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의 연구
알프레드 알바레즈 지음, 최승자 옮김 / 청하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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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살률은 흔히 실업률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안녕과 건강의 정도를 대변하는 척도인 것처럼 얘기된다. 그러나 자살을 사회의 보살핌 속에서 예방되어야 할 정신 질환 쯤으로 여기는 태도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 책에 따르면, 아테네에서는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독약의 공급을 행정장관이 관리했는데, 죽고 싶은 사람은 그 이유를 원로원에다 진술해서 공식 허가를 받기만 하면 되었다고 한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인의 방침은 이렇게나 쿨하다.

   
  누구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자로 원로원에 나아가 그 사유를 진술하여, 허가를 받은 뒤 스스로 목숨을 버릴 일이다. 삶이 혐오스러우면 죽어라. 비운에 사로잡혔을 땐 독약을 마셔라. 비탄에 빠지면 목숨을 버려라. 불행한 자는 자신의 불행을 상세히 열거하고 행정장관은 그 치료법을 제공할진저, 그러면 그의 불행이 끝나게 되리라. -p.92  
   

그리스인들에게 자살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대책이었다면, 로마인들에게 자살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영예(노예는 자살할 수도 없었다고)이자 뛰어난 의지를 보여주는 영웅적인 행위였다. 그들에게 자살은 용감하고 고상하게 죽을 수 있는 최상의 길이었다. 초기 기독교 시절에도 자살은 덕행이었는데, 그 시절 대표적인 자살행위였던 순교는 천국으로 직행하는 열쇠였으므로 언제나 동경과 찬미의 대상이었다. 자살이 본격적으로 심한 도덕적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10세기 이후의 일이다. 죄악이고 범죄였던 자살은, 뒤르켐의 <자살론> 이후 사회적 분석대상이 된다. 프로이트는 자살을 질병으로 만들었다.

유사 이래 자살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이 이토록 다양한 까닭은 자살의 동기나 경위가 몹시 개별적이고 복잡난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폐쇄된 자기논리 속에서 자살을 감행한다. 예를 들어 이 책의 프롤로그에 나오는 실비아 플라스라는 여류시인은 생의 감각을 극도로 일깨우기 위해 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한다.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자해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주기적으로 자살을 감행하고 또 용케도 살아난다. (물론 그녀는 불사신이 아니었다. 3회차에 죽었다.) 그녀의 자살 시도는 구조됨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는 행위였다. 마치 원시 부족의 소년들이 맹수 사냥에 성공하여 성인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그녀는 자기를 파멸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고 또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생의 감각을 회복했던 것이다.

예전에 어머니가 근무하시던 한 중학교에서 한창 목조르기 놀이라는 게 유행했었다. 어머니는 학생의 안전을 책임진 교사로서 이 듣보잡의 세기말적 유희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그에 아랑곳없이 학생들 사이에서 이 놀이의 명성은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숨이 막혀 정신이 몽롱해질 때까지 서로의 목을 졸라주거나 또는 자기 목을 조르는 이 놀이는, 일시적인 산소 부족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때 느끼게 되는 쾌감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세상에는 별의 별 자살의 경위가 다 있음을 실감케 하는 놀이가 아닐 수 없다. 

