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와 파스칼 -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
이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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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미학적 자기완성을 위해 신 내지는 신으로 상징되는 무한, 영원, 불멸 등의 형이상학적이고 초이성적인 요소 즉 초월성을 필요로 하는가 하지 않는가. 파스칼과 몽테뉴의 차이는 여기 있다. 신본주의자 파스칼과 인본주의자 몽테뉴. 먼저 파스칼.

 

파스칼은 모든 주제 속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비참’의 현상과 그 이면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실체를 발견한다. 파스칼의 인간학에서 비참과 위대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두 개의 축이다. 그래서 인간은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더 위대하고 반대로 위대하면 할수록 더 비참하다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p.59~60

 

파스칼은 비참의 현상 속에서 위대성을 읽어내고 그러한 사고 과정을 '배후의 사고'라 칭하면서, 몽테뉴가 현상적 사고에만 머물며 그것과 한쌍을 이루는 현상 배후의 원인 즉 위대성을 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파스칼이 보는 몽테뉴는 "비참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인간의 비참을 감지하는 그의 의식의 투명함과 감수성의 다양함은 우리를 매료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는 이 비참을 비참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 어떤 다른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비참하니까 비참하다는 동의어 반복이 고작이다. 그의 비참은 그 안에서 맴돌 뿐 어떤 탈출구도 없다. 완전히 갇힌 세계이다."(119)

 

인간 인식의 근본적인 한계와 세계의 불확실성 속에서 그 어떤 심오한 배후의 실체도 인정하지 않고('신음하며 추구하기'를 포기하고) 다만 현세의 쾌락을 긍정하는 몽테뉴를 신의 아들 파스칼은 불성실하다며 비난한다. 그러나 글쎄, 오히려 파스칼의 인간론이야말로 병리적인 것이 아닐까.

 

파스칼의 인간론은 기독교인 특유의 마조히즘을 보여준다. 니체 식으로 말하면 비참의 한가운데서 위대성을 발견한다는 건 사자가 되지 못한 양떼의 자기연민이자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그것은 피해자의 자기 성화(聖化)작업이며, 원한에 사로잡힌 약자의 위선적이고도 기만적인 세계인식일 뿐이다. 원죄와 추방, 대속과 구원이라는 줄거리는 어떤가. 마음에 인스턴트식 평안을 주는 하나의 괴이한 시나리오가 아닌가. 일단, 나는 죄진 게 없다. 설령 나도 모르게 어떤 끔찍한 죄를 저질렀더라도 예수님이 내 죄를 대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게 죄가 있다면 그 죄는 오로지 내가 풀어나가야 할 나만의 고유한 과제일 것이다. 나는 오로지 내 책임이며 나만이 나를 구원할 자격을 지닌다.

 

그러나 더는 말을 말자. (그러기엔 너무 많은 말을 한 것 같지만) 모르는 세계에 대해서라면 개처럼 짖어대기보다 침묵을 택하자. 다만 이 모든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 파스칼보다는 몽테뉴를 더 찾아보게 될 것 같다. 오직 근대적 휴머니즘의 영향권 아래서 지적 성장을 이뤄왔고 또 이뤄갈 나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몽테뉴가 견지하는 아래의 입장에 동조한다.

 

