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 철학 수고
칼 마르크스 지음, 강유원 옮김 / 이론과실천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서문과 세 개의 초고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는 첫 번째 초고 <소외된 노동>부터 세 번째 초고 <화폐>까지 요약한 것.  

소외된 노동 

국민경제학(당시의 경제학을 지칭)은 토지, 노동, 자본을 경제학의 전제가 되는 기본 요소로 다루지만 정작 요소들이 각각 그렇게 분리되기까지의 유래와 근거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각각의 추상적 요소가 탄생한 배면의 메커니즘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노동에 관해 살펴보자. 현 사회에서 노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①자기소외 행위다. 자기소외란,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물로부터도 소외되고 생산 행위로부터도 소외되는 것을 말한다. 소외된 노동은 나아가 ②인간을 자연으로부터도 소외시키고, ③유적 존재로부터도 소외시킨다.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 인간은 자신의 유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을 보편적인 존재로서 관계한다는 점에서 유적 존재이다. 오로지 직접적 욕구의 지배 아래서 자연과 일면적으로만 대면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자유롭게 지적으로든 활동적으로든 자신을 이중화하고 자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 속에서 자신을 바라본다.  

인간은 자신의 활동을 대상화하고 자신의 삶을 의식할 수 있다. 자신의 의지를 삶에 관철시킬 수 있다. 이러한 의식적인 생명 활동이야말로 인간을 동물적인 생명활동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식적 생명활동에 의해서만이 인간은 유적으로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유적 존재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은 이러한 관계를 역전시킨다. 인간은 소외된 노동 속에서 자신의 본질인 유적 존재로서의 의식적 생명활동을 단순히 자신의 생존수단인 것처럼 만들고 만다. 또한 소외된 노동은 인간으로부터 그의 생산 활동의 대상을 박탈한다. 생산 활동의 대상을 박탈하는 것- 이것은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인 자연이 인간으로부터 제거됨을 의미한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의 활동을 수단으로 저하시킴으로써 인간의 유적인 생활을 그의 육체적 생존수단으로 바꾸고 만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유에 대해서 갖는 의식은 소외에 의해 변질되고 그런 변질된 의식은 유적 생활이 인간에게 있어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상 고병권 선생님 강의록과 연초록 선생님 발제문 일부 도용하여 짜깁기함)

 
   

의식적 생명활동으로서 의미를 가졌던 인간의 노동은 자기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유적 존재 모두로부터 유리되어 오로지 개인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인간이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 자신의 생명활동, 자연, 자신의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에서 생겨나는 직접적인 귀결의 하나는 ④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이다. 소외된 노동의 관계 속에서 각각의 인간은 자기 자신이 노동자로서 존재하는 척도와 관계에 따라 다른 사람을 본다. 즉 인간을 유적 존재의 구성원으로서 보는 게 아니라 단지 하나의 노동 상품으로서 대하게 되는 것.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될 뿐만 아니라 그의 생산물이 노동자 자신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면 대체 노동자를 소외시켜가며 생산된 그 생산물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노동자를 등쳐먹는 ‘다른 인간’이 있다고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가 고통을 치러가며 수행하는 생산 활동을 이 ‘다른 인간’은 마음껏 향유한다. 노동이란 노동자가 이 ‘다른 인간’의 지배, 강제, 질곡 아래서 그 인간에게 봉사하는 활동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노동자의 소외가 일어나는 배면에서 이 소외로 인해 그 만큼의 향유를 누리고 있는 이 ‘다른 인간’을 주목해야 할 것이며, 이 ‘다른 인간’과 노동자가 맺고 있는 관계를 고찰해야 할 것이다.
             
사유재산의 관계 

자본사회에서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가 본질적으로 ‘궁핍한 자본’이어야 한다. 궁핍한 자본으로서의 노동자는 노동하지 않으면 언제나 그 이자를 상실하여 생존을 보장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결코 일을 쉬면 안 된다. 언제나 일을 함으로써 그는 자본을 생산하고 자본은 다시 노동자를 생산한다. 노동자로서 인간, 상품으로서 인간은 이러한 전체 운동의 산물이다. 한편, 노동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자본의 구조에 동참하지 않는 인간- 예를 들어 사기꾼, 거지, 소매치기, 백수 같은 사람들은 국민경제학 영역 바깥의 유령들로서만 존재한다. 그들은 철저히 배제된다. 

