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그라피 - 텔레비전에 관하여 현대사상의 모험 30
자크 데리다. 베르나르 스티글러 지음, 김재희 외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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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인공적 현재성'은 데리다의 말, 2부 '텔레비전에 대한 탐색'은 데리다와 스티글레르의 대담, 3부 '구분되는 이미지'는 다시 스티글레르의 말로 이루어져 있다. 입문서라 하는데도 프랑스 특유의 사변적인 말투에다 철학적 조어까지 난무하여 전혀 입문서 같지 않다. 제대로 읽었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투박한 수준의 정리라도 안 해놓으면 머릿속에서 완전히 휘발해버릴 것 같아 이렇게라도 남겨놓는다. 이 책은 민음사에서 나온 <현대사상의 모험> 시리즈 중에 한 권인데 현대사상의 '모험'이라니, 이 얼마나 설레고도 멋진 총서 제목인가. 비록 어마무시한 책들로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숲에 들어가 몇 십년 헤매어 보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모험일 테니 다시 생각해도 참 잘 지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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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는 원격기술을 사용하는 언론 매체 장치에 의해 매개된, 즉 계산되고 제약되며 양식화되고 주도된 현실은 ‘만들어지는’ 현재, 인공적으로 구성된 현재라고 말한다. 현실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의 순수한 어떤 것이 아니다. “현재성이 준거하고 있는 현실이 아무리 독특하고 환원 불가능하고 완강하며 고통스럽거나 비극적이라 해도, 이는 항상 허구적인 공정을 통해 우리에게 도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현실의 허구성에 대한 자각이 결코 “알리바이”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모의물의 과잉에 굴복해서는 안 되며, 또는 미혹의 미혹, 사건의 부인이라 불릴 수 있는 것 속에 존재하는 위협을 중화시켜도 안 됩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 심지어는 폭력과 고통, 전쟁과 죽음마저도 이 언론 매체 장치들에 의해, 그것들을 위해 구축되고 허구화되고 구성되며, 따라서 어떤 것도 [실제로] 발생하지 않으며, 오직 모의물과 미혹만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공적 현재성에 대한 해체는 가능한 한 멀리까지 수행하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비판적인 신관념론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보드리야르를 경계하고 있는 듯한 데리다의 논리적 지점은 그렇다면 어디인가. 그가 강조하는 것은 ‘독특성(singularite)’과 ‘모순성’이다. 모도 아니고 도도 아닌, 섣불리 단정할 수 없는 어떤 미묘함 속에 깃든 모순과 역설과 이중성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일관된 해체는 독특성에 대한 사상이며, 따라서 사건에 대한, 그리고 사건에서 마지막까지 제거될 수 없는 것으로 보존되는 것에 대한 사상임을 명심해야 하며, 또한 ‘정보’는 모순적이고 이질적인 과정임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선사하면서 또한 감추는, 매개하면서 또한 오염시키는, 왜곡되게 하면서 또한 창조하는, ‘인공적 현재성’이 보여주는 이러한 모순과 이중성으로부터 우리는 도리어 어떤 ‘여지’를 발견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해볼 수 있게 된다. “정보는 전환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며, 지식과 진리, 그리고 도래할 민주주의의 대의를 위해, 그리고 이것들에 의해 지휘되는 모든 문제들을 위해 사용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인공적 현재성이 아무리 인공적이고 조작적이라 하더라도, 도래하는 것의 도래에 대해, 도래를 전달하는 것이며 또 도래가 그리로 향해 가고 있는 것인 사건에 대해, 그리고 비록 마지못해 그런 것이긴 하지만 인공적 현재성이 증언하게 될 것[즉 도래하는 것의 발생]에 대해, 순응하거나 순종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우리는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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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에게 있어서 가상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더 이상 이 개념을, 사람들이 얼마 전까지 잠재태와 현실태, 즉 뒤나미스와 에네르게이아, 그리고 질료의 잠재성과, 목적 및 진보 등에 따라 [질료를] 규정하는 형상을 구분했던 것처럼 철학적으로 태평하게 현재적 현실성에 대립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가상성은 생산된 사건의 구조에 직접 새겨지며, 이미지, 담론, ‘정보’의 시간 및 공간, 요컨대 앞서 말한 현재성, 가정되고 있는 현재성의 현존의 집요한 현실성에 우리는 연결해 주는 모든 것을 변형시킵니다.” 데리다에게 현실과 가상은 단순 대립구도가 아니다. 현실성과 가상성은 겹쳐 있으며, 가상성은 궁극적으로 현실을 변형시킨다. 원격 기술에 의해 시공간이 재구성되는 ‘현재의 세계’에서 ‘현재성’은 가상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상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현재성은 동시에 가상성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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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현재성에 대한 ‘비연대기적 방식’으로의 접근이다. “저는 많은 경우 이른바 현재성에 대한 비동시대적인 접근법들이 현재하는 것에 가장 ‘몰입해’ 있다는 점을 기억해 두려 합니다. (...) [현재성의] 난관이나 위험, 기회, 계산 불가능한 것은 아마도 제시간에 도래하는 어떤 비동시대성의 형태를 취할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것, 정확하게[정의롭게] 시간에 맞춰 도래하는 것의 형태 말입니다. 정확한[정의로운] 까닭은 그것이 비연대기적이고 [연대기적 시간에서] 탈궤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척도를 벗어나며, 정확성이나 표준적인 적용과 무관하고, 자신이 지휘하도록 되어 있는 법 자체에 대해서까지도 이질적인 정의처럼 말입니다.) 이는 현재성의 현재보다 더 현재적이며, 역사 속으로의 타자의 틈입을 나타내는 독특한 일탈에 더 부합합니다.”

