느끼는 단조로움을 산뜻하게 벗어나 볼 수 있다고 할까.

최근 디지털 카메라 사용자가 늘면서 자신만의 사진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일반인들이 늘어 나고 있다. 어지간한 카메라라면 누구나 손쉽게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인터넷 공간은 많은 사진들로 넘쳐난다.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사진은 어떻게 찍어야 할까? 사진을 좋아하는 또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어떤 사진을 찍을까? 삶을 어떻게 표현하며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할까?

사진이 좋아 눈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사물과 존재를 셔터로 담아내는 사람들, 사진을 통하여 세상과 소통을 한다거나 훗날 자신만의 포토에세이집을 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 속에서 만나는 사진들과 좋은 만남이 될 듯하다.

처음에는 사진과 글의 의미가 더러는 어긋나고 있는 듯해서 배시시 웃었는데 자꾸 볼수록 감동으로 눈이 오래 멈추는 포토 에세이다. 몇 번 스치기를 반복했던 낯선 사람이 어느 새 친근하고 가까운 이웃으로 다가와 있듯이.

"블로거들의 순수한 열정을 그대로 반영했습니다"
[인터뷰] 오호정 '이클라세' 편집장

[박기철-사랑하세요]
 
"사랑하세요. 짧은 시간에, 한 꺼번에 타오르는 사랑이 아니라 천천히, 오래오래 달아오르는 사랑을 하세요. 그런 사랑은 하루하루를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박기철-사랑 하세요

최근 디지털 카메라 사용자가 많아지면서 포토에세이집이 많이 나오고 있다. 포토에세이는 일반 책(텍스트 위주)보다 3배에 해당하는 출판비용이 든다고. 포토에세이(사진집)는 여전히 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 그나마 사랑받는 쪽은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좋은 글을 많이 읽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그렇다면 좋은 사진을 많이 보는 것도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한 좋은 방법 아닐까?

그럼에도 무명 사람들 사진집을 책으로 내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을까? 지난 4월 15일 오호정 편집장과의 전화통화를 통해 출판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블로그를 통하여 만난 순수한 일반인들이 열 명 정도 모여서 사진전을 한다는 것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전시한 사진들을 책으로 냈으면 하는 제의가 들어 왔습니다. 신미식씨의 포토 에세이 <고맙습니다>라는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었지만, 그래도 신미식씨를 제외하면 모두 일반인이어서 저로서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저보다 많은 책을 내었던 경험이 있는 주변사람들도 우려하였던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순수 블로거, 이분들의 순수한 만남과 사진에 대한 뜨거운 열정에 우선 마음을 두고 펴낸 책입니다.

욕심을 가져본다면, 요즘 디지털카메라를 통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담아보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는데요. 그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려에도 불구하고 좋은 반응이어서 기분 좋고, 이 책을 사랑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서평에 사용하실 때 사진 찍으신 분들의 이름을 넣어 이분들의 저작을 존중해 주셨으면 합니다."


-처음 이 포토에세이를 통해 느낀 것은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간혹 사진과 글이 약간 어긋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혹시 저처럼 말하는 사람은 없는지, 편집하면서 느낀 점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사진과 글을 따로 떼놓고 보면 모두 좋은데 이 둘이 합쳐졌을 때 일부는 약간 어긋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진에 중점을 두어 유명한 작가 분들의 글을 넣을까. 글을 조금씩이라도 수정을 볼까... 그러나 결국, 책을 내게 된 순수한 동기에 가장 잘 맞도록 일반인들의 글을 그대로 넣자는 쪽으로 굳었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의 글을 전혀 고치지 않은 원래 그대로 넣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점이 순수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간혹 사진과 글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신선했다. 출판사 이름보다는 일반 사진가들의 이름을 넣어 달라고 거듭 부탁해왔다. 무엇보다 일반인들의 사진에 대한 열정을 존중하고 싶다는 이클라세는 앞으로 ‘사진과 음악관련 책’에 중점 두어 작지만 뜻있는 결실을 맺고 싶다고 말한다. / 김현자


덧붙이는 글
<감동이 오기전에 셔터를 누르지 마라>-포토 에세이

-민경찬, 김상희, 나일영, 박기철, 변종모, 신미식, 애니, 이재교, 정승훈, 홍경표(사진 수록순)/이클라세 2006년 3월 3일/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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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오리 2006-04-24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이 넘 맘에 들어요...

