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조사도 마찬가지다. 소비자들은 자신의 동기를 잘 알면서도 진짜 동기를 말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다원적 무지에 의해 다른 사람의 동기가 자기 것보다 고상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많은 소비자 조사가 "왜?"를 묻기보다는 무엇을 사는지를 묻는 데에 그침으로써 마케팅 실패를 자초하는 경향이 있다. - P212

미국에서 오케스트라 단원을 뽑는 오디션을 할 때 커튼을 쳐서 연주자의 성별을 알 수 없게 한 후에 여성 단원들이 늘었다. 이에 대해 글래드웰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편견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편견 속에서 많은 판단을 하지요. 눈에 보이는 것에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요. 만일 제가 눈부시게 잘생긴 남자라면 당신 생각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요? 저는 취업 인터뷰도 편견이 횡행하는 장소라고 생각해요. 성별 · 인종 · 민족 등이 불필요한 편견을 유발하는데, 그것을 막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보호 장치를 만들어야 해요. 요즘 미국에선 뚱뚱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큰 문제지요." - P217

0.1초도 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008년 미국 터프츠대학 심리학과의 날리니 앰바디 교수팀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사람들의 사진을 보여주고 사진 속 사람이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를 가려내는 실험을 한 결과, 참가자들은 0.05초라는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 실제 그 사람의 성적 취향을 가려낼 수 있었다고 한다. - P219

"먼저 교사나 직장 상사는 학생이나 부하 직원에게 칭찬보다는 처벌을 가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기 쉽다. 가장 좋은 시험 성적을 올린 학생은 칭찬을 받고, 성적이 가장 나쁜 학생은 처벌을 받는다. 그다음 시험에서는 추측하건대 다른 학생들이 성적에서 가장 높은 등수를 차지하거나 가장 낮은 등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 교사들은 처벌은 약이 되고 칭찬은 해가 된다는 터무니없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다 평균 회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라거나 "비 오는 날이 있으면 해 뜨는 날도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언젠간 평균으로 회귀할 것들에 대해 성급하게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조언이 아니겠는가. - P236

허수아비 논법은 논쟁에서 상대방을 공격하기 쉬운 가공의 인물로, 또는 상대방의 주장을 약점이 많은 주장으로 슬쩍 바꿔놓은 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허수아비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수법이다. 그렇게 하고선 상대방의 주장이 무너진 것처럼 기정사실화하는 선전을 한다. 예컨대 "어린이가 혼자 길가에 나다니게 하면 안 된다"라는 주장에 대해 "그렇다면 아이를 하루 종일 집 안에 가둬 두란 말이냐"고 받아치는 것도 일종의 허수아비 논법이다.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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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린스키는 1971년에 출간한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에서 "문제가 극단적으로 나뉘어야만 사람들은 행동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100퍼센트 천사의 편에 있으며 그 반대는 100퍼센트 악마의 편에 있다고 확신할 때 행동할 것이다. 조직가는 문제들이 이 정도로 양극화되기 전까지는 어떤 행동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조직가라면 자신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한 부분은 행동의 장에 있으며, 그는 문제를 100대 0으로 양분해서 자신의 힘을 투쟁에 쏟아붓도록 힘을 보탠다. 한편 그의 다른 부분은 협상의 시간이 되면 이는 사실상 단지 10퍼센트의 차이일 뿐이라고 하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런데 양분된 두 부분은 서로 어려움 없이 공존해야만 한다. 잘 체계화된 사람만이 스스로 분열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로 뭉쳐서 살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조긱가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에 알린스키를 가장 먼저 소개한 아시아교육역구원 원장 오재식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가슴에 와 닿는다.
"종교적 차원에서 보면 사람은 다 엇비슷하다. 나빠봐야 51퍼센트 정도일 것이다. 반대로 좋아봐야 역시 51퍼센트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전략적 차원에서 상대와 싸움이 벌어졌을 때는 상대가 100퍼센트 나쁘고 내가 100퍼센트 좋아야 이기는 것이다. 이것을 종교화하고 신념화해야만 전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략적 상황이 끝나고 여러 가치와 기준들이 제자리를 잡아야 하는 때에도 자신의 전투 행위를 설명할 때는 여전히 전략에 사로잡힌 종교를 내세워야 하는 것이 관행이다. 여기에 알린스키가 말하는 혁명적인 사고와 자세 변화가 요구되는 대목이 있다. 100퍼센트 나빴던 사람을 51퍼센트로 복원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지배했던 이념 체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 P73

