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의 세계영화기행] '나니아 연대기' 뉴질랜드
[조선일보 2006-04-26 03:08]    

실제 쓰인 소품 칼을 들자 벌판엔 전투 함성 들리는 듯

[조선일보 이동진기자]

처음엔 자연만 봤다. 드넓은 목초지와 끝없는 양떼, 혹은 눈동자를 물들이는 바다와 세포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 그러나 영화 ‘나니아 연대기’ 촬영지를 찾아 몇 해 만에 다시 간 뉴질랜드에선 사람이 보였다. ‘키위’(뉴질랜드인의 별칭)들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확신이 강했고, 격식을 차리지 않았지만 예의를 잃진 않았다. 판타지 영화의 무대에서 살아가는 ‘나니아 사람들’은 따스했다.

1.카라

주근깨 투성이 그녀가 멋쩍은 듯 씩 웃었다. 이어 청바지에 사과를 문질러 닦은 뒤 크게 베어 물었다. 영락없는 시골 처녀 모습이었다. 2000 마리 양을 기르는 목장 ‘테 탕아’ 쪽문 옆에서 자라던 사과나무에서 열매 다섯 개를 따낸 카라는 성한 놈 두 개를 골라 하나는 건네주고 또 하나는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손에 남은 사과들을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말(馬)이 워낙 좋아해요.”

작은 마을 오와카에 있는 그녀의 가족 목장에 간 것은 양을 제대로 찍어보고 싶어서였다. 광활한 산비탈 목장 안을 트럭으로 다니다가 양떼를 보면 내려서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매번 양들은 전력질주로 멀어졌다. 따라 뛰다 두 번이나 진창에 빠졌다. 언덕 아래 카라가 놀리듯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쑥스러웠지만 양을 따라 풀밭을 뛰어다니는 일은 즐거웠다. 가족 관객을 겨냥한 ‘나니아 연대기’에 동물 캐릭터가 대거 등장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오즈의 마법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그랬듯, 동물과 함께하는 여행담은 모두를 사로잡을 모험담일 테니까.

손님을 말에 태우고 다니는 가이드 일을 주로 하는 카라와 ‘푸라카우누이 베이’에 갔다. 남섬 동남쪽 도시 더네이딘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 절경의 해안을 달려 도착한 그곳은 결말 부분을 찍은 곳이다. 네 남매가 왕관을 쓰는 궁전 외부는 컴퓨터그래픽으로 그려낸 것이지만, 깎아지른 절벽과 짙푸른 해변은 작품 속 그대로였다. 모든 것을 다 이룬 사자왕 아슬란이 홀로 걸어 사라져간 그 바닷가가 남쪽 끝 근처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뉴질랜드 남단이라면 세계의 맨 아래 부분이기도 했다. 저 멀리 파도를 타는 서퍼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보드 끝에 제겨 디뎌 체험하는 세상의 끝은 어떤 느낌일까. 한없이 고요한 세계의 밑바닥은.

아름다운 해변과 풍요로운 농장. 헤어질 무렵 “행운을 타고나셨군요”라고 웃음을 머금고 말을 건넸더니 카라가 정색하고 답했다. 예전엔 몰랐다고. 그저 답답해 몇 년간 외국으로 떠돌았다고. 밖에 나가서야 스스로 얼마나 행운아인지 깨달았다고. 돌아온 그녀는 이 땅을 너무 사랑한다고. 행복은 맛이 강하지 않은 최상급 포도주 같은 것이다. 얕은 입맛에는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2.로브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무 살 때 영국으로 갔다. 사이클 선수로 나름대로 성공했다. 카라가 떠올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돌아왔죠?” 미소와 함께 로브가 받았다. “영국에선 여름이 두 주 밖에 없거든요.”

