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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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엽편소설은 표정이 느글느글거리면서 웃고 있다.

즐거워서 웃고 있는 건가? 아니면 웃고 있을수 밖에 없나? 아니.. 작가는 웃는척 하면서 이야기를 할뿐이다. 왜냐하면 작가는 처절하고 냉혹한 현실에 넌더리내고 있기때문에..어떻게 보면 화내는 형식으로는 버틸수 없고..그럴 에너지도 없어 보이기때문이다.

이 소설은 웃기게 그리고는 있지만 하나도 웃기지 않는 소설이다.

작가는 인생살이의 방법도 말하면서 지금의 현실도 말한다.  현실에서 기반을 두고 사람살이를 말하지 않는 것은 폼잡는 형이상학밖에 안된다.

짧은 풍경의 공통점들을 상기해 보면 이렇다.

그것은 표면과 실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형님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한번도 누구에게 잡아줌을 받지 못했던 자들이지만 선한 사마리아 같고..<어제의 용사>처럼 얌전한 노인들은 실은 군바리정신에 충실해서 약점을 노리는 자들이고,  <훈수족>들은 선의 충고가 아니라 폭력을 일삼는 자들이다. <우리 동네 전문가>는 실상 타인것을 훔치는 사람일뿐이다.

겉모습과 다른 어이없는 실상을 가진 현재의 모습은 다름아닌 지금의 한국의모습이다. <시베리아에서 곰 잡던 시절.>처럼 엉터리로 지어낸 현실로 자신들을 위장하는 모습이다.

작가는 처음부터 거의 끝까지 이런 살벌하고 넌더리나는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딸기>처럼 농약을 쳐야 먹고 사는 사회,<미안하다고 했다>처럼 상하의 관계, 선후배의 관계가 죽을때까지 따라다니고 폭력이 행사되는 모습, <속도광>처럼 빠르게 이동을 하지만 전작 중요한 것을 할수 없는 단면을 그리고 있다. 이뿐인가..사람들은 <사업 디자이너>지적 처럼 침묵도 모른다.

이런 서른여편의 단편들이 모아져서 이루어진 모자이크의 전체 그림은 어떤 모습인가??

그건 암담한 모습이고..도대체 희망이란 것을 찾을 수 없는 살벌한 사회이고 자화상이다. 그런데도 웃을수 있나?..물론 없다. 각 작은 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작가의 능청으로 웃기게 그리지만 현실의 일상에서 우리는 누구도 웃지 않고 소설속 인물처럼 화를 내면서 자기안의 발톱으로 상대를 그어버린다.  <훈수족>의 가스총을 쏘는 친구처럼 말이다.

"뭐긴뭐야. 쌔꺄. 정의의 미사일을 받아랏!"하며...

그럼 사람들은 , 작가는 어떤 고민에 빠져 있는가?  <누구를 믿을 것이냐>에서 대책4가지를 내놓는다. 작가는 은근슬쩍 하나를 고르고 독자에게도 물어보고 나서 다시 비웃어버린다.  자신도 어떤 분야의 권위자가 되어 자신의 분야에 오면 쓴맛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론...서로에게..계속해서.

작가는 어쩌면 소박한 꿈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고, 작은 순진한 마음을 간직하고, 드센 억척이보다 작은걸 잃어도 분해하지 않는 그런 마음을 말이다.

분명 번쩍 하는 황홀한 순간은 일상뒤에 감추어진 진실을 보는 순간이고 깨닫는 순간이다. 그리고 순간순간으로 이루어진 지난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기 하다.

그리고  그 순간은 다시 황홀한 순간을 꿈꾸길 바라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일것 같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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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들이 -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1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1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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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책은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전 5권에서 첫권이고 저작연대로 보면 1971부터 75년 6월까지이다. 나보다 약간 나이가 먹은 소설이다.

읽으면서 소설이 말하는 것과 별개로 엉뚱한 상상을 해보게 되었다.

하나는 그 시절 내가 태어났으면 어떤 등장인물정도가 되었을까...하고 내 부모가 등장인물과 얼핏 동년배인데..부모에 대한 이러저러한 삶의 배경을 골몰하게 됐고 그럼에도 지금과 다른점과 같은점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점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우선 삶에서  뭔가 한두대씩 제대로 된 뜨거운 맛을 보고 실패하고 실패가 예정되어 있으며 그럼에도 묘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어떤 나들이>의  유부녀는 남편과 아들이란 믿고 의지하고 자랑할 만한 시대의 상징에서 찬밥이고 세상은 여자의 자립에 대해 먼귀로도 들은봐 없다.  <주말농장>의 농부는 농사만 짓기에는 세상을 알고 세상에서 활개를 치기에는 촌놈이며, <연인들>의 연인들은 순수하지만 연약하고 앞으로 고단하고 냉혹한 장벽에서 두려움에 움치려 떨 뿐이다.

