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
오에 겐자부로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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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직 오에의 완숙이 나오기전에 그는 이렇게 상상의 나래로 절망을 요리저리 살펴보았나 보다. 확실히 작가는 본격적인 희망에 대해 말하기전 어떻게 하면 지금 저 절망과 돌이킬수 없는 것을 다르게 보일까 궁리한 흔적이 또렷히 보인다.

이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공통점은 돌이킬수 없는 절망과 무의미로 가득하다. 세상의 대지에 서있는 사람들이 폭우가 쏟아지면 여지없이 비를 맞듯이 그것은 명백하고 자명하다.  괴짜라고 불러야 할까..<다카야스 캇짱>도 죽었으며 레인트리가 보였던 <정신치료소>도 불타 안에 있던 피를 흘리던 여자도 죽었고 작가자신도 망고를 먹으며 해골이 널린 방에서 죽음에 가까이 간다. 이뿐인가?..카를로스도 암으로 죽고 삼십대의 멋진 몸매를 가진 남미에서 강간을 당한 <이노구치>도 벤치에서 목졸려 죽지 않은가..

하지만 작가는 레인트리라는 메타포를 통해 죽음이 그저 뿌려지는 것을 막아내려 한다. 비를 맞으며 그것을 잎에 저장해 천천히 비를 다시 내리는 레인트리처럼 소설속에 죽음과 절망으로 마감한 이들을 부여 잡는다.

그 부여잡고 다르게 보려는 시도는 참으로 집요하고 길고 애절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성향이 작가의 밑거름이 아닐까도 싶고... 다카야스 캇짱의 서술은 대부분 멍청한 괴짜나 순수한 기인의 전형으로 세파에 찌든 우리를 비판하는 도구로 쓰여질 정도가 아니라 그의 여인, 아들, 음악까지 집요하게 파고든다.

왜이리 작가는 그리도 집요하게 그들을 온전히 다르게 보려고 꿈꾸는가..이노구치의 성기노출을 왜 <두려움과 떨림>처럼 묵상하고 또 묵상하는가...

작가는 반정도 성공과 쓸쓸함으로 글을 마무리짓는다. 그것은 매일 열심히 수영을 통해 얻을수 있는 몸매와도 관련이 있을것이다. 자신을 넘어서는 타인의 구원에 대해 비종교인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놀랍고 부끄럽다.  물론 작가는 이후의 작품에서 한층 살아있는 것에 대해 희망을 부여하는 걸 보면 그의 집요한 여정은 궤도에 올랐다고 볼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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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에게 물리다
오에 겐자부로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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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어가는 동안 몇번이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건 현란한 수사적 문장이나 날카로운 이질적 감성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내 앞의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한 인물 중심의 진행보다는 같은 주제와 연결점을 바탕으로 같은 사연을 가진 자들이 화자와 그가 아는 사람들의 연이은 관계로 등장해 이야기가 진행된다.

단연 <하마의 용사>는 그 중심에 서 있다. 그는 <좌파적군>에서 별볼일 없는 비중의 사람이었지만 엉뚱하게 배설물을 자연에게 손상을 안입히는 방법을 연구한 사람이다.

 대체적으로 이 소설의 인물들은 시련과 착오등으로 어려움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나름대로 극복하려는 자이다. 하마의 용사는 연관성없을 것 같은 우간다에서 하마를 근접관찰하려다 물리며 등장하는데..화자 즉 작가는 하마용사와 하마를 전치시켜 하마의 생태적 특성인 수풀을 뚫고 강의 범람을 방지하고 생태를 순환시키는 것에 희망의 단초를 발견하다.

하마의 용사의 어머니인 <마담 하마의 용사>의 만학을 회상하면서 작가는 지나가듯 <고독하게 시작한 만학의 동기를 진심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그녀의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았다..>에서 사람에 대한 자세를 기본적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차츰 그 시대 이슈꺼리였던 <적군>들과 그와 상관없는 듯한 사람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다.

