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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육체파 소설가의 삽질 같은 글쓰기

'작가와문학사이'의 이번주 연재는 <최순덕 성령충만기>와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의 작가 이기호를 다루고 있다(성령이 충만하면 갈팡질팡하게 되는가 보다). 문단에서 몇 안되는 젊은 기대주로 꼽히는 이 '육체파 소설가'(근육맨이란 뜻이 아니라 '막노동꾼'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의 '삽질'에 한번쯤 주목해보시길(최근에 작가는 인터넷방송 DJ와 대학강의를 맡아 더욱 바빠지게, 더욱 갈팡질팡하게 되었다). 그냥 삽질로 보이는 작품들도 없지 않지만, 사실 그렇게 파다보면 또 뭐가 되기도 하는 게 이 '소설-노가다판'이기도 하니까 기대는 버려두지 마시고. 관련기사와 인터뷰도 한데 모았다...

경향신문(07. 03. 24) [작가와 문학사이](11)이기호-삽질 같은 글쓰기

'소설 쓰는 노동자’. 어느 좌담에서 이기호는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했다. 이때 ‘노동자’란 샐러리맨으로 대표되는 임금 생활자라기보다는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에 더 가깝다. 문자 그대로 ‘삽질하는 사람’이라고 할까. 아니나 다를까. 이기호의 단편소설 ‘수인(囚人)’은 삽질하는, 아니 곡괭이질하는 소설가가 등장한다. 소설에서 삽질, 아니 곡괭이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시대 소설가가 처한 곤경 혹은 광경을 잘 보여준다.

원래 ‘삽질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삽으로 땅을 파거나 흙을 파내는 일”을 말하지만, 군대용어로 전용되면서 요즘에는 대개 “엉뚱하거나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죽인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소설을 ‘전구나 라디오’ 같은 발명품과 같은 것으로, 아니 사실은 더 못한 것으로 보는 시대에 소설을 쓰는 일은 속된 말로 삽질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받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땅히 소설가라면 ‘삽질’을 거부할 것이겠지만, ‘수인’의 소설가는 자신이 소설가임을 증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삽을, 아니 곡괭이를 든다. 문자 그대로의 삽질을 하게 된 것이다. 25m의 시멘트벽을 뚫는 불가능한 ‘괜한 짓’은 그렇게 시작된다.



삽질로서의 소설쓰기. 그것은 ‘삽질하네!’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을 만큼 무용하고 비실용적인 일인 동시에, “바늘로 우물을 파는 듯한”(오르한 파무크) 고행에 가까운 힘겨운 노동이기도 하다. 원고료와 인세만으로 간신히 생활을 꾸려가면서 홀로 죽을 힘을 다해 소설을 써도, 소설가는 한심한 인간 취급을 받기 일쑤다. 그러나 언젠가 홈리스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속에서도, 아무도 자신의 소설을 읽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소설가는 삽질 같은 소설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삽질은 소설가만 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삽질을 해서, 땅을 파서 그 흙을 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지하 벙커에 갇힌 채 6개월을 지내야 했던 ‘나’는 극도의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우연히 흙을 먹는다. 그러다가 ‘나’는 흙맛에 매료되고 급기야 ‘나’에게 흙은 밥이 된다. ‘그냥 삽으로 대충 몇 번 파헤쳐도’ ‘나’는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흙만 먹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밥’을 위해 그렇게 악전고투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러나 ‘누구나 손쉽게’ 흙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흙맛을 알기 위해서는 ‘흙은 먹을 수 없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우리의 감각을 천편일률적인 것으로 만든 조미료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땅 파 먹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이기호의 소설에는 이렇게 삽질하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의 삽질은 대개 보통의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한다. 그래서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스스로를 질책하지만, 그러면서도 자학과도 같은 삽질을 멈추지 못한다. 그 삽질은 대개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나타난다. 자해공갈을 하려다가 공갈(恐喝)은 못하고 자해(自害)만 한 경우(‘당신이 잠든 밤에’), 교통표지판을 잘라 고물상에 팔려고 하다가 되려 교통표지판을 수호하게 된 경우(‘아무 의미 없어요’), 국기 게양대에 걸린 국기를 떼어서 팔려다가 국기 게양대와 이상한 사랑에 빠진 경우(‘국기 게양대 로망스’). 역시 삽질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기호는 이들을 일러 ‘이시봉’이라고 한다. 이 시봉이들은 분명 우리 사회의 낙오자들이다. 그들은 사기조차 칠 수 없을 만큼 멍청하며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는 머피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남을 탓하는 대신 자기 머리를 쥐어박는 자학을 선택한다. 물론 그들의 자학은 병리적 마조히즘도 자기 우월감의 반어적 표현도 아니다. 그런 멋 부리는 자학을 하기에 그들은 너무 우직하다. 어쩌면 그들은 그런 우직함으로 삽질을, 삽질 같은 소설쓰기를 계속하는지도 모른다.(심진경|문학평론가) 

한국일보(07. 03. 22) [길 위의 이야기] 정치적 올바름

요즘, 이곳저곳에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원래 '정치적 올바름'이란 차별적, 혐오적인 언어로 소수그룹을 모욕하는 것을 막자는 취지에서 생겨난 것이다. 한데 이 '정치적 올바름'이 근래 들어 자꾸 근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길 없다.