이리스 2006-04-24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나리님 / *^^*

프레이야 2006-04-24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이 오기전에 셔터를 누르지 마라.. 감동이 오기 전에 글을 쓰지 마라... 좋은 기획의 책이네요^^ 아마츄어들의 순수함과 열정이 엿보입니다.

이리스 2006-04-25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 그쵸? ^^
 

숨은 보석같은 여행지, 서천
[데일리안 2006-04-24 10:00]    
춘장대 해수욕장, 동백숲 볼거리 다양

[데일리안 강태성]
백년 된 동백나무 숲에 만발한 동백꽃이 화사함을 뽐내고, 여름에는 춘장대 해수욕장의 너 른 해변과 시원한 송림에서 더위를 식히며, 가을에는 제철을 맞은 전어잡이로 홍원항에 넘쳐나는 전어 구이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뿐만 아니라 영화 JSA가 촬영된 신성리 갈대밭은 그 애잔함이 절정을 이루기도 한다. 겨울로 접어들면 금강하구둑에는 무수한 겨울철새들이 찾아와 자연의 신비를 새로이 깨 닫게 해주고, 동짓날을 전후한 40일동안엔 마량리 앞바다로 해가 뜨고 지는 해넘이와 해돋이를 모두 볼 수 있다.

바로 충남 서천군으로의 여행에서 만나게 되는 일들이다. 사시사철 이렇게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하는 여행지는 흔치 않다. 하물며 그 좋은 여행지가 여행객들에게 그리 유명하지 않다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를 살펴보니 서천군 을 에워싼 주변이 충남 부여, 대천해수욕장이 있는 보령군, 전북 군산 등 오래 전부터 내로라하는 관광 명소들이었던 탓이다. 더불어 서해안 고속도로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불편했던 교통도 한가지 이유였다.

유명한 명소들 틈바구니에 끼어 억울하게 무명 신세였지만, 소리 없이 알차게 익은 가을 알밤처럼 속이 꽉찬 여행지, 서천군으로 늦여름, 초가을 여행을 떠나 보았다. 춘장대 해수욕장

해수욕장의 풍경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춘장대IC로 빠져 나와 춘장대해수욕장과 마량리 포구가 위치한 서면 방향으로 접 어드니 길 양옆으로 사람 얼굴보다 큰 접시꽃들이 가로수처럼 심어져 있다.

탐스러운 모양새와 울긋불긋 화려한 색깔을 뽐내며 활짝 웃고 있는 접시꽃들은 기대치 않았던 반가운 환영인사를 건네오고 그 덕인지 여행의 시작이 즐거워진다. 6월에 피기 시작해 8월까지 만발하는 이 꽃은 여름 해수욕객을 위한 서천군 의 첫인사쯤 될까.

들뜬 마음으로 한걸음에 *춘장대해수욕장 으로 향한다. 늦은 피서객들이 물놀이를 즐 기고 있는 춘장대해수욕장은 울창한 송림과 아카시아 숲을 뒤로하고, 서해를 향해 둥글게 두 팔을 내뻗은 형상이다.

경사가 거의 없는 넓은 백사장은 썰물로 물이 빠지면 바다에 묻혀 있던 500m 가량의 긴 모래사 장이 드러나 물놀이를 즐기던 해수욕객들은 즉석 갯벌체험을 즐긴다. 게와 조개 등의 수생생물들은 아이 들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해서 머리를 맞대고 모래를 파내고 있는 가족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수심 이 얕아 아이들의 해수욕에 좋기 때문에 이곳에는 유독 어린 자녀를 동반한 가족단위의 여행객들이 많이 눈에 띤다. 수영에 능숙치 않은 어른들 역시 안심하고 바다를 즐길 수 있어 춘장대를 찾는다.

동백나무 숲 정상의 동백정 동백정 앞 바다
서천해양박물관을 지나 마량포로 향하는 길목에 *마량리 동백나무숲 이 자리하고 있다. 어부들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500년 전에 심어진 동백나무들은 현재 84그루가 남아 있는데, 일반적인 동백나무 3~4그루 를 합친듯한 몸체의 굵기를 보자면 수령의 육중함이 절로 느껴진다.