개그맨 이경규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나는 진보수다"라고 했다. ‘진보‘와 ‘보수‘를 합친 ‘진보수‘라는 뜻이다. 개그맨 김제동은 "진보가 뭐고 보수가 뭔지 모른다"며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기분파다"라고 말했다. 소설가 이외수는 "좌파냐 우파냐 굳이 묻는다면 난 ‘내 멋대로 살고파‘다"라고 했다. 개그로 가볍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보자면 이 세 사람의 편 가르기 조롱이야말로 시대를 앞서가는, 우리가 취해야 할 진정한 시대정신은 아닐까? - P79

실천적 좌파 지식인인 사르트르는 서구 자본주의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왜 소련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느냐는 질문에 자신의 원칙은 ‘지금, 여기now and here‘이어야 하는바, 자신의 삶의 현장이 바로 자본주의사회이기 때문에 이의 문제들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소련에 대한 비판은 자신이 아니어도 넘쳐나는 데다가 자신까지 소련을 비판하면 그것이 "따라서 자본주의가 그래도 나은 것"이라는 식으로 현실을 정당화하고 현실 문제를 외면하는 데 악용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 P89

앞서 안철수와 관련해 "이과 모범생"이라는 말도 나왔지만, 좋은 의미로 쓴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모범생이었건 아니었건 이과 출신 대통령이 탄생하는 건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지지자들이 한결같이 내세우는 박근혜의 장점 가운데 하나가 ‘이과 출신‘이라는 것인데, 웃어넘길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이 주장이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53년 전 영국의 작가이자 과학자였던 C. P. 스노우는 인문 · 사회과학을 전공한 사람과 자연과학을 전공한 사람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의사소통하지 못하는 문제가 현대 서구 문명의 중대한 장애물이자 심각한 위협이라고 우려했다. 그런 ‘두 문화‘의 폐해는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이과‘ 편 가르기를 하는 한국에서 양상을 달리해 나타나고 있다.
아는 분은 잘 알겠지만, 지금 한국 고등학교에서 ‘문과-이과‘ 구분이 낳는 폐해는 매우 심각해 구분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 문제를 극복해보겠다고 ‘융합‘을 외치곤 있지만, 그 수준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과 출신과 이과 출신은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지만, 이야기를 깊이 들어가보라. 정말 소통이 잘 안된다. 정치나 이념 문제일 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더욱 큰 문제는 문과 · 이과 모두 일방적이고 편향적인 시각에 길들어 각각 그 내부에서도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문과 출신들이 훨씬 더 심각하다.
그동안 한국 정치는 사실상 문과 출신들이 지배해왔는데, 이게 불필요한 이념 투쟁을 격렬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게 내 판단이다. 야권에서 누군가가 ‘실용주의‘좀 하자고 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변절‘이라고 공격하는 것도 그 벌떼 속에 문과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중국이 이론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경제향우 정치향좌經濟向右 政治向左‘ 실용주의 노선을 관철시켜 미국을 능가하는 경제 대국으로 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도 거의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이과 출신이었기 때문이란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 P91