먼저 기동대원과 적군사이에 중재를 나섰던 남자의 죽음의 의미를 탐색하고 영화를 만들겠다 호언한 유진 야마네의 행적을 살핀다. 불행하게 죽음을 맞이한 다카짱의 생의 이면을 살피며 여행사를 차려 화려한 최후를 기획하며 자본주의적 세계에 충격적인 포퍼먼스를 준비한 다케짱도 소개한다. 그리고 미국에서 의료의 대안적 연구를 하고 있는 미쓰코 웨이크도 만난다. 특히 이 단락<산타크로스의 히로시마 주간>에서 나온 이문장은 가슴을 쳤다. <빨리 어른이 되어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요. 내일이라도 당장 서른 살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생각만 하고 있어요.>..원폭의 피해자측에서 나온 말이다.

위에 인물들은 예외없이 큰 상처와 장애, 고독, 무의미에 둘러쌓여 있다. 하지만 그들과 작가는 그들의 동기를 이해하려하고 가능성을 살핀다.  인물들 모두 되례 사회에서 지탄이나 불평등, 무관심과 극심한 고통에 처한 것에 관계없이 말이다.  오히려 그 상황에서 역으로 한가닥 희망을 줄기를 찾고 그것을 계속해서 발전시키려는 자들이다. 그런면 에서보면 그들은 모두 <용사>이다.

이 오에의 소설에서도 윌리엄 블레이크와 숲, 아프리카, 장애를 가진 아들이 늘 등장하는 재료로 등장하지만 오에는 자신부터해서 관계없을 같은 우간다의 청년까지 희망과 이겨냄을 발견하려 한다. 발견의 과정이 그의 삶에서 파생되서일까...사실 소설같지 않았다.

확실히 하마의용사는 또다른 작가의 형상일것이고..그가 보려는, 보고 있는 타인의 모습일것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비종교인들이지만 신앙적 네트워크 속성이 짙게 베워있어 <올바름>에 대한 생각을 골몰하지 않을수 없었다. 지난세월의 사람과 열정, 오류등을 남루함과 냉소로 내치지 않고 용사의 삶으로 그려내는 시선과 태도가 한없이 부럽고 감동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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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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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처럼 번진 책을 읽는 것은 비단 책뿐만 아니라 그 책을 읽었던 사람까지 생각하게 된다.

해서 일부러 나중에 읽는다.

 <칼의 노래>는 허무의 노래다. 그리고 독백의 노래다.

무수히 되뇌이는 무의미는 필연적으로 독백의 내면을 가지고 자신의 역사성을 긍정할 마지막 적을 찾는다. 작가가 이순신을 만나게 되는 것은 그래서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은 필연이었다.

자신의 역사성은 계속해서 무의미의 확인과 자신의 무의미의 확인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적사이에서 변증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여기서 타인은 자신의 의미를 알수 없을 만큼 알수없는 그 무엇이다.

타인은 적이되거나 알수없는 서사를 가진 내주변의 행성이 될뿐이다.  세상이 혹은 스스로 무의미의 자신이 된 사람의 거처는 어디일까?  마지막으로 숨어있고 생각할수 있고 꿈을 꿀수 있는 곳은 내면이고 그것의 독백 즉 자신의 노래이다.  자신의 노래가 누구에게라도 들을수 있게 되는 공신력을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적을 적으로 만들수 있는가. 그건 자신에게 알수 없는 적의로 몰려드는 적인데 공신력과 적의 정의사이에서 발견할수 있는 것은 이미 작가가 경험한 적이다. 모든걸 무의미하게 했었던 적이 다시 적이된다.

글은 피곤하고 나른하고 덤덤하다. 자신의 일에 감정과 생각이 온전히 집중되는 것은 없다. 이런 산만한 집중력은 독백속에는 또다른 독백이 되는데 이것이 작가의 말이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망망대해에서 개인은전투선이 되어 물결에 떠가듯 그리고 괜히 덤벼드는 적선을 격침시키고 어디선가 침몰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순신의 칼을 보며 허무의 바다에서 움직일수 있는 추진력을 얻은 것을 노래한 것이다.

단문과 쉽게 읽는 것 말고도 많은이들이 책을 읽고 번져간 이유가 혹시 자신의 고독한 내면을 위해 작은 정당성과 함께 자신만을 위해 자신만을 알고 있는 노래가 필요해서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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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
하일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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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10주년에 살인혐의로 경찰서로 끌려온 이의 진술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전개방식이 주제와 어울린다.  

