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면서 더욱 느끼는 거지만 글은 언제나 사후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한창 어떤 사건 속에 몰입해 있는 동안에는 그와 동시에 글을 적는다는 게 불가능하고 결국 글은 언제나 '~에 대한 글'일 수밖에. 글이 언제나 현재를 비껴나 있는 것과 달리 춤은 오로지 현재만 있다. 과거도 미래도 없이, 기가 막힐 정도로 강렬한 현재만이 있다. 지금 이 순간 흐르는 음악과 내 앞의 상대에 온 정신을 집중해서 추어야 할, 천 년 전에도 후에도 없을,  오늘 밤의 한 딴다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 그것이 때로는 너무나 허망해서 슬프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어느 한 순간 한 공간에서 모두가 하나의 음악에 맞추어 강렬하게 현재를 체험하고 나 또한 거기 동참하여 우리들이 지금 이 순간 생의 절정의 지점에 당도해 있다는 그런 감각을 만끽하는 것은 얼마나 경이롭고도 감격적인 일인지. 모든 존재가 다 함께 온힘을 다해 현재를 치열하게 소진시키는 광경은 얼마나 장관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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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6 0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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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7 05: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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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0 0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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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추는 라들의 공통점은 ①자아가 있고(몸의 균형과 중심축) ②관능적이다(발산하는 에너지와 표현력). 땅고가 여자를 그렇게 만드는 것 같다. 자아가 있도록, 유혹적이고 관능적이도록. 땅고는 정말 매력적인 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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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2 01: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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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2 05: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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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잘 추고 싶다. 춤을 잘 추면 이름으로 기억되니까 좋다. 존재의 고유성을 획득할 수 있으니까. 춤 추다 보면 모두가 고유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되고 그러면 나도 그 사이에 어우러져 고유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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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5-04-28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이 있는 사람은 아름다워요.

수양 2015-04-28 07:51   좋아요 0 | URL
꺅 라일라님♡ ㅋㅋ
 

 

이 영상은 어때?

둘이 우네. 슬픈가봐

연인이었거든. 이게 마지막 딴다였어

Noelia Hurtado. 이 사람이 여자인데 스윙의 맥스랑 결혼했어

아니 어떻게 땅고 추다가 스윙 댄서랑 결혼하나?

모르지 ㅎㅎ

세상은 정말 알 수 없는 일들 투성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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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23: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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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4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23 23: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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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4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땅고 동작 중에 빠라다(Parada:멈춤)와 빠사다(Pasada:건너감)가 있다. 남자가 다리로 여자의 진로를 가로막아 못 가게 하면 여자는 잠시 정지했다가 남자의 다리를 넘어서 지나간다. 여자가 남자의 다리를 넘어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넘어가기에 앞서 망설임이 길 수 있다. 망설이다 못해 뒤로 잠시 한 걸음 물러났다가 큰 맘 먹고 넘어갈 수도 있다. 넘어가면서 남자의 다리를 제 다리로 쓰윽 훑을 수도 있다넘어가고 나서는 지나간 일에 대해 미련을 털어버리듯이 다리를 좌우로 한번 휘젓고 나서 착지할 수도 있다. 아니면 처음부터 남자의 다리 같은 것은 길가의 돌부리만도 못하다는 듯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훌쩍 건너가 버릴 수도 있다.

 

요약하면 단순한 사건이다. 남자가 막았으나 여자는 지나갔다는. 그러나 음미하면 할수록 이 사건은 결코 단순한 종류의 사건이 아니게 된다. 어쩌면 세상에 벌어지는 일 가운데 가장 불가사의한 사건일지 모른다. 남자는 왜 여자를 막았을까. 여자는 왜 망설였을까. 망설이다 지나갈 때 왜 남자의 다리를 슬쩍 쓸었을까. 모른다. 진실은 오로지 그들의 다리 사이에 있을 테니까. 빠라다와 빠사다를 배우면서 이 동작이야말로 더없이 '고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땅고스럽다'는 게 뭐냐면,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땅고스러움'이란, 다음에 나오는 중국의 옛이야기 같은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옛이야기인데 가끔씩 되새겨 음미해볼 만하다. “한 선비가 기녀를 사랑하였다.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지새우며 기다린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 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아홉 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이렇게 짧고 깊은 이야기. 롤랑 바르트는 이것을 <사랑의 단상>에서 '기다림'에 관해 말하는 대목 끝에다 적어두었는데, 그저 그러기만 했을 뿐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저런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유리로 지어진 집과 같아서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다 깨뜨리고 나오게 되니까. 그 집 안에 빛나는 진실 하나가 숨어있는 것 같아 애가 닳아도 그냥 유리 밖에서 고요히 안을 들여다보기만 해야 좋다. 진실의 실루엣 같은 게 얼핏 보여도 경박한 문장들로 옮겨 적지 않는 게 좋겠다. 어떤 진실은 내성적이고 연약해서 그저 그렇게 도사리기만 할 뿐 말해지지 않는다-김소연 시집, <눈물이라는 뼈>(문학과지성사) 135쪽 신형철의 해설 中에서     

 

해설 말미에 신형철은 이렇게 말한다. “왜 선비는 아흔아홉번 째 날 밤에 기녀의 정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기녀는 알았을까. 선비라고 알았을까. 그냥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 마음이 저지른 일을 마음이 이해하는 과정이 삶이라면, 모든 문학은 결국 그렇게 된 일이 그리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 그러니까 마음의 소이연을 더듬고 또 더듬는 일인 것인가. 그러나 시의 길은 산문의 길과 다른 것이어서 (...) 시인의 일이란 언제나 그 소이연을 묻고는 충분히 대답하지 않는 일, 섬세하고 아름답게 대답을 유보하여 그 진실을 잘 보존해두는 일이다.”

 

땅고도 그런 것 같다. 땅고를 추는 동안 빠라다와 빠사다 같은 동작들이 쉼없이 이어지며 둘만의 소이연이 만들어지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이야기에 대해 우리 자신도 무어라 충분히 대답할 수가 없다. 한 딴다가 끝나면, 그저 서로의 가슴에 각자의 진실을 잘 보존한 채로 헤어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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