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사회평론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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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한 필연성의 세계 속에서 좌초당한 주체는 어떻게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가라타니 고진은 역사를 거슬러 스피노자식 결정론적 세계 속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되찾으려 했던 칸트를 소환해낸다. 우선, 칸트가 제3이율배반이라고 말한 두 명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명제- 자연법칙에 따르는 인과성은 그것으로부터 세계의 모든 현상이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인과성이 아니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외에 자유에 의한 인과성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 

반대명제- 무릇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모든 것은 자연법칙에 따라서 생겨난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자유의지에 의한 인과성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는 정명제는 스피노자식 결정론을 보여주는 반대명제와 대립한다. 그렇지만 칸트는 양쪽 모두 참 명제라고 말한다. 서로 반하는 명제들은 어떻게 각각 참으로서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괄호 치기’에 의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정명제에서 말한 자유에 의한 인과성을 괄호 쳤을 때 현상(자연필연성의 세계)를 발견하고, 반대로 반대명제에서 말한 자연필연성을 괄호 쳤을 때 자유를 발견한다. 괄호를 어디에 치느냐에 따라서 전자의 경우에는 인식적 판단, 후자의 경우에는 윤리적 판단이라는, 현상을 받아들이는 전혀 다른 태도가 동시에 가능해진다.

가령,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우리가 그의 행위에 격분하는 까닭은 그가 저지른 범죄가 사회적 구조적 모순에 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의 죄를 추궁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자연의 필연성이나 구조적 불가피성에 괄호를 치고 나서, 그를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상정하고 그에 따른 윤리적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거스를 수 없는 대전제인 자연의 필연성에 수긍하되 그것에 과감히 괄호를 침으로써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주체의 자유다. 자유는 결코 자연(섭리)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저자는 칸트가 말한 ‘자유의지’에서의 ‘자유’가 오로지 ‘자유로워지라’는 의무, 당위, 정언명령에 따름으로서 존재하는 자유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정언명령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여기서 저자는 사르트르를 끌어온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자유란 데카르트적인 주체에게 주어진 그런 고상하고 형이상학적인 자유가 아니라, 실존적 긴장과 불안에서 비롯하는 자유다. 자유로워지라는 정언명령에 따름으로서 존재하는 자유란, 형벌과도 같은 실존적 고투 속에서 비롯하는 자유인 것이다.

칸트는 자유라는 관점에서 도덕성을 봤다. 그에게 있어 도덕성은 선악보다는 오히려 ‘자유’의 문제였다. 선악을 공동체의 규범으로 보거나 개인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견해는 둘 다 개인의 주체성과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오로지 사회적 인과성에 따라서만 판단하는 경우일 뿐이다. 이것은 윤리적 판단이 이루어져야 할 일에 대해 인식론적 판단을 해버리는 것과 같은 오류다. 칸트는 사회적 인과성에 괄호를 치고, 오로지 개인의 자유(자유로워지라는 당위에 따르는 자유)에서 그 도덕성을 찾았다.

자유로부터 도덕성을 논할 수 있는 것은 자유가 책임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칸트의 윤리는 책임윤리다. 우리가 어떤 현상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은 실제로 우리가 사회적 인과성의 법칙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서 간주함을 의미한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도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는 이러한 인식은 니체의 운명애로 이어진다. 니체의 운명애가 “인생을 타인이나 주어진 조건 탓으로 돌리지 않고 마치 자신이 만들어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면, 칸트에게 있어 운명애는 “여러 원인들에 의해 규정된 운명을 그것이 자유로운(자기원인적) 것인양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칸트와 니체의 오묘한 접점을 발견해 낸다.

