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3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 그린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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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독일의 역사는 19세기 맑스주의자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충분히 성숙한 이후에도 사회주의 생산양식으로의 발전적 이행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파시즘이 태동할 무렵 독일 사회에서 중산계층은 이미 경제적으로 충분히 비참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들은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이 아닌 나치당과 독일국가인민당을 지지했다. 대중은 왜 진보를 두려워하고 극단적으로 반동적이 되었을까. 물질적 궁핍 속에서 노동하는 대중들은 왜 자신들의 사회적 상황과는 괴리된 정치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은 왜 현실에선 실패했을까. 

파시즘이 태동할 당시 독일의 중산계층은 자기모순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선명하게 혁명적이거나 선명하게 보수적인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혁명적 태도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상황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도출된 두 가지 심리적 구조의 충돌을 겪고 있었다. 이것은 통속적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으로는 결코 해명될 수 없는 현상이었다. 통속적 맑스주의자들은 인간의 이데올로기와 의식이 그의 경제적 존재에 의해 전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규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를 도식적으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경제에 의존하는 것으로 파악했으며, 역으로 경제적 발전(물질)이 이데올로기의 발전(의식)에 의존하고 있는 부분은 간과했다. 

합리성의 영역을 벗어나 존재하는 대중의 심리구조라든가 이데올로기, 언어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 내밀한 욕구, 욕망, 리비도적 에너지, 주술과 광기에 의해 견고해지는, 신비주의적인 대중의 무의식적 경향성과 같은 일체의 정신의 영역이 통속적 맑스주의자들에게는 모두 관념적 형이상학일 뿐이었다. 그들은 물질적 토대를 너무나 중시한 나머지 정신의 자체적인 힘을 사유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와 경제 구조 사이의 모순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이데올로기를 역사를 추동하는 힘으로 파악하지도 못했다. 

라이히는 맑스의 유물론을 통속적 맑스주의자들과는 다른 관점으로 해석한다. 그는 대중의 무의식적 심리 구조야말로 경제 구조와 불편한 역학 관계를 맺는 또 하나의 유물론적 토대라고 주장한다. 즉, 사회적 구조는 경제학적 요인뿐만 아니라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요인에 의해서도 구축된다. 먼저 사회적 구조의 변동은 인간의 원초적, 생물학적 요구를 변화시킨다. 구조의 변동에 맞추어 변화한 인간의 성격구조는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사회적 구조를 재생산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질서는 ‘대중들에 대한 지배’라는 자신의 주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성격구조를 그 사회의 구성원인 대중들 속에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심리적 구조를 변화시킴으로써 인간 속에 스스로를 재생산해 나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생산된 이데올로기가 모순된 방식으로 행동하는 인간에게 활동적 힘, 즉 물질적 권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발원한 경제적 토대에 반작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경제 구조 뿐만 아니라 대중의 심리 구조 또한 유물론적 토대를 구성한다는 것. 통속적 맑스주의자들은 간과한 이 지점에서 라이히는 정치심리학이 필요성을 언급한다. 정치심리학은 계급사회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생을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특정한 시대에 인간의 성격구조는 어떠한가,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인간 존재의 모순이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인간은 이런 존재에 어떻게 대처하려 하는가 등을 탐구할 수는 있다. 앞서 언급했듯, 인간의 심리 구조가 경제 조건과 더불어 또 하나의 유물론적 토대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탐구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인간의 사고의 기저를 형성하는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하고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심리구조. 라이히는 이것이 인간의 억압된 성생활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사회는 체제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구조적으로 재생산하기 위해 권위주의적 가부장제를 통해 개인으로 하여금 성의 억제와 억압을 내면화하도록 요구한다. 권위주의적 가족제도 속에서 성적 억압 구조에 길들여진 인간은 권위를 두려워하고 순종적인 인간 유형으로 사회화된다. 사실상 성욕에 대한 도덕적 억압의 목적은 고통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적 질서에 적응하고 그것을 참아내는 말 잘 듣는 노예 같은 인간을 만드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권위주의적인 가족제도 속에서 성적 억압을 내면화한 ‘도덕적 인간’은 열악한 노동착취의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히려 진보적 변화나 현실에 대한 반역을 두려워하게 된다. 

성적 억압은 대중들을 순종적이고 억압에 익숙한 상태로 만들 뿐만 아니라, 나아가 권위주의적 질서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심리 구조 또한 만들어 낸다. 권위주의적 질서의 첨단을 보여주는 국군주의적 의식은 얼마나 섹시한가. 파시즘이 섹시한 이유는 사실상 억압된 성욕이 제도적으로 승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성의 억압은 경제적으로 억압받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구조적인 물질적 이해관계에 대한 비판능력을 무화시키고, 오히려 그에 반(反)하여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도록 변화시킨다. 독일 대중의 반동적 정치 성향의 근원을 라이히는 이러한 성의 억압 구조 속에서 발견한다.       

억압된 성 생활이 내면화된 인간, 권위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인간, 자유와 해방을 두려워하는 인간. 이런 인간들에게 달라붙어 ‘고삐 풀린 살인충동을 만끽하는 흡혈귀’가 바로 파시즘이다. 사실 파시즘은 순수한 반동적 운동이 아니라, ‘반역적 정서’와 ‘반동적 사회사상’의 결합이다. 초자아에 대해 엄청나게 반항하는 마음과 엄청나게 복종하는 태도의 기이한 결합이 파시즘인 셈이다. 권위를 갈망하는 동시에 반역적이라는 점에서 파시스트의 심리 상태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노예상태에 있는 ‘소심한 인간’의 심리상태와 동일하다. 한편으로 파시즘은 종교와 닮아 있다. 파시즘은 말하자면 종교적 신비주의의 극단적 표현이다. 파시즘은 성적 도착에서 생기는 종교성을 옹호하며, 가부장적인 수난의 종교가 지닌 마조히즘적 성격을 사디즘적 종교로 변형시킨다. 그 결과, 파시즘은 종교를 고통철학이라는 ‘내세의 영역’에서 가학적 살인이라는 ‘현세’로 변화시킨다.  