노동자의 욕구란 노동자가 노동하는 기간 중에 자신을 유지하는 욕구이다. 노동임금은 노동자가 노동하는 자로서 유지되기 위해 자본이 치러야 할 소비다. 노동자들이 다음 날 쓰일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비축하도록, 그래서 더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자본가는 일정액을 투자해야 한다. 임금이란 말하자면 기계에 칠할 윤활유를 구입하듯이 자본가가 지출하는 경비이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자본의 희생인 것이다. 자본가는 최소한의 기름으로 최대한 기계를 잘 돌려야 한다. 그는 자본이 얼마만큼의 노동자들을 ‘부양’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만큼의 ‘이자’를 가져오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인간은 상품으로 전락한다. 인간은 단순한 노동인간일 뿐이며 추상적으로 실존한다. 그는 비인간이다. 실체가 없다. 

실체 없는 비인간, 노동인간이 생산해낸 산물은 더 이상 사회적이고 자연적이고 개별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는 그저 돈을 받고, 받은 만큼 생산할 뿐이다. 자본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이 노동을 통해 생산한 것에 대하여 임금의 대가 이상의 의미 내지는 사연을 부여할 수 없다. 이렇게 자본사회에서 생산된 모든 생산물(사유재산)은 그 자연적, 사회적 질(質, 고유한 의미)을 잃어버린다. 극히 다양한 종류의 자연적, 사회적 현존 속에서 그것의 현실적 내용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본이 생산된다는 것, 이러한 대립이 극단으로 추동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 관계 전체의 극단, 정점, 몰락이다. 

한편, 봉건 사회 질서에 익숙한 토지 소유자는 자신의 사유재산인 토지에 봉토라느니 세습 영토라느니 하여 각별한 사연을 부여하고 그것을 중시 여긴다. 그러나 자본가에게는 오로지 경작만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그들의 태도가 전근대적 취향으로 비추어질 뿐이다. 이렇게 토지는 자본에 비해 아직 정치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유재산이다. 토지는 궁극적으로는 자본이지만 현재로서는 세계에 연루된 상태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여 자기 자신에 이르지 못한 자본이다.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자본이다. 하나 이것은 세계적 형성의 과정에서 추상적인, 다시 말해서 순수한 표현에 이르러야 하고, 사실상 발전의 현실적 진행에서 실제로 그리 될 것이다. 토지 소유자에 대한 자본가의 승리는 필연적이다. 토지소유의 자본화를 억제하려는 일부 국가들의 시도는 헛된 노력일 뿐이다.

사유재산과 노동 

부의 주체적 본질은 무엇인가. 최초의 논의자인 중상주의자(≒중금주의자)들은 유통의 과정에서 부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유통의 과정에서 화폐 혹은 화폐로 쓰이는 물질인 귀금속만을 부의 현존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이후 출현한 중농주의자들은 부의 원천이 화폐나 귀금속이 아니라 토지(자연)에 있다고 말한다. ‘토지’라고 하는 천연의 재료는, 농업이라고 하는 인간의 노동을 거쳐 비로소 ‘부’가 된다. 다시 말해 잉여가치의 원천은 유통이 아니라 생산으로부터 나온다. 인간이 노동을 통해 풍요로운 자연에서 최초의 잉여를 발굴해 낸다는 사실, 이것은 곧 부의 주체적 본질이 인간의 ‘노동’에 있다는 얘기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때의 노동은 아직 그 보편성과 추상성 속에서 파악되고 있지 않으며(‘노동력’으로 파악되고 있지 않으며), 여전히 특수한 자연 규정적 존재 방식에서만 인식될 뿐이다. 즉 이 당시 중농주의자들에게 노동은 추상적 노동이 아니라 자연에 귀속되어 있는 구체적 형태로서의 농경 노동이었으며, 토지 역시 아직은 인간에게 독립적인 자연적 현존으로만 인정되었다. 다시 말해 토지 역시 노동 자체의 한 계기로서, 즉 ‘토지 자본’으로서 토지는 아직 인정되지 않고 있었다. 