남섬 캔터베리 지역엔 이미 ‘나니아 연대기’ 여행상품이 나와 있었다. ‘반지의 제왕’과 ‘킹콩’에서 ‘나니아 연대기’까지, 외지인에게 뉴질랜드는 온통 판타지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안내하는 로브 같은 키위들에게 판타지는 하루하루의 리얼리티였다. 여행객과 원주민,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나와 너. 리얼리티와 판타지를 가르는 것은 각도일 뿐 둘 사이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투어 정점은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서쪽으로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아서즈 패스 국립공원 인근 ‘플록 힐’이었다. 네 남매가 이끄는 아슬란 병사들과 하얀 마녀 군대가 전투를 벌이는 클라이맥스를 찍은 곳이었다. 험준한 사유 목장에 제작진이 직접 만든 비포장도로 6㎞ 끝에서 바위가 하나하나 살아 움직이는 협곡을 만났다. 바위 아래 그늘에 앉아 점심 샌드위치를 먹을 때 산토끼가 코 앞을 가로질렀다.

계곡 옆으로 걷자 탁 트인 대평원이 나타났다. 칼을 든 맏이 피터가 돌격 명령을 내리던 바위로 갈 때 로브는 실제 쓰인 소품을 가져왔다. 칼을 들고 바위에 서자 벌판을 메운 양 진영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가는 장면이 펼쳐졌다. 누른 벌판을 휘감고 솟아오른 바람이 칼 끝에서 웅웅거렸다. 환상이 깃들 곳은 태고의 세계였고 시원(始原)의 공간이었다.

차를 되돌려 상상에서 현실로 복귀할 때 다시 물었더니 이번엔 진지하게 대답했다. “모든 일엔 끝낼 때가 있잖아요. 격심한 선수 생활을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하자 자연스레 고향이 떠올랐어요.”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 삶 전체를 응축하는 상징일 것이다. 그게 공간이든 시간이든, 혹은 사람이든.

3.루크

그는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미국인이었으니까.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살던 그는 뉴질랜드 풍광에 반해 1992년 이주했다. “그러니까 당신을 키위라고 할 순 없겠네요.” 강바닥을 찔러 노를 젓던 그가 말했다. “아뇨. 14년을 살았는데 어떻게 키위가 아닐 수 있겠어요.”

이렇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도시가 또 있을까. 크라이스트처치는 더없이 고즈넉했다. 벤치 사람들은 책을 읽었고, 풀섶 사람들은 누운 채 눈을 감았으며, 보트 타는 사람들은 흐름에 배를 맡겼다. 에이번강에서 펀팅(영국식 뱃놀이)을 할 때, 도심을 가로지르는데도 급해 보이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들 모두는 시간을 초대해놓고 있었다. 문명의 아찔한 속도 속에서 필요한 것은 이런 게 아닐까. 게으름 피울 수 있는 권리, 최선이라는 말에 쫓기지 않을 권리, 주저하고 때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도 있는 권리.

물론 크라이스트처치도 ‘천국’은 아니었다. 그날 지역 신문 머리기사는 토요일 밤마다 외곽을 공포로 몰아넣는 폭주족에 대한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잠시 머문 이국의 도시에서 늘 서두르던 객(客)은 모처럼 평안을 얻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충분했다. 어차피 여행은 학습이나 각성이 아니라 휴식이나 추억을 위한 것일 테니.

작고 맑은 에이번강에 바람이 불자 낙엽이 떨어져 강물을 덮었다. 주변 숲을 새삼 둘러봤더니, 세상에, 남반구의 이 예쁜 도시는 뿌리부터 잎까지 온통 가을이었다. 잠시 뱃전에 앉은 루크가 물었다. “한국은 지금 날씨가 어떤가요.” 떠나온 봄과 떠나갈 가을. 흘러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가 시간 속을 흘러가는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는 작년 말 개봉한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은 미국에서만 2억9000만달러의 흥행 수입을 기록하는 등 전세계적으로 거대한 성공을 거뒀다. 후속편 계획을 발표한 이 시리즈는 ‘반지의 제왕’이 완결된 상황에서 ‘해리 포터’와 함께 판타지 바람을 이어갈 대작으로 평가된다. 영국 작가 C.S.루이스 원작을 앤드루 애덤슨 감독이 영화화한 이 작품은 최근 국내에서 DVD로 출시됐다. 2차세계대전 중 시골 마을로 피신한 네 남매가 옷장을 통해 들어간 신비한 나라 나니아에서 겪는 모험을 그렸다.