[몽테뉴는] 자신이 속해 있고 자신이 인지할 수 있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이 유형의 실재하는 세계만을 자신의 세계로 인정한다. 물론 이 세계는 유한하고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 우리는 그 안에서 그 어떤 완전성도, 절대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영역이고 그의 한계다. 인간은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 '오, 나의 영혼아, 영원한 삶을 탐내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소진하라', 핀다로스(Pindare)의 이 명구는 바로 몽테뉴의 것이기도 하다. (...) 그는 자연을 넘어서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단호함이 있다. 인간이 자신에게 허락된 조건과 한계 안에 머무는 것은 그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지적 정직성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p.12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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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 읽기 세창명저산책 11
강미라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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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읽을 엄두가 안 나서 이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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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그라피 - 텔레비전에 관하여 현대사상의 모험 30
자크 데리다. 베르나르 스티글러 지음, 김재희 외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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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인공적 현재성'은 데리다의 말, 2부 '텔레비전에 대한 탐색'은 데리다와 스티글레르의 대담, 3부 '구분되는 이미지'는 다시 스티글레르의 말로 이루어져 있다. 입문서라 하는데도 프랑스 특유의 사변적인 말투에다 철학적 조어까지 난무하여 전혀 입문서 같지 않다. 제대로 읽었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투박한 수준의 정리라도 안 해놓으면 머릿속에서 완전히 휘발해버릴 것 같아 이렇게라도 남겨놓는다. 이 책은 민음사에서 나온 <현대사상의 모험> 시리즈 중에 한 권인데 현대사상의 '모험'이라니, 이 얼마나 설레고도 멋진 총서 제목인가. 비록 어마무시한 책들로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숲에 들어가 몇 십년 헤매어 보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모험일 테니 다시 생각해도 참 잘 지은 이름이다.    

 

*

 

데리다는 원격기술을 사용하는 언론 매체 장치에 의해 매개된, 즉 계산되고 제약되며 양식화되고 주도된 현실은 ‘만들어지는’ 현재, 인공적으로 구성된 현재라고 말한다. 현실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의 순수한 어떤 것이 아니다. “현재성이 준거하고 있는 현실이 아무리 독특하고 환원 불가능하고 완강하며 고통스럽거나 비극적이라 해도, 이는 항상 허구적인 공정을 통해 우리에게 도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현실의 허구성에 대한 자각이 결코 “알리바이”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모의물의 과잉에 굴복해서는 안 되며, 또는 미혹의 미혹, 사건의 부인이라 불릴 수 있는 것 속에 존재하는 위협을 중화시켜도 안 됩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 심지어는 폭력과 고통, 전쟁과 죽음마저도 이 언론 매체 장치들에 의해, 그것들을 위해 구축되고 허구화되고 구성되며, 따라서 어떤 것도 [실제로] 발생하지 않으며, 오직 모의물과 미혹만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공적 현재성에 대한 해체는 가능한 한 멀리까지 수행하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비판적인 신관념론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보드리야르를 경계하고 있는 듯한 데리다의 논리적 지점은 그렇다면 어디인가. 그가 강조하는 것은 ‘독특성(singularite)’과 ‘모순성’이다. 모도 아니고 도도 아닌, 섣불리 단정할 수 없는 어떤 미묘함 속에 깃든 모순과 역설과 이중성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일관된 해체는 독특성에 대한 사상이며, 따라서 사건에 대한, 그리고 사건에서 마지막까지 제거될 수 없는 것으로 보존되는 것에 대한 사상임을 명심해야 하며, 또한 ‘정보’는 모순적이고 이질적인 과정임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선사하면서 또한 감추는, 매개하면서 또한 오염시키는, 왜곡되게 하면서 또한 창조하는, ‘인공적 현재성’이 보여주는 이러한 모순과 이중성으로부터 우리는 도리어 어떤 ‘여지’를 발견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해볼 수 있게 된다. “정보는 전환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며, 지식과 진리, 그리고 도래할 민주주의의 대의를 위해, 그리고 이것들에 의해 지휘되는 모든 문제들을 위해 사용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인공적 현재성이 아무리 인공적이고 조작적이라 하더라도, 도래하는 것의 도래에 대해, 도래를 전달하는 것이며 또 도래가 그리로 향해 가고 있는 것인 사건에 대해, 그리고 비록 마지못해 그런 것이긴 하지만 인공적 현재성이 증언하게 될 것[즉 도래하는 것의 발생]에 대해, 순응하거나 순종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우리는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

 