이후 등장하는 경제학자들은 중농주의자들의 사고의 한계를 뚫고 나아간다. 사실상 경제적 관점에서는 농업이 다른 어떠한 산업과도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농경 노동이라고 하는, 어떤 특수한 요소에 구속된 특수한 노동으로서의 노동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노동 일반이 부의 본질인 것이다. 이들은 이제 (농경 노동이 아니라 보편적 의미의) 노동이 부의 본질이라고 언명함으로써 특수한, 외적인, 대상적일 뿐인 부를 부인한다. 이로 인해 부는 비로소 그 보편적 본질이 인식되었다. 부의 본질은 추상화된 인간의 노동이다! 

인간의 노동이 부의 본질로서 추상화되자,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추상화된 노동을 하나의 ‘사유재산’으로 간주한다. 그에게 있어 사유재산은 인간 바깥의 어떤 상태로서 있는 게 아니라, 사유재산 자체가 곧 인간의 노동 즉 인간 자신이었다. 노동력이라는 사유재산을 가진 인간이 그것을 자본가에게 팔아서 거기서 생긴 돈으로 먹고 사는 거다. (제 기운을 남한테 팔아서 먹고 사는 노동자!) 사유재산이 인간 자신과 합체되고 인간 자신이 사유재산의 본질로 인식됨으로써 이제 인간은 하나의 물적인 재산으로, 지극히 비인간적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부르면 꽃으로 다가오는 인간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노동력, 노동력이라는 상품인 거다. 

모든 가치의 근원을 노동으로 파악하는 국민경제학은 일견 노동하는 인간을 최대의 가치로서, 본질로서 존중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 배면에서는 이렇게 인간에 대한 부인을 철저히 수행하고 있었다. 모든 가치의 근원은 노동이라고? 따라서 노동하는 인간은 가치 있다고? 아니다, 어디까지나 ‘노동’하는 인간이 가치 있을 뿐이다.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무가치하다. 노동이 최고의 가치를 얻는 사회에서 인간은 철저히 소외된다.     

사유재산과 공산주의 

노동이 부의 본질인 사회, 노동이 사유재산인 사회, 오로지 노동만이 있고 본연의 자기는 소외되는 사회 속에서 진정한 공산주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진정한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기 소외를 낳는) 사유재산을 적극적으로 지양함으로써 존재한다. 사유재산의 적극적 지양은 곧 인간적 생활의 회복이다. 그것은 모든 소외의 적극적 지양이다. 이를 통해 종교, 가족, 국가 등에서 자신의 인간적인, 다시 말해서 사회적인 현존으로 인간이 귀환할 수 있다. 그것은 최종적으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 본질의 현실적 획득이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완성된 자연주의=인간주의로서, 완성된 인간주의=자연주의로서 존재하며,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충돌의 참된 해결이며, 실존과 본질, 대상화와 자기 확인, 자유와 필연성, 개체와 무리 사이의 싸움의 진정한 해결이다. (중략)  

욕구, 생산과 분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인간은 다른 인간으로 하여금 자꾸만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게 한다. 이는 타인에게 새로운 희생을 강제하기 위해서이고, 새로운 의존 속으로 옮겨 놓기 위해서이며, 새로운 향유 방식으로, 따라서 새로운 경제적 파멸의 방식으로 유혹하기 위해서이다. (신발이 필요 없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본주의사회에 포섭되면서 모조리 신발을 사 신게 된 경우가 이런 것 아닐까?) 각각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힘을 창출하려 하는데, 이는 그 안에서 자신의 이기적 욕구의 충족을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모든 새로운 생산물들이 서로를 기만하고 약탈하는 새로운 잠재력으로 존재하게 된다. (경쟁의 심화를 얘기하는 건가?) 하나의 막강한 잠재력으로서 생산물은 점점 사회에 많아지지만 동시에 인간은 빈곤해지고 더욱 더 많은 화폐가 필요하게 된다. 화폐가 많아질수록 인간은 더 빈곤해진다. 자본사회는 물신숭배사회, 금권사회이다. 화폐의 양은 점점 더 인간의 유일한 힘 있는 속성이 되고, 화폐는 모든 존재를 그 추상으로 환원한다. 

