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의 A에게 안부를 물었다. 세상이 편리해져서 지구 그 어디라도 그 곳이 도시라면 안부를 묻는 일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게 된 덕분이다. A가 전하길, 자신은 지금 악랄한 연애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악랄한 연애.

A.의 설명에 따르면 책임의식을 최소화 하며 미래를 함께 한다거나 하는 발상 자체가 없는 그저 온기만을 나누는데 충실한 연애라고 했다. 그 부분에 있어서 상호 합의가 되었다면 그것이 굳이 ‘악랄한’이라는 표현을 달고 가야 하는 연애일까 싶어 더 물으려다 말았다. 즉, 합의가 안되었을 거라는 가정하에.

생각해보니 A는 지난 몇 년간 항상 2~3명의 이성을 주변에 달고 지냈던 것 같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말에 충실한 연애를 하겠노라 공언한 A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번은 A와 같이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A는 발신 번호를 보고 별로 받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한 눈치였으나 망설이다가 이내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좀 전의 태도는 온데 간데 없이 매우 상냥하고 또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대의 전화를 받았다. 짐작컨대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취중에 전화를 한 듯 했고, 다음날이면 기억 못할 이야기나 혹은 기억해봐야 민망할 이야기를 읊어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A는 시종일관 따뜻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런 A의 의중이 궁금해 뭐라 물어보려 입술을 달싹거리자 그 모습을 본 A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제 슬슬 연락 안 올 때도 된 거 같은데 의외로 좀 오래 가네. 그렇지만 1~2주 뒤면 아마 연락 오지 않을 거야. 지금 전화한 것도 내일 휴대폰 발신 목록 보고 알게 될걸? 나랑 꼭 통화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시간에 통화할 그 누군가가 필요한 것 뿐이야.”
그 설명을 듣고 난 뒤에도 여전히 A의 좀 전 모습은 낯설었다,

“외로워서 그러는 거 이해하거든. 외로워서 그래, 다들. 전화 받는 게 뭐 돈 드는 일도 아니고 거긴 새벽이지만 여긴 낮이라 잠자다 깬 것도 아닌데 뭘. 게다가 취기에 중얼대는 사랑타령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고 A는 정오의 날카로운 햇살에 살짝 눈을 찌푸리다가 이내 웃었다.

악랄한 연애라는 표현에 나는 그 날의 A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이제 A는 그 만큼의 친절과 부드러움을 싹 거둬들였다는 뜻인가 보다. A는 조금 더 외로워진 것 같았다. 다시, 안부를 물을 때쯤에는 A의 외로움이 더 두터워질지, 아니면 사라질지 모르겠다. 다만, A의 안녕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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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3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03 1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3-05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랄하든 말든 뭔가 하고픈 마음이 들지를 않는 요즘입니다.

이리스 2009-03-05 16:4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러네요. 감정 토하기, 에 지치는 날들입니다. --;;
 

살아오던 방식을 바꾸는 일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변화를 꾀하려면 계기가 필요하기 마련이고 그것은 삶의 방향성을 틀어도 괜찮을 만한 근거여야 한다.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갈 때가 된거라는 농담이 농담이 아닌 것 처럼 두려워질만큼 나는 굉장히 다른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게 있어 그 근거는 상실이다.  

상실을 자각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보니 윈드서핑을 하던 사람이 사고로 배의 스크류에 한 팔 전체가  잘려나가게 되었을 때 자신의 팔이 잘렸다는 사실을 즉각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했다. 주변이 붉게 물들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팔이 잘리는 엄청난 고통을 자각하지 못한 것은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고통이라서였을지도 모른다. 어깨 아래 달려 있어야 할 팔이 눈 앞 몇미터에서 붉은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을 보고서도 저것이 내 팔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까닭은 실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는 그 상황의 심각성과 고통의 깊이 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만화를 보다가 문득 팔이 잘린 그 윈드 서퍼가 생각났다. 내게서 잘려나간 소중한 것이 마치 신체의 일부를 상실한 것처럼 지독하게 아프고 그 상실이 불편해서 견딜 수 없어지면서 내 삶의 방식이 달라지게 된 것이 아닐까. 고통이 극대화 되어 온몸을 뒤흔들면서 동시에 치유가 시작되고 있다. 