자살에 대한 내 생각은 그리스인의 그것과 비슷하다. 영웅적이기까지는 아니어도, 자살은 자기 삶을 불의의 습격에 방치하지 않고 스스로 적절한 순간에 완결 짓는 나름의 합리적인 행위가 아닐까. 자살은, 만약 그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이성적으로 치밀하게 준비한 종류라면, 길 가다 차에 치여 죽거나 건물에 깔려 죽느니보다 훨씬 더 품위 있고 위엄 있는 죽음의 한 방식일 것 같다. 이때의 자살은, 그 어떤 죽음의 경로 가운데서도 인간의 존엄이 가장 잘 유지되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딜레마는 이와 같은 이성적인 자살이 다분히 ‘이상적인 자살’이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수양이 잘 되어 자살의 그 냉혹한 논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현대인으로서 그같이 수련된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결국 괴물과 같은 존재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자살이 실제로 논리적일 경우, 그것은 논리적인 만큼이나 또한 비현실적인 것이 되기 마련"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이탈리아 작가 파베제가 남긴 말이 인상적이다. “자살을 왜 하느냐고? 왜 하지 않는단 말인가.” 자살에의 충동은 동시에 끊임없이 살 이유를 생각하고 실존적 의문을 갖게 만든다는 점에서 확실히 생에 유익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단순히 정신의 피폐를 보여주는 증상이라고 일축할 일만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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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
서동진 지음 / 돌베개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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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지난 20년간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 과정에서 형성된 권력의 주체화의 논리, 즉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형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기존의 규율사회를 비판하고 자유를 꿈꾸는 주체의 자기형성의 논리와 겹쳐져 있다고 지적한다. 자기계발에의 의지라는 것은 결국, 보다 나은 자기가 되고픈 인간 본연의 소망, 그리고 비상과 해방에 대한 인간의 본연적 욕구와 같은 것들이 권력의 자장 속에서 마름질 당하고 가공된 형태라는 것이다. 인간 본연의 진보적 희망과 자유에의 소망이 매번 권력의 전략에 포섭되어 변질되고 마는 것이라면, 차라리 애초에 그런 꿈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자유를 지지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에 대한 새로운 물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오늘날 누리고 있는 이 자유가 어떤 종류의 자유인가 매번 날카롭게 질문해야 한다. 질문은 사유이고, 사유는 곧 새로운 자유의 가능성이다. 새로운 자유란 어떤 자유인가. 그것은 권력의 전략에 포섭되어 관리되는 자유, 순응적으로 변질된 자유, 기껏 자기계발의 자유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관계로부터의 호명이 불가능한 자유, 관리되고 대상화되기를 거부하는 자유, 외부를 사유하는 자유, 탈주하는 자유다. 새로운 자유의 정치학을 꿈 꿀 것! 이 책이 마지막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가슴벅찬 소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조언은 사실상 환자한테 불치병 선고 해놓고 미안해서 보약 한 첩 다려주는 거랑 다를 게 뭔가. 저자의 제안에 따라 아무리 세계의 자명성에 질문을 던지고, 해방된 자유, 탈주하는 자유를 열심히 사유해봤자 그가 쓴 책 전체를 관류하는 푸코식 통치이론의 논리에 따르면 그 또한 결국에는 통치 권력의 전략에 포섭되어 너무나 단정한 모습으로 그리고 또한 너무나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형되고 말 것이 아닌가. 그것이 권력의 역학 관계를 벗어날 길 없는 개체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수유너머가 기성의 체제와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 역시 그러한 한 전형은 아닐까. 예를 들어 수유너머의 일시적 구성원이었던 나의 경우, 수유너머를 늘 남산에 있는 무릉도원 쯤으로 여기곤 하지 않았던가. 가슴이 턱 막힐 때마다 무릉도원에 잠깐 다녀가 오금이 저려오는 온갖 자유와 희망의 메시지로 목을 축이고 나서, 자극적인 관념들로 샤워를 하고 나서, 다시 속세로 귀환해서는 마치 별세계에서 한바탕 꿈꾸다 돌아온 듯 이전과 다름 없는 태도로 일상을 살아가지 않았던가.

그곳에서의 공부는 나의 구체적인 삶을 전혀 바꾸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곳에서 나의 공부는, 배움을 주셨던 선생님들의 기대와는 전혀 상관없이, 나에게는 그저 출구 없는 일상에 작은 위안을 주는, 그런 신기루 같은 공부였지 않았나. 그렇다면 함부로 말해서 나 같은 이들에게 자기위안용 혹은 자기장식용 지식을 판매하는 것이 결국에는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수유너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역시 그곳 선생님들의 기대(내지는 최초에 그곳 선생님들이 꿈꾸었던 자유의 정치학)와는 전혀 상관없는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 책 비롯, 푸코의 통치권력이론의 영향을 받아 씌어진 글을 읽고 있으면 마치 공황장애에라도 빠진 듯한 기분이 된다. 끔찍할 정도로 조화롭고 치밀한 자기 완결적 시스템. 거기에는 예상치 못한 반전도, 불순한 종자들의 혁명도, 우연의 장난질도, 그 어떤 우발성도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이다. 푸코가 그려내는 세계는 마치 한치의 허점이나 틈새도 보이지 않는, 영원히 붕괴되지 않는, 견고한 성채 같다. 거기서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도저한 슬픔이다. 푸코가 말년에 주창한 자기윤리라는 것은, 결국에는 어찌할 수 없는, 그러나 너무나 비루한 자구책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얼마나 경악하고 얼마나 절망한 끝에야 비로소 호쾌하게 웃는 능동적 니힐리스트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이 견고한 성채 안에서 우리는 과연 냉소를 멈출 수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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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
서동진 지음 / 돌베개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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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주체는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으로 여겨진다.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고 성실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주체의 계보를 파헤치는 일은 하나의 자명한 풍경에 대한 의문이자 도전일 것이다.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계보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오늘날 한국 사회 담론의 지형을 탐구하고 있는 이 책은, 푸코주의적 지역학 연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곳곳에 푸코의 사유가 깊이 베어있다. 푸코는 자신의 사유를 ‘연장통’으로 써달라고 주문한 바 있다. 저자는 푸코에게서 얻은 연장통을 가지고 한국 사회를 절단하고 해부하는 날카로운 무기를 벼리어낸 셈이다. 박사논문을 다듬은 것이어서 그런지 다소 딱딱하게 읽히고, 학문적 배경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점도 없지 않다. 개념의 이해가 미흡한 부분도 있고 용어의 혼란이 일어난 대목도 있을 테지만 내 수준에서 되는대로 정리해둔다.

