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신화 플롯의 변주가 재미있다. 인간은 원죄라는 과제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영웅이 된다. 생각해보면 원죄라는 것은 일방적인 선고와도 같다. 불가항력적이다. 태생적인 악조건이며, 존재론적 한계이기도 하고, 근원적인 치부이기도 한 이 원죄라는 과제를 영웅은 어떻게 일생에 걸쳐 극복해 나가는가.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 소녀의 일대기가 그 탁월한 극복의 한 방식을 보여준다.
어느 날 두더쥐 한 마리가 햇볕 좀 쬐러 지상으로 나왔다가 난데없이 누군가의 따끈따끈한 똥을 뒤집어쓰고 만다. 웬 봉변인가. 화가 난 두더지, 온갖 짐승들을 차례로 잡도리한 끝에 이웃집 개 한스가 한 짓인 걸 알아낸다. 낮잠 자는 한스의 머리 위에 작은 똥을 누고는 그제야 땅속으로 돌아가는 두더지, 에게 묻고 싶다. 꼭 그렇게 해야만 속이 후련했냐? 아기들한테 반복적으로 보여주기엔 너무 더럽고 집요한 복수극이 아닌가 싶지만, 이미 우리 아기는 똥은 똥으로 갚는다는 함무라비 정신에 깊이 매료되어버렸다.
아직 말 못하는 아기들이 선호하는 책의 기준은 뭘까. 아기들의 머릿속에 들어가보지 못하니 심리를 완전히 헤아리진 못하겠다. 우리집 아기는 이 분이 쓴 책들을 다 좋아한다. 난 글쎄, 고리타분한 그림체가 영 별로인데. 인물 의상이라든지 동물 묘사가 마치 관념에 찌든 조선시대 남종문인화 같지만 아기가 좋아하니 어쩔 수 없다.
내게는 위와 같은 제목의 번역본이 있는데 알라딘에선 이상하게 검색이 안 된다. 가히 종이공학(?)의 신비를 만끽할 수 있는 책이다. 저마다 교묘한 모양으로 구멍 난 페이지들이 겹쳐져 있다가 한 장씩 풀리면서 괴물이 서서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러니까, 아, 이건, 직접 펼쳐봐야지 안다. 말로써 어찌 이 신비를 전달하리오. 낭독을 염두에 두고 번역된 듯한 지문은 무척 찰지다. 읽어주다 보면 랩퍼가 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에나 이런 책이 다 있었다니2. 이 책은 무려 밤중에 달 뜨는 이야기다. 달 뜨는 걸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단순치가 않어. 도중에 막 매캐한 구름에 휩싸이는 고초를 겪기도 하고 말이지. 아무리 날이면 날마다 어김없이 뜬다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니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