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전 신림동에서 스윙댄스 배우기 시작한 이래로 이 플로어 위에서 웃기도 많이 웃었지만 울기도 많이 했다. 남자 때문에 울고, 따가운 입방아에 올라서 울고, 어떤 날은 아무도 나랑 안 춰줘서 울고, 남이 추는 춤 구경하다가 황홀해서 울고. 돌이켜보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온갖 감정들을 이 플로어 위에서 두루 겪어본 것 같다. 설렘, 도취, 환희, 흠모, 질투, 고독, 원망, 분노, 고마움, 그리움, 두려움, 연민, 허무, 권태, 모욕감, 배신감, 좌절감 등등. 이 위에서 만나서 사랑도 하고 이별도 했었다. 그러니 여기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책의 세계가 차갑고 도저한 심해와 같다면, 춤판은 해수의 표면처럼 눈부시고 그 변전은 무쌍하다. 한 번 미워진 사람은 절대로 좋아지지 않고 가벼운 충격에도 오래도록 깊이 슬퍼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춤판은 정말이지 정신이 혼미해지는 곳이었다. 그래도 여기가 참 좋았던 것은, 심해와는 다르게, 살아 움직이는 생의 현란한 순간들을 온몸의 감각으로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었단 거.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은. 활자로 옮길 수도 없이 아름다운 곳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5-12-25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6 1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위급할 때는 조개가 제 껍데기 안으로 얼른 몸을 감추듯이 내 속에 숨어있으면 좋다. 내 속은 언제나 안전하지. 왜냐하면 내 속에 대해서라면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 속에 대해서라면 나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나조차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이 검은 비닐봉지 같이 좁고 어둔 속에서 당분간은 절대로 나오지 않을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저 그랬다. 잘 추는 로하고 추고 싶다. 영혼을 정화하고 심신의 평안을 얻으려면 주종을 막론하고 두주불사할 것이 아니라 귀하고 독한 술을 자기 전에 소량 마시는 편이 낫듯이 여러 명과 질 낮은 춤을 추기보다는 좋은 로와 깊고 강렬한 한 딴다를 추고 싶다. 좋은 로를 만나서 정신을 극도로 집중해서 오늘 하루 남은 기력을 다 바쳐 정성을 다해 출 수 있다면 단 한 딴다만 추고 가더라도 밀롱가에 온 의미가 생길 거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르히니아 판돌피에게서 농염한 관능미가, 노엘리아에게서 천진함과 순수함이, 제랄딘에게서 활기와 생명력이, 나탈리아 힐스에게서 절도와 카리스마가 느껴진다면, 마리아나가 보여주는 것은 자유다- 완벽한 정복에서 오는 자유. 아르쎄와 마리아나는 자유롭다. 이들한테는 탱고를 춘다는 표현보다 부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려 보인다. 마부가 말을 부리고 신선이 도술을 부리듯이 얘네들은 탱고를 부린다. 이들의 춤 앞에서는 에세나리오와 살론의 구분조차 무의미해지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일주일 간의 노동을 마치고 내일 여기 간다! 그 옛날 아르헨티나로 이민 간 어느 가난하고 춤을 사랑했던 부두노동자의 영혼이 내일 내게로 빙의되길 바라며. 속俗을 향한 열정과 생의 남루함의 정도로만 견주자면 빙의가 되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지.

 

2 모든 과도한 장식은 본의아니게 배면의 곤궁과 쇠락을 환기시키고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쓸쓸해 보인다. 밀롱가에서는 헤어스타일이 지나치게 단정하고 유난히 향수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땅게로가 항상 애잔하다. 크고 화려한 악세서리를 주렁주렁 걸친 땅게라가 그렇듯이. 그래서 그런 로는 한 딴다 내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꼭 안아주려고. 내일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