셋째, 장덕진이 유권자들의 가치관을 물질주의와 탈물질주의로 나눈 것에도 함정이 있는 듯하다. 소득이 낮을수록 물질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반면, 이미 물질이 충족된 사람들은 "인권, 민주주의, 언론, 자유, 환경 등을 중시하는 가치관"에 관심이 있는 여유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강남 좌파층이 두터워지는 이유기도 하다. 역설 같지만, 날이 갈수록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돼가고 있는 가운데 실업과 비정규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겐 물질주의야말로 참된 진보적 가치가 아닐까?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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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토론이라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합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해서 다른 사람과 접근하든가 설득하든가 하는 과정이 이뤄져야 하는 것인데,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은 ‘카타르시스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 같습니다. 설득을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생각을 일방적으로 주장만 하면 되는 일종의 ‘배설 커뮤니케이션‘인 겁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커뮤니케이션밖에 없는 거죠. 그 서클 안에서는 카타르시스가 있어요. 지지도도 오르고. 우리 정치 문화가 그래요. 지역주의에 기반을 두고는 자연히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 P56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은 ‘카타르시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손석희의 주장이 반갑다. 나 역시 평소 한국의 언론과 대중매체는 ‘카타르시스 산업‘이라는 주장을 해왔기 때문이다. 대중의 한을 달래주고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는 카타르시스 기능에 관한 한 한국 대중매체는 박수를 받을 만하지만 그늘도 있다. 정상적인 공론장 형성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대화와 타협의 문화를 위축시킨다는 뜻이다. 그 어느 일방의 속을 후련하게 해주는 대화와 타협은 원초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손석희의 고민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 P57

내가 대신 답을 해준다면, 정치 입문에 대한 질문 자체가 우문이다. 지승호가 질문에서 지적한 ‘정치를 우위에 놓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넘어서 대부분의 한국인이 어떤 분야에 종사하건 그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뒤엔 정치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식의 최종 목표쯤으로 생각하는 정치 지상주의에 만연되어 있는 풍토 자체가 짜증이 나는 거다.
나는 이런 풍토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정치 개혁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왜 자원봉사 활동을 하지 않으세요?" 라고 묻진 않는다. 왜? 그건 ‘출세‘가 아니니까. 그런데 정치는 출세로 생각한다. 정치가 출세로 통용되는 세상에서 무슨 개혁이 가능하겠는가 말이다. - P61

2005년 1월 8일 손석희는 <시선집중>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전 지도층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민주사회에서 지도층은 없으니까요." 좋은 말이다. 나는 손석희가 정치 입문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차라리 이 답을 내놓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문서답이 결코 아니다. 정치 입문에 대한 질문은 "이젠 이만큼 성공했으니 지도층이라는 위치에 오를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아주 몹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말이다. - P65

"손석희는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이다. 그의 멘트는 목표물을 향해 공중에서 일직선으로 내리 꽂히는 매를 연상시킨다. 그만큼 간략하고 정확하다. ‘말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 중 손석희처럼 언어의 절제미를 보여주는 사람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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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되는 사회에서는 모든 주체가 스스로를 광고의 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것이 전시가치로 측정된다. 전시되는 사회는 포르노적 사회이다. 모든 것이 겉으로 나오고, 벗겨지고, 노출된다. 과도한 전시의 결과로 모든 것이 "어떤 비밀도 없이 즉각적인 소비에 내맡겨진" 상품으로 전락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모든 것을 전시의 강제 아래 복속시킨다. 오직 전시적 연출만이 가치를 생성한다. 사물의 고유한 형태는 폐기된다. 사물들은 어둠 속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조명 속으로 사라진다. "일반적으로 볼 때, 가시적인 사물들은 어둠이나 침묵 속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가시적인 것보다 더 가시적인 것, 즉 외설적인 것 속에서 휘발되어버린다." - P32