자본사회에서 인간 소외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일어난다. 한 측면에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욕망하게 하고(지름신이 강림한 노동자), 다른 한 측면에서는 욕구가 한없이 상실되고 단순화되는 것이다. (퇴근하면 티비 보다 잠만 자는 노동자) 자본사회에서는 욕구의 증대와 욕구 수단의 증대가 어떻게 욕구의 상실과 수단의 상실을 만들어내는가. 자본가는 노동자의 욕구를 가장 필요하고도 가장 참담한 육체적 생존 유지로 환원시키고, 노동자의 활동을 가장 추상적인 기계적 운동으로 환원시킨다. 그에게 인간은 활동의 욕구와 향유의 욕구 이외에 다른 어떤 욕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가능한 한 가장 궁핍한 생활을 보편적 척도로 산출한다. 그는 노동자의 활동을 모든 활동의 순수 추상으로 만들듯이, 노동자를 무감각하고 욕구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자본사회를 분석하는 국민경제학은 이런 점에서 체념, 궁핍, 절약, 금욕의 학문이다. 이 학문의 진정한 이상은 폭리를 취하는 금욕적 구두쇠와 생산하는 금욕적 노예를 만들어 내는 데 다름 아니다. 폭리와 금욕, 그리고 생산과 금욕! 두 대립항의 절묘한 결합이 참으로 기이하지 않은가. 다시 말해 낭비와 절약, 사치와 궁핍, 부와 빈곤이라는 대립 항이 이 학문에서는 하나의 매커니즘에서 발생하는 동시적 효과인 것이다.  

이제 분업을 고찰해보자. 분업은 자본사회의 필수요소다. 근대 국민경제학의 다양한 논의들은 분업의 문제에 있어서는 한 가지 입장으로 통일된다. 분업과 생산의 부, 분업과 자본 축적이 서로를 조건 짓고 있다는 것, 자기 방임된 사유재산만이 가장 유용하고 포괄적인 분업을 낳아 놓을 수 있다는 것. 분업에 관한 국민경제학자들의 입장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아담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의 이기심이 교환하려는 경향을 낳았고, 교환(거래)은 분업을 낳았다. 분업으로 인해 인간의 재능은 다양해졌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재능의 다양성이 분업을 낳은 게 아니라, 분업이 일어나다 보니 인간 재능이 다양하게 분화되었다는,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분업은 노동에 무한한 생산능력을 부여한다. 분업은 교환과 시장의 확대에 의하여 증대되고 또 그것에 의하여 제한된다. 진보한 사회에서는 모든 인간이 상인이고(분업에 의해 생산한 걸 서로 교환 판매해야 하니까) 사회는 상업 사회가 된다. 

세이는 교환이 사회의 본질에서 근본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교환이(그리고 교환에서 비롯한 분업이) 한 사회가 지속되는 데 어느 정도 유용한 수단인 것은 사실이다. 또한 교환은 사회의 부를 위한 인간 능력의 적절한 사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환과 분업은 개인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능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 

스카르벡은 인간에 내재하는 개인적 힘들, 지능과 노동을 위한 육체적 소질을 사회에서 유래하는 힘들, 서로를 조건지우는 교환이나 분업과 구별한다. (원래 내가 지닌 힘, 자본의 논리로 산출될 수 없는 힘, 고유하고 특수한 전인적 능력 vs 사회에 복무할 수 있는 능력, 사유재산으로 변환될 수 있는 사회적 능력, 이 능력은 현실적 개인으로부터 나온 능력이 아니라 분업과 교환과 관련된 사회에서 유래하는 힘, 사회가 나에게 길들인 힘, 사회가 나에게 할당한 힘) 그러나 어쨌든, 교환의 필수 전제는 사유재산이다. 

밀은 상업을 분업의 결과로 서술한다. 인간의 활동은 기계적 운동으로 환원된다. 부의 대량생산, 생산의 집중화를 위해 각각의 사람들에게는 가능한 한 작은 범위의 작업들이 맡겨져야 한다.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한 교환 경향과 교환이 낳은 분업. 분업은 대량생산을 통해 부를 효과적으로 창출하지만, 동시에 개인적 활동의 빈약화와 탈본질화를 낳는다. 이러한 분업과 교환의 근거는 사유재산이며, 따라서 인간적 삶을 위해 사유재산의 지양이 필요하다.