*

제국주의가 강제한 식민지 체제, 뒤이은 분단과 냉전, 한국전쟁이 결과한 반공 규율 체제, 유신 독재 정권 시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근대사는 파시즘이 일상적 분위기로 굳건하게 뿌리내릴 수밖에 없는 비극의 역사였다. 매카시즘의 상흔이 깊게 남아있는 사회, 군사문화에 길들여진 사회, 권위와 규율에의 복종이 익숙한 사회, 엄숙한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파시즘의 망령은 끊임없이 되살아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파시즘은 사회경제적 과정이나 구조를 넘어서 대중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감정이나 정서, 내면적 심리에 그 힘의 원천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독재정권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지 오래인 오늘날 한국 사회에 파시즘의 잔재는 여전히 일상의 기류로 존속하고 있다. 사상의 자유를 가로막는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서슬 퍼렇게 살아있으며, 선거철마다 지역주의적 선동이 반복되고, 규율과 복종을 내면화시키는 학교 교육 또한 여전하다. 최근의 황우석 교수 사태에서 드러난 대중의 광기는 또 어떤가.

폴라니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하며, 사회는 이러한 모순을 두 가지 방식으로 해결한다고 말한다. 두 가지 방식이란 다름 아닌 사회주의와 파시즘이다. 전자는 재산과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진보적으로 철폐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원칙을 경제에까지 확장시키는 방법으로, 후자는 민주적 정치영역을 철폐해버리고 오로지 경제생활만을 남겨놓는 방법으로 모순을 극복한다. 굴곡진 한국근대사가 낳은 파시즘의 일상적 기류 속에서 오늘날 한국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는 유례없이 견고해져가고 있다. 어쩌면 고도자본주의 사회와 파시즘의 밀월 관계를 가장 뚜렷이 관찰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바로 이곳, 한국 사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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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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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파헤치기 위해서 원초적 자연 상태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이미 인간의 역사적 흔적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가 태어나는 장면을 보기 위해서는 일체의 실증적 사실의 뒷받침이 배제된 상태의 기술, 가설적이고 조건적인 추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에 대한 가상적 추론을 통해 루소가 상상한 원초적 자연 상태의 인간은 ‘고독하고 무사태평하고 평화로우며, 건강하고 튼튼하며, 자연의 환경에 잘 적응하고, 생각도 정열도 없고, 예측도 기억도 없는 동물’이다(150). 최초의 인간에게는 미덕과 악덕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 다만 그는 고독하게 독립적으로 살아가면서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잘 뿐이다. “혼자 살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언제나 위험에 직면해 있는 미개인은, 거의 생각하는 일이 없으며 생각하지 않을 때엔 언제나 졸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동물들처럼 잠자기를 좋아하고 잠귀도 밝았을 것이다.”(59) 

야생 상태에서 최초의 인간이 지니는 정서는 명예욕도 소유욕도 아니다. 그에게 가장 자연스런 감정은 ‘연민’이다. 연민은 “각 개체에서 자기애의 작용을 완화하면서 종 전체의 상호적 보존에 기여하는” 감정으로, 서로 아무런 교류도 없이 개별적으로 독거하던 인간이 자발적으로 연대를 맺게 하는 최초의 동인으로 작용한다. 루소는 최초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원시인들 사이에서 ‘연민’이 ‘법과 풍속과 미덕’을 대신했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연민의 감정을 갖고 있던 원시의 인류가 실제로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사적 소유 관념이 출현하면서부터다. 루소는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가 형성되면서 ‘도덕’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이 인간의 행위 속에 도입된다. 인간의 인내심은 전보다 약해지고 자연스런 연민도 변질을 겪었지만, 그리고 이때부터 인간 사이의 불평등도 서서히 그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지만, 루소는 인류가 최초로 공동체를 형성한 이 시기를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인간이 가장 행복했던 황금시대, “세계의 진정한 청춘기”였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 루소는 인간 불평등의 근원을 사적 소유 관념에서 찾고 있다. 본성이 허용하는 만큼 자유롭고 건전하고 선량하고 행복하게 지내며, 계속해서 상호간에 독립적인 상태에서 교류의 평온함을 누리던 인간이 혼자서 두 사람 몫의 양식을 차지하는 것이 유리함을 알아차리게 되자마자, 평등은 사라지고 소유가 도입되고 노동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06). 인간이 물질을 소유하게 되면서 개인의 가치는 존재에서 소유로 바뀌었으며, 불평등 구조는 지배와 굴종, 폭력과 약탈을 심화시켰다. 평등이 깨지자 극심한 무질서가 초래되었다. 안전을 위해 사람들은 사회적 질서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법률은 부자의 지배를 강화시키고 빈자의 의무를 증강시키는 양상을 밟았다. 이제 사회 내의 인간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전락하고 만다. 

루소는 역사상 출현했던 각종 정부 형태 가운데 불평등의 마지막 도달점이자 문명의 타락을 가장 심각하게 보여주는 제도로 전제군주제를 꼽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치체제에서는 모든 개인이 다시 평등해진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신민은 이미 주인의 의지 외에는 아무런 법률도 갖지 않으며 주인은 자기의 정념 외에는 아무런 규범도 갖지 않으므로 선의 관념이나 정의의 원리가 다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모든 일이 다만 최강자의 법률로, 즉 하나의 새로운 자연 상태로 귀결되어 있다.” 전제군주제의 자연 상태와 원시 인류의 자연 상태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후자가 순수한 자연 상태인 반면 전자는 지나친 부패의 결과라는 데 있다. 그러나 루소는 이 두 상태가 본질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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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 강의 프로이트 전집 1
프로이트 지음, 임홍빈.홍혜경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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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많은 경우 신경증이 나름의 쓸모와 용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신체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혹은 타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기 안에 질병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자아는 신경증의 증상들에서 기인하는 불쾌감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사실상 질병을 통해서 얻는 이득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신경증에 의해 제공되는 도움이 대체로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증상 형성을 통해서 갈등을 해소하는 방식은 인생의 요구 사항들에 대한 적절한 대처라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가장 탁월하고 훌륭한 능력들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신경증을 통해 현실을 극복하려 하는 태도가 약자적인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것은 상황을 타개하는 비굴한 방법이다. 지극히 노예적이다. 때문에 "만약 선택할 수 있다면, 사람은 운명과의 정직한 투쟁을 통해서 패배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p.519) 만약 무너지더라도, 자기와의 정직한 투쟁 끝에 무너진다면 그는 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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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 개정판 스피노자 선집 5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 서광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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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앞서 증명했던 것 요약: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신은 유일하다. 신은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서만 존재하고 작용한다. 신은 만물의 자유 원인이다. 모든 것은 신 안에 존재하며 신 없이는 존재할 수도 파악될 수도 없다. 모든 것은 신에 의해서 예정되어 있다. 더욱이 그것은 의지의 자유나 절대적 재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절대적 본성이나 신의 무한한 힘에 의한다. (이 모든 ‘사물의 질서’는 신이 의지한 것도 아니고, 생각해낸 것도 아니고, 어떤 판단을 통해 고안해낸 것도 아니다. 그저 이것은 본성이다. 절대적 본성. 그러니까 그냥 좋아서 그러는 것이다. 그저 좋아서 발현하고 발산하는 게 사물의 질서다.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그냥 좋아서.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이 무한한 발현! 발산!) 