데리다에게 있어서 가상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더 이상 이 개념을, 사람들이 얼마 전까지 잠재태와 현실태, 즉 뒤나미스와 에네르게이아, 그리고 질료의 잠재성과, 목적 및 진보 등에 따라 [질료를] 규정하는 형상을 구분했던 것처럼 철학적으로 태평하게 현재적 현실성에 대립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가상성은 생산된 사건의 구조에 직접 새겨지며, 이미지, 담론, ‘정보’의 시간 및 공간, 요컨대 앞서 말한 현재성, 가정되고 있는 현재성의 현존의 집요한 현실성에 우리는 연결해 주는 모든 것을 변형시킵니다.” 데리다에게 현실과 가상은 단순 대립구도가 아니다. 현실성과 가상성은 겹쳐 있으며, 가상성은 궁극적으로 현실을 변형시킨다. 원격 기술에 의해 시공간이 재구성되는 ‘현재의 세계’에서 ‘현재성’은 가상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상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현재성은 동시에 가상성이라는 것이다.

 

*

 

현재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현재성에 대한 ‘비연대기적 방식’으로의 접근이다. “저는 많은 경우 이른바 현재성에 대한 비동시대적인 접근법들이 현재하는 것에 가장 ‘몰입해’ 있다는 점을 기억해 두려 합니다. (...) [현재성의] 난관이나 위험, 기회, 계산 불가능한 것은 아마도 제시간에 도래하는 어떤 비동시대성의 형태를 취할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것, 정확하게[정의롭게] 시간에 맞춰 도래하는 것의 형태 말입니다. 정확한[정의로운] 까닭은 그것이 비연대기적이고 [연대기적 시간에서] 탈궤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척도를 벗어나며, 정확성이나 표준적인 적용과 무관하고, 자신이 지휘하도록 되어 있는 법 자체에 대해서까지도 이질적인 정의처럼 말입니다.) 이는 현재성의 현재보다 더 현재적이며, 역사 속으로의 타자의 틈입을 나타내는 독특한 일탈에 더 부합합니다.”

 

데리다는 연대기적 시간 속에서 불현듯 탈궤되어 있는 비연대기적 일탈, 타자의 틈입을 나타내는 이 독특한 일탈에서 (초월성보다는 내재성을 갖는) 메시아적인 것을 본다. “이러한 틈입은 항상 비동시대적이거나 예언적인, 또는 메시아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열광이나 장관을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거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메시아적인 것에 대한 책임 있는 응답이란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하는가. “그것은 이러한 비동시대성의 불일치, 불균형 또는 불협화음을 요구하며, 이러한 비연대기성의 정의로운 탈궤(정확한 부정확성)를 요구합니다. 지연시키고 거리를 두고 지체시키면서도 동시에 촉진시켜야 합니다. 현재성을 가로질러 발생하는 것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합니다.”

 

*

 

탈궤로부터 생성되는 차이에 대해 데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차이(=차연)는 하나의 관계를 표시하면서 동시에 또한 전유/고유화 불가능한 것이고 뜻밖의 것이며, 따라서 긴급하고 예견 불가능한 것이기도 한 도래하는 것, 도착하는 것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차이의 사상은 또한 긴급성의 사상이며, 다르기 때문에 내가 회피할 수도 전유할 수도 없는 것의 사상입니다. 사건, 사건의 독특성, 바로 이것이 차이입니다. (...) 차이는 도래하는 것 또는 도래할 것의 임박성에, 사건의 임박성에, 따라서 경험 자체에 호응하려고 하는 사상입니다.” 이때의 경험은 “타자의 경제이면서 동시에 비경제”이다. (여기서 경제란, 교환 가능하고 응수 가능한 관계, 언어망 안으로 포섭될 수 있는 관계, 곧 ‘의미화’를 말하는 듯)

 

*

 