*  

이 책에서는 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 담론 질서가 새롭게 재편되었다고 보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새롭게 재편된 담론의 질서란 곧 ‘지식기반경제’라는 개념으로 압축된다. 한국 자본주의를 재현하는 방식으로서의 지식기반경제라는 ‘경제적 가상’은 결코 경제라는 국지적 영역에 머물지 않으며, 경제 외적인 사회적 현실까지도 하나의 경제적 실재로서 재현한다. 즉 ‘지식기반경제’는 사회적 삶 전반에서 행해지는 행위를 규정하고 지배하는, 푸코의 개념으로 말하면 ‘에피스테메’와도 유사한 것(혹은 담론의 질서를 주도적으로 조직해 내는 역량을 지닌 무엇)이 된다.

어떻게 일개 경제적인 가상이 한 사회의 담론의 지형을 재편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폴라니의 표현을 빌면, 인류의 역사상 ‘경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사회관계들 속에 ‘묻어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독특하게도 이 ‘경제’라는 것이 사회의 전면으로 불쑥 튀어나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는 마치 저 혼자 과도하게 자라난 거대세포와도 같아서, 사회적 관계와 과정들의 여러 측면들이 경제에 종속된다. 이 때문에 경제는 담론의 질서를 조정하는 결정적 심급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경제적 가상’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면, 내가 이 책에서 처음으로 접한 ‘경제적 가상’이라는 용어는, 아마도 푸코의 ‘에피스테메’ 개념과 제일 가까워 보인다. 에피스테메는 한 주어진 시대에서 인식 가능하고 공식화된 체계들을 발생시키는 담론적 실천들을 묶어줄 수 있는 관계들의 집합이다. 그것은 한 시대의 각각의 담론적 실천들의 측면적 관계이자 관계들의 장(場)이다.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에피스테메를 일컬어 “한 주어진 시대에 있어서, 과학들 사이에서, 그들의 담론적 형성의 수준에서 분석할 때 발견할 수 있는 관계들의 집합”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지식기반경제’라는 새로운 ‘경제적 가상’(가상이라고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곧 담론적 현실, 즉 담론의 대상이 되는 실재의 지위를 얻는다) 속에서 기존에 자본주의 분석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경제적 사실이나 각종 지표 및 측정방식, 계산의 논리, 평가의 테크닉 등이 전면적으로 재배치되고 재분절된다(경제적 현실을 재현하는 언표와 체계의 변화). 기존에 경제적인 행위 혹은 경제적인 삶으로서 여겨지지 않았거나 분절되지 않았던 대상들은 새롭게 경제적인 실재로서 자격을 얻게 된다(새로운 경제적 언표군의 탄생). 또한 새로운 경제적 실재를 재현하는 각종 정책과 규범, 제도, 실천들이 생산되며(새로운 권력 장치의 생산), 이와 더불어 새로운 노동주체의 주체성을 재현하고 지배하는 담론들이 형성된다.

새롭게 형성된 ‘경제적 가상’에 대응하여 새로운 노동자의 주체성이 생산되는 과정은 이중적으로 일어난다. 즉 (1)‘노동주체를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가시화하는 담론’은 (2)‘노동주체가 자기를 지배할 수 있도록 가시화하는 담론’, 다시 말해 ‘자기-통치’의 담론과 함께 출현한다. (1)‘국민 만들기’와 (2)‘행복한 자기self 되기’라는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의 담론은 각기 자율적이면서도 서로를 상호 규정하면서 교호적으로 강화된다.