단 한 가지 진리만 제시될 수 있다는 믿음, 그 외에 것들은 모두 아니라는 생각. 그것이 이 '정치적 올바름'을 왜곡시키고 있는 주범이다. 그 왜곡이 가장 크게 작동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대학이다.

많은 대학의 선생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지닌 교육자로 평가받고 싶어한다. 해서, 자꾸 '정치적 올바름'외에 것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소수의 권리를 부르짖느라, 다수의 권리는 망각하는 선생들을, 나는 많이 봐왔다. 그것은 왜 그런 것인가? 그것이 오직 포즈로써의(*포즈로서의) '정치적 올바름'이기 때문이다.

실상은 그렇지 못한데, 인정욕망에 사로잡혀, 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정치적 올바름'은 오히려 독이 되고 만다. 근본적이지 못한 근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런 근본주의는 종종 폭력의 형태로 우리 사회에 되돌아오곤 한다. 거 참, 문제다. 연기들 하지 말고 살자.(소설가 이기호)

주간한국(07. 03. 20) [이신조의 '작가와 차 한 잔'] <2> 소설가 이기호

영국의 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고 한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해석을 하자면,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갈팡질팡이란 말 대신 우왕좌왕이나 우물쭈물, 오락가락이나 좌충우돌, 허둥지둥이나 전전긍긍이 들어간다 해도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인다. 아무튼 버나드 쇼란 작가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라도 이 문장을 통해 그가 작품 속에서 특기로 발휘했던 씁쓰레한 자조(自嘲)의 뉘앙스를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렇다면 묘비명이 아닌, 그 문장을 제목으로 내세운 소설책은 어떨까. 사실 갈팡질팡이든 우물쭈물이든, 좌충우돌이나 전전긍긍이란 말은 (한 작가의 일생보다는) ‘젊음’을 설명하는데 더없이 적절한 단어들이다. 물론 젊음은 싱그럽고 활기차고 아름답다는 희망과 긍정의 수식어를 우선 헌사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미 젊음을 통과해왔거나 지금 젊음을 통과하고 있는 당신이라면,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지’ 탄식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릴 것이다. 젊음에게 ‘혼돈’은 전공필수, ‘방황’은 교양필수다.

젊음은 헤매고 더듬고 망설이고 놓치고 속고 허방을 짚는다. 시행착오는 피할 길 없으며, 창피를 당하거나 헛걸음을 치기 일쑤다. 말 그대로 갈팡질팡, 우왕좌왕, 오락가락의 나날들. 만만찮은 대가를 치르며 인생을 위한 세련의 기술을 습득해가는 시절. 그러나 인생이 짐짓 서글퍼지기 십상인 것은 많은 경우 그 세련이 그럴싸한 포장, 능란한 거짓말, 어떻게든 상처나 갈등을 면해보려는 회피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소설가 이기호가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 역시 예의 ‘세련’의 문제다. 그러나 그는 애초부터 그럴싸한 포장이나 능란한 거짓말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방식임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라고 왜 번드르르한 세련의 포즈를 흉내내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결과는 무참했던 것 같다. 세련의 포즈를 취하려다 그야말로 무참하게 ‘깨지는’ 극적인 사례들을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그의 책을 펼쳐들면 된다. 그럴싸한 포장과 능란한 거짓말에 좌절한 이기호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래서 ‘정면 돌파’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기꺼이 고난의 가시밭길을 선택한 영웅이나 구도자라는 것은 또 아니다. 멋들어지게 돌파에 성공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시봉’이란 인물로 대표되는 이기호 소설의 주인공들은(이름부터가 벌써 좀 그렇다) 웬만한 소시민상(像)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안한 표현이지만 ‘지지리 궁상’에 가까운 캐릭터들이다. 그들의 정면 돌파는 대의를 위한 거창하고 폼 나는 ‘선택’이 아니라, 궁지에 몰린 나약한 자의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자 발버둥이다. 예상대로 그들은 세상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어느 때는 거의 린치를 당하는 수준이다.

소설 속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주인공의 좌충우돌에 킥킥 웃음을 터뜨리며 빠르게 책장을 넘기는 독자도 있겠지만, 멋지고 근사한 주인공을 자신의 분신으로 삼아 감정을 이입시켜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은 독자라면 고개를 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기호의 주인공들이 그런 수모를 겪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련’ 때문이다.

그들의 정면 돌파가 어쩔 수 없는 발버둥에 불과한 것이라도, 그들이 끝내 세련됨을 손에 넣을 수 없다 하더라도, 예의 이기호식(式) 정면 돌파는 당위성을 갖는다. 그것은 외면이나 도피가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삶에 대한 기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통은 솔직하고 정직하다. 애써 갑옷 같은 갑각류의 껍질을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는 것, 그러지 않았다는 것. 생살의 쓰라린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짐짓 건강하다는 뜻이다.