타자의 예견 불가능한 도래, 이는 곧 사건이다. “사건이란 발생하는 것 속에서 사람들이 제거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또는 부인조차 할 수 없는) 것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는 항상 타자에 대한 경험인, 경험 자체의 다른 이름입니다. 사건은 이와 다른 어떤 개념에도, 심지어는 존재의 개념에도 포섭되지 않습니다.” 사건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며, 응답해야 할 책임도, 윤리도 정치도 없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의미화 이전의 발생, 다만 메시아적 공간을 여는 발생일 뿐이다. 사건은 존재의 어떤 범주로도 귀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초에 선취될 수 없는, 기대할 수도 계획할 수도 없는, 그러한 지평조차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다.

 

사건에 대한 정의가 이러한 바,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도래 중이라고 이야기되는 어떤 이’, 즉 이방인, 신참자에게는 어떠한 계약이나 조건도 부과해서는 안 되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이러한 무조건적 환대는 결코 선(善)이 아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무조건적 환대는 예견불가능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도덕과 법과 정치를 훨씬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

 

“도착자는 절대적으로 상이한 것,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리라고 제가 기대하는 것, 제가 기다리지 않은 어떤 타자이어야 하며, 그것에 대한 기대는 기대하지 않음으로부터, 철학에서 기대 지평이라 불리는 것이 빠져 있는 어떤 기대로부터 생겨납니다. 만약 제가 사건이 존재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이는 사건이 아닐 것입니다. (...) 도착자는 엘리야처럼 항상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항상 열려 있는 이러한 가능성의 허무함 속에서, 즉 도래하지 않음, 절대적 낙담 속에서 저는 사건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사건은 항상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도래하는 사건은 사후적으로 악으로도 선으로도 분석되고 규정될 수 있지만, 아울러 그러면서도 언제나 그러한 분석과 규정으로부터 끊임없이 저항하는 절대적인 잔여를 갖겠지만, 그럼에도 데리다는 “장래의 개방이 보다 가치 있다는 것”, 즉 도래하는 자의 공간을 여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이 바로 “해체의 공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도래할 민주주의로서의 민주주의”라고. 전혀 다른 것이 도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민주주의라고.

 

비록 “사건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은 아니며, 장래는 무조건적으로 선호할 만한 것은 아님”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도래하는 자의 공간을 여는 것은 ‘정의’이다. 왜냐면 데리다에게 있어서 정의란, “법이나 권리가 아니며, 인간의 권리들을 초과하고 그것들을 정초하는 것”이므로. “(정의란) 분배적 정의도 아니고, 심지어는 인간 주체로서의 타인에 대한 존중이라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정의도 아닙니다. 이는 타자로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이며, 제가 타자를 타자이게끔 한다는 사실은 상환 없는, 재전유 없는, 법적 한정이 없는 선사를 전제합니다.”

 

정의가 통상적인 교환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선사’를 전제한다는 것. 선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교환체계에 틈을 내는 어떤 것이다. 즉 데리다가 말하고자 하는 정의는 마이클 센델 식의 정의가 아니다. 센델 식의 정의는 데리다에게 있어서는 아마도 부정과 공모하는, 부정과 상호관계를 이루는 유사 정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데리다의 정의는 분배의 경제가 탈궤되고 어긋나는 지점에 주목하고 바로 그러한 균열의 발생에 응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분배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분배의 불가능성을 증언하는 효과를 낳는다.

 

*

 

각주36 되풀이 (불)가능성의 개념에 대해서: “전통적인 관점에서 데리다가 새로 추가하는 것은 (...) 무한히 많은 상이한 상황들-맥락들에서 동일한 것으로서 되풀이될 수 있음은 항상 이미 자신 안에 선험적으로 변화-타자화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언어 행위를 할 때 이 언어 행위 자체는 항상 자신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다른 언어 행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히 언어 행위의 사실적인 조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인 조건을 이룬다.” 자신을 잃을 가능성을 담지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 오직 다르게 말해질 수 있어야만 비로소 말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런 의미에서 (...) 되풀이의 구조는 (...) 동일성과 차이를 동시에 함축한다. 가장 순수한 되풀이(하지만 이는 결코 순수하지 않다. 라캉 식으로 하면 $일 듯)는 그 자체 안에 자신을 되풀이로 구성하는 어떤 차이의 간극을 포함한다. 어떤 요소의 되풀이 (불)가능성은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선험적으로 분할한다.” 