목적론적 신 부정: 신이 모든 것을 특정한 목적에 따라 이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원인과 결과, 수단과 목적 이런 구분은 인간이 만들어낸 자의적인 분류이다. 왜냐,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사물의 원인 같은 거 모르지 않나. 그저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충동을 지닐 뿐인 거다.  

가치의 자의성: 선 vs 악, 질서 vs 혼란, 따뜻함 vs 추움, 아름다움 vs 추함, 옳음 vs 그름 등의 모든 가치평가는 인간의 주관에 의한 자의적 분류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유용한 것을 핵심이라고 판단하고, 자기들을 가장 유쾌하게 해 주는 것을 가장 탁월하다고 평가한다. 또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믿으며, 그들은 어떤 사물에서 자극받는 정도에 따라서 그 사물의 본성을 선하다 또는 악하다, 건전하다 또는 퇴폐적이다, 도덕이다 부도덕이다고 말한다. 회의론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런 기준에서, 그러니까 인간 본위의, 인간 층위의 기준에서 논박이 오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 이를테면 어떤 이한테는 아름다운 게 어떤 이한테는 추할 수 있고 하는 그런 차이 때문에. 

표상, 그리고 완전성: 우리의 표상을 훨씬 능가하는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존재하며, 또한 우리들의 표상이 약하므로 표상을 혼란시키는 많은 것이 존재한다. 이렇게 보면 사실상 대중이 자연(세계)을 설명하려고 사용하는 모든 개념은 오직 표상의 양식일 뿐이고, 사물의 본성을 표시하지는 않는다. 개념은 단지 표상의 상태를 표시한 것일 뿐이다. (이성의 유가 아니라 표상의 유?) 따라서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 그 각각의 완전성은 오로지 “그 사물의 본성과 능력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야 한다.  

양태, 실체, 속성 등 스피노자의 주요 개념을 이해되는 선에서 정리해보면,  

양태: 외부의 원인에 의해 존재하고, 자기 원인에 의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자기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실체). 양태는 규정되고 강제된다. 타동적이고 부자유함. 양태는 우주의 표정 같은 거다. 얼굴 가죽 위의 점 같은 거. 얼굴 표정이 변할 때 얼굴 가죽 위에 점의 위치가 변화하는 것처럼. 아니면 얼굴 표정 변하면서 동그랬던 점이 길죽해진다든가 하는 변화. 얼굴 표정 변화에 따른 얼굴 가죽 위에 있는 것들의 변화. 이 변화를 변용이라고 함. 양태는 변용됨. 한마디로 양태는 ‘모드’라고 보면 된다. 표정 변화할 때마다 바뀌는 새로운 모드. 그게 양태. 모든 양태는 신의 속성을 분유하고 있음. ex. 의지, 지성, 운동, 정지, 빠름, 느림...  

실체: 본질이 실존을 포함하는 것, 자기 원인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 자기 안에서만 설명되는 것. 다른 속성끼리는, 즉 다른 실체끼리는 서로 제한하거나 간섭할 수 없음. 실체는 오로지 실체 안에서만 서로 제한이나 간섭이 가능. 예를 들면 사유는 사유 안에서만 서로 간섭 가능. (처음 정의 부분에서는 아직 속성과 실체가 구분되지 않고 있다. 정의 부분에서는 속성=실체, 무수한 속성=무수한 실체, 무수한 실체였던 것들이 나중에 정리9에 이르면 하나의 실체로 전화하게 됨) 양태가 규정되고 강제되고 타동적이라면 실체는 action. 자기본성으로부터 나오는 action. 실체는 자유로움. 행동하는 것이 자기원인적임. 

속성: 실체의 본성은 속성들로 이루어짐. 무한히 많은 속성들로 신의 본성이 구성됨. 우리는 속성을 사유와 연장 두 가지만 알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모르는 속성들도 엄청 많음. 무한함. 

신: 우주의 무한한 움직임. 우리가 모르는 것들의 무한성. 질적 다양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 비유했을 때 ‘원’이 소산적 자연이라면 원의 회전으로 생겨나는 ‘구’는 능산적 자연이다. 원의 현상이 구이고, 구의 실체가 원이니까 사실 원이나 구나 같은 거. 즉 “능산적=소산적 자연” 그리고 우주의 이런 모든 작동 시스템이 다 ‘필연성’에 의한 것. 

things: 1장 신에 대하여는 “사물의 본성”에 대한 설명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모든 사물, 즉 만물이란 rerum natura =모든 “things”. thing들의 전체. thing이란 한국말로 하면 ‘것’, 단순히 물건 같은 게 아니라 추상적인 ‘것’까지도 다 포함. 이‘것’ 저‘것’ 좋은 ‘것’ 행복한 ‘것’ 딱딱한 ‘것’ 등등. 

 

2부 

정신: 인간의 정신은 사유의 속성을 지니는 양태이다. 

정신의 자율성에 대한 언급: 사유라는 속성 안에서 정신은 자율적으로 작동한다. 즉 사유라는 속성 안에서 관념이 관념을 낳는 식으로. 이런 식의 인과작용으로. 

정신의 능력에 대한 언급: 사유 역시 신의 다른 속성들과 마찬가지로 능력을 표현한다. 사유에서 일어나는 작용(정신의 자율성을 낳는)은 곧 신의 능력에 대한 표현이다. 그리고 이때 인식능력=생산능력. 신은 자신이 인식한 대로 생산한다. 또한 인식능력=활동능력. 알면 이미 그 앎에 따라 활동하고 있다는 거임. 안다는 것은 이미 공통개념이라는 하나의 리듬을 타고 있다는 뜻임. 공통개념은 뒤에 나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식능력=실존능력. 우리가 인식하는 것 그대로가 곧 실존하는 실체임. 