카페의 이름은 ‘제니스’. 좀 달콤한 것이 먹고 싶다던 그는 조언을 구한 뒤, ‘바닐라 카라멜 라떼’를 주문한다. 잠시 뒤 하트 모양의 하얀 우유거품이 떠 있는 예쁜 커피잔이 그 앞에 놓인다. 그가 웃으며 카페의 직원에게 묻는다. “와, 이런 건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어줍잖은 ‘작업 멘트’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는 커피 위에 이런저런 모양으로 우유거품을 만들어 얹은 것을 ‘라떼 아트’라고 부르는지 모르는 ‘아티스트’인 것이다. 우유거품으로 하트 모양을 내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을 그 직원을 ‘바리스타’라고 부른다는 사실 역시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뭐 어떤가. 와, 이런 건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순순히 물어보면 되는 것이다. 창피를 당할까 굳이 아는 척을 한다거나, 주눅이 들어 물어보지도 못한다거나, 그게 더 지지리 궁상이다.

두들겨 맞는 얘기에 일가견이 있는 소설가와 ‘맷집’ 얘기를 했다. 이기호는 현재 한국일보에 <길 위의 이야기>라는 짧은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세상살이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들을 이기호 특유의 유머와 기지로 풀어내고 있는데, 무척이나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는 모양이다. 재미있다는 반응도 많지만, 몇몇 민감한 사안이나 어느 특정 단체의 문제를 언급했을 때는 바로 악플이 달리거나 항의 메일을 받거나 했다. 소설이라는 픽션에 익숙해져 있는 터라 처음 써보는 칼럼이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역시 여러모로 맷집이 생기고 있다는 느낌이다. 독자의 반응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전달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게 욕이건 칭찬이건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내가 잘 쓸 수 있는 건 역시 픽션이란 것도 확실히 깨달았다.”

모든 도식화(圖式化)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분류에 의하면 이기호는 ‘글월로 세상을 계몽하는 지식인’형(形) 소설가도, ‘글로 억압과 싸우는 투사’형 소설가도, ‘문자로 예술하는 고독한 댄디’형 소설가도 아니다. 신형철은 이기호를 ‘육체파 소설가’로 명명한다. ‘막노동꾼’에 가까운 소설가란 것이다. 그 말에 동의하듯, 그는 단편집 말미 ‘작가의 말’에 “소설이 잘 써지지 않을 때마다 내가 중얼거리는 말이 있습니다. / 겁 많은 두 눈아, 겁내지 마라, 부지런한 네 두 손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라고 썼다.

이기호의 단편소설 ‘수인(囚人)’은 핵사고가 일어난 가상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세상에 재앙이 벌어진지도 모른 채 산 속에 틀어박혀 소설을 쓰고 있던 신인작가 박수영은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린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없게 된 수영은 자신이 쓴 소설책을 찾아내기 위해 폐허더미가 된 서점을 향해 이십오 미터 길이의 땅굴을 파기 시작한다. 곡괭이를 들고 자신의 책을 향해 콘크리트 벽을 내리치는 소설가의 손에는 물집이 잡히고 피가 흐른다.

곧잘 독자를 낄낄거리며 웃게 만드는 소설가 이기호는 스스로를 참 무취미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가 술에 약하다는 사실은 문단에 제법 알려져 있다. 여느 작가들처럼 마니아급의 예술적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도 음악도 여행도 그저 그렇단다. 컴퓨터 게임 삼매에 빠지는 일도 없고 흥미를 느끼는 특별한 잡기도 없다. 중독이라 할 만한 거라곤 담배와 축구중계 시청 정도. 경치 좋은 곳을 오래도록 산책하는 것, 멍하니 이런저런 공상에 잠기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들이라 말한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그의 어여쁜 아내는 “무슨 소설가가 그래요?”하며 첼로를 선물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이야 첼로 앞에 앉아 있으면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어색한 게 사실이지만 덕분에 목표가 생겼다. 환갑이 되는 날, 첼로 연주회 겸 소설 낭독회를 열고 싶다. 과거의 작품이 아니라 그때 막 새로 쓴 소설을 가지고.”

이기호와 첼로! 그럴싸한 포장과 능란한 거짓말을 익히지 못해, 흠씬 두들겨 맞으며 미련하게 곡괭이질을 해야 했던 젊은 소설가는 어찌됐든 ‘세련’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기호는 발음이 어려운 외국 영화감독의 이름이나 아방가르드 미술 사조 앞에서는 그의 주인공 ‘시봉’처럼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이지만, 귄터 그라스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책장이 나달나달해질 정도로 반복해 읽었으며 한나 아렌트와 다치바나 다카시의 글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소설가다. “내가 쓰고 싶은 얘기는 메타 픽션(소설가가 주인공인 소설)이 아니다.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아직 시작도 못했다”며 장편소설에 대한 은밀한 결의를 밝히는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더없이 진지했다. 갈팡질팡하다가 세련되어질 줄 알았다. 소설가 남편에게 첼로를 선물한 그의 어여쁜 아내는 올 5월에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 첫 장편소설에 매진하고 있는 소설가 이기호는 당연히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 정면 돌파. 그는 정직하게 글을 쓰고 정직하게 아이를 키울 것이다. 힘겹겠지만 더욱 세련되어질 그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참고로 작가와 필자의 친분관계상 대화는 이기호 소설의 그것처럼 지극히 리얼한 구어체로 진행되었으며, 곧 세상에 태어날 그의 아이는 필자의 예상대로 아들이란 점을 밝혀둔다.