봄이면 붉은 동백꽃이 만발하는 이 숲 정상에 바다를 내려다보고 자리한 동백정에서는 서해안의 일반적인 바다와는 다른 색다른 모습의 바다 를 만나볼 수 있다. 푸르른 바닷 빛깔과 절벽 아래로 와 닿는 파도는 이곳이 동해인지 서해인지 헷갈리 게 할만큼 아름답다. 동백정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조망한 후 소나무 숲을 한바퀴 도는 산책까지는 1시간이면 충분한 코스이다. 마량포 해돋이

마량포의 방파제 전망대 마량리 앞바다를 지나는 어선

풍성한 제철생선이 넘쳐 나는 홍원항에는 9월이면 전어가 풍년이다. 9월 말에 열리는 '전어큰잔치'에 맞추어 찾는다면 고소하고 감칠맛이 일품인 전어를 회나 구이로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 홍원항과 달리 마량포는 고기잡이보다는 관광지로서의 명성이 더 높다. 서해안의 여느 바다들과 마찬가지로 마량포에서 보는 해넘이도 근사하지만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해돋이 또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매년 동짓날을 기준 으로 전후 20여일씩 총 40여<
일간 방파제 전망대 동쪽으로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이 장관 을 연출하고 연말연시가 되면 이

*마량포해돋이 를 보며 마음을 새로이 다지려는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해돋이를 볼 수 없는 시기이지만 방파제에 올라 삼면으로 애워싼 바다를 향해 서면 마음까지 트이는 시원 함이 느껴진다. 가을이 깊어지면 신성리갈대밭과 *금강하구둑 은 그 진가를 발휘한다. 폭 200m, 길이 2km 갈대밭에는 키가 2m가 넘는 갈대들이 바람에 넘실대는 모습이 반짝이는 금강의 물결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이룬 다. 금강 하구둑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찾아오는 10만 마리의 겨울 철새들을 보기 위해 탐조여행을 떠나 보는 것도 멋진 계절 여행이 될 것이다./ 강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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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4-24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사진의 하늘, 너무나도 아름답구나...

플레져 2006-04-24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서천! 언젠가 가봐야겠음...

이리스 2006-04-24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오오.. 낭군님과 함께에~ ^^
 

방황하는 청춘아, 이병주를 읽어라
[조선일보 2006-04-24 09:37]    

이병주 전집 한길사|전 30권|각권 9000원

[조선일보]

나는 ‘이병주’라는 고봉준령을 오를 수 없다. 까마득해서 주눅이 든다. ‘소설 알렉산드리아’에 가기도, ‘관부연락선’을 타기도, ‘지리산’과 ‘산하’를 밟기도 힘이 부치고 ‘쥘부채’를 잡거나, ‘행복어 사전’을 뒤지거나, ‘그 해 오월’을 기억하기도 깜냥이 안 된다. 포기가 마땅하거늘 용심을 부리는 것은 가녀리나마 선생과 얽힌 추억이 있어서다. 선생이 내 손에 쥐어준 몇 톨 안 되는 말과 글의 이삭을 만지작거리자니 옷깃만 스친 그 인연조차 새삼 느껍다.

70년대 중반, 스물을 갓 넘긴 나에게 선생은 ‘문호(文豪)’로 다가왔다. 초기작 몇 편을 읽었을 뿐인데 내 마음은 송두리째 빼앗겼다. 그것을 ‘섬광에 눈 먼 자의 과장된 경념(敬念)’이라 나무라지 말라. 문학을 사랑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이제 이병주를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으로 나누자”라는 말까지 나온 것에 비하면 내 존경은 사사롭다. 인간과 역사, 전쟁과 이념, 정치와 애정이 종횡하는 작품 속에서 나는 막막한 미아였다. 선생의 문학적 편력이 겹쳐진 ‘허망과 진실’을 접한 나는 덧없는 인생과 배운 자의 허무에 몸서리쳤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 정약용과 사마천 등의 내면을 탐사한 이 에세이는 선생의 삶과 사상이 빚은 결곡한 마음의 지형을 엿보게 한다. 선생은 서문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은 ‘인생이란 결국 허망한 것’이라는 교훈을 가르쳐준다면서 이는 니체도 루신도 마르크스도 같다고 지적한다. ‘허망을 배운 사람은 이미 지옥을 보아버린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 허망을 뚫고 찾아낸 진실만이 지옥을 견디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란 인식이 굳어있는 것이다.’ 덧붙여 선생은 ‘허망하기에 진실이 아름답다는 것은 역설이 아니다.’고 말한다.

