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의 의지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강수남 옮김 / 청하 / 198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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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모든 도덕적 가치에 대해 회의하고, 기독교적 세계의 허위성에 대해 구토를 일으키기 시작할 때- 니힐리즘이라는 징후가 시작된다. 인간이 절대 가치를 회의하고 구토하게 되는 사태로까지 나아가는 힘, 니체는 그것을 “성실성”이라고 말한다. 성실성은 도덕(도덕적 가치판단- 문명 사회의 체제 유지를 위해 계발된 덕목)이 양육한 힘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여물어서(?) 자기를 양육한 도덕에 반항하게 되는 것이다. “철저한 니힐리즘이란 (...) <성실성>이 양육되어 온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도덕을 믿는 일의 결과이기도 하다.”(31)

물론, 그리스도교적 세계 해석은 인간에게 나름의 이익이 있었다. 그것은 “생성과 소멸의 흐름 가운데 처해 있는 인간의 비소성(卑小性)이나 우연성과는 반대로, 인간에게 하나의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인간은 그리스도교적 피안의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현실의 재난이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이 그 자신을 인간으로서 경멸하지 않도록, 사는 것을 적대시하지 않도록, 인식하는 일에 절망하지 않도록 지탱시켜 주었다.” 이는 하나의 “보존수단”이었다.(32)
 
모든 발생하는 사건의 배후에는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형이상학적이고 절대적인 무언가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 않다는 것, 세계에는 여하한 진리도 부재하며, 사물의 여하한 절대적 성질도, 여하한 물 자체도 없다는 것을 통찰한 인간이 돌파구로 마련하는 것은 세계를 미망(迷妄)으로 판결하는 일이다. 그리고 생존의 성격을 참이 아니라 거짓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공(空)으로 여기는 일이다. 그러나 참-거짓의 분별 또한 단순화된 세계를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인간들이 설정해낸 가상적 가치일 뿐이다. “무가치성에의 신앙”을 보여주는 이러한 니힐리즘은 수동적 니힐리즘이며, 하나의 중간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36) 

“우리가 환멸을 느낀 존재가 된다고 가정하면, 그것은 생에 관해서는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무든 종류의 원망(願望)의 무엇인가를 간파했기 때문이다.”(39) 즉, 그것은 생 자체에 대한 환멸이 아니라, 절대적 X, 대타자, 원대하고 심오한 모든 가치들, 이상, 초인간적인 권위에 의하여 세워지는 불변하는 가치, 우리가 위안으로 삼고, 순응하고, 복종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정신적으로 매달리는 모든 가치들에 대한 환멸이다. 그것은 세계의 무도덕성, 무목적성, 무의미성을 간파한 자가, 오로지 힘의 작용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통찰한 자가 가질 수 있는 환멸이다.

이렇게 우리가 환멸을 느낀 존재가 되었을 때, 하나의 해석(모든 도덕적 가치판단, 그리스도교적 세계 해석)은 철저하게 몰락한다. “하지만 그것은 해석 그 자체라고 여겨지고 있었던 까닭에, 마치 생존 가운데에서는 여하한 의미도 전혀 없기라도 한 양, 마치 모든 것이 헛수고이기라도 한 듯이 여겨지는 것이다.”(59)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이 완전히 절망적인 ‘헛수고’는 아니란 말인가? 무슨 의미가 있기는 있는가? 니체는 이에 대해 “이 사상(니힐리즘)을 그 가장 두려워해야 할 형식으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말하자면 의미나 목표는 없으나, 그러나 무(無) 가운데로의 하나의 종국을 갖는 일도 없이 불가피적으로 회귀를 계속하고 있는 그대로의 생존, 즉 <영원회귀>. 이것이 니힐리즘의 극한적 형식이다. 즉, 무(無, 무의미한 것)가 영원히!” 

니체가 무(無, 무의미)의 영원성을 말했을 때, 그것은 기독교적, 플라톤주의적 영원성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어떤 궁극의 지향점도 파기해버렸다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성이란, 주름과 표피에서 일어나는 모든 표면적 현상의 영원성이다. 거기에는 삶을 초월하는 그 어떤 절대 가치나 목표도 없이, 그저 끊임없는 현상으로서의 연기(緣起)와 유전(流轉)만이 있을 뿐이다. 끝없는 우연과 변화, 생멸이 영원히 반복될 뿐이다. 그것은 유희다. 호쾌하게 웃으며 언제든 뛰어들 만한, 대단한 유희다. 유희에는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없다. 그 과정에서 무한한 즐거움을 얻을 뿐이다. 니체는 말한다. “우리는, 과정으로부터 목적 표상을 제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정을 긍정할 것인가? 이 일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저 과정 내에서 어떤 것이 이 과정의 순간마다 매번 달성되고 게다가 항상 대등한 것인 경우이리라.” 