07. 0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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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보르헤스 > jazz standards를 통해 풀어보는 사랑의 단상(part2)

 

외설스러움(OBSCENE)


내 사랑은 “창녀들의 요란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음란하고도 벌거벗은 제물로 만드는 황홀감에 사로잡혀 장엄하고도 악취 풍기는 사정(射精)의 끔찍한 소리를 지르며 전율하는 놀라운 감수성의 성적 기관이다.(조르쥬 바타이유)


추천하는 Jazz Standards




I've Got you under your skin


재즈의 어원이 jive와 ass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단어로 여자의 성기를 의미한다는 설이 있기도 하지만 그런 것을 접어두고서라도 이 곡만큼 외설스러운 곡이 있을까 싶다.

있다면 나에게 살짝궁 귀띔해 주시길...


추천하는 음반으로는 Diana Krall의 와 Stan getz quartets의 동명의 음반.

개인적으로 남성분들은 반드시 Diana Krall의 음반을 선택하시길. 그녀의 멋진 외모는 이 곡을 더할 나이 없이 황홀하게 만든다는 점을 반드시 참조하시길 바라며...

여성분들은 당연히 스탄 겟츠의 음반을 흐흐 녹습니다 마구


깨어남(REVEIL)


서글픈 깨어남,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다정함으로) 깨어남, 텅 빈 깨어남, 순진한 깨어남, 까닭 모를 불안한 깨어남(“그러자 갑자기 그의 불행이 생각 속에서 명백해 졌다. 사람은 고통으로는 죽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 순간에 벌써 죽어 있었을 것이다.”)


추천하는 Jazz Standards

 




Falling in love with love


열풍과도 같았던 사랑의 시기가 지나게 되면, 우리는 다시 본질을 탐구하게 된다. 내가 사랑한 것이 그/그녀 였는지 아니면 사랑 그 자체를 갈구한 것에 지나지 않았는지를 말이다.

이 곡의 가사처럼

사랑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일이요 어리석은 자의 놀음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순간의 쾌락을 위해서 혹은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어서 사랑의 감정을 잠시 빌려온 것이라면 이제 그 사랑을 서서히 잃어가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지도 모르겠지.


추천하는 음반은 Heren Merrill과 Clifford Brown의 멋진 협연이 돋보이는 을 최고의 선택으로 꼽을 수 있다. 차선으로는 Sarah vaughan의 를 연주 음반으로는 Hank Mobley가 발군의 실력을 과시한 동명의 음반을 들 수 있겠다. Bill evans의 연주 또한 상당히 매력적이고 기교 또한 흠잡을데 없지만, 그의 음악은 너무 청량하다고나 할까 왠지 이 곡에는 어울리지 않는 듯 해서 PASS! 


질투(JALOUSIE)


질투하는 사람으로 나는 네 번 괴로워한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 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


추천하는 Jazz Standards

 




My Foolish Heart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의 <위험한 열정, 질투>라는 책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파괴할 정도로 극단적인 질투를 오셀로 증후군이라 부른다. 세익스피어의 4대비극중 하나인 오셀로에서 따온 이 병명은 전체 살인 사건의 13퍼센트가 배우자 살해이며, 그 주된 원인이 질투에 있다는 것을 주목하면서 더욱 알려졌다. 지나친 질투는 대단히 파괴적이고, 비극적이지만 적절한 질투는 헌신적 관계의 특징이라는 점을 이 진화심리학자는 질투라는 감정을 통해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추천하는 음반으로는 Bill Evans trio의 가 최고의 선택이다. 재즈계의 쇼팽이라 불리는 빌 에반스의 명징하고도 청량한 피아노 터치, 드럼의 폴 모션, 비운의 천재 베이시스트였던 스콧 라파로! 이 세 명이 빚어내는 interplay는 과히 피아노 트리오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보컬 곡으로는 얼마 전 소개했던 Carol Sloane! 농후하면서도 밀도 높은 그녀의 목소리는 여성재즈보컬이 재즈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언쟁(SCENE)과 마귀(DEMON)


나는 내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이미지들(질투, 버려짐, 수치심)을 연신 떠올리면서 스스로를 자해하려 하며, 천국으로부터 추방하려 한다. 이렇게 하여 열려진 상처를, 다를 상처가 내도하여 그것을 잊어버리게 할 때까지 다른 이미지들로 양분을 주고 부양한다.


추천하는 Jazz Standards

 




Love me or Leave me


I want your love

don't want to borrow

to have it, today

give it back, tomorrow

your love is my love

there's no love for nobody else


나는 당신의 사랑을 원해요

하지만 애걸하는 사랑은 싫어요.

오늘은 갖고 놀다가

내일은 돌려주는 사랑 따윈 싫어요.