화폐 

화폐란 무엇인가. 화폐는 모든 것을 구매하는 속성을 가짐으로써, 다른 말로 모든 대상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속성을 가짐으로써 우월한 의미를 갖는 대상이다. 화폐가 전능한 존재로 간주되는 것은 화폐 자신이 (구매를 통해) 모든 것으로 변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화폐가 모든 것을 매개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것, 나의 모든 개인적 본질에 비추어 불가능한 것을 화폐를 통해서 할 수 있다. 고로 자본사회에서 화폐의 속성들은 곧 화폐 소유자의 속성과도 같아진다. 화폐의 존재와 능력이 곧 화폐를 가진 자의 존재와 능력이다. 

화폐가 없는 자의 수요는 한갓 비현실적 표상(공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화폐가 있는 자의 수요는 현실적으로 유효한 표상이다. 화폐는 표상을 현실로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실을 (고유한 의미나 본질이 표백되어버린) 단순 표상으로 만들어버린다. 화폐의 논리로 점령된 현실은 돈을 초월한 고유의 의미 같은 것은 모조리 말살되고 오로지 얼마짜리 값어치만을 갖는 한없이 추상적이고 몰개성한 표상으로 변질되어버리는 것이다. 

화폐는 만물을 혼란케 하고 전도시킨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 자연적 성질을 혼용시킨다. 비겁한 사람도 용감함을 구매할 수 있게 되는 식이다. 이것은 결코 인간적 관계가 아니다. 인간적인 관계라는 것은, 인간이 의지하는 대상에 대하여 자신의 현실적이고도 개인적인 삶을 특정하게 표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폐만능사회에서는 이 모든 게 불가능하고 또한 무의미해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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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0-04-22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잘해서 내가 추천 준다
 
언니네 방 - 내가 혼자가 아닌 그 곳
언니네 사람들 지음 / 갤리온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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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 주변의 여성주의자들을 통해 접하게 되는 여성주의는-비록 이들이 여성주의의 이념을 생활 속에서 얼마나 객관적으로 체현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여성주의'라기보다는 차라리 '성적소수자주의'에 가까워 보인다. 성적소수자에 대한 관심은, 끊임없이 치열하게 고민과 모색을 거듭해온 여성주의가 오늘날 필연적으로 당도하게 된 전방의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여성주의 집단 내부에 유독 넘쳐나는 레즈비언들을 보면서, 이론상의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성적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닐 수밖에 없는 여성주의가 자기 내부에 자체적으로 (마치 자기 실험처럼) 성적소수자들을 적극적으로 양산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의지의 과잉'으로 인하여 벌어지는 것 같은 이러한 반동적인 현상 역시 극단적으로 이분화된 젠더 구분 못지 않게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대체 내가 지금 의식하고 있는 '부자연'과 '자연'의 기준이란 건 또 무엇인가 하는 의문도 갖게 되고.

여성주의 모임의 기현상을 목도하며 이래저래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분명하게 깨달은 것 한 가지는, 역시 섹슈얼리티라는 게 사회화 과정을 통해 후천적으로 구성되고 규정되는 게 맞긴 맞는 거 같다는 경험적 진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체 여성주의 그룹 안에서 관찰되는 이 특이적인 성적소수자 과잉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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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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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르놀트 하우저는 예술사를 자연주의와 형식주의가 대립해온 지난한 과정으로 보고 있다. 이 대립은 철학적으로는 유명론과 실재론, 정치적으로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종교적으로는 현세적인지 내세적인지 하는 경향, 사회적으로는 상업이 발달하거나 자유가 허용되는 정도와도 맥을 같이 한다. 이 책에서는
 
(1)추상 개념이 전혀 없었던 구석기 시기의 사실적인 표현주의가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기하학적인 모습으로 양식화되고, 통일적 조직과 피안의 세계관이 발달했던 이집트 전제왕권 시기에 이르러 극도로 추상화 되는 경향(이집트에서도 왕권의 흥망에 따라 자연주의적인 경향이 간혹 나타나기도 하지만) 자연주의양식으로 발전하기까지. (2)크리티섬의 자유분방했던 예술사조가 그리스 문명의 발달과 함께 이집트의 영향을 받아 딱딱한 아르케익 양식으로 변모하고,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는 보다 자유롭고 웅장하게 발전하여 이윽고 문명의 전성기 시절 우미양식을 거쳐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러 그 정점을 찍기까지. (3)로마문명이 쇠퇴하고 그리스도교 시대와 함께 시작된 극도로 추상화된 양식이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 시기에 잠시 절충주의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세적’이었던 교부철학의 시대에 비자연주의, 형식주의, 기능적인 특징을 지닌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일관하다가, 로마네스크 후기에 이르러 스콜라철학의 발달과 궤를 맞춰 점차 역동적인 모습을 띄더니, 11세기 이후 도시와 상업이 서서히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정신주와 현세긍정적인 감각주의가 교착된 고딕양식으로 발전하기까지(번호는 내맘대로 매김)