관념: 정신이 형성하는 정신의 개념. 관념은 사유 속성 안에서 자기 질서에 따라 생산되는 내생적인 것임. 이때 "참된 관념"과 "적합한(타당한)관념" 구별의 필요성. 전자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대상과 일치하는 관념. 후자는 스피노자가 제기한 것으로 데카르트가 말하는 ‘참된 관념’을 부정하면서 그 대신으로 끌어온 용어. 적합한 관념이란, 사유라는 속성을 지니는 하나의 양태로서의 정신, 정신이 형성하는 정신의 개념으로서의 관념. 이러한 관념은 “대상(의 일치 여부)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인식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의 모든 특질들이나 내생적(관념이 관념을 낳으므로) 명칭들을 갖는 관념이다.” 사실상 스피노자가 보기에 참되다고 하는 용어는 (대상-관념의 일치를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불성설인 셈. 그냥 대상과 관념 사이에 자연스레 적합하고 타당한 관계가 있을 뿐인 거임. 

관념 자체의 실재성: 관념이 대상과 관련해서 갖는 실재성이 아니라, 관념 그 자체인 한에서 갖는 실재성.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 개라는 관념은 짓지 않는다. 원이라는 관념, 개라는 관념- 이것들은 다른 관념들과의 사이에서 내생적으로 도출될 뿐. 그리고 그렇게 생긴 관념은 대상과 별개로 사유라는 속성 안에서 그 관념 자체로 실재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상과 관념은 대응관계 이루어 일치하는 게 아니다. 다만 “관념의 질서와 연결”이 “사물들의 질서와 연결”과 동일할 뿐이다.

속성과 속성 사이의 계열적 일치 같은 것은 없음. 다만 각각의 속성 안에서 그 표현의 산출방식이 동일할 뿐이다. 관념이 관념을 낳는 산출방식. 연장이 연장을 낳는 산출 방식. 이것이 서로 동일하다는 것. “어떤 속성에서 생각하든 간에 우리는 동일한 질서, 원인들의 동일한 연결을 발견할 것이다” 이를 그림으로 예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만약 위의 프랙탈 이미지들이 속성을 은유하는 이미지라 해보자. 이미지<1>이 (은유적으로) 사유를 의미하고 이미지<2>가 (역시 은유적으로) 연장을 의미한다면, 그림에서 보이는 바처럼 <1>의 ①과 <2>의 ①의 관계는 ‘일치’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보다 ‘적합’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는 것이 옳다. 사실상 <1>의 ①과 <2>의 ①은 굳이 일치하고 말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1>이라는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①과 ②가 관계 맺는 방식은(다른 말로 ①에서 ②가 산출되는 방식은), <2>라는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①과 ②가 관계 맺는 방식(다른 말로 ①에서 ②가 산출되는 방식)과 동일하다. (이 그림에서 예로 들자면) <1>과 <2> 모두 ‘프랙탈’이라고 하는 동일한 ‘질서’를 갖는 서로 다른 그림인 것. 

만약 <1>의 ②가 “d-o-g”라고 하자. 그렇다면 <2>의 ②는 “옆집 발발이” 정도 되는 게 ‘적합’(또는 ‘타당’)할 것이다. 하나의 속성에서 파악된 사물은 다른 속성에서도 대응물을 가져야 한다는 평행론에 근거해서. 즉, 그것(thing)은 "d-o-g"임과 동시에 “옆집 발발이”다. 7. 평행론: 이처럼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된 실체는 동일한 실체이며 그것은 때로는 이런 속성으로 그리고 때로는 저런 속성으로 파악된다. 또한 연장의 양태와 사유의 양태는 동일한 것(thing)이며, 그것은 단지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어떤 속성에서 생각하든 간에 우리는 동일한 질서, 원인들의 동일한 연결을 발견할 것이다.” 속성은 달라도 각 속성의 질서와 연결이 같기 때문에, 즉 그 산출방식이 같기 때문에 신체의 양상을 보면서 정신의 양상 또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이런 말도 성립된다. “어떤 신체가 동시에 많은 작용을 하거나 많은 작용을 받는 데 다른 신체보다 더 유능하면 할수록 그 정신도 많은 것을 동시에 지각하는 데 다른 정신보다 더 유능하다.”, 이런 생각을 갖고, 스피노자는 정신의 본성을 연구하기 위해 신체 연구로 들어간 것. 

속성들 간의 자율성: 속성들은 서로에 대해 완전히 자율적. <1>과 <2>는 섞일 수도 없고 상호작용할 수도 없다. 각각의 이미지는 오로지 그 안에서 능산적으로 thing들을 산출해낼 뿐.  

프랙탈 말고도: 각각의 사물들이 저마다의 속성 안에서 서로 연결을 맺는 방식, 질서를 이루는 방식이 동일하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비단 프랙탈 도형만 있는 것은 아닐 것 같다. 또 다른 예를 얼마든지 들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에셔의 그림은 어떤가. (이건 나중에 따로 정리해보자) 

사물들, things, rerum: 정리 7에서 말하는 사물들(res, rerum)은 단지 연장의 속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냥 모든 속성의 양태 일반을 다 지칭하는 것. “하나의 속성에 따라 파악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속성들에 따라 파악된 것들과 동일하다.” 

사유의 특권 논쟁
Q. 사유는 심지어 연장에 대한 관념까지도 갖고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사유 속성은 다른 속성들의 양태를 재현하는 관념도 갖지 않는가? 또한 관념은 관념에 대한 관념도 갖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사유는 연장보다 뛰어난 속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속성 중에서도 최고 속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A. 그거는 사유라는 속성이 갖는 ‘능력’일 뿐이다. 능력의 문제와 속성의 문제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사유 속성이 사유 능력과 맺는 관계는 다른 속성이 그 속성의 능력과 맺는 관계와 같다. (이 부분은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렇다면 연장의 속성 안에서는 우리가 모르는 연장만의 능력이 사유 능력처럼 존재한다는 얘긴가? 단지 우리가 그것을 사유하지 못한다는 얘긴가? 사유는 이미 연장과는 다른 속성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유의 속성 안에서 사유하는 우리로서는 연장의 능력을 도저히 사유하지 못한다는 그런 얘긴가?) 

