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행성어 서점 ㅣ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초엽 지음, 최인호 그림 / 마음산책 / 2021년 11월
평점 :
가끔 생각한다.
야 이건 정말 소설이야, 이걸 소설로 쓰면 진짜 재밌을텐데 뭐 이런 생각말이다.
하지만 보통의 인간인 나는 그냥 생각만으로 그칠 뿐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 한순간 아 이거 이야기가 되겠네 싶은 단상들을 놓치지 않고 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단상들이 곳곳에 포진해있다.
아 이런 생각으로도 소설이 만들어지는구나 감탄하며 이 짧은 이야기들에 흠뻑 취하게 된다.
임팩트가 가장 강한건 역시 첫 글인 <선인장 끌어안기>이다.
무엇이든 피부에 닿는 순간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병에 시달리는 파이라라는 전직 건축가의 이야기다.
그런 그녀가 온 집안에 선인장을 키우는 것은 왜일까?
자신과 같은 병을 앓고 있던 어린 소녀 소영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자신의 병은 새로운 고통이 된다.
사랑은 스킨쉽니다.
누구든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싶고, 따뜻하게 안고싶어한다.
그 포옹에 사랑의 기쁨이 담겨있다.
그러나 파이라와 소영에게 이런 기쁨은 불가능하다.
서로의 손가락 끝이라도 맞닿는 순간 불같은 고통이 각자의 몸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영은 죽음을 앞두고 파히라에게 말한다.
'파히라, 내가 당신을 안아봐도 될까요? 딱 한 번만요.'
둘은 비명을 참고 눈물을 참으며, 피부 표면을 칼로 베어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 사랑일까, 아니면 고통을 견디는 것이 사랑일까 (30쪽) 생각한다.
고통이 곧 사랑이 되어버린 파히라는 쓸쓸하게
"그래도 그 사랑을 감수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지."라고 읊조리는 것이다.
그래서 소영을 잃은 파히라는 선인장을 키운다.
이 이야기는 절망에 대해 말하지만 또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근래에 읽은 어떤 사랑 이야기보다 강한 사랑이야기이다.
짧다고 감동의 크기가 작은 것은 아니라는걸 이 이야기가 말해준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치명적인 어떤 결핍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행복해지고 싶은 인간들이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른 결핍들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행복해지고 싶은 인간의 기본 본능을 다양한 변주로 이야기한다. 또한 행복해지는 방법도 결국 사람마다 다르다.
시력을 잃고 기계 눈을 가지게 된 여성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자신의 기계 눈을 가장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연습을 하고 그것을 SNS에 올린다. 그리고 눈이 아름답다는 타인들의 찬사에 나는 기계눈이어도 행복하다고 자위한다.
정말로 그녀는 행복할까? 사실상 그녀의 행복은 모래성이라는 것을 그녀 자신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이보그는 아름답다는 말이 정말로 사이보그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것인지(40쪽) 고민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찾은 것일게다. 자신의 행복의 조건을 타인의 찬사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존에서 찾기 시작했으므로.....
정말로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영화속에 흔한 소재로 등장하는 평행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영화처럼 그렇게 극적인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곳에서 멜론을 파는 가난한 상인은 나는 저쪽 세계에서는 거리에서 연주를 하는 가난한 바이올린 연주자일수도 있다.
그래 둘 다 별볼일이 없다니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라고 생각하는건 스펙터클이나 스릴러의 영역이고,
소설속에서는 멜론을 파는 나도 나쁘지 않지만 바이올린 연주자인 나도 괜찮은것 같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게 뭐야? 둘 다 너무 별볼일 없잖아?
하지만 멜론을 파는 내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나를 바라보는 순간은 왠지 둘 다 근사하다는 느낌이 든다.
근사하게 산다는 말은 왠지 근사하다.
몸에 칲으로 심어진 통역기로 어떤 언어의 책이든지 바로 읽을 수 있는 세상에서 더 이상 언어는 학습이 대상이 아닌 세상을 꿈꾸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하나쯤은 그것이 불가능한 언어도 있지 않을까?
어떤 번역기로도 번역되지 않는 그 책이 행성어 서점에 있다.
그 책을 읽기 위해서는 인류가 오래 그래 왔듯이 느리게 그 행성의 언어를 공부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누구도 읽지 못하는 책을 읽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어떤 전자기기에 의해서도 포착되지 않는 별안개 풍경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물감과 붓을 꺼내 그리는 노인의 모습은 또 얼마나 근사한가?
늪지에 가라앉지 않고 다른 방식의 삶을 찾아 떠나고야 마는 소년도 근사하다.
이렇게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 하나 초라하지 않다.
그래서 그렇게 근사한 사람들을 만나는 독서를 하는 내가 잠시 근사해보이기도 한다.
무언가를 잃는 다는 것이 바로 불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데, 우리는 때때로 그것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하나를 잃은 것이 전부를 잃었다고 마음껏 착각하고 불행의 관념속으로 자신을 밀어넣는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나 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고, 하나를 잃으면 무언가 다른 것이 우리를 기다리기도 한다.
외계의 기생생물로 인해 얼굴에 가면이 붙어 떨어지지 않게 된 사람들은 억지웃음을 웃지 않아도 되게 되면서 오히려 서로에게 진짜 다정함을 베푸는 것(136쪽)을 배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무언가를 잃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얻은 사람이 되고 그리고 근사해진다.
김초엽 작가의 글은 모두 절망과 상실을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소재일뿐 결국 중심은 희망과 연대, 사랑이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내가 좀더 좋은 인간이 돼가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는 시간은 행복한 시간이 된다.
최근에 나왔던 첫 장편 <지구 끝의 온실>은 소재나 주제 모두가 흥미로웠지만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좀 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은 단편들이 더 좋은 작가지만 얼마가지 않아 단편들에서 느껴지는 이 힘을 장편에서도 오롯이 느낄 것을 기대하며 작가에게 감사와 응원을 보낸다.