니힐리즘은 기본적으로 데카당스의 징후이다. 그러나 “퇴폐, 퇴락, 폐물이, 그 자체로 단죄 받아야 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증대의 한 가지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다. 데카당스 현상은, 삶의 무언가의 상승이나 전진과 동일하게 필연적이다. (...) 사회가 정력적으로 대담하게 전진하면 할수록, 사회는 더더욱 실패나 기형아로 가득차고, 더욱더 쇠퇴에 가까워진다. (...) 데카당스 자체는 배격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다.”

그러나 니힐리즘은 이의적이게도 퇴락의 징후이면서 또한 강함의 징후이기도 하다. 초월적 가치나 신앙을 파기해버리고도 생존한다는 것, 즉 일체의 무게중심 없이도 생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강함인 것이다. (그런 가치들- 철학이니 도덕이니 종교니 하는 모든 지고의 가치에 의존하여 정신의 안정을 구하는 인간이야말로 "정신의 허약자, 정신병자, 신경쇠약자"다. 그러나 니체는 그러한 ‘약함’을 인간의 전반적인 성질로 본다; “사람은 약함을 욕구한다. 왜? 대체로, 사람은 필연적으로 약해지고 있는 까닭이다”. 인간을 약함을 어떻게 극복하려 하는가. “사람은 약함을 극복함에 있어서, 강장한 방식에 의하여 하려고는 않고, 일종의 시인이나 도덕화에 의하여, 바꾸어 말하면, 해석에 의하여 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강장한 방식이란? 그것은 억제나 극기, 금욕이 아니다. 무반응과 무관심과 무시다! “우행(愚行)을 예방하기 위한 처방은, 강한 의지를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리라.”)

데카당스의 징후이면서 또한 강함의 징후이기도 한 니힐리즘은, 수동적 니힐리즘에서 더욱더 더 나아가, 즉 더욱더 철저히 몰락하여, 궁극적으로는 몰락의 극단으로 치달아 파국을 맞이해야 한다. “철저한 몰락은, 파괴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의 철저한 자기 몰락으로서, 본능적 도태로서 나타난다. (...) 훨씬 깊숙한 본능의, 자기 파괴나 무(無)에의 의지의 본능의 의지로서의 파괴에의 의지.”(61) “우리가 극단적 몰락으로 치달을수록 곤궁이 커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62) 몰락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화”다. 철저한 몰락 속에서 맞이하는 철저한 부정. 그리고 오는 광명. 능동적 니힐리즘. 최후의 니힐리즘은 능동적 니힐리즘이다. 그것은 “절반은 파괴적, 절반은 반어적인, 정신의 가장 강력한, 더할 나위 없이 풍요한 삶의 이상으로서의 니힐리즘”이다.

최후의 능동적 니힐리스트, 그는 의도도 의미도 목표도 없이 그저 우연과 변화만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 영원한 생존을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할 줄 아는 자”다. “여하한 신앙개조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 우연이나 무의미의 대부분을 그저 용서하기만 하지 않고 사랑하는 자, 인간에 관해서는 그 가치를 상당히 할인하여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일에 의해 비소해지고 약화되는 일이 없는 자이다. 즉, 대개의 불운에도 버틸 수 있을 만큼 성장에 도달하고, 이 때문에 불운을 그다지 두려워하는 일이 없는, 건강에 가장 부한 자- 스스로의 권력에 확신을 가지고, 인간의 달성된 힘을 의식적으로 과시하면서 대표하는 인간.”(63) 