정리 13에 대한 설명
-“가장 단순한 신체들”: 아직 실질적인 개체를 이루지 못한 것. 실질적인 개체란 그 자체로 어떤 복합체인데, 여기서 말하는 ‘가장 단순한 신체’라는 것은 미분에서의 ‘dx’처럼 그저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개체임. 실존하지 않고 원리만 있는 개체. 'res'야말로 ‘가장 단순한 신체들’의 개념에 부합하는 용어가 아닐까. ‘가장 단순한 신체들’은 오로지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에 의해서만 구분된다. 즉 그 자체로 ‘운동’인 어떤 것. 마치 소립자처럼.
-“조성체들”: 일정한 방식, 일정한 관계를 표현. 개체는 조성체들로서 실존한다. 개체들의 개체인 조성체. 조성체의 개체인 조성체. 즉 조성체는 더 큰 조성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된다.
-어떤 물체들이 합일되어 있다는 것은: 크기가 같거나 다른 다수의 물체가 다른 여러 물체들의 압력을 받아서, 즉 외적 강제에 의해서 서로 접합하거나, 아니면 같은 속도로 혹은 다른 속도로 움직일 경우 (그래서 마치 한 덩어리나 마찬가지로 행동할 경우), 그리하여 자신의 운동을 ‘일정한 방식’으로 전달할 경우, 우리는 이 물체들이 합일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체들이 더 큰 개체를 조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3이라는 개체와 4라는 개체가 외적 강제에 의해 3/4이라는 방식으로 접합했다고 하자. 3이라는 개체와 4라는 개체가 관계 맺은 방식인 3/4는 그 자체로 하나의 복합개체다. 이 복합개체는 자신의 운동을(자신의 관계맺음방식을, 자신의 운동의 일정한 방식을) 아래와 같이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3/4 = 6/8 = 9/12 …
-이렇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라는 기호로 연결되는 더 큰 복합체가 탄생한다. 그리고 이때 전체 형상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각각의 개체들은 본성이 동일한 다른 개체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게 가능하다.
3/4 = 육/8 =9/12 …  
-개체의 정의를 분수가 아니라 파도타기에 빗대볼 수도 있지 않을까. ‘술을 마시는 행위’를 ‘운동의 일정한 방식’이라 할 때, 화살표 방향을 따라 운동이 일정한 방식으로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개체들 사이에 하나의 거대한 파도의 흐름이 일어나고, 하나의 운동 방식으로 거대한 파도의 흐름을 낳는 이 모든 개체들은 합일되어 있는 셈. 이때 술을 마시는 행위만 연출할 수 있다면 그 술이 맥주가 되었든 소주가 되었든 상관은 없다. 중요한 것은 술의 성분이 아니라 술을 마시는 행위니까. 술을 마시는 행위는 어쩌면 ‘유전자’ 같은 것인지도.    
-우리는 위와 같은 사유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도출해낼 수 있다. “개체란 하위 개체들이 서로 계속해서 ‘운동을 전달’하는 동적인 관계이며, 개체의 외부에 교란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개체는 일정한 닫힌 순환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개체들은 변이를 겪을 수 있다. 예를 들면 ‘파도타기’라는, 하나의 거대한 개체의 양상에 변이가 일어날 수 있다. 파도 속도가 점차 빨라진다거나 혹은 파도의 부침이 점차 거칠게 일어난다거나. 우리는 이를 ‘변용’이라 부른다. 

이미지와 상상: 우리가 지각하는 관념은 우리 신체의 관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 정신의 본성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본성을 구성하는 진짜 관념은 무엇에 대한 관념이란 말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신체에서 생산된 “변용”의 관념’이다. 관념이라는 것은 ‘사물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사물이 우리 신체에 가한 변용’에 대한 관념이다. 그렇다면 개체들의 고유한(?) 관념은 어디에? 그것은 인간 정신이 아니라 신 안에 주어져 있음. 

따라서 인간의 인식이 부적합하게 일어나는 까닭은, 데카르트 말처럼 참된 인식이라면 자고로 부적합할 수가 없는데 다만 ’의지‘의 방해 때문에 그것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그런 게 아니라, 애초에 우리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들을 우리가 갖지 못하기 때문에, 즉 우리는 다만 사물에 대한 관념을 갖는 게 아니라 사물이 우리 신체에 가한 변용에 대한 관념만을 인식하기에 애초에 부적합할 수밖에 없는 것임. 애초에 우리는 사물이 우리 신체에 가한 변용에 대한 관념이라는, 아주 아주 주관적이고 편파적이고 불완전한 관념만을 갖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인식은 언제나 부적합할 수밖에 없음. “우리 정신은 신체에 직간접적으로 작용을 가해오는 많은 것들을 지각하지만 그런 지각이 그런 작용을 가한 물체들의 참된 구조를 알려주는 건 아니다. 오히려 변용들이 지시해주는 것은 대상들의 실재적 특징보다는 오히려 우리 자신의 신체 상태다.” 즉, 인식은 참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부적합하다. 다만 그러한 인식을 통해서 그렇게 인식하는 우리 자신의 상태를 파악할 수는 있다. 

사지 절단된 사람이 느끼는 환상고통 같은 것을 한 번 예로 들어보자. 마치 사지가 존재하는 듯이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인식(사지가 존재한다는 인식)은 부적합하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걸 보면서 우리는 그가 아직도 자신의 사지에 미련을 못 버렸다고 판단해볼 수 있다. 그런 식으로 그의 상태를 파악해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변용을 ‘이미지’라 부르며 이 변용에 대해 우리 정신이 갖는 의식을 ‘상상’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우주삼라만상이 사실은 모두 내 안에서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인 것.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은 그러한 이미지에 대한 상상인 것.  

 

3부 

관념과 정서의 구분(p.83):
관념- 사물(things)에 대한 것, 표상적이고 재현적인 사유 양태(정서에 선행함)
정서- 비표상적인 사유 양태 

이러한 구분은 좀 애매해서 어떨 때는 정서가 관념의 일종으로 묶이기도 함. 그러나 관념과 정서가 결정적으로 차이나는 점은, 전자가 정태적이라면 후자는 동태적이라는 것이다. 관념이나 정서나 다 양태고 변용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관념은 외부 신체와 우리 신체가 만나서 혼합된 ‘정태적인 상태’이고, 정서는 능력(신체활동능력, 정신사유능력)의 증가와 감소라는 이행, 이동. 능력의 끊임없는 변이, 동적인 이행(한 완전성의 정도에서 다른 완전성의 정도로 이행). 실존력의 연속적 변화, 변화하는 선율. 정서 없이도 관념은 있을 수 있지만 대개 관념은 정서를 수반함.     

