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도 이브도 없는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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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점점 뜸해지다가 마침내 더 이상 걸려오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결별이라 불리는 야만적이고 거짓된,
그 무엇보다 기분 꿀꿀한 절차를 면제받았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를 제외하고,
나는 사람들이 관계를 끊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추할 뿐더러 사실이 아니다.
결코 끝난 게 아니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더는 생각하지 않을 때조차
그의 즉자적 현존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는가?
한 번 소중했던 사람은 영원히 소중하다.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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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잃어버린 여덟 가지
야마다 에이미 지음, 김난주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9월
절판


나는 변함없이 구르고 넘어지고 떨어졌다. 이런저런 실수도 했다. 하지만 허둥대지 않았다. 헛된 발버둥은 치지 않았다. -20쪽

나 지금, 그 사람을 미워하는 건지 사랑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져. -23쪽

그가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은 내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나는 그때, 좋아하는 남자에게 평화와 행복을 선사하고 싶을 만큼 이미 어른이었다...
나는 그를 슬픔 속에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그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가 슬픔에 빠지면 내가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멋대로 그렇게 생각했고, 그런 자신을 용납했다. 내가 즐겁기 위해서는 그도 즐거워야 했다.-44쪽

그리운 느낌 어쩌고 하는 건 순 거짓말이었어. 나는 처음부터 그의 그 눈에 끌렸던 거야. 그리고 두려운 나머지 사랑하게 된 거고. -51쪽

그때서야 나는 자신이야말로 텅 빈 뱃속으로 끝없이 울어댔던 매미였다는 것을 알았어요. 인간이 공허를 메우기 위해 운다는 것을 안 나는 그저 서럽고 애달팠어요. -73쪽

그렇게 배려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게, 남자를 사랑한다는 거야. 그 사람이 보고 싶고 만나고 싶어 애를 태울 때는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 자신의 욕망을 달래기 위해서 남자를 생각하는 거지. 만나고 싶은 마음은 똑같아도, 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달라져. 더 차분해지고, 더 슬퍼지지.-159쪽

나는 우울한 기분에 젖어 변하는 계절을 느꼈다. 죽음을 으식하면서 내 주위에 꿈틀거리는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것, 가령 계절이나 시간 같은 것들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색과 의지를 지니고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 주로 가족들이 내 주위메 만들어내는 감정의 모자이크가 마치 나무토막처럼 겹겹이 쌓여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나에 대한 그들의 감정에는 전혀 빈틈이 없었다. 나에 대한 엄마의 생각을 손으로 집어 잠시나마 공기 중에서 꺼내 놓으면 그 공백을 아빠와 동생의 감정 덩어리가 보충하고 메우는 식이었다.
나는 가족이 서로를 사랑하는 데에는 진공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내 주위는 타자의 농밀한 사랑으로 꽉 차 있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은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렇기에 더욱 행복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행복은 원래 자각이 없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174쪽

나는 돌과 무덤에 친근감을 느꼈다. 이곳에 있는 무수한 죽은 사람들. 나도 언젠가 이들 사이에 낀다. 그런 생각을 했더니,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사방을 돌아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떠다니는 공기가 내 몸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공기에서는 집에 있을 때처럼 애틋함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허공을 노려보았다. 나는 따스하고 푸근한 것에 싸여, 손 하나 까닥할 필요조차 없고 아무런 필연도 없는 쾌락에 몸을 맡겼다. 걱정하고 겁내고 슬퍼할 필요가 없느. 다만 자신이 그 자리에 존재한다는 실감 외에는 모든 것을 잃은 채 그 곳에 있었다. 나는 지금 혹시, 죽은 것일까. 그런 생각을 했다.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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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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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헤아림도 없이 달력도 없이 진창을 기어가듯 지나갔다. 멀리 주간 고속도로를 따라 길게 줄지어 있는 검게 타버리거나 녹이 슨 차들. 바퀴의 드러난 테가 시커매진 철사의 고리에 둘러싸인 채, 녹았다가 다시 잿빛으로 굳은 고무 진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타서 재가 된 주검은 아이만 한 크기로 줄어들어 좌석의 용수철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쭈그러든 심장 속에 매장된 수많은 꿈도. 그들은 계속 걸었다. 바퀴를 돌리는 쥐처럼 죽은 세계를 밟고 나아갔다. 죽음처럼 고요하고 더 깊은 죽음처럼 검은 밤. 몹시 추웠다. 그들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308쪽