당신의 사랑은 나의 사랑

다른 누구의 사랑도 아니에요


love me or leave me

let me be lonely


날 사랑하든지 아님 떠나세요.

나를 혼자 있게 두세요.


추천하는 음반으로는 역시 사랑하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람. 바로 빌리 할리데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처음부터 husky한 것은 아니었다. 고통스럽고 굴곡 많은 삶이 그녀로 하여금 허스키하지만 보석처럼 빛나는 “빌리 할리데이”만의 목소리를 만들어 주었다. 연주 음반으로는 Miles Davis의 Walkin'이 최고의 선택일 듯. Miles Davis를 필두로 J.J. Johnson, Lucky Thompson, Dave Schildkraut, Horace Silver, Percy Heath, Kenny Clarke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막강한 라인업을 구축하여, 완벽하리만치 소름끼친 연주를 들려준다.


파국(CATASTROPHE)


내 모든 육신은 뻣뻣해지며 뒤틀린다. 날카롭고도 차가운 섬광 같은 순간에 나는 내게 선고된 파멸을 본다. 그것은 힘든 사랑의 예의 바르고도 은근한 우울증과는 무관한, 버림받은 주체의 전율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나는 울적하지 않다. 전혀 울적하지 않다. 그것은 파국처럼이나 분명한 것이다.

“난 끝장난 것이다!”


추천하는 Jazz Standards

 



I Cried For You


이 곡은 빌리 할리데이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곡이 재즈 스탠더드로써 확고한 위치를 구축하게 된 것은 빌리 할리데이가 이 곡을 여러 차례에 걸쳐 부르고, 수많은 녹음을 남겼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 곡의 추천음반으로는 빌리 할리데이의 것을 들고는 싶지는 않은 데, 그녀의 곡은 마치 차가운 서리가 잔뜩 서려 서늘한 한기마저 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 때문에 울었죠, 이번은 당신이 나를 위해 울 차례에요.” 라는 가사는 얼핏 들으면 ‘빌리 할리데이’식의  곡 해석이 분명 자연스러운 것일 테지만, 이 곡의 내면에는 단순히 버림받은 여자의 처절한 恨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뒤틀리고 어긋나버린 지나간 사랑의 후회가 아닌 한땐 너무나도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옛사랑의 노스탤지어를 이 곡은 함께 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보다는 Ella Fitzgerald의 서글프고 애절한 I Cried for you 가 내 정서에는 더욱 맞다.


별은 빛나건만(E LUCEVAN LE STELLE)


“별은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결코 그대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건망증은 내 마음을 충족시켜 주고, 또 아프게 한다.


추천하는 Jazz Standards

 




"별은 빛나건만"은 푸치니의 3대 오페라중 하나인 토스카의 주옥같은 아리아 중 백미로 뽑힌다. 아직 들어보지 않으신 분들은 한번 들어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 빅토르 데 사바타 지휘로 마리아 칼라스가 토스카로 분한 1952년도 녹음이 명반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쥬세페 디 스테파노가 부르는 “별은 빛나건만”은 헐! 천의무봉의 경지이다.


각설하고 재즈 스탠더드 곡으로 아마 Stardust만큼 이 곡에 잘 어울리는 곡이 있을까? stardust를 작곡한 호기 카마이클은 어쩌면 엘리트 코스라고 할 수 있었던 인디애나 대학의 법학과를 다니던 중에 파멸적인 성격의 재즈 뮤지션 빅스 바이더벡을 만나 의기투합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자신도 본격적인 재즈 뮤지션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 낭만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가 결혼이 허가되지 않던 학생 시절 연인의 모습을 보고 하늘의 별을 보며 흥얼거리던 멜로디가 그대로 stardust가 되었던 것이다.


추천하는 음반으로는 다. 우리의 사랑은 처음 무렵에는 입맞춤 하나하나가 영감이었지만,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이고 지금 나의 위안은 노래의 별똥 속에 있다라는 내용의 가사처럼 이 곡의 매력은 씁쓸하면서도 은은한 여운을 얼마나 오랫동안 잡아주느냐가 관건인데 두 음반 모두 테크닉과 감성 어느 면으로도 절정의 경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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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보르헤스 > jazz standards를 통해 풀어보는 사랑의 단상(part1)

 

이 Paper는 얼마 전 퍼니핑크님과 주고 받았던 리플이 그 시금석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재즈를 공시적, 통시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나의 일천한 지식이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절대 무리인 듯 싶고,

아주 좁은 범위의 경험에만 한정한다면 “아마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분명 낙서 수준의 글이 될 것임에는 분명한 일지만...


사랑에 대한 담론을 주제로 삼되, 텍스트는 롤랑 바르트(Rorand Barthes)의 <사랑의 단상:Fragment d'un discours amoureux>만을 참조하는 바이다.


황홀(RAVISSEMENT)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최면이다. 나는 한 이미지에 매혹된다.

마치 소크라테스에 의해 메논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흔들리고, 충전되고, 얼떨떨해지고, 뒤집히고, 마비된다. (키르허)


누군가 사랑하기로 결심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놀라게 된다.