니체는 생에 대해 그 누구보다 처절하게 절망했던 자였으면서 또한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무한한 생의 환희를 느끼고 박장대소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과 도덕 없이 홀로 살아간다는 이 극단의 페시미즘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나의 <비극의 탄생>의 여기저기에서 번져 나오고 있듯이), 나는 정반대의 것을 스스로를 위하여 고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인간만이 웃는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마도 내가 아닐까. 인간만이, 웃음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깊이 고뇌하는 것이다. 가장 불행한 가장 우울한 동물은, 당연한 일이지만, 가장 쾌활한 동물이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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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유로 가는 길, 나는 없다
해공 지음 / 책세상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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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간 동서양 종교를 섭렵한 저자가 마지막으로 인도에서 기나긴 구도의 여정을 마치고 깨달음을 얻은 후 그 내용을 에세이 형식으로 적은 글이다. 무지에서 나온 의문일런지 모르겠지만, 명상을 통해 진리를 체득했다고 할 때의 그 깨달음라는 것은 어쩌면 순간적인 임사체험과 유사한 종류가 아닐까. 또 한편으로 드는 의문은, 어떻게 진아(眞我)를 체득한 상태에서 한편으로 동시에 개체의식을 전유한 채로, 깨달은 개체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소위 깨달은 자, 그러니까 깨달은 이후의 삶이라는 것은, 명상을 통한 비일상적이고 순간적인 무아(無我)의 체험이 개체적 존재로서의 일상을 살아갈 때 어떤 하나의 강력한 기억 또는 신념으로 작용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 게 아닐까... 이 책에서 저자는 구도자의 마음가짐으로 순수, 정성, 끈기 세 항목을 강조하면서 그 중에 우선으로 순수성을 꼽고 있는데, 나는 구도자가 되기에는 쓸데없는 의심과 분별심이 너무 많아 순수성에 있어서 이미 낙제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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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이론
자크 라캉 지음, 권택영.민승기.이미선 옮김 / 문예출판사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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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단계란 거울의 이미지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행위가 일어나는 시기로,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어린아이에게서 나타난다. 라캉은 유아 발달 시기에 나타나는 거울단계를 나중에 ‘상상계’라는 용어로 전치시키는데, 이것은 거울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주체 형성의 양상을 단순히 발육 과정에서 나타나는 시기적 특성으로서가 아니라, 주체가 (단계적인 성장과 상관없이) 처하게 되는 하나의 ‘국면’으로 확대시키는 의미를 갖는다.   

거울단계의 아이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양육을 받아야만 하며 아직 말도 하지 못한다. 운동조절 능력이 부족한 아이는 자신의 신체를 분열되고 파편화된 상태로 감각하는데, 이때 거울상은 아이의 신체에 대해 숙달된 느낌을 '예기'한다.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총체적이고 완전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거울의 이미지에 매료된다. 거울 앞에서 아이는 객관적으로는 더없이 불완전한 상황 속에서도 지극히 완벽한 자아상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아이가 거울단계에서 느끼는 근원적 통일성과 연속성의 감각은 어디까지나 환영(이미지)에서 얻어지는 효과이기 때문에 자아와 관련된 근본적인 부조화가 존재하게 된다. ‘존재론적 간극’이 생겨나는 것이다. 거울상과의 동일시 과정 속에서 부조화를 일으키는, 이전의 분열된 육체의 경험- 이것이 아이에게 히스테리적 억압을 가져오고, 아이는 억압에 대응하여 강박적으로 스스로를 요새화하는 자기방어를 수행하게 된다.  

라캉은 여기서 주체의 전반적인 정신발전을 규정짓는 ‘소외구조’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실제로는 몸을 잘 가누지도 못하는 자아가 강박적 자기방어 속에서 구축한 환상적 자아와 혼동을 일으킴으로써 이미지로서의 자아가가 실제의 자기 위치를 대체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아는 이렇게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매료와 더불어 본래의 자기를 소외시키는 과정 속에서 부상한다.  

오인과 소외에 의한 (상상적) 주체의 구축이라는 상상계적 자아의 양상은,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보여준 고전주의 시대 대감호 현상과도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광기의 역사>에서 푸코는 근대적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광인, 부랑자, 걸인 등을 비롯한 비이성의(정확히는 비이성으로 상정-분류된) 무리들이 대거 격리 수용된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이것을 인류 역사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거대한 상상계적 국면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한없이 난해한 이 책을 붙들고 있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것은 폴 벤느의 <푸코, 사유와 인간>에 나오는 한 대목이었다. “결국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발밑에 우리가 의지할 진실한 것, 견고한 것이 과연 있는가. 산에서 사람들은 눈더미가 쏟아지는 비탈에서 갈고리 쇠가 얼음에 걸리는 것을 느끼며 행복해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매번 갈고리 쇠로 얼음을 찍으며 실존적이고도 운명애적인 체험을 하는 지 모른다. 그러니 얼음과 함께 굴러 떨어질 운명을 알면서도 우리는 결코 이 우스운 짓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허망한 종류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안도감과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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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동문선 현대신서 40
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 동문선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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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4. 진리들의 윤리학 