 

데리다는 연대기적 시간 속에서 불현듯 탈궤되어 있는 비연대기적 일탈, 타자의 틈입을 나타내는 이 독특한 일탈에서 (초월성보다는 내재성을 갖는) 메시아적인 것을 본다. “이러한 틈입은 항상 비동시대적이거나 예언적인, 또는 메시아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열광이나 장관을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거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메시아적인 것에 대한 책임 있는 응답이란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하는가. “그것은 이러한 비동시대성의 불일치, 불균형 또는 불협화음을 요구하며, 이러한 비연대기성의 정의로운 탈궤(정확한 부정확성)를 요구합니다. 지연시키고 거리를 두고 지체시키면서도 동시에 촉진시켜야 합니다. 현재성을 가로질러 발생하는 것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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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궤로부터 생성되는 차이에 대해 데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차이(=차연)는 하나의 관계를 표시하면서 동시에 또한 전유/고유화 불가능한 것이고 뜻밖의 것이며, 따라서 긴급하고 예견 불가능한 것이기도 한 도래하는 것, 도착하는 것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차이의 사상은 또한 긴급성의 사상이며, 다르기 때문에 내가 회피할 수도 전유할 수도 없는 것의 사상입니다. 사건, 사건의 독특성, 바로 이것이 차이입니다. (...) 차이는 도래하는 것 또는 도래할 것의 임박성에, 사건의 임박성에, 따라서 경험 자체에 호응하려고 하는 사상입니다.” 이때의 경험은 “타자의 경제이면서 동시에 비경제”이다. (여기서 경제란, 교환 가능하고 응수 가능한 관계, 언어망 안으로 포섭될 수 있는 관계, 곧 ‘의미화’를 말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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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예견 불가능한 도래, 이는 곧 사건이다. “사건이란 발생하는 것 속에서 사람들이 제거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또는 부인조차 할 수 없는) 것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는 항상 타자에 대한 경험인, 경험 자체의 다른 이름입니다. 사건은 이와 다른 어떤 개념에도, 심지어는 존재의 개념에도 포섭되지 않습니다.” 사건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며, 응답해야 할 책임도, 윤리도 정치도 없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의미화 이전의 발생, 다만 메시아적 공간을 여는 발생일 뿐이다. 사건은 존재의 어떤 범주로도 귀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초에 선취될 수 없는, 기대할 수도 계획할 수도 없는, 그러한 지평조차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다.