◆여행수첩=‘나니아 연대기’는 뉴질랜드 곳곳에서 찍었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출발해 사자왕 아슬란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숲 장면을 찍은 홈부시 목장과 마지막 전투를 촬영한 플록 힐 등을 순례하는 여행상품(www.lionwitchwardrobetours.co.nz)이 있다. 아슬란 근거지 캠프 장면 무대인 엘리펀트 락은 오아마루 시 인근에 있다. ‘Vanished World Visitor Centre’(전화 64-3-471-7372)를 통하면 쉽게 갈 수 있다. 남섬 동남쪽 끝 캐틀린스 지역에는 대관식 장면의 푸라카우누이 베이가 있다. 이들 촬영지 부근 도시 중 크라이스트처치는 ‘영국보다 더 영국적인’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빼놓을 수 없는 항구 도시 더네이든 인근에는 뉴질랜드 유일의 성(城) 라나크 캐슬도 있다. 한국어를 지원하는 www.newzealand.com에서 뉴질랜드 전체 관광 안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크라이스트처치 뉴질랜드=이동진기자 [ dj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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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4-26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이렇게나 부러울수가.. 나도 이런 출장좀 가고 싶다. ㅠ.ㅜ

비로그인 2006-04-26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동진 기자의 글쓰기가 너무나도 부러워서 한동안 글을 안쓰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 실은 이동진 기자의 글을 읽을 때 마다 그렇습니다. 대체 뭘 먹고 살면, 어떤 것을 보고 어떻게 느끼면 저런 글이 나오는 것일까요.

이리스 2006-04-26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드님 / 으흐, 그러게나 말입니다. 원고 때문에 전화통화 한적이 있었는데 목소리마저 꽤 좋지 뭡니까요.. 흐흐흐흐.. >.<
 

5월 황금연휴 ‘한국인 나가고 일본인 안온다’
[경향신문 2006-04-26 09:36]    

급격한 환율변동으로 5월 첫주 ‘황금연휴’를 앞둔 한·일 양국 여행객들의 태도가 크게 엇갈리고 있다. 한국 관광객은 원고(元高) 현상으로 5월5~7일 사흘 연휴 기간의 출국이 봇물을 이룰 전망이다. 반면 원화 대비 엔화 가치 하락으로 오는 29일부터 시작되는 일본의 ‘골든위크 특수’를 노려온 국내 여행업계는 울상이다.

◇한국은 “나가자”=국내 직장인들은 5월 첫 주말 황금연휴를 고대하고 있다. 5월5일 어린이날이 금요일인 데다 많은 직장인들이 이르면 4일 오후부터 7일까지 최장 4일 동안의 휴가를 갖게 된 것이다. 외국계 기업 직원 장모씨(25)는 “300명 정도 되는 직원 중 절반 이상이 5월 첫주말 외국 여행을 떠난다”고 귀띔했다.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는 “다음달 4일 출발하는 일본 및 동남아 노선의 항공기 예약률이 거의 100%에 달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탑승률은 일본 54%, 중국 66%, 동남아 73%에 불과했다. 대한항공도 비슷한 예약률을 나타냈다. 일본 노선은 만석이 된 지 오래다. 범한관광 관계자는 “예약이 마감된 동남아, 중국 등으로 출발하기 위해 대기 신청이 줄을 잇고 있다”며 “다른 여행사도 비슷한 상황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일본은 “안가고 안쓴다”=롯데관광 관계자는 “지난해 같은 시기와 비교해 일본인 관광객의 예약률이 20% 정도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일본계 여행사인 HIS코리아 관계자도 “골든위크 예약률이 하락한 데다, 대부분이 저가 여행상품에 몰려 있다”고 전했다.

원고 현상의 여파는 이미 국내 관광업계에 타격을 주고 있다. 롯데면세점 관계자는 “원고현상이 이어지면서 면세점에서 전자계산기를 두들겨 가며 환율 계산을 하는 일본인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한 면세점 관계자는 “올 1~3월 서울시내 전체 면세점에서 일본인 상대 매출이 전년 대비 30%가량 감소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일본인이 하루 매출액 90%가량을 차지하는 이태원의 한 갈비집은 “지난해와 비교해 매출이 하루 1백만원 줄고 있다”며 “4명이 와서 갈비 1~2인분만 먹고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설명했다.