를 죽 훑고 있다. 선사시대에서 중세 이후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시대마다 조형예술가의 사회적 입지가 약간씩 달랐다는 점, 같은 예술가라도 문인과 조형예술가의 사회적 입지의 차이가 매우 컸다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 즉, 선사시대의 조형예술가는 일종의 특수능력보유자로서 나름의 대우를 받다가, 노동을 천시했던 그리스시대에는(시인의 원조격인 소피스트들이 당대에 받던 대우와는 달리) 굉장히 무시당했다가, 헬레니즘 시기에는 플로티노스 사상의 유행으로 일시적으로 쬐끔 천재 대우를 받기도 하지만, 중세 후기에 이르러 개인 공방을 차리고 예술품을 독자적으로 주문 생산할 때까지도 여전히 보잘 것 없었다는 것. 천재 대접은 르네상스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뤄지는데, 아놀드 하우저는 이런 현상을 ‘육체노동을 천시하는 체면 의식’의 소산으로 보고 있다.

한편, 민족대이동시대 및 영웅시대에 처음으로 등장한 시인들은 대부분 무사나 왕의 측근이었을 것이라고. 물론 이들은 후에 왕궁 내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화되고 비정규직들은 방랑시인으로 전락하기도 하면서 대중 사이로 스며들게 된다. 권력층에서 나온 예술가가 시인이었다면, 민중이 배출한 최초의 예술가는 미무스(마임)인데, 말하자면 이 둘이 문학의 원류를 형성한 셈이다.

중세만의 독특한 계급인 기사 집단에 대한 부분(p.273)도 흥미롭다. 이들은 말하자면 원래 귀족의 딱까리였다가 귀족으로 승격된 부류인데 기사도 정신이라는 것은 사실 졸부들이 졸부 티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갓 귀족된 자’의 극도로 ‘오바’하는 정신이었던 것. “기사의 계급적 이상, 귀족의 계급의식, 계급적 이데올로기는 이때부터 비로소, 그것도 바로 기사계급에 의하여 형성”되었다는 점, 노블리스 오블리주 문화도 사실은 이 기사도 정신에서 비롯한 것이었다는 점은 역사가 보여주는 조크라고 해야 할까. 체면과 절도, 인내와 극기, 충성과 명예 추구 등 온갖 영웅적인 덕목을 고수하던 기사계급이 경제적 합리주의, 영리추구, 계산과 절약과 흥정을 삶의 모토로 여기는 상인 계급에게 맥없이 나가 떨어지는 모습은 구한말 몰락의 길을 걷던 양반들의 처지와 영락없이 똑같다.