 

사건에 대한 정의가 이러한 바,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도래 중이라고 이야기되는 어떤 이’, 즉 이방인, 신참자에게는 어떠한 계약이나 조건도 부과해서는 안 되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이러한 무조건적 환대는 결코 선(善)이 아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무조건적 환대는 예견불가능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도덕과 법과 정치를 훨씬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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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자는 절대적으로 상이한 것,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리라고 제가 기대하는 것, 제가 기다리지 않은 어떤 타자이어야 하며, 그것에 대한 기대는 기대하지 않음으로부터, 철학에서 기대 지평이라 불리는 것이 빠져 있는 어떤 기대로부터 생겨납니다. 만약 제가 사건이 존재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이는 사건이 아닐 것입니다. (...) 도착자는 엘리야처럼 항상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항상 열려 있는 이러한 가능성의 허무함 속에서, 즉 도래하지 않음, 절대적 낙담 속에서 저는 사건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사건은 항상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도래하는 사건은 사후적으로 악으로도 선으로도 분석되고 규정될 수 있지만, 아울러 그러면서도 언제나 그러한 분석과 규정으로부터 끊임없이 저항하는 절대적인 잔여를 갖겠지만, 그럼에도 데리다는 “장래의 개방이 보다 가치 있다는 것”, 즉 도래하는 자의 공간을 여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이 바로 “해체의 공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도래할 민주주의로서의 민주주의”라고. 전혀 다른 것이 도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민주주의라고.

 

비록 “사건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은 아니며, 장래는 무조건적으로 선호할 만한 것은 아님”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도래하는 자의 공간을 여는 것은 ‘정의’이다. 왜냐면 데리다에게 있어서 정의란, “법이나 권리가 아니며, 인간의 권리들을 초과하고 그것들을 정초하는 것”이므로. “(정의란) 분배적 정의도 아니고, 심지어는 인간 주체로서의 타인에 대한 존중이라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정의도 아닙니다. 이는 타자로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이며, 제가 타자를 타자이게끔 한다는 사실은 상환 없는, 재전유 없는, 법적 한정이 없는 선사를 전제합니다.”

 

정의가 통상적인 교환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선사’를 전제한다는 것. 선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교환체계에 틈을 내는 어떤 것이다. 즉 데리다가 말하고자 하는 정의는 마이클 센델 식의 정의가 아니다. 센델 식의 정의는 데리다에게 있어서는 아마도 부정과 공모하는, 부정과 상호관계를 이루는 유사 정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데리다의 정의는 분배의 경제가 탈궤되고 어긋나는 지점에 주목하고 바로 그러한 균열의 발생에 응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분배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분배의 불가능성을 증언하는 효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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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36 되풀이 (불)가능성의 개념에 대해서: “전통적인 관점에서 데리다가 새로 추가하는 것은 (...) 무한히 많은 상이한 상황들-맥락들에서 동일한 것으로서 되풀이될 수 있음은 항상 이미 자신 안에 선험적으로 변화-타자화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언어 행위를 할 때 이 언어 행위 자체는 항상 자신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다른 언어 행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히 언어 행위의 사실적인 조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인 조건을 이룬다.” 자신을 잃을 가능성을 담지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 오직 다르게 말해질 수 있어야만 비로소 말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런 의미에서 (...) 되풀이의 구조는 (...) 동일성과 차이를 동시에 함축한다. 가장 순수한 되풀이(하지만 이는 결코 순수하지 않다. 라캉 식으로 하면 $일 듯)는 그 자체 안에 자신을 되풀이로 구성하는 어떤 차이의 간극을 포함한다. 어떤 요소의 되풀이 (불)가능성은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선험적으로 분할한다.” 

