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이은주 공연 관람. 기본살풀이군무-승무-시화무-금선무-태평무-한량학무-살풀이춤 순서로 구성된 공연이었다. 여체의 굴곡과 그 움직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알헨틴 땅고에 익숙해져 있다가 한국 전통춤을 대하니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공연복이었다. 한복 치마의 미학을 감히 부정하겠느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여체를 쌀포대 같은 걸로 무자비하게 뒤집어 씌워놓았다는 인상을 떨칠 수 없었다.

 

잘록한 허리의 우아함을, 탱탱한 엉덩이의 역동성을, 종아리의 날렵한 곡선을 밝은 세상에 드러내는 게 용납되지 않았던 금욕적 사회, 살아 움직이는 여체의 관능적인 몸선을 몇 겹이고 돌돌 감싸서 숨겨놓아야지만 안심이 되었던 보수적인 동방 국가에서 춤을 통한 끼의 표출은 오로지 발끝과 손끝으로 집중된다. 처연하게. 한국 무용의 에센스는 버선코와 손끝에 있었다.

 

알헨틴 땅고에서는 남녀 모두 팔을 포함한 상체 움직임이 상당히 억압되어있고 남자는 리드, 여자는 팔로우로 그 역할이 엄격하게 나뉘어있는 까닭에, 땅게라(여자)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자기표현의 기회는 오로지 다리에만 국한된다. 때문에 땅게라의 발동작을 보고 있으면 애처로우리만치 현란하고 필사적인데, 한국 무용에서는 버선코와 손끝이 그랬다. 공연 내내 치마 밑으로 슬쩍슬쩍 보이는 버선코가 이토록 내 가슴팍을 콕콕 찔러댈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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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로얄에서 다니엘 나쿠치오 y 크리스티나 소사 공연을 봤다. 독보적이었다. 올해 내가 본 마에스트로 커플 중에, 아니 내가 이제까지 본 남녀 이인무 중에 최고였다. 형언할 수 없는 감동. 탱고를 춘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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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롱가에 가서야 비로소 온전한 나로서 있을 수 있게 된다. 사회적 지위, 신분, 역할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고유한 나 자신으로. 이곳에서는 이름, 학력, 직업, 재산, 혼인여부, 자식유무 상관없이 오로지 얼굴과 몸뚱이로만 인식된다. 표정과 육체, 육체의 움직임과 촉감만으로 규정되고 평가된다. 밀롱가에 가서야 비로소 내가 제대로 된 한 마리 생물이 된 거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유일하게 나의 생물성을 자각할 수 있는 이 도시의 유일한 망명지 같은 곳이다 여기는 나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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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1 00: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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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2 08: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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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2 0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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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어떤 사람들이 탱고를 출까. 탱고 추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 시가 그 답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이곳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며 탱고는 그저 탱고일 뿐이라고 누군가로부터 충고를 얻어듣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이곳이 쓸쓸해 보인다. 이곳 특유의 과도한 화려함이 여기를 더욱 쓸쓸해 보이도록 만드는 것 같다. 내면의 한기(寒氣)와 결핍을 감추기 위한 가련한 위장술처럼 여겨져서. 가만보면 다들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사람들. 초생달 같고 바구지꽃 같은 사람들. (탱고 음악 때문에 더 이렇게 느껴지는 걸까. 다소 거창한 표현이지만 그래도 확실히 이 음악이 함축하는 어떤 세계관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흥겨운 비극성이라고 해야 할까. 이 음악이 갖는 정서와 세계관에 깊이 동조하는 이들만이 이 춤에 오래도록 머무는 것 같단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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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6 11: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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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6 1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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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패턴이 다채롭지 않아도 한 딴다 동안 깊은 대화를 나눴다는 생각이 드는 로들이 있다. 오초 히로 꾸니따 기본적인 동작들 무난하게 이거저거 다 하면서 췄는데도 추고 나서 마냥 피곤하기만 한 경우도 있고. 전자는 추고 나면 꼬르띠나 내내 여운이 남아서 그 사람에 대해 곱씹어보게 된다. 후자는 인간 자체가 시시하게 생각되어버린다. 이건 단순히 춤을 잘 추느냐 못 추느냐, 춤이 나랑 맞느냐 안 맞느냐 하고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인 듯. 나이가 변수인가 싶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거 같고. 춤에 대한 주관적인 느낌만으로 상대방의 인성과 품격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자세 따위를 속단해버린다는 게 편협한 일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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