 마치 카탈로니아 총독의 궁전에서 플로리다를 만난 아마두르가 “그녀를 오랫동안 쳐다본 후, 마침내 그녀를 사랑하기로 결심했던 것처럼.” 뭐라고요? 나는 내가 미치광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심의하고 결정해야 한단 말인가요(그렇다면 사랑은 내가 원하는 그 광기인가요?)


추천하는 Jazz Standards




Fever: 페기 리(Peggy lee)에 의해 1958년에 처음 취입된 곡으로  데이븐 포트에 의해 작사된 가사가 너무나도 재미있다. 가사의 한 부분을 발췌해서 실어보면


Everybody's got the fever, that is something you all know

모든 사람은 누구나 한번씩은 열병에 걸리지


Fever isn't such a new thing, fever started long ago.

열병은 새로운 것은 아니야, 열병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지.


Romeo loved Juliet, Juliet she felt the same

로미오가 줄리엣을 사랑했을 때, 줄리엣은 그 열병이란 것을 앓았지


When he put his arms around her, he said "Julie baby you're my flame

로미오가 그녀를 안았을 때, 그는 “줄리엣, 당신은 나의 열정적인 사랑”이라고 말했다네.


최근엔 Michael Buble에 의해 다시 불리워지긴 했지만(Michael Buble/WEA), 그의 느끼한 음색을 무지 싫어하는 나로서는 그다지 추천하고 싶진 않은 음반이다. 차라리 다이아나 로스의 Lady Sing The Blues를 한 번 들어보시길...


예속(DEPENDANCE)


사랑의 예속 관계란 역학은 아무 근거도 없는 하찮은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순수 상태에서의 예속이란 지극히 가소로운 상황에서 터트려져야 하며, 또 소심증으로 고백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화를 기다린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투박한 예속이다.


추천하는 Jazz Standards




I Don't Know Why (I just do)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름으로써 비로소 Jazz Standards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된 스윙감이 찰찰 넘치는 매력적인 곡이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고, 내가 왜 이러는지도 알 수 없다.’라는 사랑에 빠진 귀여운 철부지 소녀의 고백과도 같은 가사가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음반으로는 역시 시나트라의 중후하고도 호소력있는 목소리가 매력인 “The Voice" 음반!

차선이라면 Nat king cole의 베스트 음반이랄까...


광인(FOU)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미쳤거나 미쳐가고 있다는 생각에 자주 사로잡힌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미친 사람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광인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다만 초라한, 불완전한, 은유적인 광기만을 가질 권리가 있다.


추천하는 Jazz Standards


Crazy she calls me



100년에 이르는 재즈사에서 사랑하면 빼놓을 수 없는 아티스트들이 누가 있을까?

 

우선 빌리 할리데이를 빼놓을 수 없겠고, (바람을 피우고는 뻔뻔스레 변명을 늘어놓는 남편 지미 몬로에게 Don't explain이라는 멋진 명곡을 선사한) 순애보로 잘 알려진 클리포드 브라운(임신한 아내를 보기위해 무리하여 빗길을 운전하다, 절벽에 추락해 사망한),그리고 비장의 무기인 Mute Trumpet으로 수많은 여성의 애간장을 무참하게 녹여버린 쳇 베이커를 들 수 있겠다.

 

이 세 사람 모두 이 곡을 부르거나 혹은 연주했으니까 취향에 맞게 아무나 한 명 골라서 들어보면 ‘당신이 사랑에 빠져 미쳐있다.’라는 사실이 그다지 부끄럽게 여겨지지는 않을 듯하다. 정말 사랑에 빠져 미치는 것은 어찌 보면 매 계절마다 스쳐지나가는 독감과도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나의 첫번째 선택으로 쳇 베이커의 Baker's Holiday 를 선정한 이유는 쳇 베이커가 빌리데이에게 헌정하는 의미로 취입한 음반이라서 더 애정이 간다라는 단순하기 그지 없는 이유로..


난 널 사랑해(JE-T-AIME)


수없이 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난 널 사랑해”는 사전 밖에 있다.

그것은 그 정의가 명칭을 초과할 수 없는 그런 말이다.


추천하는 Jazz Standards

 



Love Letters


이 곡을 듣고 있노라면 항상 영화 Blue Velvet이 떠오른다. 블루벨벳은 <무방비 도시 open city>와 <전화의 저편 Paisan>으로 일약 네오리얼리즘 거장으로 떠오른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당대 최고의 탑스타였던 잉그리드 버그만(그녀는 당시 아이를 둔 유부녀였다)과의 광풍과도 같았던 열정의 결과로 태어난 “미녀” 이사벨라 로셀리니의 고혹적 매력이 잘 드러난 영화로 Love Letters는 블루벨벳에 실린 OST중 한 곡이었다.


가사를 잠시 살펴보면


Love letters straight from your heart

Keep us so near while apart

I'm not alone in the night

when I can have all the love you write


당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에게 바로 배달되어온 사랑의 편지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당신을 가깝게 느끼게 해준답니다.

편지에 쓰인 당신의 사랑을 느낄 때

전 한 밤에도 더 이상 고독하지 않답니다.