일본교통공사(JTB)는 올 골든위크 기간 중 일본인들의 해외방문지를 추정한 결과, 출국 예상인원 56만5천여명 가운데 7만6천여명이 한국을 찾을 것으로 예측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최근 일본 HIS가 2,0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일본인들의 인기 여행지는 1순위가 하와이, 2순위가 괌, 3순위가 방콕으로 나타났다”며 “환율 때문에 일본인들이 한국을 예전보다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뚜렷하다”고 귀띔했다.

〈김유진기자 actvoic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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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4-26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황금연휴에 아마도 나는 내리 출근해서 일하고 있을듯 하다. ㅠ.ㅜ

라주미힌 2006-04-26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닥토닥...
전 이틀 밖에 안 쉽니다. ㅡ..ㅡ;;;; =3=3=3

이리스 2006-04-26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 / ㅠ.ㅜ
 

[콘서트]효도콘서트 올해도 활짝…‘5월 디너쇼’ 어떤 게 있나
[동아일보 2006-04-26 04:59]    

[동아일보]

가수 심수봉은 “저녁 한 끼와 노래 몇 곡 제공하는 디너쇼는 성인 음악 팬들을 외면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녀가 준비한 것은 7인조 밴드를 비롯한 8인조 관현악단, 6인조 댄스팀, 대금연주자 등 30여 명의 ‘군단’이다.

5월 7∼8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센트럴시티 밀레니엄홀에서 열리는 그녀의 디너콘서트 ‘백만송이 장미’는 실제 콘서트와 맞먹는 규모로 진행될 예정이다. 공연문의 1544-1555

태진아는 아들인 신세대 가수 이루와 함께 디너쇼를 기획했다. 5월 7∼8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하얏트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리는 ‘2006 태진아 사모곡’ 디너쇼에서 태진아는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모곡’ 등의 히트곡과 함께 신곡 ‘아줌마’를 선보이고 아들 이루는 데뷔곡 ‘다시 태어나도’와 ‘미안해’를 부른다. 또 아들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아버지가 부르는 ‘옥경이’ 등 부자 합동 공연도 볼 수 있다. 1588-7890

5월은 연말과 함께 ‘디너쇼’의 최고 성수기. 가정의 달을 맞아 성인가요 가수들의 디너쇼가 이어지고 있다. 인터넷 예매사이트 인터파크 자료에 따르면 현재 디너쇼 예매율은 40∼45% 정도. 늘 매진 사례를 빚는 나훈아의 디너쇼는 올해도 티켓 오픈 한 달 만인 25일 930석이 전부 팔렸다.

5월 디너쇼 단골 주제인 ‘효’는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하춘화의 디너쇼 ‘노래 인생 45년 孝 콘서트’(02-789-5353)가 5월 6, 7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조영남 디너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문의 02-3450-2772)가 5월 7, 8일 서울 역삼동 리츠칼튼호텔에서 각각 공연된다.

이 밖에 5월 8일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열리는 ‘2006 포크 빅3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과(1544-1555) 15일 서울 광진구 자양동 나루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김수희 최진희의 합동 공연 ‘효 콘서트’(1588-7890)는 호텔 연회장이 아닌 ‘콘서트장 디너쇼’ 형태의 공연이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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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4-26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버이날이 다가오는구나... --;;
 

[독신의 세계]독신은 이제 평범한 삶이다
[주간조선 2006-04-25 10:53]

독신자에 입양 허용 추진도... 서구와 달리 결혼 자체에 부정적인 독신은 적어
"싱글로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력"... 사교모임·자기 관리에 적극적

혼자 사는 한 30대 여성은 최근 은행 대출을 받아 강북에 아파트를 한 채 구입했다. 그는 “애인이 생겨도 이렇게 행복할까 싶다”며 “사랑이야 불타오르다가도 사그라들게 마련이지만 아파트는 영원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는 “경제적인 안정감이 이렇게 심리적인 안정감까지 가져다 줄지 몰랐다”며 기뻐했다.