 

기존의 문자기록이 “소통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기술적 도구”였다면, 즉 “전달해야 할 내용을 가급적 정확하게 전달하고 재현하는 것을 본성으로 하는 도구”였다면, 데리다가 보기에 오히려 “기록이 함축하는 것은 수신자의 절대적 부재, 나아가 송신자인 나 자신의 부재 속에서도 가능해야 하는 소통의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통은 송신자와 수신자의 절대적 부재의 가능성을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부재의 가능성 내에서 되풀이될 수 있어야 한다.” 즉, 소통이란 반드시 그 실패의 가능성을 존재론적 조건으로 한다는 것. 오직 소통 불가능한 소통만이 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이 개념의 핵심은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동시성 내지는 가능성의 조건과 불가능성의 조건의 동일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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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문트 후설, 엄밀한 학문성에 의한 철학의 개혁 살림지식총서 476
박인철 지음 / 살림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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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테브나즈의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보다 이 책을 먼저 읽는 편이 더 유익할 뻔 했다. 중요하게 생각되는 부분을 위주로 하여 거의 옮겨적다시피 정리해둔다.

 

후설은 전통철학이 편견이나 검증되지 않은 전제에 근거하여 세계를 파악하는 소박실재론(素朴實在論)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판단하고, 확증되지 않은 어떠한 전제에도 기반을 두지 않는 무전제성의 원리에 입각해 학적 엄밀성을 담보한 철학을 새롭게 정초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후설이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의식체험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면만 보이는, 즉 음영을 통해 주어지는 외적 사물과는 달리, 의식체험은 그 자체로 음영지지 않은 채 온전히 주어질뿐더러, 체험 자체가 그 존재성을 보증할 만큼 확실하기 때문이다. 의식체험을 기반으로 하여 주관과 객관의 상관성 속에서 의식이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 및 의식과 대상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후설의 현상학은 자연히 인식론적 탐구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철저하게 무전제적으로 의식체험에 대해 주어진 그대로를 기술한다 하더라도 인식론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식주관과 인식능력에 대한 해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식주관이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고 또 어느 정도의 인식능력을 지니고 있는지가 해명되지 않고서는 인식론적 논의가 전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 과정에서 인간의 의식 주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존재론적 성격 규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고, 결과적으로 인식론적 탐구는 불가피하게 존재론적 체계를 요청하게 된다. 요컨대 후설 현상학은 ‘어떻게 존재자가 의식주관에 주어지는가?’하는 인식론적인 관심이 바탕이 되어, 존재자의 존재 의미를 참되게 규정하려는 존재론적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하나의 철학적 방법론인 것.

 

'판단중지'는 인식론적 탐구를 위해 후설이 도입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판단중지란 우리 앞에 놓여있는 전 자연적 세계에 단번에 괄호를 침으로써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 세계 존재에 대한 일체의 존재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판단중지를 통해 세계의 존재는 괄호가 쳐지고 이론적으로는 이제 의식초월적인 세계는 더 이상 내게 효력을 지니지 않는다. 남아있는 것은 나의 의식뿐이다. 판단 중지 후에도 남아있는 의식, 다시 말해 ‘세계 무화의 잔여’, ‘현상학적 잔여’로서 세계 존재의 배제 이후에도 남아 있는 이 의식은 세계에 속하지 않고 이를 초월해 있는 의식이다. 후설은 이를 초월론적 의식 혹은 초월론적 주관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잔여로서의 의식이 초월론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러한 의식 또한 결국은 ‘세계-내-존재’로서의 의식이 아닌가? 미심쩍지만 어쨌든)