신체활동능력의 증감에 관계하는 정서(평행론): 정서의 변화는 신체활동능력의 증감과 관계된다. 평행론(신체나 정서나 동일한 것의 상이한 표현)에 의거해서 정서를 컨트롤함으로써 신체의 활동 능력을 조절할 수 있는데, 이때 정서를 컨트롤하는 거는 이성이 아니다. 이성이 광포하게 날뛰는 정서를 제어하고 그러는 건 웃기는 얘기. 사실상 정서를 컨트롤하는 것은 더 큰, 더 강력한 정서다. 이성은 무력하다. 

코나투스: 모든 사물은 스스로 파괴할 수 있는 그 어떤 내적 모순도 안고 있지 않음. 오히려 각각의 사물은 자기 안에 존재하는 한에서 자기 존재에 머무르려고 노력함. 그 노력이 바로 코나투스. 코나투스는 곧 사물의 현행적 본질. 코나투스는 실존하는 것들에만 있음. 상상적인 것, 비실존하는 것에는 코나투스 없음. 모든 사물은 ‘활동’한다. 활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물을 사물이라고 인식 가능한 것이다. 즉, 실존하는 사물=현상하는 사물=활동하는 사물. 활동한다는 것은 곧 저항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ex. 회전하는 구, 돌아가는 선풍기) 코나투스=저항성=머무르려고 하는 성질=노력=능력. 실존의 사라짐은 곧 코나투스의 사라짐임.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홉스의 코나투스: 이 둘은 의미가 좀 다름. 전자는 ‘개체성을 정의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지키려는 노력. 후자는 생물학적 이기주의, 전체에서 분리된 한 개체의 추상적 생명운동, 자기보존본능. (자살에 대해: 온갖 혼동과 탈선, 슬픔 속에서도 개체한테는 언제나 자기의 본질을 최대한 현실화하려는 노력이 존속되고 있음. 그렇다면 자살하는 개체는? 그 개체는 제 정신이 아닌 거다. 자기 정신이 아닌 다른 정신에 영향 받고 있는 것, 종속되어 있는 거다.) 

욕망: 욕망은 자기 본질에 머무르려는 개체의 노력, 즉 코나투스가 사유의 속성으로 표현된 것.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욕망은 정신분석학에서의 그것처럼 결핍에서 비롯하는 게 아님. 스피노자의 욕망은 부정 없는 긍정. 그의 욕망은 욕망하는 대상과의 관계 이전에 존재한다. 욕망의 선차성. 우리에게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능력의 증감을 경험하고 이것이 곧 기쁨과 슬픔으로 지각되는 것. 모든 정서는 신체가 복합적인 개체들로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복합적임. 그것은 우리 신체에 전면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음. 양가적일 수도 있음. 

각종 정서 분석
미래나 과거의 사물의 이미지에서 생겨나는 정서: 희망, 공포
사물의 정서에 동일시됨으로써 생겨나는 정서: 연민, 호의, 분개, 질투
사물의 정서에 반동일시됨으로써 생겨나는 정서: 질투
기타 등등. 

감응, 정서모방: 우리와 유사한 외부 신체에 어떤 정서가 촉발되면 우리 신체 안에서도 그런 작용이 실행된다. 신체적으로 유사한 개체끼리는 정서적으로도 서로 감응하는 것. 서로 영향 받는 것. 한 곳에서 촉발된 정서가 유사한 신체들 사이에서 서서히 번져나가는 것, 단풍처럼 물들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정서적 모방. 정서적 모방은 신체 구조의 유사성, 신체적 변용의 유사성에서 나오므로 신체 구조가 다른 신체에 대해서는 일어나지 않음. 신체 구조의 유사성의 한도는 정서모방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사후적으로 알 수 있을 뿐.   타르드는 사회의 토대를 정서 모방에서 찾음. 계약 이전에 존재하는 모방. 전자가 강제적이라면 후자는 자발적. 파동, 흐름으로서의 모방. 정서모방, 즉 ‘따라하기’는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으로 분류되기 이전의 어떤 원초적, 시원적 행동양식. 그들이 나에게 보여주는 사랑을 통해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한편, 마트롱은 사회의 토대를 명예욕에서 찾음. 다른 사람 맘에 들려는 노력.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기. 근데 이건 지배욕으로 변질되기 쉬움. 즉, 자기가 기뻐하는 거를 대중에게 강제하면서 너도 기뻐하라고 윽박지르는 걸로 변질될 가능성. 

수동적 정서와 능동적 정서: 감정의 원인을 모를 때는 그것이 기쁨일지라도 수동적 정서임. 적합한 원인을 알면(인식을 하면) 그것이 슬픔일지라도 능동적 정서임. 정신이 자기 활동능력만을 고찰할 경우, 질투나 슬픔이 없고 대신 욕망과 기쁨이 존재한다. 이때의 정신은 자기 본성에서 생기는 기쁨을 알고 있는 것. 

 

4부 

 

5부  

정리 10. 우리는 우리의 본성과 대립되는 정서에 압도당하지 않는 동안에는 지성에 일치하는 질서에 따라서 신체의 변용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것을 연결하는 힘을 가진다.
:자유인은 지성에 부합하는 질서와 연결을 갖는다. 그의 신체적 변용, 정신적 변용, 정서의 양상(?)... 즉 ‘그’라고 하는 한 개체의 다양한 속성, 속성으로 표현되는 양태, 그 양태의 변용은 그의 지성(이성)에 부합하여 이루어진다. (그가 진정한 자유인이라면)
 
정리 10 주석 요약
:자유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이성에 기반하여, 이성의 관점에서, 이성에 기초하여) 올바른 생활방식이나 특정한 생활 규칙을 정립하고 그것을 기억에 남겨서 삶에서 흔히 발생하는 개별적인 경우에 계속해서 그것을 적용해야 한다. 이성적으로 너 자신을 인식하고 그것을 토대로 이성적으로, 이성에 일치하는 질서에 따르는 너만의 생활규칙, 맞춤형 생활규칙(?)을 정립하라. 마치 정신분석자가 환자 심리를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하여 신경증에 걸린 환자의 현재 상태를 환자 자신에게 통렬하게 인식시키는 것처럼.  