칸트가 말한 자유의지를 지닌 주체는 니체적 운명애의 실천으로서 '책임'을 져야 하는 주체로 재탄생한다. 그렇다면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나? 저자는 책임 추궁에 응답하는 한 가지 바람직한 윤리적 실천이 원인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공교롭게도 내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떠오른 것은 가토 노리히로였다. 전후책임 논쟁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가토 노리히로를 비판하는 쪽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이 책 <윤리21>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얘기하고 있는 윤리적 주체의 모습을 가토 노리히로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토 노리히로의 <패전후론>(사죄와 망언 사이, 창작과 비평사, 1998)를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그가 전쟁 책임을 둘러싼 일본 내부의 자기분열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심리를 파고들므로써 굉장히 힘겨운 자기 해부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감히 굉장히 힘겨웠으리라고 짐작하는 까닭은 그의 글이 일본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논쟁의 포문을 여는 그런 글을 썼을 때 가토가 이미 어느 정도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을 각오하고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런 글을 썼다는 것은 그것이 추궁에 응답하는 가토 나름의 한 가지 치열한 방식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이렇게 믿는 한에서(이 전제가 중요하다), 나는 가토 노리히로에게서 가라타니 고진이 칸트를 경유하여 이야기한 윤리적 주체의 모습을 발견한다.   

전후책임 문제와 관련해서 일본인들이 보여주는 자기분열적 모습은, 그들 자신이 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상의 죄에 대해 후손으로서 사죄해야 한다는 묘한 상황에서 기인한다. 죽은 자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후손이 느끼는 책무감은, 이 책 1장에서 가라타니가 아이가 저지른 일에 대해 부모가 책임지는 일의 부당함을 얘기한 것과 똑같은 차원에서 부당한 일일 수 있다. 한 마디로 전후책임 문제와 관련한 일본인의 자기분열적 태도는 '조상의 죄로부터 자신이 무관하다는 개인주의적 태도'와 '전쟁 책임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는 도덕적 규범' 사이의 간극에서 연유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가토가 고안해낸 해결책이 바로 일본 전사자들을 우선적으로 애도하자는 제안이었다.  

가토에게 있어서 죽은 자를 애도하는 일은 가라타니가 이 책에서 말한 것처럼 단순히 죽은 자를 영구적으로 추방함으로써 불안해진 공동체를 재확립하기 위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 내부의 자기 분열적 상황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는 가토에게 애도의 문제는 보다 복잡한 의미를 갖는 사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적 상황에 대한 깊이있는 천착과는 무관하게 가토가 제안한 자구책은 올바르지 못했다. 왜 올바르지 못한가에 대해 이 책 7장에서 가라타니는, 죽은자가 이미 타자라는 이유를 든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죽은 자는 소통이 불가능한 영원한 타자다. 때문에 죽은 자를 애도하는 일은 죽은 자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자기 위안이고 자기 만족일 뿐이며, 그것은 죽은 자를 산 자의 방편으로 활용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가토에 대한 가라타니의 반박은 호소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토가 전후책임문제와 관련해서 지식인 사회에 발표한 몇 편의 글들이 윤리적 주체의 실천으로써 충분히 의미있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이 책에서 가라타니가 인용한 소세끼의 소설 <모방과 독립>의 한 구절을 재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할 수 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보나 그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감추지도 빼지도 않고 쓸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쓴 공덕에 의해 바로 성불할 수가 있습니다. 법률에 걸리고 징역은 살게 됩니다만, 그 사람의 죄는 그 사람이 쓴 것으로 충분히 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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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10-12-16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 이책 진짜 좋아해요! 세번이나 읽었다능. 근데 놀랍게도 하나도 기억안남ㅋ-_-;;;;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 당대총서 20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이광근 옮김 / 당대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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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철학자들>에서 하일브로너는 복지사회주의적 관점에서 국가가 경쟁에서 도태되고 희생된 자들을 구휼함으로써 시장을 견제해야 한다고 했지만, 이 책에서 월러스틴은 국가와 시장이 결코 상호대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 둘은 보완적 관계를 이루어 자본주의체제를 견고하게 만든다. 월러스틴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의 역할은 경쟁에서 배제된 자들이 완전히 도태되어 시장 활동 자체를 못하게 되지 않도록 그들을 적당히 구휼하고 또 이를 통해 사회적 불안을 해소해서 장기적으로는 노동공급 확보와 유효수효를 창출해 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칠게 말하면, 시장은 공동체 사회를 파탄내면서 거기서 생명과 활력을 얻고, 이렇게 시장이 파탄낸 공동체 사회를 국가가 다시 어느 정도 시장의 구미에 맞게 재정비해 놓으면 시장이 또 다시 파탄내고 하는 이러한 일련의 반복적 과정이 곧 자본주의체제인 셈이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는 이렇게 국가와 시장의 쌍끌이작용(?)과 더불어 헤게모니 국가의 지속적인 교체(네덜란드-영국-미국) 속에서 돌아간다. 그런데 왜 헤게모니국가는 지속적으로 교체되어야 하는 걸까. 일단 헤게모니지위를 차지한 국가는 후발주자국가들의 성장으로 인해 점차 생산에 대한 독점력이 줄어들고 헤게모니 지위를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지금의 미국의 경우와 같이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