(...) 이 말의 뜻은 그의 존재의 모든 것, 그의 몸, 그의 능력들이 어떤 주어진 시점에서 진리가 자신의 길을 펼치는 데 사용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 인간 동물은 불사적 존재가 되도록 독촉을 받는다. 그러한 ‘정황들’이란 어떠한 것인가? 진리의 정황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지금 주어진 것(다양성들, 무한한 차이들, ‘객관적’ 상황들: 예컨대 사랑의 만남 이전의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평범한 상태)으로는 그러한 정황을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한 객관성의 유형 속에서 동물은 보편적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껏 헤쳐 나갈 뿐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가정해야 한다. 주체를 구성하도록 소환하는 것은 잉여의 것이라는 것, 또는 상황에 도래하는 것이지만 그 상황이, 그리고 그 속에서의 일상적 행동 방식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동물을 뛰어넘는(그렇지만 동물이 그 유일한 담지자인) 주체는 무엇인가가 일어났기를, ‘이미 주어진 것’ 속의 그 일상적 기입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일어났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잉여적 부가물을 사건이라고 부르자. 그리고 진리가 문제삼아지지 않는(오로지 의견만이 문제삼아지는) 다양태적 존재를 사건과 구분하자.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 방식을 결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건들은 명백히 입증되는 것이다. 

충실성 (...) 그렇다면 진리의 과정은 어떤 ‘결정’으로부터 유래하는가? 이제부터 사건적인 잉여적 부가물의 관점에서 상황에 관계하려는 결정으로부터이다. 이를 충실성이라고 부르자. 사건에 충실하다는 것은, 이 사건이 잉여적으로 부가되는 상황 속에서 움직이면서 사건‘에 따라’ 상황을 사고한다는 것이다. [사건 그 자체의 정언명령(계속하라!)하에서 상황에 대한 지속적 탐구] 물론 이것은 상황 속에서의 새로운 존재 방식과 행동 방식을 발명하도록 구속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사건은 상황의 모든 정규적 법칙들 밖에 위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건적 충실성은 사건이 발생한 고유한 질서(정치적, 사랑의, 예술적, 과학적) 속에서의 (사고되고 실천되는) 실질적인 단절이다. 

진리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한 충실성의 실재적 과정을 ‘진리’(하나의 진리)라고 부른다. 그 충실성이 상황 속에서 생산되는 것이 바로 진리이다. (...) 근본적으로 하나의 진리란, 사건적 잉여 부가가 상황 속에서 긋는 물질적 궤적이다. 따라서 진리는 내재적 단절이다. ‘내재적’이라는 것은, 하나의 진리는 결코 다른 어떤 곳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 진리에 충실한 과정들은 매번 새롭게 발명되는 내재적 단절들이다. (...) 하나의 진리는 지식들[선재하는 상황 속에서 순환하는 지식들]에 구멍을 낸다. 진리는 지식들에 대해 이질적이다. 그러나 진리는 또한 새로운 지식들의 유일한 원천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진리가 [새로운] 지식을 촉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 진리의 힘은 단절의 힘이므로 진리는 기존의 유통되는 지식들에 폭력을 가하면서 상황의 직접성으로 회귀하고, 의견과 의사 소통과 사회성에 자원을 공급하는 그러한 일종의 휴대용 백과사전을 재편한다는 것이다. (...) [진리의 효과는] 지식의 촉성, 의사 소통 코드들의 확장된 수정.

주체 우리는 충실성의 담지자, 즉 진리의 과정의 담지자를 ‘주체’라고 부른다. 따라서 주체는 결코 과정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는 사건이 생기기 ‘이전의’ 상황 속에서는 절대적으로 부재한다. 우리는 진리의 과정이 주체를 도출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가 말하는 주체는 어떠한 ‘자연적’ 선재성도 갖지 않는다. (...) 주체들은 진리의 과정의 국지적인 지점이며, [진리의 과정에서 생성되는] 특수하고 비교 불가능한 도출물이다.  

(...) 진리의 과정에 담지자적 지점으로서 속한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 속에 포착된 ‘어떤 자’는 그 자신,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다양태적 개별성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에 대한 초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충실성의 우발적 궤적은 그를 거쳐 지나가고, 그의 개별적 몸을 통과하며, 그를 시간의 내부에서부터 영원성의 순간에 기입시키기 때문이다. (...) 이 모든 것은 진리의 과정의 내재적 단절 속에 포획된다. 그리하여 자기의 고유한 상황(정치적, 과학적, 예술적, 애정적)과 생성하는 진리에 동시에 속하는 ‘어떤 자’는, 그 자신이기도 한 이 알려진 다양성을 관통하여 ‘통과하는’ 이 진리에 의해 내적으로-그러나 알아차리지 못한 채- 단절되거나 구멍난다. 