진술이 진행되면서 점차 들어나는 것은 주인공이 현실이라 믿고 있는 것과 의미가 또 다른 현실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의 전처(윤영미)와 처남, 장인, 주변인들의 진술과 자신이 기억하고 말하는 진술은 어긋나 있다.

이미 죽은이가 살아있고 자신에게 축북을 했었다는 이들이 실은 저주를 퍼붓었다는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독자는 화자가 <병적 애도반응>이란 테두리에서 외치는 것만으로 단정지울수 없음을 알아간다.

주인공이 말하는 현실에서 실재는 대상에 대한 믿음의 왜곡이다. 그는 끝임없이 믿는다 하고 치밀하게 그것을 이어가며 살아간다. 이미 대상자체 대한 의미나 고찰은 없다. 대상에 대한 의미가 그를 장악하고 있다. 마치 현상학에서 대상<노에마>는 일체 없어지고 <노에시스>만 겹겹이 둘러싼 형상이다. 그러니 대상은 없어져도 상관은 없고 의미로만 뭉쳐진 믿음의 대상은 계속 살아움직인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의미의 성격과 기원이다.

그는 왜 이미 죽은 이를 놓치 못하는가? 그를 깨닫게 해줄수 있는 것은 없는가?...작가는 여기서 세사람의 실패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해운스님이라는 현실의 고통을 해결할수 없고 생사일여, 몽매일여라는 공허한 말로 깨달음대신 도피처를 제공한 종교인과 정신과 의사이면서도 환자를 치료를 못하고 환자에게 죽는 이, 그리고 <환상과 실제>라는 철학책을 내면서도 전작 자신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논리적 인간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들..종교와 정신과 철학을 불신하는 것 같다. 이것은 위에 말한 <믿음>에 대한 해결책이 세명의 모습으론 해결할수 없다고 보기 때문인 것 같다. 믿음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물과 사람에 대한 욕망이고, 의미이고 이름이다. 주인공의 아내대한 반응처럼 잠시도 떨어질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이런 믿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해 질 뿐이지 넘어서지는 못한다. 후설이 말하듯 타인을 <내가 타자를 나의 복제復制로서 통각할 뿐>인 것이다.

주인공이 끝임없이 한시도 포기못한 이 믿음을 받치고 있는 기원과 의미는 무엇일까..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사랑이지만 이미 주인공의 진술은 믿을수가 없다. 오히려 전처와 처가식구의 주장대로 이기적일수 있으며 알수 없는 형국이다. 여기서 한가지 염두할 것은 주인공이 그 믿음과 기원이 되는 사랑의 힘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인데 주인공의 진술대로면 허상을 제거한 것이다. 주인공이 말하는 허상은 자신이 믿고 있는 허상을 방해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자신이 욕망을 방해하는 것이 허상이고 그것은 제게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허상<아내>은 책 후반부에서 볼수 있듯이 그와 하나가 되어있다.

책 초반에 식사장면에서 마약과 IMF에 무관심한 주인공과 교수들 처럼 이들은 타인에 대해 무관심과 자신의 욕망에 의미만 실제인 것인양 믿는 것이 <믿음>을 받치고 있는 단초다.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자시중심적 해석, 타인의 무관심, 욕망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을 허상이라 여기고 제거하려는 모습. 그것은 실은 홀로선 인간의속성이라 하겠다.

주인공을 보면서 루카치가 한 말이 떠올랐다. < 절대적으로 고독한 사람의 언어는 서정적이고 독백적이다>

홀로 주장하고 욕망하고 정의하고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말하는.. 신이 되어버린 서정적 주인공이 현대인의 한측면이 아닐까라는 생각은 과장일까. 소설속 인물이지만 자신마저 속이고 결국 고독감에 몸무림치는 것 같아  읽는 내내 답답함을 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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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미친 짓이다 - 2000 제2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만교 지음 / 민음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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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정을 하고 수다를 떠는 사람의 말같이 이 소설은 거침없는 빠른 템포로 말을 한다.  마치 녹취록을 옮긴 것 같이 저마다의 말을 던지고 빠지는 게릴라의 속도전 같은 형상이고 이중 유독 말많은 이는 단연 인텔리의 주인공 정도이다.