16개의 단편들 모두 이렇게 바보같이 세상에 속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런 부조리한 세상에 반기도 들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생활의 기반을 전쟁에서 잃었거나 물려받은 것은 깊은 가난뿐이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고 아들에 대한 출세의지다. 이런 것은 열거하기가 벅차다.

그들은 이중으로 압박을 받고 있다. 이른바 <근대화>이전의 문제와 근대화 이후의 문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운좋게 땅부자가 되어 이런 문제를 해결할수도 있지만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과 소설의 인물들은 그렇치 못하다. 그래서 인물들은 이런 막강한 현실에 절망하고  고발하고 스스로 종속되어 간다.

이 소설에서 들리는 유일하게 대처방법은<어느 시시한 사내 이야기>에서 처럼 당당히 맞서는 거라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이 지금에서 읽히는 동안 생각되어진 점은 그때의 협소한 선택종류가 지금은 한층 다양해 졌다는 것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많은 실험을 하고 있으며 그 당시보다 여유있게 자라서는 모르지만 더 용감?해 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대의 한계와 문제를 근대화의 가난과 현실에 초점에 맞춰 자족할수 있나?하면 그럴수가 없다. 다양하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고 아직 열매를 기다리기에는 아직 시간이 짧다.

양극화나 자본주의 심화등을 들먹이지 않아도 지금의 한계를 단순히 70년대와 비교해 우위에 있다고 말할수 없다면 지금의 한계와 절망, 그리고 그 희망을 찾기에 대해 지금의 독자는 읽는 내내 상기해봄찍 하지않을까 싶다. 소설속 등장인물의 담대하지 못함을 탓하면서 점점 나이에 짓눌리는 것을 느낄때,,그리고 얼마후 기성세대가 될때..소설속 등장인물중 하나를 나로 바꾸는 상상을 하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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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의 그늘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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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매력은 묵직하고 담백하며 바람을 정면을 맞는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한다.

이 소설은 베트남전을 그리고 있지만 몇장 넘기면 내심 기대했던 전투장면은 오간데 없고 다낭의 군수보급처로 눈을 돌린다.  전쟁이 단순히 무기를 갖고 적을 죽이는 행위로 규정지을수 없음을 이 책을 읽어가는중에 깨닫는다. 수많은 창고와 막대한 물품,  듣도보지도 못한 상품의 묘사는 전쟁의 다른면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읽으면서 왜 작가는 전투장면을 그리지 않고 이런 전쟁의 물품에 대해 쓸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나름대로 작가가 베트남전에 참가했으니 자전적 성격을 강하게 부여받지 않았나 싶었고 한국전쟁이 끝난 지금의 한반도의 정세를 살펴보기에는 이런 배경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구호품으로써 지원이 아니라 그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점령의 첨병작업은 < 레이션>으로 상징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나.

암시장은 마치 전쟁에서 벌어지는 규정할수 없고 의미를 밝힐수 없는 혼란의 전형으로 보인다. 그곳에 한국과 미국, 베트남인은 저마다의 목적으로 움직이는데..미국과 베트남정부의 모습, 한국의 모습과 반군의 모습의 비교는 의미하는 봐가 깊다.

미국은 물품을 융단폭격을 하듯이 쏟아낸다. 미국의 제품으로 이 모든것이 이루어져 있고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들이 적을 만들고 적을 입히고 다시 적을 죽이는 모습은 지금의 한국을 보는데 유효하다.

한국인들은 미국이 펼쳐논 곳에서 장사를 하고 연줄을 되어 먹고사는 이들이 많이 나온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값으로 고향의 꿈을  사고 일본제 가전제품을 산다.

 책을 읽는내내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사람의 회고가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두가지를 말했다.

하나는  무지막지한 미국의 물량에 아연한 기억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베트남 땅에 내렸을때 이길수 없겠구나하는 허무함이다.

그것은 아마도 책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민간인 학살장면과 엉뚱하게 연결이 되었다. 강력한 무력과 물품으로 당분간은 미국인처럼 살수는 있겠지만 그땅과 사람을 살수도 사랑할수도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깨닫지 못하거나 거부한 핵심이 아니겠나.