 

기존의 문자기록이 “소통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기술적 도구”였다면, 즉 “전달해야 할 내용을 가급적 정확하게 전달하고 재현하는 것을 본성으로 하는 도구”였다면, 데리다가 보기에 오히려 “기록이 함축하는 것은 수신자의 절대적 부재, 나아가 송신자인 나 자신의 부재 속에서도 가능해야 하는 소통의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통은 송신자와 수신자의 절대적 부재의 가능성을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부재의 가능성 내에서 되풀이될 수 있어야 한다.” 즉, 소통이란 반드시 그 실패의 가능성을 존재론적 조건으로 한다는 것. 오직 소통 불가능한 소통만이 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이 개념의 핵심은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동시성 내지는 가능성의 조건과 불가능성의 조건의 동일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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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원으로 결혼할 수 있을까?
전혜진 지음 / 니들북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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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미의 <나는 이렇게 결혼했다>와 전혜진의 <천만 원으로 결혼할 수 있을까?>는 둘 다 작년에 발간된, 예식 문화와 업계의 최신 동향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전자가 이 시대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결혼 준비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세세하게 적어놓았다면, 후자는 이를 보다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결혼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대안을 여럿 제시해 놓았다. 같이 읽으면 어느 정도 보완이 되는 듯.

정말 천만 원으로 결혼할 수 있을까? 가능할 것도 같다. 집 마련 비용을 별도로 하고 예물과 예단 모두를 최소화하며 혼수 장만하는 대신 자취방 살림 그대로 시작한다면. 젊은 부부는 아직 돈을 많이 못 모았으니 신혼집은 응당 단촐하게 시작하는 게 맞고, 살림살이는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이 생길 때마다 하나 둘 장만해 나가는 게 현명한 일이다. 주제를 넘는 예물과 예단은 비합리적이다. 이것이 평소의 생각이었으나 

막상 결혼 준비에 뛰어들어 보니 다른 건 몰라도 예물과 예단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내 생각만 관철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더라. 결혼 준비하면서 인류학적으로 가장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희한한 문화라는 생각이 드는 게 예물과 예단에 관한 것인데, 양가 부모님 그리고 결혼 당사자들 모두 되도록 사치와 낭비 안하고 검소하게 살고자 노력해왔다고 자부하는 편인데도 예물과 예단만큼은 자존심과 윤리 도덕에 결부된 문제라서 그런지 말 꺼내기도 조심스럽고 조율 역시 쉽지 않은 것 같다. 

웨딩의 세계에 눈뜨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은 비단 모든 가정의 깊숙한 곳에 쓰지도 팔지도 먹지도 못하는 수백수천만원어치 돌덩이들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 뿐만이 아니었다. 결혼식을 앞둔 수많은 여자들이 가히 정신 질환에 가까운 드레스 로망에 사로잡혀 예비 신랑을 끌고 웨딩 샵 수 군데를 순례하며 한 번 걸쳐보는 데만 삼만 원을 내놓으라는 드레스를 수십 벌 걸쳐보며 돈과 시간과 인생을 허비한다는 사실도, 신혼여행 때 쇼핑을 위해서만 5~600만원을 환전해 간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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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2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22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명화로 보는 신약 성경 이야기 명화로 보는 성경 이야기
헨드릭 W. 반 룬 지음, 원재훈 편역 / 그린월드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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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독교인의 처지로 서양미술사를 살펴보기가 버거워 <명화로 보는 구약 성경 이야기>에 이어서 읽었다. 보티첼리, 브뤼겔, 카라바조, 뒤러, 틴토레토, 히에로니무스 보스, 귀도 레니, 엘 그레코, 지오토, 만테냐 등등 서양미술사를 수놓은 걸출한 화가들의 작품들이 알차게 수록되어 있다.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작품을 뽑다 보니 서양미술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대표 작품들이 아니라 오히려 쉽게 보지 못했던 희귀한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어 흥미롭다. 구약 편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도판의 질이 썩 좋지는 않은 점, 그림 옆에 작품 제작 연도를 표기해 놓았더라면 시대별 회화 양식의 변화까지 좀 더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은 아쉽다.