남자는 계속 기침을 했고 소년은 남자가 침을 뱉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비틀비틀 걸어갔다. 넝마를 걸친 채 더럽게. 희망도 없이.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카트에 몸을 기대면 소년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눈물이 그렁해진 눈을 들어 소년이 거기 길에 서서 어떤 상상할 수 없는 미래로부터 자신을 돌아보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장막처럼 빛을 발하는 소년. -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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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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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도 원주민이 있다고? 호주나 미국에만 있는 줄 알았던 원주민이 이 나라 대한민국에도 있다고 하니 일단 호기심 발동이다. 그래, 그 원주민은 누구? 작가가 대뜸 말해준다. 누구긴 누구, 우리 가족! 엥?  어디 이야기를 들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가 앉은 자리에서 홀랑 다 읽었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데다가 초등학교 때 다들 방학이면 시골에 간다는 것을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그 시골 조차도 없던, 철저히 도시의 정서를 갖고 자라왔다. 그런 까닭에 나는 시골이라고 하면 일단 침부터 꼴깍 넘긴다. 내가 잘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 갈망. 대학 때 한 미대 선배가 어려서 자란 시골에서 놀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고 신기해서 그 선배만 만나면 어렸을 때 놀던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을 정도였으니. 나와 비슷한 세대의 사람이 다른 기억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의 말, 에서 보니 나는 그가 갖고 있는 피해의식, 분노, 경멸, 조소 등이 한데 뭉쳐진 자그마한 덩어리의 핵심에 서 있는 셈이었다. 도시에서 자라 유치원을 두 번이나 다녔고, (여섯 살부터 심심하다고 졸라대서 2년 다녔다) 피아노 학원을 다녔으며(엄마가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셨으니) 초등학교 때 엄마와 함께 소풍을 가봤고(엄마는 학부모회 회장이셨다). 그렇지만 그 덩어리의 핵심인 게 하나도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그 이후 집안이 폭삭 망해서 작품 속 작가의 어린 시절에 버금가게 가난했던 시절을 지났기 때문이리라.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후다닥 옷을 빨아 널었고, 아무런 것도 넣지 못한 오로지 물 뿐인 말간 국물에 담긴 얄밉도록 가는 국수 몇 젓가락만으로 배고픔을 견뎠던 적도 있었다.


<대한민국 원주민>은 대한민국의 모든 원주민들, 그 원주민의 이웃, 원주민의 친구들까지도 모두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만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보여지는 것들, 보편화된 것들에만 시선을 가두고 그것이 세상의 전부일거라 굳게 믿고 일평생을 살다가는 원주민이나 혹은 그 반대 선상의 사람이나 모두 고개를 돌려서 여기가 아닌 저기를 바라보고 또 그곳과 소통하면서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를 꿈꾼다면 너무 비현실적인 소망일까?

새삼스럽게 만화가들이 참 대단하다 싶다. 그려야지, 써야지. 하나만 해도 되는 경우도 있는데 만화가는 항상 두 가지를 해야 하는 거다.(대부분의 경우가 그렇겠지?)

책의 후반부에 있는 작가의 말 혹은 후기쯤으로 규정할 수 있는 두 페이지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물렀다. 특히, 한 페이지를 가득 메운 작가 자신의 그림. 그 처연한 옆모습이 서늘하게 가슴에 남는다. 어깨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고 싶다가도 그 행위 자체가 짐짓 가벼운 위로 정도가 될까 두려워 내밀었던 손을 어색하게 거둬들였다. 다만, 이렇게 앞서 아이와의 대면을 고민하는 모습에서 꽤 괜찮은 아빠가 될 소질이 보였다.

* 그림을 보면 그가 식빵에 포도잼을 발라 먹는 다는 것과 그의 집에 믹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은 딸기잼을 발라 먹지 않나? 남자 혼자 살면서 믹서를 갖고 있다는 것은, 흐음..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 별 하나를 뺀 이유는 웃음.. 재미가 조금 더 있었으면 하는 욕심 때문이다. 감동과는 또 다른 의미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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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7-07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에요. 알라딘에는 최규석의 팬들이 살고 있다!ㅎㅎㅎ

이리스 2008-07-08 11:08   좋아요 0 | URL
하핫, 살고 있다고 하니 어쩐지 또 원주민, 습지 막 이런 이미지가 떠올르네요. ㅋㅋㅋ

네꼬 2008-07-08 11:22   좋아요 0 | URL
최규석 팬이 여기도 살고 있다!

(나도 리뷰 쓰려고 했는데. 이거 원 기죽어서 원.)

이리스 2008-07-08 16:29   좋아요 0 | URL
네꼬님, 왜 기가 죽;;; -_-;;
 
Fly To The Sky (플라이 투 더 스카이) - Recollection
플라이 투 더 스카이 (Fly To The Sky) 노래 / 티엔터테인먼트/코너스톤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십여년 동안 내 안에 쌓인 추억이 하나둘 살아난다.

노래 한 곡 마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씩

기다렸다는 듯 추억이 살아 숨쉬기 시작하는지.

 

리메이크 앨범의 미덕은

원곡을 뛰어넘는 훌륭함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원곡과는 다른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 앨범은 완벽하다.

두 사람의 하모니는 그 어떤 곡에서도 조화를 이룬다.

앨범 전체를 반복해서 듣다보면 절로 중독되기까지 하니

대단하다고 할밖에.

 

때로는 심장이 터질듯 쿵쾅거리고

아련한 기억이 밀려와 시야가 흐려지기도 하고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며 마음이 따뜻해졌다가

차오르는 그리움에 가슴이 먹먹해지게 만드는

이토록 소중한 추억으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해준 이 앨범에

만점을 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나를 위해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그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게 빨리 오느라

땀에 흠뻑 젖은채 웃고 있던

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준 노래 한곡을, 듣고 또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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