소령의 한국여자처럼 지금의 한국도 미국를 따라서 몸을 팔고 죽어가는 것을 못보고 마약이란 환각에 취해 전쟁을 지지하고 따라다니는 그리고 수많은 물량의 반출을 기다리는 미국보다 더 타락한 부분이 없는지 반성해야된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베트남부터 이라크, 지금도 계속되는 테러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란 존재는 근본적으로 스스로 구원할수도 없으며 진보하지도 않으며 자기중심적 사고에 벗어나지 못하다는 걸 새삼 믿게 해준다고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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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로베르트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 울력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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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내면의 흐름을 심도있게 파고드는 글은 인기가 없고 지루하다.  무질은 자신의 스타일에 대해 혹시 저주를 하지 않았을까.. 망명생활과 생활고에 다그치면서도 <특성없는 남자>를 미완으로 남겼으니..

일종의 편견임인데 독일소설작가중 이름좀 알려진 작가들은 예외없이 <성장소설류>의 작품을 하나씩 쓰는 것 같다. 헤세도 그렇고 토마스만의 <토니오 크뢰거>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물론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이 성장소설이 아님은 작가가 공공연하게 말했으니 접어두기로 하고...

아무래도 무질이 군사학교를 다녔으니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베어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질의 문학관을 살펴보면 이 책이 성장소설이나, 당시 문제있는 교육기관을 고발하는 소설이 아님은 명백해 진다. 더구다나 무질 스스로도 체험소설이니 성장소설이란 말을 듣고 <모욕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한다.

소설에서 비중있게 나오는 인물은 역시 퇴를레스, 바이네베르크, 라이팅과 바시니 정도이다. 공간도 한정되어 있다. 사관학교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대부분이고 더군다나 다락방이 집중적으로 부각된다.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고 수평적이다.  무질은 이야기로써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라이팅은 현실적 관계에서 권력을 탐하고 행사하려는 인물이고 바이네베르크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신비적 심령술을 행하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의지가 박약하고 점점 궁지로 몰리는 바시니, 그리고 끝없이 무엇을 사색하는 퇴를레스가 소설의 구조로 기능한다.

퇴를레스는 라이팅이나 바이네베르크와 어울리지만 자신이 점점 원하는 것이 그들에게서 찾을수 없음을 알아간다. 그것은 수학에서 나오는 허수의 개념으로 제시된다. 완벽하게 체계를 이루고 명확한 진리로 받아들이는 수학에서 <무한>과 <허수>는 모순되고 명확히 제시될수 없는 것임을 직감한 퇴를레스는 <오감>이나 <명백한 진리> 로 말해지는 것 이외것이 삶에서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간다. 수학교사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하지만 수학교사는 퇴를레스에게 만족할 답을 주지 못한다.

바시니가 점점 심한 폭력에 노출되어 가는 과정은 퇴를레스에게 라이팅의 현실적 지배세계, 힘의 세계와 바이네베르크의 신비적 사상에 대해 밑천이 없으며 기대할 것이 없는 것을 밝혀준다.

바시니의 일이 폭로되었을때 퇴를레스는 교사들 앞에서 약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자신의 이런 생각 즉 수학적 원리로 표현되는 이성적이거나 오성적, 진리적 세계와 또 다른것이 삶에 분명존재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많은 것을 의미한다고 강변한다.

무질은 정리되고 인식된 세계를 넘어선 것을 말해야 하고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작가임을 감안한다면 이 소설의 전반적 맥락이 정리될 것 같다.

무질의 소설은 이야기가 잘 진행되지 않는다. 그의 서술은 마치 융합반응처럼 끝임없이 사람속을 파고들고 묘사한다. 그래서 익숙히 봐 왔던 소설과 달리 소설을 다읽기가 약간은 힘들었지만 읽고나니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서술시점에 대한 생각인데.. 등장인물의 감정이나 생각을 잘 묘사하는 방식이 1인칭 시점이라면 이소설은 3인칭시점을 사용함에도 1인칭의 특징을 능가한다는 점이고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퇴를레스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것과 전지적 시점에서 서술하는 방식의 차이점과 특징등을 감안해서 읽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사족인데..무질의 대표작 <특성없는 남자>가 아직 번역이 안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새삼 땅덩이가 넑이로 좁음을 느끼는것이 아니라 이런  책이 아직까지 출판되지 않았다는 것에서  좁다라는 낭패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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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ky 2005-06-08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 책 읽어봐야지 맘만 있었지 아직 읽어보진 못했는데, 상당히 어려울 것 같군요. ^^; 오즈님은 상당히 좋은 책들을 많이 읽으시네요. ^^
 
정은 늙지도 않아
이경자 지음 / 문이당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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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현재와는 다소 시간차가 있는 배경으로 되어있다. <새마을 운동>이니 자식을 볼려고 첩을 들이는 사람이 요즘 어딨냐는 소설속 말처럼 소위 <근대화>이전과 이후의 시간을 등에 업고 있다.