I memorize ev'ry line

I kiss the name that you sign

and darling

then I read again night from the start

love letters straight from your heart


난 편지에 쓰인 모든 문장들을 다 외우고

당신이 사인해 놓은 그 이름에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내 사랑

나는 다시 처음부터 그 편지를 다시 읽기 시작해요

당신의 마음으로부터 바로 배달되어온 그 사랑의 편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애편지 한 번 써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분명 그 사람의 사랑은 무언가가 비틀어지고 상실되어 있을 것이다. 난 그렇게 확신하는 바이다.


충족(COMBLEMENT)


... 그리하여 마침내 “욕망이 엿보게 했던 가능성을 쾌락이 초월하는 그런 상태를 알게 된다.” 그것은 기적이다. 모든 만족감을 뒤로 한 채, 과음이나 포식도 하지 않은 채 나는 포만의 한계를 넘어서서, 역겨움, 구역질, 취기 대신에 일치(coincidence)를 발견하게 된다....


추천하는 Jazz Standards

 



Fly Me To The Moon


바트 호와트에 의해 1954년에 의해 처음 작곡될 당시에는 <in other words>라는 다소 생뚱맞은 곡목으로 인해 그리 큰 빛을 발하진 못했던 곡이었다. 하지만 조 하넬이 지금의 곡명으로 제목을 바꿔단 이후 이 곡은 재즈 스탠더드의 불멸의 명곡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너무나도 많은 뮤지션들이 이 곡을 다투어 부름으로써 또 그 만큼의 좋은 버전들이 무수히 많이 있다. 기억나는 명 버전으로는 줄리 런던, 치에 아야도, 사라 본, 다이아나 크롤 등등.. (그러고 보니 다들 여성 보컬들 곡뿐이군.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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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 공식

똑똑한 남자 + 똑똑한 여자 = 낭만

Hombre inteligente + mujer inteligente = Romance

똑똑한 남자 + 멍청한 여자 = 모험

Hombre inteligente + mujer tonta = Aventura

멍청한 남자 + 똑똑한 여자 = 결혼

Hombre tonto + mujer inteligente = Matrimonio

멍청한 남자 + 멍청한 여자 = 임신

Hombre tonto + mujer tonta = Embarazo

2. 비즈니스 공식

똑똑한 사장 + 똑똑한 직원 = 이익창출

Jefe inteligente + empleado inteligente = Beneficio

똑똑한 사장 + 멍청한 직원 = 제품생산

Jefe inteligente + empleado tonto = Produccion

멍청한 사장 + 똑똑한 직원 = 직급승진

Jefe tonto + empleado inteligente = Ascenso

멍청한 사장 + 멍청한 직원 = 추가근무

Jefe tonto + empleado tonto = Horas Extras

3. 쇼핑 공식

남자 : 필요한 물건 하나당 $2.83 지불

Un hombre pagara $2,83; por un objeto de $1,83; que necesita.

여자 : 필요 없는 물건 하나당 $1.83 지불

Una mujer pagara $1,83; por un objeto de $2,83; que no necesita.

4. 일반 남녀 방정식과 통계

여자는, 남편을 만날 때까지 미래에 대해 걱정한다.

Una mujer se preocupa por el futuro hasta que encuentra marido.

남자는, 아내를 만날 때까지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Un hombre nunca se preocupa por el futuro hasta que encuentra mujer.

성공한 남자는, 자신의 아내가 지출하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남자이다.

Un triunfador es un hombre que hace mas dinero de lo que puede gastar su mujer.

성공한 여자는, 그 성공한 남자를 만나는 여자이다.

Una triunfadora es la mujer que encuentra a ese hombre.

5. 행복 공식

한 남자와 행복해지려면, 그를 많이 이해하되 조금만 사랑하면 된다.

Para ser feliz con un hombre, tienes que entenderlo mucho y quererlo un poquito.

한 여자와 행복해지려면, 그녀를 아주 많이 사랑하되 그녀를 이해해보려 노력해선 안 된다.

Para ser feliz con una mujer, tienes que quererla un monton y no intentar entenderla.

6. 장수 공식

결혼한 남자들은 안한 남자들보다 장수하지만, 그들보다 훨씬 죽을 준비가 잘 되어있다.

Los hombres casados viven mas que los solteros, pero estan mucho mas dispuestos a morir.

7. 성향과 변화의 공식

여자 : 자신이 변화시키고 싶은 남자와 결혼하지만, 결국 남자는 변하지 않는다.

Una mujer se casa con un hombre esperando que cambie, pero no lo hace.

남자 :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여자와 결혼하지만, 결국 여자는 변하고 만다.

Un hombre se casa con una mujer esperando que no cambie, pero si lo hace.

 작성, 파비오 (FABIO)

출처, 스페인자료실 http://cafe.daum.net/schoolspain, 게시판 스페인어만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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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10-09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퍼갈게... 꾹.

라주미힌 2006-10-10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머가 블랙인데요. :-)

멍청한 남자 + 멍청한 여자 = 임신
큭...
 