여기서 전자, 즉 지식기반경제라는 경제적 가상에 조응하는 통치의 담론으로 생산된 것이 바로 ‘인적자원담론’이다. 인적자원담론은 교육인적자원부의 출범, 7차 교육개혁안 개정, 인적자원개발기본법 제정 등의 국가적 권력 장치를 통해 그 담론적 실천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를 통해서 정부, 기업, 개인은 각각 지식정부, 지식경영, 지식근로자로서 새롭게 객체화 된다. 경제개발계획 담론이 지배적이던 사회에서 개인들에 대한 권력의 통치 논리가 ‘주민’이나 ‘인구’라는 개념으로 구성되었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회에서 주체는 ‘생애능력’, ‘인적자원’ 등등의 언표를 통해 통치대상으로서 대상화된다. 이와 같이 인적자원 담론은 수많은 주체성에 관한 언표들을 새로운 규칙에 따라 정렬하고 접합함으로써 그 안에서 각각의 언표들 사이의 관계를 재배치하고 하나의 새로운 담론의 질서, 담론의 공간을 형성한다.     

한편, ‘자기-통치’라고 하는, 노동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자신을 변형하고 개조하는 주관적인 실천으로 주체화되는 과정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자기계발’에의 의지로 구체화된다. ‘자기계발’은 ‘지식기반경제’라는 ‘경제적 가상’에 포섭된 주체의 자기 미학화의 테크닉이자 자기 윤리이다. ‘자기계발하는 시민’이란 곧 ‘지식기반경제’라는 ‘경제적 가상’과 결합된 새로운 주체성이다. 투철한 반공정신, 국가에 대한 충성, 민족에 대한 사랑을 미덕으로 여겼던 과거 반공독재개발국가의 ‘국민’들은, 신자유주의시대의 새로운 담론의 장(場) 속에서 이제는 너도나도 내 인생의 CEO를 자처하며 끊임없이 자기주도적으로 삶의 능력을 계발하고 혁신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주체화하는 ‘시민’이 된다. 새로운 윤리적 주체가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인적자원담론이 국가권력의 통치전략이라면, 자기계발 담론은 지배가 이루어지는 공간적인 배치 속에서 지배 받는 자들이 스스로 알아서 권력의 메커니즘을 실행함으로써 생겨난 담론으로, 그 역시 또 하나의 권력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3장에서는 앞서의 국가권력과 국민(시민) 간의 구도가 자본권력과 노동자의 구도로 치환된다. 자본과 노동자의 권력관계에서 생겨나는 여러 담론들 역시 국가와 시민 간의 권력관계에서와 같이 상호적이고 교호적으로 발전되고 강화된다. 마찬가지로 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하고 관리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생산해내는 각종 담론적 기획들은 곧 노동자의 노동정체성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기제가 된다.

푸코가 익히 분석했듯 권력은 외적인 강제, 폭력, 종속만을 통해서는 지배를 지속할 수 없다. 오히려 훈육과 규범화, 내면화 등의 방식처럼 개인들이 스스로 권력의 장을 형성함으로써 강제적 통제 없는 강제를 실현하는 것이 권력이다. 이를 위해 권력은 '강탈-폭력'이 아닌 '부드러움-생산-이익'이라는 원칙을 채택한다. 금지나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형태로 행사되는 권력은, 개개인을 특정한 능력과 특성 및 지식을 가진 주체,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개선하고 향상시키는 주체로 생산해 낸다. 이러한 권력의 전략은 한국사회에서 자본과 노동자 간의 권력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저자는 인재 담론, 경영 담론, 역량 담론, 경영기법과 전략, 비전, 인적자원관리기술 등 오늘날 국내 시장경제에 흘러넘치는 각종 언표와 담론들을 분석함으로써 이를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지식기반경제가 출현하면서 자본은 새로운 권력의 장 속에서 사회적 관계를 새롭게 재편해내기 시작한다. 즉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아프리오리 속에서 근대 권력은 이제 주체성 자체를 새로운 버전으로 갱신한다. 경제개발시대에 자기계발 담론을 구성하던 언표들이 규칙적인 일과의 엄수, 근면, 성실, 절조, 금욕 등등이었다면 신자유주의시대에는 1인기업, 기업가정신, 時테크, 자기경영, 자기혁신 등의 언표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새롭게 주체화된 개인들은 더 이상 고용주와 적대하는 산업혁명기의 노동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이제 일터와 가정을 구분하지 않고 언제나 열정적으로 자신의 기업가적 역량을 키우고, 자기관리, 자기혁신, 전략적 자기경영에 상시적으로 매진하는 기업가적 주체다. 기업의 전략과 일치된 주체로서 자신을 계발하고 향상시키는, 기업가적 에토스로 무장한 새로운 노동주체인 것이다.  