이 소설은 세명의 인물에 집중하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넉넉한 살림을 배경으로 젋어서 부터 <오입>깨나 하고 살고 여러첩을 두지만 전작 자식복이 없는 <도철>과  도철과 궁합과 금실은 유별나게 좋은데 자식을 못낳은 본처<필례>, 도철의 제대로 된 사랑도 못 받고 본처 필례에게도 구박받지만 나중에 아들을 생산하는 <영실>이 그들이다.

이 세인물들은 제각기 마음의 양지와 음지가 확연하다. 작가는 이런 인물들의 내면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속내, 푸념, 대화, 추억들을 징검다리 건너듯 이동해 생생히 전한다. 이런 과정에서 들어나는 <필례>와 <영실>의 하소연은 한치도 물러설수 없이 확고하고 때론 질투와 시기로 나타나고 가끔은 행복한 꿈을 꾸기도 한다.

필례와 영실의 한과 설움은 현대와 근대이전의 여성이 겪는 고초범위에 닿아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이른바 대를 이을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는 여성, 신체가 온전히 <정상적>이지 못한 여성, 가족과 남성중심에서 배려받지 못하는 여성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식을 낳지못해 수없이 첩을 들이는 필례의 마음과 신체의 온전치 못함과 여자라는 가치때문에 첩살이를 시작하고 다시 아들과 자식을 못난다는 이유로 냉대를 받았던 영실은  표면적으론 필례와  앙숙관계지만 그들 스스로는 나름대로 합리화 할수 있는 이유와 호소력을 갖고 있다. 계속해서 그들은 서로에게 상처주고 질투하고 감시하지만 이것을 둘만의 시기심이나 질투로 보기에는 상황이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것이다.

필례와 영실은 도철을 서로 독차지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이런 상황과 자신에게 헤어 나올수 없어 궁지에 몰린다. 이런 연장선에서 소설은 가족이란 틀속에서 부부라는 것에 눈길을 주고 결국 남녀관계라는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情이라는 원동력을 보여준다.

소설속의 정은 인간본성에서 나오는 사랑받고싶어하는 것이고 또 그것의 환타지이며, 당시 현실적인 유일한 공유수단인 섹스를 통한 것이며, 자신을 무장해제하는 순수함의 발견이고 이 순수함을 나누고 마음을 의지하는...삶의 원동력이자 뼈대인 것이다. 이것은 개인사가 덧붙여 나중에 이르면 돌이킬수 없는 그자체의 인생살이의 모습이 되어버린다. 이때의 원동력으로써 정은 지금 굳건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종교의 신과 온갖 학문과 미디어 설파하는 개인의지나 권리이전에 차지하고 있던 자리로 보인다.

가족과 남녀의 관계는 점차 변하고 있다. 이제는 남아선호의 풍토와 자식이나 가족이란 틀때문에 사랑없는 관계가 비판받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여러시각도 존재한다. 온전히 사랑을 쏟는 가족의 일원을 강조하기도 하고 사랑이 없다면 가족이나 부부의 틀에서도 이탈할수 있는 것도 말해진다. 이 소설은 당시에는 너무나도 당연한 풍경을 생생히 들려주고 있어서 지금의 우리의모습도 필례나 영실 혹은 도철처럼 지금, 현재를말하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이외에도 확실히 구수한 사투리와 욕설은 이 소설을 살아있게 하는데 긴밀했고 감정표출의 대화나 독백또한 이 책에서 말하는 바와 호응했다고 본다.

어찌보면 필례와 영실은 답답하고 옹졸하게 보이고 때론 순수하게도 보이는 것이 지금의 현대인의 어떤면과 비교되어 그렇게 보일까 생각하게 했다. 그런면에서 보면 필례와 영실의 악다구니와 현대인의 냉혹함이 비슷한 면도있는것이 아니겠나...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분명 살비비고  의지하면서 사는것이 이치이지만 믿고 신뢰할 것이 과연 사람일까라는생각을 하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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