40대 초반인 여고 동창생 네 명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그 중 유일하게 독신인 한 여성이 말했다. “너희들은 남편도 있고 아들, 딸도 있고 가정도 있고…, 없는 게 없구나.” 그랬더니 다른 친구가 말했다. “넌 그 모든 것을 합쳐도 가질 수 없는, 더 큰 걸 가졌잖아. 자유 말이야, 자유.” 독신 여성은 “그 말은 맞지. 그런데 자유를 얻으니까 외로움도 한 세트처럼 따라 오더라고”라며 웃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1인 가구 수는 268만명으로 추산된다. 올해엔 275만 가구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중 2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인 독신자 가정은 전체 가구의 37%로 약 98만명에 이른다. 이렇듯 1인 가구 수로만 따지면 국내 싱글 수는 300만명이 좀 안 된다. 하지만 부모와 함께 사는 미혼남녀나 부모와 함께 사는 ‘돌아온 싱글’, 배우자 없이 아이를 키우는 ‘싱글 맘’ ‘싱글 대디’까지 합치면 전체 독신자 수는 500만명이 넘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LG경제연구소의 이연수 상임연구원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개인주의, 결혼관의 변화 등으로 독신자가 늘어나고 있다”며 “하지만 독신이 하나의 가족 형태로 뿌리 내린 서구사회와 달리 한국의 독신 중엔 ‘언젠가는 결혼해야겠다’고 여기는, 가족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비교적 많은 편”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 조선일보와 리서치플러스가 30~40대 싱글 328명을 조사한 결과, 이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건강’(44%)과 ‘돈’(19%), ‘자아실현’(14%)을 꼽았다. ‘가족’(12%)과 ‘결혼’(7%)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앞으로 결혼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남성 응답자의 65%와 여성 응답자의 40.5%가 “결혼 계획은 없지만 결혼할 것”이라고 답했다. 반면 남성 응답자의 11.7%와 여성 응답자의 33.1%는 “전혀 없거나 회의적인 편”이라고 답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독신자는 어쩌면 한결같이 재테크를 잘하고 자신의 미래에 과감히 투자하는지 모르겠다. ‘초라한 싱글’은 간 데 없고 ‘화려한 싱글’만 있다. 업체들은 ‘싱글을 위한 제품’이라면서 싱글족의 지갑을 열기 위한 마케팅을 펼치고 있고 은행권에서도 ‘화려한 싱글의 재테크 방법’이라면서 경제력 있는 독신자를 잡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가히 ‘독신 시대’가 열렸다고 할 만도 하다. 이쯤 되니 ‘독신 가구의 입양을 허용한다’는 내용을 담은 법안 개정까지 추진 중이다. 한나라당 박찬숙 의원은 지난해 말 “2020년이 되면 1인 가구가 전체 가구 수의 21.5%가 될 것”이라며 “혼인을 해야 입양할 수 있다는 규정은 아이가 없는 독신 가구가 확산되는 현재의 추세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싱글 시대’가 열린 것은 우리나라만의 상황이 아니다. 프랑스의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는 최근 ‘독신자 1000만 시대’란 특집 기사에서 “지난 30년 사이 프랑스의 독신자 비율은 두 배로 늘어나 3가구당 1가구가 독신자 가구이고, 파리 시내에선 2가구당 1가구가 독신자 가구”라고 했다. 2004년 기준으로 프랑스 인구는 6200만명으로, 그 중 배우자 없이 혼자 사는 25세 이상의 독신자 수는 960만명(남자 520만명, 여자 440만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중국도 최근 인구 통계조사 결과, 베이징과 상하이에 사는 싱글족이 100만명에 달한다고 했다. 중국에선 독신을 ‘제3차 단션주(單身族·싱글족)’라 부르는데 연령대가 28~38세로, 수입이 높고 자신의 일과 취미를 갖고 있으며 독신 인생을 즐기는 층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싱글에게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요즘 싱글의 최대 화두는 돈이다. 돈 없이는 ‘화려한 싱글’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지난해 6월 조선일보와 리서치플러스의 조사에서도 싱글들은 ‘경제력’(63.7%)을 싱글로 사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았다. ‘일’(29%)이 그 뒤를 이었고 ‘친구’(4.3%), ‘취미’(2.4%),‘종교’(0.6%) 등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싱글은 기혼자와 달리 누군가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없다. 대신 자기 자신을 돌보는 데 전력을 다한다. 병원에 가서 건강을 체크하고 헬스클럽에 가서 몸을 만들고 보다 지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어학 등을 끊임없이 배우고 익힌다. 그렇다 보니 자기 몸값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주저없이 지갑을 여는 편이다.