저자는 지난 20년간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 과정에서 형성된 권력의 주체화의 논리, 즉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형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기존의 규율사회를 비판하고 자유를 꿈꾸는 주체의 자기형성의 논리와 겹쳐져 있다고 지적한다. 결국, 자기계발에의 의지라는 것은, 보다 나은 자기가 되고픈 인간 본연의 소망, 비상과 해방에 대한 인간의 본연적 욕구와 같은 것들이 권력의 자장 속에서 마름질 당하고 가공된 형태인 것이다. 인간 본연의 진보적 희망과 자유에의 소망이 매번 권력의 전략에 포섭되어 변질되고 마는 것이라면, 차라리 애초에 그런 꿈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자기계발 같은 거 아예 다 때려치우란 말인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처럼 일부러 꼴등을 향해 경쟁하는 엉터리 경기라도 펼쳐야 한단 말인가. 

이에 대해 저자는 자유를 지지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에 대한 새로운 물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오늘날 누리고 있는 이 자유가 어떤 종류의 자유인가 매번 날카롭게 질문해야 한다. 질문은 사유이고, 사유는 곧 새로운 자유의 가능성이다. 새로운 자유란 어떤 자유인가. 그것은 권력의 전략에 포섭되어 관리되는 자유, 순응적으로 변질된 자유, 기껏 자기계발의 자유 따위가 아니다. 권력관계로부터의 호명이 불가능한 자유, 관리되고 대상화되기를 거부하는 자유, 외부를 사유하는 자유, 탈주하는 자유일 것이다. 새로운 자유의 정치학을 꿈 꿀 것! 이 책이 마지막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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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2-10-05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책이다. 책도 멋지고 속표지에 실린 저자 사진도 멋지다.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우아그녀 2011-02-07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수양님의 후기도 멋집니다.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려워서 검색하던 중 이 글을 읽게 되었어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도 속표지 저자사진 멋짐에 한표요^^

수양 2011-02-07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좋지요.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꼭꼭 씹어 읽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감동적이고 멋지고 온갖 찬사를 다 갖다 붙여도 될 만한 훌륭한 책인 것 같아요!!!

수양 2011-02-07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정말 서동진 선생님도 넘흐 잘생겼어요 ㅎㅎㅎ

석류 2011-03-25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멋진 후기입니다. 저도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정말 충격과 전율에 휩싸였어요. 자기계발서를 뒤적거리는 모든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새로운 자유란 어떤 것이어야하는 지 문제-... 분명 출구는 있을거라 믿어요!

수양 2011-03-25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석류님 반갑습니다!! 이 책을 읽고 저도 똑같은 충격과 전율을 느꼈기에... 저도 정말이지 이 책이야말로 베스트셀러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정말이지 돈만 많았으면 서점가를 돌아다니면서 이 책 사재기했을 거에요ㅜ_ㅜ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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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어보면, 60년대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면 뿐만 아니라 사유의 깊이나 정신성에 있어서도 확실히 후진국 수준을 면치 못했던 것 같다. 그 시절 한국사회에서 그나마 일관된 어떤 정신적 기조를 찾자면 아마도 '다위니즘'이 아니었을까. 철학이 부재한 사회에서는 약육강식의 동물적 인간 본성이 굉장히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발휘된다. 당시 사회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잘 살아보겠다는 그악스런 의지, 그리고 바지런한 기질이다.

명분으로 내걸 철학조차 필요없는 야만적 정치 체제, 원칙과 정의 따위는 실종된, 흡사 정글과도 같은 이전투구식 사회 분위기... 이 책을 통해 엿본 60년대 한국사회의 풍경이다. 마치 남의 나라 이야기인 듯 새삼스레 치를 떨게 되지만, 실상은 그 비루한 과거가 오늘날 우리 사회를 존재케 한 토대인 것이다. 저자는 6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으로 기회주의를 꼽고 있지만, 시대정신이라는 게 결코 십여 년을 주기로 변화하는 성질의 것은 아닐 게다. 어쩌면 기회주의는 강국들로 둘러싸인 불안정한 지정학적 위치 속에서 급격한 역사적 정치적 변동을 겪으면서 한국인이 체화한 뿌리깊은 습속 같은 것인지도. 