현자(자유인, 이성으로 사유하는 사람)가 보여주는 행동 양식: p.343
(...)그러므로 자신의 정서와 충동을 오로지 자유에 대한 사람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은, 가능한 덕과 함께 덕의 원인을 인식하고 덕의 참다운 인식에서 생기는 환희로 영혼을 충만하게 하려고 할 것이다. (p.343) 

정서에 대한 정신의 능력:
정신은 정서를 인식할 수 있고, 외적 원인의 사유로부터 정서를 분리시킬 수 있다. 즉 정서를 객관화하여 고찰할 수 있다. (이것이 제 2의 인식. 그렇다면 제 1인식은? 정념에 매몰되어 외적원인의 사유와 결부된 정서만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 정신(이성, 지성)에 기반하여 적합하게 정서를 인식함으로써 비롯하는 이 정서(제 2의 인식에서 비롯하는 정서)는 외적원인의 사유와 결합된, 정념에 휩싸인 상태에서 비롯하는 정서(제 1의 인식에서 비롯하는 정서)보다 우위를 점한다. 결국 정신은 정서의 질서와 연결을 재구축, 재편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정리 10에서 말한 바처럼)

제 3인식=직관지:
이것은 신의 인식 자체를 기초로 삼는 명석판명한 인식(p.349). 이 인식은 수동적인 한에서의 정서들을 절대적으로 소멸시키지 않아도 적어도 그 정서들로 하여금 정신의 가장 작은 부분을 구성하게끔 한다. 또한 명석판명한 인식은 불변하며 영원한 것에 대한, 즉 우리들이 진실로 소유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을 생기게 한다. (p.350 1~5줄) 

인간의 정신은 신체와 함께 완전히 파괴될 수 없고 그 가운데 영원한 어떤 것이 남는다(정리 23). 그리고 이러한 ‘영원한 어떤 것’은 인간 정신의 본질에 속하며, 우리는 이것을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 신체의 본질을 파악하는 일이다. 이러한 활동은 ‘정신의 본성’이며, 이러한 활동으로 생겨난 관념은 필연적으로 영원한, 특정한 사유양태(p.352 1줄)이다. 바로 이것이 직관지. 제 3인식을 통해 얻어진 관념은 신의 영원하고도 무한한 본질을 포함하는 관념이다. 

이러한 관념 속에서 우리는 우리들이 영원하다는 것을 느끼며 경험한다. 비록 우리들이 신체에 앞서서 존재했다는 것을 상기하지 않을지라도,(“우리들은 원래 신체에 앞서서 존재했다”고 적고 있는 스피노자의 표현이 흥미롭다. 특히 스피노자가 정신의 본질을 하나의 문장으로서 표현할 때 선택한 어휘, ‘앞서서’라고 하는 바로 이 어휘가 흥미롭다. 이 한 문장만 보면 참으로 시적이다. 마치 어떤 잠언처럼 느껴진다.) 우리들의 정신은 영원하다는 것 그리고 정신의 이 존재는 시간으로 정의하거나 지속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느낀다. (p.352) 

정신의 최고의 노력과 최고의 덕은 세 번째 종류의 인식에 따라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다.(정리 25)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서 최고의 정신의 만족이 생겨난다.(정리 27) 그런데 이때 세 번째 종류의 인식에 따라서 사물을 인식하려는 경향이나 욕망은 첫 번째 종류의 인식(정념에 휩싸여 외부요인과 결부된 정서만을 인식하는 단계)에서는 생길 수 없지만, 두 번째 종류의 인식(자기 객관화 시켜서 외부원인과 정서를 분리시키고 지성에 기반하여 정서를 고찰하는 단계)에서는 생길 수 있다.(정리 28) 

정리 34. 정신은 신체가 지속하는 동안이 아니면 수동에 속하는 정서에 종속되지 않는다.
: 이것을 다른 말로 바꿔보면, 우리가 수동에 속하는 정서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우리가 우리의 신체 속에서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신체 속에서 지속하는 한 종속은 불가피하다. 숙명이다. 
 
정리 36. (...)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의 일부이다.
: 제 3인식 활동은 원인으로서의 신의 관념을 동반하면서(즉 공통개념을 원인으로 하면서, 공통개념에 기반하면서, 공통개념과 더불어서) 정신이 자기 자신을 고찰하는 활동이다. (정리 36 증명에서 스피노자는 직관지가 공통개념과 더불어서 이루어진다고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죽음에 관하여:
정신의 명석 판명한 인식이 크면 클수록, 정신이 신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만큼 죽음은 덜 해롭다.(p.362 4줄) p.351 정리 23에서 스피노자가 말했던 걸 기억하자. 신체가 파괴된 이후에도 남아있는 영원한 어떤 것이 있다고. 신체가 파괴된 이후에도 남아있는 영원한 어떤 것, 정신의 본질! 이것에 비하면, 신체의 죽음 같은 것은 별로 대수롭지도 않는 것이다.  

자유인의 능력(p.362 정리 39의 증명 부분):
여러 가지 활동에 적합한 신체를 가진 사람은 나쁜 정서에 거의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는 신체의 변용을 지성에 일치하는 질서에 따라서 질서 잡고 연결하는 힘을, 따라서 신체의 모든 변용을 신의 관념에 관계시키는 힘을 소유한다. (...) 그는 그 가장 큰 부분이 영원한 정신을 소유한다.

우리의 정신은 인식하는 한에서 사유의 영원한 양태이고, 이것은 사유의 또 다른 영원한 양태에 의해서 결정되며 그것은 다시금 다른 것에 의해서 결정되고, 이처럼 무한히 계속되어 모든 양태는 동시에 신의 영원하고 무한한 지성을 이룬다.(p.364 밑에서 6째 줄)
: 이것은 사물 질서와 연결의 방식에 대해 말했던 2부 정리 7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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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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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는 자신의 불행이 강자의 무절제한 행동에 있다고 여겨 원한을 품는다. 그러나 외부를 향했던 이 폭력적 감정은 “돌발적 사태” 이후 철저히 내면화 된다. 모든 죄를 제 탓으로 돌려 양심의 가책 속에서 살아가는 약자. 도덕의 계보 제3논문에서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약자가 ‘금욕주의적 이상’이라고 하는, 삶에 반대되면서 우선시되는 경건한 가치들을 고안해내고 그러한 가치들을 통해 삶 자체를 단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금욕주의자들은, 삶을 “저 다른 생존을 위한 하나의 다리”로 간주한다. 그들은 삶을 “반박해야만 하는 오류처럼 취급”함으로써 비로소 삶을 영위한다. 삶을 부정함으로써 삶을 누리는 이러한 자기 모순적 삶의 유형에서 니체는 극심한 원한을 발견한다: “여기에는 견줄 데 없는 원한이, 즉 삶에서의 어떤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삶 자체, 그 가장 깊고, 강력하며, 가장 기저에 있는 조건들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기갈 들린 본능과 힘 의지의 원한이 지배하고 있다.”(481) 