잡지사 편집장인 한 40대 남성은 “내 몸뚱이 하나 챙기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다”며 “혼자 사는 남자가 없어 보인다는 말까지 들을까 봐, 부지런히 헬스클럽에 다니고 패션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고 말했다. 광고대행사에 다니는 한 30대 여성은 일주일에 두 번은 요가 개인레슨을 받고 일주일에 한 번은 4시간씩 중국어를 배우고 있다. 이러니 “유지 관리비가 많이 드는 사람만 독신(獨身)시장에 남았다”는 말도 나온다.

독신은 더 이상 고독하고 외로운 집단이 아니라 새로운 트렌드와 유행을 주도하는 집단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다 보니 기업체 입장에서 이들은 최고의 타깃이 된다. LG애드는 지난해 말 보고서에서 “2033세대(20~33세)가 가장 역동적인 소비자층”이라면서 “이들은 결혼에 얽매이지 않는 ‘행복한 싱글’로서 데이트 친구를 두고 독신 생활을 즐기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미술대학 강사인 김모(34)씨는 “남편이 돈을 잘 벌어다 줘도 살림하고 아이를 키우다 보면 스타벅스 커피 한잔 마시기도 아깝다”면서 “그런데 싱글 친구들은 주말이면 비싼 곳에서 브런치 먹고 필라테스를 배우면서 삶을 만끽하더라”고 했다.

언뜻 보면 싱글의 삶은 자유롭고 화려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시트콤 ‘프렌즈’나 ‘섹스 앤 더 시티’에서처럼 사교파티를 즐기는 ‘화려한 싱글’만 있는 건 아니다. 근사해 보이는 삶 뒤에는 처절하고 현실적인 생활이 있다.

싱글들이 “외롭고 고독하다”고 말하면 기혼자들은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아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라며 핀잔을 준다. 하지만 싱글이 느끼는 외로움은 훨씬 현실적이다. 얼마 전 결혼해서 10년 넘는 싱글 생활을 청산한 한 공무원(35)은 “퇴근한 뒤 어두운 집에 들어가 불을 켜야 한다거나 주말 저녁에 갈비탕이 먹고 싶은데 혼자 가야 할 때 불현듯 가슴이 서늘해졌다”며 “이제 그럴 일은 없어진 것 같다”라며 웃었다.


혼자서도 즐겁게 사는 방법을 찾기 위해 싱글은 노력한다. 파티 같은 사교 모임에 부지런히 따라다니고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 독특한 놀이 문화를 만들어간다. 프리챌이나 네이버, 다음 같은 포털 사이트엔 ‘멋지게 사는 30대 솔로들의 모임’ ‘싱글 카페’ ‘30대 러브 하우스’ ‘낭만 30 클럽’ ‘베스트 솔로’ 같은 카페가 수도 없이 있다. ‘클럽 프렌즈’ ‘세이큐피드’ ‘파티즌’처럼 싱글족을 위한 사이버 사교클럽을 운영하는 사이트들도 있다.

스포츠나 문화생활을 즐기는 데다 동지 같은 친구들까지 옆에 든든하게 버티고 있을 경우 그들은 혼자 사는 것을 은근히 즐기게 된다. 전남 나주에 사는 40대 여고 교사는 “여름방학이면 한 달씩 해외 여행을 다닌 지 10년이 다 됐다”며 “이따금씩 심하게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고 여행다니다 보면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아예 안 든다”고 했다.