이 소설은 두 가지의 구조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 이야기를 끌어가기 위한 구조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구조가 그것이다.  이런식으로 보면 <결혼은 미친짓이다>라고 크게 눈길을  끌게 하는 남녀의 관계는 실은 이야기의 진도용일 뿐이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봐는 처음주터 끈질기게 외치는 <현실의 가짜>라는 구조이다.

주인공의 가정풍경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이들은 텔레비전에 매달려 살고 있다. 어머니는 드라마를 통해 비로서 진지하게 되면서 울거나 비판적 생각이나 말을 한다. 동생과 형수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온갖 물품과 남성상에 자신의 미래와 행복을 찾거나 중산층을 흉내낼 뿐이다.아버지가 어머니대신 텔레비전앞에서 골아떨어지는 장면은 텔레비전이 웬만한 사람의 기능 이상을 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조카는 구별되지 못하는 똑같은 거북이를 계속 기르고 만나는 여자도 매체에서 본 것을 욕망한다.  주인공과 여자가 입에 달고 있는 말은 <대사> <등장인물> <장면>등이다. <앵무새>처럼 중얼거리는 이것들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말인데 그들은 자신의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드라마나 영화의 한장면과 관련지어 생각하고 바라보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듯 어디서 본듯한, 영화의 한장면과 같은 압도적인 이미지와 행동패턴들이 지금을 대체한다.

이런 현실을 왜곡하고 대신하는 행태는 사회구조와 관련이 있어보인다.  그럴수밖에 없는 구조... 그것은 현실을 대신하는 욕망과 그욕망을 해소할수 있는 협소한 한국, 그리고 뻔히 보이는 삶의 장면들을 통틀어 바라보는데서 생기는 결론이다. 주인공은 두고보라고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끝임없이 냉소한다.

전형적인 현대인의 한 상이 여기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매체를 모델로 삼는 욕망하는 인간, 그리고 스스로 고백하는 <죄책감>이 없는 인간이다. 죄책감이 없는 인간은 기존의 도덕적 체계에 반응도 없으며 그것 또한 이미지라고 주장하고 지금의 사회적 담론을 머리에 담고 산다.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며 도덕은 필요없으며 섹스는 좋은 것이고 많은 사람들은 비판없이 살고 있고, 자유와 독립이 필요한데 전 세대보단 지금이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가지며 말이다...

하지만 전작 주인공부터 이런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 없는>뻔한 삶과 구조에서 결혼이라는 또하나의 또라이짓을 거부할 뿐이지 그 규정성을 넘어서는 의미가 없다는듯이 떠벌리는 건 우습다고 보였다. 왜냐하면 그가 알고 있는 종교,신, 사람, 심지어 자신 마저도 실은 <이미지>일뿐이고 경험하지 못한 들은 말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책과 드라마와 영화를 대비시켜 책을 숭배하는 듯한 모습을 계속보이는데 그것은 비판의 기능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책도 광고처럼 세상을 보는 색안경노릇만 하지 전작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선 주인공에 대해 허무 이상은 없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주인공이 후회한 그 지점에서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모험하지 못한 <소심>이었다. 소설에서는 여자의 두살림 이라는 대비되는 것으로 공존하지만 실은 그는 모험이라는 것에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이다.

이미지, 구조로 굳어진 세상과 자신의 전망에서 그는 자신을 구원하고 뿌리가 되는 것이 없는 <반응>의 사람으로 <선택>을 바라보고 있다.  주인공이   이미지일 뿐이라고 주장한 <판단과 전망>말고 그것을 넘는 의미와 자신의 고유의 것은 무엇일까? 정말 구조화되고 이미지된 사회와 대조되는 사회와 자신은 없을까?..  이런 질문이 책을 덮으며 드는 의문이었다.

자문하기는 그것은 아마 사람들에게는 이미지였지만 실은 <현실>이고 그것을 또한 넘어서는 <희망>이자 <의미>라고 생각하며 잠시 묵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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