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친척의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갑을 관계가 전복되다니 주체적이고 자립심 강한 여주인공이 이룩한 성취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우발적이고도 피동적인 성취가 아닌가. 이 정도의 상상력이 그 시대의 최선이었던 건가.
아동 인권 문제에 있어서 국가는 어느 정도까지 그리고 어떤 형태로 가정에 개입하는 게 최선일까. 공권력이 가족이라는 가장 사적인 관계에 침투해서 그 실태를 파악하고 문제를 진단하며 심하면 분리 조치까지 감행하는 이러한 일련의 시스템 자체가 아무리 전문가 다수의 객관적 판단에 의해 신중한 절차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권리 침해의 우려가 있는 굉장히 위력적이고도 적극적인 사생활 개입 아닌가. 국가기관에 의해 아이와 강제 격리 조치를 당하기에는 무늬네 엄마는 그래도 꽤 훌륭한 엄마였던 거 같은데.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나 역시 문제 많은 자격 미달의 엄마라서 내심 동정과 염려를 거두지 못하는 걸까. 그래도 아동 인권에 관한 미국의 방침은 꽤나 엄격한 것 같고, (약간의 놀라움 속에서) 이 부분에 대해 곱씹어 보게 된다.
한국 근현대사와 너무도 닮아있는 아일랜드 역사. 켄 로치 감독의 영화를 이것까지 두 편 봤는데 일체의 드라마틱한 과장이나 군더더기 없이, (이 또한 일종의 결벽 아닐까 싶게) 절제, 정확, 엄정한 응시만을 추구하는 영화적 서술 방식이 무시무시하다.
어디선가 주워듣기로는 영국에서 암 걸리면 검진 차례 기다리다 죽는다더니 빈말이 아니었다. 고구마같은 관료주의 행정으로 인해 사람을 살려야 할 복지제도가 되려 사람을 죽이고 있는 역설적인 영국의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아무래도 수상하다 내가 이 영화를 봤던가?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충격적이게도 예전에 리뷰까지 적어뒀었네. 참 헛똑똑이 같이도 써놓았다. 그런데 왜 이름이 공주일까? 청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 돌아온다던, 그 공주인가. 다시 보니 공주가 참 딱하다. 클로즈업 화면이라도 와락 끌어안아주고 싶을 만큼. 예전엔 사건 자체에 관심이 갔다면 지금은 인물이 더 보이는 차이인가. 사실 이 영화는 어떤 사건을 고발하거나 재조명하기보다는, 그저 비극을 겪은, 아니 여전히 겪고 있는 사람을 위로하고 응원하려는 데 힘을 쏟은 영화다. 이토록 사려깊고 뜨거운 응원이라니. 이토록 품위있는 응원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