금욕주의자들은 오로지 힘의 원천을 봉쇄하기 위해 힘을 사용한다. 그들은 욕망(생명력, 힘, 에너지)의 표출을 경계하고, 미의 표현이나 기쁨에 서툴며, 반면에 발육 부전, 고통이나 사고, 추악한 것이나 자발적인 희생, 자기 상실이나 자기 질책, 자기희생에 대해서는 환희와 희열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의 전제조건인 생리적 삶의 능력이 감퇴할수록 더더욱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의기양양해 한다. 

자기를 서서히 말려 죽여가면서 자기를 발견하는 기묘한 금욕주의자들. 이들은 퇴화되어가는 자신들의 삶을 방어하고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금욕주의적 이상’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이상을 찬양하지만, 기실은 이상에 지배당한 채로 언제나 죽음, 권태, 피로, 종말을 향한 소망 따위와 대항하여 싸우고 있을 뿐이다.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을 고안해 내어 반응적인 무리를 장악하는 사람을 '성직자'로 유형화한다. 성직자는 반응적 무리를 간호하는 건강한 자가 결코 아니다. 반응적 무리와 접촉한 상태에서 이들에 감염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들을 간호하거나 치료하는 건강한 자의 존재를 상정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성직자는 반응적 무리의 필요와 요청에 의해 태어난, 가장 강력하게 반응적인(병든)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병든 무리의 구원자이자 목자이자 변호인으로서 무리를 통솔하고 지배하고 혹은 좀 더 중독시키기 위해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는 외견상으로는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을 제안하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무리의 고통스런 현실을 보존하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는 자이다. 

원한 감정의 내면화는 공동체의 성립이라는 돌발적인 사태에 직면하여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성직자의 기만술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어쩌면 ①공동체의 성립과 ②무리의 지도자로서 성직자의 출현, ③원한 감정의 내면화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역사 이후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 아닐까?) 병든 무리가 자신들이 겪는 고통에 분개하며 책임자를 색출하려 할 때,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모든 고통의 책임이 오로지 너희들 자신에게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원한의 방향을 변경시킨다. 그럼으로써 공동체의 일원들은 더 이상 서로 짐승처럼 싸우지 않고 내면의 깊이를 지닌 온순한 양이 되어 저마다의 마음의 골방에 처박혀 죄의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죄의식에 너무나 시달린 나머지 죽어버리면 안 되므로 성직자는 간간이 “작은 즐거움”이라는 처방을 내린다. 이웃을 사랑하고 선행을 베풀고 상호성을 지향하고 공동체를 수호하도록 조언함으로써 무리로 하여금 소소한 행복감에 젖도록 하는 것. 그러나 그는 진정한 구원자가 아니며, 차라리 구원자의 탈을 쓴 사기꾼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병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지 않으며, 그저 각종 위로 수단을 동원해 일시적으로 고통을 잊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니체는 종교 뿐 아니라 철학, 과학, 역사 등 각종 근대 학문이 품고 있는 금욕주의적 성향을 철저히 해부한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분 아래 세계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고 기술하려는 그 모든 학문적 노력에서 니체는 도그마에 사로잡힌 관조적 인간, 반응적 인간, 병적인 인간을 읽어낸다. 

대체 왜 인간은 현실의 저편에 금욕주의적 이상을 세워놓고 인생을 구경거리로 만드는가. 인간은 왜 고통의 축제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지 못하고, 썩은 등받이 의자에 앉아 고통의 의미나 골몰하며 생을 소진하는가. 스스로를 긍정할 줄 모르는 병든 인간은 무언가를 의욕하기 위해 먼저 제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발견해야만 했다. 그리고 금욕주의적 이상 속에서 고통이 ‘죄’라는 관점으로 해석됨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하나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드디어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니체는 인간이 금욕주의적 이상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됨으로써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다고 말한다. 이때의 구출된 의지란 바로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하고 반발하려는 의지, “허무를 향한 의지”이다.

끊임없이 의미를 탐구하는 인간의 학문적 노력이 니체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긍정할 줄 모르는 반응적 인간의 병적 징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신이나 진리라고 하는 그 모든 금욕주의적 이상, 그것은 고통으로 얼룩진 삶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이 지어낸 강박적 환상일 뿐인가. 진리를 밝히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며 신은 처형되어야 마땅한가. 그러나 초월적이고 원대한 가치를 발견하려는, 또는 그러한 것을 지향하려는 끝없는 상승의지, 자신의 의미결핍을 극복하고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로서 온전한 실존을 찾고자 하는 욕망- 이 모든 것은 어쩌면 인간이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찬란한 본능인지 모른다. 도그마에 짓눌린 채 대지에서 벌어지는 삶의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인간도 가련하지만, 마음속에 그 어떤 정신적 항성(恒星)도 지니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 역시 딱하기는 매한가지 아닐까. 

탈리히는, 금욕적인 생활 속에서 존재성을 파악하려고 애써야 하는 피안의 타자로서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의 기반'으로서의 신을 얘기한다. 모든 존재의 무궁무진한 깊이와 기반에 대한 이름이 곧 신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신이란 우리 존재 전체의 궁극적인 깊이이며, 우리 실존 전체의 창조적인 기반과 의미이다. 신은 자연 위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의 '황홀성' 속에 그 초월적인 '깊이'와 '기반'으로 존재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니체가 단칼에 베어버린 독단적 권위와 도그마의 시체 위에서 우리는 그저 '허무'만을 곱씹어야 하는 것일까. 모든 자명한 것들의 폐허 위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새롭게 재건할 수 있지 않을까. 탈리히가 정의하는 ‘신’ 개념은 이러한 물음을 풀어가는 데 하나의 실마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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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10-04-10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발제까지.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진심 '부럽습니다'ㅋㅎ

수양 2010-04-1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발제도 써가야 되는 빡센 프로그램인 줄은 미처 몰랐어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