월러스틴은 이런 식으로 조만간 망하는 게 비단 미국만이 아니라고 본다. 자본주의세계체제 그 자체도 종언을 고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계적으로 생산비용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임금(노동력을 착취할 제3세계 지역이 점차 전세계적으로 줄어들어가고 있음- 더 이상 공장이전할 곳이 없음), 생산재료비(생산에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환경오염처리비용이 가면 갈수록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늘어남, 자연자원은 고갈되고 폐기물 매립지는 점차 줄어듦. 이 모든 난관이 결과적으로 생산비 상승을 불러일으킴), 세금 내야 할 비용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 수지가 맞으려면 판매 가격이라도 올라야 하는데, 이마저도 더 이상 오르기 힘들다. 자본주의체제가 발달할수록 모든 나라의 생산력이 향상되어 너도나도 생산하기 때문에 더 이상 생산의 과점적 조건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러는 와중에 체제에서 도태되고 약자가 된 집단들의 투쟁은 격화된다. 문명, 민족, 종교, 인종 기타 등등 사이에서 갈등과 투쟁은 첨예화되고 사회는 점점 더 카오스 상태로 되어간다.

월러스틴의 이론대로 생각해 봤을 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가 다음 주기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미국식 축적시스템(법인기업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축적시스템이 생겨나야 하고 그에 따른 새로운 국가간체계 또한 재조직되어야 한다. 과연, 인류는 현재의 자본주의체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축적시스템을 개발해낼 수 있을까. 그리하여 네덜란드-영국-미국의 계보를 잇는 다음 주자를 탄생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인류는 몇 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자본주의체제 그 자체를 뛰어넘어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구축해낼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세계체제 이후의 어떤 체제를 상상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치 인류 전체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에 대한 상상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이 인류 정신의 대격변이었듯이, 체제 자체의 전환이라는 것 역시 정신의 개벽일 것이다. 사회제도나 경제체제는 물론이고 생활양식, 풍습, 가치관, 예술사조 등 각 방면에서 근본적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출현하지 않았던 새로운 종류의 인식의 틀을 가진 주체가 도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과연 인류는 또 한 번 정신적 혁명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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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0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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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내게는 좋은 입구가 되었다. 베블런, 좀바르트 등등 차근차근 알아가 보고픈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특정한 생산양식이나 경제 제도로서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물질적 발생과 그 발생을 둘러싼 총체적인 사회 관계, 그리고 이 모든 현상의 배후에서 그러한 움직임을 운용하고 조정함으로서 사회를 특정한 모양새로 구축해 나가는 권력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 헤게모니 정신으로서의 자본주의, 레짐으로서의 자본주의를 살펴보는 공부가 필요할 것 같다. 아니, 필요하다기보다는 재미있을 것 같다. 

