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다 간 사람도 있다. 서른둘에 요절했으나 삶의 총체적 강밀도로 따지자면 팔십 평생 살다 가는 필부의 몇 곱에 해당하는 생을 누렸다고 해야겠다.
천국과 지옥을 믿는 신의 아들이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이성과 과학의 자식으로서 예수의 이적과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읽는 내내 자꾸만 인내심의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새로운 과제를 던져준다. 하나의 사상과 문화 현상의 중핵을 이루는 신화적 인물로서가 아니라 실재했던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를 만나보라는.
마키아벨리가 공화주의자였던가? 군주론만 떠올리면 언뜻 생소하기도 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이 책에서는 그와 상보적 쌍을 이루는 정략론 즉 로마사 논고(이 책에서는 리비우스 강연으로 소개됨)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군주론이 원수정에 대한 것이라면 리비우스 강연은 공화정을 다룬 저작이라고. 저자는 마키아벨리가 부패한(=비르투를 상실한) 인민으로 이루어진 나라에서는 더 이상 자유로운 공화정체가 유지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공공선을 위해 하나의 정체를 채택한다면 공화국보다는 군주정을 도입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취지로 <군주론>을 썼다면서, 마키아벨리가 변화하는 현실에 유연하게 대응하고자 하는 기능주의적 입장에서 상반된 정체를 동시에 다뤘지만 근본적인 철학에 있어서는 인민의 자유로운 참여에 의한 민주공화정체에 무게를 두는 쪽이었다고 못박는다.정치체제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생각은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어떤 이유로 공화정을 지지했던 것일까. 마키아벨리는 지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정체 역시 유동적이고 동태적인 것으로 봤다. 군주정은 참주정으로 귀족정은 과두정으로 민주정은 중우정으로 쉽게 전락하며, 그러한 이유로 정체는 군주정과 귀족정과 민주정의 순환으로 이어진다는 것. 이에 마키아벨리가 구상하는 이상적인 정체란 군주, 귀족, 인민이 상호 대립하고 견제하면서 계급간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혼합정체로서 정확히 로마 전반기의 공화정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그는 혼합정체에 의해 유지되는 공화국이야말로 사회의 변화에 정치가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우수한 국가 형태라고 봤다. 공화국에서는 다양한 재능을 갖춘 복수의 후보자가 존재하고 이들이 수시로 경합하여 상황에 적합한 인물이 지도자로 기용되므로 시대의 조건이 어떻게 변하여도 군주국가와 달리 더욱 교묘하게 대응할 수 있다. 즉 국가적인 차원에서 운명에 대처하는 비르투가 더 강하다는 것.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에서는 사건의 개요에 치중하다 보니 1522년 루첼라이 정원의 젊은이들이 모의했던 반메디치 음모의 사상적 내막에 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고 있다. 그룹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마키아벨리가 도대체 어떤 사상을 설파했길래 이 젊은이들이 그토록 무모한 짓을 감행했던 것인가 의문이 남는 대목이다. 이 책의 내용대로 마키아벨리가 인민의 정치적 역량과 참여를 중시하는 공화주의자였고 루첼라이의 정원에서 종종 <리비우스 강연>의 내용을 발표했었다면, 피렌체에 자유를 회복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민주적 공화 정체를 수립하고자 쿠테타를 도모했던 루첼라이 정원의 젊은이들의 행동이 보다 선명하게 이해된다.군주론과 정략론을 통합적인 맥락에서 헤아리고자 고심한 이 책을 다 읽었는데도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왜 마키아벨리는 애당초 이율배반적인 작품을 써서 각기 다른 사회적 위치에 놓인 인물들에게 헌정했는가. 어쩌면 마키아벨리는 자기 사상의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골몰하기보다 어떤 체제에서든 살아남기 위해 위험을 분산하고자 (그야말로 마키아벨리즘적인 책략으로) 상반된 이론의 저작을 남긴 것 아닌가. 그가 마키아벨리스트가 아니라면 왜 굳이 하필 그런 누명을 쓸 만한 여지를 스스로 만들어두었는가 말이다. 이 책에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그간의 단편적 인식을 재고해 보게 하는 저자의 논평과 더불어 그동안 마키아벨리를 두고 이루어진 다양한 역사적 평가와 해석들이 실려있다.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지만 내키지 않거나 갸웃하게 여겨지는 주장도 눈에 밟힌다. 이 저자에 대해서 그리고 마키아벨리에 관해서도 추가적인 독서가 필요할 듯싶다.
관료 시절의 마키아벨리가 통과했던 정치적 격변의 현장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교활하고 냉소적인 인물이 아닌, 자기 일을 사랑하고 우국충정은 뜨거웠던, 어느 평범한 피렌체 시민이었던 마키아벨리의 모습도. 대단한 시오노 나나미 여사. 어쨌든 이 분한테 굉장한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비르투(재능•역량•능력), 포르투나(운•행운), 네체시타(시대의 요구에 합치하는 것=시대성). 지도자에게 필요한 조건으로 마키아벨리가 꼽은 세 가지. 마지막 항목에 관해서라면 철학자로서의 마키아벨리는 시대성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그는 르네상스인이 아니다. 근대인도 아니다. 어떤 의미로는 사실상 현대인이다. 더 이상 의미와 가치를 논하지 않고, 아니 애당초 그 어떤 형이상학을 옹립하고자 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다만 게임의 방법과 기술에 관하여 천착했다는 점에서.그런데 왜 마키아벨리가 시오노 나나미의 친구인가. 관념론을 배격하는 현실주의라는 점에 있어서의 사상적 친연성과는 별개로 그녀가 마키아벨리에 대해 동질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처지상의 직접적인 이유 한 가지가 뒷부분에 나온다. 마키아벨리가 썼던 단편 역사소설이 있었고 시오노 나나미의 경우와 같은 이유로 주변의 질타를 받았던 것.
고아한 문체로 문화 역사 예술을 망라하며 이탈리아 곳곳을 깊이 있게 짚고 있다. 고열량의 내실에 비해 지나치게 검박한 이 책의 물리적 외양이 모처럼 귀한 책을 접한 독자로서는 차라리 안타깝다. 컬러 도판에 양장본으로 나와야 마땅하련만. 곳곳에 밑줄치고 색칠하고 여백마다 이것저것 더 찾아 적어넣고 수시로 이미지 검색해보고 그렇게 부산을 떨어가며 읽었다. 언젠가 이탈리아에 가볼 수 있을까. 가게 된다면 일순위로 가방에 챙겨 넣을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