싸이월드 미니홈피 같은 것을 통해 친구들과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 것에 열중하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물론 이 모든 것 이전에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건강한 싱글로 살아갈 수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국민대학교 사회학과의 김선영 교수는 독신자 증가에 대해 “현대사회를 ‘독신자 사회’라고 하는 말도 있듯이 삶의 행복을 개인적인 자아실현에서 찾게 되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다만 독신이 ‘고립’을 의미해선 안 되고 사회적인 연계망과 상호 작용을 계속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황성혜 주간조선 기자 (coby0729@chosun.com)

*본 기사 작성에는 이정은(caroline84@empal.com) 인턴기자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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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4-25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싱글로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경제력이라고 되어 있는데 결혼해서 살려면 돈이 더 필요하지 않나? 즉, 싱글이고 더블이고 간에 우짜든동 살려면 경제력은 그냥 기본이다, 기본. ㅜ.ㅡ

mannerist 2006-04-25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결혼만 하면 한쪽은 놀고 먹으면 된다는 스토리가 골수까지 박혀있는데 어쩜까. 그나저나. 84년생이 저런 기사 친 거 보니 참-_-

2006-04-25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06-04-25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정말 싱글들이 너무 부러워요

이리스 2006-04-25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너군 / 그런가? 그럼 내가 이상한건가? 흠흠..
속삭님 / 그러게 말이오.. ㅠ.ㅜ
하늘바람님 / 근데 늘 남의 떡이 더 커보이잖아요. ^^
 

반세기 영문학의 숨은 공로자를 ‘그대로 못두죠’
[헤럴드 생생뉴스 2006-04-25 08:32]

‘지하철 정거장에서’로 유명한 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유능한 편집자이기도 했다. 그가 무명시절의 제임스 조이스를 발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율리시스’를 만날 수 없을 거다. ‘황무지’의 엘리어트도 에즈라 파운드와 함께 작업했다. 에즈라 파운드의 삶 속에 당시 문학가들의 동향이 흐른다. 출판사 ‘열린책들’이 출판 편집 총서 세번째 책으로 내놓은 ‘그대로 두기’는 20세기 영국 출판계 최고의 편집자 다이애나 애실의 자서전이다. 애실이 출판 편집자로 활동한 반세기의 삶 곳곳에는 당시 손꼽히는 영미권 작가들의 예술과 인생이 그대로 박혀있다. 에즈라 파운드처럼. 게다가 당시 지성들의 성격도 살짝 공개된다.

‘달려라 토끼’의 저자 존 업다이크의 대부분 저작이 애실의 손을 거쳤다. 애실은 업다이크를 “절대 스타 행세를 하지 않았고 한 번도 우울해 한 적이 없는 완벽한 저자”라고 소개한다. 필립 로스의 처녀작이자 대표작 ‘콜럼버스여 안녕’도 애실과 합작품이다. 초기작 두 권을 내고 애실의 안드레 도이치 출판사를 떠나긴 했지만.

노먼 메일러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소개했다. 메일러의 첫 작품인 전쟁소설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는 런던의 유명 출판사 여섯 군데에서 퇴짜 맞고 애실에게까지 흘러왔다. 소설은 탁월했으나 문제는 작품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속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의 분위기는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완고한 문학담당 기자는 출간 반대 기사를 1면에 쓰고 법무장관은 출간 금지를 고려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다행히 장관이 출간을 허가해 애실과 출판사는 노먼 메일러의 이후 작품을 독점하는 성과를 거뒀다.

책 제목 ‘그대로 두기’는 편집자가 교정지에서 삭제하려 했다 되살리고 싶은 부분을 표시하는 용어다. 저자는 “축적한 경험의 일부를 고스란히 되살리려는, 즉 ‘그대로 두기’ 하려는 목적”이라고 자서전 출판의 이유를 밝혔다. 애실이 활동했을 당시엔 유명했으나 지금은 잊혀진 작가들,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지 않은 작가들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아 일반 독자에게는 이 책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전후 50년간 영미권 문학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일독할 만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다이애나 애실의 ‘50년 편집자 인생’은 넓고도 깊다.

이고운 기자(ccat@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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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4-25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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