 

후설은 판단중지를 통해 발견된 초월론적 의식을 근거로 이에 대한 상관자로서의 세계를 주체화하고자 한다. 객관주의적인 방식이 아니라, 초월론적 주관주의적 시각에서 세계를 바라보고자 하는 이같은 후설의 입장은 자칫 의식지상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으나, 후설 현상학의 최종 목표는 어디까지나 ‘이 세계가 의식에 어떻게 주어지고 보이는가’ 하는 세계의 소여방식을 문제 삼는 것 그리고 이를 토대로 세계를 규명하려는 것임을 염두해야 한다. 후설이 의식과 주관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의 존재성을 절대화하기보다는 세계를 밝히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적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의식 자체보다 세계의 해명에 더 방점이 찍혀있는 것.

 

보편적 세계에 대한 현상학적 해명을 위해 후설이 언급하는 것이 '지평'으로서의 세계 개념이다. 모든 개별적 경험에서 나타나는, 그러면서 동시에 직접적으로 경험된 것을 넘어서 하나의 의미연관을 이루는 배경을 후설은 '지평'이라고 부른다. 지평을 형성하는 의미 연관의 체계는 임의적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인식 주체의 축적된 경험과 지식, 습성과 기억 등에 의존하여 어떤 규칙적인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 지평은 의미의 연관성만 있다면 기본적으로 부단히 확장 가능한데, 이때 모든 가능한 개별 지평들을 포괄하는 궁극의 보편적 지평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보편적 지평으로서의 세계' 곧 '생활세계'다. 생활세계는 앞서 말한 초월론적 주관성의 지향적 상관자이다. 초월론적 주관성이 지향하는 대상인 것.

 

그러나 엄밀히 말해 생활 세계는 말 그대로 모든 가능한 개별 지평들을 포괄하는 궁극의 보편적 지평이기 때문에 대상의 '배경'이 될지언정 결코 세계 내의 특정 '대상'으로서 주어지거나 주제화될 수 없다. 한데, 세계를 해명하기 위해 후설이 끌어들인 지향성 작용은 근본적으로 대상성의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작용인 바, 지향적 작용에 의해 구성되는 것은 원칙적으로 대상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후설이 지평으로서의 세계를 초월론적 주관성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해명하는 한, 이 세계는 대상화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결국, 세계의 지평성과 초월론적 주관성의 구성개념이 서로 상충하는 부분이 생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지평으로서의 생활세계가 그 안에 무수한 개별적 지평을 함유하고 있는 세계라는 점을 고려하면, 하나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지평을 선정, 이를 상상 속에서 자유변경하여 무수한 변양체를 만들어냄으로써 보편적 생활세계에 대한 간접적이고 비대상적인 본질직관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다양한 지평들의 공통된 구조로서 이른바 생활세계의 본질이 추출될 수 있는 것. 후설은 이렇게 파악된 생활세계의 본질을 '생활세계적 아프리오리'라고 부른다. 이 책에서는 후설이 생활세계적 아프리오리의 초월론적 해명과 관련해서 이를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다만 암시적으로만 언급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푸코가 후설이 남겨놓은 과제를 <말과 사물>에서 구체적으로(실사구시적으로?) 수행한 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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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9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0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zendental 2014-04-10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초월론적 자아는 훗설이 인식의 논리적 과정을 해명하려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현상학적 잔여라는 말은 초월론적 자아가 마치 데카르트적인 자아처럼 초시간적으로 존재하고 있는양 보이게금 하는 말이고, 그 때문에 훗설도 많은 오해를 받고 제자들도 초월론적 환원은 못 받아들이겠다며 도망 간 사람도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훗설의 의도는 초월론적 자아를 정적 현상학에서는 의미의 궁극적 기체로 보고 그 본질을 '사념함'(해석함)이라 하거든요. 그렇게 보면 세계-내-존재와 초월론적 자아는 동일하다고도 볼 수 있어요. 실제 하이데거는 초월론적 환원도 알고 있었고, 훗설도 하이데거가 초월론적 자아를 그렇게 이름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해요.