사건 상황, 의견 및 제도화된 지식과는 '다른 것'을 도래시키는 것이다. 우연적이며 예측 불가능하고 나타나자마자 사라지는 잉여적 부가물이다. (...) 사건들이란 환원 불가능한 개별성들이며, 상황들의 ‘법에 대한 외재성’이다. (...) 사건은 상황[=기존의 지식들의 순환에 의해 구성되는 선재하는 상황]에 의해 알려지지 않은 것을 명명하면서 공백을 명명한다.  

진리의 윤리학 분열을 피한다고 주장하는 합의적 윤리와는 달리 진리의 윤리학은 항상 어느 정도 투쟁적, 전투적이다. 왜냐하면 의견들과 기존 지식들에 대한 그 이질성은 중단, 부패, 인간 동물의 직접적 이해 관심으로의 회귀, 주체에게 도래하는 불사의 존재에 대한 억압 등을 위한 모든 종류의 시도들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 진정한 주체적 충실성의 적은 바로 닫혀진 집합, 실체, 공동체이다. 우리가 진리와 그 보편적 호소의 우연한 궤적을 부각시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관성에 대항해서이다.  

 

5. 악의 문제 

(...) '선'이라는 말로 어떤 자가 진리의 주체의 구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선이란 바로 삶의 계속되는 교란의 내적 규범이다. (...) [관건은, 진리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로잡힘의 유쾌하고 열광적인 자명성을 뛰어넘어, 과연 그리고 어떻게 내가 그처럼 일차적으로 교란된 것[구멍의 발견, 사건]에 이차적인 역설적 질서[스스로를 알고 있는 어떤 자의 법칙, 자신의 끈질김을 그 끈질김을 파괴하고 교란시키는 것 속에 개입시키는 방식]를 부여하면서, 즉 우리가 '윤리적 일관성'이라고 명명한 것을 부여하면서 삶의 교란의 길을 계속 걸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 악은 선과의 만남에 의해서 열려지는 [=선이 전개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즉 진리 과정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다. (...) [진리의 발생 과정에서 일어나는 세 가지 악의 가능성으로는]  

(1)사건이 공백을 호출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적 상황의 충만성을 호출하는 경우 ['진리의 실재적 과정'으로부터 도용된 이름들이 '사라진 사건과 관련한 흔적'을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선재하는 상황의 충만성을 호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상황의 재편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상황의 강화를 몰고 오는 경우. 이 경우에는 공백을 추방해버리는 부작용, 즉 상황의 '주위'에 공백을 만들어 버리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그러나 추방된 공백은 회귀한다. 억압된 욕망이 반드시 돌아오는 것처럼.]  

(2) 충실성이 쇠퇴하는 경우 [진리의 과정은 내재적 단절의 과정이다. 이러한 단절과 다시 단절하게 되는 것(충실성의 쇠퇴, 주체성의 배반)은 기존의 상황과 의견들의 연속성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절과의 단절' 이후 '계속하시오!'라는 정언명령의 수행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사건에의 충실성'을 '기존의 상황과 의견들의 연속성'을 위해 '양보'해버린다면, 이 또한 '용기 없음'에서 비롯하는 '악'이다.]   

(3) 하나의 진리를 전능한 힘으로 간주할 경우 [진리의 과정은 모든 지식을 관통하듯 기존의 상황과 의견들의 언어를 관통한다. 그런데 진리에 절대적 권한을 부여해서 기존의 의견을 변형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의견들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경우, 그리하여 의견들이 진리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는 상황을 전망할 경우, 그 결과는 언제나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진리는 자신이 도출시키는 주체들의 구성 속에 '어떤 자'의 지속성을, 진리에 포획된 인간 동물의 이중적인 활동(단절과 지속)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전제 없이, 진리들의 전능한 힘을 설정해버리면, 그 진리들을 담지하는 공간(?)은 황폐화되고 만다.]  

(...) 진리가 전능한 힘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 종국적으로 뜻하는 바는, 진리 과정의 생산물인 주체적 언어가 상황의 모든 요소들을 명명할 수 있는 권력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리적 명명이 행해질 수 없는 적어도 하나의 실제적 요소가, 상황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다양성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한 요소는 오직 의견에만, 상황의 언어에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진리가 촉성할 수 없는 지점이 그곳이다.