 

이 책만으로 가늠해보는 예수는 명랑하고 다정하고 격의 없고 반(反)권위적인 반면에 현실 감각이나 권력욕 내지 정치력은 다소 부족해보이고 한편으론 초능력자 같기도 하다. 그는 오늘날로 말하면 운동권 지도자 혹은 재야 사상가라고 할 수 있겠는데 카리스마 있고 독기 가득한 저돌적 혁명가라기보다는 차라리 자유분방한 예술가 타입에 가까워 보인다. 그가 베푸는 자비심에는 신앙에 매몰된 자가 보여주는 특유의 과격하고 경직된 실천 의식도, 도덕가를 자처하는 자의 이면에 도사린 원한 감정 따위도 전혀 없어 보인다. 배후의 그 어떤 목표도 전략도 속셈도 의도도 없이, 그는 영혼과 신념이 이끄는 대로 물 흐르듯 행할 뿐 그 외에는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는 듯하다. 적어도 이 책에 묘사된 그는 진정 니체적 의미로 '강자' 같다.   

 

산속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예수가 행한 설교의 주된 화두는 위로와 용서 그리고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얘기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그러나 인간은 과연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박해하는 자를 위한 기도는 어디까지 진심일까. 어쩌면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패배자의 자기기만이 아닐까. 값싼 위안이나마 얻기 위한 애처로운 자기타협은 아닐까. 그리하여 너무도 손쉽고 간단하게 출구를 찾아버리는 길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얼마나 피상적이고도 저열한 방식인가. 신보다는 인간을 더 믿는 나로서는, 그리고 욕망과 투쟁의 인간인 나로서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장 원대하고 기적적인 역량을 보여주는 순간은 바로 원수를 뼛속까지 치열하게 증오할 때가 아닌가 한다. 그런 점에서 역시 나는 크리스천은 못 될 종자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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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 폭력과 추방의 시대, 촛불의 민주주의를 다시 묻는다 당비의생각 2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 산책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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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촛불 현장에 나도 몇 번인가 나갔었다. 딱히 무슨 정치의식이 있었다기보다는 공권력을 남용하는 무식한 정부에 대한 반발심과 더불어 막연한 반(反)신자유주의 감성 같은 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집회에 나갔을 땐 아나키즘적 광란의 현장에서 오는 흥분에 도취된 나머지 이후로는 불순하게도 오로지 통제 불능의 아나키 상황을 만끽하러 몇 번인가 더 시위를 빙자하여 촛불을 치켜들었더랬다. 동기가 그러했던 만큼 촛불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나도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자연히 시들해져 버리고 말았는데, 몇 년이 흐른 오늘에서야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게, 나는 왜 촛불을 꺼버렸을까.

 

당시 촛불에 참여했던 내 지위라든가 정체성이 전형적으로 “자발성과 비폭력성을 특징으로 하며 어떤 종류의 조직이나 단체와도 무관한, 나와 가족의 식품 안전에 관심을 가지고 검역주권에 우려를 제기하는 일반 시민”(98)이었으며, “평소에 글로벌 상품을 소비하면서 소비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키워왔던 여성들”(205) 가운데 하나였고, “사회적으로 ‘안정된 주체’라는 것을 의심받고 싶지” 않은, 즉 “아름다운 ‘촛불 시민’일 수는 있었어도 ‘하위주체’로 오해”받고 싶지는 않은(239), “계급적 문제에 대해서는 무력했고 둔감”(221)했던 “중간 계급”이었기 때문에- 이 책은 그야말로 당시 촛불 현장에 있었던 시위 주체로서의 나 자신의 실체에 대한 꼼꼼한 해부도처럼 읽힌다.