어찌되었든 이 기사계급으로 인해 중세만의 독특한 궁정문학인 기사도 문학이 생겨나게 되는데, “감정의 섬세성과 내면성, 사랑하는 사나이가 그 사랑의 대상인 여성을 생각할 때마다 갖는 경건한 마음, 끝나는 바가 없고 채워지지 않으며 또 한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채워질 수도 없는 사모의 정”의 끝장(!)을 보여주는, 그야말로 로맨스 문학의 원류인 기사도 문학에 대한 분석 또한 흥미롭다. 사회학자들에 따르면, 이 문학이 보여주는 “궁정적, 기사적 연애관은 정치적인 주종관계가 대(對)여성에 대한 관계로 옮겨간 것”이라고. 연애의 봉사는 곧 주군에의 봉사의 모방이며, 일종의 “정치 찬가”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제후나 호족들이 전쟁에 몰두하여 종종 궁정이나 성을 장기간 비울 수밖에 없었고, 그의 부재기간에 부인이 군주의 권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궁정에서 봉사하는 시인들이 권력층 여성의 구미를 충족시키기 위해 (마치 여성들의 신데렐라 판타지에 전적으로 부응하는 한국드라마처럼) 기사 캐릭터를 그런 식으로 더 이상화시켰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기사도 문학의 기저에 깔린 (어찌보면 상당히 노골적인) 성적 요소를 읽어내면서, 이 문학의 저자들인 기사출신 시인의 사회적 성향을 주목한다. 즉 기사도 문학이야말로 교회의 금욕적인 계명에 대해 신흥귀족이 보여주는 반항의 한 산물이며, 인습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분방한 그들의 사고방식이 여실히 표현된 문학이라는 것. “기사계급의 연애처럼 남의 부인에게 성적으로 쏠려 있는 심리적 메커니즘이라는가 그러한 감정이 그것을 자유로이 나타낼 수 있음에 따라 더욱 더 고조된다는 현상은 종전의 종교적, 사회적 터부의 위력이 쇠퇴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신흥귀족의 등장에 의해 성적 감정이 마음껏 발휘될 수 있는 터전이 미리 마련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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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5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책세상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모 토론 모임에서 신자유주의 흐름에 배치되는 발제문을 적어야 할 일이 있었다. 어떤 발제든 참혹하게 난도질 당하는 게 예사인 그 모임의 분위기상 아무래도 논거를 탄탄하게 해둘 필요가 있어서 '칼 폴라니'라는 석학의 권위에 호소하기로 작정, 참고도서 명목으로 구입했던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러나 참고로 읽기에는 예상치 못하게도 난이도가 너무도 높았던 나머지 결국에는 참고가 아니라 재고가 되어버리고 만 책이기도 하다. 일 년 가까이 지나 재고를 처분할 요량으로 다시 펼쳐들었으나 여전히 독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있고 그런 곳은 어쩔 수 없이 건너 뛰었다. 아래는 이 책을 이해되는 선에서 조악하게나마 요약한 것. 

인간이 이익을 얻기 위해 노동을 하게 된 것(정확히 말하면 '이익을 얻기 위해 노동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인류 역사상 최근의 일이다. 유사 이래 노동의 동기는 실로 다양했다. 공적 의무와 사적 책임, 종교적 계율의 준수와 정치적 충성, 서열과 신분, 법적 강제와 처벌의 위협, 공적인 찬양과 사적인 명성 등등. 그런 다양한 동기 가운데 하나로서 '이익추구'가 끼어 있었던 것.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은 놀랄 만큼 복합적이고 다양한 동기에 근거해 노동하고 있지만, 노동의 동기로 오로지 이익을 떠올리는 까닭은 우리가 전적으로 시장경제체제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익추구경향이라는 것은 기실 고유한 생물학적 본능이 아니라, 시장경제체제라고 하는 특정 체제가 가동되기 위해 잠정적으로 전제된 인간의 행동양식에 다름 아니다.   

   
  "일단 사회가 그 성원들의 일정한 행동 양식을 예측하게 되고 지배적인 사회 제도들을 통해 그 행동 양식을 대충 강제해내기에 이르면 인간 본성에 대한 견해들은 그 행동 양식의 이념형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그 이념형이 현실에 부합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상관없이 말이다. 굶주림과 이익도 이와 같은 식으로 경제적 동기로 규정되었으며 인간은 매일매일의 삶에서 그 동기들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것이라 가정되었다. 반면 그 밖의 동기들은 천상계에나 속하는 영적인 것으로, 범속한 존재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p.38)    
   