나에게도 ‘도래하는 사건’이랄 만한 게 있다면, 현재로서는 그나마 독서의 체험만이 유일한 듯하다. 드물게 만나는, 나를 교란시키는 책들만이 나를 사건의 주체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적고 나면 퍽 우스워지는데, 나의 독서 활동이란 건 냉정히 말해서, 정신적으로 말라비틀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종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윤리적 일관성'이 없다. 아무래도 나는 그다지 사건에 충실한 주체는 못 되는 모양이다. 열량이 높은 이런 책을 읽으면, 마치 거대한 한 자락의 파도에 온몸이 잠시 들려 올려졌다가 내려오는 기분이다. 해표면을 부유하는 작고 가벼운 티끌의 운동처럼. 그러니까 나라는 것은, 사유의 여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 그런 미미한 현상의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 이 책은 시집만큼 얇다. 마음에 드는 챕터는 전문을 베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시를 베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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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사유와 인간 - 푸코의 웃음, 푸코의 신념, 푸코의 역사! 산책자 에쎄 시리즈 4
폴 벤느 지음, 이상길 옮김 / 산책자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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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미학화는 어떤 욕구에 부응하지 않으며(그보다 그것은 욕구를 창출한다), 특정한 목적을 겨냥하지도 않는다. (...) 미학화의 에너지는 설득력 있는 그 어떤 교리에서 나오기보다는, 자유로부터, 자아의 충동으로부터, 신비하고 내밀한 ‘블랙박스’로부터 나온다.” -p.182 

우리가 신뢰하는 모든 절대적인 것들이(심지어는 우리 자신까지도) 계보학적 관점에서는 언제나 임의적이고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탄생 비화를 갖는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것에도 짓눌릴 필요가 없으며,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할 당위성도 필연성도 없다는 것. 우리는 우리가 자각하기도 전부터 이미 자유롭다는 것. '미학화'의 에너지는 바로 이 자유로부터 나오는 것이겠다. 아래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담론’과 ‘장치’ 개념을 요약한 것. 

담론 
-담론은 테마의 변이형이자 특이성이 갖는 형식이다. 담론은 매번 특이적으로, 자의적으로 변전한다. 변전은 우연적이고, 교차하는 인과성들의 복잡한 연쇄로부터 생겨난다.
-담론은 보이지 않는 부분이며, 생각되지 않은 생각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투명성이다. 우리는 어떤 시기의 담론의 경계 안에서만 생각한다. 우리가 안다고 믿는 모든 것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제한된다. 우리는 그 한계를 보지 않으면,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저자는 담론을 투명한 어항에 비유하고 있다.) 
-각 역사적 구성물, 각 학문 분야, 각 실천의 궁극적인 차이인 이 담론은 한 시대 전체에 공통된 사유 스타일이나 시대정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하부구조도 아니고 물적 토대도 아니고 세기의 정신도 아니다.
-담론은 매 시대에 사람들이 모든 것을 지각하고 사유하고 그에 작용하는 안경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피지배자들이나 지배자들 모두에게 부과된다.
-담론이라는 말은 하나의 층위가 아니라 일종의 추상, 즉 사건이 특이하다는 사실을 지칭한다. 모터의 작동이 그것의 부속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듯이, 그것은 모터가 작동한다는 추상적 관념인 것.
-담론은 특이성, 시대의 기이성, 장치의 국지적 색깔을 만들어낸다. 
-담론들은 변증법의 논리에 따라 이어지지 않으며, 훌륭한 이유로 인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대체되지도 않고, 초월적인 법정에 의해 그들 간에 서로 평가받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담론들 사이에는 사실적인 관계만 있고 당위적인 관계는 없다. 그것들은 서로를 대체하며, 그들의 관계는 이방인, 경쟁자의 관계다. 이성이 아니라 바로 전투가 사유의 핵심적인 관계를 이룬다.

장치
-장치란 담론, 제도, 건축적 설비, 규제결정, 법률, 행정조치, 과학적 언표, 철학적, 도덕적 박애주의적 제안을 포함한다. 간단히 말해,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의 총체. 과학이든 병원이든 성애든 혹은 군대든 어떤 역사적 구성물을 이루는 법령, 기록, 말 또는 실천들. 관념, 사법, 의학, 치안, 병원제도, 가족적 또는 직업적 규범 등등.  
-장치는 담론을 사회 속에 구현한다. 담론은 장치의 작동 속에서 형성된다. 담론은 그 자체로 장치에 내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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