작가 이문열이 ‘허망과 진실’을 읽고서 ‘도스토예프스키의 평전을 써볼 생각을 포기했다’는 토로가 풍문처럼 들려올 즈음, 나는 선생이 언급한 라스콜리니코프의 히포콘드리아(우울증)가 내 평생의 숙환이 될 거란 예감에 젖었다. 선생의 저서는 전염성이 강했고 음영이 짙었다. 허망이 울증과 짝하며 나를 괴롭힐 때, 선생은 처방전을 쥐어줬다. 선생이 입버릇처럼 되뇐 ‘봉 상스 있는 딜레탕트’! 나는 그것을 ‘인생과 예술을 완미하는 양식인’으로 풀었다. 장강 같은 사유와 도저한 현학, 끝간 데 모를 박람강기로 내 덜미를 움켜잡은


선생의 행간에서 지금껏 꿈틀대는 구절은 ‘봉 상스 있는 딜레탕트’ 하나다. 반독재 투쟁과 민주화 운동이 안간힘을 쓰는 70년대의 겨울공화국에서 ‘완미’라니, 이 무슨 한가로운 사치인가. 날선 필봉을 휘두르던 한 언론인은 선생의 책을 끼고 살던 나를 그렇게 나무랐다. 그는 선생의 ‘회색’을 꼬집었다. 좌와 우, 보수와 진보, 어느 진영에 서서도 독자를 설득해내는 기막힌 변설 그리고 모든 추구를 도로에 그치게 하는 역사적 허무주의와 댄디한 망명의식은 현실의 고통과 모순을 희석하고 변혁에 동참하는 행위를 망설이게 한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나는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 이데올로기가 무슨 쓸모인가’라고 한 선생의 편에 서고 싶었고, 허망이 뼈에 저릴 때 그 좌절조차 완미하려는 한 인간의 내성(耐性)에 홀려있었다. 그렇게 내 청춘은 흘러갔다.

76년 지역의 문학 강연회에 초대한 인연으로 나는 용산 청과물 시장 한 귀퉁이 건물에 거처하던 선생을 자주 찾았다. 잔심부름을 시키는 선생이 고마웠다. 조도 낮은 집필실에서 3미터나 됨직한 책상에 수 천 장의 원고지를 쌓아두고 몽블랑 만년필을 혹사하던 선생이, 마냥 기다리는 나를 보고 “자네도 한번 피워보게’하며 건넨 것이 소련제 담배였다. 러시아어만 봐도 경기가 들던 시절 이를 도대체 어디서 구했을까. 선생의 도처가 경이였다. 일제의 학병으로 끌려가 쑤저우에서 군마(軍馬)와 지내다 걸린 동상 때문에 손가락을 자른 고통을 들으며 ‘8월의 사상’을 곱씹기도 했다. 레드 와인을 마신 후 멋들어진 붉은 콧수염을 쓰윽 문지르던 그 정경도 아슴하다.

선생은 ‘관부연락선’에서 운명적 정인(情人)으로 묘사된 서경애를 수소문해보라며 한때 교직에 종사했던 그녀의 본명을 귀띔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덮었다. 언론인 남재희는 ‘도덕과 부도덕의 경계를 허무는 선생의 행보’를 반추했지만, 나는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을 드러내는 청으로 받아들였다. 나의 편애와 독단은 선생을 진혼하지 못할지언정, 미망과 착종 속에서 방황하는 젊음들아, 그대들은 이병주를 읽어라. 내 추억은 이제 달빛에 물든 신화가 되고 있지만 그대들은 햇빛에 바랜 역사를 마주할 것이다. (4월24일 서점 배포)

(손철주·학고재 주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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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6-04-24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학때 이병주님의 소설 '허망과 진실'을 얼마나 허망하게 (?) 읽었던지. 두께도 꽤 되는 책을 말입니다.

이리스 2006-04-24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치 나인님 / 허... 허망하게..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