시장경제체제는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의의가 경제적 이익을 통한 쾌락 추구에 있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지만, 인간은 결코 경제적 이익 추구라는 하나의 본질로 환원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기 이전에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소속되고 인정받기 위해 행동한다. 때문에 시장경제체제 이전의 경제는 일반적으로 호혜성, 재분배, 교환이라는 형태로 인간의 사회관계들 속에 묻어들어가 있었고(ex. 국가간 조공풍습, 품앗이 농경문화, 친척간 선물 교환 등), 시장은 경제 생활의 부속물 이상의 것이 되어본 적이 없다. 사실 경제적 동물로서의 본성이 시장경제를 만들어내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시장 신화'일 뿐이다. 시장은 이익 추구 본능을 가진 인간들이 경제적 교환을 하다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거래에 앞서 사회적인 관계, 즉 '지지구조'에서 나온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시장이 성장하면 어느 순간 경제가 사회의 부속물이 아니라, 사회를 뚫고 나와 오히려 사회를 포섭하는 역전이 일어난다.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는 것. 이때부터는 사회가 반대로 경제체제의 부속물이 된다. (시장 경제는 노동, 토지, 화폐를 포함한 산업의 모든 요소를 포괄한다. 하지만 노동이란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 자체이며, 토지란 그 안에 사회가 존재하는 자연 환경이고, 화폐는 그저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허구상품'이다. 이들을 시장 경제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로서 시장 메커니즘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곧 사회의 실체를 시장의 법칙 아래 둔다는 뜻이다.) 

시장에서의 교환은, 호혜성이나 재분배와는 달리 어떤 인격적, 사회적 관계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물적 관계이다. 따라서 시장이 주요한 경제제도가 될 때 기존의 사회적 관계는 심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일례로 자기 조정 시장의 작동이 요구하는 '탄력성'이라는 것은 인간과 자연에게 매우 고통스런 존재론적 불안정성을 안겨준다. 이렇게 시장은 사회적 관계와 모순적 관계에 있고, 이런 점 때문에 시장경제체제에 놓인 사회는 시장제도가 사회에 위기와 긴장을 조성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반작용으로서 여러 가지 법적 사회적 금기를 마련한다. 허구적 상품들에 대한 제한, 보호, 규제조치가 그런 것.  

그러나 본질적으로 (1)사회 전체를 시장의 자기 조정에 순응시키기 위한 운동과 (2)시장 경제에 개입하여 시장으로부터 사회 조직을 지키려고 애쓰는 운동은 상호 모순적이고 양립 불가능하다. 시장경제체제는 이러한 내부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경쟁적인 무역 전쟁, 식민지 확장, 제국주의의 방식으로 내부의 모순을 외부로 표출하게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세계 체제 차원의 위기가 불가피하다. 즉, 시장자본주의는 자신의 터전인 사회 기본 조직의 파괴라는 모순을 그 안에 품고 있기 때문에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부딪히는 체제 차원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사회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파시즘이다. 전자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경제에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이는 재산과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진보적으로 철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민주적인 정치영역이 사회 전체를 뒤덮게 된다. 반면 파시즘의 해결책은 민주적 정치영역을 철폐해버리고 사회에는 경제 생활만을 남겨놓는 것이다. 파시즘 아래서는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자본주의가 남는다. 이때 인간은 그저 경제적 생산자라는 성격만을 부여받게 되며, 파시즘은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마지막 안전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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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 집을 나가다 - 가족 밖에서 꿈꾸는 새로운 삶 스물여덟 가지
언니네트워크 엮음 / 에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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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족으로부터 독립을 준비해 나가는 중이거나 혹은 이미 독립하여 공동체를 꾸리는 등의 방식으로 비혼 생활을 가꿔가는 필자들이 저마다의 비혼담을 들려준다. 혼인과 혈연 관계로 맺어진 공동체가 가족의 일반적인 모습이기는 하지만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결혼제도를 벗어나서도 얼마든지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따뜻하고 단란하게 존재할 수 있음을 스물여덟 개의 이야기들이 유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혼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인생의 절대적인 관문은 아니겠다,라고 하는 요근래 어렴풋이 드는 생각이 이 책을 통해 좀 더 확신을 얻게 된 것 같다. 더불어 이 책은 내가 만약 앞으로도 계속 현재와 같은 독신 생활을 유지할 경우, 살아가면서 홀로 감당해야 할 실질적인 문제들(주거, 신변의 안전, 건강, 고독감 등)에 대해서도 고민해보게 만든다.

책 중반부에는 스스로 날을 잡아 '비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비혼의 대열에 합류하는 한 남성 필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비혼식이라니 이거 원, 결혼식 만큼이나 낭만적인 의식이 아닌가. 혹시 나도 훗날 결혼을 안 하고 살아야겠다는 궁극의 결심이 서면 '비혼식'이라는 걸 조촐하게라도 올려보고 싶다. 생일보다 더 의미있는 기념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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