 

촛불이 카타르시스의 축제가 되어버림으로써 경계를 넘어서는 수평적 연대의 쟁점이 묻혀버렸음을 지적하며 “자신이 처한 삶의 불안전함에서 출발하여 연대하여 공동의 싸움을 해나가지 않을 때 자신이 거리에 나온 이유인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불안전함도 극복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백승욱의 글과, 시위를 주도하였던 중간 계급이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던 ‘순수성의 모랄’(=정치색의 거부)이 정치의 현존성을 외면 내지 부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촛불이라는 정치적 행동을 민주적 행동 너머로 정치화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닌가 반문하는 이상길의 글은 인상적이다.

 

특히 촛불은 환등상(幻燈像)이었을 뿐 ‘진리적 사건’으로 보기 어려우며 “궁극적으로 촛불의 ‘시민들’이 요구한 것은 쾌락의 평등주의”였다는 것, 그리고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길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촛불에서는 소비 생활의 평등을 주장하는) 이러한 가치관이야말로 새로운 쾌락주의의 시대에 작동하는 패러다임이라고 분석하는 이택광의 글은 알몸을 들킨 것 마냥 화끈거린다. 물론 알몸이 부도덕이나 치부는 아닐 게다. 다만 구태여 자랑하거나 드러내지는 않았던 내밀한 지점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까발리니 화끈거리는 것일 뿐-ㅇ-;;

 

촛불의 경험이 내게도 그저 한때의 자족적 놀이나 축제가 아니라, 소비 주체에서 사회의 균열과 틈에 대해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치적 주체로 진화하는 각성의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점점 더 위험사회가 되어가는 한국에서 자신의 안전한 미래를 스스로 보장해야 하는 보통사람”(213)의 한 명으로서 내 한 몸 건사하기조차 버겁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이것이 촛불을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소동으로 끝내버린, 연대 의식 부족한 중산 계급의 인식론적 한계를 대변하는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촛불이 나를 비롯한 386 후속 세대들에게는 당대 현실 문제라든가 민주주의 원칙에 관한 인식 형성에 영향을 준 중요한 경험이자 학습으로 기억될 만한 사건이었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촛불을 통해 얻은 대중들의 정치적 경험과 잠재력은 분명히 새로운 사회 운동의 순환을 예비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디선가 월러스틴이 1848년 혁명은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의 예행연습이었고, 1968년 혁명은 1989년 사회주의 몰락의 예행연습이었다고 말했듯이, 2008년 촛불항쟁 또한 하나의 예행연습일지 모르겠다. 이것이 무엇을 위한 예행연습일지는 ‘경제 위기의 세계화’를 통과해가야 하는 대중들의 집단행동을 지켜보며 차후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148쪽, 김정한, <촛불의 정치학>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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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 동양고전 슬기바다 4
주희 지음, 윤호창 옮김 / 홍익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소학이 궁금했던 것은 일전에 어느 책에서 고산 윤선도가 평생토록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극진히 읽었다는 얘기를 접하고부터였다. 그는 유배가 있을 때도 아들들에게 편지를 보내 소학이 인간의 근본을 이루는 본보기이니 일평생 읽고 또 읽으라고 권면했다 한다. 8세 안팎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책을 평생에 걸쳐 경전처럼 떠받들며 살았다니 과연 어떤 책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펼쳐들었으나 온통 경건, 성실, 충실, 공경, 신실, 신의, 수양, 신중, 근면, 청렴, 절제, 단정, 엄숙, 정제, 겸손 등의 단어들로 점철된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현대사회에 태어난 것이 천만다행이다. 16세기 조선의 어느 지식인에게 평생의 바이블이었던 이 책이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비록 견딜 수 없이 숨막히고 고리타분하기는 할망정 그 내용이 대체로 수긍이 갈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적지 않은 부분이 당위로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만큼은 새삼 놀랍다. 대저 관습이 되어버린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얼마나 끈질기고도 유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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