전시가치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외양에 달려 있다. 그래서 전시의 강제는 성형수술과 피트니스클럽에 대한 강박을 낳는다. 성형수술의 목표는 전시가치의 극대화에 있다. 오늘날에는 내적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외적인 척도를 제공하는 자가 모범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폭력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러한 척도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전시의 명령은 가시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절대화를 초래한다. 비가시적인 것은 전시가치, 주의를 생산하지 못하는 까닭에 존재하지조차 않는 것이 된다. - P34

투명사회는 쾌락에 대해 적대적인 사회이다. 인간적 쾌락의 경제 내부에서 쾌락과 투명성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리비도의 경제는 투명성을 알지 못한다. 비밀과 베일과 은폐와 같은 부정적 요소야말로 욕망을 자극하고 쾌락을 강화한다. 그래서 유혹자는 가면과 환상, 가상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투명성의 강제는 쾌락의 놀이 공간을 파괴한다. 명백성은 유혹 대신 절차만을 허용한다. 하지만 유혹자는 돌아가는 길, 갈라진 길, 미로처럼 꼬인 길을 걸어간다. 그는 다의적인 기호를 동원한다. "유혹은 흔히 다의적 약호에 의존한다. 이 때문에 서양 문화에서 원형적인 유혹자들은 특정한 의미의 비도덕성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유혹자들은 다의적인 언어를 구사하는데, 이는 그들이 진지함과 대칭성의 규범에 대해 아무런 구속력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실천 양식은 투명성을 요구하고 다의성의 포기를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한 한 최대의 계약적 자유와 평등을 확보하고, 유혹의 수사적, 감정적 후광을 무력화하려는 것이다." 다의성과 양가성, 비밀과 수수께끼의 유희는 에로틱한 긴장을 고조시킨다. 투명성과 명백성은 에로스의 종언을 초래할 것이다. 즉 포르노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투명사회가 동시에 포르노사회이기도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투명성의 이름으로 무제한의 상호 폭로전을 부추기는 ‘포스트프라이버시‘의 관행 역시 쾌락에 대해서는 오직 파괴적 작용만 할 뿐이다. - P38

리비도 경제는 권력경제적 논리를 따른다. 왜 인간에게는 권력을 행사하려는 성향이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푸코는 쾌락경제에 관한 언급으로 답하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자유로울수록 다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서 오는 쾌락은 그만큼 더 크다는 것이다. 이때 게임이 더 불확실해질수록, 그리고 타인의 행동을 조종하는 게임의 방식이 더 다채로워질수록 쾌락도 그만큼 더 증대된다. 전략 게임에서 불투명성과 예측 불가능성은 대단히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권력도 하나의 전략 게임이다. 그래서 권력은 열린 공간에서 작용한다. "권력이란 전략 게임이다. 사람들은 권력이 악이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성적 관계나 연애 관계를 예로 들어보자. 사태가 정반대로 뒤집힐 수 있는 일종의 불확실한 전략 게임 속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과 정열과 성적 쾌락의 일부이다." - P43