정리해보면, 훗설은 잔여로서의 의식이 초월론적이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고 볼 겁니다. 그리고 의식이 세계-내-존재로서의 의식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할 겁니다. 왜냐하면 첫번째는 훗설은 결국 자연적 태도가 초월론적 자아의 인식과 의미부여에서 형성되는 것은 분명하다고 볼 것이기 때문이이에요. 즉 '의미 부여' 하는 주관이 있다는 것을 해명하는 것이 목표라는 거지요. 둘째는 세계-내-존재가 초월론적 주관과 동일하다고 볼 겁니다. 세계-내-존재는 세계와 관계하고 교섭하면서 세계를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도록, 또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초월론적 자아가 세계-내-존재에 비해 시적 은유가 불충분하다는 점 때문에 오해를 사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반대로 세계-내-존재라는 말도 오해가 많은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사람들은 이 말이 한편으로는 의미의 궁극적 기체로서의 '주관'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쓰다보니 너무 긴 댓글이네요. 죄송합니다.

수양 2014-04-10 15:59   좋아요 0 | URL
죄송하긴요! 음... '초월론적 자아'라고 하니까 용어의 뉘앙스도 그렇고 해서 막연히 현상학적 사유의 초기 버전(?) 정도로 생각했는데... 초월론적 자아와 세계-내-존재가 동일하다는 말씀이 저한테는 매우 새롭게 들립니다. 달아주신 댓글 출력해서 이 책에 고이 끼워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4-14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8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6
메를로 퐁티 지음, 김화자 옮김 / 책세상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살'이란 무엇인가. "감각하는 주체와 감각된 대상의 현전이 빚어낸 감각물로서 출현"하는 살은, "자연적 실재와 관념적인 것의 중간적 존재"이자 "대립항들의 결합"이며 "주체, 대상, 실존, 이념 중 그 어느 것도 아닌 동시에 양 극단을 모두 내포하는 '공유적인 것'으로 '실체'가 아니라 '차원(dimension)'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실재(實在)가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 즉 몸과 정신, 여성과 남성, 보는 몸과 보이는 몸, 나와 남, 인간과 자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꿈과 현실, 가상과 실재 등이 경계를 넘나드는 근원적 세계이거나, 아니면 양쪽 모두를 포함하는 경계 그 자체"이다. 살은 "몸과 정신, 몸과 세계, 존재와 의미 등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가역성을 띠면서 하나로 조직되어 있는 얽힘 관계(chiasme)"를 이룬다. "느끼는 주체와 느껴진 대상이 서로 섞이고 침투하는 지각의 중심"으로서의 살.

 

살은 또한 다양성을 의미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의 다양성을 가진 존재인 까닭에 타인들에 대해 상호주관성을 가질 수 있다". 이를테면 몸통이든 꼬리든 코끼리의 서로 다른 부위를 제각각 만지면서 코끼리에 대한 나름의 상상력을 펼치는 장님들처럼, 저마다의 고유한 '몸틀'에 구속된 존재인 우리가 대상에 대해 갖는 지각이란 주관적이고 측면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나 그럼에도 그것이 현상의 다양성을 의미하기에 저마다 진리값(?)을 갖는다는 얘기인가. 하지만 역시 살이란 무엇인가. 책을 읽어봐도 그 개념이 명확히 와닿지 않는다. 그야말로 모호하다. '살' 개념은 물론이거니와 김화자가 번역한 메를로 퐁티의 논문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자체도 이해가 안 된다. 해제만 겨우 읽었으나 역시 무슨 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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