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에티카 ㅣ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8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조현진 옮김 / 책세상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에티카>원문 일부 발췌 (2)<에티카> 해제 (3)앞서 발췌한 부분에 대한 주석 (4)용어 해설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명제와 그 명제의 연역적, 기하학적 증명으로 이루어진 <에티카>에 대해 일찍이 버트런드 러셀은 (증명 부분은) 정독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장담한 바 있다. 러셀의 고견을 받들어 (1)부분은 거의 포기한 상태로 읽기 시작. 그러나 이 책은 (2)와 (4)부분 만으로도 책값 4,900원이 아깝지 않은 책이다.
이 책에서 주목할 것은 ‘코나투스’라는 개념으로, 니체가 말한 권력의지와 상당히 유사하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코나투스라고 하는 자기보존의 힘으로부터 파악될 수 있는데, 코나투스는 말하자면 육체와 정신이 모두 관계된 어떤 ‘욕망’이다. 이 욕망의 종류에는 ①이성에 의해 규정되는 욕망(=내적 역량, 능동적인 정서)과 ②외부의 원인으로 인해 생겨난 감정으로서의 ‘정념’이 있다. 전자는 항상 좋은 반면, 후자는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다. 좋다는 것은 양태가 거리낌 없이 발휘되니까, 자기다운 게 자기답게 발휘되니까 좋다는 것, 나쁘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야 할 양태가 외부의 작용에 의해 억압되고 굴절되니까 나쁘다는 것. 이러한 좋고 나쁨은 선악 개념과는 관계가 없다.
신기한 것은, 코나투스를 설명하는 이런 내용이 니체가 말한 권력의지, 적극적인 힘, 반응적인 힘 등의 개념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이다. 선악 관념이 인간 본위의 자의적인 분류라고 여기고, 선악 관념 대신 힘의 증가와 감소를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설명하는 점도 마찬가지다.
한편, <철학과 굴뚝청소부>(이진경, 새길, 1997) 1장에서는 진리에 대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인식 차이(전자가 인식을 통해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후자는 진리라는 틀을 통해 인식을 시작한다고 생각함)를 대조함으로써 스피노자의 탈근대적 사유를 조명하고 있는데, 구태여 탈근대적이라고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이 책에서는 그에 대한 내용이 좀 더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아래는 그 부분을 포함하여 나름으로 정리 요약한 것.
1 데카르트에게 실체는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즉 스스로 존재하는 것. 데카르트는 이 실체를 이중적으로 정의한다. 무한실체(신)와 유한실체(육체, 정신, 자연)로. 데카르트의 신이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세계를 창조하여 법칙을 부여하고 세계를 초월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세계에 개입하는 존재다. 그러나 스피노자 생각으로는, 신이란 게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것인데, 신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신 아닌 또 다른 것’을 창조한다는 것 자체가 신의 결핍을 드러내는 행위인 거다. 때문에 그는, 신의 완전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신은 그 자체로 완전한 무한실체 하나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스피노자의 신은 피안에 존재하는 인격신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하나의 작용이자 섭리이고, 실체의 내재적 원인이다. 모든 양태이면서 또한 양태를 생성하는 내적 동력 같은 것.
2 스피노자는 이렇게, 실체는 무한실체 단 하나만 있을 뿐이고 데카르트가 유한실체라고 했던 육체와 정신은 무한 실체의 ‘양태’들이라고 말한다. 즉, 육체와 정신은 동일한 실체의 각기 다른 양태인 것. 정신과 물질은 동일한 것을 표현하는 다른 방식이므로 그 둘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 없고, 따라서 송과선도 필요 없음. 이 말은 스피노자가 정신을 물질의 상태로 소급시켜 설명하는 유물론을 옹호한다는 게 아니라, 정신과 물질이 별도의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자율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말.(=병행론)
3.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그렇게 칭송했던 인간의 자유의지를 깡그리 부정한다. 가상이고 환상이라는 것. 섭리에 의해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안 일어날 일은 안 일어나는 것이지 인간이 스스로 제 운명을 통제하는 그런 능동적이고 독자적인 의지 있는 게 아니라고.
4 인식론에 있어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앞서 말했듯, 데카르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굉장히 대단한 인간만의 고유 능력으로 봄. 그리고 그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ex. 생각하는 나) 확실한 것(진리)이라고 주장. 그러나 스피노자의 경우 확실한 것이란 ‘확실하기 때문에 확실한 것’일 뿐이다. (진리의 자기규정). 왜냐하면, 상황에 따라서는 어떤 허위에 대하여 한 치의 의심 없이 철저히 믿고 따를 수도 있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게 꼭 진리는 아니라는 것. 진리는 우리가 진리라고 말하니까 그 순간 진리가 되어버린 것일 뿐이라는 것.
만약 어떤 사람이 밤중에 끈 뭉치를 뱀 무더기로 봤다고 하자. 이에 대해 데카르트의 경우는, 우리의 인식 능력은 정상인데, 의지(여기서는 자기방어의지 같은 게 작용했을 것이다)가 잘못 개입하여 올바른 판단을 흐렸다고 본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인간의 인식능력은 확고하므로 의지를 단련하면 올바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생각으로는 구태여 인간의 정신을 인식능력과 의지로 나누어서 오류가 났을 때 의지 탓하는 거는 자기기만 밖에 안 되는 거라고 본다. 마치 땀이 뻘뻘 흐르는데도 자유 의지를 발휘하여 이 정도면 따뜻하다고 하는 거랑 똑같은 셈. 자유 의지란 일종의 환각이고 가상이고 환상이고 자기기만인 거다. 스피노자의 생각대로라면, 밤중에 끈 뭉치를 뱀 무더기로 본 사람은 그 사람이 ‘잘 못 인식’해서 그러는 거다. 인식능력 부족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인간의 인식 능력이란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것만큼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한없이 허술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탈근대의 포문을 여는 스피노자의 선지자적 생각이었던 것.
5 스피노자에 따르면, 선/악 관념 만큼이나 완전/불완전성에 대한 관념 역시 인간 본위의 자의적 분류다. 완전성의 기준은 사물이 가진 자기보존의 힘에서 찾아야 한다. 어떤 한 양태가 존재하고, 그것이 자기보존의 힘을 가졌다면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다. 모든 개체의 존재론적 평등 주장. 그러나 스피노자는 선악개념, 완전/불완전성에 대한 관념 모두 인간 본위의 자의적 분류라고 하긴 하지만, 그게 꼭 불필요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비록 상대적이고 허구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기준에 의거한 여러 가지 판단들이 궁극적으로는 자기보존욕구를 강화시켜주기 때문이다.
6 정념의 처리 방법에 대해: 데카르트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그런 것들을 통제하고 조절해야 한다고 하지만 스피노자는 정념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인 욕망의 한 모습이기에 억지로 통제, 조절할 필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정념을 야기하는 상황이나 현상을 이성의 이해력으로 ‘인식’하고 나면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있다고. 즉, 정념이란 의지가 아니라 정신의 인식에 의해 ‘치유’될 수 있다는 것. 정념을 일자(전체성)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나면 거기로부터 치유, 해방될 수 있다는 이런 생각은, 불가에서 말하는 집착과 해탈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