나 자신은 그저 해수의 표면을 부유하는 미립자와도 같은 존재이지만, 그리고 그러한 처지에서 오는 무력감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심층의 거대한 해류를 관찰하고 그 흐름을 조망해 보는 일은, 그 자체로 내게는, 다소 이상한 얘기 같기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뭔가 상당히 유미주의적인 탐구활동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 목도하는 일들에 대해 느끼게 되는 부당함과 무력감, 공포 등등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나는 이 자본주의라는 것을, 정치적인 색채를 배제하고, 마치 생물학자가 경이에 가득차서 탐미적인 시선으로 자연의 생명현상을 탐구하듯이 공부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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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니체 How To Read 시리즈
키스 안셀 피어슨 지음, 서정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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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길들여진 영혼, 시들고 야윈 영혼에게 니체는 훌륭한 양분이다. 니체를 통해서 우리는 강해진다. 격전을 준비하는 스트리트파이터의 주인공처럼 두 손을 불끈 쥐고 바운스를 타게 된다. 니체가 위험한 것은 그의 철학이 근본적으로 파이터-그것도 투쟁적인 세계를 헤쳐나가는 파이터가 아니라, 세계와 대결하고 세계를 전복하기 위해 투쟁적인 파이터-의 철학이기 때문이리라.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니체의 사유에서 “지적으로 성숙하고 진정으로 도전적인 부분”과 “철학적 환상의 영역에 속하는 부분”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구분이야말로 고루한 학자들이나 하는 바보 같은 짓일 것 같다. 차라리 우리는 니체의 철학이 근본적으로 ‘파이터의 철학’임을 감안하고, 그 사납고 오만하고 ‘근자감 쩌는’ 문체에 기꺼이 중독되는 편이 낫겠다.

2 니체가 보기에 진리는 종교나 도덕과 같이 인간이 스스로의 편의를 위해 고안해낸 개념으로 종의 보존과 생장을 위한 효용 이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모든 지식은 상대적이고 편파적이며 부정확하고 오류의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배움을 이어나가고 진리를 추구하길 멈추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책의 저자는 우리가 배움을 통해 ‘변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정신은 끊임없이 지식을 흡수하고 소화하고 거기서 영양을 취하고 생장한다. 이는 곧 부단한 지적 대사작용이다. 활동능력의 증강은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좋음’이고 ‘선’이다. 개체의 활발한 생명활동으로서의 진리에의 열정은, 그런 면에서 이미 충분한 의미를 지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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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7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7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나키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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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은 하나의 이론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이론을 정립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반-아나키즘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갈래의 아나키즘들이 보여주는 전반적인 성격과 경향을 종합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아나키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아나키즘을 삶의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아나키즘을 단순히 무정부주의로 번역하지 않는다. 이들은 반강권주의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말한다. 아나키즘은 국가만이 아니라 시장의 폭력에 맞서고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와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주의에도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미래는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라 내가 합의한 질서를 뜻한다. 내가 스스로 복종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질서는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나키스트는 모든 권위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을 거부한다.  
   

국가 없이 과연 사회가 조화롭게 유지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해 아나키스트들은 상호부조와 자활자치가 이루어지는, 농업에 기반을 둔 순환경제의 소규모 공동체 사회라면 굳이 정부 조직이 필요치 않다고 말한다. 소규모 공동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자유로운 협약과 협동조합, 공동체끼리의 연대와 네트워크 같은 것들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아나키스트들: 푸르동(소유란 무엇인가), 바쿠닌(국가주의와 아나키, 국가 없는 사회주의), 머레이 북친(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 크로포트킨(상호부조론, 빵의 쟁취), 페레, 고드윈, 도로시 데이, 헤나시, 고토쿠 슈스이, 오스기 사카에, 류스페이, 리스쩡, 콜린 워드, 신채호, 장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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