욕망에 지배 당하지 않고, 욕망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지점에 올라서고 보니 한결 여유로워졌다. 그리고 이것은 상당한 희열을 맛보게 한다. 욕망에 사로잡혀 끌려다닌 삶을 자유로운 삶과 치환해 놓고 스스로를 방기하는 어리석음에 조의를.  

 

이제, 가벼워지는 것만 남았다.  

가볍고도 가벼운 존재가 되어 미세한 떨림만으로도 전율을 느낄 수 있고 

그 언제라도 가뿐히 떠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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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2-2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반에 들으셨으니 이제 남은 건 공중부양 뿐입니다.

이리스 2009-02-28 15:37   좋아요 0 | URL
아직 번뇌가 너무 많아서 공중부양이 안되고 있;;;

Mephistopheles 2009-02-28 17:01   좋아요 0 | URL
그렇다고 헬륨을 들이키진 마십시요..어용입니다 그건.

이리스 2009-03-01 20:29   좋아요 0 | URL
요상스런 목소리로 메피님 귓가에 꽥꽥거리진 않을게요. ㅎㅎ
 



점심 식사를 마치고 따뜻해진 날씨 덕에 나른해진 기운을 업고 슬렁슬렁 광화문을 돌아다녔다.  

교보에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는 문자가 와서 책을 찾아 들고 사무실로 돌아가려다가  

바디샵 매장에 신제품 출시 광고가 걸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장미, 온통 장미였다.  

은은한 장미향에 홀리듯 이끌려 들어가 새로 나온 립스틱을 테스팅 해 보았다.  

세가지 컬러 중 마음에 드는 것은 가장 연한 핑크.  

브러시로 바를 때랑 립스틱을 바로 바를 때랑 색감이 많이 다르다.  

장미향이 지속되는데다 맛도 나쁘지 않다. 립스틱은 역시 맛이 좋아야 한다.  

결국, 다 먹게 되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립스틱을 바른 본인이 먹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대부분 내가 먹으니까. -_-;

 

마일리지 모아둔 걸로 내일 사야지.  

내가 다 먹으면 어때,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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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2-23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저는 화장을 안하고 다니는데, 립스틱은 정말 고르기가 어려워요.. 남보다 입술이 빨개서리 뭘 발라도 그 색이 안나요 흑흑

이리스 2009-02-28 09:25   좋아요 0 | URL
붉은 입술의 휘모리님이시군뇽~~ 아흐.. (나, 왜 이러지-_-)

다락방 2009-03-01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리스님. 어디서 들은 말인데 여자는 립스틱을 평생 세통 먹고 남자는 여덟통을 먹는대요. 남자가 더 많이 먹는다능.

=3=3=3=3=3

이리스 2009-03-01 20:30   좋아요 0 | URL
전 평균을 깎아먹는건가요? 그런가요? ㅜㅜ

프레이야 2009-03-02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향이라면 땡기네요.
저도 립글로스를 이용한 게 좀 됐어요.
립스틱하고 아듀한 셈인데 이거 한 번 사볼까요...ㅎㅎ

이리스 2009-03-14 17:32   좋아요 0 | URL
장미향 좋아하신다면 추천이에요. :)
 



장담컨대 케이트 윈슬렛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로맨틱 무비를 보겠다고 영화표를 산 관객들은  

십중팔구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오거나  

자막이 다 올라가기 전에 앞자리 관객들이 똑똑히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불만 가득한 말을 내뱉게 될 것이다.  

그 말 중에는 아마 이런 내용을 담겨 있을 것이다. 

 

임신한 여자가 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셔!