높은 인문학적 소양과 뛰어난 철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유럽의 역사 역시 야만적이고 추잡하기는 매한가지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인간성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대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확실히, 진창 속에서도 무언가 정신적으로 반짝이는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면, 영국 정치사에서 의회민주주의가 정착되기까지의 과정이라든가 하는 그런 부분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에서는 반짝이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만한 인물들이 모조리 고문당하거나 처형되거나 암살당한다. 한국현대사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오욕과 슬픔이다. 대단히 자학적인 심정에 빠지게 된다. 소국의 역사라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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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역사책방 5
역사학연구소 지음 / 서해문집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어보면 우리가 북한을 괴뢰정권이라고 할 처지도 못 된다. 지금은 국제사회의 계륵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북한 정권의 시작은 역사적으로 충분히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만큼 창대했던 것 같다. 자주정신에 입각해서 건립된 나라는 정작 오늘날 국제질서에서 고립된 채 자주력을 상실한 국가가 되어버렸고, 식민근성에 젖어있던 쪽은 반대로 자주력을 갖춘 나라로 성장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역사의 블랙유머일까.   

북한에서는 김일성 중심의 유일지도체계가 공고화되기 전에, 그러니까 50년대에 종파사건이라는 게 일어나서 김일성 개인숭배에 저항했던 정치세력들이 모조리 숙청당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남한에서는 진보진영을 이끌었던 조봉암 선생이 사형당했고. 북한이나 남한이나 이념전쟁이 낳은 비극을 똑같이 경험했던 셈이다. 또 이 책에서는 60-70년대에 북한이 먼저 남한 체제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연방제를 제안했던 것으로 나와있다. 물론 당시 북한이 경제 정치 여러 부문에서 남한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이 책은 남북한이 원래 한민족이기 때문에 통일이 당연히 그리고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민족이념으로 통일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80년대생인 나에게는 솔직히 그닥 와닿지는 않는 것 같다. 현재 남한사회만 하더라도 순수 혈통의 한민족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나만 해도 북한 사람보다 베트남 사람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데... 남한 사회부터 다민족 국가로 재편되어가는 판국에 한민족 운운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결국 명분에 불과한 게 아닐까. 통일은 결국은 철저히 자본주의적 논리로 실익을 따져가면서 접근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럼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했을 때 북한이 과연 브라질이나 인도보다 더 시장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이런 것도 궁금하다: 남북 적대 상황에서 지출되는 군사비 부담 vs 통일 과정에서 우리가 치러야 할 경제적 부담 둘 중에 어느 게 더 클까 하는.        

이 책에서는 80년대 이후 여성, 환경, 교육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대두된 시민운동에 대해서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시민 일반의 이익 실현을 목표로 하는 탈계급적이며 소시민적인 성격에 얽매일 수도 있다"면서 야박하게 평가하는데, 이런 대목에서는 내가 옛날에 김규항 씨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뭔가 꽉 막힌 기분과 똑같은 걸 어쩔 수 없이 또 느끼게 된다. 왜 꽉 막힌 기분이 드는지 논리적으로 설명은 못하겠다. 그냥 감각이나 정서로 와닿는 거라서 그런 것 같다. (내가 이 책을 구판(1995)으로 읽어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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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0-09-02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말씀하신 '미래의 생존을 위한 조건'이라는 게 저로서는 약간 모호하게 들리는데요. 혹시 북한의 생존 위기를 염려하신 거라면, 냉정한 걸 수도 있지만 제가 봤을 때는 그런 염려 자체가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동정론적 접근 같거든요. 이념이나 감성에 호소하는 당위적인 통일론 말고, 실리적으로 생각해보면 통일에 대해서는 저로서는 어쩔 수 없이 회의적인 입장이 되는 거 같아요. 게다가 위에서 말씀하신 거처럼 군사비 지출의 증감 여부가 통일과 무관하다면 더더욱요...

이 책에선 북한이 한참 잘 나갈 때 세 가지 종류의 연방제를 우리쪽에 먼저 제안했다고 나오는데, 그때 북한에선 연방제를 통일의 과도기적 상태로 인식한 게 아니라, 연방제 자체를 두 체제가 독립적으로 공존하는 최적의 상태로 상정하고 있었다고 해요. 벌써 3-40년 전에 나온 얘기긴 하지만, 통일문제에 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저로서는 북한의 이런 제안이 흥미롭게 읽히더군요.

수양 2010-09-02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왜 지워버리셨지-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