계략은 정언명령에 의해 이끌린 행동보다 더 효과적이고 덜 폭력적이다. 그래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계략은 폭력보다 더 낫다." 계략은 주변을 둘러보고 그때그때 상황 속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점에서 더 유연하고 더 많은 융통성을 발휘한다. 계략은 정언명령보다 더 잘 본다. 반면 정언명령은 경직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 투명하다. 폭력은 계략보다 진리에 더 가깝다. 그리하여 폭력은 더 큰 ‘명백성‘을 낳는다. 니체는 여기서 완벽한 조명과 통제의 사회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보다 자유로운 삶의 형식을 옹호한다. 그것은 대칭성과 동등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계약 사상이나 교환 경제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도 자유롭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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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소통에는 시선과 음성이 매우 부족하다. 연결과 네트워크는 시선과 음성 없이 이루어진다. 이 점에서 연결과 네트워크는 음성과 시선을 필요로 하는 관계나 만남과 다르다. 실로 관계와 만남은 음성과 시선의 특별한 경험들이다. 그것들은 몸의 경험들이다.
디지털 메체는 탈육체화하는 작용을 한다. 디지털 매체는 음성으로부터 거칢을, 육체성을, 나아가 공동과 근육, 점막, 연골의 심층을 빼앗는다. 음성은 매끄러워진다. 음성은 의미를 위해 투명해지고, 완전히 기의로 변한다. 이 매끄럽고, 육체가 없고, 투명한 음성은 유혹하지 않고, 아무런 육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유혹을 낳는 것은 기의로 환원될 수 없는 기표의 과잉이다.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아무 정보도 전달해주지 않는 그 음성은 "기표들의 육욕"을 가능하게 한다. 유혹은 기표가 기의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유통되는 공간에서 일어난다. 명료한 기의는 유혹하지 않는다. 의미 위에 펼쳐지는 피부가 육욕의 장소다. 또한 단순히 가려지고 은폐된, 덮개를 벗겨 모습을 폭로해야 할 기의가 아니라, 기의로는 풀어낼 수 없는 기표의 잉여가 비밀이다. 이 기표는 폭로할 수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덮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 P90

아도르노는 "세상에 대한 낯섦"을 예술의 한 계기로 본다. 세상을 낯선 것으로 지각하지 않는 자는 세상을 전혀 지각하지 않는다. 음전압, 즉 부정적 긴장은 예술에 본질적이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편안함의 예술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낯섦은 철학의 계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정신 자체에 내재한다. 따라서 정신은 본질적으로 비판이다. - P93

‘좋아요‘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것이 된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주관적 정신과 다른 것을 확정적인 네트워크로 빈틈없이 뒤덮을수록, 인간은 저 타자에 대한 경이의 습관을 버리게 되고, 익숙함의 증가와 함께 낯선 것을 잃어버린다. 예술은 미약하게, 금방 지쳐버리는 몸짓처럼, 이를 보상하려고 애쓴다. 선험적으로 예술은 인간을 경이로 이끈다. [……]." 오늘날 세상은 주관적 정신 외에는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는 디지털 네트워크로 뒤덮인다. 그 결과 낯선 것, 다른 것의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 익숙한 시각 공간이 생겨났다. 이 디지털 반향공간에서 주관적 정신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만날 뿐이다. 말하자면 주관적 정신은 자신의 망막으로 세계를 뒤덮은 것이다. - P93

예술은 수수께끼의 특징을 갖고 있다. "예술은 수수께끼의 성질을 통해 행동 객체의 의심할 여지 없는 현존에 가장 단호하게 대립한다. 결국 예술의 고유한 수수께끼는 이 수수께끼의 성질 속에서 지속된다." 행동 객체는 경이의 능력을 상실한 행동 주체의 생산물이다. "폭력 없는 관찰"과 "거리의 가까움," 나아가 멂의 가까움만이 사물들을 행동 주체의 강제로부터 해방시킨다. 아름다움은 오래 지속되는 관조적 시선에만 자신을 드러낸다. 행동 주체가 뒤로 물러날 때, 객체를 향한 주체의 맹목적인 충동이 꺾일 때, 그럴 때만 사물들은 그 다름을, 그 수수께끼의 성질을, 그 낯섦과 비밀을 돌려받는다. - P94

예술은 자기초월을 전제한다. 예술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자신을 망각한다. 예술은 "나에 대한 멂"을 만들어낸다. 자신을 망각한 채 예술은 섬뜩한 것, 낯선 것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나의 의문에 불과하지만, 문학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망각한 자아와 함께 저 섬뜩한 것, 낯선 것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지상에서 시적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안락한 디지털 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이름이 없거나 자신을 망각하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에고가 거주하는 디지털 네트워크는 모든 낯선 것, 모든 섬뜩한 것을 잃어버렸다. 디지털 질서는 시적이지 않다. 우리는 같은 것의 수적인 디지털 공간 속을 돌아다닌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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