애를 낳아 키우는 것은 결혼한 여자면 지극히 당연하게 또 감사하게 해야 할 일 아냐?  



요즘처럼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챙겨보지 못하고 영화 표를 산 자신 탓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절망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는 냈지만  

그 절망을 희망으로 돌리는 방식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한 부부의 가슴 아픈 결말이 담겨 있다.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하려면 원하는 삶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원하는 삶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릴 때 비극이 잉태된다.  

잉태된 비극은 반복되는 일상의 날들이 더해질수록 무럭무럭 자라난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견고한 일상 아래서 자라난 비극은  

어느 순간 너무 커져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삶을 통째로 집어 삼키거나 다시는 전과 같이 살 수 없도록 무너뜨린다. 

 

나이가 들수록,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들이 혹독해진다.  

삶의 터전을 바꾸는 일 역시 그러하다. 영화 속 설정과 같다고 볼 수는 없지만  

유사한 상황에서 결국 비겁한 선택을 하고 말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배우들의 표정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두 배우의 연기는 입가 주름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까지 모두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훌륭했다.  

그럼에도 케이트 윈슬렛 쪽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까닭은 캐릭터 자체의 매력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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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9-02-23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를 안봐서 뭐라 말할 순 없지만
디카프리오를 보는 건 힘들어요,,,그가 연기를 잘 못해서가 아니라
어떤 레젼드같은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어서 그가 연기를 기대에 못미치게 하면 어저나,,,하는,,ㅎㅎ
뭐 그의 팬이 아니라도,,,ㅎㅎ
님의 페이퍼를 보니 이 영화 꼭 보고싶네요.

이리스 2009-02-28 09:25   좋아요 0 | URL
케이트 윈슬렛에 밀리긴 하지만 그건 그가 못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너무 잘해서;; 라서 괜찮아요. :)

다락방 2009-03-01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카프리오는 어느 영화에서건 연기를 못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어요. 그런데 평론가들은 그를 싫어하죠. 자꾸 그의 외모만으로 그를 평가하려고 해요. 쳇.

이리스님.
유사한 상황에서 결국 비겁한 선택을 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해요.
그리고 저는 이 영화를 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또 같은 선택을 하게 될거에요.

토닥토닥.


참고적으로 저는 [레이첼, 결혼하다]가 정말,정말,정말,정말 좋았어요!

이리스 2009-03-01 20:31   좋아요 0 | URL
디카프리오에게도 언젠가 그것을 넘어서는 날이 올거에요. 곧!!

선택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인것 같아요.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
감사해요. :)

아, 그 영화 저도 기대하고 있어요. ^_^
 



 

운좋게 표가 생겨 보게 된 연극 <쉬어 매드니스>는 뮤지컬 <김종욱 찾기>를 봤던 예술마당에서 공연 중이었다. 

관객이 참여하는 열린결말이라는 정보만 갖고 보러 갔다. 

어쩐지 어수선하고 애드립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그런 연극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정신없이 웃다가도 정신 바짝 차리고 범인 찾기에 몰입하다 보니 어느새 연극이 끝났다. 

배우들의 연기도 나무랄데 없이 좋았고,  

그때 그때 시기 적절한 대사로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애드립도 훌륭했다.  

 

CSI를 너무 많이 본 관객들 탓일까? 너도나도 형사가 따로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예라한 관찰력의 소유자가 많은 것일까싶게. 

증인 역할의 관객들 사이에서도 은근한 경쟁심리가 발동해 서로 더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보려 애쓰게만드니 

<쉬어 매드니스>의 관객 참여 전략은 200% 성공한 셈이다. 

 

인터미션에도 배우들은 쉬지 않고 계속 무대에서 연기한다. 그 때 관객들도 단서를 함께 찾는다. 

형사에게 취재 협조를 위해 도움을 줄수도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런 극을 구성한 연출자가 궁금했다. 찾아보니 한국예술종합학교 1기 변정주씨다. 

아래는 그에 대한 무비위크 이유진 기자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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