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아르헨틴 탱고를 배울 참이었다. 스윙하고는 체력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인연이 다한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다시 스윙빠를 찾았던 건 순전히 스윙 특유의 텐션 감각을 좀 기억해두면 앞으로 탱고 배울 때 유용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당초에는 이런 불순한 마음 뿐이었는데, 다시 추는 스윙이란 이럴 수가, 일 년 넘게 어둠 속에 처박혀 있던 스윙슈즈 앞에 눈물의 회개라도 하고 싶을 만큼 감격적이다. 그러니까 늘 이런 식이었던 거다. 이렇게 습관적으로 몇 년에 한 번씩 스윙과 극적인 재회를 하게 되면, 2~3년마다 물이 완전히 갈리는 동호회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소원한 관계가 되고 만다. 동호회 활동을 하지 않아 사람들과의 언어적 교류가 거의 없고 오로지 플로어 위에서 춤에만 몰두하는 데 따른 부작용이라면, 춤 스타일이 곧 그 사람의 성격뿐만 아니라 인격과 됨됨이 그리고 성품까지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춤이 마치 총체적인 인간성을 반영하는 듯한 착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춤을 추다 보면, 단지 상대방의 춤 실력 뿐만 아니라, 상대가 낙천적이고 쾌활한 사람인지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인지 저돌적이고 성질이 급한 사람인지 등을 가늠할 수가 있고, 지금 이 춤을 영혼을 담아 추고 있는지 아니면 타성에 젖어 기계적으로 추고 있는지도 분간이 되고, 얼마나 긴장해 있는지 또 얼마나 허세를 부리고 있는 지도 알 수 있으며, 파트너를 전적으로 혼란스럽게 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느끼기에 약간은 미흡했다고 판단된 방금 전의 리딩 때문에 순간적으로 자책하는 기색마저도 눈치 챌 수가 있다.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도 춤을 통해 상대방의 전반적인 성격이나 내외향적 기질 뿐만 아니라 춤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 춤으로 한 곡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의 진정성,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 파트너에 대한 책임감과 배려 및 충실함의 정도까지도 감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글과 삶이 일견 서로를 투명하게 비추는 듯해도 실상 그 둘 사이에는 언제나 도저한 간극이 존재하며 심지어 때로는 글이 삶의 알리바이가 되기도 하듯이, 그래서 순진한 독자들은 때로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감과 당혹감을 느끼기도 하듯이, 춤과 삶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춤판에 오래 머무른 사람이라면 으레 한 번쯤 난데없는 순간에 예상치 못한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고 혼란을 겪었거나 춤 자체의 속성과는 전혀 다른 춤판 사회의 냉혹한 생리에 쓰라리게 실망했던 경험 한 두 가지 쯤은 갖고 있지 않을까. 확실히 춤으로 한 인간의 품성과 인격마저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은 편협하고도 위험한 발상임에 틀림없다. 닉과 카라 같은 챔피언들이 성인군자라서 그토록 춤을 근사하게 추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착각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춤의 효용 가운데 하나이자 춤이 지닌 신비로운 마력이 아닐지.
바운스가 과도하지 않고, 리딩은 부드러우면서도 적당히 강하고, 자세는 안정감 있고, 지금 춤추는 이 순간에 집중하는 눈빛을 보이는 리더, 허세 부리지 않는 리더, 관성적으로 추지 않는 리더, 도공이 도자기를 빚듯 온 영혼을 담아 심혈을 기울여 춤추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리더, 나르시시즘적 재간이 아닌, 다정하고 따듯한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리더, 웃음을 넘어 감동을 주는 리더. 이런 리더와 한 곡을 추고 나면, 나는 그의 인품에 대해 환상에 가까운 일방적인 신뢰를 품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착각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렇담 나는 어떨까. 오늘 홀딩한 당신들에게 나는, 어떤 팔뤄로 기억될까. 부디 기분 좋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팔뤄로 기억될 수 있다면. 물론, 실체와는 별개의 문제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