 전출처 : 페일레스 > 나희덕과 백석의 '아버지'

못 위의 잠

나희덕羅喜德

나희덕 -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나는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 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 나희덕,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작과비평사, 1994



고향故鄕

백석白石

백석 지음, 이숭원 주해 - 원본 백석 시집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어누어서
어늬아츰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같은 상을하고 관공關公의수염을 들이워서
먼녯적 어늬나라 신선같은데
새끼손톱 길게도은 손을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집드니
문득물어 고향故鄕이 어데냐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곧이라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ㄹ 아느냐한즉
의원은 빙긋이 우슴을 띄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쓰+ㄹ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이라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즛이 웃고
말없이 팔을잡어 맥을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삼천리문학』2호(1938. 4.)에 발표.
- 1. 상을하고 - 모습을 하고. 2. 關公 - 관우. 3. 길게도은 - 길게 돋은. 4. 쓰+ㄹㄴ다 - '쓴다'의 뜻에 해당하는 백석의 독특한 시어.

- 백석 지음, 이숭원 주해, 『원본 백석 시집』, 깊은샘, 2006, 142-143.



  이숭원 교수의 『원본 백석 시집』을 드디어 며칠 전에 샀습니다. 영인본처럼 돼 있는 것도 좋고 주해도 잘 되어 있어서 좋은데 차례가 엉망이더군요. 「수라修羅」라는 시를 찾는데 차례에 적힌 쪽을 찾아보니 안 나옵니다. 이상해서 차례를 다시 보니 그 앞의 시 「여승女僧」이 86쪽이고 「수라」는 68쪽이지 뭡니까. 아놔……. 이렇게 쪽수가 틀린 부분이 아홉 군데. 105편의 시가 실린 시집에서 아홉 군데라니요. 시집 『사슴』에 실린 '힌밤'이란 시는 아예 목차에서 누락돼 있더군요. 힘들게 원본을 찾고 책으로 펴낸 저자의 노고는 인정하지만 이왕 하는 김에 마무리까지 깔끔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국어 과외를 하러 갔다가 문제집에서 나희덕 시인의 「못 위의 잠」을 읽었습니다. 이제 1990년대에 출판된 시도 수능 문제집에 등장하는 시대가 온 것이죠. 놀랍지 않습니까? 흐흐. "제비의 원관념이 아버지란 거 알겠지? 그래~서! 주제는 '아버지의 고단한 삶에 대해 느끼는 연민의 정'이라는 거~" 따위 말하고 있는 제 자신이 슬퍼졌습니다만. 아무튼, 이 시를 읽고 나니 백석 시집에 실려 있는 「고향」이라는 시가 생각나서 같이 한 번 올려봅니다. 1990년대 후반에 수능 공부하신 분들은 책보다 문제집에서 백석 시인의 시를 더 많이 접해봐서 좀 뜨악할 수도 있겠지만. 흐흐.

  「못 위의 잠」의 화자는 못 위에서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보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더 바라보던',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고향」의 화자는 '여래 같은 상을 하고 관공의 수염을 드리'운 의원, 즉 아버지의 친구를 통해서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죠. 한 사람은 딸이고 한 사람은 아들이지만, 어느 집의 자식이든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애증이 섞여 있겠죠. 친구랑 며칠만 같이 지내도 좋은 맘 미운 맘이 오락가락하는데 하물여 한솥밥을 먹는 아버지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저 역시 그런 감정을 갖고 있죠. '애'보다는 '증'에 가깝지만. 하하.
  그런데 요즘은 그런 감정도 가끔씩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바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제가 '북관에 혼자 앓아누워' 있는 상황이라면 백석 시인 편을 들었겠지만, 아직은 제 마음이 나희덕 시인에 가까운가 봅니다. 말하자면, 그 때는 몰랐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다고 할까요…….

  나희덕 시인에 대해서 찾아보면서 생각한 걸 몇 마디 적어볼까요.
  그의 성장기는 '고아원'이란 말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먼 친척이 운영하던 고아원에서 태어난 그는 열 살 때 서울로 올라와서도 고아원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부모가 있는 아이인데도, 부모가 없는 아이들과 함께 자랐죠. 이런 공동체 성향과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종교적 분위기, 거기에 운동권 체험. 이런 것들이 나희덕 시인의 문학세계를 구성하는 요소가 아닐까 싶네요. 한 단어로 줄이자면 그 모든 '슬픔'들.
  그가 어느 글(한국일보에서 연재한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에서 밝힌 것처럼 그의 '시의 팔 할은 슬픔이나 연민의 공명(共鳴)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시는 '내 안의 슬픔이 다른 슬픔과 만나 서로 스미고 어루만질 때 흘러나오는 언어. 또는 존재와 존재가 서로 삐걱거리고 뒤척이며 내는 소리들'을 받아적은 것이고, '눈물을 다스리는 힘이 없이는 슬픔을 제대로 노래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못 위의 잠」에서 '눈물'을 똑 떨구는 게 아니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보는 것도 그래서겠죠.
  저는 나희덕 시인이 그의 소원대로 '저 실핏줄들이 모여 언젠가는 슬픔의 강물 하나 만들어낼 수 있기를. 넓게 흐를수록 더 깊이 숨어서 우는 건천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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